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읽기의 어려움. 그리고 소극적 사회학에 대한 비판-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원전 읽기의 어려움. 그리고 소극적 사회학에 대한 비판-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쌍따옴표 안의 문장은 베버의 원문 인용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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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책마을 폭파 전에 '독서후기'라고 해서 올린 글을 '부분적으로' 손 본 퇴고본이다. 지금 읽어보니 앞 부분의 '원전 읽기'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칼럼'이 될 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 칼럼에 올린다. 앞 부분만 잘라서 편집해서 글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글의 전체 구성을 붕괴시키게 되고 그렇게 된 글은 칼럼도 독서후기도 될 수 없기에, 이런 기형적인 글을 올린다. 기형적인 삶이 단정한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받아들여주리라고 생각하기에 올린다. 다음에 '새로운' 칼럼으로 찾아뵙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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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지난 글에 직접적으로 추가된 내용은 3장입니다. 그 외에는 지난번 글과 거의 똑같습니다. 0~1장은 칼럼이구요(장문압박 싫으시면 여기까지만 읽어도 되십니다만, 사회학 관심 없어도 끝까지 읽으면 재밌어요), 2장은 독서후기 3장은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별 상관은 없습니다.
0. 들어가며
베버리안과는 거리가 먼 분석틀을 가지고 사회과학의 언저리를 탐욕스레 애무하던 삶은 결국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하 '윤리')를 읽는 것으로 좌초되었다. 수염이 매력적인 영감탱이의 두꺼운 책은 내 주말을 바치게 하기는 커녕 먼지가 수북히 쌓였다. (허나 먼지가 아무리 쌓여도 파란 책은 파란 책이다). 이쯤에서 기형도를 읽어낸 당신이라면 이하의 글을 읽어도 좋다. 응? 이라는 반응이라면 나도 할 수 없는 일. 닥치고 읽기를 바라오만.
원전이 주는 매력은 굉장하다. 그런 매력 때문에 광기의 역사를 두권이나 샀고(씨양. 없어진줄 알고), 또 이상한 두껍고 파란 책을 샀었고, 그리고 또 이것저것 뭐 샀지만 결론은 하나다 :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 사회과학부에 속하지도 않은 내가 좀바르트(베버 읽으면서 처음 이름 들어 본 사람이다) 따위를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혹 독자중에 좀바르트주의자가 있다면 '좀바르트 따위'라는 표현에 대해 사과한다). 그래서 결국 어떤 원전도 읽지 못한 채, 대학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는 구절을 읊조리고 있을 나이가 되었다. 이쯤 되어 나는 굉장한 결의를 했다. 이름하여 프로젝트 '학부생 거듭나기'
나는 학부생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학부생이다. 대학원생의 안티테제로서 나는 학부생이고, 광역학부제의 광풍 속에서 나는 학부생이다. 비록 광역학부제의 광풍 속에서 나의 길을 걸어가며 학점에 거칠게 질문하고 실험적인 레포트를 구성한 결과로 나는 인문학부에서 교육과학대학으로 좌천되었지만, 나는 어쨌거나 '인문학부' 생이다. 교육학은 인문학의 근원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토달지 말자. 전공이야기 나오면 슬퍼진다) 어쨌거나, 대학원생의 안티테제로서 나는 학부생이기에, 학부생적인, 제네럴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부생으로서, 인문학 전체에 대한 제네럴한 공부를 해야 한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어쩌구의 원자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맑스의 박사논문인가 그런 것의 제목이다) 같은 것은 대학원 가서 해도 된다. 결국, 학부 때는 교양을 쌓아야 한다. 더더군다나. 원래 내일 모래 졸업식 날이면 학부생 레벨과 졸업해야 한다. (물론 원래대로라 해도 휴학도 했고 뭣도 했고 재수강도 해야하고 해서 4년졸업은 턱없지만) 추가로, 작가가 되고 싶은데-재능은 미치게 부족하지만 그저 되고 싶다-무식한 작가는 되고 싶지 않다. 결국. 기본 소양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하여 말도 안되는 지식의 조직도를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선정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도상에서 나는 '윤리'를 읽게 된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독서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글은 지금껏 끄적거린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필자가 느낀 '원전 읽기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와 베버의 '윤리' 자체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다루게 될 것이다. '어떤 책의 결말은 이미 책의 첫 페이지에 암시되어 있다'고 까뮈는 말했는데, 이를 이런 식으로 비틀어도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어떤 공간에서의 글쓰기는 이미 그의 첫 글에 암시되어 있다' 그런고로 이전의 글-'책들이 사라진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글, 무엇인가 말하려는 척 하다가 결국 전희중에 사정해버리는 꼴의 글이 되겠군' 이라고 미리 생각해도 좋다. 더 읽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나의 의도를 숨기는 것을 경멸하기에 미리 밝혀둔다.
