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1 : 김지민씨의 글을 읽고 
 병장 김현동 03-23 09:04 | HIT : 240 



( 다 써놓은 걸 흔적없이 날려먹어서 다시 썼.......)


 유리창1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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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민씨가 이 시를 썩 훌륭하지 못한 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1. 이렇다 할 표현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2. 기가막힌 운율감도 없다. 3. 왜 슬픈지 독자가 공감할 수 없다. 정도로 파악된다.

1. 표현력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일상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그러니까 도구의 언어를 존재의 언어로 바꾸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겠다. 그리고 존재의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이런 나의 입장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시를 향한 수많은 입장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지용의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미지는 새와 유리이다. 전 행에 걸쳐서 새의 이미지는 가장 중심적으로 드러나는데, 차고 슬픈 것, 언 날개, 산새, 날아갔구나 등의 시어가 가리키는 것, 혹은 시어의 숨은 주체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새는 산새처럼 날아갔다. 하늘로 멀리 날아가는 새의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와 닿아 있다. 날개를 가진 것, 하늘, 그리고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미지라면 그것의 종착점에 죽음이 있다는 주장을 해도 일정 정도 이상의 적합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리는 새와 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새는 유리 밖에 있고 나는 유리 안에 있다. 새는 어둠 속에 있고 나는 밝은 곳에 있다. 새는 추운 곳에 있고 나는 따뜻한 곳에 있다. 어둠과 빛, 추운 곳과 따뜻한 곳의 이미지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유리이다. 하지만 화자는 유리를 깰 수 없다. 왜냐하면 유리는 차단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새가 상을 남기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유리가 없으면 새를 볼 수 없다. 상황의 아이러니다.

 새와 유리의 이미지를 통해 시 전체가 관통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은 죽었고, 화자는 그것을 슬퍼한다. 그것은 울부짖는 슬픔이 아니라 사무치는 슬픔이다. 이 시가 극도로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시인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슬픔을 삼키기 때문인데 이러한 극도의 슬픔은 마지막 행에서 읽어낼 수 있다. '아아'와 같은 감탄사나 날아 갔구나 다음에 오는 느낌표는 어쩌면 심훈이 절제하지 못하고 표출한 극적인 감정보다도 더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을 준다. 이것을 '한'이라고 부는 게 그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 시가 이 모든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한'이다.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면서 더 이상 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 시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 정도로 생각하는 건 시를 읽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작가론적 측면의 해석을 제외하더라도, 이 시는 지극히 슬프고도 한스러운 이미지를 그린다. 상실, 단절, 흐릿함,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는 반복, 열없이 붙어서서 부는 입김 등 지용은 외롭고도 황홀한 상실감을 이토록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폐혈관은 결코 메시지를 지니는 시어가 아니다. 폐혈관에서 메시지를 찾았다면, 순전히 한국의 국어 교육 탓이다. 아하, 여기서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사용한 건 시인의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기 때문이구나, 정도로 해석하는 건 결코 정답이 아니다. 고운 폐혈관 이라는 시어를 고운 심장, 고운 고사리 손, 고운 모세혈관, 고운 뺨 등으로 바꾸어도 이 시가 지니는 한스러움은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다른 시어로 교체하였을 때 폐혈관만이 지니는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교체되는 문제점이 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의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기에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썼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폐혈관이 어떤 이미지를 지니기에 이 시어를 썼던 걸까를 고민해야 한다. 물론, 고민할 필요도 없다. 폐혈관이란 말을 입 속에서 두어 번 굴려보면 혀끝에 감도는 맛이 있을 거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다. 폐라는 글자를 머리에 떠올리면 숨이 차다. 폐肺와 같은 음가를 지는 폐閉 덕에 꽉 막히고 답답한 느낌이 난다. 그리고 혈관이라는 단어에서는 가느다랗고 약하고 살짝만 쥐어도 터질 것 같고 심지어는 꽉 쥐어서 터뜨리는 가학성과 꽉 쥐어져서 터지는 피학성도 느껴진다. 폐혈관은 이렇게 답답하고도 위험한, 위태위태하고 불안한 이미지를 뿜어낸다.

