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으로 접근하다. ? [박수영]



인지의 발달 - 지각 영역의 확장. 

실존(實存), 물질의 존재(存在), 실체(實體). 
다루는 언어적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물질적 실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고 흔히 자부하곤 합니다. 이러한 실체를 인지하는 방법의 시작점은 감각을 통한 Input.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의존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이것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문들과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반(基盤)이 되어주었고, 그 지각의 경계가 급격히 변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철학자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칸트도 그 당시 한계로써 존재했고, 당연한 것으로써 인지했던 ‘지각적 영역’을 밑바탕에 두고 논의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개’라고 통칭되는 동물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일 뿐이며 그 이상의 무엇도 쉽게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사고 영역, 사고 우주에서 ‘입자’, ‘분자’, ‘세포’, ‘조직’, ‘유전자’ 등과 같은 개를 구성하는 미세요소에 대한 논의는 시작되지 않았으며, 그들을 하나의 논리로써 구동 방법으로써 체계를 구축시키는 신경생물학, 세포생물학, 진화론, 유전학, 관절의 구동장치. 더 파고 들어가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전자, 쿼크 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완전히 무지합니다. 

그것은 고대에도 지금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들을 인간의 감각권만으로 인식(認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정보들을 그들의 이론과 가치관으로 내포할 수 없었습니다. 절대 그들의 지성이 낮아서가 아닙니다. 다만 기술력이, 과학력이, 지각(知覺)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서는 아직 제대로 구비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맞아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을 비롯하여, 초끈 이론과 T.O.E (Theory of Everything)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엄청난 진보를 거듭했습니다. 과학에서의 이론은 ‘실험’을 통한 검증이 수반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합니다. 이론분야와 실험분야는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써 이끌고 잡아당기며 성장합니다. 그것이 ‘핵폭탄’이나, 제트류를 이용한 ‘폭탄투여’ 방법이라던가, 하는 과학적 목적과는 대비되는 ‘살상용’으로써 연구의 결과라고 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인류는 이제 고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은 ‘개’라는 실체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째서 우리가 ‘바둑이’와 ‘메리’라는 강아지가 서로서로 완전히 다른 객체임에도, 그것을 하나의 종으로 카테고라이즈 시킬 수 있는 가 하는 것은 이제 ‘추상’의 영역이 아닙니다. 

과거 - 
“잘 봐, 다리는 세 개지만 주둥이가 길고, 발톱이…”

현재 ?
“우리는 유전자적인 분석을 통해서 저 강아지의 종을 명확하게 분별해 낼 수 있다. 만일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강아지가 등장하더라도, 우리는 그 개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 개가 ‘개’라고 통칭된 ‘종(種)’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분류해낼 수 있으며, 개의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특정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서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유전자나 실험적 기법에서 탈피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떠한 동물의 종을 구별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섯가지 감각을 이용해 뉴런 네트워크에 ‘바둑이’와 ‘메리’의 정보를 저장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습관이나 생김새 특징들을 순간적으로 대비시키고 대조시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낸다. 그 외에도 저장된 수많은 생물체 데이터 중에서도 ‘메리’와 ‘바둑이’의 비교성은 특출 난 것이다. 그렇게 한번 연결된 연결고리는 뇌에 학습적으로 누적되어간다. 인간은 이러한 과정을 인지하지는 못하나 ‘무의식적인 과정’에서 그 과정은 충실히 진행되고 있다.”


예전 인류는 그게 ‘개’인데 왜 ‘개’냐고 물어보면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칸트던, 데카르트던, 누구던 간에요. 왜냐면 기본적으로 그들은 '무의식의 과정'이라는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명확히 '인지'되지 않는 모든 것은 '추상'의 영역으로 환원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철학자와 학자들은 그것에 마땅히 대답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고 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은 이른바 ‘명저’들과 ‘작품’들에서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부정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존’에서부터 변화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마음가짐이라고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금 우리 인류가 개척해낸 ‘지각의 확장’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 말을 꺼낸 김에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강아지’라고 객체화 시키고 분류화 시키는 것은 사실 인류라면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그것의 ‘실체’를 ‘존재’를 100% 파악하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태껏 인류가 옳다고 믿어왔고, 구축해온 세계와 가치와 관념들은 전부 ‘인간의 지각능력’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 객관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관찰이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이것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거하면 어떠한 관찰도 ‘객관적’인 관찰이 될 수 없습니다. 관찰이라 함은 특정 대상의 정보나 사건을 ‘관찰자’가 포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관찰’이라는 행위가 이미 ‘대상’에게 간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자 A라는 녀석이 서울에 있습니다. 이 녀석은 부산 방향으로 시속 230km로 달리고 있었죠. 이제 우리는 망원경이던 현미경이던, 뭐던 간에 이 녀석을 관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빛을 쏘았습니다. 푸슝

광자가 날라가서 A에게 부딪힌 후 다시 튀어져 나와 우리의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A의 모습을 두 눈으로 인지(認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자가 A를 건드렸기 때문에 A는 이제 120km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A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광자가 그 녀석에게 미칠 영향을 추산하여 ‘영역’을 예상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주 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입자의 정보를 완벽하게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찰은 이미 대상에게 무언가 변화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완벽한 객관으로부터 이미 멀어지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거시세계 스케일에서 관찰은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간섭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라는 것을]


2. 어떠한 물체는 변하지 않는가.

이것 또한 틀린 말입니다.

어떠한 물체도 정지한 물체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역동성과 불확정성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위입니다. 칸트 시대에 있어서 이것은 ‘진리’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이것은 결코 ‘진리’의 영역에 들어있지 못합니다.

미시세계에서의 역동성은 놀랍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입자와 반입자는 ‘탄생’하며, 서로 다시 만나 ‘소멸’합니다. 이것은 이 분야에 대해서 어두운 분들에게는 상당히 놀라운 뉴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적이라고 판단하고, 고정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의 역동성과 무작위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개의 표면에서 입자는 끊임없이 이탈하며, 입자는 끊임없이 포획됩니다. 

[물질파도 있습니다]

지각을 확장해야만 하는 이유

우리는 ‘개’라는 실체를 무심결에 가시광선 영역으로만 판단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시야가 ‘가시광선 영역’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개의 온도는 280K으로써, 그 온도에 해당하는 흑체로써 많은 종류의 전자기파를 방출합니다. 적외선 카메라의 세계로 보면 강아지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가 됩니다. 그는 끊임없이 적외선의 빛을 방출하는 ‘태양’과 같은 항성체이며 발광체입니다. 전파, 적외선 그런 전파들을 강아지는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지요. 

하지만 어떠한 학자도 사람도 ‘개’가 빛을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책에도 사실로써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지각한 영역으로써의 개’가 진실이라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실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감각기관과 정보처리기관으로써 ‘필터’를 거친 ‘주관적 실체’로써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입장에서 결코 잘못되었던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채널’을 통해 개를 바라볼 능력은 아예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용가능한 몇 개인가의 ‘채널’과 ‘접근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실체’, ‘실존’으로써 그 동안 부정확하게 사용되어 왔던 것들을 재정의해야 할 때는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비로소 재 정의된 ‘실체’만이 다시 객관화라는 이름을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형과 스키마에 대하여

우리는 따라서 이 두 가지 용어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내리는 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학수씨는 글에서 원형에 대해 ‘명확한 표현 방법’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다 발달된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우리는 이렇게 진술할 수 있습니다.

