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성에 대하여 - [박수영]


[생각1]


‘무엇이 무엇보다 우월하다’ 라는 주장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곤 했다. 

서구문화는 동양문화보다 우월하다.
유태인은 라틴인보다 우월하다.
김경호는 문희준보다 우월하다. 

이 단순한 문장을 입증하기 위해,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인류는 수 없이 많은 논쟁을 벌였고, 그 과정은 때로는 전쟁을 수반했고, 폭력을 수반했고, 학살을 수반했으며 안티와 팬간의 폭발적인 적대감을 수반했다. 그러나 그 수 많은 희생과 땀과 피의 결과로서도 각 명제의 명확한 입증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J-pop과 K-pop간의 우월성에 대한 논쟁으로 친구와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고, 그것은 결국 서로의 감정만을 상하게 한 채 아무런 결과도 나타내지 못했다. 화가 가라앉을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우월성’이란 무엇인가?

이런 간단한 명제를 생각해보았다. 

사람 2명은 1명보다 우월하다. 
  
이 명제는 사실인가 거짓인가?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이끌어낸 결론은 이 명제는 ‘거짓’이다.

왜냐고?

저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우월하다라는 명제로 적용 가능한 모든 항목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 2명은 어떠한 사람 1명에 대해서도 우월해야 한다. ‘우월하다’라는 단어는 엄청나게 광의적이고 포괄적이다. 

‘사람 2명은 1명보다 우월하다’ 가 A이고, ‘병장 박수영과 병장 김지민은 앙리보다 ‘축구에 있어서’ 우월하다’ 가 B라고 하면, A ⊃ B. 즉, B는 A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A가 사실이기 위해서는 그 집합의 구성요소인 모든 B는 전부 사실이어야 한다. 

갑자기 등장시킨 지민씨에겐 죄송하나, 나와 지민씨의 조합이 앙리보다 축구에서 우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생각하신 분이 있다면 저를 아스날로 보내주십쇼. 히히] 

그러므로 사람 2명은 1명보다 우월하다.는 거짓이다. 즉, 우월하다라는 용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해서 어떻게 우월한지에 대한 정의가 명확히 되어야 하고, 그 대상도 명확히 구분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백인은 황인종보다 자본에서 우월하고, 일반적으로 황인종은 백인보다 지능지수에서 우월하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제한을 걸어주지 않으면 우월하다라는 용어는 자칫 서로간의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예시 명제의 참 여부는 일단 떠나서요. 하하]




[생각2]

객관적 우월성과 주관적 우월성에 대하여

이 부분이 아마 핵심이 되는 논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신학수 병장님의 리플을 예로 들겠다. [이하 학수씨]


저는 분명히 음악의 우월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명확히 가를만한 법칙이 나타나지 않는한 '우리가 모르는 것'이지 그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이엘 1장과 쇼팽이 그 우월이 있는한, 우리가 그 우월에 대해 모두 공감하고 알 수 있는 기준을 모르거나, 혹은 그 기준이 생겼음에도 노력의 부족으로 간파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학수씨는 음악[문화]의 객관적 우월성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그 규칙을 다만 우리가 간파하지 못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에서 ‘쇼팽’은 ‘바이엘’보다 우월하다. 

여기서 음악 혹은 문화라는 것의 우월성을 고찰해봐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우월성이란 무엇인가? 
지능지수, 돈, 키, 몸무게, 숫자, 병력과 같이 수치로 변환할 수 있는 요소들과는 달리 음악에 있어서의 우월성이란 객관적으로 정의되기 힘든 요소이다. 어떠한 작품을 감상하고 느끼는 감정들은 전적으로 ‘개인적’으로 한정된다. 그러므로 우월성의 기준 역시 개인의 내면의 판단에 의거하게 된다. 

여기서 객관적 우월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자. 다만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유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쇼팽은 바이엘보다 우월하다. 여기서 일단 나는 음악에 있어서의 우월성이란 청자로 하여금 ‘구체적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으나, 곡에서 느껴지는 느낌, 감각, 전율, 환희,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각을 본능적으로 수치화한 정도의 차이’라고 정의하겠다.  

[전제]
   1. 음악에 있어서 우월성의 판단이란 전적으로 ‘개인의 내면적 판단’에 의거 한다.
   2. 절대적 우월성이 있을 경우, 동일한 조건하의 모든 청자는 동일한 우월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정의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으나, 어찌되었든 무엇이라도 정의하지 않으면 논의는 나아갈 수 없기에 부득불 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정의를 생각해주신다면, 그 의견을 반영하도록 하지요.]


그러므로 어떠한 청자도 바이엘을 쇼팽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서는 안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곡’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이 그 우월성에 흠집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이엘 1장은 내 첫사랑이 처음 나를 위해 쳐주었던 곡이었지.’ 이렇게 추억으로 미화되었더라도 쇼팽은 바이엘보다 우월해야 한다. 만일 이런 추억이나 기타 다른 배경지식들이[음악과 무관한] 곡의 객관적인 우월성에 관여한다고 하면, 그것이야 말로 곡의 객관적인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음악의 우월함이 음악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베네치아가서 곤돌라를 탄 추억이라던가, 시험기간에 일주일 내내 버거킹만 먹었단 기억이라던가 하는 완전히 무관한 것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 ‘음악’이라는 것에는 절대적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논의의 초점은 바이엘을 더 우월하게 여기는 청자가 과연 존재하는 가의 여부가 된다. 있다면 객관적 우월성은 상당히 손상을 입게되고, 주관적 우월성이 더욱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사실 쇼팽과 바이엘이 있다면 누구라도 쇼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대 베토벤 이라던가, 윤하 대 쇼팽이라던가, 하는 식의 장르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비교가 되면, 과연 베토벤과 쇼팽의 절대적 우월성은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 [제가 써놓고도 요상하군요]

[물론 여기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해당 청자가 양 분야에 있어서 공통으로 귀가 깨어있는 상태여야 한다.]

