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의 원리 
 병장 이승일 03-09 03:39 | HIT : 186 



 윤리학의 원리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사소하게,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당연하고 사소한 내용을 다루는데 너무 많은 펄프를 낭비했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윤리학의 정 반대쯤 되는 내용에'윤리학의 원리'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이유에서 이 글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제 3의 호의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 글이 오직 그들을 위해 쓰여 졌다고 항변함으로써 위와 같은 비난을 피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은 있을법한 경우로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위 두 가지 반응에 대해 약간의 변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이 너무나 당연하고 사소한 것이라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 : 어떤 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당연하고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차분히 정리해 보는 일은 그렇게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가장 어렵거나 난해한 부분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우리가 가장 당연시하고 사소하게 여기는 부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부당함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윤리적 원칙 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동의하는 윤리학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이 제시하는 원리를 누군가가 부당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유별난 약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이 글에서 사용된'윤리적인'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잘못된 뜻으로 쓰였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나는 그 단어를 포기하고 대신 다른 단어, 이를테면'ω-윤리적인' 따위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ㅡ 물론 나는 벌써부터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윤리학의 일반적인 문제와 이 글의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윤리학의 원리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들이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적용, 확장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것이다. 

1. 윤리학의 문제와 이 글의 목적

1) 형식적 측면
 모든 윤리적 성찰의 기본적인 목표는 우리에게 주어진 윤리적 명제들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찾거나, 반대로 정당한 방법으로 윤리적 명제들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면 과연 왜 그래야만 하는지 알고자한다. 이 목표와 관련해서 흔히 인간의 선천적 본성이나 인간 사회가 처한 현실 등이 고려되곤 한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거나, 윤리적 원리를 소유하지 않은 사회는 자연 도태되므로 윤리적 원리가 존재하는 사회만 살아남았다거나 하는 설명들이 그 예에 해당한다. 이러한'정당화'는 사람들에게 윤리적 명제들을 제안하고, 설득하거고, 권유하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윤리적 명제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다음과 같이 미심쩍어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윤리적 명제들은 어째서 제안이나 설득이나 권유의 형식이 아닌 명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째서'~ 하는 것이 좋다'가 아니라 '~ 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가? 지금까지 관찰된 인간의 본성이 이러저러하고, 사회가 처한 상황이 이러저러하다면, 그것은 어쨌거나 괜찮다. 그래서 그러한 본성과 상황 때문에 우리가 행동할 것을 제안하고, 설득하고, 권유한다면, 그것은 어쨌거나 괜찮다. 그러나 윤리적 명제들은 왜 우리에게 명령하는가? 그 당위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이러한 의심의 근원은 다음과 같이 응축되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나 세상이 이러저러하다'는 명제로부터'우리가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명제가 따라 나올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가 도출될 수는 없다." 
 사실명제와 당위명제간의 형식적 괴리에 대한 예민한 인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입장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과 당위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것들이며, 사실을 통해 당위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다. 사실과 당위는 서로의 영역을 혼동함으로써 함께 오염된다. 당위는 순수하게 내적인 충동과 결단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가 어떠하다는 사실 때문에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순전히 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며, 내적인 의지에 의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당위는 사실로부터 엄격하게 구분되어야하며, 어떠한 사실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것이 당위인 것이다."이와 관련해서 오토 바이닝거의 다음 말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학과 논리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단지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성과 기질>" 논리적 동어반복인 p→p 가 참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듯이, 어떠한 윤리적 명제가 정당한 이유는 단지 그것이 정말로 정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이닝거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입장은 아마도 칸트로부터 시작해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특히 독일) 사상가들이 공유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윤리적 명제들에 대한 정당화는 불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었으며, 심지어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말할 수 없고, 말할 필요도 없으며, 말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 특히 여러 독일 사상가들의 엄격성을 경외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드려질 만 하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분명한 견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윤리적 명제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 우리의 행동엔 언제나 이유가 있고, 윤리적 행위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만약 (유사)칸트주의자들이 윤리적 명제들에 대한 정당화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받아드릴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이 정말로 불가능한 지 어떻게 아는가? 그들이 이야기한 형식적 차이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의 직관이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윤리적 명제들에 대한 정당화는, 비록 현재는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하지만, 점점 더 분명하고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지적 발전이란 바로 이렇게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을 선명하게 바꾸어나가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또한 윤리학에 대한 정당화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분명 그러한 정당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윤리적 원칙들로 한걸음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화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의견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해서는 안 되는 것' 이라는 표현 자체가 일종의 윤리적 함축을 담고 있는데, 그렇다면 윤리학에 대한 정당화가 비윤리적이라는 뜻인가? 사람들을 윤리적 명제들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작업이 비윤리적이라는 말은, 마치 기독교의 전파가 반-기독교적이라는 주장만큼이나 이상하다."
 이 글의 첫번째 목표는 위와 같이 대립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어떠한 균형점을 찾아보려는 데에 있다. 나는 당위의 형식이 사실 명제들로부터 따라 나올 수 없다는데 동의하지만, 동시에 윤리적 명제들을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에 관한 사실들과 연결지으려는 노력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는 그러한 정당화의 노력이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리라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 ~ 하는 게 좋다'정도의 제안이나 설득, 권유만으로 가득 찬 윤리학을 원하지도 않는다 ; 윤리학은 결국 어떤 당위 명제들을 생산해낼 수 있어야한다. 
 이렇게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
 나는 사실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당위 명제 - 즉 일종의 도그마 - 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숫자는 가능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다. 그래서 내가 받아드리고자 하는 윤리적 명제 전체의 당위 형식이 오직 소수 명제의 당위 형식에만 의존하도록 할 것이다. 한편 그것들로부터 따라 나오는 윤리적 명제들은,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의 상황 등에 의해 최대한 정당화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화된 도그마와, 그 한계 내에서 최대한의 정당화를 허용하는 윤리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것이 이 글의 형식적 목표이다.

