187. 이즘과 모순 

[전략]..........그러므로 이번에도, ‘파악’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방법론인 ‘사회과학적 자기 성찰’을 일정 정도 희생해야할 필요가 생깁니다. 자신에게 내재된 모순과 자신을 포섭한 구조, 그리고 자신이 가진 갖가지 편견들에 대한 평가를 ‘대충’ 해내고 다음 단계인 사회(인간)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사회(인간)을 파악할 수 없으니까,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지니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평가는 적절한 수준에서 봉합하기를 권장합니다. 허나 그렇다고 그냥 적당히 마쳐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연히 자기 평가는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혹은 극한에 달할 정도로 치열하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최소한 자신을 이루는 신념과 목적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감성에 입각해 평가해야하고, 또한 의심해야합니다. 그 과정에서 의식할 정도로 거대한 요소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 (이를테면 에프킬라 냄새는 고향 생각이 난다던가 하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자기 안의 편견들) 일정 정도 무시하고 지나쳐야 한다는, 그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이 평가가 도입부에서 단 한 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진정 사회과학도의 비극이라 하겠습니다.........[후략]

"사회과학도의 자세 5. 평가" 2006. 8. 13. 발췌 

 

이영도의 유명한 최근작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멸망한 전설 속의 일족 '키탈저 사냥꾼'의 고사가 빈번히 등장한다. 전설적인 용맹함으로 적에게 임했던, 직업이 아닌 한 종족으로서의 그들은 가장 강력한 힘은 모순 속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상대방을 저주할 때 항상 모순적인 어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영도씨가 어떤 생각으로 그들을 그렇게 설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1천 5백여년 전 캄보디아를 살아갔던 앙코르와트의 왕족들이 대화 속에 모순을 즐겨 섞었다는 전설은 알고 있다. 모순은 상대에 대한 경멸이며,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내포한다. 동시에 모순 어법은 오로지 인간의 창조물이며, 인간과 인식이 만든 대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엘리트주의에 가까운 행위일 것이다. 

모든 인간과 사회의 사유와 사상에는 모순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일관된 논리와 자세로서 모든 것에 대할 수 없다. 아마도 전능하기 전까지, 이 세계는 지나칠 정도로 방대한 정보와 지식들을 갖고 우리 앞에 서 있을테고, 전지하지 못한 인간은 항상 어느 정도 모순을 담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 제도나 사유 속에 깃든 모순을 발견한 이들은 그들을 지적했고, 그 모순이 거대해질 때 사회의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법칙을 발굴해낸 19세기의 학자들은 그들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고를 쏟아냈고, 세상은 또 한번 거대하게 변화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사회는, 사회 제도와 모순의 역학관계의 법칙성을 발굴해낸 뒤에 변화한 모습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깃든 모순이나 오류를 견뎌내지 못하는 성질을 지닌 모양이다. 진리와 완벽성에 대한 근대적인 추구는 일탈이나 티끌에 대한 필연적인 불안감을 야기한다. 내면에 근대성을 담보하고 있는 이는, 삐죽 튀어나온 못이나 길거리에 흩어진 잡초를 그 자체로서 견디지 못한다. 구태여 산을 깎고 도로를 닦으며 시멘트로 도배해야 직성이 풀리는 개발주의자들의 심성 일각에는, 분명 이러한 근대성이 일부 내재되어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내면과 사회 제도 속에 들어있는 모순에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나 인간은, 다행히도 인간은, 손쉽게 시멘트로 도배해 버리거나 칼로 쳐낼 수 없게 되어있다. 따라서 근대의 자식들은 그런 모순적인 인간과 사회의 온존함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무오류의 이데올로기를 창조하려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한 일정 기간은 성공했다.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은 모두 공산당임을 자처하고 있던 것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한 가지의 공통점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오류의 이념, 무오류의 지도자임을 자처했고 정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숙청은 공산국가의 범사였고, 다름은 인정받지 않았다. 애시당초 다름을 위해 도출된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그들에 의해 역사적 필연성만 강렬하게 강조되었고 그의 규범들은 그 자체로 진리로 평가받았다.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고 그들 앞에 남은 것은 단지 붉은 군대의 세계 진주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신봉했던 역사적 필연의 경제이론은 인간 개인을 설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실패했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지나치게 알고 있다.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이라면 레닌 이래의 공산국가들이 주창한 이론 내에 내포되어 있던, 그러나 그들이 돌아보지 않았던 모순이 어떤 것인지 최소한 다섯 가지 이상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계에 한 가지 교훈을 주고 떠났다. 인간은 변화하고 사상은 그 변화를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은 아직 인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은 70년대 이래 세계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그런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무사상의 사상, 이데올로기가 없음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들은 이제 다시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무오류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탈이데올로기를 외치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사상이나 이즘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모든 시도들을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탈이념의 사회는 언론과 매체와 교과서를 통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다양성과 개인화의 신화는 이미 굳건히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무오류의 이념은 붉은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리와 역사의 종결을 주장한다. 

