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Side and Side-터키와 그리스
일병 이석재 2008-12-19 15:23:12, 조회: 157, 추천:1
갑자기 생뚱맞게, 터키와 그리스는 왜 나왔냐구요? 사실 뉴스를 보다가,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동 소식을 보고있자니, 현대의 그리스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어졌거든요. 현대 그리스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터키도 거기에 빠질 수 없는 노릇인지라. 터키와 그리스, 어찌보면 한국과 일본같은 이 두나라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령당한 이후로부터, 그리스 영토는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쬐끄만하게 있는 코르푸라던가 크레타, 뭐 이런 도시들은 베네치아령이긴 했지만서도, 이미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 전체는 오스만투르크령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이 덕분에 발칸반도는 이슬람, 그리스 정교, 카톨릭 3개 종파가 이리저리 뒤섞여 마치 녹아버린 팥빙수 같은 형상을 하게 됩니다.(더불어. 모스크바는 제 3의 로마 어쩌구저쩌구를 주장할 수 있게 되버린 것이고…)
하지만, 인고의 시간 끝에 오스만의 세력이 약화되자, 유럽의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를 본따서 그리스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 분위기를 타서 그리스는 독립전쟁 끝에 오스만에게서 독립. 점차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면서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왈라키아, 모라비아(왈라키아, 모라비아는 서로 합쳐져서 루마니아를 형성하게 되고, 1차대전중 완전히 럭키한 사건을 터트립니다. 그 얘기는 차후에..) 등등이 독립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좀 보자니, 발칸 안에서 독립국들이 끼리끼리 모여 놀기에는 너무 좁은겁니다. 그래서 다른 강대국들 좀 따라해보자면 침략을 해야하고, 그래서 서로 작당모의해서 공격하기로 한게 오스만투르크입니다. 발칸반도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의 공격을 받고 후퇴, 결국 세 나라들은 영토를 분할합니다. 이 전쟁이 흔히 말하는 제 1차 발칸전쟁입니다.
그런데 세르비아나 그리스가 보니, 이건 불가리아가 너무 많이 드신거 같아 배가 아파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번엔 다굴대상을 좀 바꿔볼까…해서 불가리아를 노리는데, 불가리아가 그걸 알아버리고 선제공격하다가 깨져버립니다. 이것이 제 2차 발칸전쟁,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는 에게해로의 창구를 잃어버리고 흑해쪽의 항구만 남게 되었으며, 그리스는 테살로니카 등 북쪽지역을 수복하게 됩니다.
점차 이렇게 영토를 성장해나가니, 그리스는 슬슬 옆의 오스만 투르크를 노리면서 ‘대그리스주의’를 표방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옛 비잔틴의 고토를 회복해보겠다 뭐 이런 민족주의 논리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아나톨리아(터키)와 발칸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우린 뭡니까. 뭐 이러면서 오스만을 은근슬쩍 노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소말리아도 대소말리아주의 어쩌구저쩌구해서 에티오피아와 전쟁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소말리아 영토에 비해 소말리아인들이 사는 땅은 더 넓었거든요. 이렇듯 민족의 생활권과 그 민족의 나라가 일치하지 않아 벌어지는 전쟁이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잡았는데, 그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오스만이나 불가리아 같은 경우는 발전이 좀 더딘 국가들이기 때문에, 강대국들에게 시달린게 좀 많았습니다.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차대전중 같이 좀 영토를 넓혀볼까 하는 심정에서 독일 편에 붙습니다. 독일이나 오-헝, 오스만 같은 경우는 영국, 프랑스에게 불만이 꽤 많았거든요. 하지만 패배해버리고, 오스만은 아프리카, 중동을 다 잃어버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축소됩니다. 그 결과로 터키라는 공화국이 생겨나게 되죠. 이런 혼란이 옆나라에서 발생하니까 그리스는 좋다하고 아나톨리아로 상륙하게 됩니다. 한번 터키한번 먹어보자~! 이러면서 말이죠.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며 수도 앙카라 근처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터키의 아버지라고 하는 케말 아타튀르크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점차 반전되기 시작합니다. 터키는 케말 아래 점점 집결하기 시작하는데, 그리스는 왕이 암살당하면서 군대 내부문제가 점차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점차 패배하기 시작, 결국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축출당하게 됩니다.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켜보자라는 대그리스 주의는 이렇게 끝을 맺었죠. 사실 이스탄불은 커녕 너무 큰 먹이에만 집중해버린데다가 터키를 너무 과소평가해버린 관계로 그리스의 확장은 결국 에게해에서 그 끝을 맺게 됩니다. 케말은 이 승리로 터키를 굳건히 세울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터키와 그리스는 1945년 이후로 서로간의 적대관계를 좋으나 싫으나 청산해야만 했습니다. 북쪽의 공산주의가 점차 발칸반도를 휩쓸고 남하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힘겨워하는 터키와 그리스에 지원을 결정합니다. 이게 마셜계획(가난한 나라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어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미국의 경제지원계획)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는 발칸반도 국가들 중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고수할 수 있었고, 터키도 나름대로 이슬람 국가들중 거의 유일하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는 국가정치체제를 수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주위국가들 사이는 서로 티격태격 하기도 하고, 서로 연결되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앞으로 이런 이웃나라들의 사건들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에 대한 것들을 좀 써보려고 합니다. 터키와 그리스는 현재 약간의 영토분쟁(예를 들어, 에게해의 섬들)
이 진행중에 있기도 하고, 축구에서 두 나라간 경기를 하면 죽이네 마네 하기도 하지만(페네르바체나 AEK 아테네라던가 뭐 이런 팀들..) 옛날보다는 그나마 사이가 많이 좋아지기는 했습니다. 최소한, 이스탄불을 되찾자고 그리스가 난리를 피우지는 않으니까요.
다음 글에는, 어디를 쓸지 아직 결정을 안했답니다[…] 그때그때 생각나면 글을 쓰는게 제 특징중 하나거든요. 아마 유럽 구석탱이 어딘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허허
-제가 이래저래 필력에서 부족한 점이 좀 많습니다. 만약 이런저런건 설명이 부족하다던가, 뭐 그런게 있다면 날카로운 비평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더 길게 써야 하지만... 너무 축약해 쓴 감도 있군요.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늘릴까도 생각중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6:32
병장 양 현
역사이야기구나! 하고서 왔는데 이게 뭐람, 두고두고 읽어야겠어요.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들은 좋은점이 뭐냐면,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고 모티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죠.
석재씨의 다른 이야기들, 기다리고 있을께요! 2008-12-19
16:33:02
상병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2008-12-19
18:38:41
일병 김태경
역사 얘기 너무 좋아요! 2008-12-19
22:40:07
상병 이지훈
재밌군요
발칸반도, 발칸반도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는데 정작 아는 건 없었는데 말이죠
게다가 TV를 못 본지 오래 되버려서 현재의 그리스 정세도 이유를 잘...허허
질문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질문 한 가지...아니, 요청인가요?..
가능하다면..
마셜계획(가난한 나라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어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미국의 경제지원계획)이 터키와 그리스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그러니까. 글을 보면 터키와 그리스가 주위 국가와는 다른 국가시스템을 구축했다. 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마셜계획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싶어요.
또 당시 냉전시대였다고 해도, 미국이 지원을 할만큼 정치적 위치, 혹은 지정학적 위치를 터키나 그리스가 가지고 있었는지도...하하 이거 궁금한게 끝이 없군요
추가적으로 비슷한 시기의 한국도 이 마셜계획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알고 싶네요
다음 이야기들이 기대되네요 후후 2008-12-20
03:54:59
병장 안재현
동유럽쪽은 이야기 아는 것이 옛 소비에트 연방이나 신화 정도인데...
굉장히 도움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2008-12-20
04:34:25
일병 이석재
병장 양 현/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연재물로 하나 시작할까 생각중이에요.
상병 김무준/ 감사합니다! 허허
일병 김태경/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는 것, 그것이 제 행복입니다. 허허
병장 안재현/ 감사합니다! 사실 동유럽의 역사는 꽤 흥미로운것들이 많아서요. 2008-12-20
21:07:29
일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지정학적 위치는 많이 중요했죠. 2차대전 말기 영국의 처칠은 발칸반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탈리아나 프랑스, 아프리카에 시행했던 상륙작전을 발칸반도에도 시행할것을 역설합니다. 사실 이탈리아에 썼던 자원들의 반만 발칸에 밀어넣었어도 발칸의 해방은 빨랐겠지만, 연합군중 아무도 발칸에 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발칸의 지역들은 모두 소련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만큼 발칸반도에서 자유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나, 터키는 중요한 지역이였죠. 소련을 아래서 견제할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요, 터키같은 경우도 카프카스(그루지야도 이곳에 속합니다)지역을 견제하며 소련의 유전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라 미국에겐 이 두나라가 중요했습니다. 2008-12-20
21:14:45
일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저희나라 같은 경우는 마셜계획의 일부분이라고 보기는 힘들거 같습니다. 마셜계획의 중점 국가는 영국, 프랑스같은 연합군에서부터 독일, 이탈리아같은 전쟁패배후 공산주의에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국가들까지, 일반적인 '옛 강대국' 중심으로, 특히 유럽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죠. 한국의 지원에 대한 부분은 마셜계획이라기보다는, 1953년 이승만씨가 휴전에 대한 조건으로 체결한 원조협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 많습니다[이거 이승만씨라고 했다고 끌려가는거 아닌가...허허] 2008-12-20
21:20:57
일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마셜계획이 터키와 그리스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저도 조금 자료를 찾아봐야 겠군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같은 국가에 진행된 사례를 찾아보자면, 2차대전중 미국에게 빚진 군수물품서부터 온갖 채무들을 갚아주고, 폐허가 된 공장 재건설에 자금을 대주는등 주로 경제적인 쪽에서 자금지원을 많이 해주게 되는 것이죠. 미국은 전쟁체제로 돌아가던 경제체제를 다시 평시체제로 돌리면서 남는 여유물품들을 유럽에다가 제공하면 瑛릿, 여유물품 처리하고 경제 살리고 일석이조랄까요. 2008-12-20
21:23:05
상병 이지훈
답변 감사합니다 2008-12-20
21:49:32
병장 양 현
저야말로, 이런 이야기를 풀어해쳐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2008-12-21
10:10:46
병장 이동석
오, 재밌네요. 다만 해방-이라거나 반란-이라거나 저희-나라같은 표현이 아쉽긴한데, 뭐 그러려니 해야죠.
그리고 최후의 자유주의라거나 민주주의 수호-라는 표현은 엄, 그게 사실문제-라기 보단 가치판단-이 개입된 일종의 의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팩트를 설명하는데는 가치중립적인 용어 사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저도 그런 용어-로 팩트를 배워왔지만요. 2008-12-21
14:17:39
일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물론 그런 '비 중립적' 용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필체에 너무 녹아내려서인지 무분별하게 쓴 느낌이 있군요.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2008-12-21
20:41:16
병장 정현진
잘 읽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제목만 봤을 때는 하루키의 '우천염천'이 생각나더군요. 읽은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2008-12-22
09:38:56
병장 이동석
석재/ 주의를 준건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의견일뿐이에요. 컥. 2008-12-22
13:08:59
상병 김용준
현대사는 어려워요. 흑흑. 이 글 보고 머리에 쥐날뻔? 했어요. 크헉-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후후.
[연재] Side and Side- 독일과 오스트리아 (1)
일병 이석재 2008-12-20 21:57:18, 조회: 254, 추천:2
이번 이웃나라 싸움박질 시리즈 제 2탄으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 두나라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근대의 7개 강국(영국, 프랑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만투르크의 7개 강국입니다. 혹시 디플로머시(주1)를 해 보셨다면 쉽게 알 수 있으실 겁니다.)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왜소한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은 이웃나라 독일이 벌인거기도 한데, 앞으로 살펴볼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실, 역사부도를 보셨다면 가끔씩 드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영토가 나와있으면 중앙에 국경선처럼 빨간선이 찍 그어져 있을까 하는 의문, 중학교때 저는 그 빨간 선을 보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 인 등등, 그 중 헝가리는 계속 오스트리아 밑에서 통치받길 거부했고, 결국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조약을 통해 나라를 두개로 쪼갠거죠. 오스트리아령과 헝가리령으로, 헝가리 같은 경우는 외교권만 오스트리아에게 위임했을 뿐이지 자치적으로 국가를 구성했습니다. 행정부도 오스트리아 따로, 헝가리 따로 구성되었죠.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스트리아-헝가리 같은 경우는 독일을 구성하게 되는 프러시아(주2)보다는 먼저 등장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주3)가 신성로마제국(주4)을 구성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최대로 확장했을때는 이베리아반도, 독일 전체, 네덜란드, 이탈리아등지를 결혼 등 유산상속으로 인한 점령으로 인해 서유럽의 통일을 이뤄내기 반보직전까지 왔을 정도로 세력이 컸습니다. 이때는 안타까운건지 좋은건지 몰라도, 프랑스의 마지막 저항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서유럽 통일이 실패로 돌아갔지만요.
그래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문으로서, 독일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귀족들은 자기 나름대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는 있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주도권 체제 도전하는 국가가 있었으니, 이들이 프러시아입니다. 프러시아 같은 경우는 중세의 튜튼기사단(주5)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점차 서진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브란덴부르크 지역(베를린도 포함되긴 합니다.)에 터전을 잡고 점차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쪽에 있던 오스트리아와 충돌도 하게 되는데, 이게 첫번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입니다.
프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 령이였던 슐레지엔이 가장 필요했던 것이지요. 산업적으로도 가장 발전한 지역이였기 때문이죠. 그 슐레지엔을 차지하고자 프러시아는 1차, 2차에 걸쳐서 슐레지엔을 침공했고, 계속 그 지역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맘에 안드는 결과였지요.
프러시아가 슐레지엔을 ‘강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왕위계승전쟁에 돌입합니다.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했지만, 카를 6세가 왕가의 마지막 남자로서 사망하므로서 왕위를 계승할 남자가 없어진 것입니다(주6).
이렇게 되자 카를 6세의 뒤를 이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권에 프러시아는 태클을 걸기 시작합니다. 물론 슐레지엔을 완점히 점령하고자 하는 프러시아 속내는 숨겨놓은 채 말이죠. 이 전쟁이 바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입니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또다시 패배, 프러시아에게 더 이상 슐레지엔에 대해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니였습니다. 비록 슐레지엔은 점령당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몇백년동안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몸, 독일의 통일주도권은 오스트리아가 잡아야 한다는 사명 아래 열심히 프러시아에게 복수할 틈만을 노리게 됩니다. 프러시아도 아랫동네가 전쟁하고 싶다는데 그걸 그냥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다시 슐레지엔을 놓고 전쟁하는데 그것을 7년전쟁이라고 합니다. 7년전쟁에서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같은 나라들의 다굴을 받게 되지만 결국 승리, 오스트리아에게 슐레지엔을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7년전쟁의 종료로 인해 독일의 주도권 체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일원체제가 아닌 프러시아까지 포함한 이원체제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대두대는 문제는 독일통일 문제, 독일의 통일을 누가 시키느냐의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전쟁의 목적은 슐레지엔 같은 일부 땅떵어리가 아닌, 독일의 통일문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독일이 프러시아에 기치 아래 통일되느냐, 오스트리아 기치아래 통일되느냐의 문제였지요. 그만큼 프러시아가 독일 전역을 통일할만한 여력까지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독일주의, 소독일주의서부터 시작하여 이탈리아 통일 문제까지 여러가지 섞이긴 하지만 그런거까지 설명하면, 주석이 한 20개는 될거 같아서…허허허
결국,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을 향한 마지막 전쟁을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방해로 인해 이탈리아의 통일을 막을 수 없었으며(주7) 그 덕분에 이탈리아 보다 독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게 되었죠.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이 전쟁은 사도바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함으로서 결국 독일 통일은 프러시아가 주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때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사도바를 얘기하지 말고, 프랑스인에게 스당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주8)”라는 명언 아닌 명언이 나오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보불(프랑스-프러시아)전쟁 이후 프러시아는 독일을 통일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문제가 아닌 다른곳으로의 확장, 즉 발칸으로의 확장을 계획합니다. 이 이후의 얘기는 점차 길어질거 같으니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지요…허허
주1-디플로머시: 위에 말했던 7개국중 하나를 잡고 벌이는 보드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규칙은 단 하나, ‘수가 많으면 승리한다’ 2개 병력과 한 개병력이 싸우면 2개병력이 이기고 그 영토를 차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든 주위 동맹군을 끌여들여 수가 많도록 유지하는 것이 ‘외교’라는 이름을 가진 이 게임의 묘미인 것이죠. 물론 배신의 세상도 마음껏 느낄 수 있습니다.