‘원형이라 하는 것은 인류가 무작위적으로 습득한 다종의 정보를 비교하고 종합 처리하여, 그 데이터들로부터 이끌어낸 정합성, 특성 들의 데이터로써 처리된 하나의 체계’

즉, 사람이 ‘개’라는 언어를 정의했기 때문에 비로서 그 원형으로써 ‘개’를 두리뭉실하게 추상화하는 능력이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언어’의 정의 이전에도 인류는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강아지류’라는 카테고리로 카테고라이징 시키는 능력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개’라는 언어적 기호를 덧붙여서 연결고리를 형성했을 뿐입니다. 

물론 ‘개’라는 언어로 무정형적이던 카테고리에 명확한 테두리가 생기고, 그 테두리 안에서의 메타 데이터들을 뽑아내어 ‘다리가 네 개, 주둥이 길다.’라는 정보들을 깔끔하게 표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정보들이 인간이 형성해낸 ‘원형’에서부터 흘러져나오는 것이 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은 언어에 의해서 ‘기호’화 될 수는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부산물인 ‘다리 네개’ 따위의 정보로 개를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언어’가 원형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각능력이 원형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이론과 법칙에 대하여


인문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서로간에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또한 서로 상대방의 이론에 관심조차 두려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지향점이 쉽게 교차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학수씨의 철학적, 언어학적 논의와 나의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시킨 논의가 이상하게 미끈덕 미끈덕 빗나가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거죠. 이에 따라 이 차이점을 명확하게 지적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겠습니다.

인문학적인 수 많은 논의들, 저 정도의 배경 지식으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수많은 학자들과 명사들의 서적과 학파 그리고 주장이 있습니다. 역시 과학에도 마찬가지로 제가 감히 법접하기 어려운 수많은 과학자들과 논의들 이론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겁 없이 지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母윱求摸, 일단 시작해보지요.

인문학 적인 수 많은 논의들은 어디까지나 ‘논의’ 이며 ‘이론’ 이고 ‘주장’입니다. 
과학적에서 전개되는 논의들은 시작은 ‘논의’이며 ‘가정’이되 종점은 ‘규칙’입니다. 

‘학설’ 그리고 ‘규칙’입니다.

인문학적인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증명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대상들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물론이려니와 ‘문학에 목적성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구라도 나름대로의 의견과 주장을 분분히 전개할 수는 있겠지만, 놀라운 선각자가 등장하여 ‘문학에 목적성은 존재하였소! 그것에 대한 근거는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소.’ 라고 말하기는 힘들죠.  


인문학의 궁극에 도달했을 때에 ‘문학, 예술’의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는 지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이 창조시킨 것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형성시킨 담론, 생활방식을 비롯하여, ‘언어’에 이르기까지 전부 인류 자신이 개척해내고 만들어낸 분야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들은 ‘우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리(理)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구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속해 있기에, 인간이 창조해낸 이 것들을 우리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주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그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애초에 있기는 한건지,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에 따라 수 많은 ‘학설’이 생겨나고 각자의 생각대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기 힘든 노릇입니다. 


과학적인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증명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개척가능하다고 판단된 대상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우주의 창조, 물질들간의 상호작용하는 힘, 그 모든 분야들은 ‘실험’이라는 검증도구가 있어 그 가정이 맞는지 아닌지를 쉽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들은 인류가 아닌 다른 것, 객관성과 주관성을 분리할 필요도 없이 애초부터 인간의 계에 속하지 않는 외부의 것. 따라서 그것들은 논리화되고 수치화되고 검증이 가능합니다. 

과학은 이에 따라 담론이나 각자의 논리의 전개를 인정하되 그 것을 ‘실험’이라는 도구로 반드시 검증시켰습니다. 아니면 ‘귀납’적인 접근을 통해서 사실과 사실들을 쌓아 어떠한 ‘가정’을 ‘규칙’화 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인문학과 과학은 서로 다루어온 분야가 다르고 그에 따라 기법도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인문학은 자신의 논리에 대해 최후까지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증명이 안되기 때문이죠. 대신 다른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이미 ‘인간의 리(理)’에 속해있는 만큼, 그 정리를 완전히 새로 정의할 수 있죠. 그에따라 기존에 ‘인간 중에서 담론화 되어있던 그것’은 새로운 ‘정리’에 의해 차별화 된 담론으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좋고 나쁨은 또 다시 인간이 판단하는 것이죠. 

과학은 다릅니다. 그것이 다루는 것은 인간 외부의 것이기 때문에, 새워놓은 가설이 틀렸을 경우 그것은 바로 실재하는 ‘자연’과 상반되게 되고, 그에 따라 그 가설은 아예 틀렸기 때문에 ‘폐기’시켜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학수씨는 인문학도로써 ‘자신의 학설’을 설명해주셨고, 저는 과학도로써 ‘그 학설의 증명 불가능’함을 역설했습니다.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당시 두 사람은 서로 교차하지 않는 우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털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학과 인문학이 다시 통합의 시기를 맞이해야 할 시기이고, 저는 학수님과 같은 인문학도들로부터 각종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논의를 습득하여야 하고, 학수씨 역시 저와 같은 과학도로부터 과학적인 지식을 습득하셔야 하겠죠. 

그리하여 인류는 한 보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1-1) ? [신학수]


인지의 발달 - 지각 영역의 확장. 

(1) 실존(實存), 물질의 존재(存在), 실체(實體). 
다루는 언어적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물질적 실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고 흔히 자부하곤 합니다. 이러한 실체를 인지하는 방법의 시작점은 감각을 통한 Input.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에 의존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이것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문들과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반(基盤)이 되어주었고, 그 지각의 경계가 급격히 변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철학자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칸트도 그 당시 한계로써 존재했고, 당연한 것으로써 인지했던 ‘지각적 영역’을 밑바탕에 두고 논의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개’라고 통칭되는 동물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일 뿐이며 그 이상의 무엇도 쉽게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사고 영역, 사고 우주에서 ‘입자’, ‘분자’, ‘세포’, ‘조직’, ‘유전자’ 등과 같은 개를 구성하는 미세요소에 대한 논의는 시작되지 않았으며, 그들을 하나의 논리로써 구동 방법으로써 체계를 구축시키는 신경생물학, 세포생물학, 진화론, 유전학, 관절의 구동장치. 더 파고 들어가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전자, 쿼크 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완전히 무지합니다. 

그것은 고대에도 지금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들을 인간의 감각권만으로 인식(認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정보들을 그들의 이론과 가치관으로 내포할 수 없었습니다. 절대 그들의 지성이 낮아서가 아닙니다. 다만 기술력이, 과학력이, 지각(知覺)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서는 아직 제대로 구비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좋습니다. 감각을 기반으로 한 예를 제가 제시했으니까요. 기술력과 과학력, 좀 더 엄밀한 지각의 능력(수영씨는 지각의 능력이라고만 표현했지만)이 구비된 이 상황은 예전과는 다르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저는 아주 간단한 예로 현미경에 대해서 예를 들었고, 입자들, 그리고 가장 미시적인 세계인 양자의 세계까지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분명히 전제했습니다. 요렇게요.

