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일님의 [주말 잡담]을 읽고. 
 상병 신학수 04-09 07:29 | HIT : 176 



 이승일님의 글의 각 단락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 글을 씁니다. 

#1
 우리가 관찰하고, 보는 대상은 대부분 동일하다. 우리는 여러 자연물들, 천체, 작은 사물들, 사람들, 그들이 만든 사회,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나 자신의 의식을 경험한다.

 과학자와 종교인이 관찰하는 대상들은 이렇게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자신들이 관찰한 대상에 접근한다. 
 과학자들은 더 단순하고, 더 간단하고, 더 작은 것들의 집합체로서 관찰된 대상을 설명하려한다. 종교인들은 더 크고, 더 풍부하고, 더 탁월한 것의 부분으로서 관찰된 대상을 이해하려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100이라면, 과학자들은 0~99 까지의 숫자들을 통해 100을 이해하려하며, 종교인들은 무한의 한 부분으로서 100을 이해하려한다. 이 두 관점은 모두 불완전하다. 과학의 경우,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더 작은 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면, 작은 것들을 다시 재정립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관찰하는 대상들의 존재를 부인해버리곤 한다. 다시 말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뒤바꿔버린다. 한편 종교의 경우, 너무나도 광활하고 모호한 영역을 헤엄쳐야하기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 말고는 거의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ㅡ 그러나 무지에 대한 고백이 오만한 앎보다 훨씬 진리에 근접해있다. 우리는 정말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서구 철학이 사실상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라. 그의 앎이 아니라 그의 무지로부터, 그 무지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 알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신의 영역으로 넘겨버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쌓아온 0~99까지의 숫자의 의미를 무시하고서, 100을 모른다고 그 앞선 0~99까지의 것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가정 하에, 철학과 과학은 그것을 밝혀낼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과학의 경우,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더 작은 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치게 되면, 작은 것들을 다시 재정립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관찰하는 대상들의 존재를 부인해버리곤 한다. 다시 말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뒤바꿔버린다>라고 하실 만큼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과학과 철학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요. 그것에 대해서는 승일님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과학과 철학은 알 수 없으나, 종교인들은 겸허하게 수용한다고 하는 것은 미리 알 수 없는 진리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입니다. 가정된 어떤 절대적 진리-여전히 우리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에 대해서 종교인들은 믿을 뿐이고, 과학자와 철학자는 끊임없이 탐구합니다. 그러니, 과학자가 알 수 있는 더 작은 것으로 환원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다는 식으로 재정립보다는 부인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승일님의 글의 맥락에서 부인하거나 재정립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 신, 혹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더 작은 대상으로 환원하려는 것은 일부의 과학적 방법론이고, 대다수는 무조건 더 작게 쪼개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큰 틀에서 법칙과 이론을 생산해내기도 하고, 실험을 통해 접근-이는 밑의 단락에서 승일님이 인정하신 부분이기도 하고-하기도 합니다. 
 전제와 근거들이 좀 비약하는 면이 있고, 사실 납득이 잘 안 됩니다만, 결국 과학자나 철학자는 신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이 글을 쓰셨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 제가 사용한 0~99까지의 숫자는 설명을 돕기 위한 도구였을 뿐, 승일님이 #1에서 사용하신 0~99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 점 혼동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신과 진리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승일님은 신이라는 영역에 대해 과학자나 철학자는 그것을 알 수 없으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신의 영역이 증명 가능한 것이긴 합니까? 종교인들의 믿음이라는 행위는 다만 우리가 풀어낼 수 없는 숙제들을 신의 영역으로 떠넘기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에 질문을 해보겠습니다.(물론 저는 어느 정도 답을 내린 상태입니다)
 첫째, 신은 있는가?
 둘째, 신이 존재한다면 논리적으로 증명가능한가?
 셋째, 논리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인정시킬 수 있는가?
 넷째, 인정시킬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되는 것을 인정하는가?
 다섯째, '아는 것이 없는'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혹은 말할 수 있는가?
 여섯째,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인가 감정적인가?
 일곱째, 다섯째 질문에 대해 '말할 수 없다'라고 답한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신의 영역에 대해 알지 못하고 없을 수도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이라 볼 수 있는가?
 여덟째, 다시 말해 이것은 온전히 믿음의 영역이 아닌가?
 아홉째, 믿음의 영역-이를테면 신-에서 궁극적인 진리의 성취는 사유와 실험을 통해 이뤄지는가, 깨달음을 통해 이뤄지는가?
 열째, 깨달음을 모든 사람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는가?
 열한번째, 깨달음은 개인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열두번째, 깨달음이나 믿음을 강요하거나 깨닫지 못한 자들을 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비난할 수 있는가?
 열세번째, 모른다고 고백했던 소크라테스의 고백은 깨달음인가, 그의 끊임없는 사유의 종착점인가?
 열네번째,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들이 100이라면, 과학자들은 0~99 까지의 숫자들을 통해 100을 이해하려하며, 종교인들은 무한의 한 부분으로서 100을 이해하려한다>라는 문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한의 한 부분을 통해 다시 무한으로 환원해 보려는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수도 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열다섯번째, 무한을 알 수 없다는 공통점에도 불구, 종교인과 과학자들은 인식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종교인들은 인정하고 과학자들은 오만한 앎을 내세운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열여섯번째, 무지의 고백이 오만한 앎보다는 낫다는 것에 대해 전제로-
 무지의 고백 후 무지를 그대로 놔두는 것과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것은 어느 것이 나은가?
 열일곱번째, 소크라테스의 고백을 그냥 믿어야만 하는가? 그가 수많은 고민과 성찰 끝에 뱉은 말이라면,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그와 같이 수많은 고민과 성찰의 전철을 밟아야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철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사유가 되지 않겠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파생됨에도 불구, 시간관계상 이쯤에서 멈추려고 합니다.