주2-프러시아: 프러시아 ‘왕국’과 ‘백작’의 위치를 동시에 가집니다. 프로이센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작’이라는 직책을 하사받았지만, 프러시아 왕이 왕을 자칭하므로서 백작임과 동시에 왕인, 뭐 이런 복잡한 직책을 가지게 됩니다. 역시 설명하고자 하면 한도끝도 없군요.
주3-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의 통치가문입니다. 에스파냐의 왕가와 오스트리아에 왕가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이기 때문에, 서로 왕을 계승하겠다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한 가족이라고 재산 남겨놓고 싸우면 개나 소가 되기 십상이긴 하지만…
주4-신성로마제국: 독일의 오토1세가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으면서부터 지속되면서,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킬때까지 계속됩니다. 말만 ‘제국’이였지, 황제가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하는 대공위시대 이후부터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고, 나중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이름으로만 전락하게 되지만,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를 계승한 마지막 나라로서 그 이름이 주는 무게만큼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꽤 컸습니다.
주5-튜튼기사단: 지금의 폴란드, 발트3국에 파견된 기사단입니다. 주 목적은 그 지역을 개발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이였습니다. 중세때도 동유럽지역은 카톨릭보다는 쿠만 같은 이민족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차 유럽 전체로 카톨릭이 퍼져나가 더 이상 퍼트릴 곳이 없자. 이들은 점차 서진하기 시작하면서 독일의 역사에 편입되기 시작합니다. 흔히 팩션물에 많이 나오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과 그 성격이 비슷합니다.
주6-살리카: 살리카법은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이 주로 삼았던 법입니다.무언가를 계승할 사람은 오직 남자, 장자순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비잔틴 제국 같은 경우는 ‘비 살리카법’이라 해서 여자쪽에게도 계승권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왕위가 여자에게 넘어가자, ‘어째서 여자가 왕위를 가지는건가!” 라고 하면서 태클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비잔틴제국은 여자가 여제에 올라서, 결혼을 함으로 인해 그 남편에게 황제위를 물려주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주7-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해, 그 전까지 오스트리아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이탈리아의 독립세력을 지원합니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베네치아’쪽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통일하게 되지요. 베네치아 쪽에 대한 통일은 1차대전 이후에야 진행됩니다. 대신 이탈리아는 사부아, 니스를 프랑스에 양도하게 됩니다.
주8- 스당은, 보-불 전쟁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사로잡힌 곳입니다. 엠스전보사건에서부터 비롯된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프러시아에 대패를 하고, 독일 통일의 마지막 방해세력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프랑스는 이 수모를 1차대전때 갚았고, 독일은 다시 2차대전때 갚았으며, 다시 프랑스는 2차대전 종료시 이 수모를 갚게 됩니다. 이래저래 독일과 프랑스도 참 재밌는 일이 많았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7:06
상병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2008-12-20
22:04:23
병장 김민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참 느낌이 다른 사람들이 색다르게 사는구나, 싶었던게 당시의 제 감상이었는데, 역시나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군요. 부다페스트 궁에서의 근위병 교대식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이건 뭐, 메가리도 없고, 동네 아저씨들 나와서 취미생활 하는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공익을 위하는 아저씨들이 광화문 수문장이 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기는 한데, 확실히 쪼그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스트리아의 zipfer가 많이 그립군요. 허허 2008-12-21
08:19:24
병장 김민규
잘 읽었습니다. 2008-12-21
08:19:35
병장 이동석
허허, 역시 재밌군요. 2008-12-21
14:26:15
병장 안재현
와우... 석재님 역사지식에 감탄,, 또감탄입니다. 잘읽었습니다. 2008-12-21
14:43:20
상병 이지훈
민규/
이건 뭐, 메가리도 없고, 동네 아저씨들 나와서 취미생활 하는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보는 사람이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겠네요. 그래도 뭔가...역사의 재현인데 말이죠
음? 근데 재현과 재연...좀 다르지 않나요? 허허
디플로머시 재미겠군요.
근데 전 2편을 먼저보고 1편을 봤군요...허헛 2008-12-22
05:11:32
상병 김세현
아!! 이건 좀 어려워요!!
[연재] Side and Side- 독일과 오스트리아 (2)
일병 이석재 2008-12-21 16:36:11, 조회: 132, 추천:1
-자, 오스트리아와 독일이야기 두번째 시간입니다. 이번엔 두번 시간으로 1차대전 후부터 2차대전 까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헝 제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독일에서 손을 떼기 시작합니다. 이미 독일은 러시아, 오-헝제국, 프랑스, 영국등 근처에 강한나라가 들어서는 것을 싫어하던 나라들을 모두 물리쳐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이후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지세를 자세히 보도록 하지요. 서쪽에는 프랑스가 전쟁에는 졌어도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동쪽에는 러시아가 폴란드도 점령하고 독일과 경계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약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양쪽에서 친다면? 비스마르크는 그 상황을 절대로 두고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주1)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독일, 오-헝제국, 러시아가 연합하여 프랑스를 압박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헝 제국과 러시아는 서로 동맹을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확장방향이 발칸반도로 똑같았거든요. 발칸반도에서 게르만과 슬라브의 격돌은 그 누구도 양보할 수 없었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쇠락하고 있어서 그 무주공산에 누가 헤게모니를 잡느냐, 그것으로 티격태격하는데 독일이 거기에 둘을 사이좋게 한다고 해서 될일이 아니였지요.
결국, 러시아는 프랑스, 영국과 손을 잡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견제하는 양상을 띄게 됩니다. 독일은 동맹을 구해야 하긴 했으므로, 러시아보다는 오-헝제국을 끌어않고 가는 양상을 띄게 되는것이지요. 원래 초반은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구성했지만 정작 1차대전시에는 이탈리아가 연합군으로 이탈하고 터키가 독일편에 가담합니다. 하여간에…
그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반도로의 확장을 계획합니다. 이때 가장 방해가 된 세력은 세르비아였지요. 세르비아가 제 1차 발칸전쟁(저번에, 터키와 그리스편을 보셨으면 이해가 좀 빠르실겁니다)을 통해 남쪽으로 영토를 2배 이상 확장하고 알바니아까지 점령했을 때 오-헝은 슬슬 이건 이대로 두면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방해공작을 편 끝에 알바니아를 새롭게 독립시키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주2) 지역까지 병합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 상황을 세르비아가 좋게 볼 수많은 없겠죠. 하지만 오-헝제국에 비해 힘은 약하니 어쩔 수없이 오-헝제국의 얘기를 들어주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발칸에 불고있는 슬라브 민족주의는, 결국 오-헝제국의 황태자와 그 황후를 암살하게 되는 결과까지 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차세계대전입니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1차대전에서 오-헝제국과 독일은 패배했습니다. 독일은 옛 튜튼기사단에게서 내려온 건국 초기의 영토들을 폴란드에게 넘겨주어야만 했고, 오-헝제국은 미국의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등으로 나누어지고 승전국인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점령하여 이탈리아를 통일했으며, 루마니아(주3)는 영토의 2배 이상을 늘릴 수 있었고, 세르비아또한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새롭게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헝제국은 축소되었고, 옛 국토를 빼앗긴 독일과 남쪽에 소국인 오스트리아만 남아 2차대전까지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소국으로 전락하여 2차대전 전까지 거의 ‘조용하게’ 지내다시피 합니다. 독일이 어떻게든 1차대전 패배의 설움을 딛으려고 노력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는게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욕망이 다 사라졌달까요.
하지만 그들을 건드린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였지요. 그들은 오스트리아 내부에 있던 친나치 세력들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고 했고,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독일 주위에 친나치 세력들의 쿠데타로 독일에 넘어간 것만해도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도 있었지요. 그렇게 2차대전을 독일과 함께 겪더니, 결국 또다시 패배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도 독일처럼 또다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4분열이 營윱求. 하지만 독일처럼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이유는, 독일은 다시 통합되면 강국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었지만, 이미 팔, 다리가 다 짤린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으로 가는선에서 다시 통합되었고, 지금에까지 옆나라 스위스와 같이 중립국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같은 게르만 민족으로 중부 유럽의 패권을 잡았던 국가들이였지만, 두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지금은 두나라 모두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1950년대 이후 자신의 옆나라들이 소련의 군홧발 아래 넘어가는걸 보면서 중립국 선언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어딜 설명할 것인지는 결정 안되어있습니다. 허허허허 역시 언제나 질문, 비판, 태클은 환영입니다.
주1-하지만, 비스마르크가 독일 황제에 의해 축출당한 이후, 독일황제 빌헬름 3세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포기했고,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영국과 3국 연합을 구성하여 독일을 포위공격하게 되는, 독일 시나리오상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주2-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고슬라비아는 북쪽에서부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후에 1990년대 기독교계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그리스정교, 슬라브계인 세르비아 두나라 사이의 각축장으로 폐허가 瑩嗤,(유고슬라비아 내전) 지금은 평화를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나라는 이슬람, 기독교등 온갖 종교가 모여있는 곳이라서 분쟁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주3-루마니아: 저번 터키-그리스 편에서 보셨듯이, 1차대전이후 가장 땡잡은 나라중 하나입니다.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공세(브루실로프 공세)가 계속되던 도중, 루마니아는 ‘연합군이 이기겠지!” 라는 희망찬 포부 아래 독일을 적대국으로 돌렸다가, 공세가 좌절되면서 바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승전국으로서 루마니아는 오-헝제국의 영토를 받아 국가를 2배이상 불리고, 지금의 루마니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영토를 늘리다니, 역시 기회는 잡으면 잡을수록 좋은거 같군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7:15
병장 이동석
얼마전에 그르비차자(역시 고유명사 따위 잊어버렸기에 그르비차차이거나 그르비자차일수도 있음) 라는 영화를 봤는데, 보스니아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모녀와 참전군인등이 나오는 이야기더군요.
역시 재밌군요. 허허. 성실한 주석도 알차고요. 2008-12-21
18:23:41
상병 이지훈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1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재편성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헝 제국해체가 민족자결주의의 주된 목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음.. 다시 말해서 오-헝 제국해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인지 궁금해요. 2008-12-22
05:01:48
일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 용도로 쓰인 민족자결주의는 아니였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이유는 오-헝제국이라기보단 아메리카 대륙에 쓰일 용도였지요. 미국 같은 경우는 '먼로주의'를 통해 아메리카 전체에 강대국들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겠다. 라고도 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아메리카 대륙에 스페인, 프랑스, 영국등이 식민지를 두는 것을 싫어하는 미국은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그들을 독립시키는 것을 정신적으로 지원해주는 용도로 쓴 것이지요. 물론 1차대전의 패전국들에게도 적용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승전국들에게는 적용이 안되서 후에 불화의 씨만 남게 되지요. 2008-12-22
22:30:00
상병 이지훈
3.1운동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있었더랬죠. 그러한 민족자결주의의 기원이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흐흐 2008-12-23
05:54:43
상병 김예찬
민족자결주의는 결국 남아메리카의 구 유럽 식민지들을 미국의 손아귀에 넣는데 쓰였을 뿐이었죠. 미국의 외교적 고립주의 전술은 결국 팽창주의 전략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2008-12-26
13:19:34
일병 이석재
상병 김예찬/ 그렇습니다. 먼로주의에서부터 민족자결주의까지, 미국의 의도는 아메리카 전체를 유럽 국가들과 분리시키고 자신만의 세력권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온 것이지요. 하지만 남미도 나름 남미인지라, 현재는 미국의 세력을 부인하고 민족주의를 제창하는 좌파정권이 남미 여러국가들에 산재해 있습니다. 예를들어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같은 나라들이 좋은 예이겠지요? 2008-12-27
09:43:12
[연재] Side and Side - 일본과 러시아
상병 이석재 2008-12-22 20:21:02, 조회: 258, 추천:2
이웃나라랑 치고박고 싸우기 3번째 시리즈물은…. 사실 밝히기전에.
시리즈물이 너무 파격적으로 달리고 있는듯 해요, 하루만에 한편씩 올리고 있으니..허허, 이러다가 소재 떨어지면 어떤걸로 밀고 나가죠? 여러분들이 역사의 어떤 부분이 무지 궁금했다. 하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작성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번 세번째 시리즈로는 러시아와 일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왜 중국이나 일본이라던가 일본과 한국 뭐 이런나라가 아니냐구요? 그건 너무 식상하잖아요. 유럽에서 놀았으니 슬슬 아시아로 한번쯤은 넘어올 때가 되었지요.
사실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러시아는 이웃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계몽군주(주1)중 한명인 예카테리나 대제가 시베리아로 점차 진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일본과 러시아는 접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러시아와 일본은 서로 격돌할만한 국가는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국가 확장보다는 근대화에 치중해야 하는 상황이였고, 러시아는 계속적인 남하정책(주2)을 통해 중국, 특히 연해주와 몽골지역을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그 근대화에 필요한 식민지를 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집니다. 중국과 다른 나라와의 중매(?!)를 서준 대가로 연해주를 빼앗아간 러시아는, 이제 점차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오직 확장할 곳이 한반도밖에 없던 일본으로서는 한반도 확보가 절실했던 순간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청과, 나중에는 러시아와 싸우게 될 정도로요. 물론 일본은 목숨을 걸고 두 나라와 싸우게 되었지만, 역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라는 심정으로 싸웠더니 두 나라를 다 이겨버리게 된것입니다.
물론, 청나라와의 전쟁은 이번 시리즈에서 하등 필요가 없으므로 러시아와 일본만의 대결을 기술하겠습니다.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압박을 통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 나아가 만주 남쪽에 있는 한반도마저 자신의 세력권으로 확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강대국 저 강대국을 넘나들었던 명성황후를 친 러시아파로 확보(주3), 일본을 견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손가락 안의 가시. 결국 을미사변(주4)을 통해 친러시아파를 제거하고 그에 환멸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주5) 사건마저 일어납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먼저 일본에게 제의를 하게 됩니다. 북위 38도선(주5-1)이상으로는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이남으로는 일본의 세력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제안을 일본에게 보내게 되지요. 이는 러시아가 이미 써먹었던 수법인데, 이란에서 북쪽은 러시아 세력, 남쪽은 영국세력, 중간을 비무장지대로 해서 나눠먹었던 수법을 한반도에서 다시 써먹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되면 북위 38도선 이북, 특히 만주지역마저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더불어, 러시아를 세계 각곳에서 견제하고 있던 영국마저도 일본의 동맹국으로 편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은 그때까지만해도 고립주의를 천명, 동맹국이 없었지만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첫 동맹국으로서 일본을 선택한 것이지요.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은 차차 러시아와의 전쟁준비를 진행하게 되고, 기습적으로 한창 만주에서 세력권을 다지고 있던 요동의 러시아군을 급습하게 됩니다.
이에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의 함대가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오면서 일본을 공략하려고 준비하게 되고, 육군도 요동반도에서 지구전을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둘 다 문제가 있었던게, 모스크바와 한반도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함대가 한반도까지 돌아오려면, 석탄 등 기본적인 보급 품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세력이 이미 전 세계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러시아 함대에게 석탄을 공급하지 않았고, 결국 세계에 조금씩 있던 독일산 석탄을 써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석탄이 영국산 석탄에 비해 질이 낮았다고도 하더군요, 겨우 올라왔는데. 쓰시마 섬 해협에서 박살나버리고, 러시아 함대의 명예만 실추시키게 됩니다.