2) 내용적 측면

 우리가 윤리학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문제는 좀 더 일반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각 구성원이 서로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만약 사회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것의 해체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분명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상충하는 이익들 중 과연 누구의 이익이 실현되어야 하는가? 전제 권력을 찬양하는 사람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개인이나 세력의 이익이 실현되어야한다고 말할 것이다. 철인정치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가장 현명한 개인이나 세력이, 공리주의를 받아드리는 사람은 가장 많은 숫자의 개인이 공유하는 이익이 실현되어야한다고 말 할 것이다. 이들은 누구의 이익을 어떻게 실현시켜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모두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지만, 결국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이익을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우리는 다양한 이익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가장 극단적이고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를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사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묵가의 서적인 <상동上同>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실려 있다. "오래전 사람이 처음 태어나 어떤 정치 체제도 갖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서나 서로 충돌하기 일쑤였다... 그러자 천자天子가 나타나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통합했다...천자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라. 그가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그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대체 어떤 이유에서 세상이 혼란에 빠지겠는가? 천자는 오직 사람들의 뜻을 한곳에 모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천자에 의한 폭력적인 통합과, 그보다는 훨씬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공리주의적 통합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후자는 전자에 비해 확실히 발전된 형태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어쨌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둘 모두 통합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익(이것을 사회적 이익이라고 부르자) 과 그것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이것을 개인적 이익이라고 부르자) 사이의 괴리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아마도 한 사회의 윤리는 바로 이러한 괴리 안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묵가의 윤리는 천자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공리주의적 윤리는 (흔히공공이라고 표현되는) 다수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윤리는 공통적으로 나와 다른 이익을 실현하려는 개인이나 세력에 대한 배려와 희생을 권유하거나 강제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게끔 만드는 인간의 마음, 즉 이타심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이타심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물론 과연 이타심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복잡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타심 비슷한 무언가가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사회를 위한 질서의 기초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취약한 것이다. 소규모 집단이나 부락이 아닌,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회가 개개인의 자발적인'선의지'만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통합을 이루어 낸 사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그러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의 두번째 목표는 윤리학에서 선의지와 같은 개념을 제거하려는 데에 있다. 나는 우리가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대하는 행위들을 인간의 지적능력이 대신 떠맡을 수 있게 되길 원한다. 나는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간의 충돌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을 직접적으로 모색하는 대신, 각 개인의 이익을 좀 더 넓은 시간적 영역 안에서 조망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관점에서는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의 방향이 생각처럼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만약 공리주의자들이 이익에 대한 공간적 확장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의 시간적인 확장을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익의 시간적 확장에 관여하는 것이 바로 지적 능력(나아가 미학적 욕망)이라는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2. 두 도그마 

 나는 우리가 받아드릴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명제들의 당위적 형식이 오직 다음 두 명제의 당위 형식으로부터 따라 나오길 기대한다. 

A1 :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해악보다 이익을 더 많이 줄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그 행위를 하라. 
A2 : 어떤 행위의 해악과 이익을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려하라. 

( 보조 정의 : 어떤 행위가 A1과 A2의 지침을 동시에 만족할 때 그 행위는'윤리적 행위'라고 정의한다.)