1-1. 원전 읽기의 어려움.
무엇이 인문사회과학의 '원전'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베버의 '윤리'나 뒤르켐의 '자살론' 루소의 '에밀',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아마도 원전일 것이다. 그러나 이진경의 근대철학 정리나 고병권의 니체 정리, 기든스의 맑스/베버 분석 등은 원전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라깡의 프로에트 해석과 관련된 저작들은 또 '원전'으로 통용된다. 결국 확실한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논의를 위해 우리는 원전을 적당히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원전을 '해석의 의미에서든 창조의 의미에서든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주며,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텍스트'이라고 규정하고 논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분명히 '윤리'는 원전이다. 근대 사회학 발전 초기에 위치한 저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것의 방향성은 새롭다. 역사적 인정성의 측면에서도 '윤리' 부정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읽었다. 얇은 레몬으로 감싼 벽돌로 뒤통수를 난타당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던지면 내가 읽던 부분을 찾을 수 없는 신묘막기한 경험을 연속하며. 이유는 간단하다. 어렵기 때문이다.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1. 책이 1987년 번역판이다-생각해보니 선배한테 뺏은 책이다. 2. 원래 어렵다. 1. 에 대해서는 학부생 입장에서 할 말이 없다. 그저 양질의 편역/번역서가 많이 나와주는 수 밖에. 그리고 2.에 대해서라면 베버에게 충분한 불만을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윤리'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고 싶어서 이 글을 열어본 이에게 이 글은 무척이나 재수없고, 문장은 탈-문법적이며, 표현은 탈-중심적이고, 별로 중요치 않는 관념어가 지나치게 열거되고, 지저분한 예시로 가득 차 있는 글로 읽히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 그러하긴 하다) 그리하여 내 집필의 문법과 다른 독해의 문법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이는 '난해함'으로 곡해될 소지가 있기도 하다. 베버와 사회과학에 대해 다룬 글의 서두에 시덥잖게 기형도의 시를 응용한 분탕질을 쳐버린다. 그리고 베버의 '윤리'와 내가 지금껏 읽어왔던, 혹은 읽다가 포기했던 원전들의 문법이 이러하다. "만약에 과학의 목표가 딜레탕트적인 어떤 것이라면, 그러한 과학의 결론은 종말이 될 것이다" 딜레탕티즘을 거부하고 치열한 탐구를 하겠다는 정신은 좋다. 좋다. 좋지만 말이다.
베버의 사회과학 방법론과 '윤리'의 주제-어떻게 청교도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동인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싶은 내가 루터주의. 칼뱅주의. 메노파. 메서디스트파. 경건주의. 퀘이커교도 등의 청교도 분파의 출현과 그 역사성, 그리고 공통점과 차이점, 종파간의 대립. 종파와 당 권력과의 관계. 심지어 개신교 차원을 넘어서 힌두교와 유태교까지 들이대는 부분이 책 전체의 반정도를 차지하는 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가. 게다가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5문장에 하나는 bar-이를테면 당신이 방금 보고 있는 식의 표현법-가 나오거나 주석이 나오거나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주석이 주석이 아니다. 심지어 세네 페이지짜리 주석도 등장한다. 꾸역구역 읽는다해도 알 수 없다. 원주인지라 안 읽고 넘어가자니 그것도 좀 그렇다. 그리고 읽는다. 못 알아듣는다. 꾸역 꾸역 읽는다.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불친절하다. 숱한 개론서에서 설명하는 도식적이고 명료한 설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윤리'는 사회학 서적이지 종교학 서적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종교사회학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그런 것 없이 그저 종교에 대해서 잘 설명한다. 이런 식의 불친절함 때문에 나는 두 권이나 있는 광기의 역사를 반 넘게 읽은 적이 없다.
지금껏 읽어온 몇 권 안되는 원전의 특징은 이러하다: 1. 주석(원주)이 많이 붙어있다. 2. 주석이나 제시하는 예시와 사전 지식이 많이 필요하다. 3. 내용 전개가 복잡하다. 도표나 도식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4.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5. 이 모든 것들의 종합으로, 원서의 현상적인 모습은 '불친절하다' 와 '어렵다'로 요약될 수 있다.