육군은 나름대로 오래 버티긴 했지만 위에서 말했던 대로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본쪽에서도 잘 방어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계속 공격하다가 많은 피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은 요동과 가까웠고 러시아는 멀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러시아는 요동반도와 만주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과의 협정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러시아는 극동에 관심을 쏟기가 힘들었던게, 독일-오스트리아 편에서 보셨듯이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더욱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덕분에 이제 한반도는 일본의 손아귀로 안녕~
이제 일본과 러시아는 한동안 싸울일이 없게 됩니다. 러시아는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겪으면서 대외문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러시아쪽보다는 중국을 잡아먹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 문제는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으로 나라가 바뀌게 되서부터입니다.
독일과 소련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전체주의’ 와 ‘사회주의’ 관계는 진짜로, 사이가 나쁘다 못해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솬계였습니다. 전체를 하나의 정부에서 통합, 관리하는 전체주의와, ‘이론적으로는’ 전체 노동자들의 권력에 의지하는 사회주의는 그 권력이 나오는 곳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전체주의의 아버지 히틀러가 워낙 사회주의 사람들을 싫어했던지라..(왜 싫어했는지는, 개인의 선호도니 알 수 없군요. 게다가 자살했으니…쩝쩝). 그 덕분에 일본은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자 자신들의 정권에 위협이 되리라고 판단, 반 소련군대에 자신의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합니다. 친 황제파를 백군, 소련군을 적군이라고 하는데, 이 러시아 내전에서 영국, 프랑스들도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그 중 가장 많은 군대를 보낸건 다름아닌 일본이였습니다.
일본은 연해주를 차지하고 소련을 계속 괴롭혔지만 계속 전쟁을 진행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고, 게다가 소련과의 전투(죄송하지만, 어느 전투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는군요OTL 아마 노몬한전투로 기억합니다.) 에서 패배, 결국 지금까지 소련영토를 점령했던 지역을 반환하고 다시 만주로 복귀하였습니다. 스탈린은 이때 일본에게 당한 것들을 끝까지 기억하게 됩니다.(주6)
일본은 그렇게 소련과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그러나 독일 입장에서는 배신이였던게, 2차대전중 자신은 소련과 싸워데고 있는데, 동쪽에서 자신의 동맹군이라는 작자들이 적하고 협상해서 휴전하게 된것이였죠.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소련보다 중국이 더 맛나는 먹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과 일본은 같은 동맹군임에도 같은 적과 싸우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싸우다가 1945년 말이 되면서 일본의 패전이 뚜렷해지자, 독일을 패망시킨 소련은 이제 일본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스탈린은 옛날 일본이 자신을 무너트리려 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 것이지요. 물론 연합군으로써 마지막 추축국인 일본을 무너트려야 했기도 했으니까요. 결국 그들은 만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945년 8월 15일까지 그들은 원산까지 진출합니다. 더 빨리 올 수 있었지만, 미국과의 협정으로 그쯤에서 멈추기로 한 것이지요.
그렇게 일본과 소련은 승전국과 패전국으로서 갈라지게 되었고, 냉전시대를 거치며 소련은 공산주의 세력의 대모로, 일본은 민주주의 세력의 보루로서 냉전기를 지나가게 됩니다. 사실 냉전기 시대의 일본은 소련과 충돌하기 보다는, 북한이나 내부의 문제와 더 싸우게 되기 때문에 소련과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대에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변화하고 나서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옛 소련이 2차대전중 일본을 침략하면서 일본령이였던 북방 4개섬을 무력으로 강점한 것이였지요. 물론 대전 종료후 일본은 그 4개섬을 반환하기를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지금까지 반환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러시아와의 여러 협상으로 4개섬중 2개씩 나눠먹자고 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진척된 내용은 아직 없습니다. 일본은 그 북방 4개섬을 제외하고도 중국, 한국과도 섬가지고 계속 싸우고 있는 입장이니까요. 하여튼, 끝이 없는 욕심은 언젠가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1-계몽군주: 근대에 들어서부터, 정부 자체의 권력이 귀족들이 왕에게서가 아닌, 국민들에게서 나온 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던 군주들을 통칭합니다. 좋은 예로서 러시아의 표트르대제, 예카테리나 대제라던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 등을 일컸습니다. 사실 이들은 국민들을 존중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국민들을 존중한 쪽도 있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국가’하고는 거리가 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2-러시아의 남하정책: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계획했던 것은 단 한가지, ‘부동항’, 즉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래야 러시아가 자랑하는 강력한 함대들을 1년 내내 쓸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주로 남하정책을 취한곳은 이스탄불지역등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쪽,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서쪽으로 나갈수 있는 쪽, 극동에서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는 쪽, 이란에서 페르시아만으로 나갈 수 있는 쪽 등 다양했습니다.
주3-명성황후: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은 간단했습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나만갖다 장난하나, 나 한순간에 새됐어?? 뭐 하여튼, 중국, 일본, 러시아를 파트너로 삼는 정책을 취했지만, 이 세나라중 어느 누구도 대한제국을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나라는 없었다는 점에서 슬플수밖에 없군요.
주4-을미사변: 누구나 다 알다시피,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의병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건 근현대사 시간에 배우시는게 나을지도..허허
주5-아관파천: 고종이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사건을 아관(아라사 공관) 파천(하늘이 이동하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년후에 다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주5-1-38도선: 이때부터 후에 북한과 남한을 가르는 선으로 다시 쓰여지게 됩니다.
주6-스탈린: 스탈린의 복수는 너무 옙윱求. 자신의 혁명 동지라고 할 수 있는 트로츠키서부터 시작해서 그에게 위해를 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복수를 했으니까요. 1930년대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한 대숙청 때문에, 2차대전 초기동안 독일에게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깨지게 됩니다. 그러나 2차대전 승리 이후,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를 거둔 주코프 같은 장군을 유배보네는등, 그가 죽을때까지 계속榮 의심증은 소련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7:26
병장 이동석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주5)
북위 38도선(주5)이상으로는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각주가 겹치는듯하군요(?)
그리고 오타-
[영국은 그때까지만해도 고립주의를 천명, 동맹국이 없었지만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첫 동맹국으로서 영국을 선택한 것이지요]
영국이 영국을 동맹국으로 선택-한게 되는군요. 허허. 2008-12-22
21:23:47
일병 이석재
허허, 이런 오타를 지적해주시다니 수정해야겠군요-쩝쩝 2008-12-22
21:43:53
상병 이지훈
결국 그들은 만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945년 8월 15일까지 그들은 원산까지 진출합니다. 더 빨리 올 수 있었지만, 미국과의 협정으로 그쯤에서 멈추기로 한 것이지요.
조금만 애드온을 달아볼게요 재밌는 기억이 떠올라서요...그렇다면, 무례를 무릅쓰고(?)
일본은 7월말~8월초부터 이미 항복을 결정해놓은 상태였죠. 전쟁에 있어서 항복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기때문에 당연한 이치일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항복을 결정한 일본에게 항복이냐, 결전이냐는 더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고 항복을 하면 '언제'할 것인가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죠. 그리고 이것은 정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해야하는가 라는 문제와 맞물려있었죠.
헌데 마침 미국과 소련이 모두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었으니 일본은 표면상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면서도, 이 점을 이용해 최대한의 실리를 얻으려고 하죠. 미국은 카미가제 등 일본의 결전의지를 보면서 이 전쟁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소련에게 참전을 요구하죠. 미국은 오키나와에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셈이죠. 한반도에는 먼저 상륙할 것이라고요 적어도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려면 한참이나 걸릴 것이라 예상했죠. 왜냐면 만주에 주둔 중인 일본 관동군(확실한지는 모르겠네요)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이었죠.
미국의 예상과 달리 일본 관동군은 정말 쉽게 깨져버리고 소련은 미국이 참전요청을 한 날(8월 8일)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에 한반도에 들어와버리죠. 미국은 아직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데 말이죠.
미국은 급해집니다. 한반도가 이러다 완전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버리겠고 한반도는 커녕 일본조차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이 때를 기다려 일본은 항복을 합니다. 물론 패전국의 입장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이었지만 결코 무조건이 아닌 항복 협상에 있어 유리한 지점을 최소한이라도 선점한 것이죠. 미국은 급했으니까요. 38선이남으로는 내려오지 마세요 하는 약속까지 만들어낼 정도였으니까요
8월15일이라는 날짜가 그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처럼, 무조건적인 날짜 혹은 운명처럼 다가온 날짜가 아니라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약간 느낌이 묘하더라구요.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는 광복이라는 것을 맞이했으니까요. 그 묘한 느낌때문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네요 허허
근데 동석님. 아니 책마을님. OTL 정도는 애교로 봐주시는건가요? 흐흐 글이랑 너무 잘 녹아들어있는 듯 2008-12-23
06:24:12
병장 이동석
어? 지훈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광복절도 그렇고, 오티엘도 그렇고.
그런데 OTL 약자 아니었나요? (흐흐) 2008-12-23
07:44:52
병장 정영목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추천할만한 역사책도 소개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2008-12-23
10:10:08
일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런 애드온, 대 환영입니다 . WOW도 애드온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죠
병장 이동석/ 자제하려고 해도 자제가 안되네요 (흐흐) 2008-12-23
14:26:37
일병 이석재
병장 정영목/ 다음 시리즈물부터 같이 첨부하겠습니다. 1년이 다되가니 이 시대를 잘 다룬 책들이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허허 2008-12-23
14:27:16
상병 김예찬
일본은 러일 전쟁으로 많은 군비를 지출했지만 그 만큼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경제적 위기에 시달리게 되지요. 이 경제적 위기 때문에 일본 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기도 하구요. 러일전쟁으로 인한 일본 산업의 불균형한 발전은 30년대에 이르러 대공황의 아시아적 양상을 보여주면서 결국 일본제국은 대침략 전쟁의 길로.. 2008-12-26
13:05:40
일병 이석재
상병 김예찬/ 사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1차대전 승전국으로서 더 많은걸 받아내려고 했지요, 그 '경제적 위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강대국들이 차지했지만, 완전히 먹는것은 금지된' 중국에서 점차 일본의 세력이 증가하자 다른 승전국들이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은 2차대전때 추축 세력에 편입됩니다.
잘 생각해보면,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 국가들과, 상황을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들간의 전쟁이 1차대전, 2차대전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역시 애드온, 감사드립니다. 2008-12-26
20:45:53
상병 진성제
저도 에드온은 한번 달아볼게요 호호
우리나라가 광복하게 된 그 시기가 8월 15일이잖아요. 그 날짜가 이미 정해진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미국과 러시아가 2차 대전 중 정전협절을 맺은 것은 알고 계시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재미있는 조항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8월 9일이었던가?(2년전에 들었던 이야기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네요) 그 기한까지 소련이 한반도에 진출한다면 한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해주겠다, 이런 조항이었다는데요. 부동항이 꼭 필요했던 러시아의 입장에서도, 2차대전을 승리로 장식해야했던 미국의 이해득실이 이런 타협을 만들어낸거죠.(사실 미국에게는 한반도가 그다지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었던듯 하네요. 동북아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켰던 점도 상기해보면요.) 그 이후 소련은 내부상황이라던가 뭐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한반도에 진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일본의 막강함도 부담이었겠죠.) 그러다그러다 시간이 흘러서 8월이 되었는데요. 그당시 미국은 일본 때문에 굉장히 애를 먹었죠. 그래서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원자탄 투하라는 엄청난 결정을 하게 되었지요.(여기에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죠. 일본군이 너무나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미국에서 데이터를 내봤답니다.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데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까. 약 8개월의 시간을 소요해서 6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점령이 가능하다. 라는 결과가 나왔다더군요. 원자탄 투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구라고 하더군요.)
자, 당시 엄청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급해집니다. 원자탄을 투하하면 일본의 패전은 뻔하고 그러다보면 한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참전을 요구하니 옳다꾸나 하고 들이닥치게 됩니다. 뭐 미국 역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지만 소련이 그 예상을 깨버리고 너무 빨리 진출한 거죠. 그러자 미국도 부랴부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킵니다. 그리고 원자탄 투하~ 펑! 결국 한반도는 미국의 관할하에 있는 남한과 소련의 관할 하에 있는 북한으로 분열되고 말죠.
아주 정확한 내용이라고 확신은 못합니다. 2년 전에 수업에서 교수님이 잠~깐 언급하고 간 내용이라서 호호호. 어찌보면 일본에게는 원자탄 투하보다는 소련의 참전이 더욱 더 큰 타격이 되었겠지요. 2008-12-28
22:59:44
병장 김민규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가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는 이야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오네요. 워낙 용어를 섞어버무려찜으로 쓰는 시대이다 보니. 허허허
[연재] Side and Side- 남이탈리아와 북이탈리아.
일병 이석재 2008-12-26 19:21:07, 조회: 152, 추천:1
이번 시리즈물로 계획한 것은 두 나라가 아닙니다. 바로 한 나라지만 문화, 정치적인 면에서 상이하게 다른 북이탈리아와 남이탈리아, 두 곳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쓰긴 옛날에 썼는데 이곳이 다운먹기 시작하면서..지금에서야 올리는군요.
사실 로마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이탈리아는 통일된 지역으로서 동일하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이탈리아와 남이탈리아가 상이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로마제국의 멸망, 즉 서로마황제가 이민족에 의해 암살당하고 더 이상 ‘로마인의 황제’(주1)가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북이탈리아 지역은 동고트 왕국이라는 이민족 왕국의 지배에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남이탈리아는 동로마제국의 영토에 편입되게 됩니다. 사실 같은 이탈리아 반도이면서 그렇게 갈라진 이유는, 북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내륙으로 한참 들어가야 하지만, 남이탈리아는 그리스에서 배만 타면 휙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남이탈리아는 동로마제국(후의 비잔틴 제국)의 영토안에 들어갑니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주2)가 이탈리아를 다시 수복하면서 양 지역은 다시 같은 정치권 안으로 포함되지만 한세기가 지나지 않아 다시 북이탈리아는 동고트족이 다시 회복하게 되고, 이어 프랑크왕국이 다시 북이탈리아를 점령하게 됩니다. 사실 두 지역이 쉽게 통일될 수 없었던 이유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벌인 전쟁 때문에 이탈리아 전체가 폐허로 변했고, 그에 따라 ‘피점령지’라고 할 수 있던 이탈리아 전체는 비잔틴 제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품을 수가 없었죠. 굳이 로마제국이 아니였더라도 자기네들은 잘 살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그렇게 갈라진 이후로, 북이탈리아는 프랑크왕국이 깨어지면서 점차 ‘무주공산’의 지대로 변해가게 되고, 그 지역에서 ‘왕’을 주창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도시만의 권력을 강화시켜 나가게 됩니다. 그에반해 남이탈리아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 아래서, 그리스만의 색채를 띄게 됩니다. 결국 북이탈리아는 도시국가(밀라노, 베네치아, 제노바)등이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베네치아 같은 경우는 비잔틴제국의 자치도시였지만, 점차 자신만의 권력을 확립하게 되 갑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외침을 많이 받게 됩니다. 주위 국가들, 특히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 이슬람 세력등이 많이 노렸는데, 그들에게는 ‘확장할 영토’가 필요했었으니까요. 신성로마제국 같은 경우는 명목상의 로마황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탈리아에 욕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신성로마황제 따위는 독일에서 놀지! 하면서 그들의 간섭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북이탈리아는 중세기간동안 신성로마 황제와 교황 사이에서(주3) 도시들만의 세력을 발전시켜가는 동안, 남이탈리아는 점차 비잔틴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발칸 북쪽에서 이민족이 내려오지, 동쪽에서는 이슬람세력이 들어오지, 이탈리아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시칠리아섬이 먼저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오게 됩니다. (주4) 남부 이탈리아도 점차 외침을 받기 시작하더니, 결국 ‘노르만’족(주5)에게 이탈리아령을 모두 넘겨주게 됩니다.