 이 두 당위 명제들은 도그마로서 제시된 것이며, 이러저러한 사실 명제들에 의해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내가 완전한 정당화를 시도한다면, 윤리학 안에는 어쨌건 (정당화 할 수 없는)당위형식이 존재해야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위 명제들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나는'행위','해악','이익'과 같은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행위 : 나는 우리의 윤리학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행위를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의도로 행해지는 행위(이것을 간단히 '사회적 행위' 라고 부르겠다.)로 제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윤리란 기본적으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는 상호작용 속에서만 고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서 편협한 의견일 수 있다. 때문에 '개인적 행위' 들은, 그것 또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한다고 판단되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우리의 논의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행위에 국한된 논의는 여전히 개인적 행위에 대한 고려와는 독립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 두 행위들은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서로 교집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행위'라 함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행위들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익과 해악 : 이 두 단어는 일상에서 매우 자주 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호한 뜻을 갖고 있다. 어떤 일이 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악이 되는지의 문제는 개개인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려있으며, 이것은 당연하게도 주관적인 문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한 주관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익과 해악이 지닌 주관성은 오히려 우리의 윤리학을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데, 이것은 사실 A1이 표방하고 있는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A1은 당위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 개인의 외부로부터 어떤 힘을 행사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 내적 욕구의 반영에 가깝다. 사실 우리는 A1과 같은 강령이 없어도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려고 한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 그리고 오직 그렇게만 - 행동하려고 한다는 사실 때문에 윤리와 도덕이 고찰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A1 을 "한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 해악보다 이익을 더 많이 줄 때, 오직 그 때에만 그는 그 행위를 한다." 라는 사실 명제로 바꾼 뒤,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적 전제로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A2만이 모든 당위성의 원천이 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첫째, "한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 해악보다 이익을 더 많이 줄 때, 오직 그 때에만 그는 그 행위를 한다."라는 주장은 비록 겉보기에는 꽤나 그럴듯해 보이지만,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전제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거나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때문에 굳이 그것을 전제로 가정하는 부담을 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A1은 이 글 전체의 이념을 분명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추구가 윤리적 행동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동력이 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를 분명히 명시하는 의미에서 A1을 하나의 당위적 공리로 남겨두는 것이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이익'과'해악'의 모호함과 주관성이 비록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대략적인 경계선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우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가치들에 준하여 개인의 이익과 해악을 고려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더 많은 재화를 얻고, 더 많은 인정을 받는 등의 상황을 이익이라고 판단하지 그 반대를 이익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 정도의 기준 아래에서 이익과 해악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일 뿐이며, 사회적 기준이 달라지거나 인간 개개인의 성향이 변화한다면 언제든지 이익과 해악의 외연은 달라질 수 있다. 

 이제 A1과 A2 각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A1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해악보다 이익을 더 많이 줄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그 행위를 하라. 

 이 명제 안에는 하나의 조건문과 하나의 당위 명제가 필요충분조건(if and only if)에 의해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이 명제는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해악보다 이익을 더 많이 줄 때 그 행위를 해야 함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행위가 주는 이익이 해악보다 작거나 같을 때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함을 함축한다.  여기서 어떤 행위가 주는 이익이 해악보다 작을 때 뿐 아니라 같을 때에도 그것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러한 내용은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해악보다 이익을 더 많이 준다." 는 명제의 부정이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이익보다 더 많은 해악을 주거나 그와 같은 해악을 준다."는 명제라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이익과 해악이 동등한 경우, 그 행위를 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전혀 명료하지 않다. 사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A1을 간단하게 표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함시킨 논리적 잉여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것이 별 문제 없거나, 혹은 심지어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익과 해악이 완전히 동등하다는 판단에 도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상상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나는 이익과 해악을 어느 정도 계량적으로 다룰 수 있길 원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의 양이 동일하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계량화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 이익의 양 = 해악의 양' 인 경우에 대한 지침이 어떠하든, 실제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익과 해악이 동등할 경우 그것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지침은 실질적인 실용성을 갖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익과 해악이 동등하다고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오차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때문에 실제로는 이익이 약간 크거나, 해악이 약간 클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우리가 하지 않았을 경우, 그리고 나중에 가서 이익이 약간 큰 것으로 밝혀질 경우, 우리는 그만한 이익을 포기한 셈이 될 것이다. 반대로 해악이 약간 큰 것으로 밝혀질 경우, 우리는 그만한 해악을 피한 셈이 될 것이다. 나는 작은 이익의 포기보다 작은 해악을 피하는 것이 더 큰 효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이익의 양은 원리적으로 무한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해악의 양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 이상의 해악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런 판단에 동의한다면, 이익의 양과 해악의 양이 동일할 경우에 대한 A1 의 지침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A1 을 받아드리는 데에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합리화가 전제되어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쨌든 A1은 단지 도그마일 뿐이기 때문이다.