#2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뭉치를 풀 수 없을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똑똑한 일은 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일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능력한 현명함에서 별다른 매력을 찾지 못한다. 화려한 우둔함에서, 그리고 "만능 멍청이"* 에게서 사람들은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왜냐하면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앞에 붙여진 수식어들 - 무능력한, 화려한, 만능 - 뿐이기 때문이다. 
: 1.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뭉치는 결국 풀어낼 수 있습니다.
2.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였다면, 풀어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2에서 예를 들어준 '더 복잡한 실뭉치'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 또한 증명할 수 없다면, 그 실뭉치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나 철학자의 노력이 폄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3
 문학과 예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정신은 빛을 일어버렸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과학과 철학에 영원한 숙제를 제공해주며, 과학자와 철학자가 세상의 일부를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불쾌한 자극을 가해준다. "자, 이것도 세상의 일부야! 이것은 왜 무시하지!?"
: 종교와 과학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문학과 예술이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만, 좋습니다. <문학과 예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정신은 빛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과학과 철학에 영원한 숙제를 제공해주며>까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과학자와 철학자가 세상의 일부를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불쾌한 자극을 가해준다. "자, 이것도 세상의 일부야! 이것은 왜 무시하지!?">라는 부분에서는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예술이나 문학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일부의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그렇지만, 또한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둘은 영역이 다를 뿐입니다. 타성에 젖은 일부의 문학과 예술 역시 세상을 관조만 하기 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라는 것에서 그 정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접근했는지, 자기들은 문제에 뛰어들기 보다는 '벗어나' 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4
 세상의 일부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전히 불완전함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이 이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마치 자기 자신은 빼놓고 학급의 사람수를 세는 아이들처럼) 그리고 그 작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제단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분명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오만함. 
: 이것이 과학자나 철학자에 대한 승일님의 어떤 결론지어진 이미지라면, 이 모습은 오히려 종교인이나 타성에 젖은 예술가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또한 <세상의 일부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전히 불완전함을 의미할 뿐이다>에서는 작은 부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뒷부분은 그 작은 부분에 의한 성찰과 일반화가 의미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제단하려고 시도한다>-작은 부분에 의해 전체를 유추해보려는 시도는 각 종교나 종교철학에서도 종종 있는 일입니다. 작은 일들은 깨달음의 근거이기도 하고,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 일 수도 있습니다. 인체를 소우주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을 믿음의 영역으로 넘겨버리고 그것에서는 손을 떼버리는 나약함.