확언을 할 수 없으되, 나는 누군가는 윤하를 선택할 것이고, 플라이 투 더 스카이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나는 주관적 우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논의를 나는 “자기계발서에 대한 짧은 생각”이라는 글에서 진행한 바 있다. 

그 글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시멜로 이야기” 보다 우월하다고 믿었으나, 누군가 “마시멜로 이야기”에서 “그리스인 조르바” 이상의 가치를 발견했을 경우, 그에게 있어 “마시멜로 이야기”는 “그리스인 조르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는 그에게 “마시멜로 이야기”는 열등한 책입니다라고 강요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월에 대한 판단 근거가 전적으로 개인의 ‘내면’에 의존하는 이상, 그 우월성에 대한 논의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다른 기타 외부요인에 의해서 우월성이 입증된다고 정의한다면, 그 외부요인으로 측정하면 될 것이다. 판매량, 선호도, 등등] 

그렇다면 우리가 ‘베토벤’,’모차르트’ 등의 클래식을 명곡이나 위대한 곡이라는 등 ‘우열적인’ 수식어를 붙이고 또 그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그것은 '절대적 우월성'의 증명이 아니라 그 곡이 얼마나 “주관적 우월성”을 잘 이끌어내는가의 정도를 나타낸 것일 것이다. 
  애초에 대부분의 청자들은 클래식이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청음의 준비자체가 되어있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클래식은 다만 지루할 것이고, 졸린 음악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음형과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나면, - 즉 그들이 준비가 되어 있을 때 ? 많은 청자들은 이 곡들이 “주관적이고 지극히 내면적인 판단”으로 우월하다고 말하게 된다. 

샤르트르가 좋은 문학의 역할이라 함은 독자로 하여금 더 높은 경지의 자유를 이끌게 하는 인도라고 했던 것처럼, 클래식 역시 청자의 감정을 보다 잘 어루어 만질 수 있는 인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결코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인도의 능력이 ‘모든 청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논의 하에서 ‘재즈’가 ‘락’보다 우월하다는 논의는 A 청자에게 있어서 주관적인 우월성아래에 참이며, ‘락’이 ‘재즈’보다 우월하다는 논의는 B 청자의 내면적 근거 아래에 참이다. A와 B 청자 누구도 상대로 하여금 ‘재즈’나 ‘락’에 대한 절대적 우위성을 절대 증명하거나 주장할 수 없으며, 그저 가능한 것은 좋은 곡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관적 우월성’을 이끌어낸다는 사실 뿐이다.




우월성에 대한 변명-혹은 책마을의 호된 신고식
[신학수]
------------------------------------------------------------------------

저는 애초에 광철씨께 이런 질문을 드렸더랬습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간단하게만 보이는 질문이었죠. 딱, 저 한 줄이었습니다.

“문학에 어떤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대답은 과연 무시무시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문학에 어떤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고생각하진 않습니다. 어찌보면 효용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입장엔 별로 동의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목적없이 '발생된' 문학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무궁무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할수있는 것"의 스팩트럼은 철학적 성찰에서부터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연애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요. 
그래도 그런 다양한 것들 중에서도 한가지를 고르자면, 어쩌면 문학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사유 혹은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지평이 아닐까요?

예컨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래로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지성과 감성, 상상력의 조화로운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감성이 선험적 지각의 형식의 지반위에 외부의 다양을 받아들이면 상상력의 도식 작용을 통해 지성의 개념들에 매개시켜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각 능력들간의 서로 합의된 사유 모델이란 정말 근원적인 것일까요? 어쩌면 그 '미리' 합의된 능력들의 일치란 순전히 임의적으로 가정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미리 가정된 일치보다는 어떻게 일치가 '발생'하는지를 기술해야하지 않을 까요? 

여기서 문학의 성립에 대한 반성을 해봅시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하는 것. 시를 발생케 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사유모델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를 쓰는 것이 단지 우리가 외부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문이지요. 시의 발생은 우리가 도저히 개념화 할 수 없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그래서 우리 개념적 표상능력이 한계에 도달하게끔 압박하는 그 무엇인가의 조우에서 생성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표상능력이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할 때, 표상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우리의 감성이 '상처'를 입을 때. 우리는 마치 부드러운 살속으로 파고들어온 이물질을 끊임없이 감싸덮는 조개처럼, 상처를 은유라는 방식으로 감싸앉아 마침내 빛나는 시라는 영롱한 진주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자체는 기존의 사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능력들의 발생적 일치에 의해 인식이 달성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겁니다.“

