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개] Our world and Our history  
상병 이석재   2009-01-04 20:21:58, 조회: 250, 추천:0 

얼개라는 것, 사실 처음 써보는 것만은 아니지만 이곳에 와서 수많은 ‘괴물’들의 수많은 얼개를 보다보니 지금 현재도 벙쪄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필체로 이렇게 많은 자신만의 생각을 써내려 갈 수 있는가, 가끔씩은 필체에서 귀찮음과 부족함이 묻어나오는 제 글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Side and Side란 연재물을 8부작정도로 끝마쳤을 때, 한편으로는 이제 일하는 시간에 이런거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편안해지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것만으로 책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해 역사 입문서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연재물의 주요 배경시기는 ‘고대’보다는 ‘중세 말기’서부터 ‘현대’까지의 부분을 많이 다루었으니까요. 특히 현대사 같은 경우는 아직 100여년도 안된 기간이기 때문에 현대역사에 대해 쓸경우 아직도 수많은 반론에 휩싸이기 마련이지요. 박어떤분의 통치기간을 두고 아직도 많은 말들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과연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저는 어려운 말 따위는 알지도 못하니 ‘프랑스와 독일의 1830년대를 결정짓는 사건들’ 뭐 이런걸 S대 교수처럼 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마추어 역사가가 되어서 새롭게 역사 입문서로서의 연재물을 하나 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역사 입문서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부터 정의내려야 하겠군요. 여러분들은 방안으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문고리의 모양? 그 방안에 있을 무언가의 모습? 그런것도 중요하겠지만, 얼핏하면 문지방에 발이 걸려 들어가기도 전에 철퍼덕. 하고 엎어져 버릴 것입니다. 문지방이란 그런 것입니다. 쉽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작 사람들이 가는 앞길에 방해물이 될 뿐이지요. 어느사이엔가. 그렇다면 그 방이 ‘역사’라는 사실이고, 문지방이 ‘여러가지 사실들’이라면? 그 문지방을 최대한 낮추고 낮추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방안에 들어오기 쉽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는거는 뭣도 없지만 그나마 흉내라고 내고자 이런 ‘거대한’ 계획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 입문서는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가. 저는 좋은 예시를 하나 들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사 100장면”. 새로 역사를 입문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그 플롯을 따오려고 합니다. 정작 글쓰기 실력은 없는 탓이라, 어쩔수가 없군요. 고대사에서부터 현대사까지,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장면’들에 대해서 하나의 글로 담으려고 합니다. 물론 한 장면에 대해 3부작 정도까지 갈 수 있겠고, 그 주석만 하더라도 수많은 칼럼을 만들어내서 어쩌면 굿게임, 을 외쳐버릴 수 있겠지만, 그만큼 노력을 해야겠지요.

첫번째 장면은, 글쎄요, 사실 ‘그리스’의 태동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만, 그 전의 역사들-예를 들어 Chri..그분이 태어나실 때라던가, 그 전에 우리 모ㅅ…이분이 바닷물을 가르면서 네 이놈! 할때라던가-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입문서’입니다. 성경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성경시대 스토리도 제작할 때지만 스키타이 뭐 이런거 알고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만드는 행위는 제가 ‘최대한’ 지양하려고 합니다. 상식선에서 해결해야겠지요.

저번에 ‘역사론’이라는 어이없는 작품에서 제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었으니, 여기서 굳이 그 이유를 다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저는 문지방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네루가 썼던 ‘세계사 편력’을 기억하십니까? 그 책에서 네루는 자신의 딸에게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 수많은 역사를 편지형식로 다루었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하려는 것은 그것이겠지요. 이 얼개글 자체가 어려운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글이 무지 긴 것도 아닙니다. 다른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는 굳이 글이 길면서 어려운 단어를 써가면서까지 무언가를 쓰고 싶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얼개글과는 달리 제 생각을 최대한 풀어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필요악이라는 생각이 드는 속담입니다만은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쓰는 졸작에 대해서는 많은 답문 편지를 통해 저를 열심히 때려주시면, 그만큼 저도 또 한걸음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세계사의 무대에, 여러분도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전달 끝

p.s: 저, 어쩌면 글쓰기 중독일지도 몰라요. 냐하하하하하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0:57 

 

상병 정근영 
  우후훗, 첫 댓글이로군요. 역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잘 모르는 저로서는 이런 칼럼이라고 한다면 대환영입니다! 
기대할게요(웃음) 2009-01-04
20:59:58
  

 

병장 김민규 
  굿굿굿 베리굿. 보다 넓은 차원에서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바라보고 그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상큼합니다. 당분간 칼럼 게시판에 숨통이 좀 트이겠군요. 저야 이건 뭐 뺀질뺀질한 비관만 올려대던 터라, 쪽팔리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지만. 2009-01-04
21:03:27
  

 

병장 이동석 
  우오오오- 2009-01-04
22:03:04
  

 

병장 이우중 
  멋져요. 정말로. 기대하겠습니다. 허허 2009-01-04
22:18:10
  

 

상병 이지훈 
  석재// 

반갑군요. 얼개! 역사 입문서가 해야할 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 잘 알았습니다. 석재님의 글이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도요. 
하지만 석재님에게 있어서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학이란 무엇인지 밝혀주셨으면 좋겠어요. 얼개에 포함되기를 바랐는데 말이죠. 석재님 글에 보론의 성격으로 저의 역사와 역사학의 정의를 나름 써본 것은 석재님의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었던 이유도 컸습니다. 그냥 저와 비슷한 논지시군요 하셨는데, 얼개를 올리셨다면 이에 대한 석재님의 생각이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제 글이 뜻을 잘 전달하지 못했는지, 저는 분명 '대중화 방법론(이라고 해야할까요?)'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더 강합니다. 글로 정리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석재님이 역사 입문의 글을 쓰시기 전에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생각을 밝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건 개인적인 요청입니다. 흐흐 2009-01-05
02:53:20
  

 

상병 이석재 
  상병 정근영/ 감사합니다. 잘 써내려가도록 하죠 

병장 김민규/ 오히려 숨통을 막지 않을까요. 쩝쩝 

병장 이동석/ 우오오오- 

병장 이우중/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건 안됩니다! 

상병 이지훈/ 대중화 방법론. 결국에 제 말은 그렇게 축약될 수 있긴 하군요. 하긴,얼개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게 부족하다면 다시 보론을 붙여야겠지요? 2009-01-05
03:05:37
  

 

병장 정병훈 
  쉽지 않은 선택이군요. 
글쓰기는 중독이 맞는거 같습니다. 2009-01-05
20:08:01
  

 

상병 이석재 
  병장 정병훈/ 그렇습니다. 중독이지요 중독. 흑색마약일지도 모릅니다 2009-01-05
21:43:09
  

 

상병 이석현 
  으허 기대할께요. 기다릴꺼에요. 흐흐 


 [칼럼] H.I.S - Scene Zero, One:서론, 그리고 본론.  
상병 이석재   2009-01-05 23:10:33, 조회: 351, 추천:0 

Scene Zero- 서론

얼개를 썼습니다만, 모든 글에는 서론이 들어가야겠지요? 사실 글을 쓸데 가장 어려운 것은 글의 서론을 쓰는 거라고 어떤 분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맞는 듯 싶습니다.



이 칼럼의 이름은 ‘히스’입니다. ‘히스테리’의 그 히스가 아니라 History In our Story이라는 얘기지요. (남자중심적인 얘기는 아니지만) His는 ‘그의 것’ 이라는 소유격, 소유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아 영어공부하자고요? 그런건 나중에 다른 굇수분들한테… 다른 분들이 더 잘할거 같군요.



History는 그런 His 와 Story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이래저래 같은 의미들이 겹치죠? 이런거 생각해내느라고 얼마나 머리가 터졌는데요. 안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말이지요. 이제, 저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우리 이야기 속의 역사.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어떻게 완결될지도 모르겠지만, 끝까지 해보는 데는 해봐야겠지요?



P.S:역사와 역사학에 대해서 저에게 설명을 해달라는 분이 있으셔서, 역시 서론에다가 첨부합니다. 제가 이지훈님의 글을 읽어본 바로는 ‘역사’란 현재 사실, 기록되지는 못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총칭한다고 보고, 역사학이란 그런 여러 사실들중 취사선택해서 한 집단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 그것을 역사학이라고 보시는 것이군요. 맞으려나 모르겠군요.



만약 그렇게 구분한다면, 역사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말씀하신대로 ‘복잡한 것’이겠지요. 그 복잡한 것에서 역사학이 바로 집단의 역사를 차출해 내는 것이겠지요. 물론 제 졸작인 ‘역사론’에서는 그 점을 깨닫진 못했군요. 하지만 수많은 ‘역사’라는 사실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역사학을 알지 못해도 그 수많은 역사들을 체로 거르고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얻어냅니다. 배우지 못해도 자연적으로 하는 행위들에 속하려나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동이라면 굳이 역사와 역사학을 나누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신만의 ‘체’는 모두와 똑같이 흘러갈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 체가 아날학파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실증주의적인 체일 수도 있을테고,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아날과 실증주의 뭐 이런걸 구분해가면서 ‘역사’를 판단해 가겠습니까. 결국 자연스럽게 구분해 가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어느새에 역사와 역사학이 다른 단어로서 구분되어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Scene One, 



첫번째 시작은 세계 4대문명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역사의 시작은 사람들이 거주지를 잡기 시작하고, 거기서 좀 먹을 문제가 풀리는 바로 그때부터이니까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 참 명언인거 같습니다.  물론 그 전에 역사를 휘어잡은 유대, 앗시리아, 페니키아 등등이 있지만 그건 4대문명을 중심으로 가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4대 문명의 위치 이집트의 나일강, 이라크의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인도의 인더스강, 중국의 황하강이라고 합니다. 그 ‘강’에서 문명이 시작된 이유는, 경작이 쉬웠기 때문이지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갈 때 인류는 이제 창으로 ‘우가우가’하면서 곰을 때려잡기보단. 조용히 씨를 뿌리면서 결실을 맺는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보니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농사는 편하고, 그러다가보니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기고, 도시를 방어하려면 성벽도 생기고 이제 많은 생산물이 나오다보니 남는걸 힘센자가 가지게 되고, 그러다가보니 계급도 생기고 이렇게 도미노식으로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잡하죠?


그렇게 ‘경작’이란 것이 인류에게 중요해지다보니, 그 경작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지역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강 주위가 되는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집트의 나일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여름에 한창 범람합니다. 강 주위의 있던 땅이 모두 강으로 변해버리게 되면서 다시 비옥한 땅으로 변화되고, 그 비옥한 땅에서 가을내내 농사지어 추수하고 나면 다시 여름이 되어 강 범람후 비옥한 땅으로 가게 됩니다. 왜 비옥한 땅이 되냐구요? 상류에서 식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영양분들이 같이 떠내려오거든요. 물론... 땅도 다시 측량해야 하지만 말입니다.(주1)


이집트문명은, 아시다시피 지금의 시리아까지 확장한 나라였습니다. 람세스 2세 시절에 가장 최고의 영토를 자랑하였지요. 물론 북쪽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인들(주2)에게 견제당하기도 했고, 힉소스 인들(주3)에게 이집트 전체가 뒤집히기도 했지만, 중동에 이집트를 건드릴 수 있을만한 나라는 별로 없었지요. 이 이집트 문명이 이렇게 일정한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방어가 편리했고 ‘고대 역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지역에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그쪽에서 내려오려면 길이 좁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와야 하니까요.



그러나, 지금부터 말할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얘기가 좀 다릅니다.지금의 이라크 땅에 있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 지역은 제대로 된 ‘국가’ 가 ‘오랫동안’ 버티지를 못했습니다. 바빌론에서부터 앗시리아까지. 이 지역에 특징은 계획적인 도시 발전입니다. 완벽한 개수시설을 통해 강의 범람을 최대한으로 막고, 거기서 고효율의 경작을 시행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개방적인 위치로 인해 북쪽과 동쪽에서 끊임없이 오는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불안했습니다. 이런 불안감 때문에 이집트문명은 내세적이고 환상적인 것들이 많지만, 메소포타미아문명은 현세적이고, 실질적이였습니다.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음력 등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요. 또한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의 문제 또한 두 문명이 달랐는데, 이집트 문명은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를 사용하였지만, 메소포타미아는 간단한 쐐기문자로 현실성과 편리성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일단 적의 침략이 있으면 “신이시여” 보다는 일단 살고 봐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되니까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전한 나라로는 앗시리아(주4), 바빌로니아(주5) 뭐 이런나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소소한 나라들의 역사는 지나가도록 합시다. 이게 학술서는 아니니까요. 


그럼 이제 동쪽으로 눈길을 돌립시다. 인도의 인더스문명이 있군요. 제가 맨처음 역사를 배울때는 ‘왜 갠지스강이 아닌 것인가!”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안그러셨는지 모르겠군요. 인더스강이 갠지스강보다는 경작하기다 더 편했다고 합니다. 갠지스강은 게다가 주위가 밀림이기 때문에 그 밀림을 벌채하고 사람들의 거주지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좀 시간이 더 걸렸던 거지요. 게다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 이 세지역간에는 무역루트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까운 루트를 만들어 무역을 쉽게 하기 위해서라도 인더스강이 더 편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더스문명은 북쪽에서 내려온 ‘아리아’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인도 문명 자체가 아리아인의 역사로 시작됩니다. 지금 인더스문명을 가리키는 수많은 도시들(모헨조다로 등등)은 남아있고, 그 유적또한 남아있긴 하지만 다른 4개 문명에 비해서 남아있는 것들이 없다시피 합니다. 야만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인이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지요. 그 덕분에 아리아인은 인도에서 지배계층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인도의 계층 계급이 바로 이 아리아 지배계층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크샤트리아, 수드라 뭐 이런것들이요.


인더스문명의 특징은, 도시 계획이 메소포타미아처럼 정확했다고 합니다. 공중 목욕탕도 존재했고, 하지만 인더스문명에 대해 알 수 있는게 도시 유적과 조그마한 토기, 뭐 이런것들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래저래 파악에는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아리아 문명의 침략 이후 인더스 문명을 이루었던 ‘원주민’들은 동부와 남부로 피신해서 그곳에서의 다른 촌락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인도의 북부와 남부는 서로 사이가 안좋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도 인도 북부와 남부는 이탈리아의 북부와 남부수준은 아니지만 서로 문화가 상이하기도 하고, 북부에서 통일왕국이 나타나 남부를 정복하려고 하려면 반란, 반란, 반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인도의 마지막 제국인 무굴제국이 점차 무너진 이유도 이 남부에서의 반란이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산맥을 하나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봅시다. 중원! 이라고 거창하게 말은 했지만 중국의 황허문명입니다. 중국의 고대 역사라고 할 수 있는 하,상나라->은->주나라로 이어지는 이곳에서 중국인들의 문명이 태동했다고 볼 수 있지요. 지금이야 중국 남부가 식량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더욱 발전해있지만 고대에서는 황허유역이 쌀 생산의 중심지였습니다. 


하, 상나라는 황허유역의 개수시설을 확립했고, 은나라는 중국의 초기문자라 할 수 있는 갑골문자(주6)을 개발해냈으며, 주나라는 고대 중국을 결정지을 ‘하늘의 뜻’을 처음으로 시작한 나라이기도 합니다(주7). 또한 서양과는 다른 ‘봉건제’(주8)을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지요. 황허에서 시작한 문명이지만 점차 중국의 중심은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아주 멀고먼 후의 이야기니 나중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4대 문명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쓸 내용은 더 불리면 불릴수는 있긴 한데 그렇게 되면 양이 너무 많아지게 되니까 간단한 개요? 정도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4대문명은 인류문명의 태동을 도와준 위치에 있기도 하니까요. 비록 4문명 모두 여러 부침을 겪기도 하면서 나중엔 그 중심지가 이동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문명의 시작점, 이라는 데에는 전 세계인들한테서 이의가 없습니다.


다음 이시간에는, 잠시 자리를 축소시켜서 고대 중동의 역사에 대해 잠깐 훑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Coming Soon.


주1-나일강의 수학: 자, 범람을 했습니다. 강이 휙 쓸고 지나갔더니 자기 땅이 어딘지 모르겠단겁니다! 그래서 측량기술은 바로 이 이집트 문명에서 제일 먼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3대 문명에서는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거든요. 거긴 열심히 공사하면 범람을 어느정도 조절할 수 있는 수준이였지만 나일강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옛날 파피루스에는 나일강의 범람 후 토지를 측량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 놨다고 하더군요


주2- 히타이트: 히타이트 인들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榮쩝測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이 철기문화를 발전시킨 최초의 민족이라는 데에만 역사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역시 멸망 원인또한 불분명한데, 초원에서 건너온 어느 민족이 히타이트를 멸망시켰다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을 해보신 분이라면 히타이트 인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주3- 힉소스인들: 역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이민족으로서 이집트에 최초로 ‘전차’라는 무기를 들고 와 이집트 왕조를 전복합니다. 힉소스 이전의 이집트를 고대 이집트 왕조, 힉소스인들이파 파라오가 된 때를 중 이집트 왕조라고 합니다. 람세스 2세는 이 힉소스인들을 i아낸지(약 2세기만에) 얼마 되지 않을때에 집권합니다(상 이집트 왕조라고도 합니다)


주4-앗시리아: 아시리아, 라고도 부릅니다만 성경에는 앗시리아라고 표기되어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동 전체를 지배한 첫번째 국가입니다. 강력한 무력통치로 인해 중동의 패권은 잡을 수 있었지만 여러 나라들의 반란으로 인해 메디아, 신 바빌로니아 왕국등의 나라들이 독립하게 되고 결국 금새 역사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주5-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등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바빌론이 수도였다고 하지요.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한 이후 다시 독립, 신 바빌로니아 왕국이 건설됩니다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에게 다시 합병당하고, 더 이상 ‘바빌로니아’ 왕국이라는 이름은 역사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6- 갑골문자: 거북이 등에 불을 지펴 나타나는 문자를 가지고 점을 친 방식입니다. 은나라는 이외에도 순장풍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중국 내 다른 민족들 한테서 불만이 좀 많았습니다. 아, 갑자기 태공망님이 보고싶어지는건 왜일까요. 껄껄


주7- 하늘의 뜻: ‘천명’이라고도 합니다. 그 천명을 통해 중국의 왕조는 끊임없이 변화해왔지요. 이제 하늘의 뜻이 저네들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다! 라는 식입니다. 중국 왕조들의 기반이 되기도하고 무너트리는 단초가 되기도 하는데,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트릴 “이제 하늘의 뜻이 이렇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주8. 봉건제: 세계 처음으로 창설된 봉건제지만, 그 특성은 유럽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유럽의 봉건제는 똑 같은 녀석들끼리 끼리끼리 모여 나라를 구성하고 왕을 떠받드는 체제지만, 중국의 봉건제는 왕이 자기가 마음에 드는 신하들에게 분봉하고 그들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조금 더 왕권이 강한 그런 봉건제였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저보다는 이중톈의 ‘중국을 말하다’라는 책에 더 잘 나와있는듯 하니 부연 설명은 나중에 나올 Scene으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1:16 

 

상병 이지훈 
  석재// 

개인적인 요청을 서론에까지 추가해주셔셔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감히 또 댓글로 답글을 끄적끄적 거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 싶군요. 조만간 저 또한 글로 찾아뵐게요. 

참고문헌을 옆에 끼지 않고서 이 정도 지식의 양을 뿜어내시는 거라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군요. 고마워요. 잘 읽고 있습니다. 2009-01-06
03:48:44
  

 

일병 한강수 
  오! 
이런 칼럼을 기다려 왔습니다. 

세계사를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친절한 선생님을 만난 모양으로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즐거운 글 부탁드립니다. 2009-01-06
10:33:56
  

 

병장 이동석 
  역시 성실한 석재씨- 
앞으로 더욱 기대기대하겠습니다. 2009-01-06
15:15:25
  

 

병장 김민규 
  오호, 좋아요. 글은 차근차근 냠냠 먹어 보겠습니다. 
석재님의 버닝만큼이나 더 분발해야 할 이유가 생겼군요. 이거 참 큰일인데- 2009-01-06
16:14:09
  

 

상병 김예찬 
  History, 하니까 생각나는건데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저희 아버지는 History를 "He + Story", 그러니까 유일한 '그'인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해석하시더군요. 2009-01-06
18:23:17
  

 

병장 이우중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모헨조다로'인가요. 중학교 때 시험 문제로 나왔던 것 같은데, 답이 두 개였어요. '모헨조다로'와 뭐 세글자짜리였는데 기억은 안나네요. 허허. 
이거 뭐 기대를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예찬님/ history = he+story, 혹은 his+story란 말은 교회 오랫동안 다니다 보면 한두번씩은 설교 시간에 꼭 듣게 되는 말 같아요. 허허. 2009-01-07
14:32:11
  

 

병장 이동석 
  푸하하, 신학대학 교수들의 레퍼토리이기도 하죠. (비웃는건 아닙니다) 단지 신학대를 다니는 친구에게 뭘 배우는지 물었을때, 씨-익 웃으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궁을 두번 가는 운명임에도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지 않더랍니다. (군종병으로 한번, 군종장교로 한번-이라니) 2009-01-07
14:50:52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껄껄, 답글, 기대하겠습니다. 
일병 한강수/ 감사합니다. 접근에 도움이 된다면 대환영이지요. 
병장 이동석/ ...사실 어느샌가 보면 성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시게 될겁니다. 아니 그런데 궁을 두번 입궁하다니... 암울합니다. 허허 
병장 김민규/ 소화가 잘되도록 냠냠. 그런거 큰일이라고 보면 안되요. 
상병 김예찬/ 아...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군요. 몰랐던 사실인데. 
병장 이우중/ 사실 '모헨조다로' 라는 뜻은 죽음의 도시, 뭐 이런 뜻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의 흔적은 없다시피 하고 오직 유물만 남아서 그렇게 붙었다고 합니다 2009-01-07
18:31:35
  

 

상병 황동경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란 게임이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요? 
초창기만해도 문명별로 선택해 플레이가 가능했었는데.. 
전역후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나 다시 해볼생각이 드네요. 2009-01-16
00:02:51
  

 

일병 김유현 
  His+story는 사실 좀 개그에 가깝죠. 

영어사전을 잠시 참조해보면, History는 1차적으로 라틴어에서 왔고. 원래는 그리스어의 historia ( histor 알기 + -ia = 과거를 앎으로써 배우기)를 어원으로 둔다고 하는군요.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Historiai로 되어있어요. STORY와 같은 어원을 가진 별형(doublet: 말하자면 쌍둥이)이기도 하니까 아마도 한쪽은 원형이 살아있는 형태로 영어에 들어왔고, 나머지 한쪽은 h가 탈락되면서(아마도 스페인어쪽을 통해) istoria로 발음되다가 story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을테지만 정확하지는 않군요. 본론은 밥 먹고 와서 읽어야겠어요. 


 [칼럼] H.I.S - Scene Two:사막의 모래바람  
상병 이석재   2009-01-07 11:47:28, 조회: 201, 추천:1 

Scene Two


자, 두번째 장면은 예고한대로[…조커가 된것인가!!] 고대 중동지역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람세스’라는 책을 읽어보셨다면, 고대 중동이 얼마나 흥미로운 지역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의 역사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고, 후에 점차 서쪽으로 역사의 중심이 넘어가기 시작했지만(주1) 세계 최초의 문자에서부터 청동기, 철기문화의 발전까지, 지금이야 조금 퇴색하긴 했지만 화려한 문화를 발전시킨 것이지요.




맨 처음에 중동의 헤게모니를 차지한 국가는 ‘수메르’인들이였습니다. 수메르는 ‘길가메시 서사시’로도 유명합니다. 길가메시라는 유명한 왕이 자신의 주위를 정벌해 나가면서 벌이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입니다.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전했고, 이른바 ‘라가시 왕국’, ‘우르 왕국’ 등을 건설했지만 주위에서 발전하고 있던 다른 왕조들에 의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수메르 인들은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속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수메르인들이 한창 흥망성쇠를 이룩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이집트인들이 ‘고’ 이집트 왕조를 일으키고 한창 발전해가던 중이였습니다. 물론 수메르인들은 세계최초의 문자도 만들어냈습니다. ‘쐐기 문자’라고 불리우는, 간편한 문자였지요.



두번째 중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나라는 바빌로니아 왕국이였습니다. 바빌로니아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알다시피 함무라비 왕이였습니다. 법전을 공포하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유명한 명언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주2). 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고대’바빌로니아 왕국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나올 ‘신’바빌로니아 하고는 기간이 다릅니다. 이때 이집트는 힉소스족(저번 장면1에서 설명드렸었습니다)에 의해 한번 뒤집히고 난 후 중 이집트 왕조가 발전중에 있었습니다. 이집트를 고, 중, 신 이집트로 나누는 이유는 그 각 중간의 사이동안에 힉소스인의 침입처럼,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집트의 왕조는 18, 19왕조처럼 숫자가 많았는데, 이런건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역시 패스.




바빌로니아 왕국이 점차 쇠퇴한 이후, 중동은 난세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무협이냐구요? 절대로 아닙니다. 북쪽에서는 히타이트족이 철기문명을 가지고 남하하기 시작했고, 남쪽에서는 람세스가 이끄는 이집트왕조가 시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으며(주3) 미탄니 왕국은 중부에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동쪽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가 이끄는 바빌로니아 왕국이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은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이런 왕국들 사이에 페니키아(주4), 유대(주5-1) 민족등이 중동에서 역시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



그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다름아닌 ‘앗시리아’입니다. 수메르, 바빌로니아인들이 중동을 통일을 못한 반면 앗시리아는 바빌로니아서부터 서쪽의 유대인들까지 중동 전체를 장악하고 철권통치를 시작했지요.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하죠. 그들은 다른 나라의 문화는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앗시리아인들에 의한 통치를 시작했지요. 마치 중국의 ‘원’왕조와 비슷했습니다. 그러다가보니 다른 민족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바빌로니아 왕국과 메디아 왕국등이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앗시리아가 4개의 왕국으로 분열 된 뒤, 이 왕국을 다시 통일한 중동의 왕국은 다름아닌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지역에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 이란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이란을 ‘페르시아’라고 불렀기도 했습니다. 건국한 뒤로 서진하면서 계속적으로 정벌을 시작한 그들은 결국 아나톨리아, 그리스를 넘어 유럽의 도나우강에 있던 스키타이 인들까지 정벌할 정도로 세계초강대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에서 수도까지 이르는 ‘왕의 길’을 건설하여, 페르시아 왕이 순찰을 쉽게 하고 수도에서 먼 지역에 있는 총독들을 잘 감시하기 위해서 만든 도로이지요. 




페르시아는 후에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벌되는 운명을 맞게 되지만 후에 페르시아가 다시 부활하여(주5) 서쪽에 있는 동로마제국과 계속 티격태격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 이슬람제국이 성장하면서 페르시아 또한 이슬람 제국에 편입되게 됩니다. 그 뒤로 페르시아 민족주의는 계속 발흥하게 됩니다.



중동의 역사를 이렇게 써내려갔지만, 사실 이집트가 좀 소외되었다. 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집트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히타이트와 싸우기도 했지만 정작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집트가 잘나서라기보다는 지정학적 위치가 좋았으니까요. 방어하기 쉬운데다가 이집트 인 자체가 누구에게 복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편입니다.(주6) 물론 이집트 또한 상, 하이집트로 나누어 지금의 수단에 위치해있던 ‘상’이집트와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하’ 이집트 로 분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로 이집트의 주권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두 이집트는 상 이집트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후에 로마에 이해 복속될 때까지 이집트는 존속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동의 왕국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고대의 문자, 수로, 도시 문화등을 발전시켰으며 이런 문화는 지중해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서쪽에 ‘중동’과는 다른 문화를 가진 그리스 문명과의 결전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들의 유럽세계(해가 지는 쪽, 이라 해서 옥시덴탈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동쪽은 해가 뜨는 쪽 이라 해서 오리엔탈. 이라고 하지요)에 영향을 미친 것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중동에서 처음 시작된 ‘전제군주정’은 후에 후기 로마제국의 정치체제로 변하게 되고, 결국 중세시대에 군주에 의한 ‘군주정’이 시작되는 단초가 마련되기도 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문자는 유럽세계에 끊임없이 전파되어 그들의 의사소통을 또한 편리하게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사막의 모래바람말고는 생각나는게 없지만요.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고대 중동에 남아있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지만 말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잠시 동쪽으로 눈을 돌려 고대 중국의 역사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p.s 1: 사실 오리엔탈, 이라는 더욱더 이해하기 쉬운 단어들이 있지만, 오리엔탈이라고 표기하게 되면 왠지 과거의 느낌으로, 더욱 유리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현재의 명칭인 ‘중동’으로 표기했습니다. 물론 이 중동이라는 표기 또한 서유럽에 편중된 단어선택이긴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원어인 ‘오리엔탈’을 쓰는걸 별로 안좋아해서 말이죠.


주1-서쪽으로 역사의 중심이 넘어가기 시작하다: 잘 생각해보시면, 처음에 문명을 꽃핀 지역은 중동지였이였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와 로마, 서유럽이 전성기를 맞다가 지금은 바다를 건너 미국의 전성기가 유지되고 있지요. 잘 보시면 점차 지구의 서쪽으로 전성기가 넘어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다음의 전성기는 우리나라다! 라고 얘기는 하고 있지만…믿거나 말거나.



주2- 함무라비 법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처럼 이 법전은 대체로 등가교환의 법칙-예? 이거 많이 들어보셨다구요? 넘어가도록 합시다-에 의한 것들이 많습니다. 고대시대에 법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제 경제체제가 확실하게 잡히고, 여유생산물이 누군가의 소유로 확립되었고, 그 소유가 존중되기 시작하였다(사유제. 라고 하지요). 라는 의식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3-이집트vs히타이트: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시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 싸웠습니다. 한때는 히타이트가 밀리기도 했고, 한때는 이집트가 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전쟁으로 점차 피폐해지는 사이 다른쪽에서는 앗시리아가 점차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주4- 페니키아: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는 알파벳을 발명한 민족입니다. 어느 왕국을 구성했다기 보다는 해양민족으로서 지중해 곳곳에 페니키아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해양민족이다보니 상공업에 종사하게 되고, 그러다가보니 의사소통이 편한 알파벳을 개발하고, 무역이 편한 곳에 도시를 건설하게 된 것이지요. 이들이 건설한 유명한 도시중 하나가 카르타고입니다 .카르타고는… 또 언젠가 나올 내용이겠지요?



주5- ‘사산조’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같은 고대의 페르시아를 아케메네스가 건국했다 해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후기에 파르티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페르시아를 정복한 나라를 ‘사산조’ 페르시아라고 일컫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본받아 계속적인 확장정책을 펼쳤고, 이는 비잔틴제국과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주5-1 유대:성경을 자주 읽으시는 분을 위해 첨부하자면, 유대왕국은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발전하지만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북부에 위치한 이스라엘 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유대왕국은 그보다 좀 더 후에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서 멸망하는데,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건을 ‘바빌론 유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 나오는 사람이 바로 ‘느부갓네살, 네부카드네자르 2세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은 아니라서… 



주6- 복속: 그렇다고는 하지만, ‘파라오’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그 파라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습니다 .힉소스인들이 파라오를 맡은지 약 2세기 동안도, 이집트인들은 그 힉소스인들을 충분히 물러나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나중에 파라오는 그리스인으로, 로마인으로 바뀌어 나갔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1:26 

 

일병 한강수 
  기다리던 칼럼이었습니다. 

지구본을 옆에 놓고 읽고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여건상 그러지는 못하고 
열심히 머리로 세계지도를 그려가며 읽고있습니다. 

람세스도 나중에 봐야 겠군요. 2009-01-07
14:11:39
  

 

병장 이동석 
  음, 유대-에 대해서는 추신 2에서 설명하는것 같으신데, "유대(주5)"로 묶여있네요. 
이렇게 오타를 찝어낼만큼 석재님의 칼럼을 쪽쪽 빨아먹으며 읽고 있습니다. 

정말 재밌군요. 흐흐. 

다만, 그 역사의 중심이 서진-한다는 말은 그냥 딱 서구적인 시각에서의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동의 문명이 꽃피우고 그리스 문명이 번영할때 인도든 중국이든 각기 문화권 역사의 중심이 있었고, 못지않은 역사의 발전을 이룩했다는걸 무시한 처사-죠. 게다가 단순히 영향권이었던 영토의 넓이나 영향력을 행사한 인구수나 파급효과 같은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리고 역사의 중심-이라는게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오히려 중국이 역사의 중심이었던 시대가 있었겠지요. 

좀 멀리 가서 아메리카 대륙의 잉카, 마야 문명 같은 여타 대륙과 동떨어진 위치와 중간에 침략에 의해 절멸된 연율로 현대 인류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예 논외-로 치는 문명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역사학이란 결국 서구의 학문이며, (물론 근대적 학문 분류가 그쪽에서 기인하기야 합니다만) 시각도 서구중심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를테면, 오리엔탈-이라거나 중동-같은 단어처럼 말이지요. 저도 역사를 좋아하는 학생(?)으로서 아쉬운 소회를 그냥 끄적여보았습니다. 2009-01-07
15:57:37
  

 

병장 이동석 
  아 물론, 석재님이 그 표현을 사용하신건 일종의 농담이거나 단순히 인용-분위기 환기를 위한-이란것쯤은 압니다. 2009-01-07
15:59:09
  

 

상병 이석재 
  일병 한강수/ 이거 지도도 나중에 첨부해야겠는데요. 허허허 

병장 이동석/ 앗, 그부분에 대해서는 수정하도록 하지요. 칼럼이라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는데 그런 오류가 있을줄이야. 

그리고, 역시 '오리엔탈', '중동' 이라는 뜻이 서구적인 용어라는데에는 동의합니다. 근대 이후에 벌어진 '서세동점(서쪽의 세력이 동쪽을 점령하다)'서부터 비롯된 단어지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아쉽습니다만, 이제와서 -중서- 라고 부르는것보다는, 서아시아, 서남아시아 라고 부르는게 더 좋겠지요. 2009-01-07
18:34:04
  

 

병장 이동석 
  아, 전 그냥 그 지역을 부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내야할것 같아요. 중서-라는건 역시나 자기중심적이라는 혐의를 벗지 못하니까요. 사실 서남아시아-라는 표현은 아시아대륙 전체를 기준으로 설정한 용어라 그럭저럭 편의를 위해-라는 참작이라도 되지만. 

[칼럼] H.I.S - Scene Three: Chin, Chin, China..Not Genghis Khan!  
상병 이석재   2009-01-09 00:33:20, 조회: 284, 추천:0 

Scene Three ? 

세번째 칼럼의 무대는, 고대의 중국입니다. 뭐 물론 그때사정으로서 ‘중국’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애매하긴 하지만(주1) 역시 저번에 얘기했던 ‘중동’, ‘오리엔탈’ 이라는 이름처럼 다른 단어를 대체해서 쓰기도 애매하니 그냥 ‘중국’으로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문명은 토기로 구별하는데, 먼저 중국의 황하 문명에는 ‘채색도기’라고 하는 토기가 발전해 가기 시작하다가. 양사오 지역에서 발견된 칠흙색 토기와, 중국 룽산지역에서 발견된 흑색 토기로 인해 ‘양사오 문화’ , ‘룽산 문화’라고 하는 것이 발전해 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때 중국의 황허강 지역에서는 쌀농사가 안되었고 인도, 베트남지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쌀농사가 아직 중국 남부 운남지역에서만 퍼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중국의 황허유역에서는 쌀농사가 불가능했고, 더욱이 황허 유역은 강의 범람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거주자들은 황허 본류보다는 지류 근처에서 살면서 도시를 세우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지요. 쌀농사가 불가능할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조, 기장등을 심었는데 중국 황허문명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가 퍼지고 있을 때는 전체 역사에서 봤을 때 신석기 시대(주2)에 불과합니다. 토기잖아요 토기.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제 중국에는 어엿한 왕조, 은나라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은나라는, 이른바 ‘갑골문자’로 유명합니다. 갑골문자는 거북이의 등껍질을 따서 그 곳에 불을 붙이고, 거기서 나오는 형태를 보며 점을 치는 형태인데요. 이 갑골문자에서부터 중국의 문자인 ‘한자’가 나왔다고들 합니다. 수도는 ‘은허’인데 이 은허의 발굴도 우리나라 ‘무령왕릉’처럼 ‘어쩌다가보니’ 발견했다고 하더군요(주3)


하지만, 저번편에서도 얘기했다시피 은나라는 순장풍습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라가 지증왕 시대에 와서야 전체적으로 폐지된 풍습이기도 하지요. 은나라 자체는 도시국가가 연합한 연합체였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왕조국가’로서는 좀 모자른 나라였지요. 그러다가보니 중앙정부가 도시국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도 했고, 순장풍습을 수도에 살던 사람들만으로 할 수는 없다보니 다른 도시국가들의 사람들을 끌어다가 순장시켜야 했기도 했고, 그래서 불만이 점차 쌓여나가기 시작한거죠.


그래서 은나라 마지막 왕인 탕왕때, 은나라 주변의 도시국가중 가장 세력이 큰 주나라가 은나라를 뒤집어 엎게 됩니다. 은과 주가 싸울 시기만 해도 주가 은 영토의 2/3를 차지한 상태였을 정도라고 하니 이미 대세는 넘어간 상황이였지요. 물론 태공망이 조그마한 막대기 하나 가지고 바람을 불어서 뭐 달기를 휘어잡고 뭐 이런스토리까지는 아닙니다만은… 이 탕왕에게서 나온 유명한 고사성어가 ‘주지육림’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세운다. 라고 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얘기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활을 했으니 문제가 瑛습 당연지사.


은이 주로 바뀌기 시작할 때, 중국 왕조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명’이란 단어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역시 저번편에서 약간 설명했는데요.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를 통해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지요. 은나라를 멸망시킨건 주나라의 욕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나라에게 시킨것이다! 라고 애둘러서 말한겁니다. 그러다보니 주나라는 정당성을 얻게 되고, 왕또한 하늘이 중국을 통치하라고 했다.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나라때부터 청동기 문화가 더욱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 농사기구들은 청동기로 만들지 못했는데, 청동기로 농사기구들을 만들면 쉽게 부러졌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농사기구들이 철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려면 춘추전국때까지는 기다려야만 했고, 농사기구들은 주나라때까지만 해도 나무로 만들던 시기였기 때문에 생산성 면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늘어나는 쪽은 아니였습니다. 은, 주시기에 청동기는 대체로 제사때에 자주 쓰이는 물품이 된 것이지요.


주나라때부터 중국의 통치제도 중 하나인 ‘봉건제’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은나라 자체가 도시국가로 시작했고, 주나라도 비슷한 체제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중앙집권보다 분권적인 성향이 강했고, 그런 분권적인 도시국가들을 잡아두기 위해 뭐 통치는 지네들이 하지만 그 권리는 우리가 줬다. 라는 식의 봉건제를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주4) 왕이 천하에게서 통치권을 받았고, 그 통치권을 주위 제후들에게 임시적으로 분배해준다. 라는 것입니다.