#5
 가장 못 된 것은 물귀신 작전이다. 자신의 한계를 세상에 떠넘기려고 하는 것. 자신이 이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상도 이정도 밖에 안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이러한 행동은 '나를 빼놓고 무언가 엄청나고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엄청나고 중요한 일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일어나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일어나고 있다. 물귀신은 자기 자신이 부둥켜안은 희생양의 무게 때문에 종종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곤 한다. 
: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
 이것은 정말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 단락들과 갑작스레 동떨어진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조금 이해가 힘듭니다. 이런 잘못들을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범하고 있다는 건가요? 이것은 모든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심지어 종교에서까지.

#6
 우리는 소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대체로 충분히 일어날 법 한 이야기" 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에는 중대한 가정이 깔려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법 한지' 이미 알고 있다는 가정. 다시 말해 삶의 법칙들을 대충 알고 있다는 가정. (마치 물리적으로 일어날 법 한 일을 알기 위해서는 물리 법칙들을 대충 알고 있어야 하듯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법칙과 부딛혀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일종의 실험을 해보는 것이 아닐까? 
: 일어날 법 한지를 가늠 하는 것과 삶의 법칙을 아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소설에서의 가능성의 문제는 법칙의 문제와는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그것은 속성을 본질로 간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일어날 법한 것들에 대해 알기 위해서 물리 법칙을 정말 알아야 한다고 보십니까? 물리법칙은 일어날 법한 것들에 대해 왜? 일어났을까를 고심하다가 생겨난 것이지, 물리법칙을 알았기 때문이지, 현상에 대한 예측이, 어느 정도 물리법칙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소설이 일종의 실험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충분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은 법칙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지, 법칙을 알기 때문에 해보는 것은 아닙니다.(법칙에 대한 의심은 법칙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서 기인하는 불완전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적어도 패러다임 내에서 유효한 법칙에 대해 다시 실험하는 것은 '학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결언.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변론은 아닙니다. 신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믿음에 대한 강요 외에, 어떤 논리를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그것에 대한 해법으로 승일님은 문학이나 예술 등을 이야기하십니다만, 그것은 믿음의 영역과 같이 '느끼는' 것이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저도 종교인이지만, 종교는 믿음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대체 왜 인정하지 않느냐? 그것은 신의 영역이 아니냐? 왜 신을 믿지 않느냐? 종교인들은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도. 문학과 예술을 보아라. 그것은 논리적이지 못할지라도 신성(神性)이 드러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느끼지 않느냐, 이것은 너희들이 인정하지 않는 영역이라도 분명 존재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오만하게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 말고 믿어라. 인정해라는 것이 승일님의 주 논점이라고 봤을 때, 승일님의 글은 결국 느낄 수 있는 글이지, 납득할 수 있는 글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그 글은 승일님과 동일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을만한 글이나, 그 외 다른 이들을 설득할 목적으로 쓰신 글이라면, 냉정하게 말해, 실패하신 것 같습니다. 

 종교와 과학과 철학의 접점은 승일님이 이야기한 예술과, 도덕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진리를 향하고 있지만 그 방법론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영역은 오롯이 믿음의 영역으로 남기고, 그것을 통해 실제로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는 것이 각 영역을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에도 도움을 준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앞선 문장은 제 신념에서 나온 문장으로, 논리와는 관계없음을 미리 밝혀드립니다.(웃음) 

 무지에 대한 인정은 앎으로의 발판이 되어야 하지, 그 인정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종교인이 신에 대해 믿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 수많은 믿음의 근거들을 획득하고 공고히 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의 오만함이 승일님의 반감을 샀을지언정, 우리는 그들을 감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 뿐, 이성적으로 납득시킬 기술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 감정적인 비난으로 일관하는 한, 믿지 않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더 많다고들 합니다만-그들과의 영원한 평행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병장 이승일 
 자세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자세히 읽느라 글의 제목은 무심코 넘어가신 것 같군요(웃음) 우선 왜 단락들 사이에 연관성이 결여되어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오히려 어쩌다가 연관성이 생겼을 뿐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각 단락들은 우연이 아니고서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래서 잡글이지요. 