당황한 저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문학이 가지고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스펙트럼의 다양함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광철씨의 입장으로 문학을 파악했을 경우, 문학에 대한 그 정의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의도되었건 되지 않았건 발생되는 기능은 천차만별이고, 문학은 이미 내던져진 것으로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목표라는 것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문학 탄생의 가능성입니다. 왜 ‘문학작품은 써질 수 밖에 없는가’ 혹은 ‘쓸 수밖에 없는가’, 이것에는 어떤 목표나 지향점이 있지 않겠는가 입니다.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연애시는 여자친구의 사랑의 획득이라는 ‘목적’을 가진,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고 칩시다. 제 의도는 연애시가 써지게끔 하는 목적과, 또 여타 다른 작품이 써지게끔 하는 작가의 목적, 혹은 그것을 다른 형식이 아닌 ‘문학’이라는 장르로 풀어내야만 했던 의도, 설령 의도되지 않았던들 그렇게 문학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여쭙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학작품이 창작되는 순간 광철씨가 말한 다양한 스펙트럼 각각의 색에는 각자의 목적이 있겠지만, 그 스펙트럼이 목적성을 가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띄는데는 일단 스펙트럼의 가시성(可視性)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시성이라는 것이 다른 여타의 예술이나, 혹은 학문의 가시성과는 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닐까, 그 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가시성, 혹은 가시영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면 그 지향점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최근의 제 고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예를 들면서, 가정된 일치보다 어떻게 일치가 발생하는지를 기술해야 한다는 갑작스런 논의는 좀 당황스럽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도 한 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미리 가정된 일치보다는 어떻게 일치가 ‘발생’하는지를 기술해야 된다는 말씀은 공감합니다. 미리 가정된 일치가 잘못되었다면 말이죠. 한마디로 가정된 일치는 ‘가정된 것’일뿐 ‘일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된 일치보다는 일치의 발생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를 기술하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치의 발생에 대한 기술 역시 기본적으로 일치를 전제하고 있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고 만약 완성된 일치가 아닌 완성된 일치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자면 일치의 발생의 메커니즘을 가정해야 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저는 기본적으로는 일치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논의 없이 개별 작품이나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수없는 발생의 기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수없이 감당할 수 없는 기술들은 분명 배경지식 없는 여행객을 파리의 방사선 거리 한 복판에 세워놓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발생‘하는지’에 대해 기술하려면 일치에 대한 기본적 전제-도대체 일치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적어도 최소한 개별 작품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문학의 성립에 대한 반성을 해봅니다. 광철씨는 일치의 ‘발생’에 주목하면서 시라는 것이 생산되는 것의 체계를 설명하는데, 시를 쓰는 것은 우리가 외부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며 우리가 개념화할 수 없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개념적 표상능력이 한계에 도달하게끔 압박하는 그 무엇인가의 조우에서 시가 생성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표상능력이 무능력함을 실감할 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감성이 ‘상처’를 입을 때 시가 탄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제게는 이해 가능한 견해입니다. 기존의 사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능력들의 발생적 일치에 의해 인식이 달성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저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흑흑, 제 공부가 짧은 탓일까요...언어영역 성적은 괜찮은 편이였는데...여기서의 ‘발생적 일치에 의해 인식이 달성되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요?(이거 질문입니다(웃음))

길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요점은 간단합니다.
“왜?”라는 저의 물음에 대해 광철씨는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쓸까요?”라는 질문에 대해선 “왜 쓰냐니? 그냥 쓰는 거지, 왜 쓰냐는 물음이 의미가 있나?”라고 운을 띄우시고는, 그래서 ‘요러요러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어떻게’라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근데 저는 아직 “왜 쓰는 것일까?” “적어도 문학작품이 태어나게 되는, 즉 쓰이게 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쓰게 만드는 것이 문학의 목표가 아닐까. 그러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있고, 그것을 여쭤보았던 것이지요. “

다시 달린 광철씨의 답

“일단 해명하자면 제가 <문학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학수님의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그러한 문학에 대한 목적론적 태도가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폭력성 때문이었습니다. 문학창작에 궁극적 목적을 설정하려는 것, 모름지기 문학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목적을 지향해야하지 않겠느냐라고 묻는 기획은 자칫하면 문학에 대한 배타적 구획짓기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지점을 상정하고 그 지점을 기준삼아 합격/불합격을 결정하듯이 이것은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저것은 배제하는 '포함과 배제의 논리'로 치닫을 가능성을 걱정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학에 대한 '정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설정된 궁극적 목적에 따라 문학의 정의가 내려지고 정의라는 기준에 따라 문학을 바라보는 것은 위에서 말한것과 동일한 포함과 배제의 폭력성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인간을 "이성을 지닌 동물"이라 정의하는 것은 이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광인들'에 대한 핍박과 배제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학수님은 예술이 가지는 궁극적 목적에 대해선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도대체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꺄요? 우리는 과연 예술에 대해 명확하고 확고불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뒤샹이 서명을 갈겨놓은 소변기, 혹은 앤디워홀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낸 이미지들을 우리는 과연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오늘도 예술가들은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비웃듯이 갖가지 기상천외한 창작물들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의문 때문에 저는 문학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질문과 정의를 통한 접근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이지요. 물론 저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주실 만한 탁월한 견해를 학수님이 가지고 계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부디 제 걱정을 '기우'로 만들어 주시길......(웃음)“

저는 당황했습니다. ‘문학의 목적성’에 대해 가벼운 질문을 날린 댓가로 이런 커다란 질문을 받게 되다뇨? 그러나 그것에 대해 저는 어떻게든 대답이(광부님들의 눈을 피해 알트탭을 100번은 눌러가며 작성한 허접하기 그지없는)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감 없이 그 원문을 옮깁니다.(지금 보면 문법 안 맞는 부분도 있고 부끄럽지만) 음악, 혹은 음악적 장르의 우월성에 대한 논의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 분명 이 문제와도(주제는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이런 글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학의 정의와 목적성

“1. 목적성은 폭력적이다.
목적성이 가지는 배제의 속성 때문이다.
배제를 피하기 위한 것의 전제로서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유의 위협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도 어느 정도의 상대성을 지닌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거나 무한하지 않다.
그것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이다.
모든 자유를 1/n으로 똑같이 부여한다.
혹은 개인이 자유를 가져야 될만큼의 크기만 부여한다.
둘 중에 이상적인 것은 나의 경우 후자라고 생각한다.
후자를 이루기 위해서는 목적성은 필연적이다.
단, 목적성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완전한 목적성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완전해지지 않을 수는 있어도 더 나아질 수 있으므로.


