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 홍명교   2009-08-18 05:10:35, 조회: 443, 추천:0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리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 p232, <농담>(밀란 쿤데라)

어쩌면 내가 지난 몇년간 H를 생각하고, 또 그녀에 대해 '어쩌면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생각했던 그 수많은 시간도, 그 절묘한 상황들에 의해 구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확실히. 나 역시 H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처음 2학년 메이데이에 드라마틱하게도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에 대한 강렬한 기억, 우연찮게 함께 보낸 영월에서의 농활에서의 아주 드문 평화로운 날들의 공기, 처음 고백한 그날의 풍경과 헤어지던 비오는 밤의 귓가 가득한 비소리와 같은 기억들을 갈망하는 것이 아닐까. 그 당시 나를 괴롭혔던 H와 나의 정치적 입장에서의 불화가 나 스스로 혐의자들로 규정해버린 트로XX주의자들의 지독함과 책략들 때문이라는 피해의식의 그물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래서 나 스스로를 어떤 잔인한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사후적으로 H를 애뜻하게 생각했을까? 헤어지던 그날밤의 이면이 밤이 새도록 지속된 트로XX주의자들과의 전학대회 자리에서의 격렬한 논쟁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잔혹한 이별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로인해 그날밤은 이토록 결정적인 무엇으로 회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이별하는 날의 밤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재구성되어왔고, 나는 그 사후적 작업들로 헤어질때 울던 H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잔인한 욕망을 역설적으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사실 H란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냈다. 그렇지 않다면 그후로 몇차례 반복된 그녀와의 재회에서 그토록 허무하게 공허함을 느끼며 욕망의 급격한! 소멸을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종로 거리 한복판에서 H를 다시 만난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웅장하지만 지저분하게 울리는 앰프 소리에 끌려 나는 보신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때 보신각 앞에선 어떤 방송차량으로 구성된 연단이 세워져있었고, 그 자리 위엔 저명한 연설가가 이라크 전쟁과 한국의 상황에 대해 연설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은 아예 귓구멍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유령처럼 무의식적으로 H를 찾았다. 그런 자리라면 으레 알수없는 갈망이 무의식을 깨우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H와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그런 공간을 발견하면 무의식적으로 H를 찾다가도 그녀가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하곤 했었던 것이다. 보다 더 초췌하고 지친 표정으로 그녀는 애써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나는 어색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미소로 너무너무 반갑다고 말했고 나는 설탕 중이라며 동문서답했다. 그녀의 초췌함에 비해 나는 설탕먹은 궁인임에도 지나치게 발랄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고, 이미 H의 옆에는 어떤 남자가 다가와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바 그들은 으레 그런 식이다. 나는 H에게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그것은 쿨한척 하고싶어하는 유치한 욕망에서 비롯된 치기어린 질문이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방해자가 어떤 사람이든말든 내겐 중요치 않다. 어쨌든 그는 나를 달갑지 않게 쳐다보았으니까. 그런 느낌은 쉽게 감지된다. 나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작별 인사를 건네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나왔다. 돌아설때 언뜻 그녀의 손에 익숙한 크기의 신문이 쥐어져있는걸 보았다. 아마도 지금 그녀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 예전에 우리가 사귈땐 <다같이>였고 헤어질 즈음엔 <맞불>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그토록 혐오스러우면서도 꾸역꾸역 H로부터 그것을 건네받곤 했었는데.