1-2. 원전 읽기의 필요성
원전은 대략 이런 식이다. 물론 분명히 잘 읽히는 원전도 있다. 잘 읽힌다는 것이 쉬운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한에서 그저 읽히는 수위에서 잘 읽히는 원전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잘 읽히며 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원전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게 찾기 쉽지 않다. '원전'이라는 어휘에서 연상되는 그 모든 책들의 제목을 y어보면 이는 간단히 증명된다. 그러면 이런 원전을 읽을 필요가 있는가?
이번 원전 독서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없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여기저기서 파편적으로 읽은 내용의 범주를 넘어가는 내용은 없었다. 물론 베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몇몇 편견들에-이를테면 그는 정치적 의미에서 보수주의자였다거나, 그의 철학은 관념결정론적이다-대하여 베버 자신의 반론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귀중한 수확이었고, 결코 잘 알아들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청교도주의 자체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들 덕분에 당시 청교도주의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의 폭을 넓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너무 많은 시간과 지적 에너지를 탕진하다시피 했다. 그 시간에 그 에너지면 베버에 대한 심층적 해설서 세 권은 읽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어려운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물론 이는 내 낮은 지적 능력의 반증이다. 내가 아는 베버 이상의 베버를 내가 직접 독해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지적 능력이 뛰어날 리가 없잖은가. 그저 나는 넓은 '윤리' 속에서 내가 아는 베버의 파편을 주워 적당히 내 식대로 재구성하는 작업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재구성 자체도 꽤나 불성실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그러면 원전을 읽을 필요는 없는가? 조금 과격하게 말해서, 나는 없다는 생각이다. 꽤나 오래 전에 서울대에서는 대략 서울대생 필독도서 100권인가 하는 책을 냈었다. 대충 이름만 아는 책들이 꽤 많이 있어서 생각했다. '미친 개또라이' 리스트에 열거된 책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배경지식들을 요하는 것들이다. '윤리'만으로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 자체에 대해 공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마치 한글판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당대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이다. 프로테스탄티즘 자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된 이후에나 윤리는 완벽하게 의미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육의 커리큘럼 하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찌질 학부생에게 이런 교양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다. 개론서나 해설서도 따라잡기 힘든 마당에 무엇을 바라는 건가.
그러나 원전을 읽을 필요는 있다. 난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일단 원전은 말 그대로 원전이다. 누군가가 파편화시켜 해석한 거대한 철학의 단편적 양태가 아니라, 거대한 철학의 유기적인 일부와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천지차이다. 베버에 대한 해설을 읽으며 베버에 대해 창조적인 질문을 던지기는 힘들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적어도 인문/사회과학에서는, 개론서나 해설서를 읽으며 원전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힘들며, 무의미하다. 정말 뛰어난 해설서가 아닌 이상 파편화된 양태의 설명 이상이 되지 않을진데. 물론 철학이 갖는 '의미 자체'는 훨씬 수월하게 읽혀진다. 베버와 관련하여,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기든스의 'Sociology(현대 사회학)' 계층론이나 사회사상 부분, 혹은 고병권의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뒷부분 니체 정치사상에서 간략히 언급되는 베버 정도만 읽어도 일단 베버가 표명하려는 '의미 자체'에는 꽤나 근접해 볼 수 있다(여기서 잠깐, 베버의 사회학이 아닌 베버의 윤리학-그러니까 책임윤리와 주체윤리를 다룬 것에 대해서는 개론서에서 잘 안 다루어지더라. 이는 '윤리'에서도 잘 안 다뤄진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정돈되어 있는 해설서 속에서 질문의 시초가 되는 균열을 가능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균열과 질문마저도 해설해놓는 착한 해설자들 덕택에, 같은 책을 읽은 너와 내가 같은 질문을 하게 될 위험성까지 존재한다. 이에 비해 원전은 철학의 '감각'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그리고 다만 편린적 지식의 축적의 양질전화로 결코 얻을 수 없는 이 '감각'이라는 것을 얻기 위한 원전 읽기는, 감각이 필요한 상황에서 해설서 세 권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선택은 너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윤리'의 독서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편하게 읽고 아는 것이 중요한가? 이에 대해 베버는 이야기한다. "단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면 책 따위를 보지 말고 가서 영화를 봐라"
2-1 내재적 접근: '윤리' 내용 요약.
베버는 종종, 아니 항상, 맑스와 비견된다. 심지어 이런 도식선상에서 비교되는 경우도 있다.
베버-관념론. 보수주의. 해석의 철학
맑스-유물론. 진보주의. 실천의 철학.