한국에 출판된 새고전학파의 거시경제학 교과서는 사실 단 하나밖에 없다. (미시경제학 교과서는 지나치게 많다) 조하현 교수의 거시경제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사회의 경제 흐름을 연역적인 수학 공식들로 연이어 도출하며, 그 논리의 연쇄 속에 빈틈은 없다. 시카고 학파에서 출발한 수학적 경제학은 정밀한 논리와 가치중립적인 미적분이 연이어지면서 흔히 놀라운 이론들을 이끌어 낸다. 새고전학파는 이 사회와 우리들을 상당히 근접하여 설명해 내며 그들의 이론은 이미 이 사회의 기틀을 장악하고 있다. 경쟁과 자유를 방해하는 그 모든 것들은 적이다. 기업과 소비와 생산을 저해하는 모든 시도는 비 민주적이다, 라는. 

자본주의는 원시적부터 존재했겠지만,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분명 근래의 일이다. 자본주의는 원천적으로 각 개인의 자유와 소득을 전제로 성립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각 개인의 평등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에게 함양된 모든 가치를 모두 인정할 것을 또한 요구하며 이는 자본주의와 적확히 결합한다. 현실적으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그리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요구한다. 경제학적인 이론의 틀 내에서 활동한다는 전제만 성립한다면, 모든 개인들은 자신의 가치를 다르게 가질 자유를 가지며, 이는 필연적으로 서로간의 가치에 침범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같은 귀결은 결국 개개인이 내포하는 '무오류에 대한 기피 의지'와 연계하여, 이는 결국 침범 불가의 절대성만이 온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각 개인들은 자신이 가진 사유와 가치가 옳고 그름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사유와 생활에 대한 침범에 대하여 먼저 분노할 권리를 갖고 그것이 정당성을 담보한다. 결국 탈이념의 이념은 각 개인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맞물려 그 자체로 진리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내생적으로 인본적이지 못하고, 본질적으로 불평등이나 불행 중 택일을 강요한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되기를 감내하기 힘들며, 자신의 모든 잘못과 오류를 직시해야함을 요구하는 민주주의가 행복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당위로 여기며 (이 사실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따라서 그 당위에 따르지 못하는 이들은 불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이 부분을 채워준다. 각자는 소비와 소득을 통해 보다 높은 효용을 얻고 민주주의가 초래하는 초인적 불만을 범인적으로 상쇄한다. 하지만 또한 자본주의는 소비를 위해 불만을 창출하며, 더 높은 소비를 향한 불만을 항시 계발한다. (자주 오해되는 것이지만, 소비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효용을 위한 것이다)따라서 비효용이 창출되고 소비와 소득에 사람들은 보다 더 치중한다. 결과적으로 소득의 격차는 증가되며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개개인이 타인과 유리시킨 자신의 사유와 생활은 무너지며, 개인은 보다 높은 소득을 위해 이를 감내한다. 모순적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 초인적이거나 혹은 무지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인적이지도, 혹은 무지하지도 않기에 탈이념의 이념을 거부할 수 없다. 본인 또한 마찬가지이며, 현재로서는 대체할 보다 좋은 제도도 쉽게 고민할 수 없기에 반대할 이유도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사회 제도와 이념에는 필연적으로 모순이 내포되어있다는 그 한 가지 뿐이다.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모순을 벗어버리기 위해 탈이념을 외치지만 (능동적 주체가 그러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마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화했을 것이고, 지금 이 상태가 어쩌면 역사적 필연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탈이념은 무오류를 주장하기 위한 기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는 무수한 모순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적을 논리적인 형태로 인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