‘노르만’족은 그렇게 시칠리아 왕국을 구성한 이후, 계속 비잔틴령을 넘보게 됩니다. 시칠리아 왕국이 ‘만지케르트 전투’이후 약화된(주6) 비잔틴제국과 싸우는동안 교황은 교황 나름대로 북이탈리아를 세력권으로 삼고 나아가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하려는 신성로마 황제와 싸우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노르만의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왕조가 독일의 호엔슈타유펜 왕조(주7)로 바뀌고, 프랑스의 앙주가문으로 바뀐다음, 마지막엔 아라곤 왕국으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주8) 바뀌면서 시칠리아와 남부이탈리아는 그리스, 노르만, 게르만, 프랑크, 스페인까지 온갖 문화가 섞이는 용광로로 바뀌게 됩니다. 시칠리아는 특히 이슬람 문화까지 들어오게 되는데, 시칠리아가 이런 온갖 문화의 장이 되버린 것은. 서지중해와 동지중해를 연결하는 지역의 중간 기착지로서 지중해에 폭풍이 몰아치면(지중해가 유럽의 호수같긴 하지만, 기상상황은 태평양의 태풍 못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피항구로서도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입니다. 중간기착지로서의 시칠리아는 중요했으니까요.
북이탈리아는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베네치아를 제외하고는 한 가문의 독재정치체제를 취하고는 했습니다. 밀라노는 비스콘티 가문, 제노바는 도리아 가문,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 등 겉으로는 공화정 체제를 취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왕정과는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밀라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로마제국의 휘하 가신으로 편입되지만 피렌체나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는 끝까지 남아 도시국가로서 르네상스를 지휘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만 본다면 중세시대에 홀로 살아남아 르네상스라는 꽃을 피웠으니 공화정체가 더 좋은거 같구나! 하실지 몰라도, 그렇게 갈라진 상황이였으니 근대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다른 나라보다 국민국가나, 통일국가를 세우는 작업이 이탈리아에서 더 늦어졌다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문명의 발전이란 방식이 과연 어떤게 옳은것이고, 어떤게 나쁜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중세이탈리아는 종결맺고, 근대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때의 얘기는 다음시간으로 미루도록 하지요..우후훗
주1-서로마 황제: 마지막 서로마 황제의 이름은 건국자의 이름을 따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어찌보면 미묘한 사실이였지요. 그를 죽인건 동고트족이였던 오도아케르였습니다.
주2-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마지막 ‘로마인의 황제’라고 불릴만한 인물입니다. 대제 이후에 그만큼 이탈리아를 점령하려고 한 시도라던가, 로마제국을 재통일하려고 한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대제 이후에 동로마제국은 로마제국이 아닌 그리스적인 색체를 띄게 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황후 테오도라 또한 여걸로서 유명한 인물이였습니다.
주3-구엘프와 기엘린: 친교황파를 구엘프파, 친황제파를 기엘린파라고 불렀습니다. 그 두파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싸움을 다 벌였지요. 교황이, 그렇게 깨끗한 직종이 아니였습니다. 쩝쩝.
주4-이슬람 세력: 이 이슬람세력은 이미 비잔틴제국을 동쪽에서부터 압박한 이후, 점차 아프리카, 스페인쪽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슬람또한 여러 왕조가 부침을 거듭했는데,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주5-노르만족: 시칠리아에 내려온 노르만족의 기원은, 용병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용병이 시칠리아가 살만한 곳이라는걸 자기 동족들에게 알리자, 프랑스 노르망디(노르만의 땅이라는 프랑스어입니다)에 있던 노르만족이 이쪽으로 남하에서 왕국을 세우게 되죠. ‘꾀돌이’라고 불리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그 중 중요한 인물입니다.
주6-만지케르트 전투: 비잔틴제국의 중반과 후반을 가리는 중요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고, 나중엔 황제위마저 잃게 됩니다. 제국군이 이슬람군에게 패배한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이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 중부가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7-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로마 제국을 세습제국으로 만든 왕조입니다. 또한 제국을 가장 발전시킨 왕조이기도 합니다. 붉은수염이라 불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중요한 인물이지요. 하지만 시칠리아, 남이탈리아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인들에게서 방어하려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왕자가 죽음으로서, 단절되게 되고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시대’즉 자리가 비어있는 시대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주8-마피아: 사실 이 프랑스 세력에서 아라곤 세력으로 넘어갈 때,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반란주동세력을 지금까지 ‘마피아’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 설에 따르면 마피아(Mafia)는 프랑스인의 죽음을(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의 약자라고도 한다더군요.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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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7:48
상병 이지훈
마피아에 대한 주가 아주 흥미로워요 하하 그냥 갱단을 말하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시대 배경이 이 근처인가요? 군주론을 읽으면서도 아 이게 이거지..라고 이론적인 부분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니 나오는 사람 이름도 잘 모르겠고,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나...잘 정리가 안되어서요
공화정체와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와서 비슷한 시기인 것 같아 질문드립니다. 2008-12-27
01:37:04
일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그렇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체사레 보르자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냈지요. 마키아벨리같은경우는 이탈리아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집중, 절대권력 등 근대국가의 시초가 되는 여러 사상들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기도 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중세시대에 있던 몇 안되는 이탈리아 통일론자중 한사람이였으니까요. 시대보다 일찍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2008-12-27
02:41:24
상병 이지훈
석재//
오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흐흐 체사레 보르자! 이제 기억나네요 외국 사람들의 이름이란...허허 2008-12-27
23:11:16
상병 진성제
여전히 남 이탈리아와 북 이탈리아는 사이가 안좋죠 어허허 두 지역 사람들이 만나면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라고 하네요.
마치 스페인이 카스티야(남스페인)와 카탈루냐(북스페인)가 서로 사이가 안좋은 것 처럼요.(레알과 바르샤도 덕분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라이벌이 되었구요.)
뭐 두 케이스에는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 보면 굳이 리나라처럼 아예 다른 정부가 들어선 게 아니어도 세계적으로 분열된 국가는 쫌 많은 것 같습니다. 2008-12-28
23:05:22
병장 김민규
현대 남북이탈리아의 상황에 대해서 좀더 듣고싶은건 과욕일까요? 기다릴게요. 잘 읽었습니다. 2008-12-29
10:27:49
일병 이석재
상병 진성제/ 그렇습니다. 이래저래 다른 민족끼리 한 나라로 통합되어야만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해결 못할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병장 김민규/ 죄송합니다.. 원시사와 현대사는 제가 제일 약한 부분중 하나인지라...다른분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 싶습니다. 2008-12-31
21:10:44
병장 이동석
와와- 그새 이리 많이 쓰시다니, 쫓아가며 읽기도 벅차군요. 정말 재밌습니다.
징키스칸 4가 하고 싶어지는군요. 낄낄. 사실 전 역사시뮬레이션을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한 케이스라서요. 흐흐. 2009-01-04
00:59:58
상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저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역사시뮬을 하는데 이게 무슨소린지를 알아먹어야지 원.. 지금은, 역사를 떠나 게임의 스토리만 있으면 허겁지겁 달려듭니다. 심지어는 킹오브파이터라도..낄
[연재] Side and Side- 터키와 그리스 (보론)
일병 이석재 2008-12-28 12:52:44, 조회: 101, 추천:1
사실 왠만해서는 보론을 안붙이려고 했습니다만, 이 내용은 꽤 중요한 내용이라 빼먹기는 힘들긴 해서요. (본문은 내글/후기에 Side and Side- 터키와 그리스에 나와있습니다.)
사실 현대에 와서 터키와 그리스는 다시 분쟁에 돌입합니다. 저번 본문에서는 두 나라간 분쟁이 점차 사그라든다고는 했지만, 다른 곳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곳은 동지중해의 '키프러스', 사이프러스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은 고대에서부터 동지중해 항구들에 들어가기 위한 기착지로서 많은 부침을 받아 왔습니다. 1960년까지는 이곳이 영국이 점령했다가 새롭게 독립했습니다.
이 사이프러스에서 군사쿠데타로 친 그리스계 정권이 등장하자 자기 밑에 그리스 계 정권이 들어서는걸 싫어한 터키는 섬에 군사적인 침공을 단행, 섬 북부 지역에 북사이프러스공화국이라는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게 됩니다. 이곳은 EU가 터키의 EU가입을 불허하자 터키가 병합시도를 하는 등 분쟁지역으로서 점차 비화되게 됩니다. 그리스와 터키간 군사적 충돌지역이기도 했구요.
그러나 99년 터키 지진에 그리스가 인도적 지원을 한 이후, 두 나라간 관계는 점차 완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가 사이프러스 섬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곳에 대해서는 터키가 EU가입을 완료하는 때까지는 계쏙 이런 분리상황이 계속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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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7:56
병장 이동석
오오, 이 내용은 그냥 뉴스로만 사소하게 알고 있었는데, 석재님의 설명을 들으니 맥락이 좀 보이는군요. 감사합니다. 2009-01-04
01:01:54
상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제 글에서 맥락이 잡힌다고 하시다니, 대단한 글읽기 능력이...허허
[연재] Side and SIde- 남이탈리아와 북이탈리아(2)
일병 이석재 2008-12-29 13:40:26, 조회: 113, 추천:1
북이탈리아와 남이탈리아와의 통일시도는 그동안 이루어지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외세의 세력일때도 있었고(프랑스의 침략으로 인한 통일 시도), 내부의 시도이기도 했습니다(저번에도 말했듯이, 체사레 보르자인 경우), 하지만 중세시대에 이탈리아의 통일이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각자 자신들이 ‘제노바인’, ‘베네치아인’, ‘시칠리아 인’으로 생각했지 ‘이탈리아 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탈리아 자체를 하나의 국가로 생각치 못했는데 통일을 어떻게 이루었겠습니까. 결국 그렇게 중세시대를 넘어가면서 점점 이탈리아가 주위 강국들의 먹잇감이 되자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이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자기네들도 주위 강국의 침략에 맞서 싸워서 통일국가를 세우려고 한 것이지요.
특히, 그들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나라는 사르데냐였습니다. 사르데냐는 이탈리아의 섬에서 발전해왔지만, 피에몬테 지역을 점령한 후에(피에몬테는 지금의 제노바와 북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탈리아의 독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탈리아의 독립을 가장 방해했던 세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였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무너트린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오스트리아가 전쟁보상으로 점령한 땅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주위의 동맹국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뒷나라의 프랑스였습니다.
그때 프랑스의 통치자는 자신의 숙부를 모델로 하는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선거로 인해 황제로 선출된 그는 프랑스가 대외적으로 강국임을 인정받기 위해(말 그대로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이곳 저곳 영토를 쑤시고 다녔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문제에도 개입하게 됩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 싶으니 이탈리아를 도와주긴 했는데, 사르데냐가 승승장구하자 오스트리아와 단독강화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자 카보우르의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베네치아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지만 어쩔 수 없이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 남이탈리아의 통일만을 완결짓게 됩니다.(주9)
하지만 남아있는 곳이 있었지요. 교황령이였습니다. 교황령은 중세 초기부터 교황의 통치권을 대내외 강국에게 인정받은 곳이였기 때문에 그곳을 이탈리아령으로 할 경우 다른 나라들의 압박을 받을 것이 뻔한 곳이였지요. 특히 프랑스가 반대했는데, 위의 이유와 똑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에 신경을 못 쓰게 되자 냉큼 교황과 협상, 로마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이탈리아 왕국에 교황령을 넘겨주기로 합의하게 됩니다. 이제 이탈리아도 베네치아를 제외하고 통일 완료.
마지막 남은 베네치아는, 1차대전때 확보하게 됩니다.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맺었지만, 오스트리아령인 베네치아에 너무 눈독을 들인 나머지 그들을 버리고 프랑스-영국과 동맹을 맺은 후 1차대전에 참가, 승전국이 되었지요. 하지만 이탈리아도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들은 일리리아 해안과 알바니아(일리리아는 유고슬라비아의 아드리아해 쪽 해안을 일컫는 말입니다)까지 노리면서 아드리아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삼으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실패하자 영국, 프랑스에 불만을 품고 2차대전에는 독일 편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심이 심하면 언제나 실패하는 법.
이렇듯, 근대 후반에 가서야 이탈리아는 하나의 나라로서 통합瑩嗤 북이탈리아와 남이탈리아는 각자 다른길을 걸어왔습니다. 북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남이탈리아는 주위 강국들의 침략을 견뎌내가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냈지요. 대신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이탈리아는 북쪽의 돈을 빼내 남쪽에 투자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두 지역간의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지금도 경제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두 지역간에는 불화의 씨가 여전히 남겨져 있습니다. 그 두나라를 점차 합쳐져 가는 것이 이탈리아의 현재 당면한 과제중 가장 큰 과제이겠지요.
주9-이태리 독립 3걸전- 재상 카보우르. 엠마누엘레 2세, 그리고 가리발디 이 3명을 3걸이라고일컫습니다만, 사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사용되기도 한 책입니다. 남이탈리아의 양 시칠리아왕국에서 호소 한번에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합병을 결정하게된 사건 또한 유명하지요. 이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알아보고 설명드려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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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8:15
병장 김민규
그래요. 최근 유럽에 부는 분리주의의 바람은 남북이탈리아를 더욱 불안해 보이게 합니다. 분명 밀라노와 로마는 너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고하는 방식에서나, 사람들의 기질에서나, 부산과 서울의 거리감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해를 정면으로 두고 로마에서 나폴리로 향하는 남북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느꼈던 따가운 오후의 열기만큼이나 호탕하고 쿨한 남쪽 사람들에게 반했던 저이지만, 북쪽의 냉철함에 밀려버리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지요. 발칸이, 스페인이, 독일이, 이탈리아가, 아일랜드가, 그 거리감을 어떻게들 메우며 하나의 국가론을 세울지 십년후가 궁금해지는 요즘입니다. 2008-12-30
09:23:57
상병 이지훈
민규//
최근에 부는 '분리주의'라는 것이 단순히 EU에 대한 반대 개념의 것인지 아니면 아예 서로 다른 국가로의 독립을 하자는 개념인지 궁금해요. 저번에 제 독서후기에 답글 달아주실 때 질문했어야 하는데 지금에서야 하네요. 아 건망증. 2008-12-30
17:43:30
병장 김민규
EU와는 별개로 돌아가는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분리주의는 실재實在하는 것들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봅니다.
EU가 사실 실리를 위해 끼워맞추어진 관념적 연합체라면 국가는 보다 실질적이고 전통적인 하나의 주체로서 기능해 왔죠. 불과 몇십년 전의 2차대전에서 총부리를 겨누었던 나라들이 EU헌법을 논하는 것을 보며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실제 개인의 삶을 규제하고 문화적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 형법이나 민법같은 것을 EU공통으로 제정한다고 했으면, 이에는 마약이니 낙태니 온갖 세세한 이슈들로 잔말이 엄청 많을건데, 인간의 존엄 내지는 민주주의같은 대전제를 다루는 비교적 관념적인 주제의 <헌법>이니까, (비록 아직도 제자리에 머물러있기는 하지만) 말이라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유럽사람들은 EU의 단맛을 많이 보고 있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다지 손해되지도 않는 EU Citizen의 지위를 특별히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국가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 않던가요. 뜻하지 않게 그 나라 국민이 되어버린 민족들도 많은 동네 아닌가요.
카탈루나와 마드리드가, 바이에른과 베를린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북아일랜드의 IRA와 본섬의 브리티시의 경우들이 공유하는 공통점들이 있죠. 종교적 차이, 한쪽의 경제적 우세, 민족 내지는 문화적 차이. 이중 일부만 해당하는 경우도 있고 모두를 다 포함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핵심은 '뜻 맞고 잘 어울리는 우리끼리 그냥 살게 내버려 두렴', 이 아닌가 해요. 어차피 국경의 의미가 퇴색되고 예전만큼 국적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도 아니니, 게다가 먹고사는데 별 애로사항도 없는데 괜히 다른 동네에 퍼줘야 하는 것 같고, 그냥 우리 좀 건드리지 마셈!
댓글로 쓰자니 횡설수설같아 찜찜하기는 한데, 여간 10년 후 이것이 어떤 형태로 변형되어 갈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고,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호기심이 마구 자극되고 있습니다. 허허 2008-12-30
22:16:18
일병 이석재
병장 김민규/ 현대 유럽의 세계도 중세나 근세만큼이나 참 재밌는 곳인거 같습니다. 따로 또 같이라는 어디서 나온 말이 기억나는군요. 비록 영토분쟁은 옛날보다 적어지긴 했지만, 그만큼 경제적인 문제, 이민자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는듯 싶습니다. 종교, 문화적 차이도 계속 발생하고 있지요. 이래저래, 근대 외교사를 전공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긴하지만 '사실'이란 참 재미있는 것들인거 같습니다. 2008-12-31
19:06:33
병장 이동석
이탈리아 통일 과정은 언제봐도 흥미로운것 같아요. 흐흐.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2009-01-04
01:06:03
상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흥미로운 주제지요. 민족주의 바람에 한꺼번에 항복이라, 멋진 나라입니다.