 오히려 이 시의 가장 큰 단점으로 나는 보석을 떠올린다. 별과 보석은 너무나도 식상한 메타포다. 서로 너무 닮아있다. 물론 별이 보석처럼 박혔다, 라는 표현을 일상의 언어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시의 언어라 생각한다 해도 죽은 시의 언어라고 보아 마땅하다. 지용이 이 시를 썼던 당시에도 별과 보석의 연결이 식상하고 지루한 맺음이었는지 알 수가 없기에 이렇게 말하는 게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여하튼 21세기에 사는 나는 이 보석을 칼로 도려내서 다른 시어로 바꾸어 버리고 싶다.

2. (미리 말하지만 여기서 소월과 지용을 나누는 방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김춘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소월은 전통 서정시 계열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그의 시가 지니는 서정성이 독보적이라는 뜻이며, 그 서정성은 한국 특유의 민요적 운율로 극대화 된다. 소월의 경우 운율이 서정성을 만들어 낸다.

 지용이 소월과 같은 계열의 전통 서정시를 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미지스트 정지용에 국한하여 말해야 한다. 이미지스트에게 운율은 도구의 역할을 할 뿐이다. 전통 서정시에서는 운율이 그 자체로서 만들어내는 서정성이 있지만, 이미지즘 시에서 운율이 하는 역할은 이미지의 극대화일 뿐이다. 소월의 운율이 음악적이라면 이미지스트 정지용의 운율은 회화적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소월의 시는 노래이고, 지용의 시는 그림인 것이다.

 천부적인 감성에 의한 것인지, 극도로 세밀한 이성적 작업에 의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유리창1에 찍혀있는 5개의 쉼표는 시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부딪히고, 반짝, 별이, 심사이어니, 아아 다음에 오는 쉼표는 앞 뒤의 이미지를 나누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쉼표 앞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운율의 창조는 그것 자체의 음악성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다. 민요조 노래의 악보에 숨표를 찍어 넣는 게 아니라, 용의 그림에 눈을 찍어 넣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가 막힌 운율은 이미지스트 정지용이 추구하던 게 아니다. 화가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3.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시인은 시를 쓸 때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가. 조금 비겁하게 말하자면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를 긍정하는 편이다. 그리고 조금 덜 비겁하게 말하자면 전자보다 후자를 긍정하는 편이다. 시를 쓰는 동안 시는 시인의 것이다. 독자의 반응 따위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시인의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게 아니다.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나고 난 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독자의 몫이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독자가 얻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좋은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가지만큼 시에서 의미를 퍼 가면 된다. 큰 바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의미를 퍼 갈 것이며 조그만 바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은 의미를 퍼갈 것이다. 좋은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샘이어야 한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어떤 바가지를 들이대도 그 바가지만큼의 의미를 퍼주어야 한다. 그것이 좋은 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그린 시가 아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남자의 노래일 수도 있고, 불변의 진리를 잃은 학자, 영원한 예술을 잃은 예술가, 신앙을 잃은 신부, 조국을 잃은 애국자의 노래일 수도 있다. 결국 이 모든 해석의 공통분모는 '상실'밖에 없다. 이 시가 그려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상실한 자의 슬픔이다. 상실에 기인한 한스러움이다. 독자는 자신이 읽은 한스러움을 그것 자체로 느끼면 된다. 괜히 정답을 찾으려고 헤맬 게 아니다.

 유리창1은 결코 불친절한 시가 아니다. 폐혈관을 단서로 폐렴으로 죽은 아들을 추리해야 할 의무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추리한다면 시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모욕이다. 폐혈관은 폐렴의 단서다, 라고 가르친 건 대한민국 중고등학교지 정지용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정답을 만들어 놓은 우리의 학교를 보고서는 비분강개할지도 모른다. 삼천포로 잠깐 빠지자면, 이것이 내가 국어 교사를 할 수 없는 이유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 사이의 거대한 괴리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올바르게 시 감상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상과, 효과적으로 언어영역 성적 올리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상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가 없다.

 단 한 가지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폐혈관'이라는 시어 자체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이다. 나는 지용의 선택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폐혈관은 다른 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시어이고, 이국적이며, 그것만이 가지는 독특한 이미지의 선명함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런 이미지는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데, 지민씨나 다른 누가 '폐혈관'은 너무나도 어색하고 전혀 아름답지 못한 단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이것은 단순히 호불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나도 맛있는 크림 스파게티가 누군가에게는 냄새조차 맡기 싫을 정도로 느끼한 음식일 수 있듯이.