주나라의 역사는 서주시대와 동주시대로 나눕니다. 서주시대와 동주시대의 중간지점은 바로 이민족의 침략인데요. 이때부터 중국에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민족이 끌어온 이유는 집안싸움이였지만, 어쩌다가 보니 주나라 수도가 함락당하고 수도를 이전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서주시대에는 그나마 주나라가 주인이라는 권위가 살아있어서 제후들이 그럭저럭 따르기는 했지만 이민족에게 수도가 점령당하고 다른 제후들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된 동주시대는 얘기가 달라져서 이때부터 춘추시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주는 그렇게 서쪽에서 쳐들어온 이민족마저도 봉분(땅을 내주고 그 땅의 제후로 삼는 것을 ㈈募求)해줬는데, 그렇게 서쪽에 눌러앉은 세력이 진(秦)이 되어 나중에 중국 전토를 통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번 중국의 역사편은 약간 짧았습니다. 원래는 이 상태에서 춘추전국시대를 넘어 진나라까지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다른 쪽과 매치가 잘 안되니까요. 다음 시간에는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 서양 문명의 태동을 다룬 다음, 그리스-로마의 발전기를 다룬 다음에 춘추전국쪽으로 넘어오도록 하겠습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 기타지역에 대한 역사도 같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양이 적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하하



주1-중국: 중국이라는 단어를 쓰게된 때는 한나라때부터라고 합니다. 한나라 때부터 주위 국가들을 복속하고, 조공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기 나라가 최고. 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중국’이라는 나라가 황허유역 정도에서 놀던 때기 때문에, 중국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애매하다고 한 것입니다.


주2-신석기시대: 사실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 이렇게 셋으로 나눕니다만은, 중석기를 없애는 경우가 대세임으로 구석기, 신석기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신석기는 대체로 신화적인 부분이 많은데 이른바 ‘치우천황’, ‘황제’ 서부터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요-순시대까지를 중국의 신석기시대라고 합니다. 의외로 좀 된 내용인거 같은데 실제는 꽤 오래된 신화역사이지요. 원래 중국의 역사는 요-순이 있는 상나라를 중국의 시작으로 보지만, 은나라는 은허가 발굴되어 그 실재가 나타난데에 반해 상나라의 물건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학술적으로는 은나라를 중국의 시작으로 봅니다. 


주3-무령왕릉: 어떻게 발견楹캇맙? 하수도 공사하다가.


주4-봉건제: 서양의 봉건제는 말 그대로 협약이였습니다. 우리는 병사를 제공할 테니 왕은 우리가 위험하면 보호해주시오. 라는 상호계약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나 제후 둘 중 하나가 그 약속을 어길경우, 다른 상대방한테도 파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애초부터 저쪽이 약속을 안지킨 셈이니까요. 하지만 중국의 봉건제는 약속이 아닌 명령이였습니다. 자치정도는 허용해 줄 테니까 내 말은 들어야 한다라는게 중국의 봉건제였지요. 그래서 서양의 반란은 쉽게 쉽게 뜻 맞는 제후들끼리 퍼져나간 반면 동양의 반란은 거의 원맨쇼로 진행된게 많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1:35 

 

일병 한강수 
  오늘도 즐거운 세계사 시간이었습니다. 후후. 

달기가 은나라 말기라는 것이 이제 정리되는군요. 
춘추의 시대적 상황도 이제 알겠고요. 

감사합니다. 2009-01-09
10:13:37
  

 

상병 이석재 
  ...저기있는 책마을의 댓글은 뭘까요.냐하 2009-01-09
11:41:17
  

 

상병 이지훈 
  '중석기를 없애는 경우가 대세임으로' 에 대하여 

더 구체적인 설명부탁드려도 될까요? 2009-01-09
12:13:51
  

 

병장 이우중 
  저도 중석기 관련 문의드리려고 내려왔는데. 헤헤헤. 2009-01-09
17:58:58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병장 이우중/ 중석기 시대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과도기적 기간입니다. 구석기떼 열심히 돌과 돌을 서로 마주쳐 깨트리는 '뗀석기'를 썼고, 신석기때는 돌과 돌의 마찰을 이용해서 열심히 갈아댄 '간석기'가 주요한 물품이였습니다. 또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부지역에서는 쌀농사가 시작되었고 농경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조, 기장등을 재배하여 터를 닦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석기시대는 일부지역에서, 그것도 구석기의 도구들보다 약간 발전된 형태로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도기적이고, 그것도 신석기 시대에 포함해서 계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석기 시대를 없애고 구석기와 신석기, 두개의 시대로만 나누어서 계산하고는 합니다. 2009-01-09
19:26:07
  

 

병장 이동석 
  그러게요. 뭐죠? 2009-01-09
20:02:27
  

 

병장 이동석 
  아, 기억났어요. 아침에 다 읽고나서 댓글을 다려는데 갑자기 일이 생긴거죠. 
그리고 잘 읽었습니다. 역시 재밌어요. 허허. 2009-01-09
21:09:07
  

 

병장 이동석 
  은허-를 발견하는 과정의 일화인데, 얼마만큼 사실이고 얼마만큼 과장인지는 확인한바 없습니다. (무...무책임하다-) 

한약방 중에 유독 영험하다고 소문난 집이 있었답니다. (은허의 위치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군요. 암튼 황하문명이니 화북인근이나 되려나요. 역시 무책임하다) 그 약방주인을 왕서방-이라고 하죠. 암튼 경쟁 약방 주인-장씨라고 해두죠-이 왕서방의 비법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꼬치꼬치 캐묻거나, 약재를 훔쳐보거나 하는둥의 이것 저것 해보는데도 도무지 왕서방만의 특별한 비법을 찾을길이 없더랍니다. 결국엔 왕서방 약방 근처에서 잠복하는 장씨- 밤마다 왕서방이 어디론가 행하는 걸 알게됩니다. 

왕서방이 밤이슬을 맞는 이유는 바람이 나서도, 마작에 미쳐서도 아니었고 고을 인근에서 땅을 파기위해서였습니다. 왕서방은 땅을 파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손에 움켜쥐고는 달빛에 비쳐보며 씨익-웃더랍니다. 장씨는 왕서방이 무덤이라도 파헤치는건가, 야밤에 무덤을 파고 웃는다니- 그러나 그 섬뜩함도 궁금증은 이기지 못했지요. 장씨가 왕서방을 덮치고 보니 왕서방이 들고 있던건 무슨 뼛조각도 아니고 나무토막도 아닌 기이한 조각이었습니다. 그 뒤로 왕서방은 항정신성약물취급법 위반에 약사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뤘고, 장씨는 그 조각들을 모으러 길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었답니다. (뭐여 이건) 

그 조각이 갑골문자가 새겨진, 거북이 등껍질이었다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되겠습니다. 2009-01-09
21:22:05
  

 

상병 이석재 
  아, 그 갑골문자가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본 바가 있군요. 사실이라고 한답니다 [수근수근수근] 2009-01-09
21:44:03
  

 

상병 이지훈 
  석재// 

'중석기에 대하여'가 아니라, '중석기를 빼는 것이 대세'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 것이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구석기, 신석기로 크게 나누는데, 중석기를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많고 중석기를 또 유물에 따라 전기, 후기로 나누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흔하지는 않지만... 
석재님께서 중석기를 제외하신 것이 본문상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중석기 제외에 대한 다른 생각이 있으셨는지 궁금했던 거랄까요? 주석이라면 이러한 내용이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오해를 살만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나저나 석재님한테는 마구 질문만 하는 느낌이네요. 재밌게 보고 있는 독자와의 소통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석// 

오오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항정신성약물취급법이라니 흐흐흐 거기에 제조법이 써있던 걸까요? 흐 2009-01-10
07:15:25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본문상의 편의.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좋겠군요. 사실 신석기-중석기-구석기를 따로따로 설명하면 좋겠지만 그러자니 시간이 오래걸리고, 제가 또 선사시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말이죠. 2009-01-10
21:21:29
  

 

병장 이동석 
  음, 그냥 재미로 쓰다보니 정작 중요한 내용은 왜곡이로군요. 왕서방은 그 거북이 등껍질을 약재-로 썼답니다. 그 등껍질이 비법이라는걸 알게된 다른 사람들도 너도 나도 그 등껍질을 찾아 땅을 파헤쳤고, 그러다 그 곳이 유명해지게 된것이죠. 그 등껍질에 새겨진것이 문자-라는걸 안 그 지역 학자가 저명한 역사학자에게 (역사학자인지는 불확실) 알림으로써 은허-는 발견되게 되었답니다. 2009-01-11
16:26:35
  

 

상병 이지훈 
  동석// 

오호 그렇군요. 그나저나 왕서방은 왜 이리 많죠? 여기 저기 흐흐 2009-01-12
08:45:18
  

 

병장 홍석기 
  은나라 부분에서....은나라 마지막 왕은 탕왕이 아니라 주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탕왕은 은나라의 시조로, 그렇기에 '성탕' 이라고도 불리죠.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은 체격도 무쟈게 크고, 머리까지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비범한 인간이었다고 하더군요. 2009-01-14
09:38:42
  

 

상병 이석재 
  병장 홍석기/ 아앗, 이런 최대의 문제점이. 이거 크군요... 수정하겠습니다. 머리까지 기가 막히게 돌아가긴 했지만 결국 나라를 멸망시키는데에 일조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군요. 


 [칼럼] H.I.S - Scene Four: 희망과 소망속에서  
상병 이석재   2009-01-11 09:58:15, 조회: 180, 추천:0 

Scene Four 

이번 네번째 세계사 시간은. 이른바 ‘헬레니즘’시대와 로마 건국 초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물론 2개를 엮어버리면 양은 무지하게 늘어나겠지만 말이죠.


일단.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점차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체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보셨을겁니다. 물론 지중해 전역에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남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이 있었지만 그들은 말이 식민도시였지. 실제로는 자기네들끼리 먹고 사는 자치권을 가진 도시였고. 본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수수방관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무주공산인 그리스 세계에, 마케도니아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마케도니아는 남진하여 그리스 연합체를 굴복시킨후 자신에게 복속시키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아테네나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스파르타는 모두 일단 ‘그리스’인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서 내려온 이민족을 싫어했지만 전쟁에서 졌으니 어쩔 수 있나요. 그런 틈을 타 마케도니아는 간크게 페르시아를 공략할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먼저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알렉산더가 그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주1)에 그 정벌준비는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지요.


하여튼, 그들은 그리스인들을 이끌고 머나먼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합니다. 물론 페르시아와의 병력 비율에서는 그리스인들이 한참 쳐졌지만, 그들은 ‘방진’이라는 전략적인 우세 상황을 점하고 있었습니다(주2)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먼저 우두머리를 노리는 전략적인 선택과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통한 우회기동을 통해 페르시아군을 적절히 쌈싸먹었고 어느새엔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페폴리스마저도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결국 자신의 부하에 의해서 죽어버렸고, 알렉산더는 계속 동진하여 이란, 파키스탄, 인도마저 정복하여 진정한 ‘세계대제국’을 이룩하게 됩니다. 그 제국에서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만의 나라가 아닌, 전 아시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결합하여 완벽한 나라를 만들어내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아시아인들에 비해 우위라는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과 아시아인들을 서로 결합시키려는 알렉산더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지요.(주3)


알렉산더가 더욱 오래 살았다면 세계는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알렉산더 본인 자신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해버리고(그리스인들은 신과 인간은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점차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죽자 그 휘하의 장수들은 알렉산더의 아들은 무시한채 그 유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결국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시리아, 이집트의 4개 국가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 4개국은 서로 사이가 무지 안좋았기 때문에,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는 서로 싸우지못해 안달이여서 서로가 서로의 배후국을 지원하기도 했고, 서로 공격하기도 했죠. 결국 이 두나라는 서로 싸우다가 힘을 소진하여 로마가 동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여튼 이 헬레니즘 국가들은 사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서로 합쳐지려는 것을 거부하긴 했지만 그리스와 아시아에 걸친 양대 제국을 제일 먼저 창설했다는 점에서, 지금 세계에도 이루어내기 힘든 양 민족간의 융합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가장 인상깊은 문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리스가 새로운 문화를 양산해가고 있을 무렵.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로마세력이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신화상으로는 로마의 건국세력은 트로이 전쟁에서 도망쳐 나온 유민들이 흘러흘러 로마에 정착하였다. 라는 얘기가 있지만, 그거 말고는 ‘늑대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로마를 건국했다’(주4)뭐 이런걸 믿는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로마는 제일 처음 왕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발전하기 가장 쉬운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중앙집권체제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장점과 같이 단점도 더 많이 수반되는 정치형태입니다만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앙집권과 독재가 필요한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게 왕정으로 성장했지만, 시민들의 민권의식 또한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시절에 그런 민권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로마인들은 다르긴 달랐나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왕정을 타파하여 공화정체를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왕정은 타파했음에도 귀족세력과 평민세력간의 다툼은 여전했고, 평민세력은 계속적인 시위와 반란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길 요구했습니다. 결국 여러법들로 인해 그들의 민권은 신장되었고, 나중에는 ‘호민관’이란 직책을 통해 귀족들의 입법체제에 끼어들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게 됩니다. 그 뒤로는 결국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은 동일하다라는 것까지 받아냄으로서 ‘명목상’으로는 평등을 이루어 냅니다(주5).


그렇게 내부적으로 굳건하게 다져진 로마는, 자신의 한때 주인이였고 주위의 강력한 국가였던 에리트레아까지 정복하고, 점차 남진하여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라틴족’이라고 불리웠던 여러 종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편입시키기 시작합니다. ‘정복’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이때 로마인들은 주위국가들을 ‘자치적인 도시’로 구성했던 것이지요. 로마에 반항하지 않는 이상에야 도시 각자가 자신들의 정치를 해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치적인 문제가 로마의 세력이 점차 늘어나게 되자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고(주6) 결국 로마는 공화정체제를 계속 지켜야 하는 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로마는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 냈습니다. 물론 아직 ‘라틴족’이라는 전체적인 틀 아래 로마인, 그리스인, 기타 다른 민족들이 공존하는 연합구성체 정도의 국가였지만 이탈리아에 통일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주위국가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이였던 것이지요. 역사를 더듬어보면 한 국가가 주위에 다른 국가가 들어서는 것 만큼은 철저하게 반대하고는 했습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가 그렇지요. 특히 로마가 강력해지는걸 원치 않았던 국가는 페니키아인들의 나라인 카르타고와, 동쪽 마케도니아 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견제의 결과물은 ‘포에니 전쟁’으로서,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국운을 건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포에니 전쟁에 대한 부분은 다음시간에.. 우훗훗



주1-암살: 사실,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를 싫어하여 암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역시 옛날일이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방도가 없군요.


주2-방진: 고슴도치 전법이라고, 편하게 부르기도 합니다. 10X10정도의 인원들이 선다음, 맨 앞줄서부터 뒷줄까지 창을 세워가는 겁니다. 그런 상황으로 돌진! 보병이 기병에게 약하다는 기본적인 전략도 무시하고, 강력한 돌진력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은 우회기동 등 기동력이 약하고 측면공격을 당하면 완전히 망하는 진입니다.


주3-결합: 이 결합이라는 문제는 아시아인과 그리스인들간의 결혼으로 시작營윱求. 알렉산더 자신도 아시아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던 것이지요. 나중에 인도지역에서는 ‘그리스’적인 색체, 즉 신체의 완벽한 묘사를 이용한 불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가 결합된 것이지요. 이런 것을 ‘헬레니즘’ 문화라고 합니다.


주4-늑대: 로마의 건국시조인 로물루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라는 신화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그래서 로마시의 상징은 2명의 아이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그림입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AS로마라는 팀도 아실텐데, 그 팀의 상징에도 역시 늑대젖을 먹고 있는 아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렇듯 각 도시들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있는데, 이것들에 대해서 나중에 한번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주5-명목상: 하지만, 아직 로마에 노예제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고 노예들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에 명목상이라고 표기했습니다. 평등적인 국가가 등장하려면 근대가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긴 안타깝습니다만 그러면서 인류가 발전해나가는 초석을 다지는 것이겠지요.


주6-위험성: 특히, 그리스인들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 휘하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알렉산더시절에도 끊임없이 반마케도니아편에 서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로마의 시대에도 그런 성질이 이어졌는데. 결국 반란이 일어나자 로마는 그때까지 지키던 ‘자치권 부여’라는 여유를 버리고 반란이 일어난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 더 이상의 여유는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1:45 

 

상병 이지훈 
  로마인 이야기를 3권까지 봤는데 그 내용도 어느정도 포함되는군요.(언젠간 전 권을 다 보고 싶은데 말이죠) 로마의 역사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참 흥미롭더군요 허허 석재님 덕분에 머리속에서 찬찬히 잘 정리된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 나올 포에니 전쟁 부분도 기대되요 

방진이라...재밌군요. 이것이 나중에 로마 중보병 전술의 시초가 되는 걸까요? 2009-01-12
09:00:50
  

 

일병 한강수 
  부지런히 써 주시는 덕분에 
계속 해서 열렬히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쓰시기 힘드실텐데 
감사합니다. 2009-01-12
09:31:42
  

 

병장 이동석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에 나온 망치와 모루 전략이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군이 썼던 그 방법 아닌가요? 
가물가물 가물치라, 급 질문. 
마케도니아 기병대로 망치질해서 방진의 보병대로 몰아부치는 전략- 

따지고 보면 거창하게 민권이니 자치니-까지는 아니겠지만, 오히려 역사시대 초반으로 갈수록, 오히려 그 이전으로 갈때 더 평등했다가 역사가 진행되오며 점점 불평등해지는 과정을 거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한 사료는 없겠지만, 어째서 동양과 서양의 역사진행양태가 달랐는지는 궁금하기 그지없군요. 무슨 차이일까요. (아 체온이 떨어진다.) 2009-01-12
13:43:09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렇습니다. 로마의 방진 체제는 그리스의 그것을 따왔는데요. 로마는 더욱 발전시켜 방진에 들어가는 병사의 숫자를 줄여서 더욱 기동성이 원활하도록 설정하였습니다. 100명보다 50명이 왔다갔다 하는게 더욱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일병 한강수/ 봐주시는 분이 있으니 이렇게 자주 쓰고 있습니다. 허허 

병장 이동석/ 그렇습니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군이 망치와 모루 전략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보병대를 모루로, 경기병대를 망치로 삼아 후드린것이지요. 나중에 이 망치와 모루 전략의 완성본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나중에 Scene 50쯤 가야 등장하실 분이지요. 낄낄 2009-01-12
13:58:51
  

 

상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역사 진행양태라, 글쎄요. 인간이란 존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의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인류의 발전을 한 인간의 조그마한 뇌로 모두다 성찰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동하기 힘든 중앙의 양쪽에서 서로 지들끼리 좋다고 발전한게 지금처럼까지 흘러온게 아닐까요.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쩝쩝. 2009-01-12
22:23:27
  

 

상병 이지훈 
  동석, 석재// 

동석님과 석재님이 생각하시는 동서양 역사진행양태의 차이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는 어떤 것인가요? 선뜻 떠오르지 않아서요. 2009-01-13
08:59:53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흠, 중앙에 가로막혀 있는 여러 지리적인 방해물을 사이로 같은 시기에 동서양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지요. 서양이 '개인주의'적으로서 여러 비스무리한 국가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동안에 동양은 '중국'이라는 가장 큰 거대국이 변화하면서 그 주위국가들도 그에 영향을 받고, 문화도 전수받고 그런식으로 성장해 왔으니까요. 그 덕분에 '여러 머리'가 '치고박고 싸우면서' 발전해간 서양과, '하나의 머리가'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면서' '끌고나간' 동양의 발전은 그 진행양태에 차이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인도나 아프리카, 그쪽의 역사는 별개로 치고 말이죠. 2009-01-13
21:25:45
  

 

상병 이지훈 
  석재// 

오호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었어요. 그나저나 동양과 서양의 역사가 진행양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전 세계로 볼 때, 그러니까 세계 역사로 뭉뚱그려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은데 말이죠. 문명교류학 같은 것들이 이 필요성을 채워주기 위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동양과 서양(그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지만)역사가 서로 멀게만 느껴지네요. 어쩔 땐 참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죠 흐흐 2009-01-14
12:15:03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렇죠. 지금도 두 지역간의 문화 차이는 여전하고 나머지 지역또한 특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문명교류학은 커녕 '문명의 충돌'같은 이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다문화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보장해주지만, 더불어 공통성은 점차 사라진다는 얘기니까요. 
 [칼럼] H.I.S - Scene Five: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은 제국.  
상병 이석재   2009-01-13 14:45:55, 조회: 150, 추천:0 

Scene Five


지금 칼럼은 이틀에 한번씩 올리고 있는데, 이거 저만 너무 빠르게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주당 2회정도로 줄이려고 합니다. 쩝. 좀 더 진중한 설명이 나올 수 있겠지요?(땀땀)
이번 시간엔, 로마의 태동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세계 제국으로서, 앞으로 서구 문명을 결정지를 나라로서의 로마는 얘기할 것이 참으로 많은 국가이죠. 암요.


이제 로마는 세계의 제국으로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했지만 아직 국가 자체는 다민족국가로서 분열될 여지가 남아 있었고, 북쪽에는 아직도 이민족들이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동쪽과 남쪽엔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합니다.


1차포에니 전쟁의 발단은 시칠리아에서 벌어집니다. 시칠리아는 밀의 중요한 생산지로서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인들이 티격태격 싸우던 곳이였지요. 하지만 그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그리스계 참주간의 양대 대결 구도가 카르타고의 승리로 이어지려는 모습을 보이자, 그리스계에서 로마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시칠리아를 점령하면 우리 둘다 위험하다!’라는 것이였지요. 이미 이탈리아를 통일한 입장으로서 확장방향을 아직 못정하던 로마로서는 그리스계의 도움 요청을 환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시칠리아로 고고싱.


하지만, 카르타고는 괜히 카르타고가 아니였습니다. 무주공산이였던 지중해의 교역을 책임지던 강국이였기 때문이였죠. 전체적으로 육군국가였던 로마에게 배를 타고서 도착해야 하는 시칠리아를 공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그렇게 해군에서 족족 깨지자, 로마 입장에서는 ‘까마귀’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도구를 지참한 배를 가지고 카르타고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주1). 카르타고는 배의 원형을 원초적으로 파괴한 그 까마귀를 비웃지만, 결국 그 까마귀 전법에 당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칠리아 근처에 있던 함대들마저 태풍으로 인해 완파되자 그 해역에서 유지하고 있던 카르타고의 세력이 일소되버린 것이지요.


결국,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나고, 로마는 그리스계 세력까지 통합하여 시칠리아를 속주로 만들어 버립니다 . 이곳이 로마의 첫번째 속주가 된 것이지요. 속주는 로마 본토에서 사는 사람들과 계급은 약간 달랐습니다만, 그것이 노예와 주인처럼 완전하게 나누어져 있는 계급은 아니였습니다. 다만 조금의 돈을 더내고 덜내고의 수준인 것이였지요. 이후 시칠리아는 로마에 밀을 공급하는 중요한 곳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 전투 이후 카르타고는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군대를 ‘용병’으로 해결했던 전래의 방식에도 타격을 받습니다.(주2) 용병들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카르타고는 그 용병들을 제압하려고 했습니다만 로마와의 평화조약에서 군사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용병들의 반란을 쉽게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참다 참다 해서 나가긴 했는데 로마의 항의를 바로 받을 수 밖에 없었지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이때 그 유명했던 한니발은 본토에 집중되는 로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저 먼 이베리아반도에서 카르타고의 세력을 확장시켰던 것이지요. 카르타헤나 등을 건립하고 이베리아에서 군사를 키우던 그는, 결국 로마와의 조약에서 결정한 도시 ‘사군툼’ 이북을 넘어가지 않는다. 라는 조약을 깨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로마는 이제 ‘삐용삐용’- 바로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결정하게 된 것이지요.


로마는 한니발 따위는 쉽게 막을 수 있다! 라면서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프랑스에서 로마를 싫어하던 골 족을 영입하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로 침입하기 시작합니다. 해안가에서 적을 막으려던 로마는 졸지에 후방을 유린당했고, 그대로 질질 끌려가 흔히 전사에서 ‘포위전의 완성판’으로 칭송받는 칸나에 회전에서 대파당하게 됩니다. 이렇듯 북부, 중부, 남부에 걸쳐 유린하기도 하고, 아직 연합체에 불과했던 이탈리아 반도의 일부 도시들을 끌여들이기도 했지만, 정작 로마는 함락당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해상권은 아직 로마가 쥐고 있어 카르타고에서 오는 지원군을 오는 족족 끊어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한니발은 추진력을 잃고 남부 이탈리아에 거점을 잡게 됩니다. 그 틈을 타 한니발의 숙적인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의 카르타고 세력을 일소하고 바로 아프리카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지요. 남이탈리아에서 지구전을 펼치던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카르타고로 건너가게 되었고, 결국 ‘자마’ 회전에서 스키피오가 승리. 한니발은 도망치게 되고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역시 로마가 승리하게 됩니다(주3).


이제 카르타고는 마지막 기회까지 잃고, 결국 카르타고를 일소시키기 위한 로마의 마지막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카르타고는 울며 겨자먹기 3차 포에니 전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함락, 완전히 불타버리고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지요.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통해 더 이상 로마는 ‘국가 연합체’로서의 구성을 벗어버리고 로마라는 도시 아래에 있는, 통치받는 여러도시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다양성이 사라져가게 된 것이지요. 


영토는 늘어나고 고대 국가발전에 필수적인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채택하긴 했지만(주4) 문제점도 많았습니다. 시칠리아, 이베리아 반도등 영토가 늘어나자 그 영토를 산 대지주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그 대지주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지요. 평민들을 위해 토지를 분배하려 했지만(주5) 실패했고, 결국 여러 내전을 겪은 끝에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운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로마는 제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아, 물론 이 사이에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도 나타났고,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등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외전’형식으로 쓸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저는 사람들에 맞추어진 역사보다는 국가체제와 문화의 발전에 그 중점을 두고 싶거든요. 중요한 점은, 토지개혁 실패로 인해 로마공화정은 그 정치체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내전을 통해 ‘일인’체제의 집권적인 통치가 로마에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였습니다. 아직 연락체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은 상황에서 거대한 영토의 통치를 다수결로 결정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로마는 지중해 전체를 통치하는 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물론 칼리굴라나 네로처럼 로마를 망쳐버린 황제들도 존재했지만, 끊임없이 영토는 확장되었고 5현제시대에 로마는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통해 지중해 전체에 로마의 문화를 전파한 것이였지요.


다음 시간에는 로마 제정에 관해 일부 언급한 다음 로마의 멸망, 그리고 새롭게 재편되는 지중해 세계를 다룬다음 중국쪽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Coming Soon


주1-까마귀: 뱃머리에 널판지를 돛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 돛과 연결된 줄을 끊으면 널판지가 앞으로 걸쳐지는 모양인 것이지요. 그것을 통해 로마인들은 해상전을 육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후에 나타날 겔리선들끼리의 전투와, 해적선의 전투방식, 그리고 삼국지에서 나타나는 연환계 등등이 해전을 육전으로 바꾸어놓은 중요한 사례들이지요.


주2-용병: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던 일부 국가들이 유지하던 체재입니다. 돈을 주고 병사를 사오던 것이지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던 체제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돈이 없으면 이 용병들은 반란을 일삼았으니까요. 비잔틴제국의 후반 카탈루냐에서 사온 용병들이 제국에서 돈을 지급하지 못하자 바로 반란, 그리스에서 분탕질을 벌이고 모레아 공국을 독립시킨 사건을 보면, 이래저래 돈있다고 살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였지요. 


주3- 한니발: 사실 한니발 렉터 박사 뭐 이런사람이 아니에요. 전혀! 이후 한니발은 동지중해로 건너가 마치 ‘여포’처럼 고용되기도 하지만, 로마사절이 와서 한니발을 죽이라는 압박을 해오는  통해, 결국 독약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호수, 칸나에 전투 등을 통해 어떻게 하면 작은 숫자로 큰 숫자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많이 만들어낸 위대한 장수중 한명이였습니다. 애도.


주4- 중앙집권적 국가: 칼럼을 쓰면서 계속 나오는 단어군요. 하지만 로마는 제정에 들어서기 전 까지는 ‘전제주의’국가가 아닌 ‘공화정’ 국가로서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였습니다.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상황에서 로마인이 그 중 제일이 되는 상황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로마인’이 된 상황에서의 통치랑은 달라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갑작스런 확장으로 인한 문제점은 공화정체제로서는 해결하기 힘들었습니다. 평민과 귀족의 갈등을 해결해 줄 강력한 구심점이 부재했던 것도 한 이유이겠지요. 그런 구심점이 될 만한 독재정권이 등장하긴 했습니다만, 아직 공화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독재자가 죽고 나서는 권력이 흐지부지 되는 상황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주5-그라쿠스 형제: 토지 개혁을 통해 대지주의 토지를 줄이고 소농들에게 토지분배를 실현하려 했습니다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실패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토지 분배에 관해서는 그렇게 쉬운 쪽은 아니였던거 같군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1:54 

 

상병 차종기 
  어어어 , 저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하지만 공부는 해야겠고, 그러니, 
프린트로 하겠습니다. (꾸벅) 2009-01-13
15:24:50
  

 

병장 이동석 
  이미 진중함은 확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리 많이 쭉쭉-뽑아내시는지, 재밌고 쉽게 쓰실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한니발-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밌는것 같아요. 더 해주세요-라고 동슥 어린이가 보채지만, 발로 뻥-차버리세요. 2009-01-13
16:11:02
  

 

상병 김상윤 
  로마인이야기로 익히 접한 이야기군요, 특히 여러번 읽은 2권의 한니발전쟁에 관해서요 
흐흐 제정 로마의 성립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그리고 완벽한 사기극이 아니었나.. 싶어요 
덧붙여서 한니발도 멋지지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으면, 개인적인 팬인 제가 더 좋아했겠지만, 역시 그정도 비중은 안나오는거겠죠 2009-01-13
16:13:01
  

 

상병 이석재 
  상병 차종기/ 헉, 제글을 프린트해서까지 보시겠다니. 그럴만한 글이 아닙니다. 쩝쩝 

병장 이동석, 상병 김상윤/ 이거이거, 아무래도 로마 역사에 대해 보론을 한번 써야겠군요.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얘기라... 윽, 좀 쉬려고 했는데(땀땀) 이번 주말전까지 올려보도록 하죠. 휘릭 2009-01-13
16:58:43
  

 

병장 정병훈 
  아, 정말 매번 올라오는 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역사에는 정말 무뇌안이라 이거 석재씨를 내 앞에 앉혀두고 이야기를 듣고싶습니다. 2009-01-13
21:02:52
  

 

상병 황동경 
  좋은 칼럼 감사합니다. 어디까지 쭉쭉 쓰실생각이신지요? 

이 칼럼을 보고나서 저도 갑자기 역사에 관심이 생겨나는데요? 2009-01-16
23:22:49
  
 [칼럼] H.I.S - Scene 6:지중해의 마지막 통일 제국  
상병 이석재   2009-01-17 09:56:28, 조회: 161, 추천:0 

Scene 6

이번 여섯번째 씬을 시작하기전에 미리 밝히고자 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로마시대를 다루는 부분으로서 많이 읽어보셨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느냐. 라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을거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 바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군요. 하지만 제가 책마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남긴 “시오오 나나미, 혹은 우아한 냉혹?” 이라는 글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주1) 시오오 나나미의 책은 접근방법에서는 가장 편한 길일지는 몰라도 그 목적지가 잘못될 수 있다고, 주관적인 생각을 집어넣었을 경우 독자들마저 자신만의 주관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다. 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가장 이해하기 쉬운 시오오 나나미에서 나왔던 소스를 기반삼아,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최대한 오류를 피해야 할 테니까요. 심지어는 타키투스 같은 로마 역사가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보고싶은것만 보고, 듣고싶은것만 듣고 적은 것들이 많은데,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겠지요. 각설하고.

로마는 이제 최고의 전성기라는 5현제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주2)에 이르는 5현제시대에 로마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이민족들은 아직 멍청해서 로마제국에게 번번히 격퇴당하고, 트라야누스는 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가 하며,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타니아 지역을 새롭게 정비합니다. 뭐 이런저런 것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 이라는 장자상속체계가 아닌 ‘선양’이라는 가장 불안한 세습체계를 유지한 것입니다. 물론 그 뒤의 황제들이 모두 똑똑하고 잘나서 선양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일단 선임자들이 후임자들을 잘 골라서 후임 황제로 임명했으니까요. 

하지만, 마르쿠스 시대에 와서 로마는 점차 위험에 접어듭니다. 북쪽 이민족들은 이제 로마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동쪽에는 ‘아메케네스 페르시아’를 본받자고 일어난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령 중동을 계속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마르쿠스는 곳곳을 다니면서 이 흐름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만. 동쪽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물결을 그 혼자서(주3)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마르쿠스의 죽음이후에 로마는 ‘군인황제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런 계승이 아닌 무력과 쿠데타에 의한 계승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 군인황제 시대동안 로마를 살릴만한 황제는 등장했지만 모두 단명으로 끝나고, 결국 로마는 회생할 시간을 잡지못한채 게르만족, 훈족, 페르시아인들, 사막 유목민들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까지 유린당하자, 결국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분열됩니다.

로마의 멸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없습니다. 이민족의 침략에 의한 로마인들의 대처 방안이 미숙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로마제국 최대의 위기 아래서 내전이라는 형태로 힘을 모두 소진했으며, 더욱이 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인들또한 로마제국에 적대적이였으면 적대적이였지 우호적은 아니였습니다. 예수가 로마인들에 의해서 죽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로마인들은 내외환이 수없이 쏘아지자 더 이상 극복할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였습니다. 군인황제시대동안 새로운 대농장인 ‘라티푼디움’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한채 소농들이 ‘노예’처럼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라티푼디움이 중세에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하는 중세의 기본적인 경제체제인 장원의 기본형이 된 것입니다. 

물론, 로마제국을 살리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등이 전제군주정을 새롭게 확립하기도 하고, ‘부제’를 통해 통치권을 이양하는가 하면, 기독교를 새롭게 채택함으로서 기독교의 힘을 빌어보려고도 했습니다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후 서로마와 동로마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고, 그나마 경제적인 우위권을 가지고 있던 동로마와는 달리, 정치적인 중심지에 불과했던 이탈리아, 갈리아등 서로마제국은 순식간의 이민족들에 의해 멸망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제국은 멸망하고 서유럽 곳곳에는 이민족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지역의 반달왕국,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 프랑스의 프랑크 왕국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훈족을 피해 새롭게 로마제국의 영토에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일부 이민족들은 동로마제국의 발칸반도로 들어서 그리스 영토를 유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민족들중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나라는 프랑크의 프랑크왕국 뿐이였습니다. 뭐 세계사 시간에서는 ‘이동거리가 짧아서 많은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으며, 로마인들과 동화되려는 시도를 하였다’라고 합니다. 후자가 가장 맞는 얘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 프랑크왕국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원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인들을 손쉽게 통치하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 이후의 얘기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짧게 짧게

다음 이시간에는 중국의 춘추전국과 진나라를 다룬 이후에, 동로마제국의 초기 역사를 다룬다음 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간에 간단하게 인도, 중동, 아프리카, 아메리카 역사를 한데 엮은 것 칼럼도 하나 만들어야겠지요. 현재까지 그들은 역사의 '주'가 아닌 '부'에 속한 사람들이였으니까요. 

주1-링크는 달지 않습니다. 스킬이 없어서가 아니라. 검색해서 찾아보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과연 이유가 그걸까…]  

주2-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금 베니스에 있는 마르쿠스의 동상은 사실 중세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상으로 잘못 알려져 왔습니다. 만약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황제였던 마르쿠스의 동상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파괴되었겠지요.

주3-거대한 물결: 한나라 무제는 북쪽의 흉노를 공격해 격퇴시켰습니다. 자신들의 거주지를 잃은 흉노는 점차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러시아를 거쳐 동유럽에 들어옵니다. 동유럽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은 흉노(훈족)에게 밀려 점차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던거죠. 이 거대한 도미노 물결을 일으킨 한나라 무제는 정작 그 사실을 몰랐을테지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2:01 

 

상병 이지훈 
  으음 조회수 0의 상콤함이로군요 

역사의 "주"와 "부"를 나누시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앞으로의 석재님 칼럼을 읽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2009-01-17
10:02:57
  

 

상병 이석재 
  흠, 한 시대를 이끌어나간 지역을 주, 로 잡고 그 주 외의 지역을 부로 잡았습니다. 예를들어 고대시대에는 중동, 중국, 지중해유역이, 중세에는 유럽과 중동을, 근대,현대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주가 되겠지요. 물론 다른 지역도 자신만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므로 주와 부를 나누는것은 조금 그렇지만, 고대시대에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문화는 '자신들의'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것이지, 그것이 다른 문화에까지 전파되어 영향을 미친 수준까지는 아니였으므로 주와 부로 나눈것입니다. 2009-01-17
10:19:24
  

 

상병 박지훈 
  석재// 

음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나저나 사소한 질문인데 왜 Six라 하지 않고 6 이라 하셨는지? 

H.I.S가 10여 편이 넘어갈 것을 '이제' 확신하신 건가요? 흐흐 2009-01-17
14:53:19
  

 

상병 이석재 
  ....사실 그렇습니다[삐질] 2009-01-17
15:51:52
  

 

상병 이지훈 
  석재// 

아이고 잘못해서 동기이름으로 댓글 달아버렸네요 위에 허허 

같은 컴 쓰다보니 흐흐 2009-01-17
16:34:30
  

 

병장 이동석 
  흐흐, 그런데 동기이름도 지훈이라니 재밌군요. 

잘 읽었습니다. 

 [칼럼] H.I.S - Scene 7:중국 최초의 통일세력. 酒..아니, 周나라  
상병 이석재   2009-01-18 07:18:02, 조회: 176, 추천:0 

Scene 7

주나라가 서쪽에 있던 이민족(주1)들에게 수도를 유린당하고 동쪽으로 수도를 옮겨 다시 주나라를 다시 세우게 됩니다. 이전의 주나라를 서주, 수도를 옮긴 주나라를 동주라고 표현하는데 문제는 바로 이 동주입니다.


동주는 세력이 약화된 관계로 점차 자신들에게 봉분했던 봉건 제후들의 지배권을 점점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실 이 봉건제후들과 주나라의 관계는 ‘혈연’관계로서 황제의 조카, 손자, 삼촌 뭐 이런사람들이 봉건을 받은 것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혈연관계는 약화됩니다. 우리나라도 8촌 이후로는 혈연관계로 치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백년도 넘은 그 시점에서 과연 혈연관계가 얼마나 남아있었겠습니까. 결국 봉건제후들은 동주에 과연 ‘주인국가’로서 섬겨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도는 이민족에게 유린당했지, 힘은 약화瑩, 이제 슬슬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세력권을 유지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춘추시대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 춘추시대동안 주위 봉건 제후들은 주나라에는 ‘명목적’인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른바 ‘근왕’이라는 명분 하에 군사를 움직여서 다른 봉건제후들을 공격하기도 하고요. 이 춘추시대를 주름잡은 사람들을 춘추오패라고 합니다. 제나라의 환공, 진(晉,후에 중국을 통일하는 秦과는 다른 나라입니다.)문공,(주1-1) 초양왕, 송양공, 월왕 구천, 오왕 합려(주2)등이 있습니다.