[연재] Side and Side- 프랑스와 벨기에
일병 이석재 2008-12-31 21:08:15, 조회: 144, 추천:1
이번 Side and Side 시리즈물은, 어떤분의 요청대로 프랑스와 벨기에, 어찌보면 참 안맞는 두나라에 대해서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프랑스 역사보다는 벨기에 역사에 더 치중하지 않나 싶군요. 프랑스 역사는..하나의 글로 쓰기엔 너무나 방대하거든요.
사실, 벨기에는 예부터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 강대국으로서 부상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페인등을 넘나들며 통치를 받다가 결국엔 독립하긴 했는데… 독립 이후엔 자이르 하나 먹고서 땡입니다. 그 자이르도 자신이 점령한게 아니라, 어쩌다가보니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에 중립지대 하나 놓고 싶고, 그렇다고 자이르를 독립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름대로 유럽국가인 벨기에가 식민지 하나 없이 빌빌거리길래 여러 강대국들과의 협의 끝에 자이르(지금의 콩고)를 넘겨준 것입니다.
하여튼, 벨기에가 전격적으로 역사에 나오기 시작한 때는 100년전쟁때였습니다. 영국과 플랑드르(벨기에 지역을 의미합니다)는 경제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는데, 영국에서 양모를 주면(주1) 플랑드르지역에서 그걸 가공해서 면직물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다보니 플랑드르지역은 프랑스의 가신이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더 가까웠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영국의 플렌테저넷 왕가(주2)가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주3)와 전쟁을 벌이는 100년전쟁에 가서는, 플랑드르지역은 오히려 영국에 붙게 됩니다. 남쪽의 부르고뉴또한 프랑스인으로서 영국에 붙어서 전쟁을 진행하는 데요. 왜냐하면 부르고뉴의 영지중 하나가 플랑드르 지역이였기 문이지요. 그래서 프랑스는 이때부터 플랑드르인들에게 원한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못해준게 뭐가 있다고! 이러면서 말이죠. 하지만 플랑드르는 나름대로 영국하고 전쟁하게되면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몰락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게 되버리니까요. 결국 영국은 플랑드르를 통해 영국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프랑스 침입의 교두보로서 활용하게 됩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100년전쟁은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유럽 본토 내의 영국령은 칼레로 축소되었으며, 플랑드르는 다시 프랑스 령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르고뉴가 전쟁에서 졌더라도 가문의 영토는 함부로 뺐을 수 없는 법이지요. 결국 부르고뉴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또 다시 나오죠? 원래 유럽 역사란 이렇답니다) 에게 넘어가면서 이젠 벨기에는 스페인의 역사에 편입되게 됩니다.
사실 이 합스부르크 왕가라는게 참 웃긴게, 사실 슈바벤의 작은 영지만을 다스리던 가문이였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외가는 스페인 왕가, 친가는 오스트리아 왕가가 되버린겁니다. 그 친가와 외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카를 4세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죽자…영토가 장난아니게 늘어나버린 겁니다.
그렇게 벨기에는 카를 4세의 영토(사실, 카를 4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였다가, 카를 4세가 자신의 동생에게는 오스트리아를, 아들에게는 스페인을 넘겨주면서 벨기에 또한 스페인 영토로서 존속하게 됩니다. 물론, 네덜란드또한 덤으로 넘어오게 되지요.
하지만, 벨기에 인들 입장에서는 스페인 인들이 맘에 안들었습니다. 벨기에나 네덜란드는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돈을 좀 안좋게 보는 카톨릭보다는 돈을 버는 행위또한 신에게 봉사하는 행위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이념에 더욱 잘 맞았던 것이지요(이걸 누가 말했더라…기억이 안나는군요. 혹시 아시는 분 제보바랍니다). 그런데 저 먼나라 사람들이 “카톨릭을 믿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라고 나서니 네덜란드랑 벨기에는 짜증이 확 치솟는 겁니다. 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스페인에게 독립을 요구하게 되고, 이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스페인은 바다쪽으로 접근하는게 빠르긴 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제해권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바다쪽으로는 접근을 못하고, 스페인, 프랑스 남부, 스위스, 독일을 거치는 긴 거리를 보급로로 선택해야만 했습니다(물론, 이쪽 모두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독일은 스페인의 보급로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였고, 이에 나중에 30년 전쟁에 스페인이 끼어들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뭐 이건 이렇고…왜 두나라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스페인까지 끼어들게 되는거지 …
역시 아시다시피, 스페인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북부의 6주를 네덜란드로 독립시켜 주게 됩니다. 남부의 나머지 주들은? 스페인의 영토로서 존속하게 되지만, 강력한 자치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자기 윗동네가 독립했는데 자기라도 독립 못할쏘냐! 라고 나온다면 스페인 입장에선 더욱 난감하니 이 정도로 절충한 것이지요.
하지만 스페인은 다시 벨기에의 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벨기에를 프랑스의 영토로, 네덜란드를 자신의 동생에게 넘겨준 것이지요. 이때부터 프랑스의 벨기에 사랑은 계속됩니다. 프랑스는 예로부터 벨기에는 자신의 영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생각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벨기에는 네덜란드 왕국으로 통합榮鳴 다시 분리되긴 했지만,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 또한 벨기에를 호시탐탐 노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젠 프랑스 주위국가들이 프랑스의 확장을 그냥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벨기에를 점령해서 자기 배 채우겠다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영국도 반대했고, 독일은 더욱더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무리하게 벨기에를 점령하려고 했고, 이는 주위 국가들이 프랑스를 바라보는 눈을 안좋게 만들게 된것입니다. 결국 보-불전쟁때 주위 국가들이 수수방관만 했던것도, “프랑스가 벨기에를 먹는것보다얀…”라는 생각으로 주위 국가들이 생각했기 때문이였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거죠.
그동안 벨기에는 네덜란드 왕국에서 독립한 이후 어디선가 레오폴드 1세를 끌어와서는 입헌군주국을 세웁니다.(주4) 레오폴드 1세는 나름 왕이 좀 영토도 넓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나라의 80배가 넘는 자이르(콩고)지역을 식민지로 삼게 된 것이지요. 위에서 말한것처럼 주위 나라들이 좀 도와준게 있긴 하지만, 왕 나름의 외교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였겠지요. 하지만 벨기에의 통치 능력은 최악이여서, 지금까지도 자이르는 자원부국임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나 남아공처럼 아프리카내에서 좀 이름날리는 국가가 아닌, 내전으로 점철된 국가가 되버렸습니다. 이래저래 수탈의 역사가 낳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벨기에는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잘살아 먹겠다고 했는데, 이젠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이 건드립니다. 1차대전, 2차대전시 독일의 전략은 애초부터 네덜란드, 벨기에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독일이였습니다. 1차대전때는 독일이 벨기에를 침략함으로서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현상을 낳기도 했지요, 벨기에는 독립 이후에 ‘중립국’을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중립국을 공격하게 되면 외교적으로 지탄을 받기 마련입니다.
하여튼, 양차대전간 벨기에의 역사는 암울 그 자체였기 때문에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 1970년대까지 자이르의 통치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긴 하군요. 결국 2차대전 이후 벨기에는 완전한 국가로 다시 독립했고, 나중엔 룩셈부르크를 독립시켜주어야 했습니다. 사실 벨기에가 빛을 발했던 시기는 별로 없는듯 싶군요.
하지만, 지금은 양 나라가 분열의 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벨기에 남부지역과 북부지역간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심하기 때문이지요. 벨기에 남부지역은 카톨릭, 프랑스어 지역권인데 반해 북부지역은 기독교, 네덜란드어 지역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다른 두 지역 사람들간의 감정의 골이 깊습니다. 그 수준이 저희 북한과 남한을 바라보는 정도니, 좀 심각한 정도입니다.(주5) 오죽하면 남부와 북부과 분리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겠습니까. 벨기에에서는 이런 이유로 정권을 세우기가 좀 힘들다고 합니다.
사실 프랑스-벨기에 중심적인 역사로 진행하려고 했습니다만, 벨기에의 역사가 워낙 주위 국가들의 이런저런 침략을 많이 받다 보니 프랑스는 커녕 ‘벨기에의 역사’가 되버린듯한 느낌입니다. 현재의 벨기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3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사실 프랑스가 벨기에를 안좋게 보는 이유는, 옛날엔 자신의 밑에서 빌빌거렸고, 별로 내세울것도 없는 나라인데 EU본부가 있는가 하면 EU의 정치적인 중심지로서 현재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아니꼬워서, 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이제 외교적 승리만 성공하면 되는것인가요?[퍽]
주1-양모: 영국에서 양모는 나중에 산업혁명시기 아주 중요한 자원이 되지요, 중세시대부터 이미 영국은 양모로 유명했습니다. 이탈리아지역은 면직물, 벨벳으로 유명했습니다.
주2-플렌테저넷: 이름만 영국식입니다, 그러나 실제 왕가는…한때 남이탈리아를 정복했던 앙주가문이 영국으로 넘어가서 왕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나라 왕가가 영국에 가서 이름을 바꾸는 게 흔했는데요, 예를 들어서 노르망디의 노르만 세력이 영국으로 건너가 정복하지를 않나, 독일의 하노버가문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지금의 영국 왕실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래저래 영국 자체 사람들이 왕가를 세우기가 힘들었는지 원…
주3-발루아: 프랑스 카페-발루아-부르봉 왕조로 이어지는 중세 프랑스 왕조의 중간단계입니다. 떼루아가 아닙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칙령을 발표한 앙리 4세가 발루아 왕가의 시조입니다. 영국은 프랑스의 왕에게 서신을 보낼 때 “발루아 가의 가주에게” 라는 식으로, 프랑스의 왕권을 부정하는 바람에 두 나라가 결국 100년전쟁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영국의 플렌테저넷 왕가(앙주 가문)도 카페왕조 이후에 프랑스 왕가를 이어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가문 혈통따지면 골치아파지기 시작하는군요.
주4-가문 끌어오기: 사실,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독일의 하노버 왕가는 영국의 명예혁명이후 영국에서 새롭게 ‘영입’한 왕가였기 때문이지요. 1차대전 이후 독일색을 싫어한 나머지 가문 이름을 바꾼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주5-분리독립: 유럽내에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나라들은 많습니다. 예를들어 스페인과 바스크, 남,북 이탈리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이지요. 각자 문화적, 종교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최대한, 유혈 사태를 막는 것이 제가 되고싶은 외교관들이 할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8:24
상병 이지훈
꾸준하시군요
2009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잘 보고 있습니다 2009-01-01
14:42:38
병장 김민규
꺄아, 읽으면서 이런 눈물이..... 잘 읽었습니다.
낄낄, 벨기에 아저씨들 생각하면 프링글스가 먼저 떠올라요. 뭔가 어수룩한....
그나저나 벨기에에도 분리독립의 바람이 있는줄은 미처 몰랐네요. 말이 국경이고 나라지 워낙 섞여있는 분자들이라서 불씨는 항상 존재하나봅니다. 허허 2009-01-01
19:07:30
상병 이석재
상병 이지훈/ 09년에도 열심히 써야지요. 이제 다른 주제를 들고 나올때가 된듯...?
병장 김민규/ 어이쿠 이런 눈물까지... 사실 유럽에 속해있는 민족들은 많지만 그 많은 민족들이 다 독립하지는 못해서 생긴 문제겠지요..? 2009-01-01
20:12:54
병장 이동석
와와- 플랑드르 지역이었군요. 제가 얼마전엔가 예시로 써먹을랬다가 기억이 안나서 말아먹었던 기억이.
먼나라 이웃나라-만큼이나 재밌는 역사 기행입니다. 재밌는데다가 알찹니다. 2009-01-04
01:40:01
상병 이석재
병장 이동석/ 아니 이렇게 제글에 리플을 많이...허허, 아직 먼나라 이웃나라만큼에 도달하진 못했습니다. 과찬이세요
[연재] Side and Side- 미국과 멕시코
상병 이석재 2009-01-01 17:41:13, 조회: 203, 추천:0
갑자기 삘이 받으면 하루에 한작품씩 올리게 됩니다. 벌써 Side and Side 연재물도 보론을 제외하더라도 7번째 글이로군요. 의외로 장수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자화자찬]
사실, Side and Side에 나오는 나라들은 ‘라이벌’ 정도로 불릴 수 있는 나라들을 주로 적습니다. 한 나라의 스토리에 편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지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엔 강대국으로서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고, 두 나라간 균형이 안맞다 보면은 프랑스-벨기에 처럼 한나라 스토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벨기에 쪽에 관련된 것을 쓸 거리가 별로 없거든요!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스토리에 관해서 적으려고 하면 아프가니스탄의 암울했던 역사들을 주로 나열해야 합니다. 인도는?... 사실 두나라간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영국 식민지였다. 정도밖에 없겠군요.
이번엔 서글이 좀 길었군요… 이번에 써내려갈 두 나라는 유럽을 잠시 벗어나서, 멕시코와 미국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나라도 나름 재밌는 스토리이니까요. 멕시코 입장에서는 극구 부인을 하겠지만….
미국과 멕시코는, 모두 ‘외국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은 ‘인디언’들이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오만한 이름으로서 건국하게 됩니다. 멕시코 또한 마야 문명에 의해 발전하고 있었지만 단지 수백명에 달하던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멸망하고, 스페인에 의한 지배 체제를 확립하게 됩니다.
미국의 역사는 잠시 건너뛰고,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만 설명하자면, 루이지애나 주의 점령입니다. 루이지애나 주는 원래 프랑스의 영토였지만,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전쟁할 비용을 벌기 위해 이곳을 영국에게 값싸게 판매합니다(주1)
멕시코는 멕시코 나름대로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실 멕시코에 정착한 유럽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스페인에 정착한 유럽 지주들은 스페인의 간섭을 싫어했습니다. 자신들이 땅을 가지고 있는데 자꾸 간섭한다는 이유에서였지요. 그러다가 스페인정부가 뒤집히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인 것입니다(주2)
그러다가보니 멕시코의 지주들은 독립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상관이 이미 유럽에서 너무나 바빴던 탓이지요. 결국 멕시코는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게 되고, 그 영토는 캘리포니아서부터 남쪽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영토를 장악하게 됩니다. 통치자들은 대체로 유럽에서 건너온 지주들(크리올)이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원주민 나름대로 유럽인 지주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멕시코가 독립한 이후에도 멕시코의 전체적인 정치체제는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미국과 멕시코가 격돌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텍사스’의 독립이였습니다. 텍사스는 멕시코령이였지만, 미국 쪽에서 이주민들이 넘어오면서 그쪽에 텍사스라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게 된 것이지요. 멕시코는 텍사스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했지만 10년동안 점령하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텍사스는 미국에 병합되기를 바랬고, 미국도 그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지요.(주3)
결국, 텍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미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멕시코간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바로 멕시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멕시코는 수도인 멕시코시티마저 미국에게 점령, 패전하게 되고 조약을 통해 멕시코의 국경을 리오 그란데강 이남으로 확정하게 됩니다. 멕시코 영토의 거의 반에 이르는 캘리포니아, 뉴멕시코의 영토를 모두 미국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텍사스의 경우처럼 이 영토에도 노예주(노예를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주)이냐, 자유주(노예제를 금지하는 주)이냐에 대한 문제가 미국에게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 새로운 영토에 대한 문제는 후에 남북전쟁에 대한 단초가 됩니다.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 패전 이후 원주민들이 권력을 잡게 되지만, 내전과 전쟁등으로 외채 상환이 불가한 상황이 되자(주4) 프랑스, 영국등이 멕시코에 침입하여 멕시코에 괴뢰정권을 세우게 됩니다.(주5) 결국 프랑스는 패배하고 멕시코는 독립국가로서 존속하게 되지만, 멕시코는 외채상환으로 인해 자신들의 자원을 거의 외국에 퍼다주게 되는 상황을 만들게 되버립니다.(주6)
멕시코와 미국은, 심지어 미국이 남북전쟁 속에 빠져들었을 때에도 조용히 지내지만, 1차대전때에 다시 붉어지게 됩니다. 사실 미국이 피해의식은 좀 센탓이였긴 했지만..