 나머지 이야기들에 관해서는 제가 썼다고 해도 믿을만큼 저 스스로에겐 반론할 부분이 보이지 않는군요. 사실 제가 지금까지 써온 글들 중 상당 수는 바로 이 글과 같은 논지를 담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이라는 논고의 명제가 잘 못 이해되고 남용된 사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동의합니다. 04-09 * 

 병장 이승일 
 음 .. 혹시 제가 학수씨의 글에 동의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한가지 첨언하겠습니다. 제가 만약 어떤 기념주화의 앞면을 좋아한다면, 저는 그 기념주화 자체를 좋아할 것이고 따라서 뒷면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뒷면을 잘라서 버릴 수야 없는 노릇이죠. 제가 쓴 글과 학수씨의 글이 배치된다고 여기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모자르다는 말은, 동시에 그것이 그만큼이라도 차있다는 뜻이며, 더 채울 수 있고 또 더 채워야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학수씨의 진지한 태도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분명히 인간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04-09 * 

 상병 신학수 
 승일님이 제 글에 동의한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 전혀 의아하지 않습니다.(웃음) 저는 승일님의 다른 글도 보아왔으니까요. 가입후 그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책마을에 글을 남기지 않았을 뿐, 이 공간에서 사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몇몇 분들의 글들은-승일님 글도 마찬가지지요-일부러 검색해서 보기도 한답니다. 승일님의 그간의 진지한 철학적인 탐구에도 불구, 지난 몇개의 글들이 그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글들인 것 같아서 한 번 찔러봤습니다. <제가 쓴 글과 학수씨의 글이 배치된다고 여기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모자르다는 말은, 동시에 그것이 그만큼이라도 차있다는 뜻이며, 더 채울 수 있고 또 더 채워야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주말 잡담에 한한 것이라면 의아합니다.(웃음)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성실한 답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04-09   

 병장 이승일 
 학수 / 아래 글에서 저는 이를테면 과학과 철학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의 부족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학문들이 완전한 학문이 아닌 이상, 부족하다는 것은 어쨌거나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비록 아직 부족할지라도 분명 훌륭한 성취이며, 그러한 성취를 이룩한 정신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하지 않은 모든 인간 활동에 대해서는 두가지 평가가 병행되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의 성취를 인정해줌과 동시에 그것의 부족함 역시 간과하지 않도록 지적해 주어야합니다. 물론 한 개인이 이 두가지 입장을 동시에 취하는 것은 종종 모순적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래서 보통 어떤 사람은 그것의 성취만을, 다른 사람은 그것의 결함만을 지적할 수밖에 없겠죠. 저 역시 그랬고, 학수씨 역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희 둘의 의견을 합친다면, 보다 나은 의견이 되리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상호보완적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한편, '사상적 영향력' 의 대열에 제 이름을 끼워주신 것은 황송할 정도로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단순히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글을 자주 쓴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될 것입니다. 학수씨처럼 뛰어난 역량을 갖고도 시간의 부족 때문에 글을 자주 쓰지 못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을테니까요. 설사 시간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칭송받을만한 분들들은 대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04-09 * 

 상병 신학수 
' 사상적 영향력'이라는 말이 참 거창하긴 한데, 사실 뭐...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제가 뛰어난 역량이 있다는 말이 오히려 부끄럽네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인정한 뒤에야 과학과 철학은 그것을 새로운 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측면의 고려-이를테면 예술-와 선입견 없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정도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런지요(웃음). 

 승일님의 글들은 생각할 점들이 많아요.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마침 이런 계기로 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좀 러프하게 글을 밀어붙인 경향이 없잖아 있었는데,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뵙기로 해요(웃음) 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