이 춘추시대동안, 사람들은 아직까진 목재 농기구를 사용했지만 경작기술의 발달로 (청동기로는 농기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청동기가 그렇게 내구력이 좋은 물품은 아니였다고 하더군요.) 생산성은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므로 일할 남자들이 부족하기도 해서 눈에 띌 정도로 배부르게 산 정도는 아닙니다. 또한 이 춘추시대에 공자, 맹자, 순자 같은 ‘제자백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해가기 시작합니다. 이런 정치적인 의견들은 각 나라에 유입되기 시작하고, 각 국가들의 정치적인 지향점이 되기도 하였지요. 예를들어 법가는 진나라에 유입되면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춘추시대가 아닌 전국시대로 돌입하기 시작합니다. 춘추시대에는 무려 100개가 넘는 국가가 존재했었지만 전국시대로 돌입하면서 점차 국가들이 줄어들어 10여개국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7대 강국은 진(秦),초(楚),연(燕),제(薺),한(韓),위(魏),조(趙)의 7개국입니다. 이외에도 송, 노, 주나라등이 존재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주나라를 ‘명목상’으로 주인국으로 대접했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서로 자기들만의 이익만을 좆아 전쟁과 평화를 반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물론 영토는 초나라가 가장 컸지만 국력으로서는 진나라가 제일 강력했기 때문에 나머지 6개국이 진나라를 상대하는 상황까지도 발생하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진나라가 외교로서 점차 6국 연합을 무력화하기 시작했고, 결국 진나라에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여, 중국의 첫번째 통일 국가인 진나라를 출범하기에 이릅니다.


진나라는 , 중국을 제일 처음으로 통일했기 때문에(은,주나라는 중국을 통일했다기보다는 초기국가형태로서 인식됩니다.) 도량형등 모든 규칙들을 새롭게 통일해야만 했습니다. 7개국으로 나뉘어져 티격태격하던 시절이 얼마 안되었기 때문이였지요. 하지만 그 통일시도는 너무 격해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들을 ‘법가’로서 통일시키려는 노력인 분서갱유, 이민족을 막자고 시작한 만리장성등 너무 큰 역사를 통해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티격태격 싸우던 때보다 통일국가일때가 더 살기 힘드니 이래저래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진시황이 좀 안죽어보자고 은단 구하다가 꼬까닥 죽어버린뒤로, 국가에 카리스마가 없어지자 결국 반란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중국 최초의 민중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서부터 시작하여 중국 전체에 반란의 물결이 일어나고, 진 2세황제(주3)또한 반란군을 진압하다가 내부반란으로 죽어버리자 결국 진나라는 와해되고, ‘장기’(주4)로 유명한 초나라와 한나라, 항우와 유방이 격돌하는 체계로 흘러가게 됩니다.


항우가 초반승기를 잡고 유방을 공략했지만, 유방은 고대 진나라(파촉지역, 지금은 ‘성도’라는 도시가 있지요)의 지역에서 힘을 키우다가 초나라를 결국 해하 싸움 한번에 격파해버리고 항우를 자살케 합니다. 결국 이 유방이 진나라를 물리치고 새로운 국가, 한나라를 건국하여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시작합니다. 


한나라는 주나라가 이미 봉건제로서 어떻게 망하는 지를 봤기 때문에, 진나라가 정한 군현제를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군현제는 지금처럼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관리가 각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군현제는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나라는 봉건제와 군현제를 아우르는 제도를 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국제의 시초인 것이지요. 초기에는 유방의 가족들을 임명하고, 군사적인 승리를 도운 신하들을 임명했지만 점차 유방이 임명한 관리들을 파견하게 되면서 자연스런 세대교체를 단행합니다. 이에 각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유방은 ‘토사구팽’의 정신 아래 자신들을 도운 신하들마저도 무참하게 처형해버리지요(주5)


한나라부터 이제 ‘중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진나라때도 주위 국가들의 조공을 받으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한나라에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족을 공격하기도 하고 고조선을 멸망시키면서 주위 국가들에게 조공을 통한 평화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른바 ‘조공 무역’의 시작입니다. 신하국가들이 조공을 받치면 중국은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내림으로서 교역 아닌 교역을 하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한나라때부터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부서지지도 않겠다, 수량도 많겠다. 평화시대라 사람들도 늘어나겠다. 그런 것이죠. 


저번편에서 말한대로, 대대적인 이민 붐을 일으킨 한 무제를 제외하면, 사실 한나라에서 특기할만한 황제는 별로 없는거 같습니다. 이 한무제는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전매함으로서 국가의 재정 또한 늘려가기 시작했지요. 소금은 사람이 무언가를 먹는데 꼭 필요한 거기 때문에 국가에서 전매하기 시작하면 그 이익이 상당했기 때문이였고, 그 이익을 통해 전쟁비용을 댄 것이지요. 물론 ‘전한’과 ‘후한’을 나누는 기준인 왕망의 반역사건(주6)이후 다시 한나라를 복귀시킬 때 빼놓고는 말이죠. 후한은 거의 우리나라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같다고나 할까요. 거의 근근하게 먹고사는, 그런 상황이였습니다. 후한 또한 건립한 광무제 이후 특기할만한 황제가 없었습니다.


이제 한나라 또한 멸망의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역시 국가에서는 농민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결국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등으로 인해 한나라는 몰락하고 말지요. 한나라는 중국 국가중 처음으로 통일제국을 길게 유지했습니다. 한나라의 문화 또한 전 아시아에 퍼져나갔으며, 그들의 행보는 유럽을 뒤집어 놓기도 했고 중국을 중심하는 한자문화권이 이 한나라 시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모든것을 처음 시작한 한나라는, 나중에 나타나는 여러 통일 제국들에게 그 모티브를 던져줄 수 있었고 앞으로 중국에 등장하는 왕조들의 첫번째 모델이 됩니다. 그럼 한나라 이후의 역사는 다음시간에..으흐흐. 


주1-1-진문공: 사실 수정하면서까진 쓰고싶진 않았지만 설명하면 재밌을거 같아서요. 나중에 전국시대에 등장하는 한,위,조는 이 진나라를 한씨,위씨,조씨가 서로 나눠먹은 국가입니다. 삼국지에서 유기가 제갈량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고 난 뒤에 제갈량이 고사라고 전해준 내용이 바로 이 진문공 얘기가 있습니다. 진문공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왕위계승을 해야 했지만 계모의 계략으로 나라를 탈출해서 전국을 순회합니다. 그에반해 그의 동생은 나라에 남아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실패하고 처형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제갈량은 나라에 남아서 처형당하기보다는 강하로 튀어서 목숨을 보전하고 기회를 노리라는 조언을 한 것입니다. 진문공은 그렇게 전국을 주유하다가 나이 60이 되서야 진나라 군주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지요.


주1-이민족: 중국은 황하유역을 ‘중원’으로 놓고 동,서,남,북에 있는 다른 민족을 모두 이민족 취급하였습니다. 북적, 서융, 남만, 동이 라고 표현합니다. 적,융,만,이 모두 ‘이민족’을 나타내는 한자어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우리 민족을 ‘동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정작 이민족을 나타내는 표현어인 것이지요. 주나라를 쳐들어온 민족은 바로 이 ‘서융’입니다”


주2-춘추오패: 춘추시대에서 패자로서 다른 나라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간 중요 군주들입니다. 하지만 이 군주들의 사후에는 다른 지역에서 패자가 등장했으므로 통일국가가 등장하기에는 아직 요원한 시기였던 것이지요. 초 양왕만 왕인 이유는, 초나라가 거의 유일하게 주나라를 따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주나라에게 주어진 작위는 단지 ‘백작’수준에 불과했거든요. 그거에 불만을 가진 초나라는 원체 그 원류가 남만이였고 중원인이 아니였기 때문에 간단하게 왕을 참칭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국가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요. 송양공 같은 경우는 춘추오패로 넣는 역사가들도 있고 안넣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이 송양공이 사자성어의 ‘송양지인’을 일으킨 주범인데요. 강을 건너는 적군을 인의로 대접하여 강을 건널 때 공격하지 않고 상륙까지 다 하고 나서 준비까지 시키며 “적이 도하할 때 건드리는 것은 인의가 아닐지니”이러다가 된통 당한, 바보 같은 인의를 일컫는 말입니다. 월왕 구천과 오왕 합려는 바로 ‘와신상담’이라는 사자성어의 주인공입니다.


주3-2세: 진나라의 진시황은 자신들이 죽을 때 신하들이 주는 연호를 폐지했습니다. 황제의 연호를 신하가 함부로 정할 수 없다는 자만심의 발로였지요. 그래서 그의 시호가 첫번째 황제라는 시황인 것입니다. 역시 그 후계자또한 2세 황제, 3세황제 라는 식이였지요. 다만 3세황제는 없어서 눈물이 좀 나지만,


주4-장기: 장기의 말을 보시면 초, 한이 적혀져 있습니다. 초나라가 항우, 한나라가 유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항우가 우위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가 먼저 군사적인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초나라의 한자표기는 좀 이상한데, 그것이 남방지역에 퍼져있는 ‘사투리’같은 한자입니다. 중국의 언어는 북방하고 남방하고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지요.


주5-토사구팽: 한신,소하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장량은 한나라의 통일 이후 미련없이 유방을 떠나 그 목숨을 부지했지만, 한신, 소하는 유방 밑에 남아서 한자리 꿰차다가 결국 토사구팽당해 처형당하게 됩니다. 유방이 뭐 그런사람이였기 때문이였겠지요.


주6-왕망의 신나라: 왕망은 옛날 주나라 시절의 봉건제를 좋아한 나머지 모든 법들을 옛날 것들로 회귀시켜 토지가 국가에 배속되어 골고루 나눠주는, 그 시대에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법들을 제정했습니다. 물론 지주들의 불만을 사서 신나라는 금방 멸망해버리고 후한이 들어서게 되지만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2:10 

 

병장 이동석 
  또 지적질, 꾸벅- 

[진중,오광의 난] (?) 

[오합려, 송양공, 월왕 구천, 오왕 합려] 
오 합려가 두번 나왔군요. 

확실히 한나라는 치세-였던지라 과하게 정복사업을 하다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간 한무제나 다시 한나라를 복원시킨 광무제정도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치적이 보이지 않긴 하는군요. 역사엔 좀 안남았어도, 사람들 살기엔 좋았겠지요. 그리고 그 뒤로 이천년 가까이 유지되는 '중국'의 토대를 만들었던 시기기도 하니까요. 2009-01-18
10:24:46
  

 

상병 이석재 
  왜 난 이런 오류만 자꾸 저질르는거지..수정하겠습니다. 이거 이런 오류가 자꾸 발생하면 안되는데 말이죠. 2009-01-18
10:42:40
  

 

상병 김예찬 
  엇, 진나라가 군현제를 시행했고 한나라가 군국제를 시행한게 아닌가요? 

군현제는 모든 지역을 군과 현으로 나누어 수도를 제외하고 모든 지방을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놓은 것이고, 한나라의 군국제는 공신과 황족들에게 왕의 칭호를 주어 나라를 나누어준 제도, 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9-01-18
18:00:57
  

 

상병 이석재 
  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찾아봐야 겠군요. 옛 기억에 의존해서 하다보니. 낄. 2009-01-18
18:01:57
  

 

상병 이석재 
  앗, 오류다. 이런식으로 정확도가 떨어지면 안되는데 허허. 설탕나가서 세계사 관련 책 한권 들고와야 하나...쩝쩝. 수정합니다. 2009-01-18
18:07:36
  

 

병장 이동석 
  아뇨, 뭐 저런 세세한 부분은 노템전(그러니까 참고문헌이나 검색이 어려운, 우리 상황)이니까 어쩔수 없는거지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2009-01-18
19:53:12
  

 

병장 김민규 
  어쩌면 그러한 노템전다운 풋기야말로 이 글의 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엄청난 참고문헌을 쌓아놓고 썼다면, 그냥 잘 쓴 세계사 책 한 권 읽어보는게 낫겠죠. 그건 단지 요약-에 불과할테니까요. 도대체 뭘 하면 저런걸 머리속에 쌓아둘 수 있는지, 그냥 궁금합니다. 잘 읽었어요. 2009-01-19
02:13:57
  

 

상병 김예찬 
  노템으로 시작된 글이 여러 사람들의 참여와 보완으로 하나의 아이템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참 재미있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9-01-19
09:42:33
  

 

상병 이석재 
  모든 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낄낄. 

  [칼럼] H.I.S - Scene 8:노랑머리  
상병 이석재   2009-01-20 20:10:12, 조회: 178, 추천:0 

Scene 8


자, 이제 중국으로 떠났던 우리의 마음을 유럽으로 돌려봅시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 서로마지역은 여러 게르만민족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지만 동로마지역은 온전히 남아 유스티니아누스의 지도 아래 발전하게 되지요. 이번 8번째 장면은 이 비잔티움 제국부터 먼저 설명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밀라노 칙령에서 기독교를 국가가 공인한 종교로 삼은 이래 비잔티움의 동로마제국 또한 기독교를 통한 종교적인 색채를 띄어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로마와 다른 점은 이른바 ‘필리오퀘’라고 불리우는 단어 하나서부터(주1) 여러 종교적인 행동, 황제를 종교최고지도자로 일치시키느냐 아니면 왕과 교황은 다른 존재인가, 에서부터 궁극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는가 숭배하지 않는가(주2)의 문제까지 서쪽의 카톨릭과 동쪽의 그리스 정교는 같은 본류였지만 다른 가지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마치 동아시아의 어느나라처럼…


이렇듯 카톨릭이 점차 게르만족에게 전파되고 있는 사이, 비잔티움제국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나타나 로마제국의 복귀를 꿈굽니다. 그는 정벌군을 일으켜 동고트 왕국이 세운 동고트 왕국을 재정복하고, 반달족이 세운 반달왕국을 아프리카에서 정벌,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남부를 재정복하게 됩니다. 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최후의 로마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이탈리아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가끔씩 있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나중에 노르만족에게 이탈리아의 마지막 본거지인 바리까지 점령당하면서 이탈리아는 말 그대로 꿈으로 남게 되는 것이죠. 이탈리아 반도 자체가 정복사업으로 인해 피폐해지면서 사람들은 비잔틴이나 게르만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겁니다. 결국 오래 정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 대전을 통해 법을 정비하였고 여러가지 문화사업을 통해 비잔틴인들이 수백년간 먹고 살 유산을 남겨주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비잔틴제국의 영토는 점차 줄어들게 되지요.


그리스 정교의 비잔티움이 북쪽의 마자르족(주3)이나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는 사이 서부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이 프랑크 왕국은 카톨릭을 받아들임으로서 피지배자들과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특히 자신들의 정복지를 교황에게 일부 떼어줌으로서 이른바 ‘교황령’의 시초가 되는 일을 해냈지요. 거기에 감동먹은 교황은 대뜸 사를마뉴 대제를 ‘로마 제국의 왕’으로 삼아버립니다. 교황이라는 신성에서 황제의 권위가 나왔다 하여(주4)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프랑크 왕국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한건 아니지만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원형이 된 것이지요. 


이제 비잔티움은 뒤집어진겁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돌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로마제국의 황제를 참칭하다니! 로마제국의 황제는 자신들밖에 없거늘! 이런 어이없는 사실이 이러면서 신성로마를 규탄하려고 하지만 그게 될리가 있나요. 비잔티움은 주위에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을 막기에도 벅찼으니까요. 결국 그들은 신성로마를 승인해야만했습니다. 물론 그 자존심은 세서 단지 신성로마가 ‘바실레오스’ 즉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 가능하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12사도와 동격인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보다는 한수 아래로 인식하게 만들긴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로마인이 아닌 황제가 된 최초의 시도로서, 앞으로 수많은 사례를 만들어내게 되는 그 시초가 된 것입니다.


프랑크 왕국은 교황령을 수립하는 것을 지원하여 교황이 영토를 통치하는 사례를 제공했으며,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올라오는 이슬람 군대를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주5) 카톨릭 유럽을 보호하는데 수훈을 세웠으며, 더욱이 사를마뉴의 가문 이름인 ‘카롤링거 르네상스’(주6)를 통해 라틴어를 프랑크 왕국 전역에 보급하고 고대의 책을 필사하여 보존했고 고딕양식을 발전시키며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비잔티움의 문화보다는 덜했지만 말이지요. 비잔티움의 문화는 그 당시 주위국가들중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성 소피아 성당이나 온갖 화려한 장식품들 등, 콘스탄티노플은 그 시대 최고의 부유한 도시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이 수많은 문화들이 성상파괴 운동이나, 후에 언급할 4차 십자군의 약탈 등으로 소실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아직은 비잔티움이죠?


이렇게 프랑크왕국과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초기를 이끌어나가는 두 기둥으로서 활약해 왔습니다. 이때부터 고대는 끝났다고 볼 수 있으며 중세의 특징답게 이동권한이 없는 농노로 경작이 이루어지는 장원이나, 자급자족 체제, 종교에 기반한 정치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장원제와 봉건제는 계급사회를 지향하던 중세시대에 중요한 두 기둥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고대 말기의 라티푼디움에서부터 시작된 물결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국가는 점차 나타나는 다원적인 물결에 휩쓸리게 됩니다. 특히 프랑크왕국에서 그 문제가 더욱 두드러졌는데 사를마뉴 대제 이후 왕국이 3개 국가로 갈기갈기 갈라진 것입니다. 이 국가들을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라고 불렀는데 왜 나뉘어졌을까요? 제 첫번째 습작인 Side and Side를 유심히 보신 분이라면, 게르만족은 ‘살리카 법’이라는 계승법 아래 남자 아들이라면 유산을 똑같이 받는, 똑같이 받지 못하더라도 차등으로 받는 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둘째,셋째가 모두 유산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지요. 사를마뉴도 역시 자신의 형이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 유산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를마뉴의 아들은 셋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 세명은 프랑크 왕국을 삼등분하여 받은 것이고, 그 아들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가 결국 베르窪뗀,메르센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원형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후에 로마제국 황제의 위는 동프랑크 왕국을 번영시킨 오토대제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뭐 하여튼 그건 나중의 일이고


비잔티움도 유스티니아누스의 발전 이후 점차 이민족, 페르시아, 이슬람의 공세를 받기 시작합니다. 러시아인들도 쳐들어오지요. 특히 이슬람이 문제여서 콘스탄티노플이 무려 3번에 걸친 공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겨우 방어하긴 했지만 이집트, 중동등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나톨리아로 영토가 축소되기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중동을 잃어버린건 여러 종교적인 문제(주7)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결국 비잔티움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에 걸친, 방어하려면 양면을 다 상대해야 하고 그러자니 확장하긴 벅찬 그런 어정쩡한 제국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발칸반도도 역시 세르비아, 불가리아인들 등 비(非)그리스인들의 독립으로 인해 영토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어정쩡했음에도 1000년이상 가긴 했지만요. 로마제국 시기까지 합하면 2천년정도 되는 시기니까, 세계 최고(最古)의 제국이라고는 할 수 있겠군요.


이렇게 양 제국간의 역사를 살짝 살펴보았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중세의 특징인 자급자족 경제체제에 충성을 요구하는 봉건제 등을 탄생시킨 주역이라고 할 수 있고, 비잔티움은 카톨릭문화를 발전시켜 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는 고대문화를 유지,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의 전성기가 지나간 후 유럽세계는 스페인의 이슬람, 프랑크왕국, 잉글랜드왕국,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헝가리, 폴란드, 비잔티움 등등으로 나뉘어 서로 치고박고 사랑하고 깨지고 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지요. 카를 4세의 합스부르크 왕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등 유럽을 통일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지만 더 이상 거대국가로 유럽이 통일되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아, 1940년대의 독일은 제외하도록 하지요. 나중에 20세기 후반에야 나타나는 유럽연합의 체계전까지, 앞으로의 유럽은 전쟁과 갈등의 역사가 될 테니까요. 다음 시간은 설을 지나고 나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의 좀 마이너한 지역 역사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잇힝



주1 필리오퀘 ?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라고 하지요? 그중 ‘성령으로부터’를 라틴어로 하면 필리오퀘가 됩니다. 이 필리오퀘는 서로마지역의 카톨릭에서는 인정했지만, 동로마지역의 그리스정교는 인정하지 않은 내용이지요. 비잔티움의 그리스 정교는 '성령'의 존재를 카톨릭에서처럼 예수와 하느님처럼 동일시 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주2 우상숭배 ? 사실 그리스 정교가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정교 또한 우상의 효능성, 즉 이민족들을 쉽게 교화할 수 있고 더욱이 자신들에게 심미적인 포만감을 안겨줄 수 있는 우상숭배를 점차 허용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비잔티움제국에서 우상파괴운동이 일어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


주3 마자르족 ? 지금의 헝가리인들입니다. 훈족의 아틸라가 급서한 이후 라인,도나우강 이북지역의 패권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비잔티움서부터 이탈리아까지 곳곳을 약탈하지만 결국 사를마뉴 대제에게 정복당하게 됩니다. 이 마자르족 말고도 페체네그족등 아직 강 이북에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4 콘스탄티누스: 수천년간 계속된 거짓말중 하나는,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황제의 임명권을 넘겨준 인증서가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교황이 황제의 위에 있다는 인증서로 한동안 받아들여졌지요. 하지만 현대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그 인증서는 고대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닌 12~14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너그럽게 봐 줄수 있는 문제일까요?



주5 롤랑의 노래: 이곳에서 중세 서사시중 유명한 ‘롤랑’의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4LEAF의 그 롤랑이 아닙니다. 허허. 아군 배신자에게 속아 후퇴하던 프랑크군을 이슬람군이 후미에서 들이치자 후미에 있던 롤랑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사를마뉴 대제가 구원군을 이끌고 올때까지 버티려 했으나 결국 황제가 오기 바로 직전에 사망하여 대제가 슬퍼했다. 뭐 이런 스토리의 서사시입니다. 



주6 르네상스: 르네상스가 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만을 가리키는 것도 있지만, 좀 크게 봤을 때 중세 시대에는 3번의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지금 언급하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여러가지 책 필사를 통해 고대 지식을 보존하고 보급한 수도원의 르네상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렇게 3번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각각의 르네상스는 고대와 근대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다리가 되었으며, 고대의 지식을 지금까지도 보존, 유지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7 단성론: 예수가 하느님의 영혼과 예수의 영혼을 동시에 가지지 않는다는 단성론이 중동 전체에 퍼져있었습니다. 지금의 카톨릭은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고 있지만 옛날에는 별별 희한한 이론이 다 나와있었지요. 앞에서 말한 필리오퀘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단지 선지자중 한명으로 격하시키는 네스토리우스파,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파등 여러 카톨릭 이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종파들은 종교적인 색체가 강한 비잔티움 제국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2:21 

 

병장 홍승표 
  50년대 최고의 축구팀이였던 헝가리대표팀의 별명인 마자르 군단이 여기서 유래된거였군요...(웃음) 
4leaf의 롤랑이라면 창세기전3에서도 나왔던 그 캐릭터를 이야기 하시는건가요? 킥킥 2009-01-20
21:04:37
  

 

상병 김예찬 
  주4 부분은 현대 과학자들이 밝혀낸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겁니다. (아 근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 으악!) 황제 임명권을 넘겨준 인증서, 가 아니라 카탈루냐 지방의 영토 소유권에 관한 문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2009-01-21
07:47:42
  

 

병장 이동석 
  잇힝, 잘 읽었습니다. 2009-01-21
13:04:44
  

 

상병 김예찬 
  엥 내가 왜 카탈루냐라고 적었지 (당황) 카탈루냐가 아니라 교황령입니다. 2009-01-21
13:35:32
  

 

상병 이석재 
  아, 그랬던거 같군요. 역시 다시 도지는 가물가물병. 가물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허허 

[칼럼] H.I.S - Scene 9:잠시 눈을 돌려서  
상병 이석재   2009-01-28 20:15:53, 조회: 151, 추천:0 

Scene 9

일단 고대의 아프리카, 아메리카 역사는 간단합니다. 아시아나 유럽 등 티격태격 싸웠던 나라들에 비해 이 두지역은 각자의 문화를 발전시키며 따로따로 발전해 왔으니까요. 


북아프리카는 저번에 설명드렸던 데로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국가인 ‘카르타고’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우측엔 리비아인(주1)들과 이집트가 있었지요. 모로코지역은 ‘누미디아’라고 하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아프리카의 역사는 사하라사막을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남아프리카가 다른 식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북아프리카는 현재까지도 이슬람 문명이 중심인 반면에 중,남아프리카는 기독교와 원시적인 문화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지리적인 차이는 이렇듯 한 대륙에서도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 누미디아, 이집트 등이 로마제국에게 정복당한 이후에 북아프리카 해역은 모두 로마의 마레 노스트룸, 즉 내해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북아프리카는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로마가 점차 약화되면서 북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에 사는 여러 사막민족들에 의한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북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은 점차 지중해를 건너 이주하기 시작했지요. 그 틈을 타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튀니지 지역에 정착한 이후 ‘반달’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독일쪽에서 튀니지니까지 가로질러 이동하다니, 먹고 살기 위해선 뭔 짓을 못하겠습니까만은.


반달왕족은 북아프리카에서 번영하기 시작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주2)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북아프리카의 영토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게 됩니다. 그 비잔틴 제국의 중심은 바로 ‘카르타고’였지요. 고대 로마가 이 도시를 완전하게 파괴합니다만 그 지리적 위치는 어디서도 무시하기 힘든 지역이였으니까요. 카르타고-시칠리아-칼라브리아로 이어지는 지중해의 중심은 서지중해와 동지중해를 나누는 경계선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로서, 또 지중해 함대의 감제지역으로서 그 효용성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도시위치를 그 누가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로마가 파괴해도 그 이후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시대까지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중요 도시로서 활약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카르타고가 점차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몰락의 기점은 바로 이슬람의 침략이였지요. 이슬람은 비잔틴제국을 공격, 중동과 아프리카를 이슬람의 영토로 편입시킵니다. 비잔틴제국은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로 그 영토가 축소되게 되지요. 그렇다면 카르타고랑은 무슨 관계냐하면, 이슬람의 기반은 ‘중동’ 즉,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였습니다. 후에 나타나는 파티마, 아이유브 왕조(주3)는 이집트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카르타고를 점령한 우마이야 왕조 또한 북아프리카가 기반이 아닌 스페인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후에 튀니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리드’왕조가 탄생하기까지 카르타고는 이슬람의 바깥지역으로서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사하라 사막 남부는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만사무사가 다스리는 황금의 왕국 등 ‘금’으로 유명한 여러 왕국들이 발흥했습니다. 특히 이슬람인이였던 이 만사무사는 이슬람인들이 메카로 인생에 한번은 와야한다는 그 철칙에 따라 사하라 사막과 이집트를 건너 메카로 들어갔는데, 들어오면서 황금을 마구 뿌려대어 서아프리카 왕국의 부를 마음껏 발산했다고 하는군요. 왕국 이름들이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서도, 서아프리카에 존재한 왕국들은 그 부가 장난 아니였다고 합니다. 발전 속도도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포르투갈, 스페인등이 참여한 아프리카 정복전쟁에 희생되어 멸망하고 결국엔 노예공급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떤 아프리카 왕국은 자신들의 국민들을 노예로 팔아치웠다고 하니 그 상황을 알만 하지요. 


아메리카 지역은 북아메리카, 중남미 아메리카, 남미 아메리카 이렇게 3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북아메리카는 주로 ‘인디언’들이 자기들만의 문화를 키워가고 있었고, 중남미지역은 주로 멕시코 중부와 동부에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화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인데,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에서 무덤의 용도로 쓰인 피라미드와는 다르게 하늘에 제사지낼 제단으로써 쓰인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주4)


남아메리카는 주로 안데스산맥 주변에서 문명이 발전하였습니다. 아마존강유역은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했고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지역또한 방목하기에는 적당하지만 사람이 경작을 하면서 살기에는 좋지 않았으니까요. 뭐 물론 사람은 많이 살았지만 특기할만한 문화는 없었다고 볼 수 있지요. 결국 아메리카의 3대문명이라 할 수 있는 마야, 아스텍, 잉카문명은 각각 멕시코 중부, 동부와 안데스산맥에서 발전했습니다. 안데스산맥에서 문명이 발생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메리카 동부와는 다른 서늘한 기후등이 사람이 살기에는 더욱 적합했다고 하는군요. 


이제 인도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도는 저번에 4대문명에서 말했던 대로 아리안이 인더스문명을 침략한 이후 암흑기에 빠져듭니다. 문명 자체를 거부하는 이민족들은 문명을 파괴하고 약탈할 뿐이지 그 문명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원주민들은 인도의 남부와 동부로 도망쳤고, 아리아인들은 인더스강 유역에 남아 자신들만의 통치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인도까지 이어지는 ‘카스트제도’입니다. 카스트제도와 인도 신화의 시작이자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신화책이라고 할 수 있는 ‘리그 베다’등을 통해 아리아인들은 인도 북,동부에 도시국가를 건국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 도시국가들은 처음으로 통합되게 되는데, 인도 첫번째 통일국가라고 할 수 있는 마가다 왕국입니다. 이 마가다 왕국은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아리아인들의 첫번째 중심 왕국을 세웠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마가다 왕국은 서쪽에서 들어온 그리스인,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에 의해 약화되었고 인도는 왕조가 교체, 마우리아 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 마우리아 왕조는 갠지스강 유역까지 통치하여 인도 북부를 통일하게 된 것이지요. 아소카 왕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인도의 고대문화가 최고조로 발전하게 됩니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 시절에 그리스와 인도 문화가 섞인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땅에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우리아 왕조도 몰락해가기 시작하면서 인도는 이제 그리스의 헬레니즘문화가 아닌, 불교와 힌두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왕조가 교체되어 ‘굽타’왕조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인도의 고대 역사는 이 굽타왕조까지입니다. 이후에는 ‘이슬람’의 세력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힌두문화가 섞이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지요. 사실 인도의 왕조들은 중국, 동남아가 아닌 서쪽에서 오는 세력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물론 영국이야 예외가 될 수 있지만 말이지요. 인도의 문화는 아리아인이 구축한 카스트 제도 아래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물론 그 제도가 계급별 사회를 구축하게 되는 단초가 되지만, 인도의 특수한 신화, 문화또한 아리아인들이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건 조금 내용이 부족한 느낌이 들지만, 제 지식의 한계다보니, 쩝쩝. 다음 이시간에는 잠시 또 중국쪽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지요. 헉헉, 지금 제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보니 이번 칼럼은 영 퀄리티면에서 부족하군요. 원래는 주석도 이정도로 끝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음 작품은 더욱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지요.


주1-리비아인: 리비아인들은 후에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울때까지 이민족으로서 활동합니다. 주로 이집트지역을 많이 공략하긴 했지요. 이집트 관련 소설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주2-유스티니아누스: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로마인 황제라고들 합니다만, 사실 로마를 ‘꿈꾼’마지막 황제라고 볼 수 있겠군요. 그의 영토는 이탈리아, 북아프리카를 거쳐 남스페인까지 점령했지만, 이 영토 모두 랑고바르드인들이나, 이슬람인들에 의해 정복당하게 됩니다. 하여튼 그의 왕비인 테오도라와 함께 세운 비잔틴의 영토들은 비잔틴 제국의 최대 영토로 지금까지도 기록되어 오고 있습니다.


주3-아이유브 왕조: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세운 이집트 왕조입니다. 후에 ‘노예’왕조라고 불리우는 맘루크 왕조로 교체될때까지 이집트와 중동 지역을 통치했는데요, 사실 살라딘 빼놓고는 얘기할 만한 국가는 아니여서.. 하여튼 중세의 중동통치는 모두 이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이란이나 이런데는 좀 따로 놀긴 했지만… 후에 오스만 투르크 인들도 이집트의 노예왕조에서 ‘술탄’과 ‘칼리프’의 칭호를 얻어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슬람을 얘기할때에 따로 얘기하도록 하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2:38 

 

병장 이동석 
  여기까지 백업했습니다. 헉헉. 2009-01-28
20:19:09
  

 

상병 이석재 
  헉헉, 이동석님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졸작을 백업하시느라.. 2009-01-28
20:52:19
  

 

상병 이지훈 
  앗, 어느새! 일단 자고 내일 봐야겠어요 흑 2009-01-28
23:07:04
  

 

일병 김소망 
  살라딘을 원어 발음으로 "살라흐 알 딘"이라고 표기해주는 센스도 같이 발휘해 주심이(웃음) 

 [칼럼] H.I.S - Scene 10:고기가 물을 만난 격.  
상병 이석재   2009-02-02 21:22:26, 조회: 181, 추천:0 

Scece 10

이제 이 H.I.S를 지원해줄 사람들이 점차 떠나가는 느낌이에요. 으헝헝. 이 부족한글에 첨부파일을 달아주면서 지원해줄 사람들은 정녕 없는건가요. 제가 아는것마냥 이렇게 글을 써도 부족한 것은 너무나 많답니다. 이번 시간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중국과 유럽을 넘나드는듯 싶긴 하지만 고대, 중세의 역사가 워낙 그렇다보니 말이지요. 아메리카야 근대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하니까요. 중국을 다룬 다음에야 비로소 탈유럽, 탈중국을 꾀해 이슬람의 역사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후한이 십상시의 난, 황건적의 난으로 무너져갈 때 이 중국의 영토는 점차 여러 난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대, ‘삼국지’의 무대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중원의 조조, 여포 하북의 원소, 강남의 손씨가문, 형주의 유표 등이 중국의 영토를 통일하기 위해 서로 각축을 벌이지요. 이 삼국시대의 전투는 대체로 3대 전투로 나뉘는데, 하북과 중원을 두고 원소와 조조가 맞붙은 관도대전, 조조의 삼국통일을 무력화시키고 결국 사마씨에게 그 영광을 넘겨주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요즘 영화화된 적벽대전, 유비의 야심찬 카드인 60만 대군을 불살라버리고 촉을 외지의 조그마한 국가로 축소시켜버린 형주의 이릉대전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3개의 대전을 통해 삼국시대 초기에는 여러 간웅들이, 후기에는 위, 촉, 오 3국이 솥밭처럼 그 형세를 이루며 통일제국이 등장하는 것을 최대한 견제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 자체가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였고, 삼국시대도 그 분열의 시기가 마감을 하려고 했던지 위나라의 ‘사마’씨 가문이 진(晉)을 세우고 오, 촉을 통일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 진나라는 춘추시대에 등장했던 진나라하고는 다릅니다. 물론 위, 오도 다르다마다요.


진나라는 이렇게 삼국시대를 통일하고 중국에 다시한번 평화를 가져오는가 했습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그새 멸망하게 되는데, 8왕의 난이 일어나버린 거지요. 애초부터 통일보다 유지가 더 어렵다는 것은 진(秦)나라 시절에 익히 보아와서 알고 있던 사실. 그래서 진(晉)이 좀 뭔가 해보려는데 8왕의 난으로 나라 전체가 내란에 빠져버린 것이지요. 발전은 커녕 유지조차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 틈을 타 북쪽에서 호시탐탐 중국 본토를 내려다보던 이민족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진나라는 다시 분열되기 시작하고 양자강 남쪽으로 피하게 됩니다. 바로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북조, 즉 양자강 이북은 5호 16국이라 하여 5대 이민족, 16개 국가가 각축을 벌입니다. 남조, 즉 양자강 이남은 진나라에서 분열되지는 않은채 그 왕만 바뀌어가면서 국호만 바뀌는 형태였지요. 아마 송-제-양-진 뭐 이런순이였던가요. 북조가 전진으로 통일이 되는 약간의 시간도 있었지만 남조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5호 16국 상황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다시 혼란에 빠져든 중국 대륙에서 농부들이 살아남기란 쉬운 상황은 아니였지요. 하지만 이 5호 16국을 통일한 나라는 북주에서 출발한 양견이 세운 수나라였습니다. 얼쑤 수나라, 수나라는 진(秦)과 비슷한 군현제를 통해 각 지역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는 체제를 이룩했습니다. 물론 이 체제가 국가의 역량을 끌어내기에는 가장 좋지만 단점은 황제의 능력이 부족할 경우엔 그 폐단이 너무나 심하고 더구나 국가 자체의 역량을 통치에만 쏟아붇는데도 모자랄 지경이였다 이거지요. 게다가 수 양제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국가의 모든 것을 갉아먹었습니다. 진(晉)도 보시다시피 국가 초기에 온갖 반란으로 신음한 나머지 뭘 하기도 전에 무너졌지 않았겠습니까. 수도 전국 통일 후 무언가 좀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전쟁과 토목공사를 반복하는 통에 그 힘이 너무나 딸렸던 것이지요. 결국 수는 다시 멸망해버리고, 결국 혼란한 중국을 다시 통일하는 것은 이연, 바로 중국의 역사상 3대왕조(한, 당, 청)라고 불리우는 당나라가 통일하는 것입니다.


잠시 글을 맺기 전에, 5호 16국과 수나라 시대의 과거제도를 약간 살펴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5호 16국의 과거제도는 구품중정제라고 합니다. 상상에서부터 하하까지 9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사람들을 천거받고, 그 천거받은 사람들을 썼던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점은 그 천거라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제가 만약 세력있는 가문인데 아들이 ‘하하’등급을 받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 당연히 천거관등에게 뇌물을 써 상 이상의 등급을 받도록 샤바샤바 하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하 이하의 등급만 받는겁니다 .이 등급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관직 제도로서는 그렇게 효율성 있는 제도는 아니였습니다. 이에 수나라는 진사과제라는 과거제의 원형을 통해 사람들을 새로 뽑으려고 했지만, 그걸 써먹기도 전에 멸망해버렸으니 참 눈물나긴 하는군요. 하지만 수나라때부터 군을 폐지하고 주에 소속된 현을 두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구요? 황제를 중심으로 봅시다. 만약 ‘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전국의 수백개 되는 군을 관리하는 데에 그 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군이 백개라면 황제는 백개의 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과 주를 둔다면? 주를 10개로 줄이고 황제는 10개의 손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주에 10개의 현이 있다면 황제가 아니라 주자사가 10개의 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셈이지요. 그런 식으로 통치의 간소화를 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5호 16국시대와 수나라가 발흥하는동안 유럽의 대륙에서는 한창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의 한판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고 서로마는 멸망한채 여러 이민족들이 그 왕국을 세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고 인도는 굽타왕조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한반도는 삼국시대의 말기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세력또한 새롭게 발흥하려고 하고 있었군요. 다음시간엔 이슬람의 발흥과 발전, 그리고 유럽의 제대로된 중세 시대를 밝혀보도록 하지요. 얼쑤.


-이번엔 주석이 없어요. 모르는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낄낄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2:45 

 

상병 황동경 
  유익한 글 잘 보고있습니다. 

칼럼 읽다가 역사 매력에 푹 빠져버려서 얼마전엔 History 라는 5만원 상당의 책을 
질러버렸습니다. 

이 열정을 몰아 후엔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네요. 2009-02-02
23:55:12
  

 

상병 이석재 
  상병 황동경/ 아니 그 비싼책을 사시다니... 쩝, 이거 더욱 열심히 올려야 쓰겄는디요. 2009-02-03
10:18:29
  

 

상병 김상윤 
  도와줄수 있는 지식을 가진분은 줄어도, 잘 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습니다........ 
화이팅! 2009-02-03
14:59:17
  

 

상병 김상윤 
  질문 있습니다. 
1. 이릉대전이 어떤 내용이었던거죠? 형주에서 있었던거라면, 관우가 형주를 홀랑 넘겨줬던 그 대전인가요? 
2. 위나라가 촉을 합병하고 그후 진으로 변한뒤 오나라를 흡수한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게 맞나요? 이건 만화책에서 본거라 잘 모르겠네요. 2009-02-03
15:07:08
  

 

상병 이석재 
  상병 김상윤/ 감사합니다. 허허. 이릉대전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유비가 형주재탈환을 목표로 진격하던 중에 발생한 전투입니다. 위치는 영안(백제성)과 강릉성의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형주를 외교적으로 넘겨주려던 손권의 작전이 실패한 후에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그 실패로서 오던 후폭풍또한 대단했습니다. 형주작전에서 황충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형주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위가 촉을 합병하고 진으로 변한뒤 오나라를 흡수한게 맞습니다. 2009-02-03
15:24:04
  

 

병장 이지훈 
  당연한 이야기지만 삼국지는 중국을 중심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주변 나라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몇몇 이민족들-중국의 입장에서-은 그저 맛있는 양념정도로만 등장하죠. 뭐 제갈량을 위해 맹획을 오랫동안 등장시킨 것은 예외이기는 하지만요. 후대 사람들은 제갈량의 남벌보다, 관도대전에 이어서 조조가 북방의 이민족들을 토벌한 것이 5호 16국시대를 늦추는데 공헌했다고 더 높이 평가하는데-이것도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지에서는 비중이 크진 않죠. 곽가가 그곳에서 죽는다 정도? 흠. 