A2 어떤 행위의 해악과 이익을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려하라. 

 여기서 가장 문제시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최대한 장기적'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무엇에 비추어보아 최대한 장기적이라는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이익(해악)의 정산기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싶다. 어떤 현상이 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악이 되는지는, 그가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그 이익과 해악을 계산할 것인지 - 즉 정산할 것인지 - 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수험생이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의 행위(공부하는 것)는, 예를 들어 약 한 시간의 정산기간 안에서 생각해본다면, 그에게 이익보다는 해악을 훨씬 더 많이 준다. 한 시간 동안 그는 그 행위로부터 현실화된 이익을 거의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산기간을 10년으로 설정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현재의 스트레스를 충분히 보상받고도 훨씬 남을만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할 개연성이 높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정산기간이란 이와 같이 개인의 이익과 해악을 -그것이 미래에 실현될 개연성까지 포함하여- 계산하는 회계기간을 말한다.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익과 해악을 고려하라는 말은 이 정산기간을 최대한으로 연장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장기적 관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해졌겠지만,'최대한'장기적인 관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불명료할 것이다. 나는'최대한'이라는 표현의 기준을 한 개인의 이성적 판단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이란, 한 개인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연장된 정산기간 하에서의 관점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주관적이지도, 전적으로 객관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이 판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산기간은, 그가 결정하고 싶어하는 정산기간과 다르다. 정산기간은 그의 욕망이나 선호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성적 판단에 달려있다. 어떤 사람이 30년 후에 자기에게 돌아올 잠재적 이익이 자신의 이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알고 있을 수는 있다. 혹은 그가 2000년 후에 일어날 일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면서 실제로 그의 이성은 그러한 판단에 이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최대한의 정산기간'라는 개념이 결국 개인의 판단력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인이 그것을 변경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완전히 주관적이지도 않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한 개인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산기간은 아무리 길어야 자신의 여생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발생하는 사건은 어떤 형태로건 이익이 된다고 간주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임종을 앞둔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손들을 위해 환경단체의 서명운동에 참여하거나 사후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서전을 저술할 수도 있다. 자손들의 이익은 노인 자신의 이익이 아니며, 사후의 명예는 그에게 직접 주어질 수 있는 이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현재 가치로 할인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정산기간은 남은 삶의 기간 이하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이 두 명제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A1 과 A2 가 결국은 한 개인 자신이 실행해야 할 원칙들이며, 그 원칙을 잘 수행했는가에 대한 평가도 결국 그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적) 행위, 이익과 해악, 그리고'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 대한 확인과 평가는 모두 개개인의 판단에 의존해 있는 것이며 대외적으로 공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앞에서 윤리의 필요성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윤리적 행위의 평가 역시 사회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의사소통이라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개발된 보청기가 결국 개개인에 의해 사용되고 또 관리되듯이, 사회적 필요에 의해 고찰된 윤리적 원칙이 오직 개개인에 의해 수행되고 평가되는 것 상황 역시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필요하다면 사회적)행위, 이익, 해악,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 등의 개념을 타인의 입장에서 추측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 한 개인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의도로 수행되었는지의 여부는, 분명 그 개인의 심리상태를 직접 열람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알려질 수 없겠지만, 주어진 여러 정황들을 통해 추측해낼 수는 있다.(이러한 추측은 오늘날의 법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익과 해악 역시 한 사회의 상식적인 기준을 토대로 추측할 수 있으며, 한 행위가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려되었는지의 여부도, 비록 앞의 두 경우보다는 까다롭겠지만, 그 행위를 수행한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태도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행위가 A1과 A2 의 기준을 얼마나 충실하게 만족하는지 대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물론 가장 진실한 판단은 행위 당사자에게만 허락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A1과 A2의 수행에 대한 판단이 심지어 당사자에게 있어서도 시간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음을 염두 해 두어야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이익과 해악에 대하여 잘 못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 그 판단을 번복해야할 수도 있다. 얼만큼의 정산기간이 최대한 장기적인가 하는 문제 역시 시간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에 자신이 고려했던 정산기간이 어리석게도 너무 짧았거나 혹은 비현실적으로 길었다고 토로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언제라도 가능하며, 한 때 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가서 그렇지 않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이렇게 수정가능하다는 사실을, 진실에 대한 판단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과 비교하고 싶다. 진실에 대한 판단과 진실 그 자체가 구분될 수 있듯이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그것의 실제 윤리적 정당성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진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진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야하듯, 우리의 윤리적 판단이 실제 윤리적 정당성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역시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이점은 우리가'윤리적 능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최대한 정확하게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이익과 해악을 계산하고, 자신이 고려할 수 있는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이 얼만큼인지 결정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이타심이나 동정심, 배려심 등이 아니라 일종의 지능이다. 그래서 윤리적 능력은 지적 능력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타심이나 동정심, 배려심 등에 기초한 윤리적 지침들은 오히려 충분히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도우미 역할을 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러한 지침은 훌륭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마치 수학공식을 스스로 증명할 능력이 없는 학생에게 그것에 대한 무조건적 암기가 어쨌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말하자면, 순종을 통해 부족한 이성의 능력을 보충한 것이다. 그러나 순종이 이성의 역할을 항상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조건들이 변화하고 나면, 선에 대한 숭배는 언제든지 악마에 대한 숭배로 뒤바뀔 수 있다. (마치 공식만을 암기한 학생이 난해하게 변형된 문제 앞에서 언제든지 오류의 늪에 빠질 수 있듯이.)
 이로써 A1과 A2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났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A1과A2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들이 결코 그것에 대한 정당화는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부가적 설명들은 우리가 왜 A1과 A2를 받아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A1과 A2를 받아드리기로 이미 결정했을 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설명이었을 뿐이다. 

