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가입인사] 피곤
이병 오학준 2009-04-18 23:49:50, 조회: 301, 추천:1
序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는 그저 읽기만했다. 하지만 언제나 피곤함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결국 눈 위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는 가벼운 삶이 될까 두려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다음 발자국이 처음 발자국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피곤함을 떨쳐냈다는 - 사실은 업고 있을 뿐이지만 - 처음의 시도가 중요한 것이니까.
1. 광활하게 펼쳐진 인트라넷의 세계엔 책마을 말고도 다양한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 공간들 중에서 책마을이라는 곳으로 입주하게 된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책마을에 찾아 들어오게 되었나요? 그리고 책마을에 입주 신청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문구가 아닌, 당신의 솔직한 진심을 듣고 싶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뿌려진 검은 글'씨'를 매일 읽으면, 조금씩 달라지는 그 읽기 때문에 머리 속 갈매나무는 아주 약간의 간격을 두고 가지를 벌리기 시작한다. 그 갈매나무가 풍성해지면, 바람이 불어올 때 그만큼 풍성한 흔들림이 있는 법이다. 나는 매일같이 화분에 물을 주듯, 갈매나무를 키우기 위해 세상을 읽었다. 그러나 강산이 두 번 변한 동안 머물러야 할 울타리에서 자라고 있는 갈매나무들은, 하나같이 땅을 향해 곧게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달라져야 하는 읽기 대신에, 정해진 읽기가 강요되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갈매나무가, 어디 풍성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당장 목이 말랐다. 그 목마름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거의 잊혀져 가는 기억 - 이 좁은 울타리를 먼저 벗어났던 순례자가 말하길, 당신이 원하는 그 다른 읽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 까지 떠올리게 되었으랴.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남풍에 흔들리는 숲을 보았다. 나는 그 옆 조그만 공터에 나의 나무를 심기 위해 여기 이렇게 늦은 인사를 남긴다.
2. '책마을'에 입주를 선택한 당신에겐, '책'에 대한 유별난 마음씀씀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당신의 삶은 '책'을 통해서 어떻게 변해 왔는지 듣고 싶습니다. 책과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 나의 옆에는 책이 두 권 놓여 있다. 뒤돌아보면, 거의 모든 순간에 내 근처에는 책이 항상 있었다. 화장실을 갈 때, 여행을 갈 때, 머리를 짧게 깎았을 때, 술을 먹고 새벽에 집에 들어왔을 때에 어김없이 근처에 책을 두기 위해 노력했다. 집착일지도 모르지만, 책은 사실 내 삶의 매순간 항상 지금, 여기에 있었다. 세계를 모험하고 싶었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나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해 주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3.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김경욱, 「위험한 독서」) 당신이 읽은 책은 곧 당신을 말해줍니다. 당신이 읽어온 책들이 궁금합니다. 당신이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딱 세 권만 보여주세요. 세 권의 책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세요.
책을 많이 읽게 되면, 그리고 비슷한 책들을 여러 권 읽게 되면 책들을 각각의 개별적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뭉텅이로, 일종의 메타-텍스트로 구분을 하는 게 더 쉬워진다. 책들 그 자체가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을 상실하고,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들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별자리는 매우 순간적으로 나타나고, 그 어느 개별 책에서도 별자리 전체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다. 오로지 그 책들이 서로의 차이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차이들이 상쇄된 메타-텍스트가 자신의 모습을, 반드시 그 속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그때 쯤이면, 어떤 책이 나를 말해주는가라는 대답에 무엇이라 답할지가 망설여진다. 책 그자체를 보물 모시듯 한 게 아니라, 책들이 설명하는 단편들의 몽타주를 원했던 나로서는 구체적인 책의 내용들을 일일히 기억해서, "이 책이 이러이러해서 좋았다"라고 말하기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무리를 해서 말하자면 - 말하지 않으면 답할 수 없으니까 -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내 삶의 자세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생각조차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서도 삶을 어떻게 살고, 생각을 어떻게 개진할 것인가에 대해, 그의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슈미트와 홉스와 함께 묶어서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폭력'에 대해 고민하는 - 내가 전공하는 '의사소통'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여겨지는,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 의해 언제나 이루어지는 - 데 훌륭한 영감의 소재가 되었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경제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좋은 지침을 주었다. 동시에 슘페터와 베블런의 경제에 대한 사고 - 이윤은 습관적인 경제순환이 '깨짐'으로서 발생한다 - 역시 나에게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전환을 요구함으로써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4. 한 '문단'으로 스스로를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여주기에 한 문단은 긴 것이 아니겠죠? (단, 공지사항에 나와있듯이 문제가 될 수 있는 표현들은 피해주시길 부탁드려요. 물론, 입주 신청서를 내기 전에 공지사항은 꼭 읽어보셨겠죠?)
