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위기의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  
일병 홍명교   2009-03-10 12:37:56, 조회: 105, 추천:0 

<위기의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

생각해보면 그래요. 매체와의 모든 마주침이 그렇겠지만, 책읽기만큼 기억이나 삶과 이어져있는 행위는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책 속에 담긴 그 고유의 스타일과 역사(들)이 오로지 사적이기만 했던 제 기억들과 충돌하는걸 발견할때마다 찌릿찌릿한 전율을 느끼는거죠. 

대학로에 있는 모 대학에 다니던 옛 여자친구는 존경할만한 페미니스트였습니다. 그 친구에게 배운 점도 많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한 것도 참 많았죠. 편의상 A라고 부르겠습니다. A와의 관계에서 연애나 사랑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어느날은 A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저는 사르트르를 살짝 좋아하는 입장에서 보부아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사르트르의 평생의 반려자이자 계약연애 관계였다는 점? 정도였었답니다. A에게 들은 보부아르의 이야기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얘길 많이 하면서 말예요. 물론, A와 저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제가 많이 어리기도 했고, 또 인연이 아니었겠죠. (정말 무책임한 결론이죠? 하지만 이별에 별다른 변명꺼릴 찾을 수는 없네요.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라면, 자책 가득한 자아비판이라도 해야하는데... 그런건 더 역겹게 느껴져서요.)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저는 이 책 <위기의 여자>를 읽었어요. 원제는 "La femme rompue"인데 직역하면 대략 "좌절한 여자", "무너진 여자" 라는 뜻이래요. 이 소설은 중년 이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권태의 시기를 지나간 한 부부에게 찾아온 위기, 즉 남편의 외도, 그리고 그 이후의 아내의 갈등을 그립니다. 화자는 현모양처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딸 교육과 부부간의 관계에 바쳐왔던 아내로, 그녀는 그때까지 자신의 삶이 모조리 무너지는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일기체 형식으로 쓰여져서 9월 어느날 가을로부터 시작해서 다음해 봄까지 이어지는 그 지난한 과정이 저에게 있어서는 정말 괴롭고 쓰라린 과정이었답니다. 제 가정사가 떠오르면서 남의 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저의 지난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던 지난 시간의 연애의 기억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 가족史와도 마주쳐 더 가슴 깊숙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알베르 카뮈 전집과 사르트르 문학/철학의 쉬어가는 타임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오랜만에 읽는 여류작가의 소설인데다 남다른 인연(?) 때문인지 많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책읽기의 경험이었습니다. 소설은 결국 주인공인 아내가 스스로 자신의 좌절한 삶을 딛고 일어서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지난한 투쟁의 기록으로 끝맺어집니다. 그러나 결코 그 고뇌와 여성-실존적 자아가 겪는 갈등이 끝나지 않은 듯한 뉘앙스로 끝나는 종반부는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소설은 끝나도 삶을 이어지고 괴로운 삶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삶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괴롭도록 슬프게 자각한 그녀가 스스로 그 고통을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요. 아마도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카뮈가 서로 논쟁하고 싸워가며 일군 실존주의의 반쪽짜리 성과의 나머지 반쪽을 일군 장본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과찬인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 소설은 얼마전에 읽은 <이방인>(알베르 카뮈)이나 <전락>(알베르 카뮈)만큼이나 저를 자극시킨 소설이니까요. 그녀의 다른 소설 <타인의 피>나 실존주의 철학과 여성사회학이 접합된 '명저'라는 <제2의 성>도 어서 읽고 싶네요. 사르트르의 책 4권, 카뮈 전집 중 4권을 구매하고 보부아르는 이 책 1권만 샀는데, 그녀의 사상과 삶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 차올라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35:21 

 

병장 김무준 
  엉엉. 요즘 해석하기 힘든 텍스트가 자꾸만 올라와서 슬퍼요. 짖을 데가 없어요. 진짜 철학을 한 번 파봐야하나. 그러기에는 지금 파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엉엉엉. 2009-03-10
12:46:29
  

 

병장 이동열 
  오랜만의 명교님의 글이군요! 반갑습니다.(웃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여러가지면에서 희대의 연인이었다고 생각해요. 뛰어난 사상가의 만남, 그리고 명교님의 말씀대로 계약연애의 관계였다는 점. 그들은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연애를 했다는 점(서로의 외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사랑을 하게 되면 맹목적으로 변하는 저에게는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대해 씌여진 책이 있었는데- 정작 제목이 헷갈리네요.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이었는데... 그냥 제목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였던것 같기도 하고... 

사족. 
명교님의 글을 다시 클릭하면 뭔가 조금씩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땀) 2009-03-10
13:04:59
  

 

일병 홍명교 
  동열 / 제가 좀 내키는대로 확 써놓고 나중에 2,3번 수정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런 거일꺼예요. 살짝 고쳤는데 헷갈리게해서 죄송합니다.(웃음) 2009-03-10
14:27:55
  

 

상병 정근영 
  오랜만에 보는 명교님의 독서후기네요. 
뭔가 댓글을 달고 싶은데 아는게 없는 관계로 조용히 하려구요, 흐흐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연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