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가입인사]序文
병장 정건희 2009-04-05 20:29:26, 조회: 303, 추천:0
1. 광활하게 펼쳐진 인트라넷의 세계엔 책마을 말고도 다양한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 공간들 중에서 책마을이라는 곳으로 입주하게 된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책마을에 찾아 들어오게 되었나요? 그리고 책마을에 입주 신청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문구가 아닌, 당신의 솔직한 진심을 듣고 싶습니다.
쩡건에게
내가 책마을을 궁인에게 바친 것에 대해 주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궁인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궁인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싶은,
바깥나인들을 위해 씌여진 책들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이유는 이 궁인이 양주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위로받아야 한다.
이 모든 이유들로도 충분치 않다면, 나는 출궁 이후의 그에게
책마을을 바치고 싶다. 궁인들도 누구나 언젠가는 바깥나인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체감하는 궁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책마을에의 헌사를 이렇게 고쳐 쓰려고 한다.
더 없이 험난한 궁 밖을 거닐게 될
쩡건에게
2. '책마을'에 입주를 선택한 당신에겐, '책'에 대한 유별난 마음씀씀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당신의 삶은 '책'을 통해서 어떻게 변해 왔는지 듣고 싶습니다. 책과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학 입학 후에 순수한 보람을 느꼈던 건 딱 한번, 재수 시절 ‘우연히’ 재미있게 읽었던 『피아노, 그린비의 상상 & 미성년』의 저자 김연경씨가 강의하는 수업을 ‘우연히’ 수강했을 때였다. 비록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협공에 맥없이 무릎 꿇어 학점은 바닥까지 흘러내렸고, 자신의 글만큼 재기발랄하고 톡톡 튀는 성품은 아니셔서 사알짝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텍스트와 저자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한 학기였다.
자신의 일상 속 사건과 인물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취하여 살아 숨 쉬는 텍스트로 완성해가는 소설 속 주인공(소설가)의 모습은 일반적인 창작 과정과 다를 바 없지만 이후 逆전이를 통해 텍스트 속의 인물에 대한 동경이 극대화되고 결국 현실의 반영인 텍스트가 현실에로 적용되는 역류 현상이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독서가 내게 작용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여 당시 어린 마음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었다. 텍스트가 나를 부추겨 ‘내가 네가 될 수’있다고 독려해 왔기에, 그 안의 누군가를 쫓아, 아니면 텍스트 자체의 느낌과 정서를 동경하여 내 자신을 구상하고 현실 속에서 그 이미지를 구현하고자 애썼던 게 스물 몇 해 남짓한 내 인생의 실체인 셈이다. 이런 행위 속에 뚜렷이 보이는 한계를 뛰어넘어 현실 속 손에 잡히는 삶으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행위를 성인식에 비유한 그녀의 결론에 의하면 나는 아직 턱없이 ‘미성년’인 채로 여전히 읽고, 부침을 겪으며 활자 속을 부유하고 있다.
3.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김경욱, 「위험한 독서」) 당신이 읽은 책은 곧 당신을 말해줍니다. 당신이 읽어온 책들이 궁금합니다. 당신이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딱 세 권만 보여주세요. 세 권의 책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세요.
무라카미 하루키 - 『상실의 시대』로 내 20대의 Attitude는 결정되었다. 생각하며 행동하되 무겁지 않고, 처세는 세련되고 정직하되 얽매이지 않아야 했으며, 사랑하되 상처받지 않으려 애썼다. 쿨 해야 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잃으며 많이도 돌아왔지만 여전히 내겐 ‘Isn't it good?'이니 아직 영락없는 ’미성년자‘다. 슬프다.
황석영 - 『손님』 이후 ‘결론은 인간’이라는 중간 결과가 나왔다. 세기말을 맞이했던 사춘기 철부지를 둘러싸고 있던 ‘신앙’, ‘이념’, ‘인식’에 대한 보편론적 적용과 개인사적 변용으로 인해 지쳐가던 당시의 내게 ‘불완전한 너와 나의 공존’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절세비공을 툭하고 던져주었으니 10대 초반 『퇴마록』을 통해 내 기저를 흐르던 ‘사람’이라는 화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전공의 선택을 통해 방점을 찍었다.