2. 문학의 정의.
나는 문학의 정의 뿐아니라
그 어떤 작은 단어의 정의조차도 제대로 내릴 수 없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이며 지금까지 나온 모든 글들은 의미를 가진다.
글들은 단어의 조합이다.
단어는 의미를 가진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그것이 완전하던 하지 않던 정의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의는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모순이므로 모든 글들은 그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그것들은 어떻게 소통가능한가?
그것이 소통가능하려면 정의는 내려져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정의가 정확하지 않을 뿐이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정의에서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어떻게 문학작품이라고 인식되는가?
어떻게 비문학은 비문학이라고 인식되는가?
그리고 그것의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문학작품에 대한 공감대-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지언정-가 형성되었다고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문학의 정의를 이야기해보는 것은, 좀 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문학작품의 의미를 가시적으로 끌어내보는데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비판 불가능할 수 있지만,(여기서 비판은 깐다는 뜻은 아니다.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쯤으로 정의하자)
보여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 비판이 성실하고, 진실하다면, 치열하다면, 적어도 문학의 정의는 완전해지지 않을 수 있어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그러니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 정의와 목적성과의 관계
정의는 대상의 좀 더 완전한 언어적 구현의 열망으로 생기는 것으므로,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실재만을 논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문학이라는, 신의 피조물마냥 작품만 널려있고, 그 실체는 모호한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버젓이 붙여서 사용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글자은 사람들이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일수 있다.
그 경우 문학은 특정대상을 전제로 가진다.
혹은 문학이라는 글자는 대상 뿐 아니라 앞으로의 그 정의나 직관적 배경지식(혹은 원형)에 부합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그 경우, 문학이라는 정의는, 어떤 것이 문학이라는 직관은, 신학수의 새로운 卒作이 태어나는 그 순간, 그 녀석이 문학인지 아닌 지를 구별할 수 있다.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그 정의나 직관적 배경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좀 더 완전한 정의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그 정의는, 그러므로 완전한 정의를 향한 여행을 펼칠 수 있다.
문학의 정의는 여러 가지를 포함할 수 있겠지만, 이미 문학은 어떠해야한다는 당위를 포함하고 있다.(그것이 형식적 측면에 그치는 소극적인 정의일지라도)
그것이 문학의 목적성이다.
문학의 목적성은 문학의 정의같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말로 표현했을 때 비판의 여지를 가지게 된다. 비판의 여지는 그것의 정의 자체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얻는다. 
그것은 소통되고 나눠진다.
나는
마치 예수가 다섯 개의 빵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 마냥,
모든 이의 정의가 쏟아져 같이 논의될 것을 바란다.
그 치열한 논의 속에
좀 더 완전한 문학의 목적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예술작품의 정의는, 그리고 그 목적성은?
예술 작품의 정의는 역시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는 잘못되었을지언정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정의의 속성대로, 완전해질 수는 없어도 더 나아질 수 있다.
어떤 곳에서 이미 한 이야기지만,
‘일반적인(폭력적인가? (웃음))유치원생’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둘의 우월성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일 수도,   
혹은 고흐의 우월성이 확연하다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라고 빠득빠득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인정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기반한 것일테지만)
후자의 경우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것은 앞서의 논의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흐와 샤갈의 그림은 어떤가?
앞의 예와는 비교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흐와 샤갈의 그림의 가치가 동등하기 때문인가?
혹은 그 정의에 똑같은 거리 정도만을 비껴있기 때문인가?
어떤 것에서 개념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완벽히 같은 거리를 가지는 것이 정녕 가능한가?
어느 쪽이든 그 정의에 더 나아간 것이, 그 목적에 맞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반문한다.
정의는 온전한 것이냐고.
목적성은 온전한 것이냐고.
아니다.
그러니 이야기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정의와 목적성이 더욱 완벽해지기 위하여.
그리하여야만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정의와 목적성을 버리고 어떻게 기준을 삼을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완전에 다다를 수 없다고 내팽개쳐버리는 것은 과연 옳은가?
좀 더 나은 방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혹은 음악을 포함한 예술의 완벽한 정의가 당장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최소한 소통과 상호 비판을 통해서 보다 완벽에 가까운 정의와 목적성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필연적으로 정의와 목적성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리고 그 완벽을 향한 도정이 바로 우리가 정녕 학문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이것이 내려진 궁극적인 결론이었습니다.



---------------------------------------------------------------

이런 정의의 이야기를 굳이 시작하게 된 것은 수영님께서 굳이 강조하시는
                                
                           “객관적 우월성”

에 대한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객관적(절대적) 우월성’이 이 세계에서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객관적 우월성’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서 ‘우월성’의 논의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가끔 친구들에게 하는 비유지만,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해서 여행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 모든 것을 갖춘 것 같아도 빼놓는게 많습니다. 그것이 인간이구요. 그래서 여행을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객관적 우월성을 알 수 없어서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요. 그것은 ‘모든 것을 안다’라는 말만큼이나 오만한 말이라고 저는 자신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객관’의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객관과 이성의 맹신에 빠져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완벽한 기반과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 전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껏 철학은 완전한 진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철학이나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습니까?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더 많아졌지만, 그만큼의 영역 확장을 발전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관적으로 분석하지만 추상적인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으로 분석되는 대상은 주로 어떤 시간과 공간 속의 한 상태로 대표되어 분석됩니다) 

객관을 빙자하여, 그 완전한 객관성을 알기 힘들기 때문에, 어떤 것의 가치를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것을 알 수 없으니 포용하자는 것도 사실 비겁한 일입니다. 

‘똘레랑스(?)’라는 책마을의 글에서 제가 올렸던 답글로 제 논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절대적인 기준과 그것에 대한 우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우리가 알 수 없다할지라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점이란, 어떤 절대성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람마다 그 기준점이 다르다 하는 것은 어떤 가치를 판단하는데 있어 그 측정기구를 적용하는 지점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측정되는 그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용자가 간난아기일 경우,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그림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그림들은 그 그림들의 가치나 심미성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판단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샤갈과 고흐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둘에게 어떤 자그마한 우열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못 볼 뿐이지요. 그것을 알 수 없을 바에야 인정하자는 것인데, 물론 노력없이 우열을 주장하는 사람들(그중에 어떤 이들은 진짜 覺者일수 있지만)보다는 그것이 낫겠지만, 노력을 수반한 우열의 가늠은 분명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첫째, 노력없는 판단이요, 둘째는 노력의 포기이며, 셋째는 노력 후의 것이 절대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직관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들이 본능인지, 많은 사람들은 첫번째나 두번째 단계에서 세상을 적당히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곤 하지요. 그게 편하거든요. 사고도 별로 안나고.”



우월성에 대하여(2) - [박수영]


[학수 Phase]

음악 그리고 문학 및 예술 분야에 있어서, 객관적 우월성이란 존재한다. 