3. 적용

 이제 A1과 A2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간단한 예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거짓말 
 비트겐슈타인은 여덟살 무렵'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하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꼬마 비트겐슈타인은 'Nein(No)'이라고 결론지었고, A1을 받아드린 우리의 대답도 이 꼬마의 대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과연 그러한 거짓말이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에 있다. 
 이 꼬마가 거짓말을 하기로 결정한 순간 그의 마음이 어떤 계산을 하고 있었을지 추측해보자. 그는 눈앞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혹은 어떤 이익을 취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마음먹으면서 아마도 약간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거짓말이 탄로난다면 자신이 겪게 될 해악은 거짓말로 얻을 수 있는 현재의 이익을 훨씬 상회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말로 그러한지는 의심해볼만한 문제이다. 이것은 어쩌면 한 사회의 문화에 달려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개인의 신뢰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화를 어쨌건 상상해볼 수는 있다. (물론 매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짓말의 이익은 그것이 들통 났을 때의 해악보다 훨씬 작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거짓말로 인해 얻게 되는 이익은 아마도 하나의 경우나 사건에 국한되는데 반해,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의 해악, 즉 신뢰의 상실은, 그 사람이 이후에 마주치게 될 무수한 사회적 거래에 불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신뢰라는 개념을 앞으로 여러 사건들에서 얻게 될 잠재적 이익이라는 개념으로 분해할 수 있다면, 거짓말의 발각으로 인해 감당해야하는 해악은 그것의 임시적 효과로 얻게 되는 이익보다'양적으로'크다. 
 꼬마가 느낀 두려움에도 이러한 판단이 개입되어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짓말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왜 그런가? - 거짓말로 인한 이익은 아마도 거의 100%의 확률로 실현되겠지만, 그것이 들통 날 경우의 해악은 실현될 확률이 매우 낮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거짓말로 인한 이익을 b, 발각되었을 경우 겪게 될 해악을 h, 그리고 거짓말이 들통 날 확률을 p라고 하면, 꼬마 비트겐슈타은 b > h x p라고 판단하여 거짓말이 더 이익이라고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b는 거의 즉각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보장된 이익일 것이므로 따로 확률을 고려하지 말도록 하자.) 거짓말이 들통 났을 경우의 해악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거짓말이 주는 이익보다 크지만, 매우 작은 값을 갖는 확률이 곱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익보다 작은 값으로 할인된다. 그래서 꼬마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한다. 우리 역시 이 꼬마의 생각을 받아드리고 A1에 따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확률p 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리고 우리가 얼만큼의 시간을 고려했는가에 따라 p 의 값이 달라질 수 있음을 주목해보자. 어떤 사실이 하루 만에 드러날 확률은 그것이 일년 안에 드러날 확률과 같지 않다.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에 따른다면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우리는 p 가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되어야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b > h x p 라는 식은 우리가 얼마나 긴'정산기간'하에서 고려하느냐에 따라 부등호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시간과 p의 관계는 정비례관계에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시간에 따라 p의 값은 분명 증가하겠지만 그 증가율은 감소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p는 1 이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에 따른 p 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그래프를 만족하는 어떤 함수 Ψ를 가정함으로써, p = Ψ(t) 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b > h x p 라는 식은 이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b > h x Ψ(t)     …①