문제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은 1차대전중 미국이 계속 영국에게 군수물자를 지급해주는것에 열받아서(사실 자기 아버지뻘이니…) 익히 아시다시피 무제한 잠수함 작전등 미국을 대전에 끌어들이는 바보 같은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독일 입장에서는 미국이 군수물자를 팔든, 전쟁에 병사를 투입하든 다를바가 없었겠지만 미국입장에서는 두 입장은 완전히 다른 입장이였지요. 그렇게 미국의 여객선들마저 잠수함에 당하게 되자 미국 언론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미국의 대통령인 윌슨은 그때까지 유럽에 최대한 간섭을 자제하려고 했지요(주7)
하지만, 독일의 미국대사에게서 날아온 전보가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게 됩니다. 이 전보의 내용은 멕시코에게 켈리포니아, 뉴멕시코등 전쟁에서 잃게 된 땅들을 다시 찾게 해주는 대신, 미국을 공격해 달라고 한 것이지요. 정작 멕시코가 이 전보에 대해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전보의 내용이 미국 언론에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윌슨 입장에서도 더 이상 유럽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던 것이지요. 결국 멕시코도 미국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독일은 이래저래 전보 한장 때문에 적을 더 늘린 셈이 되버렸지요.
그 뒤로 멕시코와 미국은 전쟁 같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국입장에서는, 멕시코의 가난한 사람들이 국경을 자꾸 월경해서 자신들의 땅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지요. 비록 캐나다-미국-멕시코간 자유교역협정을 맺었지만 멕시코의 경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국 경제에 예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서는 국경을 넘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자 하는 멕시코 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재밌었던건 영화 ‘투모로우’에서 미국인들이 오히려 역으로 멕시코로 월경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요. 결국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1-루이지애나 주: 프랑스는 이후에 캐나다에서도 축출당하게 되고, 아메리카 전체에 프랑스령이라고는 서인도제도의 몇 개의 섬정도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프랑스의 식민지는 이후 아메리카보다는 동남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많이 치중하게 됩니다.
주2-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왕가를 뒤집어 엎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에 등극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했지만, 스페인의 왕가는 그대로 존속하게 되어 스페인은 후에 ‘부르봉 왕가’로서 왕조가 바뀌게 됩니다.
주3-텍사스: 미국이 텍사스를 점령 못했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텍사스가 ‘노예주’였기 때문이지요. 북부는 노예주인 텍사스가 들어오게 되면 남부에 힘을 실어줄게 뻔하기 때문에 반대했고, 반대로 남부는 텍사스의 영입을 통해 새롭게 주 하나를 얻는 것이였기 때문에 대환영을 했습니다. 북부와 남부가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텍사스가 아무리 미국을 바랬어도 병합하는데 10년이나 걸렸던 것이지요.
주4-국가 파산(판데모니엄): 국가가 파산하게 되면, 대체로 ‘받아들여주는’나라들도 있지만 ‘전쟁을 불사하는’나라들도 있습니다. 판데모니엄을 선언한 국가는 1930년대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부터 현대의 아르헨티나 정권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파산을 선언하게 되면 채무는 없어지게 되지만 국가의 신용도는 급격히 하락하여 아무도 돈을 안빌려주려고 하겠지요.
주5-괴뢰정권: 이때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주도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편과 프랑스편, 독일편에도 얘기했었지만 자신의 숙부를 닮아 프랑스를 대외적으로 위신을 높이는데에 애를 썼습니다. 이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얘기하는데, 결과적으로 독일에 패배하고 황제위에서 물러남으로서 모든게 물거품이 되버렸지요. 하여튼, 이때 괴뢰정권의 수장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아 대공을 보고싶으시면, 진중문고중 ‘위대한 패배자’에 보시면 잘 나와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거 같습니다.
주6-과테말라 총독령: 사실 멕시코가 멕시코 남부의 중미 지역을 차지한 적이 있었지만, 반란으로 인해 분리,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구성했지만 다시 분리하여 지금의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주7-먼로주의: 저번에도 먼로주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지요? 역사란 다 이렇게 얽히는 것입니다. 미국은 먼로주의를 주장하며 아메리카에 대한 간섭을 막았지만, 역시 자신들도 유럽에 얽히는 것을 반대해 왔습니다. 자기내들끼리 잘먹고 잘 사려고 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보니 유럽에서 1차대전이 진행되도 미국은 물자만 팔면서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8:33
병장 김민규
멕시코가 초반러쉬로 강하게 나갔더라면, 그래서 현 미국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면, 지금과는 또다른 모습이 되었겠죠?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지만, 이래저래 강자독식구조에서 약삭바름이 지혜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2009-01-01
19:13:28
상병 이석재
병장 김민규/ 멕시코 입장에서는, 미국하고 전쟁을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겁니다. 애초부터 텍사스는 미국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지역이였기 때문이지요. 주위 국가들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병합해서 없던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였습니다. 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이 미국인들이였기 때문에 문제였지요. 나중에 독일이 게르만 민족을 통일한다고 체코의 주테텐란트 지역을 요구한 것은 이와 비슷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군요. 2009-01-01
20:11:03
상병 김세현
아 재미있습니다 진급을 축하드립니다 2009-01-01
21:13:44
상병 이석재
상병 김세현/ 허허, 제 진급을 알아보시다니 감사합니다. 재미있다고 하는 댓글 하나가 저를 춤추게 합니다 2009-01-01
22:37:44
병장 홍석기
몇 가지 발뱀 붙여봅니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매입'이란 단어가 조금 그렇지만) 나폴레옹이 영국에 판매한 것이 아니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이 나폴레옹에게 일정 금액을 주고 '매입' 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캐나다에서 쫓겨난 것은 이 사건보다 이전의 일 (미국 독립 이전)으로 알고 있고요.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 매입' 이라 하면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뉴올리언스 주변의 땅) 이라고 혼동할 수 있는데, 그 당시 매입 대상이었던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강 유역 대부분, 즉 현재 플로리다에서 텍사스 사이의 모든 지역- 대부분의 미국 중서부 지역(라고 쓰지만 사실 중동부 지역이죠)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텍사스의 병합이 남북전쟁의 단초가 되었다는것은 좀 비약이 있네요. 노예주/자유주 문제는 1850년의 '미주리 타협' 때 (미주리/캔자스의 분할을 놓고) 정점을 달렸던 문제입니다. 당시 나름 짬 찬 상원의원이었던 헨리 클레이가 땜빵안을 가지고 묶어놓긴 하지만, 멕시코와의 전쟁 후 캘리포니아를 놓고 다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던 (텍사스는 노예주로 결론내렸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9-01-02
09:15:31
병장 홍석기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윌슨은 '먼로주의'를 주창한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물론 제 기억의 정확도는 매우 떨어집니다만). 당시 미국의 '먼로주의'는 스페인과의 전쟁과 함께 이미 깨진 상태였죠. 그리고 '먼로주의'는 지금처럼 영향력있는 발언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1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3류 국가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죠.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개입하지 마라-와 같은 대담한 소리를 큰소리 떵떵 치는 미국에 유럽 국가들이 반응하지 않은 것은 단지 '나 용용초등학교 6학년 짱인데 우리동네 출입하지 마라' 라는 초딩에게 무플로 일관한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09-01-02
09:27:32
상병 이석재
병장 홍석기/ 1. 루이지애나 매입이 '영국'에게 했다는 것은 제가 잘못 표기한 부분이군요. 미국이 맞습니다. 왜 제가 영국으로 했는지.., 그 전의 캐나다와 영국을 생각하면서 쓰게 된거 같습니다. 프랑스가 캐나다에서 i겨난건 제가 노템전으로 하다보니 기억을 차마 못했군요. 루이지애나의 자세한 설명 또한 감사드립니다. 제가 그걸 놓치고 표기를 하지 못했네요.
2. 텍사스의 병합에 대해서는 제가 좀 잘못 알았던 것 같습니다. 노예/자유주 사건이 텍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켈리포니아 쪽 얘기였꾼요.
3. 스페인과의 전쟁또한 시간의 전후를 잘 기억하지 못해서 일어난 오류군요. 먼로주의가 영향력 없던 발언이라는 것또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구요. 이런 뱀발 너무 감사드립니다. 사실 미국이 그렇게 얘기했어도 프랑스는 멕시코와 쿠바에 개입했으며, 스페인 또한 계속 남미지역을 차지하고선 미국의 얘기는 저 멀리 흘려보내긴 했죠. 2009-01-02
12:28:58
병장 김민규
이런 넘치는 두분의 포스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책마을의 춘추전국이 밝아 옵니다. 2009-01-02
14:21:20
병장 이동석
낄낄낄, 아 재밌어라. 따지고 보면 미국이 지금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것도 불과 몇년만의 일인데 미국의 발전사-식민지 독립국은 어떻게 제국이 되었는가-에 대해 공부해보는것도 재밌겠군요.
그리고 멕시코는 생각하면 할수록 여간 안습. 2009-01-04
01:49:34
상병 이석재
병장 김민규/ 포스라니. 전 아직 부족할 따름이지요.
병장 이동석/ ..역시 멕시코는 생각하면 할수록 여간 안습이긴 합니다. 미국을 견제할 나라로 클 수 있었는데... 허허 2009-01-04
22:30:11
일병 김유현
흐음.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미국사는 공부해둬야겠습니다. 일리노이 대화재도 그렇고,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군요.
국가 파산이 판데모니엄이라는 부분에서 뿜었습니다. 비록 모라토리엄이 한참 생각나지 않아 이리저리 뒤적거려 찾아내긴 했지만서도.
[연재] Side and Side- 폴란드와 러시아
상병 이석재 2009-01-03 13:04:53, 조회: 137, 추천:1
이번글을 마지막으로 Side and Side 의 연재를 잠시 중단하고자 합니다. 자료가 많이 부족하기도 했고, 처음 시작한 Side and Side란 연재물을 통해 제 자신이 궁에 입궁한 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었는지 지표로 삼기도 했거든요. 이제 설탕을 먹을때도 책마을에서 쓸 거리를 찾아야 할 테니, 이래저래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이제 제 자신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아시는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해서, 이제 휴식기를 좀 가지고 다음 연재물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다음 작품엔 더 많은 반응들을 이끌어 내기위해, 더 많이 노력을 하고 있겠습니다. 물론, 가끔씩 번외편으로 Side and Side를 쓸 생각입니다.
이번엔 폴란드와 러시아라는, 어찌보면 안어울리는 두나라에 대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아, 두나라는 붙어있지 않다고요?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두 나라는 국경을 딱 붙고 지내고 있었답니다. 지금도 따로 떨어져있는 러시아령(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군요.) 이 폴란드랑 붙어있습니다. 그러니 이웃국가로 하죠 뭐[휙휙]
러시아 같은 경우는, ‘루스’ 족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노보고로트 공국 등을 세우면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심심하면 비잔틴 쪽으로 남하하면서 비잔틴 인들을 괴롭혔고, 결국 비잔틴 제국은 윗동네에 황제의 딸을 주기도 하고, 종교로서 포섭하기도 합니다(주1)
폴란드는? 폴란드 같은 경우는 기독교를 채택했습니다.(주2). 사실 폴란드 왕국 자체는 그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나라를 세운, 평범한 스토리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를 채택했음에도 같은 기독교 인들인 튜튼기사단(주3)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튜튼기사단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물리친 이후에는, 그들을 지금의 독일 베를린 지역으로 후퇴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영향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사실 이때의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결혼을 통한 합병(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을 통해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르던 때였으니까요. 이때 바로 지동설을 주장하던 코페르니쿠스가 이 폴란드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간 확장시기때는 서로 싸울 일이 없었지만, 폴란드가 여러 외침과 왕조의 교체로 인해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얘기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절대군주국이 아닌 귀족정에 왕은 선거제로 뽑기 시작한 것이지요. 옆나라 신성로마제국처럼 말입니다. 귀족정의 최대 단점은, 결합이 어렵고 서로간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점이였지요. 결국 왼쪽에서 점점 성장하는 프러시아와, 북쪽의 강국인 스웨덴, 동쪽에서 다가오는 러시아 3국에게 포위당하는 형상을 띄게 됩니다.
폴란드는 그때까지 남쪽에서 다가오는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해야 하기도 했고, 나중엔 북쪽에서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스웨덴 왕국에게 수도인 바르샤바 마저도 빼앗기고 러시아와 동맹을 파기, 스웨덴의 종속국이 되버리죠. 그때부터 폴란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러시아 나름대로 노보로로트 공국에서 모스크바 공국, 키예프 공국등으로 바뀌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러시아 왕국을 구성하지만, 그 사이에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리운 몽고의 침략을 받기도 했습니다.(주4) 그 뒤로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러시아 왕국이 점차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역시 폴란드를 노리게 되죠. 북쪽과 동쪽은 너무 춥고, 남쪽은 오스만이 버티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건드리기가 어려웠으니까요.
폴란드가 스웨덴에게 종속당하긴 했지만, 스웨덴과 러시아의 북방전쟁(주5-1)으로 인해 폴란드는 스웨덴의 종속을 버리고 다시 러시아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 헝가리 등이 계속 괴롭히는 바람에 세력은 점차 약화, 결국 러시아에 종속당하는 결과를 맺게 됩니다. 이때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대해 1차분할이 이루어 지는데 러시아는 리투아니아령을 통합하게 되지요.
나중에는 2차,3차분할에 의해 폴란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사실 그 3차에 걸친 분할에 역사를 다 쓰자면 이건 폴란드의 역사가 되버리기 때문에 이정도로 축약하도록 하겠습니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대해 계속 저항을 하게 되지만, 폴란드인들이 독립하려면 나폴레옹, 나아가 1차대전 후까지 기다려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폴란드(바르샤바 대공국)을 기반삼아 러시아를 침공했지만,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불태우면서까지 나폴레옹을 격퇴하고야 맙니다. 폴란드 인들은 나폴레옹을 믿고 러시아를 배신했지만,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겨버리는 바람에 다시 러시아에 종속되게 되고, 다시 암울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였습니다. 결국 1차대전중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폴란드는 독립의 기운을 잡게 되었고(주5) 1차대전 종료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새롭게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독일이였지요. 새로운 폴란드는 원래 자신들의 영토가 러시아에 많았지만, 서쪽으로 이동하여 독일인들의 땅에 자리잡게 됩니다. 특히 독일의 고향(튜튼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동프로이센을 육로에서 끊어버림으로서(단치히 회랑) 독일인들의 민족주의를 다시 불붙이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네들의 생활권인 동프로이센을 걸어서 못간다는, 뭐 그런이유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독일은 단치히 회랑을 요구하다가 폴란드와 전쟁, 2차대전의 시작을 알립니다. 폴란드는 독일과 싸우려고 했지만 그 유명한 기병대-탱크(주6)끼리 붙는 처참한 결과 등으로 바르샤바는 점령당하고, 오히려 소련까지 동쪽에서 침입, 폴란드는 동서로 분할되게 됩니다(주7)
2차대전 종료후, 폴란드는 독일령인 동프로이센마저 승전국들에 의해 포함되어서 새로운 폴란드 공화국이 등장합니다. 이때까진 암울한 역사였지요. 자신을 분할한 사람들에 의해 땅 이름인 폴란드(Polska)마저도 못부르는 정도였으니까요. 겨우 독립하긴 했지만 소련의 공산주의 바람에 의해 소련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런 저런 것들로 인해 폴란드인들은 한국인들의 역사를 볼때마다 자신들과 비슷하다, 라고 느낀다고들 하더군요.