이것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신의 영역일지도 모르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분야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수영 phase]

논의에 앞서 예술분야에 있어서 우월성이란 용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우월이란 간단히 말해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뛰어난지에 대한 정의가 명확치 않을 경우, 논의의 초점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음악’의 우월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구체적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으나, 곡에서 느껴지는 느낌, 감각, 전율, 환희,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각을 본능적으로 수치화한 정도의 차이”

이 정의에 의거하면 음악의 우월성이란 전적으로 ‘개인의 내면적 판단’에 의거한다. 

따라서 ‘객관적 우월성’이 존재한다면, 그 판단자 모두에게 있어서 우월함은 동일한 결과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서 우월성은 완벽히 동일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우월에 대한 판단 근거가 전적으로 개인의 ‘내면’에 의존하는 이상, 그 우월성에 대한 논의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학수 Phase]

사실 여기서 저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학수씨가 제 글을 논박하기 위해서 공격해야 할 부분은 

1. 제가 임의로 설정한 ‘우월성’에 대한 정의
2. 우월에 대한 판단 근거가 개인의 ‘내면’에만 의존한다는 것

이 부분에 대한 논박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다른 논지의 전개인 문학의 목적성에 대하여 라는 글을 들고 오셨습니다. 

사실 처음의 출발은 ‘음악에서 장르의 우월성에 대한 논의’ 였었습니다. 따라서 제 글에서 등장한 예시나 논지 전개의 대부분은 ‘음악’ 분야에 대한 논의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수시는 문학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따라서 학수씨는 반드시 

음악 분야에 있어서의 우월성과 문학 분야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같은 문제인가?


에 대한 구체적인 논거를 진행해주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학수씨에게 있어서 저것이 같은 문제라고 인지되어진다 했더라도, 저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문제가 아닙니다. 마땅히 설명되어야 하고 어째서 이것을 같은 판단척도에 놓고 설명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 해주셨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후의 전개되는 글의 전개양상은 기본적으로 제가 이야기 했던 것과 직접적으로 관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이 분야에 대해 이런 수많은 논의들을 했는데, 당신이 알아서 그 글의 주장에 해당하는 논거의 부분과 주장을 찾아서 반박하시오. 

예. 해드리겠습니다. (흐흐)



문학의 목적성에 관하여 


대담 1. 문학에 궁극적인 목표는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방향이 있다. 

1. 궁극적인 목표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2. 궁극적인 목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뒤의 질문은 무의미 하다.

광철씨는 ‘궁극적인 목표는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다만 ‘목적없이 발생된’ 문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개념적 인식들을 구체적으로 ‘시’로 언어화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표상능력의 한계에서 고뇌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뇌의 과정은 능력의 발생적 일치에 기인한다. 

  학수씨는 ‘궁극적인 목표는 있지 않겠느냐’ 라고 반박합니다.

1.의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문학’이라는 장르로써 탄생한 그 결과물에 대해서 근원을 찾을 수 없다. 

사실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학수씨는 이미 문학과 다른 예술 장르를 구분짓고 있다. 따라서 문학에서의 우월성과 카테고라이즈 시킨 예술장르에서 우월성을 동일화 시키는 것은 상당히 난폭한 기술이 된다. 

2. 어떠한 작품들이’ 문학’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3. 문학이 가진 고유의 가시성을 파악하면, 지향점도 파악할 수 있다.

이 문장들은 전부 근거가 아닙니다. “문학에 있어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는 말에 대한 다른 표현들입니다. 
근원, 지향점, 등의 표현은 모두 문학으로써 탄생한 것들에 대해 하나의 궁극적 개념으로 환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것입니다. 하지만 광철씨는 애초에 그런 궁극적 목표가 없다고 말했으므로, 이 이상의 논의의 전개는 불가능합니다.

이후의 대담도 완전히 동일한 전개입니다. 

발생’하는지’에 대해 기술하려면 일치에 대한 기본적 전제 ? 도대체 일치란 무엇인가 ? 를 가지고, 적어도 최소한 개별 작품내에 ‘일치’가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가정해야 한다. 즉 주장입니다. 만일 이 주장에 대해 동의 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럴 수가 동의할 수 없다니 이건 사실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담 2. 문학의 궁극적 목적과 폭력성

광철씨가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문학의 궁극적 목적’이 야기한 폭력성에 대한 논의입니다. 
‘문학의 궁극적 목적’을 설정함으로써, 문학이 마땅히 가야하는 길로부터 배제된 수 많은 것에 대한 배타적 구획짓기가 자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정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설정된 궁극적 목적에 따라 문학의 정의가 내려진다면 역시 배제의 폭력성을 띄게 됩니다.

이 부분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문학의 궁극적 목적’이 존재했을 경우, 그것을 가정했을 경우의 폐해이다. 결코 이 것은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거도 논증도 아니다. 만일 이 주장을 완벽히 논파하여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폭력성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내어도, 그것은 절대 ‘궁극적 목적’ 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존재 여부는 여전히 각자의 논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담3. 문학의 정의와 목적성

학수씨의 답변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크게 4가지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목적성과 폭력성 2. 문학의 정의 3. 정의와 목적성의 관계 4. 예술작품의 정의는?

이 글은 엄청나게 혼동스럽습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목적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폭력성에 문제와 목적성의 존재 여부와는 서로 상통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자유’에 대한 논의가 등장합니다만, 이 논의는 상당히 비약적으로 전개됩니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인가? 아니다. 타인의 자유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는 자유를 1/n으로 부여하거나, 개인 가져야 할 크기만큼 부여한다.
나는 여기서 자유란 개인이 가져야 할 만큼만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목적성은 필연적이다.

허허. 