 여기서 b 와 h는, 그것이 비록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어떤 정해진 사회조건을 가정한다면 상수로 취급할 수 있다. 따라서 ①의 부등호 방향은 오직 t에 의존하게 되고, t가 충분히 커져서 Ψ(t) > b/h 가 된다면, b < h x Ψ(t), 즉 거짓말의 이익보다 해악이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b < h x Ψ(t) 가 되기 위한 충분한 t의 값이 정확히 얼만큼일지, 다시 말해 거짓말의 잠재적 해악이 이익보다 더 크게 여겨질 수 있는 정산기간이 정확히 어느 정도일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우리가 A2의 지시에 따라'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려 한다면 부등호의 방향은 거의 대부분 오른쪽을 향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거짓말이 들통 났을 때의 해악이 그것의 즉각적인 이익의 3배이고, 30년 동안 그 거짓말이 탄로 날 개연성이 50%라면, 그리고 최대한의 정산기간이 바로 그 30년이라면, 그 거짓말은 이익보다 해악을 더 많이 가져오는 행위이므로 비윤리적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그럴법한 예상일 뿐이며, 만약 반대의 결론이 나오는 경우 A1과 A2는 거짓말을 하는 편이 더 윤리적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게 생각해본다면, 그러한 경우는 거의 상상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거짓말이 탄로 났을 때의 해악은 그 즉각적인 이익의 3배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며, 자신의 여생을 정산기간으로 설정했을 경우, 수십년 동안 어떠한 비밀이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 확률은 상식적으로 그렇게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과시 
 비슷한 예로 자신의 능력이나 장점을 과시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장점을 알게끔 하는 행위에는 분명한 이익이 따른다.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신뢰할 것이며, 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래의 무수한 이익에 대한 현재의 가능태이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스스로 자랑 할 경우, 이 이익은 분명 다소간 훼손된다. (인류문화권에서 대부분 그러하며, 동양 문화권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과시의 이익과 해악은 즉각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확률을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과시의 이익에서 해악을 제한 값을'b - h'로 표시하자. 자, 이렇게 과시가 이익과 함께 해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나 암묵적으로나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과시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는 과시가 가져다주는 해악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이익을 더 크게 생각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b - h > 0 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많은 경우 충분히 사실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시는 대부분의 경우 윤리적인 행위인가? 이에 대한 결론은 잠시 후로 미루고, 이번엔 다음의 경우를 고려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충분히 과시할만한 능력과 장점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이로써 그는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익 (b - h)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의 능력이나 장점이 그의 과시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그는 -h 없이 b 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과시에 따르는 해악 - 질시, 오만하다는 평가 등등 - 없이 그와 동등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그의 장점이 스스로의 과시 없이 과연 알려질 수 있을 것인가'이며, 이는 다시금 확률을 개입시킨다. 어떤 사람의 장점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에게 알려질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것은 그의 행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밖으로 표출되며, 사람들에게 조금씩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장점이 그의 과시 없이 암암리에 공개될 확률이 Ψ'(t) 라는 함수에 따른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가 과시하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b x Ψ'(t) 이며, 만약 t 가 충분히 크다면 
b - h < b x Ψ'(t)   …②
 가 될 것이다. 즉, 그가 과시하지 않는 편이 과시하는 편보다 더 큰 이익을 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산기간 t 안에서 ② 가 참일 것을 예상케 한다. 결국 b - h 를 얻기 위해서 과시를 선택한 사람은 최대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에게 해악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이고, A1 을 위반했으므로 비윤리적이다. 

 비록 꽤나 부족하긴 하지만 위의 두 예는 A1과 A2가 우리의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 이끌 수 있는지 충분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예들의 목표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받아드려 왔던 윤리적 당위명제들을 A1, A2 를 통해 도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A1과 A2를 일단 받아드렸을 때에 어떤 윤리적 당위명제들이 생산 가능한지 보여주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전통적 윤리와 A1,A2 로부터 유도되는 윤리가 상당히 유사하다면, 그것은 (비록 본질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수용되어온 윤리적 명제들이 A1과 A2로부터 그럴법하게 따라 나오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글에서는 더 다양한 적용 사례를 준비하지 못했다. 