㉠ 물자체---------------->인간의 감각------->인간의 해석-->인간

㉡ 물자체----->도구------->인간의 감각------->인간의 해석-->인간

   ⓐ 물자체와 인간 감각단계까지는 모두에게 동일한가? 
      즉, 감각으로 완벽히 객관적인 사실을 획득할 수 있는가?
      전혀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획득할 수 없다.
      간단한 예) 시력이나 청력의 차이.
   ⓑ 시력이 좋다는 것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사실은 아니다.
   ⓒ 도구를 사용해(이를테면, 현미경, 망원경) 어떤 것을 바라본 것이 시력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육안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가?
      눈에 현미경을 낀다고 가정해보면 된다. 더욱 가까워 졌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범위로 생각해서는 진실의 범위에서 어긋난다.
원형 획득은 최초 인간의 감각까지 닿았을 때의 상(image)을(그 전에 도구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인간의 해석을 통해 저장합니다. 그것이 원형이며, 혹은 원형의 가능성입니다. 원형의 가능성이라는 말을 굳이 하는 것은, 순간순간 인지되는 수많은 상들이 원형으로 바로(즉시) 자리 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가운데 도구에 닿은 순간에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첫 번째 답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2) 그러나 이제 21세기를 맞아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을 비롯하여, 초끈 이론과 T.O.E (Theory of Everything)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엄청난 진보를 거듭했습니다. 과학에서의 이론은 ‘실험’을 통한 검증이 수반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합니다. 이론분야와 실험분야는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써 이끌고 잡아당기며 성장합니다. 그것이 ‘핵폭탄’이나, 제트류를 이용한 ‘폭탄투여’ 방법이라던가, 하는 과학적 목적과는 대비되는 ‘살상용’으로써 연구의 결과라고 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인류는 이제 고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100번 인정합니다.

이제 우리의 눈은 ‘개’라는 실체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째서 우리가 ‘바둑이’와 ‘메리’라는 강아지가 서로서로 완전히 다른 객체임에도, 그것을 하나의 종으로 카테고라이즈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제 ‘추상’의 영역이 아닙니다. → ‘보다 정밀하다’는 것은 ‘완전함’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결국 단계적인거죠.

과거 - 
“잘 봐, 다리는 세 개지만 주둥이가 길고, 발톱이…”

현재 ?
“우리는 유전자적인 분석을 통해서 저 강아지의 종을 명확하게 분별해 낼 수 있다. 만일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강아지가 등장하더라도, 우리는 그 개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 개가 ‘개’라고 통칭된 ‘종(種)’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분류해낼 수 있으며, 개의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특정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서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 비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개의 다리가 세 개인 이유는 교통사고일수도 있습니다.(웃음)
   (그 예는 최초에, 우리가 어떻게 지각적, 개념적인 특정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 대한 예입니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분류학의 기본은 아직까지 외형입니다. 현재 유전자적인 방법을 통해 분류를 해보려는 시도는 분명히 있긴 하지만 크게 의미 있는 진전은 없습니다. 유전자적인 분석을 통해서 이 개가 개인지를, 혹은 한 종이 그 종인지를 객관적으로 분류할 수 있기 위해 보통 다음과 같은 척도를 듭니다.

                                          염색체의 염기쌍의 수가 같다.
                                             염색체의 크기가 같다.

염색체를 분석하고 유전자로 환원하여 신뢰할만한 샘플링을 하지 않는다면, 지나가던 어떤 유전자만을 가지고 그것을 개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개인 것 같다, 정도가 되겠네요. 그러나 아직 의미가 있을만한 개의 유전자적 표본을 구축하고 있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틀린 건지도 몰라서 어딘가에 물어봤습니다) 만약 어떤 표본을 구축한 것이 있다면, 종의 판단은 그 표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비교죠, 비교. 논리적으로 파고 들어서 바둑이가 완전히 ‘개’라는 종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믿는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순수한 논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관찰적인-물론 컴퓨터를 위시한 도구를 통해서-결과물을 통한 비교, 혹은 유추일 뿐입니다.

위의 두가지 염색체의 속성에 대한 비교와 더불어, 좀 더 미시적인 세계로 각 단백질의 염기배열을 들 수 있겠는데요. 이 배열이 완전히 같으면, 동일한 종에서도 동일한 생물로 간주됩니다. 복제양 돌리 같은 것이죠. 그러니 이 배열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점점 동일함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염색체의 염기쌍 수나 염색체의 크기와 관계없이 돌연변이를 내보내기도 합니다. 그 유전자의 변이와 관련한 연구는 기껏 게놈지도가 완성된 초파리 등 몇 종에서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초파리도 100% 정확히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물론 변이된 개체가 초파리라는 개념적 확신하에 그렇습니다)그렇다면 어디까지를 같은 종으로 봐야할까요? 역시 이것도 어느 정도 엄밀한 것 같아보이는 틀로 들이댄 잣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또한 그러한 유전자나 실험적 기법에서 탈피하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떠한 동물의 종을 구별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제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게 이겁니다. 대신 한 번 더 정리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인간은 다섯가지 감각을 이용해 뉴런 네트워크에 ‘바둑이’와 ‘메리’의 정보를 저장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습관이나 생김새 특징들을 순간적으로 대비시키고 대조시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낸다. 그 외에도 저장된 수많은 생물체 데이터 중에서도 ‘메리’와 ‘바둑이’의 비교성은 특출 난 것이다. 그렇게 한번 연결된 연결고리는 뇌에 학습적으로 누적되어간다. 인간은 이러한 과정을 인지하지는 못하나 ‘무의식적인 과정’에서 그 과정은 충실히 진행되고 있다.”

예전 인류는 그게 ‘개’인데 왜 ‘개’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칸트던, 데카르트던, 누구던 간에요. 왜냐면 기본적으로 그들은 '무의식의 과정'이라는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명확히 '인지'되지 않는 모든 것은 '추상'의 영역으로 환원되어야 했습니다.  
→ 무의식의 과정과 개가 개로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을 전적으로 재구성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 어떤 것에 대한 인지는 상당부분 무의식적입니다. 아마도 제가 말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겠지요. 