제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한국이 나올 수도 있는데 나오지 않는, 삼국지가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당시 고구려가 위나라, 오나라 심지어 촉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으니까요. 위나라의 경우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의 도성격인, 정확히 말하자면 도성의 외성인 환도산성을 공격한 기록이 있고,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에 갖은 보화를 선물하자, 고구려왕이 백필정도의 말을 보답으로 보낸 기록도 있고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위나라 북방지역에서 사마씨가 장악하기 시작한 위나라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위나라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갈량이 고구려에 대해 언급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는데...이건 좀 개인적으로 허구같고요. 아무튼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적벽대전 보고싶군요. 봉효가 살아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는 조조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흐흐 2009-02-03
16:48:21
  

 

상병 이석재 
  병장 이지훈/ 북방의 이민족을 토벌한 것이 5호 16국 시대를 늦추었다라. 이거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오와 고구려가 교역했다는 것도 처음 보는 사항이구요. 제가 알기로는 사마씨의 위나라를 반대한 세력이 관구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조조의 친위세력이였던 하후씨, 조씨와 결합해서 일으킨 반란이였지만 극서에서 달려온 사마씨 일가에 토벌당하고 맙니다. 2009-02-03
21:00:18
  

 

병장 홍석기 
  흐흐. 아직 책마을의 히스토리 학파는 건재하군요. 잘 보고 갑니다. 
[칼럼] H.I.S - Scene 11:Deus Vult(신의 뜻대로)  
상병 이석재   2009-02-06 12:03:55, 조회: 187, 추천:0 

Scene 11


이번엔 유럽과 중국에서 좀 탈피해서 중동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도록 하죠. 이슬람이 중동에서 발흥하기 전까지 중동은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양대산맥이 중동을 가지고 경쟁하는 시나리오였습니다. 물론 두 나라는 서로 싸우는데 급급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짓쳐 올라오는 마호메드의 군대를 막을만한 여력이 없었지요. 사산조 페르시아는 비잔티움을 공략해서 이집트와 시리아 지방을 일시 점령할 수 있었지만 바로 비잔티움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게 되죠. 그 약간의 공백기간동안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은 이집트와 사산조 페르시아로 동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했고, 그의 후계자들[이른바 ‘칼리프’라고 총칭되는]이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이슬람의 세력은 확장되었습니다. 비록 시아 알리가 암살되면서무함마드의 후손들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 이슬람의 계보를 잇게 되었지만, 그들은 이란을 공략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프랑스에도, 아나톨리아를 거쳐 비잔티움을 무려 3번에 걸쳐 공략하는 등(주1) 활발한 정복활동을 거쳤습니다. 만약 투르-푸아티에 전투나 비잔티움 공방전이 없었더라면, 이미 이슬람의 세력이 중부 유럽까지 다가가게 되었겠지요. 물론 그런 상황은 없었습니다.


이슬람의 영토가 넓어졌다고 해서, 그 영토가 오직 하나의 왕국 아래 통합된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정통 칼리프’시대라고 하여 4대인 시아 알리라는 칼리프 시대까지는 무함마드의 혈족, 또는 친인척이 칼리프 직위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부족 세력들은 칼리프의 직위를 무함마드의 혈족이 아닌 부족장 회의를 통해 선출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결국 시아 알리가 기도중에 살해당함으로서 무함마드의 혈족을 계승하고 지원하는 ‘시아’파와 부족장회의를 통해 칼리프를 선출하고자 하는 ‘수니파’의 두 종파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시아, 수니말고도 수많은 종파가 나타나면서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정통칼리프 시대를 거쳐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란지역을 주 거점으로 하여 페르시아, 이베리아, 북아프리카를 정벌하기 시작하지요. ‘우마이야’가문이 통치하던 우마이야 왕조는 그러니 이슬람 중심주의, 친인척 등용 등으로 반대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결국 우마이야 왕조는 무너졌고 우마이야의 잔여세력들은 이베리아로 도망가 후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합니다.(주2) 그리고 지금의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압바스 왕조’가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하죠.


하지만, 압바스 왕조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슬람의 수많은 종파들이 각자의 세력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아랍세계 내부에서도 점차 분열의 기운이 높아져 갔습니다. 압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와는 다르게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간의 교류를 존중했고, 비이슬람인들의 권리를 존중해 주었지만 독립세력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집트 지역은 파티마->맘룩조(주3)로 이어지는 이슬람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고 압바스 왕조의 중동지역은 수많은 왕조들로 쪼개지게 됩니다. 그 수많은 왕국들이 자세하게 기억은 안나는군요. 뭐 이란 따로 이라크 따로 논걸로 기억하지만.. 하지만 이런 이슬람을 위협하는 첫번째 세력이 등장합니다. 바로 몽골세력이 중동에 등장한 것이지요. 이란의 호라산 왕국을 점령한 그들은 중동으로 끊임없이 침략했고, 이집트의 맘룩조에 의해 저지당할때까지 중동 전체를 석권, 일 한국(주4)를 건국하게 됩니다. 중동 전체가 몽골족에 의해 점령당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일 한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지금의 카프카스(주5) 지역에서 넘어온 이민족인 투르크 민족에 의해 축출당하게 되지만, 몽고의 역사는 다른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슬람의 문화로는, 과학중심적인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그 과학중심적인 문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문화에서 받아온 것이 많습니다. 고대 그리스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비잔틴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기 때문이였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연구하기도 했고 중세시대의 중요 특징중 하나인 야금술, 연금술, 기초과학또한 이슬람에서 발전하다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다시 유럽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결국 유럽-> 이슬람 -> 유럽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슬람 종교 자체는 ‘유일신’입니다. 또한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지요. 타 종교인원들에게 약간의 인두세만 지불하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해주었습니다만 일반 농민들에게는 그 약간의 인두세마저도 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쉽게 이슬람으로 종교를 옮길 수 있었지요. 그 후 이슬람으로 들어오는 이민족들은 같이 동화되어 포교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슬람은 기독교의 예수도 ‘그 시대의 선지자’로서 인식합니다. 애초부터 이슬람 자체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기독교의 선지자 사상 등등을 이어받아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세계 최후의 선지자는 무함마드라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유럽 중세의 역사에 대해서 의논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슬람의 역사로 조금 뛰어버린 감이 있으니 중국도 당나라, 5대 10국, 송나라까지는 설명을 해야 몽고의 역사로 넘어갈 수 있겠지요. 유럽 중세의 각 국가들의 알력들도 다뤄볼까 합니다. 중세에 형성된 알력들이 근대에까지 넘어와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다음시간에 뵈요오.


주1- 비잔티움 공방전 : 이슬람은 비잔티움의 중동을 차지한 이후 3차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방전을 펼쳤습니다. 이슬람의 해군들마저 동원된 3차 공방전의 결과는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문, 석유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에서 꺼지지 않는 불, 이른바 ‘그리스의 불’등을 이용한 비잔틴 제국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이슬람군대는 비잔티움의 중심부를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문, 즉 성벽이 3중으로 둘러쳐져 있는 이 벽은 수백년간 철옹성으로써 활약해 왔지만 1452년 오스만 투르크의 거대 대포에 의해 파괴,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주2 ? 후 우마이야 왕조 :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어인(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이슬람 인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들의 국가입니다.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지만 후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후 이베리아반도는 여러 무어인들의 공국들이 난립하는 형상을 띄게 되었고 그 틈을 타 기독교 세력들이 점차 발흥하기 시작하려 레콩키스타가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3 ? 맘룩조 : 지금의 이집트 지방에 자리잡은 이슬람 왕조입니다. 파티마 왕조를 몰아내고 맘룩조가 들어선 후, 살라딘이 이 맘룩조를 몰아내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는 체제입니다. 러시아에서 타타르(몽골인을 지칭하는 유럽인들의 말입니다.)의 정복으로 인해 발생한 노예들을 수입, 이른바 ‘노예부대’를 만들어 중동을 차지하러 내려오던 일 한국의 군대를 격파하게 됩니다. 일 한국이 패배하게 됨으로서 몽골은 아프리카 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4- 일 한국 : 지금의 중동에 자리잡은 몽골의 분권 왕조입니다. 몽골이 한 나라로서 통치한게 아닌 원나라, 일 한국,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 한국등 각 지역을 정벌한 칭기스 칸의 아들들이 분권 정권을 세운 후 그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 한국은 그러나 오래 버티진 못하고 투르크 민족에 의해 축출당하고 맙니다. 


주5- 카프카스 :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현재 카프카스 지역에 모여있는 세 국가입니다. 터키와 러시아의 접경지대로서 ‘카프카스 산맥’이 있습니다. 소련시대에는 소련의 영토였지만 러시아로 변화함으로서 이 3국또한 독립했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는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의 멸망 이후 2차대전 때까지 독립을 요구했지만 그때까지 실패했습니다. 결국 아르메니아는 독립하긴 했지요. 하지만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영토분쟁과 이민문제로 인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그루지야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석유산지로 향하는 길목이다보니 2차대전시 독일도 이 지역을 노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좌절당하고 말지만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2:54 

 

병장 이지훈 
  무함마드, 마호메트 이름을 통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뭐, 인지의 문제도 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어식 발음인 마호메트보다는 원 발음에 가까운 무함마드가 나을 것 같군요. 세총보다 세종이 낫듯이 말이죠. 

주1에 약간의 애드온을 덧붙이자면, 철옹성을 깨뜨린 것은 거대 대포의 힘도 있지만, 열려 있던 쪽문(그 문의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군요. 속담도 생겼다던데...)때문에 결정적으로 함락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정면은 대포 펑펑 쏴대도 쉽게 뚫리지 않았는데 정작 단단한 정면 옆으로 돌아가보니 우연찮게 작은 쪽문이 열려있던 것이죠. 허허 

좀있다 자세히 읽어봐야겠네요. 너무 촤좌작 읽어내렸군요. 
잘 봤어요 2009-02-06
13:24:06
  

 

상병 이석재 
  병장 이지훈/ 사실 그 '작은 쪽문'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쪽문으로 들어가기전에 이미 수비병력들이 거의 전멸수준이라 어차피 거기서 거기였다는 설, 최후의 공격이 실패하고 후퇴하려던 참에 쪽문이 열려있어서 거기로 쏟아들어갔다는 설. 어느 설이든 간에 그 해의 콘스탄티노플은 서유럽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유럽은 백년전쟁에, 로마와 신성로마는 또 싸우고 있었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동유럽에 관심이 없었으니 그때 콘스탄티노플을 도울 세력은 거의 전무했지요. 그리고 이름은 무함마드가 좋겠지요? 2009-02-07
08:10:01
  

 

병장 이지훈 
  석재// 

그렇다면 마호메트를 무함마드로 수정 고고 입니다. 흐흐 

그 쪽문 이름이 6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허허. 외국 이름은 왜 이렇게 기억하기 어렵죠? 쩝. 책[광기와 우연의 역사-슈테판 츠바이크]을 다시 찾아봐야겠네요. 본지 꽤 되었는데 말이죠. 아, 그 책에서 다룬 내용은 석재님이 말씀하신 후자의 설에 가깝겠군요. 2009-02-07
16:50:22
  

 

상병 이석재 
  수정했습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이미 수비병력이 전멸수준인 상황에서 쪽문이 열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도 문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쩝쩝. 2009-02-07
17:02:42
  

 

병장 김동욱 
  석재님의 해박한 역사 지식 앞에서 주눅드는 건 어쩔 수가 없지만. 

1. 제목에 scene의 숫자가 넘어가는 것보다는 간단하게라도 부제가 달려있으면 좋겠습니다. 11개의 내용들이 각각 어떤 것인지 구별하기도 힘들기도 하고, 단순히 "H.I.S - Scene 11" 라고 적혀있기에 사람들에게 어필하기도 어려울 거라고 보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많이 클릭했으면 좋겠다, 보다는 제목을 구체적으로 닮으로써 석재님에게도 그리고 저희에게도 문제의식을 더 편하게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지금 같은 형식도 좋지만 현재적인 의미를 뽑아낼 수 있는 글을 기획하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물론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 현재를 되돌아보는 측면이 없진 않고 지금과 같은 파노라마 식의 구성이 주는 매력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왠지 이 속에는 석재님이, 그리고 석재님의 스타일이 반영되는데 있어 제약을 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석재님이 취합하고 정리한 것 자체만으로도 석재님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겠지만. 그래서 지금과 같은 스타일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약간 따분해 질수도 있을 겁니다. 

좀 더 석재님의 이야기와 생각이 드러난 글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관한 한 찌질한 지식밖에 없지만 예를 들자면, 얼마전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이전까지 중동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고 앞으로의 포인트를 짚어주신다든지, 최근 한-중-일의 관계를 두고 1차세계 이전의 유럽의 몇몇 국가들과도 비교하는 경우도 있던데 이런 부분도 한 번 말씀해 주신다든지 말이지요. 이건 너무 어려운건가....그래도 석재님이라면! 낄낄. 

이상, 지나가는 이의 허접한 생각이었습니다. 2009-02-09
00:53:52
  

 

상병 이석재 
  김동욱님의 댓글, 잘 보았습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거 같군요. 전의 글들을 수정하는 방도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저도 사실 부제를 달려고는 했는데 마땅찮게 생각이 나진 않더군요. 허허 

현재적인 의미는, 아무래도 H.I.S가 끝나던지, 아니면 제가 쓰고 있는 작품들중 하나라도 끝나면 그 대신으로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것을 뽑아볼까 생각중입니다. 아무래도 현재 분위기가 더이상의 '환상소설' 뱉어내기를 불허하게 될 듯 싶으니, 제 외전을 빨리 종결시켜야 할 거 같아서요. 하나라도 끝내야죠. 허허. 2009-02-09
07:03:00
  

 

병장 이지훈 
  동욱// 

동감합니다. 저도 말하고 싶었던 부분인데...음..어렵더군요. 제가 예전에 쓴 역사학에 관련된 글들은 사실 석재님의 칼럼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직격탄은 아니었어요. 흐흐 이 한마디로 조금은 궤도가 수정되겠군요. 

우선, 이렇게 뽑아내는 석재님, 요즘의 현상님까지 노템전으로 생각했을 때 정말 말도 안되는 역사 지식을 보여주시고 있죠. 석재님은 세계사, 현상님은 한국사. 그래서 제 욕심을 융합해 직격탄을 날리기 어려워요. 덕분에 제 글은 매우 긴글이 되었죠.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란 걸 알고 있거든요. 근데 글을 보면 "으악"하고 경탄하고, 그걸로 끝인 경우가 많아요. 정작 보는 사람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죠. 고개만 끄덕끄덕. 오타 수정이나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글 자체가 굉장한 내공을 요하는 글인데 이 이상-현재적인 의미 혹은 우리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을 바라는 건 조금 욕심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부담을 드리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이 칼럼 자체가 애초에 역사를 일단 쉽게 후루룩 살펴보자는 의미로 출발한다고 얼개에서 밝혀주시고 있기 때문에...허허 

side의 1편이 당시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그 배경이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욕심이 더 생기는 듯도 하군요. 게다가 석재님은 제 글을 보시고 댓글도 다셨으니 제가 추구하는 바(?)도 알고 계시니까...제 욕심이 뭔지도 아시겠죠. 흐흐 뭐 그렇다구요. 그냥 욕심입니다. 흑 

...그리고 뜬금없지만 여전히 잘 읽고 있습니다. 2009-02-09
09:05:31
  

 

상병 이석재 
  지훈/ 어이쿠, 그것을 노리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기본 밑거름'인 H.I.S를 쓴 다음에 새롭게 다른 작품을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허허,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향후 방향에 대한 글을 써봐야겠군요. 

  [칼럼] H.I.S - Scene 12: 신은 휴가를 갔다 왔단다.  
상병 이석재   2009-02-09 21:34:32, 조회: 212, 추천:0 

Scene 12 ? 신은 휴가를 갔다 왔단다.

이번 칼럼을 시작하기 전에, 이 칼럼의 성격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HIS는 역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개론서입니다. Paradise나 주황색 물결이 끝나고 난 뒤에 여유가 생기면[이라고 쓰고, 전역날이 얼마 안남으면 이라고 읽겠지요] 현대 세계에 나타나는 여러 분쟁들을 과거의 역사와 함께 엮어 쓰는, Side and Side식의 칼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랄랄]


혹시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군요. 그 영화에서 중세가 왜 ‘중세(Dark age)인지에 대한 설명이 잠깐 나오지요. 뭐 설명이라기보단 개그입니다만..


“신도 휴가를 갑니까?”

“중세(Dark age)가 괜히 있는줄 아나보지?”


그렇습니다. 비록 어둠의 세계라고 칭하기에는 너무나 밝은 것들이 많았습니다만. 신적 광기와 명목을 중요시하고 실리를 따지지 않던 이 중세시대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 이 유럽의 중세시대 초기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비잔티움이 이슬람과 발칸의 불가리아, 세르비아등에게 점차 축소되고, 독일의 오토대제(주1)가 세운 신성로마제국이 점차 분권적인 체제로 바뀌어가던 때였습니다. 잉글랜드,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도시국가들과 교황령, 노르만족의 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 주위 국가의 포섭으로 인해 기독교를 선택한 중부유럽의 헝가리와 폴란드. 비잔틴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등등. 어휴, 참으로 많은 국가들 아닙니까?


잉글랜드는 로마의 세력이 철수한뒤로 스칸디나비아에서 들어온 색슨족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그래서 원주민인 앵글로족과 합쳐저 앵글로색슨. 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민족은 ‘바이킹’이였습니다. 색슨족 또한 바이킹의 일파로서 잉글랜드에 상륙한 것이지요. 이 바이킹을 싫어하는 민족들이 북쪽으로 옮겨가기 되는데, 이들이 바로 ‘켈트’족의 스코틀랜드입니다. 이때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지금까지도 두 나라 사이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주2)


프랑스는, 저번에도 보셨다시피 ‘프랑크 왕국’ 에서 분열되어 서프랑크왕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프랑크 왕국의 왕조는 제일 처음 카롤링거 왕조였지만, 금방 그 맥이 끊기고 카페왕조(Cafe가 아닌 Capet)입니다.가 들어섭니다. 프랑크 왕국은 잉글랜드와는 다르게 지방분권적인 색체가 강했습니다. 바이킹 같은 전투민족이 왕국을 세웠다는 것은, 곧 그 ‘왕’이라는 작자가 힘이 강했기 때문이였고 그 힘으로 다른 귀족을 눌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프랑스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에 다른 귀족들을 제지할만한 왕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 대세는 카페왕조 때까지 지속된 것입니다. 카페왕조는 말이 프랑스왕국의 통치자였지, 그 직할령은 파리 근교 조금이였으니까요. 다른 귀족들, 부르고뉴나 보르도의 귀족들이 남부 프랑스를 거의 장악한 상황이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이 프랑스와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되면 프랑스로서는 죽을 맛인 것이지요. 그 결과물이 후에 나올 ‘백년전쟁’입니다.


신성로마제국, 그 원형은 바로 프랑크 왕국에서 나온 동프랑크 왕국입니다. 오토대제는 그 동프랑크 왕국에서 지속되어오던 카롤링거 왕조를 이어 교황을 지원하고, 독일을 통일하게 됩니다. 마자르족에 대한 정벌도 신성로마제국과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폴란드, 헝가리와 함께 끝낼 수 있었지요. 북쪽에 대한 정벌을 끝내자 교황은 오토1세에게 카롤루스 대제에게 준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합니다. 이때부터 로마황제의 관은 교황의 씌워준다. 라는 규칙이 세워지게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관은 앞으로 교황의 씌워주게 됩니다(주3)


중프랑크 왕국, 역시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져나온 이들은 뭐 왕국을 세울 것도 없었습니다. 이미 북쪽엔 강력한 국가가 있었고 남쪽에서는 교황령이 점차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였지요. 결국 이탈리아는 북쪽에서 교황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침략을 받게 되고, 점령당합니다. 그러나 남쪽의 교황은 신성로마의 북이탈리아 점령을 절대로 좋게 볼 수 없겠지요. 생각해보면 자기 머리위에 돌이 떨어지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결국 북이탈리아는 두 세력간의 중립지역 비스무리한 곳으로 남게 되고, 그 틈을 타 그곳에서 도시국가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페인에서는 후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후 점차 조그마한 이슬람 국가로 분열되던 시기였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라크에 있던 부와이 왕조를 멸망시키는 동안, 스칸디나비아의 덴마크, 노르웨이등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받던 잉글랜드는 프랑스 노르망디 반도(주4)에서 건너온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노르만왕조를 시작한 윌리엄 1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스칸디나비아 세력을 무찌르고 잉글랜드에 노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사람들을 투입하게 되지요. 사실 잉글랜드가 좀 민족의 짬뽕이긴 합니다. 


이렇게 서유럽세계는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드디어 등장할 십자군 전쟁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중세기간동안 사람들은 ‘장원’이라는 곳에서 농노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농노는 농부와 노예의 줄임말. 경작을 하면서 살아가긴 하는데 이동의 권리나 기타 등등해서 그 성의 성주에 소속된 노예나 별 반 다를게 없었기 때문이지요. 장원은 그렇게 폐쇄적이였기 때문에 경제체제 자체는 자급자족이였습니다. 자급자족이였기 때문에 영토나 땅이 더 넓을수록 힘이 더 였 것이지요. 귀족세력이 왕권세력을 누를 수 있는 것도 왕이 다스리는 직할령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도록 귀족들이 끊임없이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문화자체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비롯된 문화사업이 ‘교회’를 통해 전 유럽으로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 수도사들이 할게 없으니 책이나 베끼면서 과거의 책들을 필사, 보급했던 것이지요. 아직까지 성경은 수도사들의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카톨릭을 믿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교회를 필수적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정신수준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킬만한 상황은 아니였던 것이지요. 성경책이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에야 종교개혁도 하고 뭐 그런것입니다. 그렇게 고대의 역사를 이어가기 시작한 수도사들의 노력은 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일단 고대의 책들이 남아있어야 그걸 보고 사유를 하든 사고를 하든 할테니까요.


다음 이시간에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껄껄.



주1-오토대제: 오토대제가 세운 왕조를 ‘작센’왕조라고 합니다. 신성로마에는 여러 왕조가 있었습니다. 작센왕조를 이은 잘리어 왕조, 신성로마제국 최초의 ‘제대로된 세습왕조’라고 할 수 있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등이 존재했습니다. 호엔슈타우펜 이후에는 황제가 선거로써 뽑히고, 그 뒤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제국의 황제위를 계속 계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2-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지금은 의회만 따로 분리되어 있고 외교적인 문제는 잉글랜드에서 총괄하는, 말 그대로 “연방제’국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가 유명한건 단지 스카치때문이라고 비웃고 있는 실정이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대로 빌어먹을 날씨 속에서 사는 녀석들이 뭐가 잘o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더군요. 이외에도 웨일스, 북아일랜드또한 연방의 일부입니다. 영국의 국기속에는 잉글랜드의 국기(하얀색 바탕에 적색 십자기)와 스코틀랜드의 국기(파란색 바탕에 하얀색 대각선 십자기)가 같이 합쳐져 있습니다. 


주3-신성로마제국의 관: 오토대제가 교황에게 황제 대관식을 받은 이후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서 대관받지 않으면 제대로된 황제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황제는 계속적으로 교황에게 압박을 넣어 대관식을 치루려고 했고, 교황은 교황대로 그 상황을 최대한 질질끌어 황제를 자신의 손에서 놀아나게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처음엔 ‘카놋사의 굴욕’등으로 교황세력이 일시 성장했으나, 카놋사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는 그 굴욕후 교황을 사로잡아 유배보내버리게 됩니다. 뭐 그건 복수극일 따름이고 굴욕은 굴욕이였으니..카놋사의 굴욕이 뭐냐구요?(주 3-1)


주3-1:카놋사의 굴욕: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하 4세와 교황권의 수호자 그레고리우스 7세간의 알력다툼입니다. 보름스라는 곳에서 황제는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교황은 교황대로 황제를 파문합니다. 파문은 중세인들이 가장 안좋게 봤던 것으로 더 이상 인간이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한다는 교황의 선언이엿지요. 결국 그 파문으로 인해 독일 내 반황제파들이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자 황제는 카놋사라는 성에 있던 교황에게 찾아가 싹싹 빌고 파문을 철회합니다. 그러나 그 뒤로 권력을 다시 쌓아가던 황제는 반황제파들을 싹쓸이해버리고, 다시 파문을 선언한 교황을 로마까지 쳐들어가서 내쫓은 다음에 친황제파 교황을 등극시켜 버립니다. 


주4-노르망디 반도: 노르만의 땅이라 하여 노르망디라고 한답니다. 프랑스가 계속된 해적질로 인해 허덕이자 프랑스는 노르만인들에게 땅을 주고 그땅에서 사는 대신 해적질을 하지 말도록 하게 됩니다. 이 땅을 주요중심지로 삼은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까지 내려가 이슬람인들을 물리치고 그 땅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삼은 후 비잔틴제국마저 노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사에서는 그 유명한 오버로드 작전[... 저그의 그 오버로드가 아니라]이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현장이 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03 

 

병장 김정우 
  마침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 저작집을 읽는 중인데.. 얼추 비슷한 시기 이야기가 나오니까 반갑네요. 사실이란건 때론 픽션보다 더 흥미롭기도 하죠. 

물론 흥미나 상식측면으로서의 역사는 실제 역사의 아주 작은 면이고, 학문으로서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곤 하지만..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이렇게 조그만 사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것도 재미있지요. 

아무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연재하신거 다 챙겨보겠습니다.(웃음) 

그나저나 마지막부분은 살짝 짤린것 같군요? 중요한 부분은 거의 다 나온것 같긴 하지만.. 2009-02-10
02:03:24
  

 

일병 장봉수 
  아... 재미있군요. 
오랜만에 역사공부네요. 후후. 
그리고 브루스 올마이티... 
감동받은 영화죠.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더욱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고 수도사의 필사라.. 
역시 도서관은 교회에서 인가요? 2009-02-10
02:15:17
  

 

상병 이석재 
  병장 김정우/ 그래서 수정했습니다. 저도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처음엔 교과서로 시작했고, 점차 깊고 깊은 책들을 탐구해가면서 조그마한 사실을 새롭게 알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제 연재를 사랑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2009-02-10
12:52:22
  

 

상병 이석재 
  일병 장봉수/ 그렇습니다. 책이 대량으로 찍혀나오기 전까지 필사로서 책의 보급을 전담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지식'이라도 갖춘 수도사들이 그 일을 해야만 했으니까요. 


 [칼럼] H.I.S - Scene 13: 너무나 붉은 십자가  
상병 이석재   2009-02-11 23:57:42, 조회: 174, 추천:0 

Scene 12


드디어, 십자군의 세계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십자가를 맨 사람이라는 뜻인 Crusader는 이교도를 물리치고자 하는 기독교 세계의 자발적인 운동… 이라고는 하지만 다들 흑심을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십자군운동의 시작은 우르바누스 2세가 공의회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운동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비잔티움이 이슬람에게 뺏긴 뒤로 이슬람령이 되어 있지요.(주1)그러나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제창한 명목적인 이유는, 비잔틴제국의 SOS요청 때문이였습니다.


그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만지케르트 전투(주2)이후에 혼란기를 바로 잡은 알렉시오스 콤네누스였습니다.(어디서 많이 보셨다구요? 낄) 이슬람의 계속된 확장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그는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였고 우르바누스 2세는 좋다고 그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과연 그들이 그리스정교를 돕고 싶어서 카톨릭의 이름으로 도와준 것이였을까요?


초기 기독교에는 5대교구라서 해서 총대주교가 머무르는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이 5개 도시이지요. 하지만 이슬람의 공격으로 인해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이 3개도시는 다른 종교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로마 교황은 이 3개의 도시를 차지하여 ‘친로마파’인 총대주교를 세워 다른 나머지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나 그의 후원자라고 할 수 있는 비잔틴제국의 황제를 누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비잔틴제국에 로마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던 좋은 기회를 서유럽의 사람들이나 교황으로서는 좋은 기회였던 셈이지요.


게다가, 서유럽의 체계는 프랑크 왕국의 얘기에서 했듯이 장자상속체계입니다. 물론 프랑크의 초기에는 ‘권력분리’를 우선시했지만, 점차 중세 군주제가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권력을 가장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장자상속을 우선시 했기 때문이지요. 그 덕분에 장자가 아닌 사람들은 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그런 차에 ‘신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비잔틴제국과 중동에 공짜로 데려다준다니, 이런 기회가 어디있었겠습니까. 


뭐 원래 1차 십자군 전엔 피에르가 이끈 은자 십자군이 있지만 이 십자군은 아나톨리아에서 자멸했으니 넘겨두고, 결국 고드프루아, 레몽등이 이끈 1차 십자군이 발족하여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합니다.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고 주인인양 행세하는 십자군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일단 도우러 왔다니까, 어쩔 수 있나요. 보내줘야지. 하지만 알렉시오스는 한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그들의 상위 군주는 비잔틴 황제라는 것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십자군들이 점령한 땅은 모두 비잔틴 제국령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나서는 그 약속을 단번에 어겼지요. 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건 사실 이슬람이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살라딘, 장기(주3)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점차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여러 기독교 국가들(주4)들이 점령당하기 시작하지만, 아직까지 십자군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기 때문이지요. 이제 그들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알렉시오스는 자신들의 영토를 내놓으라고 그러고 십자군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 왕’을 선언하고 그 지역의 모든 국가들은 비잔틴이 아닌 예루살렘 왕국의 밑으로 편입됩니다. 알렉시오스는 당연히 화가 났지요. 그래도 안티오크나 중부 아나톨리아의 일부는 수복할 수 있었으니 그들로서도 그렇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였습니다.


3차십자군은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사자심왕 리처드, 존엄왕 필리프(주5)등이 나섰지만 프리드리히 1세가 강물에 빠져죽고 리처드가 살라딘과 협상을 체결하면서 끝을 맺게 됩니다. 이 십자군때 예루살렘이 빼앗겼지만 나중에 2년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다시 이곳을 되찾지 못하게 되지요.


4차 십자군은 이슬람을 치랬더니 이게 왠걸, 베네치아가 돈빌려줬는데 못갚은 겁니다. 제노바의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점차 퍼져가는 것을(주6)맘에 안들어하던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돈 받는 대신 공략해 줄것을 요구했고 결국 그들은 해내고 맙니다… 그래서 비잔틴제국은 라틴인들이 세운 라틴제국, 비잔틴 제국의 망명정부인 에피루스 왕국, 니케아 왕국, 트레비존드 왕국등으로 분열됩니다. 결국 60여년만에 니케아 왕국이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지만 그 깊은 상처는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 외에도 이단인 알비파를 제거하기 위한 알비십자군, 노예로 끌려가버린 어린이 십자군, 아이유브 왕조의 내전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일시 받아낸 6차 십자군등이 있지만, 1차 십자군 이후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구요? 이제 그 마법이 풀렸거든요. 이슬람의 세력은 점차 성장해오지, 자기 땅 지키기도 벅차지, 이제 더 이상 중동에 메리트가 없었던 것이였습니다. 결국 9차십자군을 끝으로 십자군은 종료됩니다.


이 십자군전쟁에서 가장 이득을 본 곳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였습니다. 중동으로의 교역로를 완성하여 수많은 이득을 본 것이지요. 그다음은? 왕들이였습니다. 자신들의 잠재적인 위협을 중동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지요. 그다음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이였습니다. 뤼지냥 같은 경우는 원래는 상속받는 것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기독교 국가들중 하나를 냉큼 집어먹을 수 있었고, 안티오크 후작령이 점령당한 뒤에는 키프로스로 도망쳐 뤼지냥 왕조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럼 제일 안좋은 사람은? 교황이였습니다. 자신의 권위로 지원군을 파견했는데 이거 왠걸, 패배하고 예루살렘은 얼마 점령을 못한것입니다. 결국 교황의 힘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결국 교황은 그렇게 점차 힘이 약화되게 된 것이고 그에 따라 황제들의 권력이 점차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시면, 수만명의 군대가 집결해서 파견을 가려면은, 그만큼 지지기반또한 커야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왕권이 강력해져서 도시와 경제를 재정비하고, 군사적인 면으로 집중할 수 있는 권력이 만들어져야 했지요. 그것이 십자군 운동을 통해서 정립된 것입니다. 결국 왕권이 신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슬람의 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에 남아있던 고전문학 연구자료들이 서유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비잔틴제국은 4차 십자군운동 등으로 인해 서유럽의 카톨릭세력과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비잔틴제국 말기에 가서야 ‘문서상의’ 교회통일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결국 카톨릭과 그리스정교는 다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군운동은 끝났고, 이슬람의 과학과 고전문명을 다시 이어받은 서유럽은 북이탈리아의 경제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가 꽃피며, 중앙집권체제 또한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슬람세력도 기독교 침략에 맞서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유럽과 이슬람이 대등하게 싸운 것은 이때뿐이였고, 결국 두번째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의 식민지 확장 전쟁에서는 이슬람이 대대적으로 패배하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요. 다음 시간에는 다시 중국영토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잇힝 


주1-이슬람의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 들른 것 때문에 성지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무려 3개 종교의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2-만지케르트 전투: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와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이 아나톨리아 동부의 만지케르트에서 맞붙은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배신으로 인해 패배한 비잔틴 제국은 그 뒤로 아나톨리아로 투르크의 침입을 허용, 더 이상 아나톨리아 중부지역을 되찾지 못하게 됩니다. 해안가만 점령하고 앉아서 근근히 버텨나가야만 했지요. 아나톨리아의 상실은 비잔틴 제국에게는 인재 풀(Pool)과 생산성의 대폭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였습니다.


주3-살라딘, 장기: 장기는 초한싸움인 그 장기가 아니라..[퍽퍽퍽], 중동지역을 장악한 이슬람 군주입니다. 기독교 세력을 격파하면서 다녔지만 어느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고, 장기가 세운 왕국인 장기 왕조는 그 뒤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다른 왕국에 흡수되었습니다. 살라딘은 아이유브왕조의 시조로서 노예부대인 맘루크 부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는등 수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사자심왕 리처드랑은 전쟁의 영웅들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친분을 유지했지요. 


주4-기독교 국가들: 에데사 백국, 안티오크 후국, 트리폴리 백국, 예루살렘 왕국을 일컫습니다. 1차십자군 참가자들이 세운 국가로서 예루살렘 왕국이 기독교국가들중 상위국가였지만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결국 아크레가 함락당함으로서 중동에 있는 기독교 국가들은 사라졌고, 중동에 ‘비 이슬람’국가가 세워지기까지는 2차대전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주5-프리드리히, 리처드, 필리프: 붉은수염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서유럽에 제국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싸웠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름인 바르바롯사는 나중에 히틀러가 차용하기도 하지요. 북부이탈리아를 신성로마제국에 완전하게 편입시키기위한 노력을 진행했지만 십자군 운동에서 사망함으로서 이탈리아도시들은 한숨 돌렸지요. 필리프는 프랑스, 리처드는 영국왕이였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애초부터 사이가 안좋아서 중동에서도 이 안좋은 사이는 유지되었습니다. 결국 필리프가 본국으로 먼저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3차십자군은 리처드 혼자서 유지해야 했지요. 결국 십자군 종료 후 돌아가지만 필리프는 프랑스에 돌아온 리처드를 영국에 남아있던 그의 동생인 존과 합심하여 가두어버립니다. 결국 돈을 내고 영국에 어렵게 돌아오게 되었지만 왕위는 다시 되찾지 못했지요. 이래저래 ‘사자심왕’이지만 비운의 왕이기도 합니다. 


주6-제노바와 베네치아:이탈리아 북부도시들중 가장 최고를 달리던 두 도시들이였습니다. 제노바는 주로 흑해무역을, 베네치아는 중동무역이 주요 교역 루트였지요. 비잔틴이 4차십자군으로 옛날 자신의 속주였던(비잔틴제국 초기시, 베네치아는 비잔틴의 자치도시였습니다.)베네치아를 버리고 제노바를 선택하면서 그리스 지역에서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싸움은 계속됩니다. 이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건 오히려 비잔틴제국이였지요. 결국 누구도 이기지 못한채 중동무역은 오스만투르크에 넘겨줘야만 했고, 베네치아는 레판토 해전 이후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제노바는 프랑스와 신성로마등에 편입되는 역사를 겪어야만 했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13 

 

병장 홍승표 
  십자군 전쟁을 보니까 창세기전이 떠오르는건....(웃음) 
나오는 이름까지도 캐릭터 이름과 유사하고.... 
글 잘보고 있습니다.. 2009-02-12
03:27:52
  

 

책마을 
  바우돌리노가 떠오르는군요. 2009-02-12
07:27:00
  

 

상병 이석재 
  병장 홍승표 / 감사합니다. 허허허. 창세기전이 역사속의 여러 인물의 이름을 차용했지요. 클라우제비츠부터 얀 지슈카까지. 허허 

책마을/ 누굴까요, 김예찬님의 느낌이 들지만. 그 프리드리히의 양자를 다룬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주인공 말이군요. 하지만 그 내용만 알지 자세하긴 읽어보진 못했어요. 한번 읽어볼까.. 2009-02-12
21:01:33
  

 

병장 홍승표 
  역사속 인물을 차용한것도 있긴 합니다만... 
제가 알기로 창세기전3 파트1에서 팬드래건 왕국이 투르침공하는걸 십자군전쟁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들은바가 있어서요. 
 [칼럼] H.I.S - Scene 14: 당나라 군대  
상병 이석재   2009-02-15 23:01:19, 조회: 318, 추천:0 

수나라는 북조의 세력이였던 북주에서 살던 한인 귀족출신인 양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조의 여러 국가들은 선비족 귀족계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북조의 국가중 북제는 돌궐(주1)족과 싸우다가 북주에게 멸망당했고, 북주는 외척세력의 발호로 쇠하다가 선비족에게 눌려살던 한인 귀족계층의 반란에 의해 뒤집히게 된 것이지요. 양견은 이참에 남조에서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있던 진(陳)을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시킨 네번째 나라가 된 것입니다.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자, 중국 주변세력도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한나라의 통일 시기때는 흉노족이 있었다면 수나라의 통일 시기때는 돌궐이 있었던 것이지요. 수나라는 이 돌궐과는 무력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북제가 돌궐과 싸우려다가 내부 혼란으로 인해 무너진 꼴을 잘 보았기 때문이지요. 수 양견은 이 돌궐을 이간질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고 동돌궐을 복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돌궐은 그대로 내빼서 유럽지역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 밖에도 아직까진 돌궐의 세력하에 있던 거란족, 그리고 고구려등이 수나라 주위에 있던 이민족들이였습니다. 거란은 돌궐의 세력하였지만 돌궐이 무너짐으로서 내부 발전을 이룩, 수나라랑 격돌하지만 수나라는 새싹은 일찍 잘라버려야 한다면서 거란을 격퇴합니다. 이후에 거란이 나타나는 시기는 당나라 말기, 즉 송나라가 등장할 시기쯤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 뵙지요. 낄.