 병장 오기환 
 지민씨 글도 그렇고 현동씨 글도 그렇고 대단하군요. 

 문학적 감수성을 
 안드로메다 어디쯤에 두고 온 사람 중의 한 명으로서, 감탄만 나오네요. 

 그건 그렇고, 그래도 폐혈관.. 이라는 단어가 
 시를 천천히 낭독할 때 주는 이질감은 어느 정도 있는 듯 합니다. 
 차라리 폐혈관이 아닌 다른 단어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 
 저도 예전에 해 본적이 있거든요. 
( 이 자릴 빌어 정지용의 아들 운운 했던 국어 선생에게 저주 한번 날려주고...) 

 물론 시는 온전히 시인의 것입니다. 
 다만, 저 역시 폐혈관이 주는 어떤 '갑갑함' 때문에, 
 저는 이 시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 
 아무튼, 현동씨 글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우 흥미롭네요. 03-23   

 병장 성태식 
....... 현동씨는 지민씨와 더불어 책마을을 이끌어 갈 굇수분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앞으로 자주 그 능력을 보여주세요! 03-23   

 병장 임정우 
 태식 / 어짜피 현동님은 운영자이신걸요. 으헐헐~ 03-23   

 일병 김대윤 
 저는...이곳에 계신 분들이 다 무섭습니다. 03-23   

 병장 성태식 
 정우 // 크핫. 그렇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민씨를 차기 보안관으로! 
(..... 그렇습니다. 음해세력입니다. 우헤헤.) 03-23   

 상병 김지민 
 길게 쓰다가 지쳤습니다. 어차피 조금은 무의미한 '추잡한 변론'이 될 듯 싶어서 짧게 말씀드립니다. 

 일단 현동씨께서 제가 시를 까는 논조를 요약하신 것이 좀 잘못되어있습니다. 제 논조는 위에 제시된 바와 같이 분리되어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공감대 형성을 위한 표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감이 잘 안된다. 차라리 그럴 바엔 운율이라도 좋던가' 하는 이야기인데, 분리되어 표현되다 보니 플러스 알파의 단점이 무시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운율감에 대한 지적은 다만, '하다못해 이거라도 잘 하던가' 정도의 논지였을 뿐이지 모든 시가 운율감을 갖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시에 대한 지향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현동씨 또한 이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공감대 형성을 위한 수 많은 길을 뚫어놓아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느낌도 들고 저런 느낌도 들게 하는 것이 '좋은 시'라는 점에서는 저 역시 공감합니다. (국어 교과서적인 해석입니다만, 한용운 '님의 침묵'에서 님을 꼭 그 님만으로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이 유리창이란 시에서 '폐혈관'이라는 단어는 수 많은 공감대 갈래의 장치적 어휘로서는 하아아안참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본문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정지용은 폐혈관이란 단어에 집착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자신의 특수상황을 시에서 단서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 수많은 공감대를 위했더라면 '폐혈관'보다 더 좋은 어휘가 있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오해하고 계신 점이. 제가 이 시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시로 파악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말씀드리며, 다만 '아들의 죽음'을 나타내지도 못했으며, '수많은 공감대 형성'에도 실패 한 이 시가 왜 명시로 분류되는 지 이해 못한다는 것 뿐임을 알려 드립니다. 
 저는 그 의아함에 '정지용이 유명한 시인이기 때문에' 라는 의혹을 달고 있는 것이구요 

 그리고 지적하신 '폐혈관'이라는 어휘가 생소할 뿐만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시에서 다분히 통일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시어라는 점에서는 제 주장을 굽힐 수 없습니다. 차라리 '새'와 연결된 시어였다면, 차라리 '찢어진 날개'를 좀더 시적으로 인용했다면 상실감을 통일성 있게 형상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이질감을 (마치 밥먹다 돌 씹는 것 같은) 느끼지 않게 하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포인트는 '공감대 형성' 이겠지요. 메시지를 굳이 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독자들이 시를 읽으며 슬픔을 시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아무런 효용이 없는 시라면 그것은 단지 조잡하게 엮어놓은 텍스트일 뿐이겠지요. 제게 시란 '메시지'가 아니라 '느낌으로 다가오는' 텍스트입니다. 현동씨께서는 자꾸 메시지 메시지 하셨는데, 저는 시가 꼭 일정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저 역시 바라볼때마다 새로운 시가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렇게 바라볼 때마다 새롭기 위해서는 '공감대'의 가능성을 여기저기 열어놓는 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고 나서 시가 시인을 떠나는 것은 맞는 말이겠습니다만, 제가 본문 중에서 말씀 드렸듯이, 어떤 '하중'을 넘겨주기 이전에 노력해야 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새'끼 내 품 떠난다고 싸질러놓고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뭐 조금은 다른 비유겠습니다만. 03-23   