폴란드는 그렇게 공산당의 통치 속에서 소련의 간접통치를 받게 됩니다. 물론 민주화 운동도 있었지만 프라하의 봄(주8)처럼 탄압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이 무너지난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에 의해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지요. 그때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 인이였기 때문에. 교황 입장에서는 폴란드의 민주화를 도와주는 입장이였습니다. 그만큼 폴란드의 민주화는 꽤 쉽게 풀린 편이였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없이 민주화에는 피가 수반된다는 점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지금의 폴란드는, 러시아보다는 독일하고의 문제가 더 많습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폴란드 인들이 불법으로 독일 국경을 넘어 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폴란드 자체도 옛날 러시아보다는 서유럽, EU에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현재 폴란드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원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폴란드를 강점하고, 냉전시대에 이르러서는 폴란드를 자신의 수하국으로 삼았던 역사는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중부유럽의 대강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역사는 쉬이 잊혀지지 않을테니, 앞으로 그때보다 더욱더 발전한, 폴란드를 보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가스도 잘 팔아먹고 있으면서 뭘...[랄랄[
주1- 포섭: 비잔틴 황제의 딸이 러시아에게 팔려간(??) 이후, 그뒤로 러시아 땅에는 그리스 정교가 전파되기 시작하고, 결국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왕이 그리스 정교로 종교를 선택함으로서 포교는 절정에 다다릅니다. 유명한 일로는 비잔틴 제국의 키릴 형제가 포교를 하면서 포교하기 쉽게 문자를 창제했다고 하는데, 이게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키릴문자라고 합니다. 비잔티움의 멸망 이후에는 모스크바가 ‘제 3의 로마’로서 그리스 정교의 중심지가 되어 있습니다. 역시 러시아 대통령이 그리스 정교의 수장입니다.
주2- 기독교 채택: 그들이 기독교를 채택한 이유는 교황의 포섭때문이였습니다. 교황은 옆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둠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세력은 저번 이탈리아편에서도 얘기했다시피 사이가 안좋았으니까요.
주3- 튜튼기사단: 저번에도 설명한 듯 싶군요. 독일과 오스트리아편에 나왔었지요? 그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이민족들 뿐만이 아니라 폴란드령까지 같이 노렸습니다. 물론 폴란드는 자신의 왕국을 보존하기 위해 튜튼기사단과 싸워야 했지만, 같은 기독교인이 싸우는 것을 보며 모든 전쟁이 종교적 이유에서만 의해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4-타타르의 멍에: 러시아가 몽골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던 2세기동안을 가리킵니다. 타타르는 몽골족들을 가리키는 용어지요. 사실 이 용어도 러시아인들이 아닌 비러시아인들이 역사를 기록하면서 만든 용어입니다. 러시아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자신은 유럽인인데 아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한 역사였으니까요. 결국 나중에는 몽고족들의 내란을 이용하여 러시아인들은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게 됩니다.
주 5-1: 북방전쟁: 스웨덴과 러시아간에, 북유럽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전쟁을 일컫습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초반 승기를 잡아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 내부의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 궁극적인 승리는 러시아에게 돌아갔고, 결국 스웨덴은 발트해의 입구를 러시아에게 내주게 됩니다. 이후부터 러시아의 바다사랑은 시작된 것이지요. 이후에 스웨덴은 30년전쟁에서부터 하락하기 시작한 국세를 더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주5- 러시아 혁명: 러시아에서 소련으로 바뀌면서, 레닌은 러시아가 불법적으로, 또는 무력으로 점령한 나라들이나 지역들에 대해서는 거의다 독립을 시켜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스탈린하고는 대비되는 방향이지요. 레닌 입장에서는 괜히 거추장스럽고, 독립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굳이 끌고가기보다는, 러시아 자체 내에서의 혁명을 더욱 완성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6-기병대-탱크: 혹시 그림을 보신 분들이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진격하는 독일 탱크들을 향해 폴란드 기병대가 달려들다가 얻어터지는 모습을..이래저래 한 나라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주7- 독-소 불가침조약: 이 조약으로 독-소 전쟁시까지 두 나라는 전쟁하지 않기로 합의합니다. 물론 이 조약안에는 폴란드를 분할한다라는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번 일본-러시아 편에서 보시다시피 전체주의와 사회주의가 손을 잡은 이 조약은 얼마 안가 깨질 운명이였습니다.
주8-프라하의 봄: 체코슬로바키아에 불어닥쳤던 민주화 바람입니다. 동유럽 국가들중 제일 처음으로 일어난 민주화 시위였지만 수도 프라하에 들이닥친 소련 탱크들로 인해 실패하게 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8:49
병장 김민규
햐, 어렵다. 석재님 글의 특징은, 본문보다 주가 더 방대하다는 것 아닐지. 흐흐
냠냠 꼭꼭 씹어서 먹어 볼게요. 2009-01-04
00:39:52
병장 이동석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이라니 아쉽기는 한데, 다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갈음하겠습니다.
폴란드 기병대는 나름 그 이전 시대에 이름난 기병대였는데, 결국 그 화려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떨구지 못하고 고수하다 전차군단에 절멸당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 기병대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변모하지 못해 뒤쳐지게 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이름 아시는 분들의 제보-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만,
[스웨덴과 러시아의 북방전쟁(주5)]
[1차대전중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폴란드는 독립의 기운을 잡게 되었고(주5)]
주석이 겹치는군요.
[물론 독일-폴란드간 사이도 영국-프랑스같이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폴란드는 지금까지 서로 티격태격 싸워왔습니다.]
독일과 러시아를 혼용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009-01-04
00:44:10
상병 이석재
병장 김민규/ 허허, 소화라는게 쉬운게 아니라서..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저야 대감사죠 뭐
병장 이동석/ 이거..반쯤 잠긴 눈으로 쓰다보니 이런 대 오류가 생겨버렸군요. 북방전쟁 부분을 5-1 주석으로 수정하고, 그 밑의 부분도 다시 수정해서 올립니다. 2009-01-04
08:17:52
병장 이동석
제가 계속 깔짝깔짝 지적질인데도, 역시 석재님 대인배-
멋지십니다. 다음 연재를 기다리겠습니다. 흐흐. 2009-01-04
14:34:48
상병 이석재
병장 이석재/ 제가 대인배라니요. 전 전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연재] Side and Side- 번외편: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병 이석재 2009-01-30 18:58:44, 조회: 190, 추천:2
이번 Side and Side 번외 제 1탄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두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나라는 예로부터나 지금이나 앙숙으로 지내기도 했고, 동반자로 지내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연재란이 너무 환상소설쪽으로 나가는거 같아 한번 번외편을 제작하는것도 나쁘지 않다.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서고트왕국(주1)->이슬람의 순서로 통치 국가가 변화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점차 기독교 왕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통치체제 또한 변화해 가기 시작해왔지요.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서기 시작한 나라들은 아스투리아스 공국,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왕국(주2) 바르셀로나 공국 등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공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히메네즈’라는 가문의 아들, 조카들이였는데요. 이 때문에 한 가문에서 탄생한 이 왕국들은 서로 합병, 결합을 별 거부감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뭐 예를 들어 장기이식 같은 경우는 가족들끼리 할 경우에 별로 거부반응이 없는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레콩키스타(주3)를 통해 점차 기독교인들의 왕국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레온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결합하고, 레콩키스타가 종결된 이후에는 바르셀로나 공국에서 시작된 아라곤왕국과 카스티야왕국이 결합하여 에스파냐 왕국을 결성하게 됩니다. 그럼 포르투갈은 뭐하고 있었느냐구요?
포르투갈도 역시 ‘히메네즈’가문의 방파로서 사실은 카스티야왕국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과의 전쟁 중에 카스티야에게 반기.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를 점령하게 됩니다. 물론 카스티야 입장에서는 이녀석들! 하면서 포르투갈을 공격하지만 결국 전투에서 패배, 포르투갈의 독립을 허용하게 됩니다. 포르투갈도 포르투갈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옛 삼국시대의 백제와 고구려처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서로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레콩키스타를 종료하고, 아라곤의 이사벨여왕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왕의 결혼을 통해 에스파냐왕국을 탄생시켰지만, 이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지중해로의 진출은 힘들었습니다. 이슬람을 밀어내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스만투르크와 베네치아, 프랑스, 영국, 독일, 교황 등등이 지중해 지역에 이미 한발 빠트리고 지네들끼리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지중해 서부 끝자락에서 지중해로 진출하기엔 이미 한발 늦은 그들은 동쪽바다가 아닌 서쪽바다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과 에스파냐의 중요 외항인 세비야 등을 통해 동쪽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한 그들은. 결국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등 항로를 개척, 세계를 반띵한다는 어이없는 조약(주4)까지 맺어가면서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살아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신대륙과 아프리카, 인도항로를 독점하면서 지내들끼리 잘 살던 두나라는 점차 쇠락해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간략하게 축소하긴 했지만 저번에 말했던 대로 합스부르크왕가가 에스파냐를 결혼으로 얻어내기도 했고 뭐 이런 스토리가 있긴 한데 결국 카를 2세가 합스부르크가문의 유럽통치가 프랑스 루이 14세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하면서 결국 스페인은 네덜란드 등을 점령한채로 오스트리아 왕국과 결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위에서 말한 카를 2세의 아들입니다.카를 2세는 동생에게 오스트리아를, 아들에게 스페인을 넘겨준 것이지요. 저번에 설명드린것도 같은데…),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등이 이루어낸 두 왕국이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신대륙, 아프리카, 인도등지에 퍼지기 시작한 다른 나라 함대들,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두 나라의 독점체제에 점차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메리카 대륙 전체는 아직 에스파냐의 통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지만(주5) 포르투갈이 독점하던 동부 향신료교역은 점차 다른 나라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그 독점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아프리카,인도에 프랑스, 영국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포르투갈의 향신료교역은 점차 그 이득을 잃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게 에스파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전쟁도 하고, 네덜란드 독립전쟁등으로 네덜란드를 독립시켜주면서 점차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겼으면 상관이 없겠지만 두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면서 식민지도 점차 떨어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결국 대박은 나폴레옹때에 나오는데, 나폴레옹이 에스파냐, 포르투갈을 모두 점령하고 에스파냐는 신대륙으로, 포르투갈은 브라질로 도망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원복하기는 했지만.. 이미 수도까지 점령당했던 나라가 다시 부흥하기엔 너무 힘들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미 옛날에 벌어뒀던 부는 이미 다 소진한 상황이였답니다. 영국에게 자기네의 영토인 지브롤터(주6)를 점령당하기도 한 에스파냐는, 점차 쇠진해가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도 더불어 말이지요.
물론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점령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왕위계승전쟁을 통해 포르투갈을 점령했던 적도 있던 에스파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토해내야 했지요. 수백년간 갈라졌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에스파냐 인들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포르투갈은 이렇게 에스파냐인들의 통치시기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18세기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리스본을 다시 도시계획에 의해 재건했지만 결국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는 17~19세기동안 벌이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들의 각축장에 거의 끼어들지 못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왕위계승전쟁, 30년전쟁등에 끼어들기는 했지만 그 뿐이였습니다. 한때 강대국이였던 그들은 점차 쇠락해가기 시작한 것이지요.하지만 에스파냐는 아직 역사의 전면으로 나서게 될 사건이 남아있었지요. 바로 ‘스페인 내전’이였습니다.
1차대전동안 포르투갈은 연합국으로, 스페인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독일입장에서는 포르투갈이 워낙 멀어 공격할 수는 없었지만 영국은 지중해에 들어서기 위한 초입에 자기편인 리스본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큰 지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근대국가들을 가르는 ‘현상타파’국가들과 ‘현상유지’국가들중(주7)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현상유지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환상적인 발전 이후 그들은 대외적인 영토 욕심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기본적인 식민지는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거기서 더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앙골라를 비롯한 몇몇지역, 스페인은 모로코에서만큼은 우위권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1차대전 이후 ‘스페인 내전’을 겪습니다. 프랑코 장군은 모로코에 있던 스페인 군대를 끌어모아 본토에 있던 사회당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전쟁은 2차대전의 성격을 가름짓는 중요한 전쟁이였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각각 프랑코와 사회당 정권을 지원하여 지원군을 파견하기도 하였지요. 둘다 스페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서 후방에 자기편을 심어놓고 다른 국가들을 견제할 중요한 세력으로 남겨둘 수 있었으니까요.
스페인내전은 20세기에서 가장 처참한 내전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념에 사로잡혀 내전에 빠진 중요한 케이스 이기도 했고 반대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주위 강대국들의 논리에도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그 내전에서 발을 뺄 수 있었습니다만, 스페인의 내전은 스페인인들을 해외로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니 스페인에서 법이 제정되어 이 내전때 빠져나간 국민들을 다시 국내로 복귀시키도록 노력한다고 하더군요. 하여튼간에 프랑코장군이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스페인은 전체주의 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바람대로 스페인은 추축국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발칸을 휩쓸때까지만해도 스페인은 흔들렸습니다. 물론 스페인도 옛날에 빚진게 있으니 독일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였죠. 히틀러는 계속 프랑코를 꼬셨지만 결국 프랑코는 2차대전 종료시까지 추축국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예상은 적중하여 추축국이 2차대전에서 패배했지만 프랑코의 스페인 정권은 그대로 남아 1970년대 프랑코가 사망할때까지 정권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 독재정권의 기간은 스페인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살당하고, 한가지 생각만을 강요당한채 살아야만 했으니까요.
포르투갈은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 이후 왕정을 복고시킨데 반해, 1910년에 왕정이 무너진 이후 공화국 체제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좌익과 손을 잡은 군부가 살라자르 독재체제를 무너트린 무혈혁명, 이른바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포르투갈이 해외식민지를 포기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포르투갈이 모잠비크등 아프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고, 스페인이 모로코 남부 서서하라를 포기하게 된 이유도 독재체제 정권을 무너트리고 민주정부를 세우면서 자기들의 식민지들도 독립권을 가질 수 있다는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해 주려는 움직임이였지요.
이렇듯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는 독재체제를 무너트리고 민주정권을 세운 케이스로서 지금까지도 다른나라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두 나라 사이도 중세시대에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일시점령한 때(주8)빼놓고는 지금까지 별 탈없이 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베리아반도를 극적으로 차지한 두 나라는 현재까지도 이베리아 반도의 두 국가로서 현존하고 있지만 포르투갈은 경제적인 문제, 스페인은 바스크등 소수민족의 독립 문제로 지금까지 씨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스크인들은 아직도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싶어하고 아라곤-카스티야가 합병했던 옛날 역사가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 스페인 동부와 서부는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이 두지역은 아직도 분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긴 있습니다. 하여튼, 이 두나라는 한때 과거의 최강대국으로서, 지금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고향으로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과거사’청산에도 이들이 가장 큰 귀감이 되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스페인의 중,근대사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고 싶으시면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을 참조하시는 게 가장 좋으실 듯 싶습니다. 군대가 커지면 그만큼 국력은 약화된다는 폴 케네디의 이론은 꽤 흥미롭거든요.
주1- 서고트왕국: 로마제국이 이민족의 침략을 허용한 이후 저 먼 게르만의 땅에서 이베리아반도까지 넘어온 민족입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한데 반해 서고트족은 더 서쪽으로 빠져서 이베리아반도에 정착, 서고트 왕국을 세웁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공격에 이베리아 남부를 내주고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다가 이슬람인들의 침략에 속절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주2- 나바라왕국: 지금의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생겼던 나라입니다. 원래는 카스티야왕국을 위협할 만큼 강한 나라였지만 카스티야가 점차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카스티야에 합병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독립성은 여전해서 현대까지도 나바라왕국을 건설했던 바스크인들은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고자 그렇게 애를 쓴다지요.
주3- 레콩키스타: 혹시 그래뵈도 안습하다(그라나도 아스파다)에서 보셨다구요? 사실 ‘재정복운동’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이베리반도에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운동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 재정복 운동은 이슬람인들이 북아프리카로 사라질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주4- 세계를 반띵: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에게 그 중재를 의뢰합니다. 교황은 세계본에 줄 딱 그어놓고 이줄 서쪽은 스페인, 이줄 동쪽은 포르투갈 뭐 이런식으로 나눠버렸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쪽을 차지하게 된거고 스페인은 신대륙, 즉 아메리카대륙을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현실성은 없지만 말입니다. 이 조약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고 한답니다.