이런 것이 개론서의 폐단이다. 외부에서 사상을 편린을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그런 식의 오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사상은, 그것이 사상이라고 불리울 만한 가치가 있는 한은, 보다 진지하게 접근되어야 한다. 3개의 단어로 요약되기 위해 베버가 위대한/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베버가 '윤리'에서 밝힌 그의 사상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자. 물론 나는 이에 앞서 커다란 회의를 느낀다. 베버에 대한 해석은 제법 충분할 정도로 잘,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는 느낌이고 나의 요약은 아마 충분할 정도로 못, 그리고 난잡하며 어렵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걱정에서다. 그러나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독서 정리를 위해 나는 요약을 할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문장의 미묘한 뉘앙스에 주의할 것. '청교도주의는 자본주의 발달의 무수한 동인들 중 제법 영향력을 가진 요인이다' 와 '청교도주의는 자본주의를 잉태했다'는 병장과 이병만큼 다르다.
기본적으로 베버는 '청교도주의는 자본주의 발달의 무수한 동인들 중 제법 영향력을 가진 요인이다'를 설명하기 위하여 '윤리'를 썼다. 아니, 설명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세계의 종교와 근대 형성에 대한 거대한 기획의 일부분으로 서구 근대 자본주의와 청교도주의간의 연관성을 밝혀보려는 시도에서 저술하였다.
청교도주의에서 베버가 핵심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청교도주의 구원의 핵심 원리인 '예정설'이다.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있다. 아무리 네가 선행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발버둥쳐도 네가 먼 태초에 구원을 예정받지 않았다면 넌 즐이나 쳐먹고 지옥가셈. 이런 이야기다. 열라 살벌하다. 그리고 예정설은 금욕을 추구한다. 좀 복잡한데. 단순히 이야기하면 이렇다. 예정에 의해 구원/비구원이 갈리는데, 그 누구도 누가 예정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니가 선행을 해도 예정된 사람이 아니면 구원 못받는데, 예정된 사람의 증표는 '선행'이더라. 많은 무기력한/염세적인 철학의 기반을 이루는 예정설이 이런 식으로 '적극성'을 띄어버린다.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선행을 하는 것은 구원의 증표이다. 또한 청교도주의/종교혁명의 핵심인 종교의 생활화-단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만이 종교가 아닌, 일상에 침투한 종교-와 관련하여 선행은 '착한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단지 신에 대한 의무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마음에서 우러난 선행보다, 신에 의한 의무 때문에 이행한 선행이 더욱 값지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쯤에서 청교도주의의 핵심 원리를 하나 더 끌어들여보자 '금욕주의' 금욕적 생활 역시 '신에 의한 의무' 이며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예정설. 그리고 금욕주의. 는 각각으로 존재하면 굉장히 무기력하고 염세적인 태도의 토대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의 미묘한 결합에 종교의 일상화라는 종교개혁의 키워드가 맞물리며 그것은 대중을 사로잡는, 그리고 굉장한 적극성을 띈 삶의 태도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 '노동'과 '경영'은 신의 의무에 대한 성실한 이행이다. 기존 카톨릭의 노동관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노동관으로 대표되는 '자연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행위. 적당히만 하면 되는 행위'에서 '금욕적으로. 근면하게. 할 수 있는 한 무한대로' 일하는 청교도적 노동관으로 대표된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부의 축적은 또다른 부의 축적이라는 의무의 이행을 하는 선에서 정당화된다. 부를 축적해서 방탕하게 쓰거나 놀면 벌받지만, 근면하게 일하고 또 일하고 투자해서 돈을 버는 것은 신의 뜻을 어기지 않는, 아니 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구원받은 이'의 증거가 된다. 이리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이 발원한 네델란드 등지에서는 거대한 자본이 낭비되지 않은 채 축적되고,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이 투자/재생산되어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베버의 자본주의 발달론의 핵심이다. 와. 그럴싸하다.
2-2 내재적 접근 : 베버의 방법론/근대론
단지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베버와 '윤리'의 위대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베버의 위대성은 또한 그가 이러한 설명에 있어 택한 관점을 통해 구성된다. 그는 기본적으로 환원주의-특히 당시 점증하던 맑스식의 유물론 환원주의-를 거부하고, 다원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고등학교 일반사회적 감수성을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설명 자체도 자본주의 발달의 전체를 꿰뚫으려는 작업이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서구 자본주의'의 발달 원인 중의 하나로서의 '청교도주의'간의 '내적 친화성'을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도 사회와 종교, 중국 사회와 종교에 대해서는 그 사회 자체에 대해 내재적으로 접근해야지, 자본주의/청교도주의의 틀을 들이대어 마음대로 해석하는 만행을 저지르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가 맑스식의 유물론 환원주의를 오해한 측면은 분명 존재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원-중심성은 충분히 의미있다.