강은교 -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설레고 부끄러워하며 꿈꿨다. ‘유리창을 닦으며’ 내 안을 바라보고, 옷깃을 여미고,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었더랬다.
4. 한 '문단'으로 스스로를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여주기에 한 문단은 긴 것이 아니겠죠? (단, 공지사항에 나와있듯이 문제가 될 수 있는 표현들은 피해주시길 부탁드려요. 물론, 입주 신청서를 내기 전에 공지사항은 꼭 읽어보셨겠죠?)
한국학을 하신다는 박희병 교수님은 文史哲을 통째로 삼켜야 ‘진짜’라고 하셨다. 문학?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딱히 문학애호가라 하기엔 심히 부끄럽다. 활자 중독이긴 했었지. 한글 좀 읽는다고 으스대던 대여섯살 꼬맹이 무렵부터 한동안 간판, 전단지, 성인 대상 월간지까지 밥 먹을 때도 쥐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혜원 세계 문학 전집’ 류가 읽어야만 하는, 외부로부터의 압박으로 다가오면서 내 활자탐닉은 꽤나 손쉽게 치유되었다. 여전히 읽어 재끼지만 진지한 정독은 버겁기만 한 요즘, 문학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사학?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근 십년간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은 역사학자, 고고학자였다. 무슨무슨 史만 붙으면 뉴스라도 좋았다. 하긴 그 시절엔 경제대통령 그린스펀 따위의 수사에 경도되어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문화대통령이 되고 싶다 읊어댔으니 차라리 일찍 꽃피어 어느새 에둘러 져버린 성미 급한 인문학도로서의 소양에 저주를! 철학? 재수 시절 학원 수업 재끼고 시립도서관 한 구석에 죽치고 앉아 읽곤 하던 라깡, 데리다의 그렇게나 근사하던 담론들, 대부분 우는 소리하던 논술 준비가 무슨 보드게임마냥 신났던 그때. 칸트, 데카르트가 지 친구라도 되는 양 설치던 생각이 없어 생각이 많은 날들이 있었다. 참 유쾌하게 웃기고 앉아있던 날들, 모습들, 기억들. 생각은 있어 생각이 없어진 요즘, 겁 없이 덤비고 설치던 그 날 그 자리의 모습에 향수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나이 값 못하고 제 자랑 읊어댈 기운쯤은 남아있는 대책 없이 믿음직한 철없음에 잠시 잊어보는 깊은 시름.
덧말.. 다 적고 보니 손가락,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느낌인지라 황급히 수습고저 하나니,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 그러는 인간을 믿어선 안 된다 하더이다.(고로 자비를.)
5. 당신이 생각하는 책마을은 어떤 모습인지, 당신이 책마을에서 무엇을 만나고 싶은지 이야기해주세요.
올드 트래포트를 ‘꿈의 극장’이라 하던가. 마을 언저리에서 하릴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요 몇 달 동안, 푸석푸석한 궁 생활 가운데 이곳에 들르는 시간은 마치 몇 달째 오매불망하던 영화표를 손에 쥔 채 내 앞의 입장 줄이 짧아지길 기다리던 때처럼 꽤나 설다. 구혜선의 다크서클 마냥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유의 향연에 섣불리 동참하지 못하고 서성댔지만 마감시간이 임박해 가는 지금은 표를 자르고 한구석 자리라도 비집고 앉아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700Mbyte 영상 두개가 개봉도 전에 빛의 속도로 범람하는 자비의 유토피아를 살아가면서도 굳이 우리가 돈을 주고 극장에 가는 이유는 내가 기대하던 무언가를, 같은 기다림을 가진 불특정 다수와 함께 호흡하며 즐기기 위함일 터. 입주서약서를 작성하는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숨쉬기 위해 필요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이야기들을, 역시나 목말라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 섭취하며 포만감을 만끽하고 싶달까.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스스로도 몰랐던 가치 있는 존재의 편린 한 두 조각이라도 발견하고 흘릴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내가 이곳에서 향유한, 할, 주옥같은 명연에 대해 작은 대가를 지불한 셈 치련다. 물론 내 쪽에 턱 없이 유리한 불공정거래 같지만.(웃음)
6. 여기까지 쓰면서 책마을에 당신을 보여주셨다면,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야말로 가입‘인사’를 써주세요. 뭐든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써주세요.