수나라는 문화적으로는 중국적인 것을, 군사적으로는 선비족의 것을 취했습니다. 양견이 선비족과 한족의 융화정책을 취한 덕택이였습니다. 수나라때부터 시작된 3성 6부제(주2)는 당나라때 그 꽃을 피우지만 그 시초는 수나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성하여 총관을 통한 황제의 직접통치가 쉽도록 하고, 조세, 부역문제를 해결하여 민중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관료’계층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제 등을 통한 관료계층을 구성함으로서 황제를 받춰줄 지지계층이 필요했지만, 국가가 이어질 수 있는 장기적인 플랜이 수나라에는 전무했습니다. 그 결과 황제의 옆에서 샤바샤바 거리는 관리들만 남게 된 것이지요.뭐 운하건설 얘기도 있고..(주3)

수 문제 양견은, 흔히 자신의 아들에게 암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첩과 샤바샤바한 아들을 혼내자 그 아들인 수 양제가 원한을 품고 양견을 암살했다고 했지요. 문제는 씀씀이도 컸지만 국가를 그냥저냥 이끌어나간데 반해 양제는 씀씀이만 컸습니다. 결국 고구려와의 3차에 걸친 대대적인 전쟁을 ‘실패’로 이끈 덕택에, 반란의 기운은 더욱 커져만 갔고 결국 그는 장강 이남으로 튀었지만 그곳에서 자살하게 됩니다. 다시 전국은 혼란에 빠져가게 된 것이지요.

이때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당나라의 이연입니다. 이연이 등장하자 세력은 2개로 나뉘었지요. 중원을 차지한 당국공 이연과, 수나라의 잔여세력을 흡수한 우문술(주4)의 두 아들이 남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지요. 그 외에도 중원 전체에는 잔여세력들이 즐비했습니다만 이연은 자신의 아들인 이세민을 선봉으로 삼아 수나라 잔여세력도 흡수하면서 전국을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세민은 셋째아들이라 황제에는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였지요. 그는 결국 반란을 일으켜 형과 동생을 죽이고 결국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됩니다(주5)

그러나 이세민은 자신의 연호인 ‘정관’의 이름을 딴 정관의 통치(정관지치)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됩니다. 비록 고구려 정벌이 다시 실패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잃게 되지만, 서역을 정벌하게 됩니다. 비록 이슬람세력과 격돌하여 패배하지만(주6) 서역을 안전하게 개척하여 교통로를 뚫을 수 있었고 더불어 진정한 중원으로서 개방적인 문화를 통해 서부에서 들어온 ‘이단’인 네스토리우스 파, 페르시아의 종교로서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 사원까지 온갖 종교의 향연이 벌려지는가 하면, 이민족들을 관리로 등용하는 체제를 완성시켜 그 유명한 해상왕 장보고가 탄생하는 계기도 만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외에도 수나라의 3성 6부제를 완성시킬 수 있었고 승려인 현장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받아오는 서유기의 시대가 시작되는것도 이 당나라입니다. 또한 강제적으로 병사를 징집하는 부병제 대신 농부는 농부대로, 병사는 병사대로 나눈 모병제가 시작되는 시기도 당나라입니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가 잠시 득세하지만(주7), 다시 이씨가 세력을 잡아 당나라로 복귀합니다 당 현종의 시기에는 역시 연호를 딴 개원의 치세(개원지치)라고 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양귀비에 빠진 현종은 정치를 등한시하고, 당나라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게 되면서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주전충이 당나라에서 양위받음으로서 당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당나라는 그 개방적인 문화를 꽃피웠지만 군사적인 문제를 황제가 아닌 ‘절도사’라고 하는 국방지역을 담당한 신하들에게 맡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권력이 강할땐 복종했지만, 정작 약할때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주전충또한 절도사로서 당나라를 뒤집었으니, 결국 자신의 손에 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로군요.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의 다시 혼란기로 5대 10국의 시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처음으로 국사로 복귀해봅시다. 더불어 일본의 역사도 다루도록 하지요. 


주1: 돌궐-유럽에서는 이들을 ‘투르크’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중동으로 밀어닥친 투르크의 세력은 이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돌궐족입니다. 이 투르크족은 이슬람의 종교를 받아들여 종교적인 정치지도자인 칼리프와, 세속적인 군사지도자인 술탄의 이름을 모두 얻어내고 중동의 통일 세력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도 이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기 때문이지요. 

주2: 3성 6부제-후에 등장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기본적인 정부구조체제의 원형이 됩니다. 상서성, 문하성, 중서성의 3성, 예부, 병부, 형부, 공부, 도지부, 사부의 6부로 나뉘어집니다. 후에 당나라를 비롯, 고려, 조선등 우리나라의 국가들도 이 3성 6부제를 취합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도 역시 이 3성 6부제를 약간 고친 형태로서 정부체제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3: 운하- 이 운하에 대해서는 2가지 상반된 이론이 있습니다. 남부지역의 물자를 정치적인 중심지인 장안으로 옮겨 경제적인 균형을 이루고 국가를 발전시킨 측면도 있지만 수많은 노역으로 인해 반란의 단초가 되었다 라는 이론이 있지요. 그러나 당나라도 이 운하를 쏠쏠하게 써먹었으니 수나라가 총대를 매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주4: 우문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을지문덕에게 별짓거리 다당한 그 장수입니다. 공이 높으니 만족하고 꺼져달라는 편지까지 받았지요. 

주5: 그 뒤로, 어느 나라에서 똑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되지요. 어쩌면 이세민을 벤치마킹했을수도요. 태종 이방원, 이세민과 참으로 닮은점이 많았지요.

주6: 고선지: 고구려의 옛 장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역 정벌에 큰 공을 세웠지만 탈라스 강가에서 이슬람세력에게 패해 결국 미완의 완성으로 남게 되었지요.

주7: 측천무후: 중국 최초의 여황제입니다.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마음대로 부려서 결국 자신이 여황제가 瑩嗤 늙고 병들자 신하들이 다시 뒤집고 그녀의 아들을 왕위로 복위시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측천무후를 따라하고자 하는 황후에게 암살당하고, 결국 그녀의 손자가 황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녀의 손자가 누구냐구요? 당현종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20 

 

상병 정해룡 
  유익한글 끌끌 황제건 일반 사람이건 여자를 잘만나야한다는 교훈만!얻고싶군요 2009-02-15
23:35:20
  

 

상병 윤영준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냥 이것저것 부연설명으로 생각나는대로 붙여봅니다. 
당 멸망은 안-사(안녹산-사사명)의 난이 시작이죠. 이때부터 절도사의 권력이 무지막지하게 커지니까요. 이미 중앙정부는 실질적인 힘을 잃었습니다. 

주5 부연 - 현무문의 난이겠죠. 참 권력이란 것은 무서워요. 형제까지 죽이는 판이니.... 

주6 부연 - 고선지는 당의 고구려 정벌 직후 수많은 유민을 여러지역으로 분산시켰지요. 고선지는 그 분산된 유민들 중의 후손이었을겁니다. 그리고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의 제지술이 서역으로 전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고요. 2009-02-16
00:41:15
  

 

상병 김상윤 
  중국의 오랑케 사상덕분인지 
돌궐과 투르크는 느낌이 전혀 다르네요 으음 2009-02-16
06:38:18
  

 

상병 이석재 
  정해룡/ ... 낄낄, 그런 결론도 도출되는군요. 

상병 윤영준/ 안-사의 난 이름이 쓸때는 기억이 안나는군요. 아무래도 부연에 대해서 수정을 좀 해야할 듯도 싶군요. 껄. 
김상윤/ 한자랑 영어표기가 좀 달라지지요. 흉노족이 훈족이 되기도 하고.. 2009-02-16
06:56:09
  

 

일병 송기화 
  으악, 돌궐이 투르크로군요. 이 빛나는 무식이란. 
그런데 그걸 아는 순간 느낌이 정말 새로웠어요.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는 이 기분이란. 아 또 무식을 빛내고 있군요. 잘읽었습니다. 2009-02-16
13:32:22
  

 

상병 이석재 
  현무문의 난 - 태종 이세민이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의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황세자 자리를 꿰찬 사건입니다. 형과 동생은 이세민이 점차 권력을 키워가자 그를 두려워하여 아버지를 선동, 아들을 제거하려 하지만 아들은 먼저 눈치채고 아버지에게 가서 하소연을 하지요. 아버지인 고조 이연은 나머지 두 아들을 호출하지만, 큰아들은 현무문의 근위대장이 자기편이였기때문에 아무 의심없이 호출에 응합니다. 하지만 이세민이 그 근위대장을 포섭한 상태. 결국 황궁으로 들어오는 입구인 현무문에서 형과 동생은 근위대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세민은 형의 네아들마저 모두 죽인 채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됩니다. 2009-02-16
23:15:12
  

 

상병 이석재 
  안녹산 사사명의 난- 안녹산은 양귀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절도사로서 병력을 키운 뒤에 현종을 칩니다. 현종은 장안에서 촉의 수도였던 성도까지 도망갔고, 그 길에서 양귀비를 병력들의 강압에 못이겨 자살하게 방조합니다. 성도에 짱박힌 현종은 안녹산이 죽고 그 부하였떤 사사명까지 죽은 뒤에도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하게 됩니다. 안사의 난 뒤로 당나라의 농부 숫자는 급속히 줄어들었고, 경작력또한 약화되게 되어 절도사를 중심으로 한 분권정치가 성행합니다. 2009-02-16
23:16:54
  

 

상병 이석재 
  고선지에 대한 설명은..이미 잘 해주셨군요. 제지술이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으로 넘어가고, 그 이슬람에서 십자군 전쟁으로 서유럽으로 넘어가 제지술이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2009-02-16
23:17:41
  

 

병장 김민규 
  무어라도 리플을 달고 싶은데 이거 눈치로 때려잡아 쓸수도 없는 노릇이고 머리는 텅 비어 깡통소리만 나고 있고 궁시렁 

열심히 읽기라도 해야겠군요. 아 부끄러워, 도망가야지 
 [칼럼] H.I.S - Scene 15: 호랑이냐 토끼냐  
상병 이석재   2009-02-28 14:41:35, 조회: 247, 추천:0 

일주일동안 벌어진 소풍동안, 인간이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으헝헝. 하여튼 오랜만에 돌아온 H.I.S, 이번시간엔 우리나라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함께 설명하도록 하지요. 이나라의 역사도 결국엔 ‘세계사’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 진정한 역사는, ‘고조선’(주1)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은 이른바 ‘신화’와 ‘역사’의 중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왕검이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단군이라는 이름이 한 사람의 이름이다. 라고 보는 측면과 고조선을 통치하는 군왕의 이름이다 라는 측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군 조선’의 시대를 단군이라는 군왕들이 통치한 시대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고조선 전에 ‘쥬신 제국’어쩌구저쩌구 하는 중국 고대 역사에 등장한 ‘황제’와 싸운 ‘치우천황’의 얘기도 있습니다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거짓과 사실사이에서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므로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주2) 그럼 다른 시대가 있느냐? 조선은 단군의 시대로만 지속된 것은 아닙니다. 고조선이 중국에 예속된 국가였다는 중국측 주장의 기반이 되는, 은나라에서 건너온 ‘기자’가 고조선을 넘겨받았는데 이를 기자조선이라 하고, 기자조선 이후 역시 중국 연나라에서 건너온 위만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통해 고조선의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은 이렇게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단계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조선의 중국예속론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써먹는 떡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춘추전국의 7웅인 연나라와, 그 후에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의 지속된 공격으로 인해 패망하게 됩니다. 연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이였던 요서지역을 전쟁을 통해 얻어내었고, 한나라는 내부반란으로 인해 수도인 왕검성을 무너트리고, 그 지역에 한사군(주3)을 설치합니다. 고조선은 주위 지방정권들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그 연합체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조선이 멸망했지만, 고조선의 자리에는 부여, 고구려등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삼한이라 하여 마한, 진한, 변한등이, 함경도지역에는 동예, 옥저등이 여러 부족국가를 형성한채로 후에 닥쳐올 한반도의 난립세력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현도군을, 신라나 백제는 낙랑군(주4)상대하면서 점차 국력을 신장시켜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건국역사는 너무나 유명하므로 따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고구려는 낙랑에서, 백제는 고구려 지배세력의 원로들이 세운, 마한의 한 국가로서, 신라는 진한의 한 국가로서 점차 주위국가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주5), 고구려는 국내성, 지금의 압록강 상류에서부터 시작하였고 백제는 한강유역, 신라는 경주지역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한나라의 잔여세력들을 정리한 삼국은 후에 변한을 정리한 가야까지 합쳐 4국끼리 티격태격하기 시작합니다(주6) 이 삼국간 가장 중요했던 한강유역은 엄청난 쌀 생산력, 편리한 교통등으로 중요한 지역이였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백제가, 그다음에는 고구려가, 마지막엔 신라가 차지하면서 각각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백제는 성왕대에 이르러 한강유역을 일시 회복했지만, 배신으로 인해 좌절하고, 결국 신라를 침공하다가 패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패배이후 백제는 타격을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중국에서 새롭게 발흥한 수나라, 이후엔 당나라의 침략을 방어하긴 했지만 역시 타격을 입었던 것이지요. 신라는 구석에 박혀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침략에 더 안전하긴 했었기 때문에 격동의 8~9세기에 헤게모니를 잡고 통일국가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삼국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 많이 있지만, 그런건 나중에 따로 얘기하면 재밌을거 같기도 하고, 한국사의 대가는 따로 있으니까요. 다음시간엔 남북국시대와 일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주1-고조선: 고조선은 원래 국명이 ‘조선’입니다. 후대 역사가들의 14세기에 세워진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오래된 조선, 즉 고조선이라고 분리하기 편하게 지어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후대 조선이 ‘조선’이 된 이유는, 명나라가 고조선이 한나라에게 정복당했으니 조선이란 이름은 결국 중국에 복종하기 위해서 그렇게 지은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옛날 민족의 영기를 보존하고자 지은 이름이였다고 하니, 이런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한다지요. 

주2-한단고기: 이 내용의 근거는 한단고기라고 하는 책에서 출발합니다. 중국대륙과 시베리아, 한반도를 정복한 쥬신족과 중국대륙에서 떠오르던 한족과 티격태격 싸웠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몇몇 사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주장되어오고 있습니다만, 칼럼을 쓰는 본인은 믿지 않고 있습니다.

주3-한사군: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군을 한나라가 세운 4군이라 하여 한사군이라 합니다. 한나라는 흉노와 연합하여 자신들을 괴롭힐 수 있었던 고조선을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이 한사군의 존재는 한반도 내 여러 국가들의 결속을 다지는데 이용된 측면도 있습니다. 다른나라 사람들이 자기네 땅에서 살아가겠다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주4-낙랑군: 백제나 신라의 고대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낙랑군은 이 한사군의 낙랑군이라는 측면과, 지금의 강원도에 자리잡은 낙랑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있었다. 이 두가지 측면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낙랑군의 존재로 인해 마한에서 나온 백제와 진한에서 나온 신라는 각각 양 국가로 결합되어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5-백제: 사실,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백제의 초대왕인 온조왕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대체로 마한병합시기는 근초고왕때로 볼 수 있습니다. 건국초기때 국가연합체인 마한을 병합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겠지요. 고구려와 백제사이에 자리잡았던 낙랑군을 몰아낸 시점에서 백제는 고구려를 제압하고 (그덕분에 광개토대왕이 남진하는 빌미를 주었지만)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은 마한을 제압했던 것입니다. 미리 말했지만, 백제의 초기 근거지는 한강유역이였고, 고구려 장수왕때에서야 한강유역을 잃고 지금의 충청도지역에 그 기반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 말기까지, 한강유역에서 시작한 백제의 귀족세력과 전라도를 기반으로 잡은 마한 귀족세력은 서로 사이가 안좋아서,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하던 그때, 지방군들이 일어나지 않아 의자왕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주6-가야: 사실, 이 가야도 합쳐 4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야는 철 생산국으로서 신라와 백제에 대항할만한 강한 국가로 성장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신라는 불교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개혁을,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통해, 백제는 마한과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낸 중앙집권체제를 가야가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 큰 한이였습니다. 결국 가야는 친백제계였음에도 백제세력이 후방에 자리잡는 것을 경계한 신라 진흥왕대에 신라에 정복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라 김유신이 가야의 유민이였으니, 어찌보면 가야와 신라의 연합이 통일신라를 만들어내는 발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27 

 

상병 윤현상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석재님의 H.I.S는 언제나 재미읽게 읽고 있었어요. '근데 왜 이제야 첫 리플이냐!'라고 말하신다면 항상 뒤늦게 읽어서 뒷북치는 것 같아 부끄러워 못달았다고 말도안되는 변명을 남김니다(웃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세계사 전반을 아우르는 석재님의 높은 지식에는 혀를 내두르게 되네요. 제가 가야할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걸 석재님을 보면서 느끼고 있습니다.(웃음) 

아, 느낀거와는 별도로 조금의 보충설명을 하자면, 
주1에서 고조선의 명칭에 대해서 -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사실 고려중기부터 역사서에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왕조는 아직 건국되지도 않은 시기에 고조선(옛조선)이라니!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조선 중에 기자, 위만보다 시기가 이른 단군조선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쓰이던 단어가, 이후에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3조선 전체를 포괄하도록 의미가 확장되면서 요새는 주로 3조선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지요. 뭐, 결국은 같은말이었나요?(웃음) 2009-03-04
14:43:09
  

 

상병 이석재 
  상병 윤현상/ 그렇군요. 그래서 신채호는 고조선을 외쳤던 것이였던가요. 그리고 제 지식은 아직 부족하답니다. 저보다도 더 대단한사람들이 이곳엔 널렸는걸요[웃음] 윤현상님의 한국사 시리즈도 역시 잘 보고 있습니다. 한국사에 대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제가 더 부족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09-03-04
18:17:26
  

 

병장 이우중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도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추세인가요? 2009-03-04
19:05:40
  

 

상병 이석재 
  병장 이우중/ 오랜만입니다. 요즘 뭐하시고 사셨는지 궁금하네요. 제가 일기로는 요즘도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말이 많은듯 싶습니다. 옛날에 비해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인원들이 점차 늘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역사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교과서를 보더라도 기자조선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측 기록이 아닌 중국측 기록에 의존하는 기자조선설은 제 입장에서는 그닥 인정하고 싶진 않은 기록입니다. 2009-03-04
20:47:40
  

 

병장 이우중 
  석재님/ 오. 감사합니다. 
아직까지도 교과서 등속에 기자에 대한 내용들이 남아 있는 데에는 유림의 영향도 무시할 수만은 없으려나요. 흐음... 2009-03-06
10:22:11
  

 

병장 이지훈 
  기자조선을 비롯해 우리의 상고사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지만, 전부터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어요. 이전에도 댓글을 단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당연하겠지만 고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대한 사료가 많이 남아있었다고 해요. 그랬을 것이라고 충분히 유추할만한 기록도 남아있고요. 그만큼 상고사에 대한 접근성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중님께서도 말씀하신, 유림, 선비 계층이 어째서 그 많은 시간동안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특히 조선시대의 경우 역사라는 것이 정치는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는 중요한 학문이었는데 말이죠. 기자조선이라는 것이 단순히 허황되고 근거없는 이야기라면 그들도 기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당시 선비들이 사대주의, 중화주의에 너무나도 빠져있어서 라고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실학과 진경산수의 시대 정신 속에 살았던 학자 중 한 사람인 정약용의 역사인식에도 기자조선은 빠지지 않잖아요. 

기자조선의 경우 임나일본부설같은 것들과 달리 학문적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끼어들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의 기록이 주가 된다는 이유로 아예 연구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2009-03-06
16:22:35
  

 

병장 이지훈 
  백제에 대해 덧붙이자면, 

한강유역에서 시작한 백제의 귀족세력과 전라도를 기반으로 잡은 마한 귀족세력 

전라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지역적 색깔이 상당히 강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이미 영산강 유역은 마한이 세워지기 이전, 그러니까 청동기 시대부터 그 유적과 유물에 있어서 타 지역과 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고분은 주변의 고분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고분과 비슷한 부분이 많고, 유물같은 경우도 특색이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이 지역의 특색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강력한 영산강 호족의 등장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요. 그 전, 견훤의 최대 지지 세력이 이 영산강 세력이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한창 연구중인 부분이라고 했었는데 말이죠. 저도 들은 이야기라서요. 제가 입궁하던 때니까 이제 성과물이 좀 나왔을까나요. 뭐 우연의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고, 너무 지역적인 측면에 짜맞추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까지 나온 유물, 유적,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럴듯하고 참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국가가 아니라 그 동안 우리가 몰랐던, 지역을 기반으로 한 어떤 역사적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흐 2009-03-06
16:39:55
  

 

상병 이석재 
  병장 이지훈/ 물론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만큼 기자조선설 또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고대의 역사는 신화적인 면을 배제한 측면에서 연구해야 한다는게 제 지론이기도 하구요. 고조선과 삼국시대 초기의 역사만큼은 우리가 확실하게 연구해두어야 겠지요. 기자조선설도 마찬가지 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기자조선설에 그렇게 큰 비중을 두고 싶진 않아요.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채로 유림이 기자에 대한 역사를 소중화주의와 엮어서 사용한 것이 마음에 안들어서 라는 이유도 있군요. 2009-03-06
20:45:59
  

 

상병 이석재 
  또한 전라도와 마한에 자리잡은 귀족세력에 대한 설은 이미 백제의 멸망을 다룰 때부터 솔솔 흘러나왔습니다. 단기전을 꿈꿨던 당, 신라와 장기전을 꿈꿨던 백제와의 전쟁에서 지방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라도의 귀족세력이 사비성이 함락당하는 위기에도 빠른 동원을 하지 않은채 수수방관했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부흥운동때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영토 전역에서 반란의 기운이 샘솟긴 했지만요. 여전히 안타까운점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그나마 사실적으로 기록한 책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야사정도에 불과하다는게 그렇습니다. 2009-03-06
20:48:41
  

 

병장 이지훈 
  음 제가 더 알고 싶은 것은 유림들이 과연 무분별하게 기자에 대한 역사를 받아들였는지 예요. 이에 대한 자료, 사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설탕때 찾아봐야하나....말씀드렸다시피 조선조 500년동안 아무 저항없이 근거없는 역사로 한 왕조의 뿌리를 구성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거든요. 조선시대에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가 미비했다라는 근거 혹은 사료가 어떤 것인지 소개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리고 조선말 정약용를 비롯한 실학자라 부를 수 있는 학자들은 서양의 지식과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중국의 사상(주자의 성리학 등)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정리했는데요. 그들마저도 일관된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기자조선에 관련된 상고사가 너무 한 방향의 관점으로만 연구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제가 언급한 영산강 세력설(?)은 기록보다 유적, 유물에 더 비중있는 연구를 하고 있지요. 애초에 유물의 특이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니까요. 기록에서는 이 영산강 세력의 '역사적 상황'만을 파악할 수 있지만 유물과 유적은 이 세력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죠. 제대로된 기록유물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뿐이기는 하지만, 아직 더 캐낼 것이 있으리라 믿어요. 2009-03-07
10:41:52
  

 

상병 이석재 
  병장 이지훈/ 저도 한번 이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찾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고대 상고사는 저도 갸웃하는 부분이 많아서요. 쩝쩝. 
 [칼럼] H.I.S - Scene 15-1: 호랑이냐 토끼냐 -2  
상병 이석재   2009-03-01 21:16:08, 조회: 140, 추천:0 

이번 보론의 성격은 삼국시대를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고대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사니까요. 그냥 휙휙거리면서 넘어갈 수는 없겠더군요.

삼국시대의 시작은 대체로 고조선의 멸망부터 시작합니다. 한사군이라고 칭하는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군이 한반도의 각각에 한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위해 설치될 무렵이지요(주1) 그뒤로 저번에 말했던대로 북부지방에 부여, 고구려, 함경도에 고구려의 예속국가로 발전한 동예, 옥저 그리고 경기도지방에 마한, 경상도지방에 진한, 경상남부에 변한등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마한, 진한, 변한은 말 그대로 부족국가 연합체였습니다. 여러 국가들이 외부적인 침략에 맞서서서 서로 결합해 침략을 방어해보자 라는 식이지요. 사실 기록들이 좀 부적절한게 이때입니다. 낙랑군의 위치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낙랑군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말갈이 등장해서는 신라를 쳤다고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 북쪽에서 살아가던 말갈이 왜, 어째서 경상도까지 내려왔는지는 알길이 없군요. 

고구려는 부여에서부터 시작된 국가였습니다. 신화는 제외하고 좀 현실적인 면에서 보자면, 부여의 새로운 갈래, 즉 반 금와왕파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주몽과 함께 세운 나라인 것입니다. 고구려의 수도는 우리가 아는것처럼 국내성->평양성 뭐 이렇게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닙니다. 기억력이 잼병이라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국의 침략등으로 수도를 자주 바꾼 편이지요. 고구려는 불교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국가입니다. 중국하고 가장 가까웠으니까요. 소수림왕은 이 불교를 고국양왕시기에 이루어진 백제의 침략이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원시종교와 불교와의 차이가 뭐냐구요? 원시종교는 말 그대로 귀족들이 원하는 종교입니다. 자기 맘대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자신의 조상들이 끼어들더라도 별 상관이 없는 체계화되지 않은 종교인것이지요. 하지만 불교는 체계화된 종교체제를 통해 왕의 대한 충성심을 키울 수도 있는 것이고, 국민들의 사랑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건너온 대승불교는 사람들의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왕은 불교를 통해 귀족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지요. 

백제는 바로 이 고구려에게서 발원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세력이였던 소서노, 비류, 온조는 고구려의 신흥세력인 유리왕에게 밀려 지금의 한강유역까지 밀려 내려온 것이지요. 온조는 지금의 한강 남쪽에, 비류는 인천지역에 국가를 세웠지만, 인천에 세운 비류국은 인천이 아시다시피 바다에 인접한 곳인데다가, 뻘도 장난아니고 더불어 지형에 소금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경작하기에는 힘든 지역이였단 것이지요. 결국 십제를 세운 온조왕은 비류국을 합병하고,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부족국가를 통합하여 백명의 신하라는, 백제를 세웁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서는 마한을 바로 이 온조왕때 정복하였다는 기사가 있지만, 대체로 온조왕때에 지역국가 연합체인 마한의 중심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다가, 근초고왕때 비로소 완벽한 정벌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백제는 대방과 요서에 군을 세우고 통치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서는 말 그대로 요하강의 서쪽, 삼국지로 말하면 북평, 계에 속합니다. 특히 산동반도에는 백제의 유적들이 일부 남아있기도 하지요. 이런 해외 식민지에 세운 국가를, 백제 관직 최고등급인 ‘담로’를 따서 ‘담로국’이라고 합니다. 이 담로국은 심지어 동남아시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책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백제의 멸망 후 태자가 동남아시아의 담로국으로 대피해 백제를 회복하고자 했다. 라고 한 픽션물이 있었는데,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군요.

백제는 이렇듯 남북조시대의 중국과 동남아, 심지어는 일본에 식민지를 경영했다고 합니다. 특히 ‘칠지도’를 통해 일본에 하사하기도 했는데요. 이 칠지도의 몇글자가 지워진 덕분에 일부 일본 민족사학자들은 백제가 일본에게, 가 아닌 일본이 백제에게 라고 주어를 바꾸어서 백제가 일본에 조공했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해석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 몇글자 지운거 때문에 역사가 완전히 뒤바뀌기도 하더군요.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해적이나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있던 여러 부족국가들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이 아니였기 때문이였겠지요. 지역적 특성을 살린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등을 썼던 것을 보자면 신라가 버틴 진한의 체제는 다른 두 국가보다 중앙집권적인 면이 더욱 떨어졌습니다. 그 덕분에 고구려나 백제처럼 활발한 대외활동은 제한되었지만, 신라는 소백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아 주변국가를 정리할 ‘시간’을 벌었던 것이지요. 신라가 소백산맥 이남을 통일한 시점에 이미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를 침공하고 있었고, 신라는 근근히 그것을 방어하는 상황이였습니다. 후에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틈타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전황이 완전히 뒤바뀌지만 말이지요.

근초고왕-근구수왕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전성기를 지나,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전성기, 지증왕-법흥왕-진흥왕등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전성기는 모두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쌀 생산력을 가지고 있으며 남한강, 북한강 등을 통한 교통도 편리하고, 중국의 문화를 쉽게 수입할 수 있는 항구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 모두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변한의 가야는, 결국 6가야 이상의 발전을 이룩해내지 못합니다. 백제-가야-일본의 라인을 통해 신라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철의 생산을 통해 삼국에 수출하여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지만, 그 철을 욕심낸 신라의 압박에 멸망하고 만 것이지요. 백제는 그 때에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웅진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충청도는 구 마한 귀족들의 영역권. 지역 토착세력과 굴러온돌인 온조의 백제계 세력간에는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동안 신라는 가야를 꿀걱 삼킨 것이지요. 가야는 원래 금관가야 중심으로 흘러갔지만, 이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함으로서 후기 가야시대로 접어듭니다. 전기 가야시대가 철을 통한 외교 통상국가를 꿈꾸었다면 후기가야시대는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농경적인 면이 더욱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는 결국 진흥왕의 5신중 한명인 사다함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정복한 뒤로 당나라와 결합하였습니다. 백제는 말갈-고구려-백제-왜라는 라인을, 신라는 당-신라라는 라인을 구성하여 이른바 ‘십자외교’를 구성하였지요. 그렇다고 해서 옛날부터 이런 외교관계가 구성되진 않았습니다. 고구려의 발전시기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며 중국에 끊임없는 외교를 통해 고구려의 후방을 위협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천운은 신라의 편. 고구려과 수, 당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휘청거리고 백제가 백제 성왕의 패배 이후 그 타격을 회복하지 못한채 신라-당의 연합군대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결국 7년후 고구려도 당의 군대에 의해 정복당하게 되지요. 그러나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경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통치하려고 합니다. 신라는 이에 반발해 백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촉진시키고 ‘민족이 합쳐 외적을 방어해야 한다’는 민족 개념을 처음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결국 당과 신라간의 전쟁이 벌어졌지만 당은 한반도까지의 보급선이 너무나 길었고, 신라는 이 보급선을 적절하게 위협함으로서 결국 약속했던 대동강 이남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 반쪽자리 통일로도 평가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주2)이 ‘임’, 즉 가야와 ‘나’, 즉 신라에 일본이 본부를 설치하고 통치했다 라고 하는 설입니다. 말그대로 뻘소리지요. 신라와 가야가 일본에 정복되어 있었다면, 신라가 통일따위는 할 수 없었겠지요. 고구려의 남진을 일본이 막아주었다 뭐 이런식의 스토리인데 더욱 어이없었던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만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의 야마토 정권 스토리에는 이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삼은 시나리오가 있었으니 더욱 애가 타더군요. 허허. 차라리 독도가 일본땅이다 라는게 더 믿기 쉽더군요.

어째 주보다 보가 더 길던 H.I.S였습니다 . 낄.

주1-한4군: 삼국지9였나요. 서지역에 떡하니 붙어있는 ‘낙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결국 코에이측에서 이름을 수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발생지역에 중국의 한4군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하면서말이지요. 사실 제일 어이없었던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저질렀던 임나일본부설이였겠지만… 게임상에서 이뤄지는 역사왜곡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요즘 나온 웨스트우드사의 레드얼럿3는.. 뭐 개그물수준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주2-야마토 정권: 일본에 자리잡았던 지방 부족국가의 연합체입니다. 야마토정권에서부터 점차 일본의 발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34 

 

병장 윤영준 
  역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셨군요. 
게임에서의 역사 왜곡은 참- 할 말이 없죠. 
저는 삼국지 할 때마다 관구검인가(?) 고구려 쳐들어갔던 그 장수를 이유불문하고 참형을...큭 2009-03-02
22:30:22
  

 

병장 이우중 
  그나저나 석재님 제목 뽑는 센스가 상당하신듯. 흐흐. 2009-03-06
17:58:23
  

 

상병 이석재 
  병장 윤영준/ 사실 관구검 능력치가 구려서.. 전 그냥 풀어줍니다. 

병장 이우중/ 제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셨다면.. 당신은 센스쟁이 우후훗. 
  [칼럼] H.I.S - Scene 16: 진골의 나라와 소수민족 고구려인.  
상병 이석재   2009-03-07 11:25:17, 조회: 187, 추천:1 

삼국이 어렵게 통일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의 침략을 기벌포 등지에서 불리쳤지만 신라는 통일했던 그때만 반짝하였고 그 이후엔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종무열왕-문무옹-신문왕으로 이어지는 3대의 기간동안 신라는 왕권강화를 통해 진골 귀족세력들의 발호를 억제하고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귀족회의기관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대통령이 의회의 전횡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군주제와 의회민주제를 비교하기엔 조금 비약이 크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신문왕의 사후 왕권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왕권강화의 필수적인 발판은 완전한 승계과정이 필요합니다. 3년~5년마다 왕이 바뀌는데 어떻게 왕권강화를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신문왕은 토지제도를 국가에서 녹봉을 나눠주는 관리제도를 시행했지만 신문왕의 사후에는 귀족들이 봉토에서 알아서 소작해서 그 이득을 얻는 방향으로 토지제도가 바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토지가 국가귀속에서 귀족의 귀속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경제권이 귀족들에게 넘어감으로서 왕권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신라의 나머지 역사 기간 내내 귀족의 발호로 인해 신라의 통치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라의 장보고등이 왕권을 넘볼 수 있었던 이유도, 왕건, 진훤(주1), 궁예등이 후삼국시대를 이룬것도 바로 이 왕권약화로 인해 지방세력과 경주와의 연계가 원할하지 않았던 탓이였지요. 특히 신라의 수도는 동쪽 끝자락인 경주. 바다를 이용해도 육지를 이용해도 한강유역등 한반도 중심지역을 통치하려면 애로사항이 컸기 때문이지요.

결국 나중엔 신라가 박씨(박혁거세), 석씨(석탈해), 김씨등이 세웠는데 김씨가 이 나라를 망쳤으니 박씨를 세워보세 하며 성씨가 바뀌는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라의 국력은 약화되고 사람들은 불교가 불러오는 퇴락(주2)속에서 점차 나약해져 갔던 것입니다. 

한편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는 고구려의 강역에 당나라가 통치를 시작하지만, 중국의 수도가 지금처럼 북경도 아니고, 장안에서 만주까지 통치를 하기엔 당나라가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요. 삼국지를 해보시면 알겠지만 장안은 방어에 유리한 진지이지. 확장하기 좋은 땅은 아닙니다. 홍농과 완만 잘 틀어막으면 서진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낙양이나 남경등에 비해서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다가보니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한 부흥운동에 취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더욱이 한반도 점령시도가 신라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결국 당나라를 요동으로 i아내고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발해라는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이 발해는 저번에 말한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조금 변형시킨 2성 6부제를 정치제도로 삼았으며 수도를 5개, 즉 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으로 삼아 지방에 대한 통치를 원할하게 한 것이지요.

이 시대를 근래까지도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렀지만., 발해에 대한 역사를 의도적으로 숨긴다는 평이 있어 요즘은 공식적으로 남북국시대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에 나라가 있었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같은 민족임이였음에도 발해와 신라는 소 닭보듯 하면서 지냈습니다. 물론 교역의 면에서는 동해안을 통한 바닷길을 통해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고,(주3)일본은 심지어 발해에도 사신을 보내 신라를 같이 협공하자고 요청한 기록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당이 발해를 공격하자고 신라를 꼬실때도 신라는 은근슬쩍 넘어가면서 같은 민족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덕분에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던 시기에 발해 민족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창 새롭게 건국되고 있던 고려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였지요.

한편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통치가 점차 약화되고 귀족의 수탈로 인해 고생하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결국 궁예의 후고구려, 진훤의 후백제등이 각 지역에 건국되기 시작합니다. 후삼국시대 스토리야.. 뭐 대충은 다 아시는 내용일거 같아서 패스하겠습니다. 특이사항을 정리하자면 후백제의 진훤이 후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오대 십국시대를 거치고 있던 중국과 외교 관계를 튼 내용. 후고구려가 대동강을 넘어 북진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일부 회복하고 영토선을 청천강으로 삼은 내용등이 있지요. 결국 후고구려의 궁예(주4)를 대신하고 개성을 중심세력으로 한 왕건이 고려를 세워 두번째 통일국가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는 하나의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가 삭제된 채로 철기 시대로 넘어간 것이지요. 일본 전역에 청동기 유적이 너무나 부족하여 벌어진 추측인데, 사람들은 철기 문화를 백제인이나 가야인들이 전해주었다 라는 설을 세웠지만 이도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히 기원전 3세기에는 한반도인들이 규슈로 건너가 벼농사 기술을 전파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불교도 백제를 통해 전파했습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일본의 땅을 백제의 한 담로국으로서 기록하는 사람도 있고 어느 종교에서는 일본 영토가 가야와 백제가 나누어서 통치했다라는 지도를 들고 나오기도 하지만.. 믿기는 조금 그렇군요. 하여튼 일본은 그렇게 한반도의 문화를 전수받으며 지방국가연합체제인 야마토 정권을 통해 처음으로 권력의 집중을 이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방국가 연합체제는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발전 없이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통일신라가 등장하던 시점에 다이카 개신을 통해 천황의 직접통치체제를 건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일본 내부에도 더 수많은 개혁이 있었지만, 그 부분이 지금 확실하게 기억이 안나서 보론을 통해 일본 역사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지요.

다음 시간에는 한반도에서 다시 뛰어넘어 중국쪽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송의 등장과 몽골의 등장을 다뤄보기로 하려구요. 잇힝.


주1- 진훤: 우리에게는 견훤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의 이름은 진훤이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견훤은 역사를 기록한 책에 그 표기가 비슷한 진훤(?萱)이 견훤(甄萱)으로 바뀌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 전라도 야사에서도 견훤이 아닌 진훤이라고 불렀다. 라고 하는 걸 보면 이름이 잘못 표기되어 있다는 설이 그렇게 가볍지많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진훤으로 표기합니다.

주2-불교: 지금이야 기독교의 퇴락적인 면을 주로 비추지만, 옛날엔 불교의 퇴락적인 면도 꽤 컸다고 합니다. 한번 장식을 했다 해서 금으로만 칠하면 불교 행사도 꽤나 삐까뻔쩍 했을 것이 틀림이 없겠군요. 

주3- 발해로: 역사스페셜에서 나왔던 내용이던가요. 발해와 신라간의 교역로를 재현하기 위해 청년들 몇이 돛단배를 세워서 신라 경주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항해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듯 발해는 신라, 일본,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 교역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고구려가 대체로 왜, 신라, 백제등의 교역이 취약했던 면에 비해 발해는 교역에 관해서는 자유로웠습니다.

주4-궁예; 궁예는 신라의 왕족의 후예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불교를 받아들여 국시를 불교로 삼아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한 정치체제를 구축하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기호에 맞는 체제로 끊임없이 변화하여 지속성이 부족하였고 자신의 건국초기 세력들을 무시한 나머지 왕건에 의해 축출당할 시점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게 문제였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41 

 

병장 이지훈 
  고구려가 대체로 왜, 신라, 백제등의 교역이 취약했던 면에 비해 발해는 교역에 관해서는 자유로웠습니다. 

조금 갸우뚱하는군요. 직접 교역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해상 교역만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고구려가 해상교역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2009-03-07
13:01:12
  

 

상병 이석재 
  병장 이지훈/ 용어 선택에 약간의 혼용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절대적인 무역량을 비교해 봤을때 고구려의 양과 발해의 그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고구려 같은 경우는 왜와의 교역은 거의 전무하였고 대체로 중국과의 교역이 성행했지만, 발해는 중국과 더불어 신라, 왜와의 교역로를 개설하여 고구려때보다 더 많은 상업수익을 올렸다고 볼 수 있겠지요. 2009-03-07
16:27:30
  

 

병장 윤영준 
  잘 봤습니다. 