그러나 현재의 철학자와 학자들은 그것에 마땅히 대답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고 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은 이른바 ‘명저’들과 ‘작품’들에서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부정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존’에서부터 변화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마음가짐이라고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금 우리 인류가 개척해낸 ‘지각의 확장’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인정해야 합니다.
→ 그러자고 이야기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떻게 ‘음악적 장르의 우월성’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 긴 글을 쓴 것이지, 알 수 없다를 말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자. 말을 꺼낸 김에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보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강아지’라고 객체화 시키고 분류화 시키는 것은 사실 인류라면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그것의 ‘실체’를 ‘존재’를 100% 파악하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태껏 인류가 옳다고 믿어왔고, 구축해온 세계와 가치와 관념들은 전부 ‘인간의 지각능력’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 100%는 힘들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100%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 그러니 실체의 온전한 파악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은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는 불가능합니다. 실체의 경계의 모호성이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기도 하고 그 실체 내부에 있는 가능성 모두를-면적-을 가정하고 있으면서도 그것 전체를 사유-예를 들면 모든 지점에 점을 찍는-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체의 모습을 온전히 재구성할 수 없다고 하여 그 방향성을 정할 수 없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합의된 정의에 의하여 논의를 시작할 때, 논의가 가능한 것은 그 합의된 부분에 의해서이지만, 그 합의된 실체에 의해 어떤 방향성이 논의되면 합의된 틀 밖의 부분은 개개인의 사유공간에서 개개인의 틀이 옮겨진 부분까지 같이 이동합니다. 즉, 합의되고 이동된 부분에서 다시 확장의 가능성을 간직한 채로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1. 객관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관찰이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이것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거하면 어떠한 관찰도 ‘객관적’인 관찰이 될 수 없습니다. 관찰이라 함은 특정 대상의 정보나 사건을 ‘관찰자’가 포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관찰’이라는 행위가 이미 ‘대상’에게 간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객관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언어는 아닙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세포를 본다면, 현미경을 다른 사람 눈에도 대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본 것을 가장 훼손 없이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조차 내가 보고 있는 것과 상대방이 보고 있는 것이 같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당장 중등생물교과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는 세포는 세포질과,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등이 합쳐진 형태일 것이고, 유치원생들이 보는 세포는 그 이름조차 모른 체 동그라미와 점, 뭐 다른 이상한 것들이 뭉뚱그려진 형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은 조기교육을 받지 않았고, 천재도 아니라고 가정합니다)” 요부분을 보고 하신 말씀이라면, 그 밑의 부분과 연결해서 읽어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본 것에 대해, 혹은 사용한 것에 대해 그 맥락을 그대로 따다가 주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라는 겁니다. 현미경 이야기를 했다고 그대로 관찰이라니요. 객관의 획득이라는 말을 했으니 오해를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그 뒤에 저는 객관과 주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했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건데, 그것은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다분히 실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합의는 실체의 존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경계,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것이 100% 주관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완전한 객관, 100%의 객관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노력을 통하여 더 높은 %의 객관을, 실체의 더 나은 재구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것을 100% 도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저는 비겁하다고 생각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생각 안 해봐서 모르겠다’가 아니라 ‘객관적’우월이란 없으니 그저 즐기자 하고 치워버리는 것이 변명이라는 겁니다!! 다 포기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 순 있겠지만, 개인의 자유겠지만, ‘포기’가 ‘포기’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만은 죽어도 잘못이라는 겁니다!!!”
100%의 객관이 실현될 수 없듯이 절대적 주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관이 섞였을지언정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금붕어눈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인간의 눈에 똑바른 선을 하나 그어놓고, 금붕어에게 보여준다면 휜 것처럼 보이겠지요. 금붕어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선이 역시 휜 것처럼 보일겁니다.(헉! 눈이라는 것을 눈과 연결된 대뇌의 해석체계까지로 이야기하지 않는 우를 범할뻔 했습니다)그러나 그 선을 따라가라고 이야기한다면, 금붕어눈을 가진 사람의 눈엔 다른이가 곡선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그냥 눈을 가진 사람의 눈엔 금붕어눈을 가진 사람이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결국 운동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주관적인 감각기관으로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운동-선 따라가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동일합니다.(물론 몇걸음을 걸었네, 하는 따위의 문제가 있겠죠. 에혀)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실체를 인식하는 눈은 달라도-주관적- 실체와 개개인 간의 감각적이고 거리적인 비례는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대상의 관계성이 일정하기 때문에 그것에서 차이를 변별해낼 수 있고, 그 차이라는 것의 비례가 금붕어눈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의 비례로, 보통 눈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의 비례로 차이를 변별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돋보기를 보고 커진 물체를 판단할 수 있는 건, 어느 순간까지 돋보기라는 것을 통해서 본 세상의 실체들 사이의 관계의 비례가 육안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굴절률까지 계산 못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동일합니다.)


입자 A라는 녀석이 서울에 있습니다. 이 녀석은 부산 방향으로 시속 230km로 달리고 있었죠. 이제 우리는 망원경이던 현미경이던, 뭐던 간에 이 녀석을 관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빛을 쏘았습니다. 푸슝

광자가 날라가서 A에게 부딪힌 후 다시 튀어져 나와 우리의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A의 모습을 두 눈으로 인지(認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자가 A를 건드렸기 때문에 A는 이제 120km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A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어느 정도 속도로 달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광자가 그 녀석에게 미칠 영향을 추산하여 ‘영역’을 예상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주 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입자의 정보를 완벽하게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찰은 이미 대상에게 무언가 변화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완벽한 객관으로부터 이미 멀어지고 있다는 말이 되지요. [거시세계 스케일에서 관찰은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간섭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라는 것을]

→ 책나누미에 이런 좋은 소개가 있더군요. 책마을 분인것 같아요.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양자역학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증명한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란, 양자세계에서는 어느 한계이상까지 정확히 측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위치를 알려고 하면 속도를 알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속도를 정확하게 재려고 하면 위치를 정확히 알수가 없습니다. 거시세계에서야 녀석들이 다 크다보니 고전물리학은 거의 들어 맞지만, 양자세계로 가는 경우에 녀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관측한다는 것은 물체에서 반사된 빛(광자)을 보는 것입니다. 거시세계에서는 관측을 아무리 행하여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자세계에서는 관측하는 행위 자체(빛을 비추면 광자가 양자의 위치나 속도를 변화시킵니다)가 양자의 상태를 변화시킵니다..  이와 관련된 '슈뢰딩거의 고양이'파라독스(역설)이 있습니다. 

본지 꽤 되어서 가물가물한데, 
고양이가 상자안에 들어있는데, 상자에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상자안에는 독극물이 
들어있습니다. 
칸막이 각각 하나씩 두개의 뚜껑이 있는데 둘중 어느 한쪽 뚜껑에 특수한 장치가 되어있어서 
어떤 뚜껑을 열게되면 독극물 통이 파괴됩니다. 뚜껑을 열지 않는 한 독극물 통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독극물통이 파괴되면 칸막이를 통과해서 반대편에 있는 고양이는 독극물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정리하면, 
내가 고양이가 어디있는지 확인하려고 뚜껑을 열면 고양이를 죽이거나 살릴 확륙은 50:50입니다. 
이것은 고양이가 죽어있을수도, 살아 있을수도 있으므로 고양이는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상태 

입니다. 이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파라독스(역설) 입니다.“
수영님 요런 이야기시죠?

또한 이승일의 글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했던 ‘국소적 결정론’에 대한 양자역학에 대한 반론, 그리고 그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아스페의 실험’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국소적 결정론은 ‘물리적 세계 내에 물리적으로 증명가능한 원리가 있다’라는 것인데, 양자역학 류의 아주 극한적인 미시세계-광자나 혹은 쿼크-에서는 그것은 확률적으로만 나타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학자들은 ‘국소적 비결정론(이른바 양자역학을 위시한)’과 ‘비국소적 결정론(어떤 일종의 물리세계 이상을 가정하는)’의 입장으로 나뉘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 수영님께서, 양자역학적인 입장을, ‘비국소적 결정론’의 입장을 굳이 취하시겠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미시적인 세계에서 벌어진 실험이 도구를 통했을지라도 그것의 지각적인 관찰을 어쩔 수 없이 담보하는 것입니다. 관찰을 통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죠.