그리고 그는 '근대 발전'에 대한 굉장한 통찰을 제시했다. 그는 근대라는 과정을 총체적인 합리화/탈주술화 과정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예정설과 금욕주의와 종교의 일상화라는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신적인 목적을 위해서지만, 근대는 근대 세계와 근대인을 합리적으로 구성해냈다. 상거래와 자본-노동 결합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지만 그것은 '특수한 형태의 서구 자본주의'와 다르다. 물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어느 세계에서나 존재했지만 그것은 '자본 축적에 대한 자본주의적 욕구'와 분명히 다르다. 근대의 것이 다른 것들과 다른 점은 '합리성'이다. 최초의 스케줄은 청교도 금욕주의 수도자들이 14세기에 발전시킨 것이다. 최초의 '개인 통제'의 의미에서의 일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슷한 양태 속에서도 서구 근대 발달에는 합리성/체계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고, 이것이 근대의 특질이라는 것 처럼 이야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긴 말을 할 수 없다.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라는 말 밖에는. 의외로 이야기가 쉽게 전개되어서 내가 할 말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윤리'의 진미는 자본주의-청교도주의의 문제보다는 바로 이 방법론 및 근대론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직접 읽고 재구성해보는 기쁨을 빼앗고 싶지 않다.
3-1. 그 끝없는 소극성에 대한 비판. 이론에 관한 이야기-반증가능성
베버는 위와 같은 논의를 굉장히 소극적으로 전개해간다. '직접적인 원인/동인' '인과' '필연성' '보편성' 등의 단어는 베버와 거리가 멀다. 베버는 '내적 친화성(서로 다른 철학 안에 내재된 유사성으로 인하여 철학의 동시적 발전의 단초를 주는 것. 이를테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간의 유사성)' '직접적 동인이 아닌 하나의 영향력' '내재적 접근법' '가능성' '특수성' 등에 방점을 찍는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선택한다. 많은 후대 학자들은 이를 '한 발짝 빨리 당시 학계를 점거했던 맑스적/결정론적 경향성에 대한 의식'에서 해석한다. 또한 그는 굉장히 총체론적인 작업을 진행한 학자이다. 사회학, 법학, 종교학, 철학을 아우르는 그의 작업은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이 진행한 숱한 작업에 필적한다. 그리고 당연히, 고려해야 할 변수가 하나 늘어날 때 마다, 함수적인 인과론이 발붙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져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버의 이러한 소극성은 이해될 수 있다. 이해될 '수' 는 있다. 하지만.
칼 포퍼는 특정 철학-내지는 명제 내지는 주장-의 가치를 '반증가능성'에서 찾는다. 요약하자며 이런 입장이다. 우리는 결코 논리와 경험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절대 진리에 닿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막연한 추측'이며, 이러한 막연한 추측-가설-에 대한 실증적 탐구를 통해 가설을 좀더 정교한 무엇으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여 철학과 인류의 점진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포퍼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베버가 '윤리'에서 보여주는 그 끝을 찾을 수 없는 소극적 설명은 이러한 입장에서 효율적으로 비판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한 무엇에 대해 과감히 추측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추측을 논리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어렵게 가지 말고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명제'에 대해 배운 것을 떠올려보자. 명제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문장이다. 일테면 '나는 바보다'라거나 '김형진은 잘생겼다'는 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기에 명제인 것이다. 그런데 베버가 '윤리'에서 늘어놓은 수사에는, 명제랄 만한 것이 없다. 베버의 표현을 빌려 보자면, '베버의 '윤리'는 참일 수 있는 확률이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에 반증 가능성은, 없다. 당시 대세였다던 '맑시즘적 결정론'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역사적인 가치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베버의 사상이, 그리고 '윤리'가 무의미하다는 무의미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윤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는 2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 의미에 대해 충분히 동의한다. 다만 나는 여기서 추가로 베버 '윤리'의 한계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에이. 괜히 무게잡으려고 하니 말이 꼬인다.
그러니까, 이리저리 돌아가지 말고 단호하게 내지르자면 이런 것이다 :
왜 베버는 내지르지 않는가 ? (Thesis on weber No. 1)
내지르기라고 해서 공병호처럼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부욱 질러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지르기는 '다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은 일단 괄호 안으로 숨겨두고' 특정한 부분과 관점에 좀 더 포커싱을 하는 것, 그러한 입장을 좀 더 강하게 고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면피하지 말잔 말이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이론의 충돌과 갈등이 이론의 발전을 낳는다는 견해에 나는 동의하기 때문에. 좀 더 과감한 괄호 치기, 좀 더 과감한 주장이 사회과학에서는 필요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말의 맥락을 나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최대한으로 말하라'는 말이다. 개소리를 내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베버처럼 '총체론적'인 학자라면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나나 공병호는 그런 거 하면 안 되겠지만.