 상병 김지민 
 폐혈관 어휘 자체의 호불호를 따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떤 시에서 이것이 쓰일 때, 일반적인 호불호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콜렛이 좋다 하더라도 
 쿠키 안에 초콜릿을 넣는 경우와 
 빈대떡에 초콜릿을 넣는 경우가 다를테니까 말이죠. 03-23   

 병장 김현동 
 사실 시를 대하는 태도부터 차이가 나다보니 지민씨와 저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저는 이래요. 지민씨는 공감대의 가능성을 여기저기 열어놓는 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시인이라면, 독자가 이 단어를 보고서 공감대를 형성하겠지, 라는 고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감대는 생겨도 그만 안 생겨도 그만입니다. 

 제 글에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쓰는 것과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쓰는 것 둘 다 소극적으로 긍정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전자를 소극적으로나마 긍정하는 이유는 공감대 형성을 시의 목적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라기 보다 시가 문예지에 발표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인이 독자를 예상하지 않는다면 문예지 따위에 시를 발표할 일도 없지요. 결정적으로 이 문제에 자신감있게 해답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독자를 염두에 두는 시인을 소극적으로 긍정하는 겁니다. 하지만 시는 독자가 없어도 시입니다. 이것에 대한 제 주관은 뚜렷합니다. 시인은 독자에게 아무런 하중도 넘겨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시인으로부터 그 어떤 하중도 받을 의무가 없구요. 굳이 다다이즘이나 쉬르레알리즘까지 가지 않더라도 독자의 전제가, 공감대의 전제가 시에 있어 결코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제 주장의 심정적 근거를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의 차이는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인데,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폐혈관이 매우 훌륭한 시어 선택이라고 보는 입장이므로, 호불호의 문제라는 제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지민씨는 초콜릿 같은 좋은 어휘라도 빈대떡 같은 시 속에 있다면 일반적인 불호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폐혈관이 초콜릿이고 빈대떡이 유리창1인가요? 제 생각으로 지민씨가 하고 싶은 말은 '쿠키 같은 유리창1안에 염소똥 같은 폐혈관'인 것 같은데요. 그래야 이 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유를 '폐혈관'이라는 어휘에 추궁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지민씨가 마지막 댓글의 비유를 이 시에 직접적인 메타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제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이것도 참 애매한 게, 무엇이 쿠키냐, 무엇이 빈대떡이냐, 무엇이 초콜릿이고 염소똥이냐를 판단하는 것 부터가 사실문제가 아니고 가치문제이기 때문에 선호와 비선호의 문제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지민씨도 느끼시겠지만, 지민씨와 저에게 수렴점은 없는 것 같아요. 03-23   

 병장 김현동 
 아차, 운율의 문제를 두고 곡해한 것 죄송해요. 그런데 사실 이 시가 훌륭한 이미지즘 시가 아니라면, 운율이 아무리 기가 막혀봤자 소용 없지 않을까요. 운율은 단지 이미지를 선명히 하기 위한 도구적 역할만 할 뿐이니까요. 03-23   

 상병 김지민 
 저는 시는 독자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화장실에 쓰는 낙서도 하다못해 보면서 킬킬댈 사람들을 떠올리며 적는 것이죠. 만약 정말 의도가 없다면 단순히 '심심풀이'일 것입니다. '시' 말예요. 

 저는 정확히 현동씨가 '시를 쓰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분명히 독자를 염두해 두고 쓰고 있습니다. 일기장에만 적어놓는 시라면 독자는 '제 자신'이 될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제 시에 독자는 있습니다. 그래서 제 시는 하중을 넘겨줘야 하고, 하중을 넘겨주기 전에 충분히 이것이 친절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꼭 문예지에 올리는 것이 아니더라도요. 