다시 제 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런 식의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 제 글의 시작이었고, 저는 그렇기 때문에 실체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 인식과 사고의 과정을 길게,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관찰도 100%정확할 수 없지만, 관찰이라는 방법도, 그것에 기인한 논리적 사유라는 방식도 결국은 100% 객관이 아닌 실체에 의한 파악이므로 그것에 대한 합의로 논의가 진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미시적인 세계에서 확률 이상의 증명가능한 것이 없으므로 그것의 확장에 있어서 의미있는 논의는 없다라는 의미로 들리는군요.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구라는. 그러나 거시의 세계도 하나의 틀로 파악해야합니다. 미시의 세계에 대한 맹신만으로는 세계를 정리할 수 없습니다. 미시는 또 다른 미시를 낳고, 하나의 실체가 미시의 세계로 환원될 때마다 그 이전의 미시는 거시로 전환되며, 상태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물음-극한적인 미시세계에서 입자만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장(field)라던가, 상태에 대한 개념도 계속 논의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그냥 개인적 궁금증입니다. 입자를 예로 드셔셔...현재의 논의에는 큰 영향이 없어보입니다.




2. 어떠한 물체는 변하지 않는가.

이것 또한 틀린 말입니다.

어떠한 물체도 정지한 물체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역동성과 불확정성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위입니다. 칸트 시대에 있어서 이것은 ‘진리’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이것은 결코 ‘진리’의 영역에 들어있지 못합니다.

미시세계에서의 역동성은 놀랍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입자와 반입자는 ‘탄생’하며, 서로 다시 만나 ‘소멸’합니다. 이것은 이 분야에 대해서 어두운 분들에게는 상당히 놀라운 뉴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적이라고 판단하고, 고정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의 역동성과 무작위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개의 표면에서 입자는 끊임없이 이탈하며, 입자는 끊임없이 포획됩니다. 

[물질파도 있습니다]

-변합니다. 저도 변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변화 속에서도 개념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틀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미시적으로 변하고 있고, 그것이 끊임없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그 세포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분열과 소멸을 향하여 변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교육을 받은 사람이 본 세포와 아이가 본 세포와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빛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또 그 관찰의 간격이 1초 이내로 제한하자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 또 뭐라고 할까봐 무서워요(웃음))”

제가 변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변화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의 가능성까지를 포함하여-혹은 배제하는 방식으로-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실험에서는 조건의 제한이요, 그리고 제 글에서는 틀의 설정입니다. 그러나 실체의 표면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 문학과 음악도 경계가 ‘개’의 경우보다 불분명할 뿐 분명히 어떤 경계는 존재할 것입니다. 아니, 경계가 시시각각 바뀌겠지요. 그러나 경계가 어딘지 정녕 모호하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겁니다. 우리는 개념과 정의의 틀을 통해서 혹은 원형과 스키마의 적용으로 무한한 공간의 어떤 지점을 ‘음악’이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봅니다. 그 공간을 편의를 위해 평면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교집합의 면적이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합의를 할 수 있는 겁니다.(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는 합의라는 것은 실체에 대한 공감이며, 자신의 원형을 기반한 스키마적인 응용의 가능성입니다)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실체에 기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개개인의 틀에 갇힌 음악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틀의 확장을 시도하고 또한 그의 분할로서의 ‘장르’를 떠올립니다. 예를 들어, 기악만을 계속 접하다가 타악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 처음부터 타악을 ‘음악’이라는 범주에 넣지는 않을테지만, 점점 음악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테지요.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아무리 접한다고 해서 그것은 음악의 범주로는 넣을 수 없을겁니다.(언젠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음악이라는 함의적 합의의 가능성에서 완전히 배제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타악이나 메탈 등 처음에는 어떤 이들에게는 음악 같지도 않았던 것들을 점점 자신의 틀로 확장시킴과 동시에 장르도 분할이 됩니다. 장르는 개개인의 음악의 틀 안에 있으면서 역시 불분명한 경계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좀 더 작은 범위이고 합의된 면적이 적기 때문에 오해의 가능성은 분명 있겠지만, 그것의 합의된 면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에서부터 다시 확장과 분할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경계의 구체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합의된 면적이 없다면, 그것은 개인만이 생각하는 장르고 그것은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장르에 대한 합의적인 면적이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정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할테지만, 시작된 논의는 점점 그 경계에 알맞은 형태로, 좀 더 나은 형태로 다듬어질 겁니다. 왜냐면 장르 역시 수많은 곡 등으로 이루어진 개념적인 실체이니까요.“

길어서 힘들더라도, 부디 읽어주십시오. 


지각을 확장해야만 하는 이유

우리는 ‘개’라는 실체를 무심결에 가시광선 영역으로만 판단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시야가 ‘가시광선 영역’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개의 온도는 280K으로써, 그 온도에 해당하는 흑체로써 많은 종류의 전자기파를 방출합니다. 적외선 카메라의 세계로 보면 강아지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가 됩니다. 그는 끊임없이 적외선의 빛을 방출하는 ‘태양’과 같은 항성체이며 발광체입니다. 전파, 적외선 그런 전파들을 강아지는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지요. 

하지만 어떠한 학자도 사람도 ‘개’가 빛을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책에도 사실로써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지각한 영역으로써의 개’가 진실이라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실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감각기관과 정보처리기관으로써 ‘필터’를 거친 ‘주관적 실체’로써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입장에서 결코 잘못되었던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채널’을 통해 개를 바라볼 능력은 아예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용가능한 몇 개인가의 ‘채널’과 ‘접근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실체’, ‘실존’으로써 그 동안 부정확하게 사용되어 왔던 것들을 재정의해야 할 때는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비로소 재 정의된 ‘실체’만이 다시 객관화라는 이름을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과학도가 해주십시오. 과학은 대상과 실체를 정리하는 학문이 아니라 정확히는,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학문입니다. 재생산될수록 관계 역시 재생산됩니다. 그 관계의 파악 뿐 아니라(보통은 과학보다 비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재생산은, 물론 조금 일찍 논의합니다만, 수영씨의 결론부분에서 조금 인용하자면, 인간의 리(理)에 속하는 것이겠죠? 그러나 저는 그것이 실체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논의 가능하다고 봅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서 ‘계열’과 ‘통합’의 관계로 한 번 글을 써야겠는데, 아, 미치겠습니다. 수영씨, 차라리 슈가 맞춰 한 번 만나는게 어때요?(웃음)

원형과 스키마에 대하여

우리는 따라서 이 두 가지 용어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내리는 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학수씨는 글에서 원형에 대해 ‘명확한 표현 방법’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다 발달된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우리는 이렇게 진술할 수 있습니다.

‘원형이라 하는 것은 인류가 무작위적으로 습득한 다종의 정보를 비교하고 종합 처리하여, 그 데이터들로부터 이끌어낸 정합성, 특성 들의 데이터로써 처리된 하나의 체계’

즉, 사람이 ‘개’라는 언어를 정의했기 때문에 비로서 그 원형으로써 ‘개’를 두리뭉실하게 추상화하는 능력이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언어’의 정의 이전에도 인류는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강아지류’라는 카테고리로 카테고라이징 시키는 능력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개’라는 언어적 기호를 덧붙여서 연결고리를 형성했을 뿐입니다. 