갑자기 등장한 ‘자유’라는 것에 대한 정의도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타인의 자유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솔직히 말해 독자인 나에게 전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장들이 학수씨의 내면에서 수 많은 사고의 갈래들을 거쳐서 또한 그 사고가 개념화되고 언어로 변화하면서 얼마만큼 열화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은 나에게 아무런 감명도, 전달력도, 이해력도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우선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타인의 자유로부터 위협을 받는 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가? 게다가 여기에서 발전하여 개인의 자유는 1/n으로 부여하거나, 개인이 가져야 할 만큼만 부여한다고 한다. 자유와 같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진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오만한 논의이다. 개인의 자유를 자르고, 부여한다는 것도 우습고, 그에 따라서 목적성은 필연적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물론 학수씨는 이 논거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밀한 근거와 사유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제시되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필연’이란 단절 조각처럼 어긋난 테트리스 블록과도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논의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지적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작업이고, 게다가 그 논의가 우월성의 논의로 연결되지도 않으므로, 간략하게 넘어가도록 하겠다. 

문학에 있어서의 궁극적 목적이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실증가능한가? 라고 물었을 때, 학수씨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나 그것이 있다는 사실은 맞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증명 불가능한 이상에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로써 또한 주장으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이 주장에 찬동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추가적으로 연구를 하고 개척을 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로선 논리적인 전개로, 근거에 의해서 이 명제는 절대 도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시도된 수 많은 논리의 전개들은 ‘허점’과 이 전개를 도출시키기 위해 변용된 수 많은 명제들의 탑 위에 서 있다. 

게다가 최후에 이 글이 더욱 용납될 수 없는 것은, 최후에 문학은 ‘예술작품’으로 도약한다. 이 엄청난 도약에 대해 심지어는 스스로도 문학과 다른 예술은 차별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서술했음에도, 이 도약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시 우월성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서

학수씨는 이 우월성에 대해서 스스로도 약간의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 역시 절대적 우월성’이 이 세계에서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우월성’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서 ‘우월성의 논의’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몇 번이고 지적했으나, 학수씨가 말하고자 하는 ‘우월성’이란 대체 어떤 개념인가? 어떤 정의 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어떻게 우월하다는 것인가? 

내가 ‘우월성에 대하여’에서 가장 우선으로 지적했던 점은 이 문제였다. 우월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대단히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이상에는 나와 학수씨가 이 과제에 대해서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하려면, 일단 용어 자체를 정의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학수씨는 결국 ‘우월성’이라는 것에 대해 명확한 개념 제시는 뒤로 미뤄놓았다. 그리곤 ‘절대적 우월성’이 이 세계에서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의 영역 일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무엇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가 말하는 절대적 우월성은 무엇인가? 

만일 제가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차용했다면 학수씨는 제가 쓴 ‘우월성에 대하여’를 다시 읽어봐주시기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수씨에게 있어서 ‘우월성’이라는 개념이 다르다면, 마땅히 그것을 제시하셨어야 합니다. 

또한,


‘절대적 우월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의 선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나는 주장했으나, 학수씨는 그에 대한 논박으로


‘절대적 우월성’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뿐 입니다. 

라고 그저 같은 말을 또 반복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른 논박인가요? 


연구에 의한 발전여부나, 진보 여부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학수씨가 아무리 객관적 우월성을 믿고 따른들, 그것은 종교에 대한 신념과 거의 비슷한 차원에 머무른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아무런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그야말로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


정리하며

1. 문학적 목적성에 대하여. 라는 글의 차용은 ‘우월성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 글은 어디까지나 ‘문학’에 대한 글로써, ‘예술’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2. 학수씨는 마땅히 ‘우월성’이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과 판단 근거를 제시하셨어야 합니다. 
여기서 제가 학수씨의 글을 살펴보며, 추측한 결과로는, 학수씨는 제가 제시했던 ‘우월성’의 근거, 개인의 주관적 판단근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해당 텍스트의 우월함의 가치는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와 청자의 개인적인 감각과는 무관하게 그 텍스트 자체의 무언가로 보고 있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학수씨와 제가 생각하는 ‘우월성’에 대한 개념은 처음부터 차이가 났습니다. 그렇다면 논의는 당연히 어긋날 수 밖에 없구요. 

3. 현재로썬 ‘절대적 우월성’의 논의의 근거가 없는 상황이라면, 이 명제는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합니다. 절대 단정적으로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장하고 믿을 뿐입니다. 그것을 연구하여 진보와 연구가 쌓여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로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실’인양 생각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겁자, 오만자’의 탈을 씌우는 것은 그야 말로 폭력적인 행위일 것입니다.  

4. “우리는 주관적으로 분석하지만, 추상적인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분석합니다’, 추상적인 대상이 변하든 안 변하든, 심지어 그것이 절대적 법칙에 의거하여 하나의 면으로써 존재하더라도, 그것의 판단 ? 우월성의 판단 여부에 ? 우리의 주관, 내적 세계가 관여하는 이상에는 그것이 ‘일반화’ 즉, ‘규칙’화 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물론 우월성이라는 개념을 제가 도입한 개념으로써 받아들일 경우에.]


5. "객관을 빙자하여 그 완전한 객관성을 알기 힘들기 때문에 노력을 안한다면 비겁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비겁합니다! 완전한 객관성 자체가 존재한다면. 말이죠.


6. "절대적인 기준과 그것에 대한 우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우리가 알 수 없다할지라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점이란, 어떤 절대성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람마다 그 기준점이 다르다 하는 것은 어떤 가치를 판단하는데 있어 그 측정기구를 적용하는 지점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측정되는 그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용자가 간난아기일 경우,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그림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그림들은 그 그림들의 가치나 심미성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판단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샤갈과 고흐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둘에게 어떤 자그마한 우열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못 볼 뿐이지요. "

하지만 여기서도 우스운 것은, 사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무언가를 판단한다 하더라도, 그 대상은 불변이다. 라고 하셨지만, 결국 ‘그 그림들은 그 그림들의 가치나 심미성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판단될 것입니다.’ 라고 하신 것은 여태껏 논의한 내용들과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제가 이야기 했다시피 그 가치나 심미성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거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기준점이 되는 사람들의 판단은 전부 일치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고흐는 샤갈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하던가요? 
그렇다면 그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두뇌와 판단력에게 ‘절대적’인 우월성을 떠맡긴다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게 우월성을 정의하신다면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 [신학수]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음악적 장르의 우월성은 과연 ‘논의 가능’한가?