이러한 점에서 나는 베버의 이러한 저술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면피주의는 즐이다.
3-2. 그 끝없는 소극성에 대한 비판. 실천에 대한 이야기
3-1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대로 베버는 굉장히 소극적으로 논의를 전개해간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이론 내적인 문제가 아닌, 이론과 실천 간의 문제에 대해 베버가 가지는 입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특수성과 가능성, 내재적 접근을 사용하는 사회학은 사회학적 개입의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베버 역시 사회의 점진적 개혁을 위한 모임에 참가하였고 많은 당대 학자들과 적극적인 논쟁을 벌여내었다. 물론 모든 역사는, 모든 인간은, 모든 철학은 나름의 특수성과 내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것에 대한 억압은 '필연적으로' 모든 억압의 단초가 되어버린다. 박정희 정권이나 구소련 정권이나 장발을 못마땅해 했다. 특수성의 배제, 보편화는 인간이 취하는 가장 못된 태도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우리가 휴전선 넘어 사는 뽀글머리 아저씨가 행하는 삽질을 용인해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국인들이 김치에 기생충을 넣어 먹던 팔던 상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중국의 공개처형이나 이슬람의 할례도 내재적 접근과 특수성의 논리하에서 용인된다. 물론 베버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베버식의 방법이 이러한 방법과 내적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이다. 베버처럼 나는 이리 조심스러운 용어를 사용해본다. 그래서 나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베버를 읽던 중 공책에 한 낙서 중에는 이런 낙서가 있었다.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 손에 있는 것이 펜이라는 것이다->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 손에 있는 것이 모나미 볼펜이라는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잉크가 다 떨어져가는 모나미 볼펜이라는 것이다->내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지금 내가 늘어놓고 있는 헛소리가 무수한 속류 얼치기 찌질이 삽대가리들이 베버를 매도한 방식과 비슷하다는 거, 안다. 그러나 매도에도 모기다리만큼의 정당성은 존재한다. 물론 예정설을 적극적 윤리론으로 개척할 수 있는 것이, 영원회귀를 적극적 윤리론으로 개척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이기에 절망은 일단 대책없이 미뤄두어도 된다. 결국 구체/추상과의 가장 극단적으로 대립된 긴장의 선을 오가는 작업에서 이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라는 건 미치도록 대책없는 100년넘은 레토릭이다. 하지만 포어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이론적인 측면에서든 실천적인 측면에서든) 내지르기 필요하다.
4. 나가며
'권선징악'이라는 네글짜짜리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 긴 흥부전이 쓰여진 것이 아니다. 흥부전은 흥부전이라는 텍스트의 길이만큼의 의미가 있다. 한 단 짜리 신문기사에는 한 단 짜리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한 줄짜리 시에는 한 줄만큼의 의미가 있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프로이트 전집만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의미는 그 책 만하다. 당연스럽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용도 많고, 내가 알고도 빠뜨린 내용도 많다. 베버가 예측한 근대의 파국이라거나, 관료제 같은 매우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나는 이 글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것을 어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윤리'와 마찬가지로 좀 페이크성 글을 썼다. 독서후기인 척하면서, 텍스트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 뭔가 비장해보이기까지 한 제목을 달고, 막상 쓴 것은 대부분 그저 독서론. 이런것이 베버리안의 생활이다. 라는 농담을 해 볼까 하지만 재미 없을 것 같아 그만둔다.
긴 글을 쓰면 마무리에서 좀 정리하는 척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그런 건 후대의 평론가들이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다. 긴 글 억지로 베버식의 글쓰기를 따라하며 베버를 친근하고 희극적인 인물로 그리고자 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원래 내 스타일이 그렇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 글은, 책마을 폭파 전에 '독서후기'라고 해서 올린 글을 부분적으로 손 본 퇴고본이다. 지금 읽어보니 앞 부분의 원전 읽기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칼럼'이 될 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 칼럼에 올린다. 앞 부분만 잘라서 편집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글의 전체 구성을 붕괴시키게 되고 그렇게 된 글은 칼럼도 독서후기도 될 수 없기에, 이런 기형적인 글을 올린다. 기형적인 삶이 단정한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받아들여주리라고 생각하기에 올린다. 다음에 '새로운' 칼럼으로 찾아뵙도록 하겠다.