일본에 청동기시대가 없었나요? 몰랐는데요. 가야와 백제를 통한 철기문명 유입이 그래도 가장 설득력 있지 않나요? 흠- 2009-03-10
17:22:44
  

 

상병 이석재 
  병장 윤영준/ 아무래도 그 설이 가장 설득력있다고 보여집니다만, 일본에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청동기 문화가 발견榮鳴 한 학자가 증거를 보여주면서 일본열도가 끓어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 청동기 문물이란게 한 학자가 위조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 분위기는 다시 다운이 되었지요. 그럴 정도로 일본 학자들에게 청동기 문화란 콤플렉스 중 하나입니다. 
[칼럼] H.I.S - Scene 17: 문관과 무관  
상병 이석재   2009-03-14 14:44:03, 조회: 146, 추천:0 

당나라가 주전충이라는 절도사에 멸망한 후, 중국 대륙은 5대 10국의 시대로 빠져 듭니다. 5호 16국의 의미가 5개의 이민족들과 16개의 국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듯 5대 10국은 5개의 강국과 10국의 소국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해서 그리 의미를 붙인 것이지요. 후량, 후주등 ‘後’자가 붙은 나라들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양’ ‘주’로 세우긴 했는데 이미 그런나라들은 그 전에 쓰였기 때문이지요. 고조선, 후고구려, 후백제등이 쓰이듯 후대의 역사가들의 구분하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외에도 남한, 북한, 후촉등도 있었지만 이 5대 10국은 아무 발전이 없던 ‘혼란기’에 불과했을 따름입니다. 당에서 송으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후주의 절도사였던 조광윤이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을 세운 후,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다시 통일 제국의 시대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조광윤의 채택했던 제도는 극과 극이였습니다. 그는 당에서부터 내려왔던 절도사라는 직책을 잘 알고있었으며 그가 송을 건국한 이후엔 절도사를 없애버리고 문치제일주의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군사적인 문제를 문관에게 맡겨서 해결해는 관습은 이후 동아시아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조선의 고려와 조선도 이와 비슷한 관습을 송에게서 얻었던 것이지요(주1)

또한 송은 수,당이후에 문란해졌던 과거제를 확실히 정립하고 황제의 면담도 집어넣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는 선까지는 똑같지만 황제의 재결에 따라 그 급이 달라지는 체제였기 때문에 문관들은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가기 위해 황제에 충성을 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상상, 중상등으로 나누는 구품중정제보다는 더욱 발전한 관료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문관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송나라의 무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고 만약 무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송나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는데, 강남지역에서 한창 일어났던 비단산업, 도자기산업등이 송의 재산을 불려줬기 때문이였지요. 또한 운하를 통해 북쪽으로 쌀을 이동시키는 것 또한 가능했으니 전쟁에서 패배하면 돈을 주면 끝나는 일이였던 것입니다(주2)

중국엔 요, 서하 같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거란족은 수나라때부터 변방의 이민족으로서 여진(주3)족과 함께 생활해왔지만 5대 10국시대 이민족에 대한 중국의 견제가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세력을 기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에 자리잡은 거란족은 요를 세우고 점차 서진을 거듭, 북부의 강국으로서 자리잡은 것이지요. 서하는 중앙아시아의 탕구트족이라는 이민족이 세운 나라인데, 실크로드, 중국, 거란의 사이에 자리잡은 나라였기 때문에 중계무역으로 톡톡히 이익을 보던 나라였습니다. 나중에 몽고와 싸우면서 점차 몰락, 멸망하게 됩니다.

요는 북부를 정벌한 후 송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신 ‘연운 16주’지역이라고 하는 두 나라간 사이의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바로 전연의 맹이라 하는데, 이 연운 16주가 바로 송나라의 외교정책을 반영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력으로 해결하지 않고 돈과 땅으로서 이민족을 잠재우는 정책인 것이지요. 요나라는 중원의 알짜배기땅이였던 연운 16주를 통해 국가의 힘을 키울 수 있었고 이는 장기적으로 송나라에게 폐해로서 다가왔던 것입니다. 요나라는 더욱이 자신의 후방에서 송과 연합할 기세를 취하던 고려를 공격했지만 정작 서희에게 땅만 내주고 물러나게 되기도 하였지요(주4) 

그러나 요는 그것이 다였습니다. 이중톈(주5)씨가 지적한 것 외에도 중국사를 다루는 많은 역사가들은 이민족들이 중국 영토를 정벌하지 못하면 멸망한다는 것을 연구한 바 있습니다. 이민족들의 목표는 중국의 정벌인데,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한 나라는 중흥기를 이루어보지도 못한채 쇠퇴기로 접어든다는 것이지요. 요나라는 연운 16주를 통해 국가의 발전을 이루었겠지만 정작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습니다. 결국 쇠퇴를 거듭, 여진족에게서 새롭게 일어난 금나라와 송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금과 송은 처음엔 친하게 지낼 수 있었겠지만 송이 군사력도 없는 상황에서 금에게 연운 16주의 반환을 요구합니다. 원래 자기네땅이라 이거죠. 금은 우리가 요를 대체했으니 요나라의 땅은 곧 우리땅, 이러면서 송과 전쟁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송의 수도인 변경이 금나라에 함락당하면서 선황제와 현황제가 모두 금의 수도로 끌려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결국 현황제의 동생이 남경으로 내려와 송을 다시 건국하는데, 이 사건 이전을 북송, 사건 이후를 남송이라고 나누게 됩니다.

북송의 기간동안 왕안석 같은 개혁가는 농민이 말 등을 기르고 국가가 그 비용을 지불하거나, 토지개혁등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려고 했습니다. 흔히 농부들에게서 군사력을 징발한데 해서 부병제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부병제를 사용할 경우 국가가 병력을 훈련시키고, 그 유지비용까지 지불하는 상황이 아닌, 오직 유지비용만 지불함으로서 오직 ‘징발’만 하여 잘 훈련된 병사들을 차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려고 했습니다. 이를 ‘신법’이라고 하였고, 옛날의 법을 유지하자고 하던 사람들을 ‘구법’이라고 하였지요. 이 신법과 구법의 싸움은 북송을 혼란의 시기로 이끌었고, 이것 때문에 북송이 멸망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구법과 신법의 사이는 너무나 안좋았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당파정치가 일으킨 하나의 폐해처럼 말이지요.

금이 비록 변경을 점령은 했지만 중국을 통일할 만한 힘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송이 건국된 것이지요. 남송은 ‘주자학’(주6)으로 유명한 주희의 사상이나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는 건국 초기때부터 시작된 문관주의가 전쟁반대사상으로 번져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국민들과 관료들 사이에서는 돈으로 모든지 해결 가능하다 라는 식의 사상이 퍼져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금과의 사이에서도 대체로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했고 금과 싸우려던 악비(주7)같은 장수들도 내부의 모략으로 인해 죽게되는 상황까지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남송은 새롭게 나타난 몽고와 함께 금을 협공하여 멸망시키지만 자신 또한 몽고족에게 정벌당해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과 당의 차이점은, 폐쇄적이냐 개방적이냐의 차이입니다. 당은 네스토리우스교 같은 기독교 이단들을 받아들이면서 종교적인 자유도 누리고, 또한 많은 해상교역을 이루기도 했지만 송나라는 관료제에 외국인을 따로 뽑는 제도또한 없었으며 해상교역보다는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 만족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또한 퍼져있지 않았고 송때에 이르러 장안, 낙양 같은 중국의 중부지역에서 변경 같은 중국 북부나, 남경 같은 중국의 남부로 국가의 종심이 바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송은 다른나라들에 비해 문관주의, 관료제를 통해 내부적인 체제를 완비했지만 무력의 면에서 너무나 부족하였기 때문에 돈으로 때우고, 그 돈이 없어지면서 외교상황이 악화되고, 그러면 더 많은 돈으로 때우고 그런 악순환이 반복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당나라 군대’보다 더 한 나라였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화가들, 서예가들, 시인들이 나와 문화적인 전성기를 누린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다음시간에는..어디로 가볼지 아직 안정했어요. 얼쑤.



주1-문관제일주의: 고려, 조선에서는 문관이 무관보다 계급이 위였습니다. 서희 같은 경우도 문관이였음에도 군사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무관들의 반란이 일어난 무신정변 같은 경우도 문관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와서 일어난 것이였지요. 조선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문관중시주의는 먼저 시작한 사람은 많았지만 직접적인 정책으로 계획하고 시행한 사람은 송의 태조 조광윤이 먼저였습니다. 

주2-용병제: 중국에는 ‘용병’이라고 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강력한 집권체제를 꾸리고 있었고 또한 ‘나라’를 건너가면서 일한다는 것이 동아시아 세계에는 완벽하게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였지요. 하지만 송나라가 행한 일은 바로 이 용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돈으로 국방력을 해결한 것이지요. 하지만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돈으로 국방력을 해결할 시에는 그 돈이 조금이라도 마를 때 큰 타격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용병들은 돈이 해결되지 않으면 바로 마음을 바꾸기 마련이였지요.

주3-여진족: 고려와 거란의 사이, 함경도와 평안도, 만주 일부에 자리잡은 이민족입니다. 주로 발해와 고려의 중간무역으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고려와 요가 있을 시기엔 그 사이에 막혀서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던 민족이지요. 하지만 고려가 무신정변과 거란의 침입으로 피폐해지고 거란도 점점 하락세를 타는 사이 승기를 잡아 결국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을 내i게 됩니다.

주4-서희: 외교로서 평안도 서부를 차지하고 거기에 성을 세운 장본인입니다. 이 뒤로 고려와 조선의 정책은 압록강의 이남을 통일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주5-이중톈: 인지도를 보자면.. 중국의 이덕일 교수와 비슷한 위치라고 볼 수 있겠군요. 중국사에 대해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세한 연구로 많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주6-주자학: 조선에 ‘유교’와 접목된 학문입니다. 국가에 충성하고자 하는 사상또한 가지고 있었기 문에 지배자들로서는 괜찮은 학문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송 이후 사라져갔지만 조선에 유입된 이후로는 조선의 지배사상으로서 조선의 멸망시까지 유지됩니다.

주7-악비: 남송에 유명한 장수입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애국심과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내부의 모략으로 인해 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고서 처형당했지요. 그 이후 많은 시인들, 서예가들이 이 악비를 칭송하는 시와 그림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48 

 

병장 김상윤 
  아 너무 유익한 칼럼이네요 언제나... 
다음엔 오래간만에 유럽쪽이나 다른 대륙쪽은 어떨까요? 
아니면 인도쪽도 재밌을거 같아요 2009-03-14
14:57:18
  

 

병장 김상윤 
  흣, 방금 리플이 살짝 수정映봇, 
예전에는 전반적으로 만능형인 사람이 모든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던것으로 볼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이죠) 이지훈님 의견에도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요, 저희 역사적인 지식은 미천하지만요. 
그나저나 역사는 정말로 보는 관점에따라 해석이 천차만별로 나눠지네요 2009-03-14
16:23:17
  

 

병장 이지훈 
  잘 봤습니다 꾸준하시군요 역시. 

말씀하신 문관제일주의에 대해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나름 애드온입니다) 

고려시대의 경우 문, 무관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강감찬과 윤관의 예가 그러하죠. 강감찬이나 윤관은 그 업적에 있어서는 무관에 가깝지만 그들의 관직 비롯한 나머지 부분들은 문관에 가깝지요. 고려시대를 뒤흔든 무신정변같은 경우도 그야말로 중앙에 있는 무관들, 즉 야전지휘관이 아닌 수도방위나 수도치안을 맡은 무신들이 중심이 되지요. 무신정변 후 무신정권에 대하여 반기를 든 여럿 무신들이 있었구요. '아, 난 무신이니까 무신을 당연히 지원해야지'라는 '무신'의식이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문, 무의 역할분담이 딱 나누어지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해요. 문, 무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부작용으로 무신정변이라는 일이 생겨난 것이고요. 

그리고 서희가 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나요? 서희는 분명 '적진'으로 들어가 담판을 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라의 존망을 책임지고 있는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자가 '적진'으로 섣불리 들어갔을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아서요. 

문, 무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조선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국사책에도 나오는, 무과가 생기는 시대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확실히 문관들이 무관들에 비해 계급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 전문성을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왕이나 중앙 정부의 신하들의 인식 속에도 무신은 계급에서 동등한 문신보다 결코 낮게 평가되고 있지 않았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에는 문, 무의 차별대우로 갈등이 생기지 않죠. 

송의 경우, 고려의 경우는 문, 무가 아직 전문적으로 분화되지 않는 시기에서 전문적으로 분화되어 가는 과정, 그리고 조선시대는 그것이 제도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분화가 완성된 시기. 이렇게 보는 것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큰 줄기에는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 못하신 것 같아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댓글 달수 있는 부분이 나와서 후다닥 애드온 달고 갑니다. 헥헥 2009-03-14
16:24:46
  

 

병장 이지훈 
  상윤/ 

아 들켰군요.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흐 
역시 세상엔 완전 범죄따윈 없군요. 조회수가 한 자리라 방심했어요. 사실 마지막 문장만 벌써 3번째 수정했네요. 갑자기 글이 산으로 가버렸었거든요. 허허 2009-03-14
16:27:38
  

 

상병 이석재 
  병장 김상윤/ 원래 부처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더라구요. 

병장 이지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글쎄요. 고려의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송의 경우가 문, 무가 서로 혼합되어 있었다고는 볼 수 없겠는데 지금 현 상황으로서는 노템전이다보니 자료수급이 힘들군요. 요즘따라 H.I.S를 쓰면서 자료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쩝쩝. 자료수급이 되고 나서 다시 한번 댓글을 달도록 하지요. 2009-03-16
19:40:42
  

 

병장 윤영준 
  상병 이석재/송나라는 돈이면 장땡이었지요. 그리고 자존심도 오지게 쎄서, 요나라한테도 그랬고 서하한테도 그러고 돈을 쥐어줄대로 주어주고 자기가 형이라고 우기고 그러다 재정은 거덜나고 싸울 힘은 사라지고 그러고 망하고 쩝. 
자- 이번에는 유럽쪽으로 어떨까요? 

병장 이지훈/문관과 무관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데요. 
문무관의 차이가 불분명한 것보다는 서로 간의 우월성이 없는 것이라고 보아서... 
자료가 없어서 강감찬이나 윤관같은 경우는 머리가 아프네요. 
그리고 서희는 외교관에 가깝지 않나요? 군지휘권자라고 하기에는 좀 납득이 안가서 
저도 노템전이라 제대로된 반박을 못걸겠네요. 쩝- 그래서 이리저리 찝쩍대기만 2009-03-17
02:37:02
  

 

병장 이지훈 
  석재, 영준// 

저도 노템전인 것은 마찬가지예요. 전 단지 다른 관점을 제시한 것 뿐이죠. 그렇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같이 생각해보자고요. 어떤 사료가 실제적인 과거와 가깝다, 멀다를 떠나서 그 사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말한 거예요. 

어떤 사료가 실제적인 과거와 가깝다, 멀다는 역사적인 지식과 사료가 필요하죠. 근데 말씀하신 것처럼 이곳은 거의 완벽한 노템전이라, 이런 논의가 진행되면 서로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 이상의 논의를 진행할 수 없지요. 물론 저 또한 제가 알고 있는 지식에서 출발했지만 논의 자체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으면 해요. 책마을에서, 특히 HIS에서 계속 댓글을 달면서 느끼는 것이네요. 

그리고 영준님 말씀대로 문무관의 구분이 어렵다라기보다는 서로 간의 우월성이 없는 것으로 보는게 맞는 것 같군요. 제 표현이 조금 애매했군요. 2009-03-17
15:21:21
  

 

병장 윤영준 
  하하- 당연하신 말씀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서 이야기를 하다보면은 조금은 과장되고 조금은 축소되면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어쩌다보면 엉뚱한 이야기도 튀어나오고 뭐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거죠. 관점의 차이죠 뭐. 
그런 걸 인정하면서 이런저런 다른 해석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잖아요? 
 [칼럼] H.I.S - Scene 18: 카라코룸  
상병 이석재   2009-04-13 21:38:55, 조회: 98, 추천:0 

딱 한달만이군요, 한달만의 H.I.S의 위치는 중국에서 조금 위로 올라간 몽골(주1) 대평원에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몽골에 대해서 얘기해보기 전에,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라인에 대해서 먼저 알아봐야할 듯 싶군요. 요는 비록 연운 16주를 통해 중국 앞까지는 내딛었지만 그 이상의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금에게 축출당했으며, 금은 송나라를 장강으로 밀어내고 장강 북쪽을 통일하였지만 역시 원나라에게 축출당했습니다. 이민족 왕조들의 제 1목표는 당연히 중국 대륙의 통일입니다. 전에 나왔던 5호 16국이나, 5대 10국, 요, 금 등 이민족 왕조들의 실패 원인은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는 점이였지요. 그런 의미에서 중국을 점령한 왕조가 몽골족의 원, 그리고 만주족의 청 두 나라 뿐이라는 것은 특기할만한 사실입니다. 이민족들은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면 오히려 한족에게 동화되거나 한족의 반란에 의해 내i기게 되는 것이지요. 

몽골족은 비록 초기엔 금나라의 이간책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테무진이라고 불리우는 걸출한 영웅에 의해 점차 통일되기 시작했고, 몽골족의 통일 이후 그들은 점차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마병들은 보급물품을 간단하게 휴대하고 다녀 장기간동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더욱이 잔인한 평정으로 인해 저항에 대한 의지를 꺽고 다녔던 것이지요. 그러나 제일 문제는 공성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이였습니다. 특히 금나라는 공성전을 하지 않고서는 정복할 수 없던 나라였지요. 그 덕분에 테무진, 즉 칭기스 칸이 제일 먼저 노린 곳은 다름아닌 서하였습니다. 만만했거든요.

하지만 이 서하도 수많은 침입끝에 폐허로 만들어버립니다. 기억상으로는 4차인가 5차까지 침입했던 것으로 기억하는군요. 이 서하에 대한 전쟁을 통해 그들은 공성전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금나라를 송과 함께 협공을 통해 멸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남송은 왜 자꾸 끼어드냐구요? 금에게 계속 평화값을 바치던 송나라로서는 금이 멸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나 평화값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단기적인 목적에 사로잡혀 금 멸망에 협조한 것이지요. 하지만 요를 밀어내고 금을 밀어낼 때 처럼 그들은 잃은게 있었습니다. 그때는 비록 장강 이북이였지만 이번엔, 중국 전 대륙을 몽골에게 내주어야 겠지요. 칭기스 칸을 이어받은 쿠빌라이는 중국에 원왕조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쿠빌라이의 원나라를 제외하고더라도, 차가타이 칸국, 오고타이 칸국, 일 칸국(주2) 등 칭기스칸의 아들, 자손들이 세운 나라들이 전 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몽골적이 자랑하는 장기적인 작전능력, 보급이 필요없는 병력들로 중부유럽까지 다가왔던 것이지요. 중부유럽에서 태평양, 남쪽으로는 인도양까지 점령한 이 세계 대제국을 따라온 자는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 대제국은 유지는 힘들었습니다. 비록 보급이 필요없는 병력이였다고는 하지만 이 무적군대의 문제점은 장기유지가 힘들다는 것이였지요. 보급이라는 것은 점령 영토에 대한 통치를 수반하며 이 통치로서 나오는 이득을 통해 군대를 보급하는 시스템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 단지 개인의 소지품에 따른 보급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결국 통치에 대한 것이 전무하다는 셈이 된것이지요. 일본원정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정을 하지 않은 원나라도 점차 한족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비록 확장은 계속瑩嗤 정작 중부 유럽 이후, 즉 장기적인 보급을 통해 수많은 병력의 피해를 낳게 되는 공성전을 너무 멀리서 할 수는 없었던 노릇이였지요. 결국 최대확장선에서 후퇴하게된 몽골족들은 점차 내부 반란, 주위국가들의 공격 등으로 인해 영토는 축소되게 된 것이지요. 러시아, 중동에 있던 칸국들은 슬라브화,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점령지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중동의 몽골족들은 후에 등장할 ‘티무르’에 의해 재통일되지만, 그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에 자리잡은 몽골족들은 무려 200년 넘게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된 것이지요. 후에 이반 2세 같은 러시아의 영웅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그들이 축출되게 됩니다.

원나라또한 주위 칸국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원나라, 색목인(즉, 중동인)들을 중시하는 통치체제는 한족들의 불만을 일으켰으며, 더욱이 라마불교등에 빠진 황실세력이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통치’보다는 ‘점령’을 꿈꾸었던 몽골족들에게 한족들이 점차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결국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에게 축출당한 몽골족은 북원을 건국하기도 하지만,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중국의 자치구로 남아있는 내몽골과, 몽골공화국으로 이루어져 있는 외몽골 두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주3)

세계의 몽골족들은 유럽 영토에도 남아있습니다. 핀란드인이 그 중 하나라고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래서 핀란드인과 우리나라인들이 서로의 언어를 모르더라도 일부 통하는 것들이 많다고는 하더군요. 몽골 대제국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어지는 초원길을 개척하여 무역로를 개설하였지만, 문화에 대한 파급력은 약했습니다. 칼로 흥한자는 칼로 망한다고, 그들의 무력에 의한 통일은 문화에 의한 통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위 국가들의 문화에 점령당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몽골족은 그렇게 물러났으며 그 자리에는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주1: 몽골-사실, 몽골에 사는 몽고족들은 자신들을 ‘몽고’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군요.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나지만 몽고라는 의미속에 타타르처럼 좋지 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몽고’보다는 ‘몽골’이라는 표현이 더욱 좋다는군요. ㄹ 하나차이가 큰 차이점을 만들어내는 듯 싶습니다.

주2: 일 칸국: 중동지역으로 들어온 몽골의 한 일파입니다. 투르크 천국이 되어가던 중동을 통일하고 아나톨리아에서 부흥하던 롬 술탄국마저 멸망시켰지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더 이상의 진출이 좌절당하고 결국 분열되어 멸망하게 됩니다 .사실 이 곳만 콕 찝은 이유는 ‘프레스터 존’에 대한 것 때문이지요.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 중 아시아에 있던 ‘프레스터 존’이라는 사람이 국가를 세우고, 그 국가가 이슬람인과 싸우는 자신들을 돕기 위해 이슬람의 후방을 친다는 소문이 펴졌습니다. 이 소문만 무성했던 기독교 국가를 찾기 위해 로마 교황의 사절마저 파견될 정도였지요. 궁극적으로 이 나라는 ‘몽골족’, 즉 일 칸국이였습니다. 뭐 이슬람과 싸웠으니 그들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였겠지만 이미 그때는 이슬람 운동이 모두 종결된 뒤였습니다. 

주3: 내몽골, 외몽골: 이 두 몽골에 대한 역사는 지금까지도 몽골족에겐 아픔의 역사로 남아있습니다. 중국의 자치구들이 그렇듯 원래는 각 민족의 영토가 되었어야 하지만 무력강점으로 인해 중국이 자치구로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외몽골 또한 청나라 시대에 와서 새롭게 정복된 땅이였으며 마오쩌둥의 통치를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로 완전히 귀속되었습니다. 사실 이 두땅이 나누어진 이유는 ‘소련’의 영향력이였던 외몽골과, ‘중국’의 영향력이였던 내몽골 이런 식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지요. 소련 영향력 하의 외몽골은 몽골공화국을 세우게 되었지만 중국의 내몽골은 자치구로 편입되었습니다. 중-소 분쟁이 격화되던 때에 일어났던 일이였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3:55 

 

일병 김소망 
  蒙古 : 어리석은 옛 것 

이러니 싫어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2009-04-16
19:25:08
  

 

상병 이석재 
  김소망 / 아하. 그렇군요. 얘기만 들었지 그 이유가 기억이 안나서 가물가물했는데. 
[칼럼] H.I.S - Scene 19: 우후죽순  
상병 이석재   2009-04-18 09:07:40, 조회: 65, 추천:0 

아주 오랜만에 유럽으로 돌아옵니다. 2월 11일에 올렸던 [H.I.S:13 너무나 붉은 십자가] 이후 쓰는 무려 두달여만에 유럽으로 돌아왔군요. 그동안 유럽은 너무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먼저 영국으로 가볼까요? 11세기 초반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은 노르만 왕조를 새롭게 개창합니다. 사실 로마제국의 라틴인, 북방의 바이킹, 색슨족등까지 합하면 브리튼 제도의 민족은 수없이도 바뀌어왔지요. 그러다가 노르만 왕조의 대가 끊어지면서 프랑스의 앙주가문에서 흘러들어온 헨리 2세가 플랜태저넷 왕가를 개창합니다. 사실 앙주가문에서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권에 대한 권리를 제창할 수 있었습니다(주1) 결국 프랑스와 벌어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는 브르타뉴, 영국왕, 플랑드르등 왕위를 위협하는 귀족세력을 일소하고 왕령을 넓혀 진정한 프랑스의 왕으로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영국또한 프랑스에서 i겨난 귀족과 원래 브리튼 섬에 남아있던 귀족들간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랭카스터 가와 요크 가의 전쟁인 장미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미전쟁으로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된 점으로 볼 때, 백년전쟁의 진정한 의미는 귀족세력의 몰락과 왕권의 성장, 절대왕권의 성립등으로 귀결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절대왕권이 성립될 여지가 있었으므로 두 나라의 성장은 완전히 달랐는데, 영국은 대헌장이라고 불리우는 마그나카르타를 통해 의회와 국왕의 대립구도로 바뀌었지만, 프랑스는 전쟁 도중 강력해진 상비군, 왕령을 통해 진정한 절대군주국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손을 잡았다’ 라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없었으며, 처음으로 동맹하여 바깥의 거대한 적을 칠 때는 크림전쟁, 즉 러시아를 상대할 때부터야 일어났으니 어찌보면 개와 고양이 같은 사이기는 합니다.

프랑스는, 카페왕조-발루아왕조-부르봉왕조로 이어지는 통치 체제를 구축합니다. 비록 카페 왕조 시기에는 프랑스 왕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왕령이 적고 귀족의 세력이 강했지만 백년전쟁등으로 인해 왕권이 점차 신장하게 되지요. 특히 노르망디, 보르도등 영국령이였던 대륙내 세력들을 축출하고 프랑스령으로 삼은 점, 신성로마제국-영국의 동맹군마저 격파할 정도로 점차 국력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 침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프랑스에서 절대군주정의 대표적인 특징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발루아 가문의 통치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군요. 하지만 구교-신교가 고루 분포되어 있었기때문에 분란도 많았습니다. 이 분란에 관해서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죠.

신성로마제국은 오토 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에게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이 된 독일은 그 덕분에 로마의 원조, 즉 이탈리아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를 지니게 됩니다. 특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중세를 결정짓는 중요 특징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름스 회의를 통해 황제가 교황의 폐위를 결정짓기도 했습니다만, 교황은 그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을 통해 황제를 굴복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는 성직자들의 임명권에 대한 요구였는데, 결국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이 성직자를 임명시키는 대신 성직자는 황제의 밑에서 일한다. 정도로 타협을 맺은 것이지요. 그러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진정한 로마의 황제로서, 제국을 유럽의 강국으로 올려놓은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대공위 시대(주2)를 겪으면서 황제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황금 문서를 통해 황제위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옆나라 프랑스처럼 절대군주정이 아닌 귀족들에게 지배되는 귀족정 비스무리한 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이슬람을 몰아내고 아라곤, 카스티야등이 레콩키스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카스티야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지요. 사실 이베리아 반도의 나라들은 한 가문에서 나온, 어찌보면 형제들의 국가 집합체입니다. 카스티야-아라곤이 결혼 동맹을 통해 에스파냐로 결합함으로서 새로운 강국이 탄생하게 되었지요.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더불어 카톨릭의 중심지였는데 특히 종교재판등이 심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에 합스부르크가문의 영지로서 세계의 첫번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는 독일, 프랑스와는 다르게 완전한 도시국가체제로 들어섰으며 비스콘티 가문의 밀라노, 베네치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등이 유명합니다. 이들은 황제와 교황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도시들의 권력을 지켜 나갔습니다. 사실 말이 도시국가지 밀라노, 피렌체등은 가문에 지배당하는 반 독재국가 수준이였지요. 물론 체사레 보르자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 전에도, 그 후에도 이탈리아가 통일될 기미는 요원했습니다. 아직 ‘피렌체인’, ‘베네치아인’등 각 도시국가간의 특징이 너무나 강했으며, 이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점 이후에야 가야했기 때문이였지요, 프랑스, 독일등이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 도시국가를 침공하고는 했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이합집산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한 국가가 대두되어 나서기가 힘든 상황이였지요.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는, 맨 처음 노르만의 일파가 왕국을 건설한 이후, 로베르 드 기스카르 같은 사람들이 비잔틴 제국을 노릴 만큼 성장하였지만 프랑스 앙주 가문이 노르만 일파를 내i았고, 앙주가문도 시칠리아의 만종(주3)사건으로 인해 스페인의 아라곤 가문이 시칠리아, 남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운 것이지요. 북쪽 이탈리아가 도시국가체제를 유지한데 반해 남쪽 이탈리아는 유럽 강국들의 혼수 선물등으로 넘어가고는 했습니다. 

그럼 이제 동유럽으로 좀 넘어가볼까요. 동유럽의 주요 강국들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보헤미아), 키예프 공국, 노보고르드 공국,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 등이 있겠군요. 

폴란드, 헝가리등은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교황의 카드였습니다. 아직 비기독교화되어 있던 이 지역에 교황이 대주교구를 설치(주3)해주고 기독교화 시킴으로서 이 두나라는 독일과 끊임없이 대항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에 비에 보헤미아 왕국, 즉 체코는 독일 선제후중 한명으로서 독일보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대항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지요. 비록 독일 제후들중 한명이였지만 자신도 독일 황제과 될 권리가 있었지만 대공위 시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그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폴란드,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후 외부 침략보다는 내부 치정을 더욱 중요시 했습니다. 폴란드는 특히 튜튼기사단의 계속적인 확장을 막기 위해 리투아니아와 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을 개설하였습니다.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은 프로이센, 러시아, 오-헝제국이 폴란드를 다구리(?!?!)때릴때까지 중유럽의 대강국으로서 그 영향력은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였지요. 헝가리는 마자르족의 일파로서 독일 견제를 위해 교황이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인데, 아르파드 가문의 통치 이후 비잔틴을 몰아내고 올라온 오스만에 의해 점령당하는 사건도 일어나게 됩니다.

튜튼 기사단에 대해서 설명을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겠군요. 십자군전쟁시의 구호기사단, 성전기사단과 비슷한 성격의 튜튼기사단은 중부 유럽의 발트해 연안지역에서 시작하여, 그 지역의 기독교화를 위해 힘썼던 기사단입니다. 물론 말만 기독교화지 실제로는 점령, 점령, 점령이였지요. 폴란드 입장에서는 초장엔 기독교화를 공짜로 시켜주는 튜튼기사단이 고마웠지만, 점차 그들이 자신들의 영토마저 노리자 리투아니아와 연합, 튜튼기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튜튼기사단은 이에 대항하여 기사단의 성격을 버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편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전쟁에 패배하여 폴란드 왕의 휘하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에 임명시키게 됩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이자 프로이센 왕. 이것이 튜튼기사단의 이중적인 성격이였고 이 이중적인 성격은 후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고 라이프치히 조약이 맺어질 때에야 비로소 종결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요. 아마 근대유럽의 프로이센 왕국을 설명하게 되면서 다시 나오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노보고로트 공국과 키예프 공국등이 있겠군요. 지금의 모스크바와 키예프에 자리잡은 이 두 공국말고도 러시아 지역에는 수많은 공국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통일보다는 연립국가들 수준이였지요. 이들은 남쪽에서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여(주5) 후에 비잔틴 멸망후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가 됩니다. 그들 나름대로 발전했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200여년간 몽골의 통치를 받아야 했으며, 후에 가서야 이간질 등을 통해 몽골족을 밀어내고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다시 유럽의 얘기를 진행해보도록 하죠.

주1:앙주와 발루아: 언젠가 얘기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카페 왕조가 단절된 뒤에 발루아 왕조가 프랑스의 왕위를 이었지만, 앙주가문에서 나온 플랜태저넷 왕가도 프랑스의 왕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앙주가문이 프랑스 왕가의 신하이므로, 결과적으로 영국 왕 또한 프랑스 왕의 신하일 수 밖에 없었지만,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의 누이가 영국 왕의 아내였기 때문이였지요. 만약 여자로부터 계승권을 인정해준다면, 영국 왕의 아내이자 프랑스 왕의 누이의 아들에게도 충분히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인정 될 수 있었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살리카’법을 중요시 하던 서부 유럽에게 여자 계승권을 운운하는 점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해석차이가 다양했는데, 프랑스는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여자에 대한 계승권을 거부했지만, 영국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이 건너들어왔고, 이쪽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들을 낳아 계승할 수 있는 방도를 주는 아내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여자에 대한 계승권도 인정하는 편이였지요. 서로의 해석차이 때문에 벌어진 전쟁, 바로 이것이 백년전쟁의 시작입니다. 

주2: 대공위시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왕이 시칠리아로 들어온 앙주가문을 상대하다가 패배, 살해당함으로서 독일의 대공위시대가 시작됩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문이 제국의 황제위를 계승하기 되지만, 그동안 독일은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타 수많은 귀족세력들이 할거하기 시작합니다.

주3: 시칠리아의 만종: 중세 반란사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뽑힙니다. 앙주 가문이 비잔틴과의 전쟁을 위해 주민들을 혹사시키자 이에 노르만 색이 강했던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앙주가문을 축출한 사건입니다.

주4: 대주교구: 교황이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중 하나였습니다. 위에서 보름스 협약으로 서임권이 교황에게 넘어왔다는 얘기를 했었지요? 비록 황제의 휘하였지만 교황과 땔래야 땔 수 없는 주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황제의 권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고 교황이 신경쓸 수 있는 지역은 많아지는 상황이 榮 것이지요. 비잔틴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교황이 불가리아에 대주교구를 설치하여 불가리아를 교황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주5: 그리스 정교: 저번에,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설명한 듯도 싶은데… 카톨릭과 그리스정교를 저울재던 러시아는, 그나마 지리적으로 가깝고, 결혼에 대해 관대하며(재혼, 삼혼까지는 허용했습니다. 사혼이후로부터는 금지), 교황-황제의 이중적 체제가 아닌 황제 중심주의로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측면 등으로 인해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4:01 

 

상병 박원익 
  Medieval total war 시리즈가 생각나네요(웃음) 2009-04-18
11:37:30
  

 

상병 이석재 
  박원익 / 사실 좀 그런 느낌이 들거에요. 실제로 그 게임을 좋아하기도 하고. 2009-04-25
12:19:07
  

 

상병 최규호 
  미디블 토탈워!!! 엠파이어 토탈워 하고싶은데 
 [칼럼] H.I.S - Scene 20: 중세를 추억하며  
상병 이석재   2009-04-18 21:18:30, 조회: 68, 추천:0 

H.I.S 20편만에 중세를 종결하고, 근대 세계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식으로 도배는 올리지 않는데. 빨리 20편을 올리고 중세를 종결시키고 싶어서요. 이번편에서는 저번 19편에서 알려드리지 못한 중세의 얘기들을 적고, 중세에 대한 결론을 낸다음 근대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중세-근세를 나누는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그렇게 나누는 이유또한 불분명합니다. 프랑스 아날학파 학자중 한명인 자크 르 고프가 얘기했던 것처럼, 어떻게 1452년에 살던 사람이 다음년, 또는 그 다음년에 ‘아 이제 근대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냐는 거지요. 마치 우리가 2000년이 넘어가면 날아다니는 버스, 3D시계등이 생기리라고 90년대에 생각했던 것처럼, 중세와 근세를 나누는 기준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는게 그의 생각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기준을 나눈 이유는, 편리를 위해서지요. 아무 기준없이 역사를 나열하면 모든 역사학자들이 전공없이 모든 역사를 다 관리하고 배워야 할 테니까요. 하여튼 중세의 종결과 근세의 시작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비잔틴 제국의 멸망 후, 그쪽의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망명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적인 배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였지요.

중세의 종결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잔틴의 멸망을 적어놔야 겠군요. 4차 십자군 이후 발칸과 아나톨리아 일부로 영토가 줄어든 상태에서 그들은 세르비아, 노르만, 프랑스, 에스파냐, 마지막엔 오스만의 침공을 다 받아내어야 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앙카라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해 성장이 줄어들었지만, 그것도 비잔틴의 명을 수십년밖에 늘여주지 못했습니다. 오스만은 아드리아노플을 수도로 삼고 비잔틴을 계속해서 압박해 들어갔으며 비잔틴은 술탄의 가신이 되어야 할 정도로 굴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엔 교황은 아비뇽 유수로 인해 권력이 약화된 상황이였고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전쟁중, 에스파냐는 비잔틴에 그닥 욕심이 없었고 독일은 자기네들끼리 싸우느라 비잔틴에 관심조차 가지지 못했죠. 결국 문서상으로 그리스 정교와 카톨릭의 결합을 선언하였지만 결국 물리적인 지원은 가지지 못한채 오스만의 강공에 1453년 멸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 오스만은 베네치아와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결전을 벌이게 되지요.

아비뇽 유수와 티무르 제국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넘어가야 겠군요. 아비뇽 유수는 교황과 대립교황의 싸움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신성로마가 대공위 시대 이후 점차 내부적인 문제에 치중할 무렵 프랑스는 이탈리아 공격등을 통해 교황권과 새롭게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프랑스는 아비뇽에 교황을 유폐시키고, 다른 교황을 선출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로마는 로마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교황을 뽑게 되는데 이를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아비뇽 유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가서야 로마교황으로 통일되지만 교황권이 점차 약화되던 시기를 대변하는 중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티무르 제국은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티무르가 중동을 휩쓸고 통일 제국을 세운 사건입니다. 오스만을 격파하고 인도까지 진출할 정도로 세를 넓혔지만 티무르가 명나라 원정 도중 사망함으로서 티무르제국은 점차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 지역을 다시 차지하게 되는 나라가 오스만 투르크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 스칸디나비아로 넘어가볼까요? 이 지역의 강국은 두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스웨덴과 덴마크이지요. 스웨덴은 유럽 국가들중 제일 먼저 농노를 폐지할 정도로 근대적인 국가였습니다. 핀란드를 속령으로 거느리고 노르웨이 왕까지 겸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이후 덴마크가 나서 칼마르 연방을 제창함으로서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일시적으로 통일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즈음에 가서 다시 스웨덴과 덴마크로 분열되었고 덴마크는 독일 연방에 편입되고, 스웨덴은 나중에 30년 전쟁과 러시아와의 대북방 전쟁 이후에 노르웨이를 뱉어내야만 했습니다. 스위스도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겨 독립할 수 있었던 케이스지요. 스위스의 역사는.. 먼나라 이웃나라에 더 자세하게 나와있으므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싶지만, 스위스 용병은 ‘란츠크네히트’라고 불리우는 독일 용병과 더불어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고, 지금 로마 교황청을 지키고 있는 용병 또한 스위스 용병이라는 점은 집고 넘어가야 할 듯 싶군요.