 설령 저 혼자만을 위한 시더라 하더라도, 먼 훗날 읽게 될 것을 생각하며 불친절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쿠키, 염소똥 이건..... 
 폐혈관이라는 시어가 다른 시에서 씌여 있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그 시에서 폐혈관이라는 시어는 시의 분위기에 이질적이지 않았으며, 갑작스런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고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시 전체적인 이미지가 뭔가 신체적이고 해부적이었던 고어의 느낌으로 기억되네요. 
 아무튼 이런 경우엔, 폐혈관이라는 초콜릿이 쿠키라는 적절한 바탕안에 숨쉬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리창은 전혀 분위기가 딴판인 (물론 제 주관으로) 느낌이므로, 유리창과 새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다가 갑작스럽게 폐혈관이 튀어나와 놀라게 하므로, 같은 어휘일 지언정 빈대떡 속에서 초콜릿을 먹듯이 부조화라는 말입니다. 
 쿠키 속의 염소똥이라는 것은, 속에 들어가는 재료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비유가 옳지 않습니다. '폐혈관'이라는 시어는 두 시에서 똑같으니까요. 바탕만 바뀌었을 뿐. 
 쿠키와 빈대떡이라는 바탕말이죠. 

 물론 본질적으로 이것은 가치문제입니다. 호불호를 따지는 것이 당연하긴 합니다만, 웬만한 호불호가 그러하듯이 이것도 '일반적인 호불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맛이 특이한 사람은 초콜릿 넣은 빈대떡을 조낸 맛있게 먹을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그런 빈대떡이 과연 그 사람을 제외한 평가에서 '좋은 음식'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논점은,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느냐, 현동씨가 이 시를 좋아하느냐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이 시를 봤을 때 이 것이 과연 '명시'로서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03-23   

 병장 김현동 
 제가 시를 쓰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좀 가르쳐주세(......). 

 요즘 제가 쓰는 시는 모두 미끄러지는 의미의 안타까움에 관한 것입니다. 나와 너의 소통 불가능성. 소통의 불가능. 너와 나 사이를 차단하는 것.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한계와 딜레마. 뭐 이딴 것들인데, 시를 쓰면서 이런 주제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짓이죠. 소통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소통을 위해 시를 쓰는 꼬락서니라니.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시인을 말씀드린 거는 이것과도 유관합니다. 차피 자아는 타자와 소통이 불가능하니까요. 아, 역시나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다시 폐혈관인데(......). 지민씨가 한 말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저는 폐혈관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레기라고 보시는 줄 알았으니. 그러니까 지민씨는 폐혈관 자체의 이미지를 문제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이미지가 나머지 시의 분위기와 부조화를 이룬다는 뜻이었군요. 

 초콜릿을 넣은 빈대떡을 폐혈관이 들어간 유리창1로 직접 비유하셨으니 이제 좀 편합니다. 이 극단적인 비유를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난감한데,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것에 대해 좀 의아합니다. 지민씨가 "폐혈관이 여기에 들어가는 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당연히 이렇게 느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 딱 그만큼 다른 누군가도 "폐혈관이 여기 들어가는 건 너무나도 적절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당연히 이렇게 느낄 거야" 라고 생각할테니까요. 

 어떤 의견이 다수냐를 따지는 것도 지금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어느쪽이 다수이건 간에, 사실 이렇게 말하는 건 다수가 가지는 권위에 호소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고, 소수가 좋아하는 것은 훌륭하지 못한 것이다. 이 주장의 논리적 취약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죠. 

 고로 이 시가 명시이냐, 졸시이냐를 판단하는 건 시를 읽는 독자의 몫입니다. 아무리 교과서에 나오고 문제지에 나와도 시를 읽고 감흥이 없으면 그에게 이 시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읽을거리일 뿐이고 그냥 답을 맞히기 위해 외워야 하는 암기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절절히 사무치는 한을 느꼈다면, 그에게 이 유리창1은 명시가 되겠죠. 사람들이 이 시를 두고 명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지민씨는 정지용의 이름값 때문에 이 시가 허명을 얻은 것은 아닌가, 라고 물으실 것 같은데(아니면 죄송합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그것까지 따지라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사실 좀 걱정이 되는군요. 03-23   