언젠가, 설레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입장의 변으로 삼가 올리옵나이다.
달콤, 쌉싸름
아침을 잃은 밤
해를 닮은 달
카페인 한 잔과
봄 바람
나란히 한 쌍 조조영화표
달콤, 살벌한
봄 여인, 봄 연인
담배 연기처럼 피어
오가는 사람
정오, 명동
웃다가 무서워져
너는 모르게 너만
보이는 이곳
다시 한 잔 카페인과
봄 가락
기대하겠어 우린
달콤, 쌉싸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3:53:40
병장 김형태
피쓰 2009-04-06
08:28:53
상병 정근영
아아, 반갑습니다 건희님.
'700Mbyte 영상 두개가 개봉도 전에 빛의 속도로 범람하는 자비의 유토피아를 살아가면서도 굳이 우리가 돈을 주고 극장에 가는 이유는 내가 기대하던 무언가를, 같은 기다림을 가진 불특정 다수와 함께 호흡하며 즐기기 위함일 터.'
명문이군요
아직 얼마나 남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보다 빨리 저녁을 드실 것은 거의 확실하군요.
그렇지만, 그 시간동안 건희님과 많은 것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지로- 2009-04-06
08:32:32
병장 정건희
형태//
피쓰(웃음)
근영//
반겨주시니 감사해요.
분위기에 압도되어 안어울리게 어깨 힘 빡 주고 장문을 끄적댔더니 아직 손가락이 덜덜거리네요. 하하
저녁 먹기 까진 아직 달단위로 몇 묶음 남아있답니다.
남은 시간 근영님과 아직 잃고 싶지 않은 낭만에 대해 따뜻한 대화 많이 나눌 수 있길 바래봅니다. 2009-04-06
09:24:19
병장 김민규
후루룩, 아 쌉싸름
담배 연기처럼 피어
오가는 사람
정오, 명동
반갑습니다. 2009-04-06
09:51:15
병장 김범수
하루키, 저도 많이 좋아해요. 상실의 시대는 재밌게 봤죠.
저도, 가입인사를 써야하는데, 글쓰는 방법을 몰라서 미루고 있다죠 2009-04-06
11:28:13
병장 송원호
호오!!
반갑 습니다!! 2009-04-06
12:49:44
상병 김태완
명필가 등장이오 2009-04-06
13:45:59
병장 김대운
기대하겠어 우린
달콤, 쌉싸름
흐흐, 저도 기대 하겠습니다. 2009-04-06
15:53:27
병장 정건희
민규//
역시 어디에나 계시는군요(웃음)
반갑습니다.
범수//
공지에 즐겨찾기 이용해서 글쓰는 법 나와있던걸요?
저도 가입인사 한참 걸렸어요. 하하
원호//
반갑 습니다!!!
오묘하게 띄어쓰시니 배치기 노래같군요. 호오라.
태완//
송구스럽게 과찬을...
원래도 쑥쑥 양산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책마을 글들을 주욱 읽어가다 보면 글쓰기 버튼이 잘..(좌절) 안눌러 지더라구요
다음엔 힘좀 빼고 자연스레 써보고 싶습니다(웃음)
대운//
저도 많이 기대할게요. 하핫 2009-04-06
22:24:30
상병 김지호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행복감에 젖어드는
드림카카오같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시대가 인문학을 외면하는 시대이지만 분명 기초는 인문학일 듯합니다.
순수상실의 시대여...... 2009-04-07
14:55:09
병장 정건희
지호//
언제나 외면받는 처지였지만
그 위에 발딛지 않은 것이라곤 분명 아무것도 없지요.
설탕먹고 돌아오니 주말 내내 방문이 안되고
정상화되어 들어오자 손님이 되어있고
다시 가입하고 나니 공지에 제 글이 있네요.
뭔가 다사다난합니다 그려.(땀땀)
부끄러운 글을 윗머리에 얹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렵니다. 2009-04-13
12:37:12
병장 김대운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이주의 가입인사입니다. 하하 다시 한 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