물론 ‘개’라는 언어로 무정형적이던 카테고리에 명확한 테두리가 생기고, 그 테두리 안에서의 메타 데이터들을 뽑아내어 ‘다리가 네 개, 주둥이 길다.’라는 정보들을 깔끔하게 표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정보들이 인간이 형성해낸 ‘원형’에서부터 흘러져나오는 것이 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은 언어에 의해서 ‘기호’화 될 수는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부산물인 ‘다리 네개’ 따위의 정보로 개를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언어’가 원형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각능력이 원형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 단연코 이야기 하건데, 수영씨는 제가 이야기한 원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말한 원형은 ‘개별적 실체’입니다. 저에게 딱 떠오르는 단편소설, 그러면 황순원님의 ‘소나기’를 이야기합니다. ‘소나기’가 제 단편소설의 원형입니다. 다른 단편소설들은 그 원형을 중심으로 여러 스키마의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단편소설, 혹은 단편소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까 말한 개의 유전자적 검증을 위해 최초로 샘플링한 유전자가 ‘원형’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원형은 나중에 수정됨과 동시에 다른 원형으로 대체됩니다. 예를 들어, 최인호의 ‘광장’이 단편소설이라고 굳게 믿었다가, 그것이 사실 ‘중편소설’의 범주라는 것을 안다면, 그 작품이 아니라 다른 작품을 원형으로 삼게 됩니다.




이론과 법칙에 대하여


인문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서로간에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또한 서로 상대방의 이론에 관심조차 두려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지향점이 쉽게 교차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신학수씨의 철학적, 언어학적 논의와 나의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시킨 논의가 이상하게 미끈덕 미끈덕 빗나가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거죠. 이에 따라 이 차이점을 명확하게 지적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겠습니다.

인문학적인 수 많은 논의들, 저 정도의 배경 지식으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수많은 학자들과 명사들의 서적과 학파 그리고 주장이 있습니다. 역시 과학에도 마찬가지로 제가 감히 법접하기 어려운 수많은 과학자들과 논의들 이론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겁 없이 지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母윱求摸, 일단 시작해보지요.

인문학 적인 수 많은 논의들은 어디까지나 ‘논의’ 이며 ‘이론’ 이고 ‘주장’입니다. 
과학적에서 전개되는 논의들은 시작은 ‘논의’이며 ‘가정’이되 종점은 ‘규칙’입니다. 

‘학설’ 그리고 ‘규칙’입니다.

→ 세계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에서, 철학과 수학, 그리고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은, 그리고 신화마저도 그 목적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리적 대상 자체를 파악하기도 하지만, 사실 물리학은 그것에서 도출 되는 관계를 정립하는 학문이며, 심지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나타난 현상으로부터 그 실체를 규명해내려고 합니다.(간단히 말해 힘 자체는 보이지 않죠)

수학은 대상 자체에서 도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대상의 단순화, 혹은 속성의 대표화-이른바 환유라고 하죠-를 통해 세상의 원리를 규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물리의 세계가 더 깊은 미시세계와 더 넓은 거시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 같이, 수학의 세계는 심지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수들이나 정리들을 도출해내고, 생장해나가고 있습니다. 정의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나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definition이 있으면 theorem이 생기고, 그 theorem은 다시 definition으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철학은 관계에 있어서 대상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보통은 나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논합니다. 혹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를 논합니다. 정당화이지요. 그러니 그것은 마치 인간의 리(理)처럼 보이겠지요. 물리학에서 대상과 대상 사이를 파악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물리학자                                물리학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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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대상---------------------대상               대상
         (물리학의 관심1)                          ∥
                                                              ∥(물리학의 관심2)
                                                              ∨  
                                                  더 엄밀한 대상의 속성, 모습

철학입니다. 물리학자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물리학자                                
                ∥                                   
                ∥                                   
                ∥(철학의 관심)                      
                ∥                                   
                ∨                                   
대상---------------------대상                  
         (물리학의 관심1)                             
                                                      
  철학의 관심이라는 부분에 어떤이는 심리학을 끼워넣기도 합니다. 심리학은 사실 사람 자체를 대상으로 파악하는 (물리학의 관심2)의 영역에 놓여있습니다. 파악하는 방식의 얼개를 제공해주지만, 실체가 일으키는 현상만을 파악할 뿐입니다.(이제 심리학에 관한 글도 써야겠군요.)

             
인문학적인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증명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대상들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물론이려니와 ‘문학에 목적성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구라도 나름대로의 의견과 주장을 분분히 전개할 수는 있겠지만, 놀라운 선각자가 등장하여 ‘문학에 목적성은 존재하였소! 그것에 대한 근거는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소.’ 라고 말하기는 힘들죠.  
→ 인문학은 증명불가능한 것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인간의 삶이 정당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출발합니다. 논리나 원리로는 완벽히 구현할 수 없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학적 현실이, 혹은 각박해져가는 도덕적 현실이, 혹은 은유로 표현되는 예술의 세계, 즉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현실이 어떻게 ‘우리것’이냐는 확신을 찾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미 철학적 정당성의 문제를 미뤄두고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고 듣고, 판단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합의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합의의 과정이 무엇이냐를 철학은 찾지만, 과학은 합의된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 발전 속도가 훨씬 빠를 뿐입니다.

인문학의 궁극에 도달했을 때에 ‘문학, 예술’의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는 지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이 창조시킨 것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형성시킨 담론, 생활방식을 비롯하여, ‘언어’에 이르기까지 전부 인류 자신이 개척해내고 만들어낸 분야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들은 ‘우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리(理)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구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속해 있기에, 인간이 창조해낸 이것들을 우리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주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 그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애초에 있기는 한건지, 모든 것이 모호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에 따라 수많은 ‘학설’이 생겨나고 각자의 생각대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기 힘든 노릇입니다.  


과학적인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증명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개척가능하다고 판단된 대상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우주의 창조, 물질들간의 상호작용하는 힘, 그 모든 분야들은 ‘실험’이라는 검증도구가 있어 그 가정이 맞는지 아닌지를 쉽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들은 인류가 아닌 다른 것, 객관성과 주관성을 분리할 필요도 없이 애초부터 인간의 계에 속하지 않는 외부의 것. 따라서 그것들은 논리화되고 수치화되고 검증이 가능합니다. 

과학은 이에 따라 담론이나 각자의 논리의 전개를 인정하되 그 것을 ‘실험’이라는 도구로 반드시 검증시켰습니다. 아니면 ‘귀납’적인 접근을 통해서 사실과 사실들을 쌓아 어떠한 ‘가정’을 ‘규칙’화 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과학은 합의된 바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합의에서 이미 전제를 획득합니다. 전제가 철학적으로 불확실한 것일지라도요. 합의된 전제가 생기니 규칙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학과 과학은 서로 다루어온 분야가 다르고 그에 따라 기법도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인문학은 자신의 논리에 대해 최후까지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증명이 안되기 때문이죠. 대신 다른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이미 ‘인간의 리(理)’에 속해있는 만큼, 그 정리를 완전히 새로 정의할 수 있죠. 그에따라 기존에 ‘인간 중에서 담론화 되어있던 그것’은 새로운 ‘정리’에 의해 차별화 된 담론으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좋고 나쁨은 또 다시 인간이 판단하는 것이죠. 