십자군 전쟁 이후, 크리미아 반도에서 건너들어온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였습니다. 러시아-크림반도를 거친 이 병은 콘스탄티노플-발칸, 이탈리아-독일, 프랑스-스페인, 영국을 차례로 거치며 유럽 인구의 1/3을 줄여놓았지요. 사실 로마 후기에도 정착민의 감소로 인해 농촌문화가 줄어들고 도시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흑사병 이후에 이런 성격이 더욱 강해집니다. 점차 폐쇄적인 경제체계를 갖추고 있던 장원문화가 인구 감소로 인해 줄어들기 시작하고 결국 각 장원의 귀족들은 수도로, 수도로 모여들면서 왕 옆에서 먹고 살 길을 강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그 결과 귀족들의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하고 왕권이 강화되어 절대왕권의 시대가 찾아오게 됩니다. 왕은 왕대로 이젠 지방 귀족의 숫자가 줄어들어 군대를 뽑아내기가 힘드니까 자신만의 군대를 창설하여 원하는 때에 전쟁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절대왕권과 상비군, 그리고 중상주의정책은 중세를 종결하고 근대로 넘어가게 하는 중요 특징중 하나입니다.

사실, 스페인 반도 통일이나 에스파냐 왕국의 탄생, 장미전쟁,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등은 1453년 이후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 또한 중세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며, 근세를 결정짓는 일들은 대항해시대, 르네상스의 시작, 종교개혁의 불길등으로 요약될 수 있겠지요. 다음 유럽편에서는 이것들을 다룰 생각입니다. 저 또한 자크 르 고프의 생각처럼 사건을 기준삼아 역사를 판단하는게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인간의 짧은 생각이 수많은 사고의 시간들을 단지 사건 하나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나 11~15세기의 사건들과 15~19세기의 사건들은 그 특징면에서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세가 비록 ‘암흑시대’로서 마녀재판, 종교재판, 교황과 황제의 끊임없는 전쟁, 이슬람의 발전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시대지만, 그만큼 고대 문화의 보존, 유지. 각 민족들의 민족주의 발전의 기반등을 마련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전 유럽은 각 지역에서 티격태격 싸우던 시기를 지나 대륙의 기상을(?!?!) 펼치게 됩니다. 여러분, 근세의 시기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칼럼] H.I.S - Scene 21: 코에이  
상병 이석재   2009-04-25 11:36:51, 조회: 193, 추천:0 

근대, 몇몇분들이 근대성에 대해 적어주신 글들이 있어서 가끔씩 참조중이긴 하지만, 이 근대성이란게 어찌보면 사람들을 더욱 잔혹하게 만드는 성향을 지니게 하는거 같습니다. 중세적인 면을 버리고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단어, 근대성. 그 발전 앞에 있는 수많은 방해물들은 당연히 치워져야 하면 오직 결과만을 향해 나아가는 그 단어야 말고 15세기 이후 세계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케일이 더욱 커진 서로간의 암투와, 그에 따른 홀로코스트의 역사. 근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단 천천히 세계의 모습을 훑어볼까요. 아직 아메리카, 아프리카는 중세 왕국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메리카는 4세기에 일어난 마야문명의 뒤를 이어 잉카, 아즈텍 문명이 한창 꽃피우던 시기였고, 아프리카는 중세의 강력한 왕국들이 분열된 상태에서 유럽인들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중동엔 압바스 왕조, 셀주크 투르크, 일 칸국, 티무르제국에 이어 오스만 투르크가 유럽, 아프리카, 중동에 걸친 제국을 건설해 나아가고 있었으며 인도에는 노예왕조를 거쳐 여러 국가들의 연합체라고 볼 수 있는 델리 술탄 왕조가 건설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인도에도 이슬람화의 물결이 진행되고 있던 터였고 인도네시아는 마자파히트 왕조, 타이는 아유타야 왕조, 베트남은 진조등이 건국되었습니다. 중국은 송-원에 이어 명나라가 새롭게 등장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고려-조선의 교체기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를 통해 막부통치체제가 새롭게 건립되고 점차 막부가 아닌 혼란의 전국시대로 빠져들어가던 추세였지요,

그럼, 이 근대세계 입문의 첫번째 단계인 르네상스부터 짚고 넘어가볼까요. 이 르네상스는 중세의 종결이라고 할 수 있는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제국의 부흥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멸망당하던 그 해에, 수많은 비잔틴 학자들은 북부 이탈리아로 넘어와 고대 지식체계의 전승을 행했습니다. 로마 분열때부터 15세기때까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있던 도시에, 그 수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나온 그 학자들은 서유럽에 어떤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이미 로마의 색깔은 사라지고 새로운 ‘신’의 문명을 개척해가던 서유럽으로서는 고대와 중세의 혼합을 통한 새로운 색깔의 비잔틴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개인을 억압하는 ‘신’중심 체제에서 신조차도 인간의 형태였던, 고대의 ‘인간’중심 문화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 등지에서 일어나던 경제적 부흥은 이런 예술적 움직임에 대해 박차를 가하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현재로도 보건데 부자들은 예술을 지원함으로서 자신이 좀 있어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데, 이와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될까요. 결국 신을 찬양하는 중세 교회의 그림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고난, 역경, 아니면 혼란 등 인간중심적인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이였다면,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추구하는 과정이였다고 볼 수 있을까요? 독일의 종교개혁또한 르네상스와 일치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를 특징짓는 교황 중심의 교회체제가 아닌 각 지역의 신도 중심의 교회체제를 구축하려고 한 루터 같은 인물들은 과거의 ‘인간’중심 체제를 다시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또한 ‘유토피아’, ‘우신예찬’같은 작품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기엔 단지 그림 속의 숨겨져 있는 지식이였던 반면에 비판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들을 논의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지식 기반을 마련하였다면, 그 기반을 토대로 북유럽의 르네상스에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통한 인간 중심의 문화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역시 피바람이 불게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단점 또한 짚고 넘어가야겠지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물론 문화적인 면에서는 부흥을 일으켜줬지만,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파란의 시작이였습니다. 경제적인 부흥, 문화적인 발전은 다른 강국들을 이탈리아로 끌어들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자기 잘난맛에 살았고 통일문제는 뒷전이였던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피렌체 등은 결국 주위 국가들의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교황의 나폴리 왕 떡밥투척사건(주1)으로 이탈리아에 개입하게 된 프랑스, 나폴리의 원래 주인이였던 스페인, 북이탈리아의 주인이였던 신성로마제국, 동쪽의 강국 오스만제국 등등 이탈리아에 관심이 있는 나라들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그들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근세 중반 이후에 가서야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대항해시대로 넘어가볼까요. 대항해시대를 설명하기전에 꼭 필요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즉 이베리아 반도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습니다. 레콩키스타 라는 국토 재회복 운동을 통해 무어인(주2)들을 아프리카로 몰아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이제 지중해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지중해는 포화상태,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는 물론이요 오스만 제국, 프랑스 왕국등이 지중해의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새로운 세력의 진출을 막았던 것이지요. 물론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점령한 에스파냐로서는 지중해로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고 베네치아와 더불어 레판토 해전(주3)까지 진행하게 되지만, 그들은 인도, 대서양을 통한 진출을 노리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주4)을 통해 신대륙, 즉 아메리카와 인도양 등을 나눠가지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첫번째 세대가 된 것입니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가 행한 일들은 세계의 중심을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으로 옮겨 놓았으며,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대륙, 유럽 대륙의 삼각무역을 통한 새로운 경제체계로의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항해시대 1세대가 에스파냐, 포르투갈이라면 2세대는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정도가 되겠군요.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지역을 주 지역으로 삼았다면 프랑스와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새롭게 진출한 케이스지요. 이렇듯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점령지에 그들이 새롭게 끼어들면서 대서양 해역은 전쟁의 포화속에 빠져 들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엔, 종교개혁을 언급하면서 이 시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종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휘릭.

주1- 나폴리왕 떡밥투척사건: 교황은 베네치아나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라곤 왕가가 차지하고 있던 나폴리 왕의 직위를 프랑스 왕에게 넘기는 대신, 이탈리아에 개입할 것을 요청합니다. 프랑스의 진출 직전에 와서야 그 요청을 철회하지만 이미 프랑스는 쾌속 진격, 북부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나폴리 왕국까지 내려가는 상황을 연출하게 됩니다. 물론, 프랑스는 나폴리 전역에서 패배하긴 합니다만 이후 수십년간 이탈리아에 프랑스가 개입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주2- 무어인: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이슬람 인들을 일컫습니다. 알 모라비데 왕조등이 건국되었으나 수십개의 국가들로 분열 된 이후 북부의 기독교 인들에게 계속 후퇴, 결국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됨으로서 무어인들은 모로코, 알제리등지로 i겨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모여살던 무어인들은, 지중해의 이민 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주3- 레판토 해전: 베네치아, 에스파냐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졌던 해전입니다. 최후의 겔리선 전투라고 일컬어지며 이 전투에서 베네치아, 에스파냐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서 오스만의 동지중해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이후 완만한 쇠락의 시작점으로서, 1차대전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네치아 또한 피폐해 짐으로서 지중해 전체에 쇠락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이 틈을 타 에스파냐는 대서양 해역의 개발을 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4- 토르데시야스 조약: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 그들은 교황에게 중재를 의뢰했습니다. 이때의 교황은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로 유명한 알렉산데르 6세. 그는 지구의 본초자오선으로 직선을 쫙 그은다음에, 그 선의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인정했습니다. 그 선은 지금 브라질쪽을 관통하는 선인데, 이 때문에 신대륙의 대부분은 에스파냐령으로,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쪽은 포르투갈 령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등 유럽 강국들의 진출이 이어짐에 따라 에스파냐는 남미와 멕시코, 포르투갈은 모잠비크, 앙골라 등 아프리카 일부 지역과 동남아 일부 지역에 국한되는 식민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식민지 1세대들은 2세대들처럼 ‘점령’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무역소’의 개념이 더욱 컸기 때문에 식민지 2세대들이 들이닥칠때는 무역소 개념의 이상. 즉 유지 후 확대의 과정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토가 쉽게 날라가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였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4:16 

 

병장 김무준 
  코에이의 떡밥에 낚였다. 파닥파닥. 2009-04-28
23:16:45
  

 

상병 이석재 
  ...사실 낚시 떡밥으로 준비한 제목은 아니였는데... 다만 대항해시대 때문이였지요. 어허. 나중에 코에이를 주제로 글한번 써볼까... 2009-04-29
15:18:01
  

 

병장 김태원 
  본문과는 관계없는 말이지만 

코에이 덕분에 희망봉과 신대륙의 발견년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히 느껴지는군요 2009-04-29
15:41:11
  

 

상병 이석재 
  낄낄낄. 저도 그렇죠. 2009-04-30
21:23:20
  

 

상병 김소망 
  르네상스 이후의 철학과 르네상스 이전의 철학이 확연한 단절서을 보여준다는 점은 르네상스가 근대초기와 중세를 분절하는 어느 한 기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여겼던, 그러니까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신앙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철학을 이용했던 중세와, 철학 그 자체를 세계에 대한 탐구 목적으로 이용했던 근대초기는 확실히 뭔가 다르지요. 2009-05-16
08:09:36
  

 

상병 이석재 
  상병 김소망/ 그렇습니다. 그 중세를 분절하는 어느 한기간이 르네상스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중요한 기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칼럼] H.I.S - Scene 22: 종교개혁  
상병 이석재   2009-04-28 23:38:58, 조회: 128, 추천:0 

종교개혁의 바람은 확실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서 발원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그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유럽의 제국(諸國)들을 살펴봅시다.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 북유럽, 동유럽등이 있군요. 동유럽은 슬라브인의 그리스정교와 오스만의 이슬람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비잔틴을 설명할때도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그리스정교는 애초부터 황제가 종교의 수장을 맡는 체제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황과 성경의 괴리에서부터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는 종교개혁의 근거 자체가 없는 셈이지요. 이미 황제가 교황인데요 뭐. 이슬람도 원래는 정치적 지도자만을 의미했던 술탄이 명목상 남아있던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칼리프, 즉 종교적 지도자의 직함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래서 술탄-칼리프 통치체제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정치와 종교가 애초부터 일원화되어있던 러시아와 발칸은 이래서 제외.

그렇다면 카톨릭을 받아들인 서유럽은? 대표국가라면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등이 있겠군요. 영국은 너무나 잘 알다시피 헨리 8세의 파혼(주1)등으로 인해 영국의 국왕을 종교의 수장으로 하는 국교회가 등장했기 때문에 패스. 프랑스는 ‘위그노’라고 불리우는 신교도들이 있었지만 낭트 칙령을 폐지한 루이 14세(주2)의 정책으로 인해 명목상으로는 카톨릭의 승리. 에스파냐는 신교도가 들어올 틈도 없이 종교재판, 마녀사냥등으로 카톨릭의 근원을 지켰기 때문에 카톨릭 승리, 이탈리아는 교황이 있다보니 신교도가 들어올 공간이 없으므로 카톨릭 승리. 주로 신교도가 들어온 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즉 북유럽쪽이 강했죠. 그들은 서, 남유럽에 비해 카톨릭을 받아들인 기간도 느렸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왕보다 더 높은 교황이라는 직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헝가리는 한창 오스만의 점령 하였던지라 이런 일에 끼어들 상황도 아니였고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등의 침략으로 인해 역시 쇠퇴기를 맞고 있었던 상황이였지요. 그럼 남은 곳은 어디였을까요?

독일은, 일단 여러 제후들의 국가로 나뉘어져 있어 카톨릭이냐, 신교도냐를 결정해줄 사람이 없었다는것도 문제였으며 교황 자체가 절대적인 권력자가 없는 독일에서, 말 그대로 사자가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다라는 모토를 앞세워 수탈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터등이 일으킨 종교개혁을 통해 독일은 카톨릭과 신교도로 나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끊임없는 분쟁으로 이어져 나중에 가서는 유럽 최후의 종교전쟁이라 불리우는 30년전쟁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독일 신교도 제후 연합을 슈말칼덴 연합이라고도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슈말칼덴 연합은 독일을 싫어하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30년전쟁에 가서 카톨릭임에도 신교도편에 참전한 프랑스의 정책 기조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은, 글쎄요. 교황의 권위를 한층 떨어트렸다는데에 그 의의가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마저도 신화가 아닌 인간중심적인 면으로 변화했다는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통해 수도승만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손에 쥘 수 있게 됨으로서 성경을 교육시켜야 할 사람들이 대두되었고, 결과적으로 점차 성경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게 된 독일인들은 점차 교황중심 아닌 독일 자체로서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임시봉합은 했지만 강력한 체제가 없었던 독일에서는 신교도와 구교도의 싸움이 격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교도는 루터파와 칼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루터파가 주로 독일지역에 자리잡은데 반해 칼뱅파는 프랑스 신교도들을 대표하는 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터파와 비슷한 교의였지만 예정론을 통해 신교도들의 경제적 행위를 옹호하고, 엄격한 성서중심주의를 펼쳤다고 볼 수 있지요. 루터파는 경제적 행위를 중요시 여기지 않았지만 칼뱅파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이 두 교파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그 덕분에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가르키는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신교도와 구교도들의 전쟁을 위그노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여파라고 볼 수 있겠지요. 위그노 전쟁에 대해서는 낭트칙령 부분에서 설명하고 넘어갔지요?

영국은, 헨리 8세 이후 메리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주4)을 거친 튜더왕조가 메리 여왕의 아들이며 스코틀랜드 왕인 스튜어트 왕가로 왕가가 변화하던 시기였습니다. 스튜어트 왕가는 카톨릭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서 영국 국교회가 자리잡아가던 영국에 종교적인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더욱이 스튜어트 왕가는 의회를 배척하는 정책을 폄으로서 의회와 왕의 분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독일 문제에 대해서는 신교도 중심주의였으며 후에 일어나는 30년 전쟁에서도 신교도의 편을 들게 됩니다. 

종교개혁 시기의 동유럽은 러시아의 새로운 발전과 튜튼 기사단의 멸망 후 프로이센 왕국으로의 흡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의 쇠퇴등으로 기록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이 종교개혁의 가장 큰 파도는 서유럽,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 등지라고 볼 수 있으니 잠시 눈밖에 난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이 네덜란드가 근대 초기의 가장 큰 화두라고 볼 수 있겠군요. 어머니로부터 에스파냐를, 아버지로부터 오스트리아를, 할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위를 상속받은 에스파냐의 카를 5세는 근대 초기에 처음 나타난 강대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주5)란 책에서도 제일 먼저 나오는 나라가 카를 5세의 신성로마 제국이지요. 그러나 독일 신교도-구교도간의 끊임없는 전쟁, 비록 이탈리아 등지에서 패배했지만 신성로마제국 독주체제에 끊임없이 태클을 걸고 있던 프랑스의 저항등으로 인해 그 유지력을 잃고 동생에게는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을, 아들에게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등지를 물려주게 됩니다. 에스파냐의 통치자인 펠리페 2세는 신대륙을 경영함과 동시에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파인 메리 스튜어트(주5)을 지원함으로서 영국을 견제하고 있던 상황이였지요. 더욱이 카톨릭파인 펠리페 2세(주6)는 신교도들의 땅으로서 경제가 발달한 네덜란드를 끊임없이 종교적으로 탄압하였고 이에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에게서 독립, 신교도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또한 반대파를 계속 지원하고 있던 에스파냐를 해적(주7)을 통해 자금줄을 계속 끊고 종국에는 전쟁상황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영국 연합과 에스파냐의 전쟁. 이것이 첫번째 초강대국이였던 에스파냐를 거꾸러트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대서양 진출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등이 새롭게 진출하게 되는 결론을 낳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레판토 해전으로 시작된 에스파냐의 최전성기는 이렇게 종결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잠시 유럽을 벗어나 볼께요. 원래로 돌아와서 한동안 못한 조선과 일본을 한다음 중국을 해보려고 합니다.

주1- 헨리 8세의 파혼: 첫번째 아내서부터 여덟번째 아내까지, 황제가 종교의 최고제사장이라고 볼 수 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마저도 4혼까지밖에 못했습니다. 그런데 카톨릭이였던 영국이라고 오죽했겠습니까. 그의 아들을 위한 사랑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지만 결국 그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는 일찍 죽어버리고, 결국 엘리자베스 1세까지 지속된 튜더왕가는 그렇게 종결되었던 것이지요. 이 재혼의 문제 때문에 교황과의 관계가 틀어진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라는 새로운 신교를 채택함으로서 카톨릭의 세계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후 영국은 카톨릭과 국교회를 넘나들다 의회정치가 확립되는 하노버 왕가 이후에는 완전한 신교도 체제로 들어서게 됩니다만, 그때가서는 신교-구교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치 않은 세기가 되어가던 것이였지요.

주2- 낭트 칙령: 앙리 4세, 즉 부르봉 왕가의 창시자인 그가 발표한 칙령입니다. 사실 이 칙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그노 전쟁을 먼저 얘기해야 할 텐데요. 얘기하자면 복잡하지만, 결론적으로 프랑스에 생겨나기 시작한 신교도들과 원래의 구교도들간의 이루어진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왕등이 암살당하고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등이 이루어지는 등 프랑스 왕국이 내분의 홍염에 빠져들었지만, 신교도였던 앙리 4세가 화합을 위해 카톨릭 교도로 개종하고, 위그노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칙령이 낭트 칙령입니다. 그러나 이 칙령은 루이 14세가 파기함으로서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그 후 프랑스에 밀어닥친 경제적인 위기는 프랑스혁명 시기에 가서야 수면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주3-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독일 제후들과 황제가 종교 문제에 대해 타협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황제는 신교도들을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서 타협을 하였는데요, 다만 다음 제국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라고 규정하여 카톨릭 교도의 우위를 보장하려고 하였습니다. 신교-구교간 가장 두드러진 평화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4- 엘리자베스 여왕: 튜더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입니다. 장미전쟁으로 왕위를 계승한 튜더왕가가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에서야 종결되었는데, 그래도 그녀의 통치는 왕권을 강화하고 에스파냐 등지에서 해적질로 넘어들어온 자금력을 통해 의회의 눈치를 안보고 재정적인 면을 장악할 수 있었지요.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죽음으로서 결과적으로 밑에 설명할 메리 스튜어트의 궁극적인 승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에스파냐와 결전을 벌임으로서 앞으로 벌어질 영국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5-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의 여왕입니다. 그러나 혈통상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와 끊임없이 경쟁하였으며 특히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계속적인 저항을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가 처형하게 됩니다. 이 처형은 좀 눈물나는데, 스코틀랜드 왕을 이어받은 제임스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가 아들이 없자 다음 왕위계승 1순위에 오르게 됩니다. 결국 그는 엘리자베스와 타협하여 다음 왕위를 안전하게 차지하는 대신 어머니였던 메리 스튜어트에 대한 처형을 묵인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처형을 묵인한 그는 결국 엘리자베스 사후 스튜어트 왕가를 개창하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왕국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주6- 펠리페 2세: 카를 4세의 아들입니다. 에스파냐의 전성기를 개창하였으나 끊임없는 자금력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에스파냐의 재정은 점차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신대륙에서 나오는 자원줄이 끊기고 영국에 의해 대서양 재해권이 장악당하자 에스파냐의 재정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결국 전성기는 거기서 종결되고 맙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너무 강대하게 유지한 나머지 건전한 재정을 유지 못한것이지요. 미국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베트남 전쟁등으로 군사력 대비 재정을 거대하게 유지하면 할수록 경제 위기가 다가온다는 이론이였습니다. 사실 제 이론이 아니라 폴 케네디의 이론이였지만…쩝쩝

주7_ 해적: 이시기의 해적으로 유명한 드레이크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대서양 등지로 해역이 넓어지면서 감독할 수 없는 해역또한 넓어짐에 따라 해적이 성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의 경우처럼 국가를 도와를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4:23 

 

상병 이기범 
  잘봤습니다. 뭔가 제 머릿속에서 따로놀던 역사적 사실들이 종합되는 듯한 느낌 흐 

근데 하나 추가했으면 하는 것이 바로 '스위스' 입니다. 전 유럽이 휘말린 30년전쟁의 업화 
속에서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장칼뱅이 활동하기 시작한 근거지가 바로 스위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2009-04-29
10:09:07
  

 

상병 최규호 
  잘 봤습니다. 
언젠가 영국 국교회의 성장과정이나 샤를마뉴 대제 쪽 배경 스토리 같은 것도 나오겟죠.. 2009-04-29
12:34:55
  

 

상병 이석재 
  상병 이기범 / 스위스의 독립과 중립을 지켜가는 과정은 대단하긴 하죠. 하지만 30년 전쟁시의 스위스는 그냥 관심 밖 대상이였다고 하는게 좋겠지요. 이탈리아는 분열되어있지, 주위 강국들은 독일에 관심이 더 많지. 이런 상황에서 칼뱅파의 본산지가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것도 꽤 큰 호기심이긴 하지만, 제 생각에서는 그뿐이긴 하군요. 스위스를 더 평가해주고 싶은 시기는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상병 최규호 / 사를마뉴 대제의 스토리는 넘어갔긴 했는데...아악, 그런걸 더 쓰자면 제 전역때까지 안끝날지도 몰라요. 영국 국교회도 생각해보죠... 2009-04-29
13:37:41
  

 

상병 최규호 
  scene 8 에서 나왔는데 좀 짧은 것 같아서 슬퍼요 
아니면 토탈워 신작 엠파이어 토탈워 시리즈 배경이 되는 근대는 관심 없었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조금 궁금해지네요 2009-04-30
08:25:39
  

 

상병 이석재 
  상병 최규호 / 하긴.. 좀 짧긴 했지요. 엠파이어 토탈워 시리즈의 배경이라면,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시기쯤은 가야겠지요? 2009-04-30
21:20:45
  

 

상병 최규호 
  보나파르트 형 나오고 할때 쯤이니까 
16, 17세기 전후반으로 나올 것 같은데.. 
그런데 세계사 정말 많이 아시는 것 같네요. 2009-05-01
13:06:40
  

 

상병 조성열 
  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2009-05-01
13:15:18
  

 

상병 이석재 
  상병 최규호/ 아마 그쯤나오려면 H.I.S가 30쯤은 가야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 중국, 한국, 일본 적으려면 꽤 시간이 걸리거든요. 중동이나 인도, 아프리카도 다뤄야 할듯 싶고... 실제 아는건 별로 없어요. 

상병 조성열/ 감사할 따름입니다. 2009-05-01
20:15:03
  
 [칼럼] H.I.S - Scene 23: 인삼  
상병 이석재   2009-05-15 11:53:13, 조회: 68, 추천:0 

이번엔 중국이 아닌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좀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사실 유럽이 근대를, 중국이 몽골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한반도는 아직 고려시대를, 일본열도는 야마토정권을 벗어난 나라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좀 진도를 맞춰보려고 합니다. 사실 세계사라고는 하지만 제가 집중적으로 알고 있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사가 주요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다음 좀 겉으로만 아는 중동사, 아메리카사. 그리고 거의 잼병수준인 인도사, 러시아사 같은 경우는 자료가 좀 빈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쩝.

하여튼, 일본 먼저 들러볼까요? 다이카 개신을 통한 일본의 개혁은 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에 열심이였습니다. 이를 나라시대라고 하는데, 야마토 조정, 나라시대의 일본 같은 경우는 전국을 통일한 연방정부의 성격이였습니다. 그것도 혼슈(주1)에 국한되어 있었고 큐슈섬 같은 경우는 독립정부가 존재했지요. 대마도 또한 말이 중앙정부 귀속이지 실제로 자치정부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고려, 조선과 단독으로 외교협상을 벌일 정도였으니까요. 야마토 조정은 주로 백제문화를, 수도를 쿄토로 한 나라정부는 당의 문화와 신라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백제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맞나…?)를 베꼈다고 전해지는 일본 국보 1호(이것도 맞나…? 하여튼 국보인것만 기억나고 있습니다.)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또한 이 문화의 전파를 가장 잘 가르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특히 백제의 담로국(주2)이 일본이였다는 설 또한 일본에 전파된 중국, 한국문화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외에도 백제의 성씨를 쓰고 있는 마을이라던가, 중국 문화의 산실인 유교의 전파등 또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자신들만의 색을 찾기 시작합니다. 간단한 이유로 당의 몰락과 백제, 신라의 멸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당의 이야기를 할때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당은 개방적인 국가입니다. 송의 폐쇄적 국가와 반대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서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도 개방적이였고,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는데도 개방적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방적인 국가가 멸망하고 혼란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일본인들은 당의 문화를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위대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국가도 저렇게 한순간에 멸망하는데,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신들 또한 언젠가 멸망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 말이지요. 이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결국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종교(주3)가 새롭게 정립되기 시작하고 근세까지 이어져 내려온 일본의 문화가 이때서부터 정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본의 문화는 더욱 발전하기 시작하죠. 막부 자체로는 정치적인 쇠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제라고 볼 수 있는 천황의 통치체제가 아닌 이름뿐인 천황을 놓고 정치력이 강하지 못한 중세 봉건적인 정부, 즉 막부가 통치하는 체제는 중앙집권을 이룩했던 중국과 한국과는 조금 한등급 떨어지는 정부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주4)그러나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은 무력의 시대를 지내는 법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이어지는 전국시대에 가서는 한국, 중국에 비교하며 무사계급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침략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가마쿠라 막부는 천황통치를 종식시키고 막부통치
를 시작하였습니다만, 단지 권력 중심적인 이유로 인해 정치체제가 변화한 것이였고 이 때문에 막부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던 지방의 영주들은 점차 자신들만의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따르지만 속으로는 따르지 않는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원의 침략(주5)으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로 교체되고, 결국 지방중심적인 분리가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막부는 유명무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등으로 유명한 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전국시대와 에도시대에 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고 다시 한반도로 넘어와볼까요.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신라가 내부분열로 인해 후삼국시대로 분열되던 때였습니다. 결국 발해의 멸망 이후 더 이상 요동, 만주지역은 한인이 주인이 되지 못하였지만. 신라, 후삼국, 고려로 이어지면서 평양 이남에 국한되었던 영토는 점차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후고구려의 주인이였던 궁예는 평양성을 새롭게 수복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고 결국 그 후고구려를 이어받아 신라, 후백제를 점령한 고려 또한 국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고구려(주6)를 이어받은 국가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왕건이 유언을 통해 평양을 중요시 여기라고 했을까요(주7).

고려의 통치는 조선과는 확연히 대비됩니다. 물론 성종이 시무 21개조를 통해 유교적인 통치기반을 마련하였지만 이는 아직 유교가 일상생활이 아닌 통치체제에만 접목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건은 불교를 중요시 하였고 이는 고려시대 내내 이어진 기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계속적인 북진정책을 통해 압록강에 이르는 성과를 보여주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신라의 골품제가 아닌 과거제를 통해 진정한 인재를 뽑는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불교에 빠져드는 왕족계층과 점차 늘어나는 귀족계층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원의 침략까지 이어지는 무신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였습니다. 고려 후반에 가서야 무신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무신독재체제가 무너지고 원나라의 간접통치체제를 거쳐 독립을 꿈꾸지만, 결국 개혁세력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대로 동아시아를 끝낼 수는 없겠죠? 조선과 일본 전국시대, 그리고 명나라를 다룬 다음에 중세로 넘어가볼께요. 

주1: 4개섬-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4개섬을 일본의 4개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알아둘 바는, 고대와 중세의 일본은 지금의 일본과는 좀 영토개념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쓰시마, 류구제도 같은 경우는 후에 가서야 일본의 진정한 영토가 되기 때문이지요. 홋카이도도 메이지유신 이후에 가서야 진정한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게 됩니다. 이때의 일본은 대체로 시코쿠와 혼슈, 큐슈섬을 의미하게 됩니다.

주2: 담로국- 백제가 왕권집중을 행한 뒤로 각 지역에 설치한 지방정권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듯 싶군요. 현재 미합중국의 한주정도? 교과서에는 백제 영토에 설치되었다고 설명되어있지만 요서, 심지어는 동남아에도 백제의 담로국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덕분에 일본의 천황이 백제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주3: 일본의 종교- 신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불교였지만 점차 일본의 문화가 국내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일본 자체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신도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와서는 천황을 위시한 국가주의적인 종교로 변질되기도 하였지요. 중국의 유교 비스무리한 종교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군요.

주4: 정부체제: 그러나, 중국-한국이 절대왕권시대에서 근대의 의회국가로 급격하게 넘어간 반면 일본은 절대왕권-봉건체제를 거쳐 근대 의회국가를 거쳐갔으므로 일부 일본인들은 자기네 나라가 정부체제상 더욱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역사상으로 유럽과 비슷하게 발전하지 않았는가? 라고 주장하긴 합니다만. 개소리라고 치부하고 싶군요. 유럽과 동아시아는 발전양태가 상이하게 달랐다는 점에서 유럽을 예시로 첨부하는 이 주장에 대해 긍정할 수 없습니다. 결국 유럽또한 봉건체제를 거쳐 절대왕권중심의 근대국가로 복귀했다는 점. 중국-한국 또한 굳이 봉건적 분립체제를 거치지 않더라도 식민지 시대 전까지 분란없이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는 점, 일본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직접통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봉건체제가 국가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볼 수 있겠군요.

주5: 원의 침략- 몇번의 침략을 통해 고려를 종속국으로 만든 원은 고려함대를 동원하여 일본 정벌을 계획하지만, 이른바 ‘카미카제’라고 불리우는 태풍에 의해 두번에 걸친 원정이 좌절되어 결국 일본은 원의 침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덕분에 일본의 문화는 자신 나름만의 문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6: 고구려- 여러 고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국명은 고려라고도 한다’라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라고 국명을 정한 왕건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국명을 통해 북진을 계획했던 것이지요.

주7: 왕건의 유언- 위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개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경을 중요시하고 불교 종교행사를 자주 펼칠것과, ‘라도’출신을 경계하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 왕건의 유언은 고려 멸망시까지 고려의 중요한 정책기조로 이어져 내려가게 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4:32 

 

상병 김소망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유물로 6세기경에 그러한 "반가사유상" 형태의 불상이 신라에서 유행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략 1세기가 지난 후에 일본에서 그것이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은 그 양식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요. 2009-05-16
08:02:52
  

 

상병 김소망 
  아, 그리고 "차령 이남"이 "전라도"라는 해석은 근거가 박약하네요. 
일단 "차령 이남" 관련조가 후대에 위조되었다라는 설이 있기도 하고, 
차령 이남이 차령 이남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방만을 일컫는 것이라고 
말해지기도 하니까요. "차령 이남" 관련조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분분합니다. 2009-05-16
08:06:11
  

 

상병 이석재 
  상병 김소망/ 역시 국보 1호가 맞긴 했군요. 하여튼 이 '차령 이남'에 관한 얘기는 아무래도 후대에 위조되었단 설도 일리가 있는듯 싶습니다. 그러나 왕건이든 누구든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차령 근처 지역에 대한 고려의 주인들이 위험성을 느꼈기 때문이였겠지요. 또한 그런 위험성을 느꼈다는 것은 고구려를 계승한 사람들이 느끼는 백제에 대한 위험성이 아니였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확실히 고려의 건국은 신라계 세력과 연합해서 이루어진 측면이 크니까요. 세나라가 다 연합할 수 없다면 한나라를 다굴때리는 형상으로 진행되어야 겠고. 그 측면이 고구려-신라 연합과 백제로 나뉘지 않았을까요. 그 덕분에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차령 운운하는게 나왔을지도요. 2009-05-16
10:55:44
  


 [칼럼] H.I.S - Scene 24: 1,2,3!  
상병 이석재   2009-05-18 21:35:16, 조회: 108, 추천:0 

이제 조선 전,중기와 일본 전국시대, 그리고 중국의 명나라를 다뤄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과 중국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바다사이에 있는 양국끼리 어떻게 영향력이 없겠습니까. 영국과 프랑스처럼 말이지요.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는 중국의 명이 건국되던 시기와 얼추 비슷합니다. 그럼 먼저 중국의 명나라를 설명해야 설명이 되겠군요

중국의 원나라는 점차 중국의 한족에 의해 밀려나던 시기였습니다. 다른 이민족국가와 같이 중국에 동화되던(주1) 것도 있겠고. 특히 한족보다는 색목인 같은 외국인을 중시한 정책 때문에 한족의 불만을 샀던 것이지요. 결국 주원장에 의해서 명이라는 새로운 나라로 통일됩니다. 원나라 부터는 좀 특이한 국명을 사용하는데 송, 당등이 중국의 지역을 통합해서 부른 호칭이라면 원, 명, 청 3국가는 좋은 한자를 가져다가 붙였다고 보면 되겠지요. 하여튼 주원장이 명나라를 통일했지만 이 명나라는 딱히 ‘발전기’라고 불릴만한 시기가 없었습니다. 그냥 건국때 반짝하고 점차 축소되었다. 라는 호칭이 맞겠지요. 물론 정화의 원정이 계획되고 중국이 진정한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 새로운 것이 딱히 없이 완만한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 명나라입니다.

하여튼, 주원장의 명나라는 건국 초기 건국세력을 제거하는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손자에게 안전한 제국을 물려주고 싶었던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건국세력을 퇴출해가기 시작했습니다. 호람의 옥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였던 것이지요. 또한 한자의 몇 글자등이 자신을 모욕하는 한자라 해서 사용을 금지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문자의 옥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정작 손자가 황위를 물려줄 때는 그런 신하들이 아닌 친족이 손자의 황위를 위협했습니다. 결국 연왕이였던 주원장의 아들중 한명인 주체가 반란을 통해 황위를 빼앗고 영락제에 등극합니다(주2) 주원장의 문제점은 친족견제를 등한시하고 오히려 친족을 견제할 수 있는 신하들을 극단적으로 견제한 결과였던 것이지요. 특히 이 덕분에 명나라의 체제는 황제 제일주의로서 황제와 그 근처의 신하, 즉 환관중심의 정치체제로 변질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황제 말 한마디에 신하의 목숨이 날라가는 상황이 된거고 그런 절대권력의 황제를 보좌할 인물들은 환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영락제가 정화의 원정등을 계획하면서 명 중심의 중화주의를 꿈꿨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명나라는 초기부터 불안정했습니다. 영락제가 황위에 오르던 시기는 서쪽에서 티무르의 군대가 서진하던 시기였고, 북쪽 몽골고원으로 도망친 북원(주3)세력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동쪽에서는 정도전이 요동정벌론 어쩌구저쩌구를 주장하면서 이성계를 설득하던 시기였으며, 남해에는 왜구의 해적질이 점차 심화되던 시기인데다가, 정화원정 전에도, 원정 후에도 해금정책은 계속 실시되었기 때문에 결국 명나라는 송나라보다 더 심각한 폐쇄국가로서 쇠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한때 이 덕분에 조선이 요동을 연왕, 또는 혜제의 세력과 연합하여 정벌한다는 소설도 쓴 적이 있군요. 중학교때 쓴거지 뭐 완성력 필력 이런건 거의 최악의 수준이였지만… 아직도 그 소설을 쓰기 위해 온갖 정보를 찾아다니던 어릴때가 기억나는군요. 각필하고 결국 폐쇄적인 국가로 변질된 명나라는 환관중심의 탁상공론정치로 변해가다가 결국 임진왜란에 의해 국력이 급격히 상실. 결국 새롭게 일어나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뭐 청에 의해 멸망했지만 결국 내부 세력에 의해 무너진 꼴이 되었고, 청은 거기에 숟갈만 얹은 모양새가 된 것이지요.

고려로 돌아가볼까요. 고려는 원의 간접통치체제를 공민왕의 개혁으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하지만, 고려 역사동안 쌓인 쇠퇴의 기운을 돌려세우진 못했습니다. 귀족들의 토지 겸병이 날로 심화되어 가기 시작했으며 조선을 새롭게 건국한 인물들이 이 토지 겸병을 가지고 끊임없이 태클을 걸던 시기였지요. 고려를 개혁하자는 개혁파와, 뒤짚어 엎자는 급진파와의 싸움은 결국 우왕, 창왕의 계승(주4)을 가지고 끊임없이 공격하며, 결국 개혁파의 목숨마저 위협한 급진파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초반 고려의 국명을 그대로 따오며 고려를 이어간다는 것을 천명했지만 결국 명의 지명을 받아 국명을 조선으로 짓고 건국했던 것이지요

조선도 역시 명나라처럼 피에 얼룩진 역사로 시작했습니다. 어찌보면 조선이나 명나라나 비슷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야할까요. 왕자의 난등으로 왕위를 위해 추하게 싸운 역사를 넘어, 결국 태종, 세종, 세조, 성종등의 정치를 통해 유교통치체제를 확립하게 되었지만, 조선건국세력과 사림세력과의 결전에서 사림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 이후로 유교통치체제와 더불어 폐쇄적인 소중화주의의 국가로 변질된 것은 사실입니다. 더욱이 그런 유교통치체제가 임진왜란을 통해 기둥이 좀슬었음에도 국가가 무너지지 않은건, 초기 200년으로 후기 300년을 살았다고 평할만큼 좋게 봐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에 대한 역사는 고등학교 1학년때 배우는 국사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이 이상의 문제는 세계사 중심인 H.I.S보다는 국사를 따로 빼서 쓰는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 이후 전국시대로 들어갑니다. 여러 유명한 인물들인 다케다 신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등이 나오는 시기가 바로 이 전국시대입니다. 이 전국시대를 통해 일본은 중국과 조선과 같은 문치주의 중심이 아닌 무치주의 중심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사무라이 정신등 ‘일본의 정신’을 표상하는 문화들이 이때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전국시대의 역사를 간단하게 한줄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반죽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떡을 만들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먹었다”라고 표현하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경우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극하려 했지만 실패했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확장적 국가를 폐쇄적 국가로 바꾸었지요. 결국 명, 조선, 일본 3국의 공통점은 같습니다. 폐쇄적인 국가를 통해 자신들만의 국가를 형성해갔던 것이지요. 명은 중화사상, 조선은 소중화주의, 일본은 해금정책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지만. 유럽이 화폐혁명(주6), 산업혁명등을 겪는동안 동아시아 3국의 발전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때 벌어진 차이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가기 시작하면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 이시간에는, 다시 유럽과 중동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p.s.: 저 계속 이렇게 올려도 되요?[삐질]


주1- 동화: 저번에도 말했던 내용인듯 싶지만, 중국에 나라를 세운 이민족 국가들은 모두 한족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선비족, 거란족, 심지어는 만주족까지 말이지요. 중국에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이 들어왔지만 정작 중국을 통일한 이민족 국가는 원과 청뿐이라는 사실도 특기할만 합니다.  