한동안 나는 H와의 재회를 무척이나 갈망했었다. 몇 시간씩 비 자취방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전화하지말라는 말도 무시하고 계속 전화하는 전례없는 찌질함을 보이기도 했으며, 연애시절엔 겨우 한번 바래다주었던 집 앞에서 몇시간씩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재회가 이루어진 그때마다 얼마나 공허하고 비틀거리며 당황했던가. 나는 차라리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길 바라며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십번 그녀와의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얼마나 안도하며 돌아섰던가. H는 오직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욕망으로서만 존재할 뿐인 것이었다. 재회가 이루어질때 내가 구성한 H는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농담>은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욕망의 기억들과 좌절된 욕망의 기억들로 변주된 몇가지 차원의 중첩된 기억이다. 그 욕망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루어지는 것이 시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좌절된다. 왜냐하면 그 너머는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텅 비어있는, 그러나 마치 갈망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처럼 위장된 욕망이 루드빅의 1차적 욕망의 껍데기를 감싸고 위장하고 있다. 그것은 허상이며 실패를 요구하는 가면이다. 그 겉껍질에 의해 가려진 무엇 안에 실제로 원하는 바가 숨겨져 있으나, 거의 항상 그것을 알아챌 수 없다. 이미 그 껍질의 해체가 시도되는 그 순간, 목적은 수단으로 전도되며 바로 그 순간 실체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오늘밤엔 반드시 다 읽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기상벨 1시간 전, 취침시간 3시간전.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9-16 09:04)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1:19:25 



상병 정택민 
  <다같이>가 아니라 <다함께> 아닌가요? 아님 심의상 바꿔 말한건데 제가 들추어 낸 것이 아닌지.. 그나저나 저는 당근을 먹을 수 없어서 장시간 책을 읽을 수 없는데, 가끔은 당근을 먹고 싶어요. 2009-08-18
07:05:32
  



상병 홍명교 
  당연히 후자죠(웃음) 
나름 패닉 단체, 달팽이 단체인데 가려주는 센스 2009-08-18
07:13:35
  



상병 정택민 
  아하, 저는 <맞불>은 제대로 쓰셨길래 혹시 잠시 착각하신거 아닌가 했죠. 저도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다같이>가 맞나 싶었으니까요. (빙그레) 2009-08-18
07:34:23
  



병장 양동훈 
  택민// 당근을 먹으면 장시간 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저도 생각했는데, 잠만 오더군요. 하악. 2009-08-18
09:11:57
  



병장 이재익 
  이상하게 그렇게 만나고 싶던 사람이랑 만나도 그때마다 쿨해지거나 찌질해지거나 둘중 하나로 그렇게 오래 예상하고 생각하던 것처럼 행동하지 못하는게 참 희안할 정도네요 2009-08-18
09:22:12
  



병장 이기범 
  재회 후 찾아오는 알 수 없는 허망감. 차라리 만나지 말것을 

왠지 이런 말 하기가 죄송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제 경험과 참 비슷하시네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농담> 2009-08-18
09:37:09
  



병장 양동훈 
  재익// 아. 이거 왠지. 정말 공감. 무척이나 어려운 얘기 같아요. 킁킁. 2009-08-18
10:11:59
  



상병 윤정기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도 그런것 같습니다. 나 자신이 '재구성한' 그녀와 그녀 '자체' 사이의 갈등구조. 저도 그녀도 서로 자신속의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은,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 허허. 유리창을 통해 창 밖을 보는, 인간의 분절된 세계인식 같은 것들. 
첫사랑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처음 유리창을 통해 본 세계인식의 사생아가 어느샌가 내 방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2009-08-18
10:26:21
  



상병 박재현 
  누군가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그러할 수 밖에 없겠죠 
누군가를 그 자체로서 기억하고 간직한다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섬뜩하기까지 해요 
그렇기에 '농담'이라는 제목은 얼마나 능청스러우며 예리한 것이었던지 
그 책에 대한 감상이 완전히 휘발되기 전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2009-08-18
12:09:42
  



병장 이 원 
  가끔은 쿨해지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던데, 

글쎄요, 이루어 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것이라.. 

맞죠ㅡ, 사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기 싫어하는것은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할때가 많으니까요. 후후 2009-08-18
13:00:26
  



상병 홍명교 
  그게 왜 그녀와의 의리의 문제인지. 
의리라고 생각하는거야말로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닐까요. 
사실은 그녀가 내가 재구성한 그녀의 가짜 모습으로만 남길 바라는 마음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2009-08-18
17:0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