3. 사회적 조건

 지금까지 우리는 A1,A2 두 도그마에 의존한 윤리학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비록 A1과 A2가 윤리학의 당위형식을 생산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제시되긴 했지만, 그것이 좀 더 쉽게 받아드려질 수 있는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자. 

1) A1 을 위한 조건
 이 조건은 아마도 서구 사회보다는 동양사회에 더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유교 문화권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개인의 사적인 이익추구를 사회 질서에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오늘날에도 강하게 남아있으며, 특히 공직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리나 부패를 비난할 때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비난의 초점은'어째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가'라는 지점으로 모아진다. 공직자는 자신의 자리에 해당하는 사회적 윤리의식을 가져야하며 권력자 역시 자신의 영향력에 걸 맞는 의무감을 가져야한다고 여겨진다.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며 심지어 정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왜 그러한 의식이 요구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A1과 A2를 받아드린다면 이들에 대한 비난의 초점은 결코 그들이'사적인 이익을 추구했다는 사실'에 모아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윤리적인 행위의 필요조건이다! 그들의 잘못은 충분히 장기적인 관점 하에서 자신들의 손익 계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와 같은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A2를 받아드리고 그에 따라 합리적인 계산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A1에 대한 인정이 우선시 되어야한다. 즉, 그들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끔 먼저 허용해야하는 것이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어야지만 A2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어야하며, 그것은 당연한 전제가 되어야한다. 단, 그 이익은 가장 장기적인 관점 하에서 드러난 이익이어야 한다는 강령이 추가되어야 할 뿐이다.

2) A2 를 위한 조건
 위에서 예를 든 부패 공직자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가 충분히 장기적으로 사고했다면 아마 부패를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행위로 얻을 수 있는 즉각적인 이익(b)보다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 감수해야할 해악(h)이 엄청나게 크며,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것이 발각되지 않을 확률은 b/h 보다는 분명히 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선 단순히 합리적인 판단능력의 결여에서 비롯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그가 고려한 정산기간이 매우 짧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사회와 정부의 시스템은 수시로 바뀌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당분간만 발각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이 문제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이 생각은 충분히 현실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정산기간을 그렇게 길게 설정할 합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안정성 결여로 인해 발생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체(政體)와 문화의 구조가 지나치게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에서는 장기적인 관점이 쉽게 성립할 수 없다. 장기적인 관점이란 어디까지나 예측 가능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2가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안정된 사회가 요구된다.

3) 사회 변화와 윤리의 화석화
 개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지고, 사회가 모든 면에서 안정을 유지한다면, A1과 A2가 그 사회의 구체적인 문화적, 정치적 조건들을 통해 생산해내는 당위명제는 아마도 전통적인 윤리명제들과 상당히 유사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고착화되고 나면 사람들은 A1과 A2가 생산해낸 윤리 명제들을 실질적인 정당화 과정 없이 관습적으로 받아드릴 것이다. 그래서 결국 A1과 A2는 잊혀지고 여러 윤리적 명제들만 화석처럼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구체적인 문화적, 정치적 조건이 변화하면 이 명제들은 더 이상 A1과 A2로부터 정당하게 따라 나오지 않는다. 이 명제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인습으로 전락할 것이며, 사회는 그 인습을 보호하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정당화의 과정을 시도하려는 사람들로 나뉘게 될 것이다. -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출된 윤리적 명제에 대한 관습적 수용을 항상 경계해야한다. 그것은 언제나 A1과 A2,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조건들로부터 합리적으로 따라 나와야 하며, 사회가 변하면 결론도 변화해야한다. 우리의 윤리학에서,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도그마는 오직 A1과 A2 뿐이기 때문이다. 