주2- 영락제, 혜제: 혜제가 그 유명한 ‘황제의 검’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허허. 그래서 저의 눈길을 끌었던 이 소설도. 결국 역사근거따위는 무시한채 먼치킨 소설로 가면서 조용히 책을 닫았죠.

주3- 북원: 원나라가 다시 몽골고원으로 돌아가 세운 국가입니다. 결국 명의 견제에 의해 여러 몽골부족들로 분리되고, 결국 분리된 이 몽골 부족들은 러시아, 청등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 더 이상 국가를 세우지 못한채 후에 가서는 소련과 중국의 사이에 끼여서 이리저리 치이는 역사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주4- 우,창왕의 계승: “지금 잠이 오느냐. 우하하하하하하!!!”로 유명한 신돈에서부터 얘기는 시작합니다. 이성계등 급진파는 우, 창왕을 신돈의 아들로 격하시킴으로서 고려의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권을 강화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우, 창왕은 i겨나고 급진파가 원하는 공양왕을 왕위에 앉힐 수 있었던 것이지요. 현왕의 피를 깍아내리는 일은 왕위를 원하던 신하들이 자주 하던 일 중 하나였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4:40 

 

상병 강인선 
  첫 댓글이군요. 석재님의 H.I.S항상 즐겨 보고 있습니다. 

청이나 원은 몰라도 명국 같은 경우의 '明'에는 개국조인 주원장이 '명교'에 몸담았는 사실로 미뤄볼때, 국호 자체가 이 '명교'와 관련이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많이 있더군요. 
사실 명국 같은 경우에는 홍무제(주원장)이 개국초에 벌인 일련의 '개국공신 숙청'에 있어서 무자비한 면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이는 홍무제의 뒤를 이을 '건문제'가 나이 자체가 어렸다는 점에서 홍무제가 자신이 손자에게 결코 후일의 '부담'을 주지않기 위했던 작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나았지만.. '친족견제'를 등한시 했다고 하셨는데, 이 것은 안했다기 보다는 하기전에 '죽음'을 맞았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건문제가 즉위 후, 홍무제가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번왕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계속 해나갔다는 것에 비춰보면 말이죠.. 

명국이 여타 다른 왕조에 비해 그리 '빛나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홍무제가 수립한 '전제주의'체제에서 온 것으로 보는데, 이는 결국 황제 한명에게 과도한 업무와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다른 군신들의 발언권, 정략에 대한 임무 등이 날아가버린 것이 크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황제가 굉장히 정력적이고 또한 열정적일 때(홍무제, 영락제)에는 그래도 문제가 안되지만, 황제도 사람인 만큼 다소 암우하고 유약한 사람들, 아니 평범한 사람들만 황제의 자리에 앉아도 바로 문제가 나타나니까요.. 실제로 명조에는 홍무제, 영락제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할 군주도 나타나지 않았고.. 

환관에 대해선 홍무, 건문 시기 때만 해도 환관의 수가 굉장히 적었습니다. 홍무제가 환관을 극도로 경계했으니까요.. 오히려 영락제 즉위 후 환관의 권력이나 수가 굉장히 증가했는데, 이는 '주체의 난' 때 환관이 영락제에게 합류 일급 정보를 흘렸다는 점. 그리고 방효유의 참형으로 대표되면서 명조가 이후 '지식인들과 적대적'인 관계로 흘렀다는 점에서 황제에게는 어느정도 우군이 필요했는데, 영락제는 이 우군들은 환관으로 낙점했다는 것에선 상당히 아쉬움이 크죠... 2009-05-20
07:53:11
  

 

상병 이종보 
  '조선이 피에 얼룩진 역사로 시작' 하는 이유가 '조선이 명나라와 비슷한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 이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반도 어느 역사를 살펴봐도 건국자가 죽고 난 후에 정국은 항상 어지러웠고(근데 그것이 꼭 한반도에 국한된 역사적 특징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 같지만 말이죠.), 그 와중에 
정권다툼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흘러내려간 피가 없을수가 없겠죠. 
다만 조선시대 특징으로는(물론 제 생각입니다.) 잊을만 하면 터지는 대형 참사(라는 표현이 적절하려나)가 있겟네요. 신하들의 권력다툼에 결국 왕명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옥사' 또는 '사화' 같은 사건이 말이죠. 물론 이것도 조선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특징이고 원래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공통된 특징일수도 있겟지만 이 이상은 제 지식의 한계점이기 때문에........ 무리에요(눈물 * 10000) 2009-05-21
22:17:38
  

 

상병 이석재 
  상병 강인선/ 지켜봐주고 계시다니 감사합니다. 이래저래 환관에 대한 문제는 명나라를 경색된 국가로 만들어 버렸지요. 정실정치라고 해야할까요. 

상병 이종보/ 저도 왜 갑자기 그런 내용을 집어넣었는지 지금에 와서 기억이 안닙니다. 허허. 조선이 명나라랑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이유는 피에 얼룩진 역사때문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으면서 멸망 위기또한 비슷하게 겪었다는 것을 쓰려고 했던듯.. 물론 임진왜란 이후 명은 무너지고 조선은 살아남았지만 조선후기사회는 기형적인 사회임에 틀림이 없었고, 결국 근대국가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나머지 개화기를 맨몸으로 맞게 되었던 것이 아니였을까요. 
 [칼럼] H.I.S - Scene 25: 수박 겉핥기  
상병 이석재   2009-05-29 22:08:55, 조회: 40, 추천:0 

자. 오랜만에 동아시아 세계를 끝내고 유럽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아시아-중동-유럽을 거친 스토리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잠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를 좀 짚고 넘어가야 할 듯 싶습니다.

먼저 북아프리카부터 가볼까요. 영국, 프랑스등 식민세력이 들이닥치기 전에부터 이 지역은 인디언(주1)들의 통치령이였습니다. 미시시피 강 유역과 캐나다지역에 주로 자리잡았던 이들은 수렵, 채집, 농사들을 통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구축하였지만 이미 세계는 근대국가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침략의 시대를 구축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때였지요. 중남미 아메리카는 멕시코에 자리잡은 아즈텍, 마야문명, 안데스산맥에 자리잡은 잉카문명등으로 대비됩니다. 그들은 피라미드를 통한 태양신 숭배사상(아즈텍), 음력 사용 등으로 인한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지만 중세 전제주의 국가 그 이상을 발전시키지 못한 측면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문명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중 하나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문화적, 경제적 침략. 또는 경제고류인데. 중남미 아메리카 국가들의 교류는 경제적 교류에 국한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지요. 기독교-그리스정교-이슬람교 문명권 사이에서 전쟁,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의 발전을 이루어냈던 반면에, 아메리카의 문명들은 비슷비슷한 문명끼리 경제적 교류를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중남미에 들어왔을땐 그들의 대비태세가 완전히 구축되지 못했던 상황이였지요. 결국 그들은 수백명밖에 안되는 외국 군대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자, 이제 아프리카로 넘어가봅시다. 아프리카란 거대한 대륙을 나누는 것은 그렇게 좋은 발상이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북,남,동,서,중앙 아프리카로 나누어보겠습니다. 북아프리카는 전통적으로 이슬람의 발흥 이후 아랍문명권으로 대비됩니다. 물론 오스만 투르크가 이지역의 통일을 이루어냈지만 그들의 세력이 점진적으로 약화되면서 이집트, 알제리,모로코등이 자치정부를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영국, 알제리는 프랑스, 모로코는 스페인, 프랑스, 리비아는 이탈리아가 후에 점령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지중해 주변 세계가 로마-비잔틴-이슬람-유럽으로 이동되는 이 시기에는 북아프리카는 유럽의 이민식민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잉여인구들이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여 지배체계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는 초반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무역거점이였습니다. 특히 전에 말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거하여 포르투갈의 무역거점으로 활발했는데요. 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인도를 거치는 중간 기착지 주변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기엔 아직 아프리카 국가들이 남아있었는데, 주로 유럽국가와의 무역을 통해 먹고사는 길도 있었고, 심지어는 자국민들 노예로 잡아다 팔아넘기는 무역까지도 성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영국등의 세력들이 점차 아프리카를 노리기 시작하지요. 이 때문에 수단, 에티오피아등으로 대비되는 동아프리카지역은 기독교 세력이 강합니다. 특히 에티오피아에는 흑인계 유대계라고 알려져있는 라타샤인(맞나..?)마저도 존재하고 있었지요. 서아프리카는 유럽국가들의 주요 무역 거점으로 성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앙아프리카는 주로 원시적인 종교를 통한 아프리카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아프리카는 정글, 늪지대 등으로 근대의 초반까지 누군가 들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였기 때문이지요. 남아프리카는 주로 네덜란드인이 무역거점을 설치하여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추진하였지만 영국인들이 그 자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아프리카의 독립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유럽국가들에게 종속되는 현상을 보여주게 되지요.

그럼 인도로 넘어가볼까요. 인도도 또한 여러 왕조가 흥했다가 망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굽타-바르다나-가즈니-노예왕조-델리술탄왕조-무굴제국등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각 왕조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이거 무책임하군요. 흐흐] 노예왕조 이후에는 이슬람의 세력이 인도에 새롭게 정착했다는 것. 중국과 가까움에도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중국문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인도문명 자체의 발전이였다는 것. 남인도와 북인도는 쉽게 통일되지 못했다는 것 등이겠지요. 그 외에는 글쎄..랄까요. 허허.. 

동남아도 역사는 존재합니다. 비록 제가 기억을 자주 못해서 문제지요. 건국자의 성을 따서 전해내려오는 이조, 진조등이 대표적인 베트남의 왕조입니다. 이들은 중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종속국가로 변한적도 있었지만, 그에 반해 중국의 세력이 약화될때에는 동남아의 강국으로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태국은 수코타이조, 아유타야조가 있으며 미얀마(주2)는 파간조, 페구조등이 있습니다. 태국은 미얀마의 침략으로 수코타이조가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했지만, 야유타야조는 동남아 최고 강국으로서 근대 유럽국가가 침략하기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현태 태국의 왕조는 ‘방콕조’라 하여 아직 왕국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스리비자야, 마자파히트 왕국등이 생성되었는데, 스리비자야 왕국은 통일신라와도 거래한 내역이 있을 정도로 해상강국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동남아의 여러 제국들은 서구세력의 침략에 쉽게 무너졌습니다. 이슬람의 해상교역의 중심지로서 이 지역은 중국 상인들인 화교와, 이슬람교가 적절히 혼합된 문화기는 하지만 문명 발전의 시도가 늦은 탓이 컷겠지요. 결국 이지역은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등의 각축장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이번 역사는 안타깝게도 많은 정보를 취합을 못하다보니 수박 I기 식으로 지나간듯 싶지만 제 실력상으로는 어쩔 수 없군요. 중동은, 어차피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다보니 아무래도 유럽역사와 같이 엮어서 설명하는게 편할 듯 싶군요. 중동에 대한 설명은 1차대전 이후, 즉 오스만이 멸망하고 여러 아랍국가로 분열되는 시기에 따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이시간엔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촉발된 유럽의 새로운 헤게모니, 그리고 식민지 개척시대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주1: 인디언-아시다시피, 콜럼버스가 북아메리카를 인도로 착각한 나머지 인도인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이 인디언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캐나다와 미국지역에 넓게 퍼져있던 인디언들은 자연친화적인 문화를 구성하였지만 단지 문화에 국한되었으며 부족국가체계 그 이상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멕시코-안데스산맥에 있던 기타 전제주의 국가들과는 대비되는 현상인데, 유럽이나 아시아를 보더라도 기타 근접국가들끼리는 서로서로 배울건 배우며 비슷하게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런 일이 아메리카에서 힘들었던 이유는 리오 그란데강, 로키산맥, 광활한 평원으로 대비되는 북아메리카의 지형적 특성상, 아직 중세국가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아즈텍 문명이 멕시코를 넘어 자신들만의 문명을 칼로서 전파하기에는 그 힘이 부족하지 않았나. 이리 추측해봅니다. 

주2: 미얀마: 과거의 국명은 ‘버마’였습니다만, 미얀마 군부독재가 ‘미얀마’로 국명을 바꾸었습니다. 그 덕분에 미얀마 군부독재를 인정하지 않는 외국의 국가들은 ‘버마’로 국명을 표기한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저희나라는 군부독재에 대한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미얀마로 표기. 군부독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칼럼] H.I.S - Scene 26: 영국과 프랑스  
상병 이석재   2009-06-01 23:26:58, 조회: 59, 추천:0 

오랜만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어요. 저번 시간에는 네덜란드 독립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각 국가에 맞추어서 살펴보았지요. 이번 26번째 시간엔 몇가지 사건으로 축약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 개척정책, 프랑스와 영국의 내란, 그리고 30년 전쟁. 이렇게 세가지가 되겠군요.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뒤를 이은 두번째 해상국가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신대륙을 노렸던 반면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우세를 잡았던 인도와 동인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죠. 서인도제도가 지금의 쿠바나 아이티 이런 곳들을 의미했던 반면. 동인도는 말 그대로 인도의 동쪽, 즉 인도네시아지역을 의미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주1)를 건립하고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해 개발을 실시합니다. 개발이라고 해봤자 플렌테이션 농업(주2)뿐이겠지만, 후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거느리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신대륙에도 세력을 파견, 뉴욕(주3)과 허드슨강을 발견하고 그곳에 개척자들을 파견합니다.

영국, 프랑스 또한 개척자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주로 캐나다에, 영국은 주로 신대륙에 근거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는 ‘버지니아’였는데, 이는 영국의 여왕이였던 엘리자베스여왕이 ‘국가와 결혼했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렇게 ‘처녀’였던 그녀를 기리기 위해 신대륙의 근거지 이름을 버지니아로 정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현재도 미국엔 ‘버지니아 주’가 있는 것이지요. 프랑스는 주로 캐나다, 그리고 미시시피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모피 교역을 주로 삼았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의 첫 근거지였던 퀘백지방은 후에 영국이 점령함에도 프랑스의 문화를 유지한 채 현재까지도 캐나다에서 자치, 궁극적으로는 독립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된 데에 영국과 프랑스의 발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봐야겠지요.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사후 스튜어트 왕가가 개창됩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사상은 완전히 다르지요. 잉글랜드에 국교회가 의회정치를 통해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상황을 만들어낸 반면에 카톨릭 세계였던 스코틀랜드는 아직 왕권신수설(주4)를 통한 왕권강화정책을 계속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스코틀랜드의 왕이였던 제임스는 이 때문에 잉글랜드의 의회와 끊임없이 충돌하게 됩니다. 결국 찰스 1세에 이르러 권리청원을 통해 의회정치의 기틀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권리청원에 대한 의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계속적인 왕권중심주의를 펼쳤고, 결국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군을 이끌고 내전을 일으켜, 결국 ‘청교도 혁명’을 통해 찰스 1세의 목을 떨구고 잉글랜드에 공화국을 세우게 됩니다. 

크롬웰의 공화국은 아일랜드를 점령(주5)하고 항해법을 발표합니다. 이 항해법은 중요한게 ‘영국으로 들어오는 물산은 영국 국적의 배로만 가능하다’라는 조항이였던 것이지요. 중계무역으로 발전하던 네덜란드에게는 치명타였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바다로 갈 수 있던 주요 무역국이 영국과 프랑스인데, 그 둘중 한곳이 거래가 끊기게 된 것이였지요. 결국 네덜란드는 이 때문에 영국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전쟁이 영국-네덜란드 전쟁인데, 프랑스는 벨기에에 대한 권리를 위해서(Side and Side에서도 나왔지요? 프랑스-벨기에편을 참조해주세요.) 영국에 협조, 결국 내륙과 해상에서 압박받던 네덜란드는 결국 몰락하고, 새로운 해상세력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대륙에 남아있던 네덜란드령이 영국령으로 변화하게 되는 시기가 이시기입니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쇠퇴한 이후로 인도네시아(주6)지역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지요. 

프랑스는 리슐리외-마자랭를 통한 재상라인이 강력했습니다. 영국이 의회정치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통한 정치를 추구했다면 프랑스는 강력한 왕권과 중상주의(주7)를 통한 발전을 이루어갔습니다. 물론 저번시간에 말했던 위그노 전쟁등이 그들의 경제상황을 악화시키기는 했지만 이는 프랑스가 수많은 자본금을 다 탕진한 이후에야 천천히 밝혀지는 사실이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자본금은 뛰어나서 확장주의 정책을 쉽게 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신대륙에 대한 개발과 더불어 인도, 아프리카로의 진출은 프랑스의 경제를 점차 살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런 주위 국가들의 발전은 30년 전쟁으로 귀결되었는데요, 역사 최후의 종교전쟁(주8)이라고 불리우는 이 30년전쟁은 독일에서 신교도, 구교도가 모두 참여한 전쟁이였습니다. 한가지 특이할만한 사실은 프랑스가 구교도, 즉 카톨릭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영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신교도 편에 붙어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발렌슈타인, 틸리, 구스타프 왕등이 유명한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결정나게 되는데, 이 조약은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실질적인 독립. 독일 제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함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완전한 명목상의 황제로 변질등이 있겠군요.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멸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독일주의 등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쯤엔, 영국의 크롬웰은 죽고 이미 영국은 왕정복고가 되어있었으며,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왕권신수설을 최대로 발전시켰고, 신대륙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인원들이 버지니아에 상륙함으로서 미국의 탄생을 이루어냈고,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발언하는등 이런저런 일들이 생겼지요. 

다음 이시간에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발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낭트 칙령의 철폐, 영국의 명예혁명, 북방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전쟁을 밝히고, 그 다음시간엔 인도의 식민지화, 중동의 상황, 미국독립전쟁을 한다음에 프랑스혁명으로 가면 되겠군요. 프랑스혁명부터는 유럽세계가 거의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내용들은 안나올거에요.  

주1-동인도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합병한 회사입니다. 이런 이름들이 그렇게 특별한 이름은 아니였습니다. 단지 신대륙에 있으면 서인도회사, 인도에 있으면 동인도회사 뭐 이런거지요.

주2-플렌테이션 농업: 세계지리 시간에도 배우셨을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식용작물이 아닌 점령국가가 쉽게 팔 수 있는 상업작물을 대대적으로 재배하는 농업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점령국가들은 돈벌이 대상은 될 수 있겠지만 후에 식민지가 독립한 이후 먹고 살 문제가 막막해 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탈식민지시대에 국가들이 이 플랜테이션 농업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먹고 살 문제가 막막해도 유일한 자금줄이였기 때문이지요. 사탕수수등이 유명한 상품작물입니다.

주3-뉴욕: 원래 이름은 네덜란드식 이름으로 뉴암스테르담이였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영국 전쟁간 영국의 공작이였던 요크공이 이지역을 점령한 이후로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지요. 그 무슨 거리가 원래 뉴암스테르담시절부터 중요 거리라고 했는데, 아마 브로드웨이였나..뭐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군요. 니콜라스 케이지의 ‘내셔널 트레져’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였는데 말이죠. 

주4-왕권신수설: 왕의 권력은 신에게서 나왔다는, 근대 초반의 중요 사상입니다. 후에 의회정치가 확립되면서 점차 힘을 잃게 되지만 말이지요.

주5-아일랜드: 크롬웰 시대에 이르러서 아일랜드가 점령당하게 됩니다. 결국 후에 가서야 아일랜드가 혁명을 통해 독립하게 되지만 북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잔류하게 됨으로서 현재까지 지속되는 분쟁이 싹트게 된 것이지요. 아일랜드의 식민지시대에 대기근등의 원흉이 된 잉글랜드 때문에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대기근 시절에 아일랜드인들이 많이 미국으로 건너가 이주민중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기 된 것이지요. 이게 감자를 주식으로 먹었는데 감자에 병이들어서 어쩌구저쩌구… 로 알고 있습니다.

주6-인도네시아: 네덜란드의 중요 식민지입니다. 향료무역을 중요시하던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신대륙을 포기하는대신 인도네시아를 확보할 수 있던 것이지요. 후에 2차대전에 가선 ABCD동맹(America-Britain-China-Dutch)의 한 거점으로서 활동하게 되지요. 네덜란드엔 인도네시아 이주민들도 많아서 네덜란드는 이 이주민에 대한 정책을 이주민들을 최대한 국내민과 동일시 함으로서 최대한의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이 점령했으니 일부분 이에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7-중상주의: 왕권신수설과 함께, 국내경제를 중요시 해서 수출품은 장려하고, 수입품은 관세를 매기는 주의를 뜻합니다. 어찌보면 현재의 ‘자유주의’경제에 반하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왕권신수설-중상주의는 절대왕권의 자금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대신 다른나라도 똑같은 중상주의정책을 펼치기 때문에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는 수단에 의지해야 했던것이지요.

주8-종교전쟁: 사실 최후의 종교전쟁이라는 말은 좀 어색하지요. 인도-파키스탄 전쟁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럽 전체가 들어간 대규모 종교전쟁은 30년전쟁이 최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에 나타나는 신성동맹 이런건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신성동맹은 나중에 설명할게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5:06 

 

상병 조성열 
  주 3은.. 
원래 성벽이 있었는데 점령국이 바뀌면서 성벽이 없어지고.. 어쩌구 해서 생긴 
월 스트리트 아니었나요??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칼럼] H.I.S - Scene 27: 짐은 곧 국가다.  
상병 이석재   2009-06-04 09:00:14, 조회: 30, 추천:0 

이번 시간에는 크롬웰의 공화국, 프랑스 루이 14세의 등장. 북방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다뤄보도록 하지요.

사실, 근세를 얘기하면서 영국-프랑스가 좀 많이 나오는듯 싶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대세중 하나인데, 스페인-네덜란드-영, 프를 거치면서 점차 무게중심이 이들로 쏠리기 시작했고, 어찌보면 정치의 양 극단이라고 볼 수 있는 의회정치와 절대정치의 양면에 자리잡은 영국-프랑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탈리아는 사르데냐가 프랑스혁명 시기에 가서야 성립됨으로 아직 분열의 시기를 겪고 있었고 에스파냐는 펠리페 2세의 죽음 이후, 오스만제국은 빈 침략(주1) 이후에 완만한 쇠퇴를 겪고 있던 상황이였던 것이지요. 중부유럽은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등이 존재하고 있던 시기였고 러시아가 한창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였습니다. 폴란드, 헝가리등은 점차 쇠퇴의 시기를 겪고 있던 상황이였지요. 결국 근대 초기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이해가 필수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양 극단에서 유럽을 이끌어나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일단, 크롬웰의 죽음으로 저번시간에 간단하게 마무리지은 영국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크롬웰은 기독교 원리주의라고 볼 수 있는 청교도적 정치를 통해 공화국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네덜란드의 경제에 타격을 입히는 항해법등의 제정을 통해 영국을 중상주의적 국가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지요. 결국 의회정치를 구상했던 그였지만 의회도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크롬웰의 독재국가를 구축해 나갑니다. 사회 문화상으로도 청교도적 분위기가 팽배해져서 국민들은 자신들의 분위기를 다운시키는 크롬웰을 점차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크롬웰은 결국 자연사하고, 크롬웰 파는 크롬웰의 아들을 다시 독재자로 복귀시키려하지만 결국 이는 실패하고 영국에 다시 왕정이 복귀됩니다. 이때 왕당파, 영국 국교도회 중심을 토리당, 의회와 비국교도인들을 휘그당으로 불렀던 것이지요. 결국 스튜어트 왕가가 다시 복귀했지만 이들은 이들대로 의회를 다시 무시하고 철권통치를 시작합니다. 결국 의회는 독일의 하노버왕가가 예부터 영국 왕가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발견, 그들을 스튜어트 왕가 대신 초청하게 됩니다. 결국 하노버 가문이 상륙함으로서 스튜어트 왕가는 도망치게 되고, 이를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해서 명예 혁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노버왕가는 1차대전 이후 독일색이 짙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꾸어 윈저 왕가로 개창하게 됩니다. 이 윈저왕가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지요.

프랑스는, 절대왕권이 확실히 확립된 나라였습니다. 캐나다와 루이지애나 지역에 식민지를 확립한 프랑스는 저번에 말했던 위그노 전쟁으로 인해 생긴 갈등이 낭트 칙령으로(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H.I.S 종교개혁편을 참고하세요) 봉합되었으나. 정작 낭트 칙령을 발표한 앙리 4세는 암살당했고, 루이 13세때에는 신교도들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를 공격하는 일 등이 있었습니다. 이 동안 리슐리외-마자랭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재상은(리슐리외는 삼총사로도 유명하죠?) 절대왕권으로 유지되는 중상주의, 즉 국내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국외의 수입은 최소화하여 수익을 내는 구조를 유지하였습니다. 마자랭의 사후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주2)으로 황궁을 옮겨 절대왕권의 발전을 이룩합니다. 나는 곧 국가다라는 명언을 통해 왕이 국가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이념을 확립하였지요. 이때의 재상인 콜베르도 이런 중상주의와 절대왕권의 혼합을 통해 프랑스의 경제를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확장주의적이였던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영국 전쟁에도 개입하였으며 독일, 스페인등에도 여전히 개입하였습니다. 또한 앙리 4세가 발표했던 낭트 칙령을 루이 14세가 파기함으로서 신교도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운 점도 있었지요. 그 덕분에 프랑스의 중상주의 경제는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종교개혁편에서도 다뤘지면 신교도가 구교도에 비해 이론적으로 경제적 행위를 더욱 쉽게 행했기 때문이였지요. 

결국, 루이 14세의 확장주의적 정책은 주위 국가들에게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을 촉발시킵니다. 점차 쇠락해가던 에스파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손이 끊기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루이 14세는 이런 합스부르크 왕가의 절손상황을 인지하고 계속적으로 에스파냐의 대한 압박을 실시하던 중이였습니다. 근린 국가들은 이런 프랑스의 침략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였지요. 결국 에스파냐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가문 왕이 사망하자 프랑스는 에스파냐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이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문(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니 당연히 계승권이 있을수밖에요), 프랑스의 앙숙인 영국, 계속적인 침략으로 프랑스와 적대하던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서막입니다. 

자신의 손자를 스페인 왕위에 올리려던 루이 14세는 초반엔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지만, 점차 동맹국들의 수에 밀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캐나다 지방에서는 영국에게 식민지를 빼앗기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이때 영국이 점령한 지브롤터는 현재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습니다. 영국의 앤여왕(주3)의 왕위계승문제까지 합쳐진 이 전쟁에서 루이 14세는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할 정도로 패색이 짙어지기까지 했습니다(주4). 결국 영국은 캐나다의 허드슨만을, 네덜란드는 일부의 영토 확장을, 프로이센은 공국이 아닌 왕국으로의 승인을(주5), 오스트리아는 에스파냐의 나폴리, 밀라노등을 점령했습니다. 프랑스는 이런 대가로 에스파냐에 자신의 손자를 왕위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가는 지금까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 스페인의 왕또한 부르봉 왕가인 것이지요. 
한편 스칸디나비아쪽은 스웨덴과 러시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던 상황이였습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하고 구스타프 아돌프 왕의 전사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지만 계속 북부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던 상황이였고,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가의 등장 이후 표트르 대제등이 네르친스크 조약(주6)을 통해 시베리아로의 확장을 완료했던 상황이였습니다. 결국 점차 확장을 거듭한 그들은 북부에서 부딛힐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이는 카를 12세의 북방전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후에 나폴레옹, 히틀러가 밟게될 전철을 만든 카를 12세는, 폴타바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러시아의 승리를 불러왔고, 결국 스웨덴은 후에 덴마크, 노르웨이 등으로 쪼개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교도의 강국이였던 스웨덴의 몰락은 결국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확장주의적인 지역이 아닌 국내적인 문제로 돌리게 만들었으며, 이는 나폴레옹 전쟁시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전쟁, 산업혁명, 7년전쟁, 식민지전쟁등을 다뤄보도록 하지요
주1-빈 공격: 오스만제국의 최고 영토시절, 슐레이만은 오스트리아의 빈을 두번에 걸쳐 공략하게 됩니다. 세르비아, 헝가리등 등 발칸 민족주의 세력을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시킨 그들은 헝가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서유럽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비엔나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갑작스런 장마등으로 인해 그들의 진격속도는 저하되었고, 결국 비엔나의 강력한 성벽 앞에서 두번이나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오스만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으므로 어찌보면 오스만 제국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주2-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에 가본적이 있습니다만, 진짜 넓고 화려하긴 합니다. 프랑스, 나아가 세계 전체의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궁전입니다. 루이 14세가 이쪽으로 천도한 이후 프랑스혁명시까지 프랑스 왕실의 문화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수도로 기능하였습니다. 특히 절대왕권의 특징은 지방 귀족들이 지방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에서 왕을 보좌하는 것을 권력의 형성과정으로 알아갔기 때문에 지방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였지요. 그 덕분에 베르사유 궁전은 왕 옆에서 알랑거리려는 귀족들로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주3-앤 여왕: 하노버 왕가의 첫번째 왕입니다. 사실 남편도 같이 왕위에 오르지만 두명이서 같이 왕위에 오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은 앤여왕이였기 때문이였지요. 스페인 왕위전쟁시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따로 ‘앤 여왕 전쟁’이라고 합니다.

주4-애국심: 루이 14세는 병력의 부족을 애국심에 호소하여 충원했습니다. 이는 짐은 곧 국가다라고 주장하던 왕조차 국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시까지 국민의 세력이 증강하게 되는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을 30년전쟁정도와 비슷한 무게로 설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더욱이 30년 전쟁 이후 비종교적인 문제로 강국들이 부딛힌 사건이라는 점, 프랑스,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신대륙에서 축출당하는 사건이라는 점. 영국의 식민지 제국이 성립되는 시기라는 점. 오스트리아가 중부유럽의 패권을 잡고 이탈리아의 통일왕국인 피에몬테 왕국이 점차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 때문에 좀 많이 설명했습니다. 루이 14세인 손자는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를 개창해서 계몽군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필리페 2세 이후 비대해진 정부 지출을 바로잡고 세제를 개혁하는 발전을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주5-브란덴부르크 공국: 저번에 Side and Side 독일-폴란드편에서 설명한듯 싶지만, 이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프로이센 왕국으로 인정받은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지만 교황이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공국이 폴란드의 가신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튜튼기사단으로부터 시작된 이 왕국은 결국 자칭 왕이 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에 발을 걸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상황은 7년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게 프로이센 왕으로서 인정받게 됨으로서 종결됩니다.

주6-네르친스크 조약: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청의 강희제와의 국경조약입니다. 이 국경조약에서 시베리아의 러시아-청간 경계문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유럽-아시아간 최초의 근대적 국경 조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5:12 

 

상병 양동훈 
  네르친스크 조약은 참 웃긴게... 청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외교전에서 발린 거라는 사실... 근데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더 웃긴건 후에 우리나라는 더 심한 꼴을 당했었다는 사실이겠죠?(웃음) 
[칼럼] H.I.S - Scene 28: Revolutionary  
상병 이석재   2009-06-06 22:07:28, 조회: 14, 추천:0 

계속적인 유럽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어찌보면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으로 전체적인 역사 흐름의 일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번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국민군대의 개념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사건들을 그리 쉬이 넘길만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때의 분위기를 한번 살펴볼까요. 30년전쟁이라는 최후의 종교전쟁을 겪고 난뒤로 유럽에 더 이상 종교의 바람은 잦아들었습니다. 대신 ‘전쟁은 정책의 최후수단’이라는 규정 아래 근대국가를 꿈꾸는 여러 강대국들이 유럽, 나아가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강대국들은 유럽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더욱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30년 전쟁에서 보다시피 유럽 내부에서 벌이는 전쟁은 서로의 몰락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유럽 본토가 피폐화 되는 것이 아니라 신대륙,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 등이 피폐화되는 것이 강대국들에게는 더욱 나은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서유럽(에스파냐, 프랑스, 영국)등에 국한되었고, 아직까진 유럽내 전쟁이 아직 사그러지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이제 보-불전쟁과 1차대전 사이에 가서야 유럽의 강대국들은 서로간의 유럽 내 전쟁을 점차 줄여나갔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전쟁은 신대륙으로 확산된 두번째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오스트리아 전쟁은 3개의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요, 유럽 전역, 에스파냐-영국간 신대륙에서 벌어진 전쟁, 그리고 프랑스-영국간 인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유럽 전역부터 살펴보도록 하지요.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자신이 아들없이 죽게 되자 주위 강국들에게 약속을 받아냅니다. 자신의 딸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황제위에 오르더라도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지 않도록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황제위에 오르자마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진정한 왕국으로 발전한 프로이센이 중요 산업지역이였던 슐레지엔을 차지하고자 이곳을 침략하게 되는 데 이것이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전쟁입니다. 많이 말한듯 싶지만 게르만의 ‘살리카’ 법은 남자들만 상속받게 되어있고, 프로이센은 여자가 상속받게 된 이 상황에 대해 태클을 걸고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영국과 프로이센-독일 연방제후-프랑스-에스파냐의 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국이 오스트리아 편을 든 이유는 식민지에서 계속적으로 충돌하는 프랑스-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전쟁또한 승자도 패자도 없었습니다. 전쟁이 너무 길어 다들 지겨운 상황에서 평화조약을 맺게 된것이지요.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양도하였고, 프랑스는 로렌을 상속받았으며(주1) 또한 이탈리아 지역을 사보이, 에스파냐 왕국에 양도하였고 대신 중부 유럽의 본토에 대한 영토는 상속받을 수 있었지요.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라면 슐레지엔을 통해 산업혁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프로이센이라고 해야할까요. 석탄의 산지니까요. 그러나 이 전쟁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유럽 중세, 근대 초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럽 통치력은 두번의 전쟁으로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또한 각국에게 들기 시작했지요. 특히 독일 통일에 대한 헤게모니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대한 문제, 이것이 7년전쟁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신대륙에는, 영국이 에스파냐를 견제하고자 남미지역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에스파냐의 강력한 견제로 인해 실패하였고, 인도에서는 프랑스가 새롭게 인도를 공략하게 된것입니다. 이정도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을 설명할 수 있겠군요

그럼 7년전쟁을 살펴볼까요? 7년전쟁은 갑작스럽게 확장되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고자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가 프로이센을 포위하고 벌인 전쟁입니다.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했지요. 프로이센이 가장 무서워하는 포위전쟁(주2)이였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국가의 멸망위기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3국동맹에서 탈퇴한뒤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는 슐레지엔에 대한 탈환을 포기한 채로 강화를 맺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은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전쟁에서 얻지 못한 신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였으며, 미시시피강 서쪽 영토를 에스파냐에게 할양하고, 대신 에스파냐는 플로라도를 얻을 수 있었지요. 인도에서또한 플라시 전투로 인해 프랑스가 인도에서 나오게 되었지요.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간 독일 통일을 향한 경쟁, 영국의 산업혁명을 통한 세계 대제국으로서의 발전, 프랑스 혁명의 시초, 에스파냐의 몰락 등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업혁명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다시피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출발했지요. 방적기, 방직기등을 통한 기술의 발전, 각 곳에서 들어오는 생산력등은 영국이 산업혁명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였지요. 영국의 산업혁명은 세가지가 기반입니다. 토지사용, 석탄, 그리고 모직물. 토지사용 문제부터 보도록 하죠.

토지사용은, 흔히 들어보셨다 시피 ‘인클로저 운동’의 시작입니다. 중세에는 하나의 성에서 그 성의 영주가 토지를 가지고 있고, 중세의 주민들은 그 토지에서 공동으로 경작하던 상황이였지요. 그러나 점차 경제가 세계화되기 시작하면서 토지를 점령하는 사람들은 굳이 성의 영주들뿐만 아니라 자본가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경제계급이 등장하게 되고, 그들은 돈으로서 토지를 사서 공용으로 경작하던 토지를 자신만의 토지로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둘러친다’라는 뜻의 인클로저 운동인 것입니다. 공용지가 사유지화 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개인의 ‘사적 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왕권신수설과는 대비되는대, 왕의 권력이 신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토지 또한 왕의 것일 수 밖에 없는 프랑스에서는 이런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기 힘들었습니다. 다수가 정책을 결정하는 의회가 있는 영국에서, 개인의 사적 재산이란 개념은 중요했던 것이니까요.

자, 이렇게 ‘양’을 기를 토지는 확보되었습니다. 자본가들이 땅을 사서 경작한게 아니라 양을 키워서 양모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럼 이 양모를 만들어 모직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직물은 인도에서부터 건너오기 시작했는데, 영국으로서는 컬쳐 쇼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자기보다 못한 인도인들이 더 좋은 모직물을 만들고 있다니, 결국 영국은 이 ‘인간적 문제’를 ‘기술적 문제’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방직기등이 제작되면서 빠르게, 그리고 대량으로 물건을 생산할 체제를 갖추어 한창 유행하는 인도산 방직물을 대신할 것들을 만들기 시작하게 된것이지요. 석탄 또한 중세에 끊임없이 썼던 목재가 고갈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자원대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요또한 있고 이 수요를 받춰줄 기술, 자원또한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 산업혁명은 탄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소작농들이 몰락하고 대지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 몰락한 소작농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새롭게 건설된 모직물, 면직물 공장으로 투입되었습니다. 그 모직물, 면직물들은 한창 해상제국으로 등장하던 영국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식민지에 투입되면서 자원 착취, 물건 판매소로서의 식민지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산업혁명의 문제점은 노동자들, 특히 어린이들의 노동여건등이 문제가 된 것이지요. 또한 석탄을 사용하게 됨으로서 환경문제가 두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산업혁명동안 영국은 기술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네덜란드로 기술이 유출되면서 점차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등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이런 ‘자본가’, ‘대지주’ 등의 주도로 산업혁명이 일어났지만 독일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 졌다는게 차이점이랄까요. 결국 산업혁명으로 인해 점차 벌어지던 유럽과 비유럽의 차이는 더욱더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량 양산력이 모직물, 면직물만 국한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다음 시간에는 세계의 중요한 2번의 혁명,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다루고 가려고 합니다.  Coming Soon

주1: 로렌: 알자스-로렌, 독일과 프랑스간 치열한 영토분쟁이 벌어진 지역입니다. 이때 프랑스가 로렌지역을 장악함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분쟁의 서막이 올라가게 된 것이지요. 

주2: 포위전쟁: 프로이센, 후의 독일이 가지게 되는 포위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내선작전, 즉 토지는 일부 포기하지만 중앙에서 요격함으로서 적을 격퇴하는 작전형식을 잘 수행한 독일이 겨우 7년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이후 동쪽과 서쪽에서 적을 상대하는 독일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게 된 것이지요. 보-불전쟁은 이런 수칙을 잘 지켜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1,2차세계대전은 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해 패배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5:19 

 

상병 양동훈 
  석재// 인클로저 운동이 돈으로 토지를 산 개념인가요? 흠.. 새로운 정보인데요!! 제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조금 달라서... 껄껄 

그리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몰락한 것은 소작농뿐 아니라 '소규모 영농인 집단의 대다수' 인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뭐 전체적인 흐름에는 차이가 없습니다만..(거참 이걸 태클이라고 걸고 있는건가) 

인클로저 운동이 왜 소작농이나 소규모 영농인들의 몰락을 가져왔는가에 대한 흐름상의 설명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주석의 형태로... 

그럼 이쯤에서 총총 2009-06-06
22:2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