죄송합니다. 글이 에러나서 다시 씁니다.
병장 주영준 (2006/02/23 14:21:24)
요즘 복고가 유행이라서. 켈룩.
병장 김동환 (2006/02/23 14:42:52)
광기의 역사 파세요. 켈켈.
병장 한상원 (2006/02/23 15:12:18)
동환// 정모가서 경매 한번 하죠. (웃음) 영준씨, 3000원부터 시작하게 해줘요.
병장 김태경 (2006/02/23 17:03:55)
후아, 힘들게 읽었어요. 다 읽고나서 리플달려고 했더니 로그인이 끊어졌더군요. 글 읽고 로그인 끊어진거 처음이예요.
1. 베버리안
2. 안티테제, 테제 - 대충만 알겠음.
3. 원전 - 뒤에서 이해함
4. 딜레탕트, 딜레탕티즘
5. 프로테스탄티즘 - 청교도주의처럼 프로테스탄트(개신교)주의겠죠. 대충 이해함.
6. 관념론, 유물론
7. 환원주의
8. 레토릭
9. 포어이바흐
뭘까요? 제가 이글 읽으면서 이해못한 것들 적어놓은거예요.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막막하네요.
일단은 철굴부터 가야하나...
병장 김형진 (2006/02/23 16:22:52)
4. 딜레탕트란, 문화, 예술, 학술 따위의 애호가, 그러니까 지적유희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랄까.
호사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7. 환원주의란 어떤 복잡한 현상이나 양상 따위를 '~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을 말하죠.
8. 레토릭은 화려하고 과장된 수사나 양식 같은 것을 말합니다.
9. 포어이바흐는, 포이어바흐의 오타인 듯 싶은데, 기계적 유물론자입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다른 것들은 짧게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시간관계상 여기까지만. 아마 다른 분들이 덧붙여주실거에요.
병장 김동환 (2006/02/23 17:00:45)
첨언)
딜레탕트란 전공보다는 교양의 개념과 가깝다고 알고있어요. 실례로 책마을에서 딜레탕트를 자처하시는 분 두분 있어요. 형진님이랑 지연님.(먼산..)
베버는 저도 안읽어봐서 기회가 닿는대로 읽어볼 요량이고
철굴로 알수 있는것은 관념론 유물론 정도군요.
상병 안대섭 (2006/02/23 17:09:46)
1. 베버주의자(?)라고 하면 될듯. (아니면 벌로 키보드 잡고 휠윈드 100바퀴 돌겠습니다.)
아하하하..
병장 김형진 (2006/02/23 17:10:39)
대섭님, 저는 아하하하..의 의미를 알고 있어요. [먼산]
병장 허원영 (2006/02/23 17:35:53)
강록 님 / '자살론'이면 에밀 뒤르켐일테고, 첫번째는 콩트일까요.
상병 김강록 (2006/02/23 17:37:02)
베버리안
: 막스 베버라는 유명한 사회학자가 있는데(이 글의 주인공이기도 해요), 그의 추종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추종자(오해 없기를, 별 뜻 없는 표현임)들을 크리스찬이라고 하듯이 말이에요.
하나의 사회현상을 분석할 때 입장에 따라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모든 건 경제적 이유에서 기원한다─라는 경제 환원론자들이 있는 반면에, 모든 건 성적 에너지sexuality로부터 기원한다는 사람들도 있고, (저같은 경우도, 개인적으로 모든 문제는 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고) 그런 가운데 베버리안들은 아니다, 사회현상의 원인은 한 가지 이유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라는 언뜻 보면 당연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거의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좀 더 좁은 의미에서 베버리안들은 주로 경제 환원론자들에 대한 반발, 즉 콕 찝어서 "문제가 꼭 경제적 이유에서만 기원하지만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안티테제, 테제 - 대충만 알겠음.
: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Thesis-반Antithesis-합synthesis를 말해요. 부정의 연쇄를 거듭하며 사실, 내지 진리 비슷한 곳에 서서히 도달해나간다는 뭐 그런 식이죠.
원전 - 뒤에서 이해함
: Pass
딜레탕트, 딜레탕티즘
: 형진님께서 이미 답변.
프로테스탄티즘 - 청교도주의처럼 프로테스탄트(개신교)주의겠죠. 대충 이해함.