1부. 어떻게 음악적 장르의 우월성을 논의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무엇을 전제로 획득할 수 있을까

객관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객이라는 말이 客, 즉 자신이 아닌 손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뜻인 한자와는 달리 objective라는 말은 대상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놓고, 자신의 가치의 개입 없이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어떤 객관으로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가치의 개입 없이 바라본다는 객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자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학문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객관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언어는 아닙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세포를 본다면, 현미경을 다른 사람 눈에도 대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본 것을 가장 훼손 없이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조차 내가 보고 있는 것과 상대방이 보고 있는 것이 같은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당장 중등생물교과 이상의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는 세포는 세포질과,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등이 합쳐진 형태일 것이고, 유치원생들이 보는 세포는 그 이름조차 모른 체 동그라미와 점, 뭐 다른 이상한 것들이 뭉뚱그려진 형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은 조기교육을 받지 않았고, 천재도 아니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그 세포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분열과 소멸을 향하여 변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교육을 받은 사람이 본 세포와 아이가 본 세포와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빛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또 그 관찰의 간격이 1초 이내로 제한하자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 또 뭐라고 할까봐 무서워요(웃음))

언어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용어를 파악하는데도 마찬기지입니다. 사전에는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그래서 종종 사전을 통해 용어를 규정지으려고 하지만 한 용어에 있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용어가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느냐를 직접 보여주는 일입니다. 실제로 정의 위주의 우리나라 사전은 그런 말뭉치, 말모둠(corpus)의 형태로 나아가고 있지요. 

언어의 사용은 다양하기 때문에 많은 예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줄이느냐의 문제가 남겠지만, 한 용어의 이해에 있어서 예시의 방법은 정의의 방법보다 우월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방법은 계속되는 정의를 나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런 좋은 사전을 허리춤에 끼고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 사용에서 계속되는 해석의 순간에 봉착합니다. 과연 이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느냐, 그 뜻은 무엇이냐를 두고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의 주어진 문장 사이의 맥락과 자신 나름의 정의를 더해 언어를 해석해 나갑니다. 물론 거기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요. 정의적으로 엄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특히 학술적인 이야기를 할 때 더욱 크기 마련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사실 자주 없습니다. 

딱히 학문적이거나 깊은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오해가 생긴다면 그것은 최초의 말하고자하는 것이 그 용어가 애초 잘못 사용되었거나, 말하고자 하는 깊이 즉, 층위에 맞지 않는 범주(예를 들어 제육이라고 엄밀하게 이야기해야하는 상황에서 고기라고 했다던가), 혹은 그 층위와는 관련이 없는데, 미리 하위 층위까지 미리 생각하여 언어의 비엄밀성을 지적하는 경우죠. 흔히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은 마지막의 상황에서 지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놀랄만한 통찰과 식견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곤 하는데요, 그것이 가능하고 또 이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저는 우선 entity(원형, 이건 이 말이 쉬우므로 이하 원형)와 schema(일반적 개념, 혹은 배경지식, 이것은 원용어가 부르기 쉬우므로 이하 스키마, 철저 틀리지 않았나 진심으로 걱정됩니다)의 개념을 이야기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참, 이런 논의전개 힘든데 말이죠.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개(dog)의 원형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개’하면 딱 떠오르는 ‘상(image)'을 이야기합니다. 학수가 ’개‘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바둑이‘라면, 수영이는 ’개‘하면 떠오르는 것이 ’메리‘일수 있습니다. 보통 원형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지요. 가지고 있는 경험과 기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의 일반적 개념(쓰기가 어려우므로 이하 스키마)은 내가 ’개‘라고 규정짓기 위해 떠올리는 것들입니다. 다리 네 개, 꼬리 하나, 요런 것들입니다. 포유류다, 뭐 이런 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개의 속성을 다른 대상의 속성과비교 후 공통적으로 뽑아낸 이미 이차적으로 가공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가공되지 않은 일반적인 속성에 대한 개념이 스키마라고 칩시다.

원형에 기대지 않은 채 스키마로만 판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가 지금부터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학수나 수영이는 ‘바둑이’나 ‘메리’라는 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가 세 개 뿐이거나, 병으로 털이 다 빠진 개가 나타나거나 어떤 스키마에 반기를 드는 특성을 가진 개가 나타났을 때에도 그것을 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원형이 배제의 속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즉 원형과 그것에서 파생된 스키마를 통해 사물을 판단하고 그것을 사유할 수 있는데, 원형과 다른 것들을 스키마와 다르다고 ‘개’라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학수가 ‘메리’를 보고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만약 학수가 개를 오로지 어디에서든 ‘바둑이’만 보았다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실체적인 부분의 유사성을 찾아서 ‘개’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딱 보면 그게 ‘개’인데, 그게 왜 개냐고 물어보면 도대체 명확히 할 말이 없습니다.

“잘 봐, 다리는 세 개지만 주둥이가 길고, 발톱이...”

거기에 대한 반론으로는 그 말과 다른 개 한 마리를 어디서 찾아오거나, 섬뜩하지만, 만들어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다른 은유적 비교를 할 수 있어 어떤 상황에서 ‘개’라고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라는 이것이 진정 존재하는지 도저히 증명해낼 수는 없지만, 저는, 혹은 우리는 개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아닌 분이 혹시 있을 수도 있어서 말이죠) 그것은 ‘개’라는 언어에 기반하지 않고 그 실체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문제에 대해 살펴봅시다.
  



(2) 원형과 스키마는 어떻게 획득되는가-우월성의 원형과 스키마는 획득가능한가?

   ① 우월성에 대해 달려가기까지의 여정-문학, 음악, 목적성
                               
                                        “우월성”

저를 이 나락으로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사실 몇 대쯤 쥐어박아주고 싶습니다. 쥐어박을 수 없는 것일텐데도 말이죠. 우월성의 원형을 이야기하자면, 우월성의 원형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자면, 우월성의 원형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개의 원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극히 적을겁니다. 저도 우월성의 원형이 있다고 확신하기 힘들었었거든요. 일단은 떠올리기 힘드니까요. 여기서 누군가는 요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월성’이 있지도 않거나 정의하기 매우 주관적이고 불완전한 개념인데 ‘우월성’의 원형을 논하자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런데 그것을 논하고자 하느냐”

그럼 저는 울상을 지으면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개는요?”