주5- 에스파냐: 에스파냐는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값싼 노동력으로 은,금을 대대적으로 채굴합니다. 그것들을 모두 유럽에다가 가져다 파니 에스파냐는 자동적으로 부자~ 부자되세요~ 하지만 아프리카 등지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유럽은 유럽대로 가치가 높은 은, 금이 점차 수량이 많아지면서 가치가 하락, 물가가 비싸지는 가격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6-지브롤터: 현재 영국령으로 되어있는,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불립니다. 에스파냐는 영국의 점령 이후 무력, 외교적으로 계속 지브롤터를 돌려달라고 떼를 쓰지만 애초부터 지중해를 감제하기 위해 지브롤터, 몰타,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영국 입장으로서는 줄리가 만무, 현재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현재까지도 스페인은 돌려달라고 떼를 쓰곤 있지만 모로코령인 세우타를 점령하고 있는 스페인 입장에서도 뭐 가오는 안사는 모양입니다. 모냥빠지게…
주7-현상타파, 현상유지국가: 근대세계에서, 독일,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토가 축소된 나라를 현상타파국가, 영국, 프랑스등 식민지를 이미 가지고 확장적인 국가를 견제하려 든 국가들을 현상유지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세력권은 1,2차대전때 서로 편을 갈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2차대전때도 포르투갈은 대신 중립세력이였습니다. 대체로 ‘전체주의’에 빠지지 않은 독재국가들은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8-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자 에스파냐 왕국이 포르투갈의 왕위를 클레임 걸고 점령해버린 사건입니다.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이 독립하게 되고, 2차대전까지 영국과 포르투갈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자신의 독립지원세력을 얻은 셈이고 영국은 강국인 에스파냐를 견제할 견제 세력을 하나 가지게 된 셈이니까요. 그래서 포르투갈이 1차대전때 영국의 편을 든 것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8:57
병장 김민규
우오 컴백스페셜이군요. Side and Side
냠냠, 잘 먹겠습니다. 2009-01-30
20:40:39
병장 김도환
잘 읽었습니다.
카스티야 와 바스크라...평소에 잘은 몰랐는데
바스크가 순혈주의로 유명하다는 얘기는 들었던것 같아요. (웃음)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석재님의 Side and Side는 이미 검색으로 다 읽었습니다
음헤헤헤!!! 2009-01-30
21:43:17
일병 홍새암
역사 탐방은 너무 좋아 엉엉
최고에요!
[연재] Side and Side- 번외편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1]
상병 이석재 2009-03-05 22:16:03, 조회: 95, 추천: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찌보면 너무나도 오래된 떡밥이며 발칸, 한반도와 함께 세계 제 3대 탄약고로서[이 탄약고가 탄약넣는 탄약고가 아니라는 비유정도는 알아차려주세요. 으헝헝] 우리에게는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더욱이 이 두나라만의 문제만이 아닌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등등등 근접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Side and Side에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들어 늦게나마 써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즉 팔레스타인 인들과 헤브라이인들이 살던 고대의 역사는 쓰자면 너무나 기니 넘어가도록 할께요. 그래도 조금이나마 설명하자면, 이스라엘인들의 조상인 헤브라이인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제일 부흥을 이루었으며 솔로몬 사후 유대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뉘어진 후에,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제국에, 유대왕국은 네부카드네자르, 즉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바빌론 유수를 겪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민족국가를 추구하는 페르시아에 의해 바빌론에서 풀려나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후에 로마제국의 통치에 번번히 반대하다 결국 디아스포라라고 불리우는 유배를 통해 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 이후로 팔레스타인 지역엔 이슬람의 세력이 전파되었고 그 역사는 2차대전까지 지속된 것이지요.
저번에 썼던 '카르타고식 평화'에 관한 글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추축국의 가치를 가불하여 자신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중동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국은 추축국인 오스만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의 영역이던 중동에 아랍민족주의를 퍼트려, 아랍이 투르크와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만들어야만 했지요. 더불어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유대인들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위해 유대왕국을 건설해준다는 약속과, 아랍민족에게 팔레스타인 왕국을 건설해준다는 약속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추축국이 패배도 하기 전에 미리 미래를 가불해 버린 것이지요.
결국 2차대전이후 유대인들은 영국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게 되고, 영국이 자신의 수많은 팔들을 전쟁의 폐해로 인해 유지할 수 없게되어 점점 떨어트리는 1948년도에 이르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팔레스타인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들의 동족이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돕고자, 더불에 이웃국가에 종교가 다른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보기 싫어하던 사우디, 이라크, 이집트등은 팔레스타인을 도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데, 이를 1차 중동전쟁이라 합니다. 어찌보면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을 제 2의 십자군국가로서 자신들을 위협할 잠재적인 적국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아랍국들은 초기전쟁에서는 승기를 잡았지만 UN의 중재로 1개월동안 휴전한 이후엔 오히려 이스라엘에 그 승기가 넘어갑니다. 아랍은 연합국으로서 그 뚜렷한 목표가 없고, 이스라엘을 과소평가 했지만 이스라엘은 1개월의 휴전동안 무기를 수입하여 아랍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차중동전쟁의 문제점은 아랍국들이 ‘정전’이 아닌 ‘휴전’조약이고, 이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조약이 아니라는 점, 수없이 늘어난 팔레스타인 난민들 등 여전히 불씨를 가지고 있는 휴전일 뿐이였습니다.
2차 중동전쟁의 발발은 수에즈의 국유화로부터 시작營윱求. 이집트 민족주의자인 나세르는 1차 전쟁에서 패배한 아랍인들의 증오를 이용하여 자신이 아랍 국가들의 종주국으로 부상하고자 하였고, 이스라엘의 수에즈 운하 사용을 금지하고, 나중엔 국유화조치를 통해 미국과 영국의 간섭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로의 강습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있는 시나이반도를 모두 점령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로 점령지에서 다시 후퇴하였습니다. 2차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포기로 인해 강대국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던 것이고, 이집트의 나세르는 전쟁에서 패배한 아랍을 격동시켜 자신을 아랍의 맹주로서 부상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3차 중동전쟁은 바로 이 나세르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세르는 인도의 네루등과 함께 제 3세계의 대표주자로서 아랍을 통일시키고자 했고 결국 시리아와 함께 통일 아랍 공화국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나세르로 인해 아랍국들은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모세 다얀과,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의 이익을 꾀하는 걸 목표로 삼은 골다메이어 여사, 에쉬콜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다얀은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목표를 전쟁으로 삼았고, 이집트를 선제공격하여 내부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외부적인 위신을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6일간의 공격으로 UN이 중재하기도 전에 영토를 늘린 이스라엘은 아랍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아랍은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를 통한 비정규전으로 목표를 선회한 것입니다.
4차전쟁은 3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양 측 모두 평화를 꿈꿀 수는 없었고 오직 전쟁만이 남아있던 상황이였으니까요. 각자의 장점, 즉 전차와 야포, 전투기수가 월등하므로 그분야에 대한 발전을 계속적으로 꾀하였고 아랍은 이스라엘의 동원력과 집중력을 면밀히 관찰하여, 미사일 방어망을 통해 항공기를 격퇴하고 진격해오는 지상군을 점차 격멸하기로 전략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차를 통한 전격전을 통해 피해확대를 노려 공격적인 전술을 채택한 것이고 아랍은 적의 공격을 흡수하여 적이 장기전으로 약화된 틈을 타 공격하는 전술을 채택했지만, 4차전쟁의 초기에 이루어낸 아랍의 승리는 아랍을 느슨하게 했고, 그 틈을 타 이스라엘은 재정비하여 다시 아랍을 내i아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4차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고, 이스라엘은 승기를 다잡은 전쟁 후반기에 이르러 평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소련의 개입이 우려되었으므로 라고 답하여 배후세력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흠.. 일단 4차중동전쟁까지는 썼고, 다음시간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외교와 게릴라전, 앞으로의 방향등에 논의해보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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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9:05
상병 정근영
음, 최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어서, 독서후기를 써볼까- 하다가 머리속이 뒤죽박죽 되버려서 포기했었는데, 때마침 이런 글이 또 올라왔군요. 다음편 기대할게요- 2009-03-06
08:15:39
상병 김형태
연재에도 '가지로'를 외쳐도 되겟슴니까 허허허 2009-03-06
08:25:33
일병 김소망
현재 이ㆍ팔 분쟁의 불씨는 모두 영국과 프랑스가 제공했고(밸포어 선언, 사이크스-피코 조약 등의 이중 외교전략으로) 지금까지도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중동전쟁에 끼어들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고 이를 계기로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끝냈던 것도 이 때문이겠죠.
그러나 저는 그 분쟁의 불씨가 어떻게 됐든 지금의 억압자인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제투쟁을 여전히 지지합니다. 2009-03-06
14:15:30
병장 이지훈
오랜만에 다시 보네요 side by side. 다음 편이 기대되는군요 2009-03-06
14:52:22
상병 이석재
병장 정근영/ 감사합니다. 하아, 쓰고싶은건 많은데 말이지요.
상병 김형태/ 제 글말고도 가지로 단어를 쓸 글이 너무나 많으니 제거엔 아껴주세요.
일병 김소망/ 글쎄요.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반제투쟁'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고향을 되찾고 싶어할 뿐이지요. 반제투쟁을 벌이고 있는 인물들은 팔레스타인 인들이 아닌 그 주위에 있는 아랍국가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레바논에 자리잡은 헤즈볼라 같은 세력들만 제외한다면, 이스라엘과 국경선만 확정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역이 명확히 주어진다면 그들은 이 분쟁을 끝내려는 시도를 할 것이 분명할 테니까요.
병장 이지훈/ 흐흐. 계속 번외편을 올릴 생각입니다.
[연재] Side and Side- 번외편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2]
상병 이석재 2009-03-07 20:15:44, 조회: 97, 추천:0
혹시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 ‘뮌헨’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복수는 결국 사람들에게 허망함을 안겨줄 뿐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작품과 이제 말할 팔레스타인하고는 약간의 관계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인 PLO가 이 뮌헨 올림픽 사건의 배후 주동자이기 문입니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 이후 아랍의 인원들은 더 이상 전면전으로 이스라엘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틈腑 PLO를 동원한 게릴라전으로 돌입합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은 주로 레바논에 자리잡았는데, 그 덕분에 PLO의 주요 거점지역또한 레바논 남부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이 포클랜드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소련이 조용한 틈을 타 뮌헨에서 일어난 테러를 복수하고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통해 PLO를 소탕하고자 합니다. 이 전쟁이 레바논 전쟁인데, 전쟁으로 PLO는 와해되었지만 난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PLO보다 더 급진적인 헤즈볼라가 레바논에 나타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로마가 파르티아를 물리쳤는데 그 자리에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더 무식한 녀석들이 나타난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레바논은 기독교 마론파, 이슬람교, 유대교등이 모인 다종교 국가입니다. 대통령은 기독교가, 국회의장은 이슬람교가 뭐 이런식으로 먹다보니 국가의 의견이 한군데로 잘 모아지지 않고 분열되는 상황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테러단체들이 레바논을 주 무대로 삼고있으며 팔레스타인의 독립세력또한 레바논 남부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봉기’라는 뜻을 가진 1,2차 인티파다를 통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고 예루살렘 동쪽의 지역을 팔레스타인 공화국으로 삼고 독립하기에 이릅니다. 이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요.
팔레스타인 민중에 일어난 1차 인티파다 이후, 오슬로에서 이루어진 오슬로 협정과 백악관에서 이루어진 워싱턴 협정, 2가지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자치 정부를 세운다는데 동의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슬람 저항운동 이란 뜻을 가진 하마스가 계속적으로 테러활동을 자행하고 온건파 총리인 라빈 총리가 암살당함으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다시 경색됩니다. 요르단강 서안에서 철수하기로 한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하지 않고 버티는 상황도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강경파 당수였던 샤론마저도 예루살렘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땅임을 선포하자 이스라엘 전역에서 제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의 기운에도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가 계속적으로 일어나자 이스라엘은 샤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며 팔레스타인 자치령에 계속적으로 군대를 투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PLO의 수장이였던 아라파트가 이스라엘 공격설, 내부 암살설 등에 휩싸여 사망하자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점차 다시 평화의 기운을 찾기 시작했도 강경파 당수였던 샤론 총리도 평화를 원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관계 개선의 여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샤론 총리는 팔레스타인 자치령이였던 가자지구에서의 점진적인 철수를 계획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현재 같이 점령중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의 철수는 가자지구에서 철수 후 테러행위가 종식될 때에만 비로소 행해질 수 있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자지구에서의 철수가 말 그대로 본보기가 되는 것이지요. 이거 해줄 테니까 너도 이거 해줘.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다룰 수 없는 테러단체들도 많아 이것이 과연 원할하게 이루어질 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반 이스라엘단체이자 시아파 단체인 헤즈볼라나 하마스가 그 주인공인 것이지요.
레바논 남부에 주둔한 헤즈볼라나,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한 하마스의 테러활동이 끊이지 않자 이스라엘은 다시 레바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또한 하마스의 로켓공격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가자지구로서의 침공을 단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덕분에 레바논 남부는 초토화되었고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대로 ‘헤즈볼라의 통치를 종식하고 다국적군이나 레바논군에게 그 통치권을 넘겨라’라는 주장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긴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이슬람 단체는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양차대전 사이의 때가 아닙니다. 국제 연합이 아닌 국제연맹이 있던 그때는 강대국의 마음먹기에 따라 연맹의 가입국가라도 마음대로 독립이 좌지우지 獰鄕熾. 아프리카의 독립국중 하나였던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의해 강점되었지만 연맹의 그 어느 국가도 이탈리아의 행동에 대해 제지를 거는 사람은 없었고, 그때부터 국제연맹은 유명무실해진 것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을 강점하게 내버려 두는 국가는 없습니다. 모두들 중동에 평화가 도래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등이 관여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관계 소원이 요원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두 단체가 의견이 통합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하고 있고, 팔레스타인도 협상파와 하마스 같은 협상거부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아랍 전체와 맞서야 하는 상황이며, 이는 이라크와 평화협상을 체결하더라도 시리아와는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아랍 자체가 석유를 무기로 들고 나와 자원민족주의, 석유파동등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세계의 탄약고로서 이 중동지역에 평화가 도래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겠군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각자의 거주지역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팔레스타인의 무장세력이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고,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포기할 수 있다면, 중동에 평화는 조금 일찍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8:49:12
병장 김대운
오랜만에 보는 Side and Side.
잘 봤습니다. 2009-03-08
08:33:53
상병 정근영
허허, 이거 어지간히 저 지역에 관심이 없다면 들어보지도 못했을 말들이 대부분이군요. 얼마전에 책을 한 권 읽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게 뭔소리? 하고 넘어갔을 뻔했네요. 오슬로협정이니 헤즈볼라니, 시아파부터, 샤론총리와 아라파트까지. 새삼 석재씨의 머릿속이 궁금해지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저런 걸 다 알고 계신답니까.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들이 벼랑끝에 매달려 간신히 붙들고있는 지푸라기 하나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이 순수하게 군사력으로 대응하기란 요원한 일이니까요. 더구나 그나마도 팔레스타인의 중심단체라 할 수 있는 파타와 하마스가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도 내부의 분열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팔레스타인을 응원하고 있는 저로서는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횡포'보다도 하마스와 기타 단체의 '테러'에 오히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의문입니다. 사람의 숫자로 그 가치를 재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의해 죽은 유대인들보다는, 이스라엘의 공습에 희생된 이들이 몇십배는 더 많을 텐데요.
팔레스타인이 그들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할 사항은, 내부의 분열을 바로잡는 것이 아닐까해요. 오슬로 협정으로 자치를 인정받은 파타가, 어느새 이스라엘의 꼭두각시가 되어 하마스를 몰아내려 하고 있고, 많은 난민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는데, 고위급 관료들은 호화로운 주택을 짓고,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며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고 있으니, 팔레스타인인들은 '누가 진정한 그들의 적인가'에 대한 회의에 젖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스라엘의 마흐무드 압바스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우리는 신의 말씀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그렇지만 예수는 우리의 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