: 저도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닌데, 일련의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 '열심히 일해서 획득한 부는 신의 은총이다'라는 가치관이 확산되잖아요. 즉 예전에는 무작정 소박하고 금욕적으로만 살라고 하던 것이 이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했다면 돈 많이 벌어서 부자되는 것도 신의 뜻이다! 뭐 그런 분위기로 바뀐 겁니다. 막스 베버는 그걸 자본주의가 태동하게 된 주요 동력으로 파악한 거구요.
관념론, 유물론
: 관념론이 선, 도덕, 정의, 진리, 존재 뭐 이런 추상적인 것들에 관한 사유 내지 통찰이라면 유물론은 그거 다 헛거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이 진짜다, 하는 그런 경향이라고 하면 될까요. 예를 들어 경제 환원론자들이, '경제'라는 물질적 요인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유물론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어요.
환원주의
: 형진님께서 이미 답변.
레토릭
: 이것도.
상병 김강록 (2006/02/23 17:37:44)
원영 / 앗. 오타 수정하다가 그만. 콩트와 뒤르켐, 정확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병장 김형진 (2006/02/23 17:39:20)
앗, 늦었다.
병장 박형주 (2006/02/23 23:45:10)
'원전론'에 한표. '평생 찌질하게 개설서나 보다 되어지느니 원전 한권을 보는게 낫다'던 지금은 yes24에서 열심히 책을 파는 한 선배의 말이 생각나네요. 뭐, 단지 정가로 3만 8천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광기의 역사를 안 읽은 사람도 있지만.
병장 주영준 (2006/02/24 14:50:01)
형주 / 하지만 역시 원전은-본문에서 서울대 추천도서 100권과 관련하여 잠깐 이야기했던 대로-날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 그런 차원에서 '좋은 개설서 읽기'도 원전 읽기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이나 기든스의 '사회학' 같은. 사실 개설서로써 철굴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고. 아. 이 글이 아마 작년 11월인가에 쓴 글일텐데(그쯤에 책을 읽었던 듯 하니까), 내용이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면 역시 원전은 읽으나마나. 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는 물론 농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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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잘 달아주신 형진, 강록님 고마워요. 제가 했어야 할 일인데 그게 아시다시피 댓글들과의 혈투 때문에[먼산]
병장 박형주 (2006/02/25 03:42:13)
그린비(맞나?)에서 나온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중에서 고미숙의 열하일기 편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게 있었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지 문득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리즈(몇권 나오진 않았지만)는 아마도 원전을 읽지 않은 인문사회학에 관심 있는 대학생 정도 수준의 독자를 대상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대중적 현대적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한 해석과 적당한 의미부여로 오히려 원전에의 접근 그 자체, 혹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위험할 수도 있는 시야를 은근슬쩍 강요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었어요. 영준씨의 이야기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들뢰즈 가타리와 니체의 단어가 난무하는 열하일기 해석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던 게 1. 필부필부 장삼이사의 입장에서 저게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있나?(그 책에서는 그닥 문외한에게도 혼란스러운 언어를 내뱉어 놓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2. 그걸 알아먹는 인간이 과연 열하일기 원전을 못 읽을까? 3. 과연 저자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저걸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을까? 4. 백번 양보해서 이해하는 독자를 위해 쓴 거라면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 건 아닐까? 뭐 공부안하고 불평불만만 많다고 하면 사실 할말은 없지만.
비슷한 이유로 그 시리즈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같은건 그래서 원전을 읽기 전에는 읽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더랬죠. 독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학회 세미나 1학년 커리로 저걸 집어넣은 걸 본 적이 있는데, 찜찜한 느낌도 있었지만 뭐 그땐 그런거 신경쓸 때가 아니었으니까-반면 옆 학회에서는 원전을 보고 있는 판에. 밖에 나가면 바로 읽자고 마음먹고 있지만 뭐 어찌될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고. 쓸데없이 고백하자면 원전 읽기의 원동력 중 상당 부분이 찌질하기 짝이 없는 스노비즘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의미 없는 건 아니니까. 무어, 금 시점에서 각종 고전급 저작에 익숙하다는 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무식이 덜 뽀록날까 고민하는 처지지만. 하지만 여기는 대략 비슷한 나이대이고 읽어봤자 얼마나 했을까 싶은 생각도 한편으로는 있으면서. 뭐 그렇다는 겁니다. 책은 봐야겠고 볼 건 많고 봐도 뭔 소린지는 못알아먹겠고. 제갈량은 오나라에서 무슨 경전을 읽었냐는 질문에 그딴 게 무슨 소용이냐고 호통을 쳤다지만 범인에게는 궁색한 변명밖에 안 될 터이니.
시간도 시간이고 도저히 산만하지만 양해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