4. 윤리학, 그리고 영원성 
 이제 A1과 A2가 함축하고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탐색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의 설명이 사회에 일반적으로 배포될 수 있을 것을 전제하고 씌어졌다면, 이 마지막 항목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을 염두 해두고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일종의 부록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거짓말'의 예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판단을 가능케 했던 식 ①을 상기해보자. 
b < h x Ψ(t)     …①
 만약 우리가 t 를 무한한 값으로 잡는다면 어떻게 될까? lim(t→∞)Ψ(t) = 1 일 것이기 때문에, t가 한없이 커질 경우 위의 부등식은 b < h 로 간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거의 확실히 참이다. 때문에 우리가'영원한'정산기간 하에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남들에게 발각될 경우 이익보다 해악을 다 많이 주게 되는 모든 행위가 비윤리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시간을 고려할 경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모든 일은 어쨌건 일어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A1 과 A2를 통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지점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단 앞에서 말했던'윤리적 능력', 즉 일종의 지적인 능력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의지와 같은 개념이 다시 요청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혹은 미학적 욕망이다.'영원의 관점 아래에서 '1)바라볼 때 우리는 A2를 가장 완전에 가깝게 실행할 수 있으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한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다. 비록 우리에게는 무한한 이성이 주어져있지 않지만, 무한에 대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그것과 가까운 곳으로 끝없이 인도한다. 2)그리고 아마도 오직 그곳에서, 우리는 진정한 윤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1) 이것은 스피노자가 사용한 '영원의 형식 아래에서' 라는 표현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2)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가 완전히 선하다면, 그것은 그가 매우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무한한 이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따라서 신의 지고지선함과 전지전능함은 상충하지 않는다.






 상병 이지훈 
 와~!! 승일씨 대단하십니다 03-09   

 병장 박동일 
 오오.. 대단하다. 
 한동한 조용하시더니, 03-09   

 병장 임정우 
 그동안 안보이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으아. 03-09   

 상병 진규언 
 일단, 으악! 하고 놀라고.. 주르륵 드래그 하여, 고이 저장해놓았습니다. 
 마음 다잡고.. 읽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03-09   

 상병 김지민 
 압도 03-09   

 일병 구본성 
 이렇게 다량의 생각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긴 하지만, 전 이해가 안 가는군요. 삶에서 맞닥뜨리는 곤란한 질문은 오히려 '무엇이 행복(글에선 이익이라 생각되는)인가?" 하는 문제이겠고,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이 현재로 내려와서 현재의 행세를 하는 것도 납득이 안 갑니다. 공간의 확대라고 표현하신 공리주의적 관점은 사회의 입장에서 생각했을때 정당성을 얻겠지만, 개인에게 있어 시간의 확대라는 것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익의 계량화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곳에서 논하신 것처럼 몇 가지 변수들로만 해결되기엔 삶의 양상은 너무 복잡한 영역인듯 합니다. 한 가지 변수가 추가된다고 해도 쉽게 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라고 느껴지네요. 03-10   

 병장 이승일 
 본성| 제가 썼지만, 저 역시 이 글에 그렇게 공감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제가 쓴 글이니 책임감을 가지고 무언가 답변을 해야겠지요. 

1. 먼저 행복(이익) 이 무엇인가는 이미 정해진 문제가 아니라 항상 고민하는 문제다. 라는 지적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논의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행복(이익)이 무엇인지 찾아 헤맨다고 할지라도, 매 순간 그 때 나름대로의 행복(이익) 에 대한 기준은 항상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할지라도 말이지요. 마치 우리 삶의 목적은 항상 변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매 순간순간을 이끄는 목적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2. 잠재적 가능성이 현재행세하는 것이 납득가지 않는다면, 주식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사실 경제학의 발전이란 바로 미래 가능성을 현재 매매가치로 계산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주식이란 어떤 기업의 현재 가치가 아니며, 예상되는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끌어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경제학에서는 물론 매우 많고, 경제학 밖에서도 굉장히 많습니다. 사실 양자역학에서 사용되는 아이디어 중 하나이기도 하죠. 기본적인 발상은 모두 동일합니다. 미래의 본질은, 그것이 시간적으로 현재와 분리되어있다는 것을 떠나서,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미래가 아니며, 현재 실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룰 수 있게되죠. 물론 우리는 미래를 완전히 다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미래는 부분적으로(즉 확률이 곱해진 형태로) 현재화 되어 다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익의 계량화와 복잡한 삶의 양상간의 괴리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인정하며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인간이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복잡한 다양성 속에서 무언가 양적인 규칙을 찾는 행위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설사 제가 이 글을 아주 진심으로 썼다고 하더라도 삶의 다양성을 완전히 계량화하기를 기대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정도의 진심이 아닌 경우에야 더욱 그러한 기대를 하진 못하겠죠. 물론 이 글을 얼마나 진실된 마음으로 썼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 글이 그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느냐와는 별도로, 복잡한 삶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 규칙을 찾는 것은 타당한 목표이며, 인간의 지성을 이렇게 발전시키고, 우리가 이렇게 인트라넷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목표 아래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03-11 * 

 상병 최영일 
 헐, 이 글 13장이나 되는군요. 놀랐습니다. 시간을 두고 곰곰히 읽어봐야겠군요. 3월달의 글입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