과학은 다릅니다. 그것이 다루는 것은 인간 외부의 것이기 때문에, 새워놓은 가설이 틀렸을 경우 그것은 바로 실재하는 ‘자연’과 상반되게 되고, 그에 따라 그 가설은 아예 틀렸기 때문에 ‘폐기’시켜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 과학이 자기 자신의 논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예 대상과 방법론적인 합의에서 시작하기 때문이거나, 패러다임이 도그마처럼 버텨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수씨는 인문학도로써 ‘자신의 학설’을 설명해주셨고, 저는 과학도로써 ‘그 학설의 증명 불가능’함을 역설했습니다.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당시 두 사람은 서로 교차하지 않는 우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털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과학과 인문학이 다시 통합의 시기를 맞이해야 할 시기이고, 저는 학수님과 같은 인문학도들로부터 각종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논의를 습득하여야 하고, 학수씨 역시 저와 같은 과학도로부터 과학적인 지식을 습득하셔야 하겠죠. 
→ 대상과 현상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파악하는 길을 선택한 과학은, 선결조건에서 아직 지지부진하게 답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철학에 자극제와 좀 더 생산적인 수많는 논의들을 던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한 보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인류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술먹고 놀기 좋아해서 그 한 보에 기여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웃음)



통섭으로 접근하다 ? 2. [박수영]


지각 영역의 확장

과학 기술에 의한 지각 영역의 확장은 인각의 감각을 통?정보 습득을 2차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전에는 눈, 귀, 코, 입이 1차적인 기관으로써 어떠한 정보에 대해 다이렉트로 접근하여 정보를 획득했고, 그 기관의 한계를 초월하는 정보들은 전부 왜곡되거나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방법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보다 ‘실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는 우리의 뇌로 저장이 되고, 해당 실체에 대한 배경지식으로써 작용하게 됩니다. '인간'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에 있어서 말이죠.

여기서 학수씨는 ‘원형’이라는 것을 ‘도구에 닿은 순간에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라고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떠한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면에서의 도구와 감각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객관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객이라는 말이 客, 즉 자신이 아닌 손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뜻인 한자와는 달리 objective라는 말은 대상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놓고, 자신의 가치의 개입 없이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입장을 배재하고 초월적인 입장에서 ? 객관적으로 ? 바라보았을 때,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과 ‘도구’는 동일합니다. 그 정보가 인류의 두뇌로 들어가느냐, 그 정보가 컴퓨터로 들어가느냐의 차이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르다고 해주셨습니다.

‘원형의 획득 과정에서 정보가 ‘도구’에 닿았을 때와 ‘인간의 감각’에 닿았을 때는 다릅니다’. 

물론이려니와 각 실체의 정보가 도구에 닿는 순간 왜곡(distortion)이 발생함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구’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각’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에도 ‘원형’의 정의를 ‘인간’과 ‘도구’를 분리한 것은 매우 간단한 이유입니다.

‘원형’은 이미 ‘인류’의 관점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시야로써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인류의 관점으로써의 주관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실체라는 ‘인간 외부의 것’을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해석’을 거쳐서 비로소 ‘인간의 원형’으로 환원이 되는 것입니다. 



실체에 대하여

실체는 인간이 파악한 원형도, 사유를 통해 얻어내는 무엇도 아닌 ‘사물’ , ‘object’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던 말던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명왕성’을 가져다 놓고 옥신각신하며, 이건 ‘지구형 행성’이네, ‘목성형 행성’이네 하며 싸우며 그들을 ‘인간의 세계’로 카테고라이즈 시키기 위해 논쟁을 벌였지만, 정작 ‘명왕성’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우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그저 수 많은 돌들과 입자들의 집합체로써, 충돌 집적에 이은 중력 집적을 통해, 내부의 층(layer)를 분화시켜 하나의 행성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신들을 ‘집합체’로써 행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방향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유치원생들의 시각에 따른 뭉뚱그려짐 혹은 천재의 시야에서 보여지는 어떤 규칙적인 특성 이던 무엇이던 간에 객관은 결코 ‘획득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으로써 일뿐,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세포는 세포일 뿐입니다. 그 자신이 가진 파동과 물질적 요동 그런 것도 그 자신의 일부이죠. 

실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말은 실체에 의존하고 있다고 ‘객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관점을 전제하고 시작한 ‘주관’을 ‘객관’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실체에는 합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객관성은 그저 ‘이상적인’ 논의로써만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실체라고 정의되는 것을 합의하는 것, 경계를 구분 짓는 것.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획득한 '원형'을 ‘실체’에 가깝도록, 그리하여 스스로가 가진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행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00%의 객관이라는 말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학수씨는 객관의 ‘퍼센트율화’를 통해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0% 객관성부터 100% 객관성에 이르기 까지 수치화 되어 있는, 일종의 ‘수치’라고 관념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 따위는 없습니다. 객관성에는 완벽함도 덜 완벽함도 없습니다.

인간이 객관화를 획득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종에서, 육신에서 탈피하여 자기(自己)를 버리고, ‘초월적인 존재로써’ 거듭나야 됩니다. 그야 말로 ‘신의 업’이겠지요. 인간의 눈으로 실체를 바라보고, 인간의 사유로써 그것을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는 이미 ‘주관적’인 영역의 문제입니다. 

모든 주관적인 시도들을 통해 접근된 그것이 ‘객관성’의 한 부스러기 조차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매트릭스에서 보듯이 ‘인간의 눈을 통해 지각’된다는 것은 생각 외로 별 것 아닌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통해 받아들인 정보는 신경계를 거쳐 뇌로 종합되고, 그에 따라 인간은 ‘외부에 있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이 ‘실체’ 가 없다고 하더라도 뇌에 그와 동일한 자극을 흘려준다면 인간의 지성은 그것을 판별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은 ‘실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의 일부분 ? 인간의 감각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 만을 지극히 ‘주관화’시킨 왜곡(distortion)으로써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전자 현미경을 가지고 있던, 발달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돌이 되어서 스스로의 강성과 온도를 체험할 수 없으며, 그 존재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시작된 모든 행위와 사고는 이미 인간이라는 종으로써의 한계점을 머금고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 모든 행위는 ‘인간이라는 종으로써 주관화’되어 있으며 결코 객관화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흔히들 스스로의 사고 능력과 언어 능력으로 만들어낸 ‘담론’ , ‘이론’ 등이 완전히 ‘인류’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은 결국 인간으로 귀결하며, 
그것에 ‘객관’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질에서 관념으로

돌은 ‘물질적 실체’입니다. 이 우주에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실존하는 물체입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우리는 ‘객관’을 눈꼽만큼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리(理)’로 내포화 시킨 그래서 ‘지극히 주관화 되어있는’ 관점으로써의 ‘돌’이라는 것입니다.

실체는 인간에게 있어 ‘목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목적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의 탄생이나 소멸도 ‘인류 탄생을’ 위한 목적으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저 사건, 정보 입니다. 그저 인류가 가진 ‘사고(思考)’ 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능력이 그것에 자의적인 가치를 부여했을 뿐입니다. 이 목적성은 그러므로 오로지 ‘인간’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죠. 