 상병 김지민 
1. 저도 완전한 소통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시를 통한 소통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타인과 타인은 분리된 개체이기 때문에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지요. 
 제가 한숨과 함께 잘 섞어쓰는 말 중에 '진심은 결국 절대로 통하지 않아'라는 말이있습니다.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네요 

2. 어떤 의견이 다수냐를 따지는 것은 다수 권위에 대한 호소라기 보다는 '시'가 가지는 특성 때문입니다. 어떤 문학이 그렇지 않겠습니까만은 쓸데 없는 군더더기를 최대한 덜어내고 경제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그것이 작가의 몫이던 독자의 몫이던 이것은 둘째로 칩시다) 시라고 했을 때 여기서 사용 되는 언어는 '다수의 언어'가 됩니다. 

 언어를 '시어'로 적절히 변용하고자 할때, 적당히 다수가 쓰는 언어가운데서 변용을 통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쓰는 스킬은 현동님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를 '낯설게'만드는 방법을 통해 독자들로 부터 시적 감흥을 얻어낼 수 있는데, 이러한 '낯설게 하기' 기법이 어느정도 일반화된 언어를 변용시키는 수준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되어버리면 그 시어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가 스스로만이 알 수 있는 언어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심지어는 작가 스스로도 먼훗날 자신의 시를 펼쳐보았을 때 이것이 대체 무엇에 대한 비유였는지, 어떤 것을 '낯설게'한 것인지 까먹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개그'를 치는 것과 비슷한 논리입니다. 많은 사람들로 부터 '웃긴 개그'라는 평을 듣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논리'에서 깨는 아이디어를 생각해야지 '협소한 논리'에서 깨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았자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군대 개그를 하나 들먹이겠습니다. 

 저와 제 고참이 가끔 사용하는 이 개그는 '잘 못들었습니다'의 변용으로서 전화할 때 '여보세요?' 하며 되묻는 상황을 군대에 맞게 변용한 개그입니다. 
 말하자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 통신보안?" 

 이라고 개그를 치는 것입니다. (솔직히 조금 웃깁니다) 

 하지만 이 협소한 군대개그가 저 넓디넓은 사회에 가서 쓰인다고 칩시다. 아마... 외계인 보듯 쳐다볼걸요. 
 그래서 시어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도 '시는 독자를 향한 것이다'라는 제 주관 아래서의 생각이지만요.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다수냐 아니냐를 묻는 것은 '훌륭하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라기 보다, '먹히냐 안먹히냐'를 묻는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변용시킨다면 물론 '훌륭하냐 아니냐'로도 쓸 수 있겠지만요. 

3. 그리고 제 의견이 다수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은, 그 글의 논지이자 주장입니다. 허허. 다수가 아니라면 제 글이 틀린 것이구요. 

4. 물론, 어떤 시를 읽으며 이것이 좋은시다 아니다를 판가름 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입니다만, '명시'는 '좋은 시'와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좋아서 이름난' 시 라는 뜻이지요. 저는 거기에 태클을 거는 겁니다. 과연 일반적인가. 그 일반적이라는 범주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는가, 정지용과 친했던 문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현동씨 말이 맞습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한 바 있구요. 03-23   

 상병 김지민 
 결국은 또 시의 지향점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이 나는군요. 크하핫핫 
 그러니 현동님 말대로 수렴점이 없어보입니다. 모쪼록 제 의견에 대한 현동님의 오해가 풀린 것 같으니 더이상의 논의는 의미가 없어 보이네요. 

 시가 독자들을 염두해 둘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현동씨와 술자리에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정모때 만날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히히 03-23   

 병장 김현동 
 결론은 술이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시인의 한 손에는 언제나 시가 있어야 하고 다른 한 손에는 언제나 차가운 소주잔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저는 막장설탕 빼고는 남아있는 게 없다는 거(.........). 

 하긴, 저 저녁먹은 뒤에, 지민씨 병장일 때, 그때 보는 방법도 있겠군요(.........). 03-23   

 병장 이희웅 
 아니 이것은 염장지르기 스킬....의근한 스킬입니다...(웃음_) 
 두분의 논의 충분히 잘 읽었습니다.... 
 지민님 말도 맞고 현동님 말도 맞고....마치 황희정승님이 되는냥~~ 
 한손엔 시가 한손엔 소주잔이.... 
 오늘의 정답이고 결론아닐까요??? 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