나는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다. 앞으로 나의 삶은, 우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그것을 예측하기 위해 나의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이것을 분석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 분석은 일면적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그렇게 팍팍한 분석으로만 삶을 채우는 것이 무미건조하기에, 시와 소설, 음악과 영화를 그 사이사이의 삶의 흐름에 부어넣고 있다.
5. 당신이 생각하는 책마을은 어떤 모습인지, 당신이 책마을에서 무엇을 만나고 싶은지 이야기해주세요.
숲, 수많은 나무들이 삶들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무대, 어느 한 나무도 서로를 모방하지 않으면서도 닮아 있는 집합, 그렇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나무 하나 하나에 담겨 있으면서도 나무 하나에만 담겨 있지 않은 곳. 그것들이 모여 있을 때에만, 실체 없는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곳. 책마을은 그런 숲이길 빈다. 몇몇의 나무들이 스스로의 아름다움만을 뽐내고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나무들'이지 숲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은 나무에 있지, 나무들에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부러지고 휘어 있는 돌틈의 소나무와 닮았을 뿐이다. 서로의 서투름이 아름다움이라는 실체 없는 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책마을은 바로 숲이었으면 좋겠다.
6. 여기까지 쓰면서 책마을에 당신을 보여주셨다면,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야말로 가입‘인사를 써주세요. 뭐든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써주세요.
첫 발자국에 너무 많은 말을 담은 듯 하다. 그리 많은 말을 품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말이다. 또 한동안 쉬어야 겠다. 피곤하기 때문에.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3:52:52
상병 김태완
반가워요. 님 앞으로 책마을에서 많이 활동 하시겠군요.
궁에 들어온지 얼마 안돼서 여길 발견하시다니. 당신은 정말 용감한 행운아예요.
저도 현재 너무 피곤한 상태라 이 글을 지금 읽지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님덕에 좋은 음악 하나 듣고 갑니다. 수고요. 2009-04-19
01:43:47
상병 이석재
반갑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유가 공감되기를. 2009-04-19
07:12:05
책마을
인트라넷 내 링크는 금지되어있습니다. 다만 명시해놓은 바가 없으니 일단 링크만 지워놓겠습니다.
가입인사에서 폴라니의 이름을 보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흐흐. 2009-04-19
08:25:36
병장 김형태
공지로 2009-04-19
16:29:39
상병 홍명교
<거대한 전환>
정말 좋은 책이죠? 세상을 읽는 눈을 뻥 뚫어준 책들 중 하나. 2009-04-20
19:23:31
병장 김범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괜찮죠 2009-04-21
14:08:36
상병 이승찬
'나' 49개 2009-04-21
20:56:26
병장 문병준
도대체 홍기빈이 번역한 거대한 변환 언제 출간하는건지. 혹시 나왔나요? 2009-04-22
01:36:54
상병 김예찬
5월 중에 나온다고 합니다. 2009-04-22
08:22:37
이병 오학준
명교 // 여러번 읽을 필요가 있는 책입니다.
승찬 // 쓸데없이 좀 많죠.
병준 // 이건 뭔가요. 진짜 문병준이네요. 2009-04-22
18:50:59
상병 정근영
반가워요.
'그것들이 모여 있을 때에만, 실체 없는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곳. '
책마을과 주민들을 숲과 나무로 비유한 것은, 정말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책마을의 모습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울타리를 먼저 벗어난 순례자'가 누군지 궁금하지만, 굳이 여쭙지 않을게요.
대신 피곤하시더라도, 글로써 많이 만나뵈었으면 좋겠네요. 2009-04-23
12:52:25
일병 최정현
기대하겠습니다. 2009-05-01
11:50:15
일병 김강현
반갑습니다 XX나무님. 아무리 전지가위로 우리의 모난 모양을 자르고 다듬으려 해도 우리의 원형태까지 변형시킬수는 없으니.. 그걸 인식하는게 '내면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진X문고중 "죽음의 수용소"라는 명작이 있는데 좋아하실 것 같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