이제 여기서 또 하나의 것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월성’입니다. 

그것은 관념이고, 인간에게만 유의미한 개념입니다.

명왕성이라는 실체와 천왕성이라는 실체에는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그것은 ‘인간’입니다. 그것은 아예 물질계에는 실존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가 탄생시킨 ‘추상화’라는 능력, ‘관념화’ 라는 능력에 ‘본질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가치는 마땅히 판단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가치를 정한 것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당신은 우월성이라는 것을 우주 어디에서도 관측할 수 없고,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관념화된 무언가로 떠돌고 있습니다. 그 가치라는 개념은 ‘인간’에게서 탄생한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가치’라는 것이 객관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행을 많이 하는 것은 훌륭하다.
악행을 많이 하는 것은 훌륭하지 않다.
마이클 스코필드의 탈옥은 정당하다.
베토벤의 월광은 윤하의 비밀번호 486보다 우월하다.

모든 가치 논의들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는 ‘음악’이라는 특정분야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떠한 분야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모든 관념들과 인류가 상상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모든 분야들에 대해서, ‘가치’란 이미 주관적입니다. 
[저는 무신론자이므로, ‘신’의 존재를 애초부터 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논하는 것도 이미 무의미 합니다. 경계의 모호성을 느끼는 것도, 명확성을 느끼는 것도 ‘인간의 리(理)’의 내부에서의 문제입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토벤의 월광을 음파로써 그 파문으로 해석했을 때 그것은 절묘한 사인 그래프를 그리며,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교묘하게 오가며, 그 모습은 불규칙적인 무언가에 비해서 훨씬 아름답고 정교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베토벤의 월광을 들려주었을 때, 식물은 훨씬 쑥쑥 잘 자랐고, 하드코어 메탈을 들려주었더니 죽어버리더라, ‘생명체’에 활기를 불어줄수 있다는 음악이라면 이미 그 우월성을 증명한 것이 아니냐.

그것 역시 ‘인간’의 가치 판단에서의 문제입니다. 생명체의 죽음은 죽음일 뿐이며, 삶은 삶일 뿐입니다. 그것의 음파가 생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영향을 보였다. 역시 하나의 사실, 사건이고 거기에서 끝납니다.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류’의 몫이며, 그 의미는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문학과 음악의 경계, 틀의 설정, 자신의 틀, 개인만의 장르, 합의된 면적, 이 모든 용어들, 그리고 아이디어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며.

인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주관적 세계 안에서 ‘실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해 더욱 가까이 설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라는 세계의 테두리 안에서만 비로소 가능하며, 초월적인 계에서의 ‘객관’이란 불가능합니다.

그에 따라서 ‘우월성’과 ‘모든 가치 판단’의 근거 들은 오로지 인간들 사이에서 담론화 되거나 혹은 인간의 내면으로 담론화 되고 주관화 된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며,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 아래에서 저는 ‘모든 우월성의 판단은 주관적’이다라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re]통섭으로 접근하다 ? 2 [신학수]


1.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
2. 주관적인 것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각 개인에게 속한 것이다.
3. 주관은 감각(지각, 인삭)과, 그에 대한 해석으로 나뉜다.
4.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감각하고 해석하는 것인가?
5. 적어도 해석과 왜곡의 대상(실체)은 존재한다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6. 그러니 주관은 실체의 존재를 기반으로 한다.
7. 실체의 존재는 자기 아닌 다른 것들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8. 어떤 실체가 자기의 세계 외에 실재한다는 것이 객관이다.
9. 나와 실체 사이에 있는 거리와 왜곡으로 인해, 혹은 실체 속성의 무한성으로 인해 실체는 온전히 파악되지 못한다.
10. 완전한 객관성의 획득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실체를 온전히 이해 못하는 것이다.
11. 그러니 모든 논의는 소모적이다. 그것은 주관의 해석을 거친 것으므로.
12. 그것이 허무주의자들이 주장이다.
13. 그들은 돌멩이 하나조차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13-1 그러니 우월성이니 하는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13-2 물론 난 지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은 말할 수 있다.
14.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갈수록 세계는 불규칙적이라고 말한다.
     14-1 양자역학자들은 극한적 미시 세계에서의 불규칙함이 거시세계를 파악할 수 없
            는 근거가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거시세계조차 해체시켜버리려고 노력한다.
     14-2 그러니 미시의 세계를 규합해 거시의 세계를 만들지 못함이 미시세계의 불규칙
            함에 기인한다고 굳게 믿는다.
     14-3 그러나, 거시세계는 존재한다. 미시적인 불규칙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미시세계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날아간 연결고리를 복구할 수 없기 때문이
            다.
15. 그러나 사실 그들이 주장하는 주관조차 절대적이지 못하다.
     15-1 위에서 이야기한바와 같이, 왜곡에는 적어도 왜곡의 대상이 존재해야한다.
     15-1-1 주관은 실체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15-1-2 기본적인 전제는 논의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
     15-1-2-1 내가 확장적 논의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16. 그러니 돌멩이의 온전한 실체는 파악할 수 없어도, 존재 자체는 알지 않겠는가.
     그것에서 파악된 것들은 왜곡일지언정 돌멩이를 왜곡한 것이다.
17. 현미경이나 망원경, 혹은 여러 도구들 역시 변형된 실체를 지각하게 한다.
     17-1 그 변형된 실체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상과 실체(이를테면 기계) 등이 탄생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7-1-1 그 새로운 실체 역시 왜곡되어 인지되는데도 불구하고
18. 그것은 왜곡의 비율이 일정하기 때문이다.
     18-1 금붕어눈이나 사람눈은 선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지만, 그 선 자체를 기반
            한 행동-이를테면 선 따라가기-에서는 같은 형태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금붕어든, 사람이든.
19. 그러니 우리는 왜곡의 비율을 알아내어야 한다.
20. 나는 그 왜곡의 비율의 비밀이 은유에 있다고 믿는다. 
21. 은유의 가장 기본적 과제는 공간의 연결 방식에 있다고 믿는다.
22. 혹시나, 내가 중간에 미쳐서 한량이라는 꿈을 버리고 공부를 하게 된다면, 그 공부
23. 써 놓고 보니 나는 사실 오히려 과학을 정당화해주려고 하는 것 같다. 
24. 뭐든 괜찮다. 애초의 목표는 ‘알 수 없다’고 핑계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하는 것 
이었으니. 
25. 
26. 무엇보다 묻자. (일반적인 독자를 통칭하는 의미로서)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 
고 있는가? 
27. 도대체 어떻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가? 
28. 알 수 없는 삶을 지탱하고 순간순간을 판단하며 사는 근거는 무엇인가? 
29. 내 글은 죽기 위함이 아니라, 살기 위해,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30. 정당성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그냥 막사는 것보다 우월하고 고된 길임을 안 
다. 
31.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삶이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32. 다른 이의 삶 역시 실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우리가 혼자 살 수 없고, 관계에 의존하듯, 대상과 대상 사이는 관계로 연결되고, 주 
관은 실체에 의존한다. 
34.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