개에 대해서, 그것도 알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름이란 필요에 의해 붙인 어떤 약속 이상 이하의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 용어가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시면, 뭐, 더 이상 무엇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게임 오버죠. 사실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작업은, 끝난 것 같은 게임에 돈을 넣고 다시 시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차근차근 훨씬 공감할만한 층위(이를테면, 개)에서부터 좀 더 공감이 안 되는 층위(예를 들면, 우월성)로 그 논의를 넓히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일차적인 원형 획득에 대해

칸트가 썼던 말을 쓸게요. 물자체(그 사물이나 대상 자체). 칸트가 어떤 의미로 썼는지 ‘정확히’ 아느냐? 전 ‘정확히’는 모릅니다. 실체 자체를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를 씁니다.


㉠ 물자체---------------->인간의 감각------->인간의 해석-->인간

㉡ 물자체----->도구------->인간의 감각------->인간의 해석-->인간

   ⓐ 물자체와 인간 감각단계까지는 모두에게 동일한가? 
      즉, 감각으로 완벽히 객관적인 사실을 획득할 수 있는가?
      전혀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획득할 수 없다.
      간단한 예) 시력이나 청력의 차이.
   ⓑ 시력이 좋다는 것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사실은 아니다.
   ⓒ 도구를 사용해(이를테면, 현미경, 망원경) 어떤 것을 바라본 것이 시력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육안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가?
      눈에 현미경을 낀다고 가정해보면 된다. 더욱 가까워 졌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범위로 생각해서는 진실의 범위에서 어긋난다.

원형 획득은 최초 인간의 감각까지 닿았을 때의 상(image)을(그 전에 도구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인간의 해석을 통해 저장합니다. 그것이 원형이며, 혹은 원형의 가능성입니다. 원형의 가능성이라는 말을 굳이 하는 것은, 순간순간 인지되는 수많은 상들이 원형으로 바로(즉시) 자리 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가운데 도구에 닿은 순간에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해석의 대상이 됩니다.

‘개’를 위시한 개념적으로 좀 더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원형 획득에 방식, 그리고 스키마가 발현되는 방식에 대해 위에서 상당히 거칠게 설명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꽤나 만족스럽게 모든 생각을 다 보여드리지 못하였으나(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요) 일단은 그정도로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개보다 물리적 실체일 것도 없지마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금 덜 물리적 실체, 조금 더 개념적 실체인 것처럼 보이는 다음 것들의 예로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음악이나 문학 같은 것입니다.

음악이나 문학의 경우는 좀 더 추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감각에 있어서 덜 직접적인 감각(여러 논의의 경향으로는 청각보다는 시각이 더 직접적인 것처럼 보입니다)이 기반이 된 개념(음악)이기 때문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그 개념자체에 있어 여러 가지 다른 개념이 들어간 이차적인 개념(문학)인 때문이기도 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수많은 형태의 ‘글’들 중에서 어떤 이차적인 정의를 통해 다시 걸러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여타의 ‘글’의 발생과 독립적인 것인지, 혹은 파생적인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문학’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에 우리는 ‘글’에서 파생된 문학을 파악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음악과 문학을 파악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식으로 음악과 문학을 파악하는지 보겠습니다.(문학의 논의로 음악의 논의를 대신하고자 했던 얄팍함에 대한 일차 해명입니다. 2차 해명은 지금 편집 중에도 옆에 두고 있는 ‘은유적 사고’에 관한 글에서 마저 하겠습니다) 

음악이 존재하고, 음악이라는 정의가 존재하느냐, 음악의 정의가 존재하고 음악이 존재하느냐라는 문제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자의 입장입니다. 음악은 음악으로 인지되는 어떤 형태의 예술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음악이 어떤 것이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음악의 정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음악-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으로 내는 리듬이나 음이 있는 소리의 집합 중 하나

저는 이런 식으로 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면 이제 수많은 반론이 들어오겠지요. 아마 더 풍부해질 겁니다. 그것은 제 정의 자체의 부족함, 불완전함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원형과 그것에서 비롯된 스키마가 일정 부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바뀐다고 할지라도 음악들이 가지고 있는 그 실체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각적으로 ‘실재’하는 것만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정의와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그것에 대한 원형과 스키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념적인 용어의 원형 획득과 스키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의 ‘목적성’에 있어서 ‘목적성’의 예를 들겠습니다. ‘목적성’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은(동그랗다 등에 비해)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저장한 원형과 그리고 그것의 스키마에 비추어볼 때, 그 실체 속에서 바로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미 그 실체를 전제한 후, 그 실체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성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큰 문제를 가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 실체의 파악이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 전체의 방향성, 올바른 이동의 가정이 가능하겠는가?
㉡ 그 방향성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가?

1번 문제의 경우는 우리가 어떤 개념을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은 채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원형에 기반한 스키마의 공감, 합의(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겠습니다)를 표면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한 뒤에 다음 논의를 진행시킵니다. 나중에 좀 더 그 합의가 세분화될 필요가 있는 문제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무리없이 그런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기표’나 ‘기의’를 ‘글자’와 ‘뜻’처럼 합의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무리 없이, 특히 생활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좀 더 깊은 문제, 이를테면 학문적 필요, 에 있어서는 ‘기표’와 ‘기의’, ‘외연’과 ‘내포’ 등의 다른 합의로 이전됩니다. 그것은 실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화에 있어서 실체의 완전성에 더욱 다가가기 위한 탐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특정 합의를 위해 발췌하는 속성이 더 자세하거나 제한적이거나 혹은 다른 용어와 조금 비켜서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의 대화에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일어납니다. 

무한한 공간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세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무한성을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해도, 인지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공간에는 무한한 실체들이 널려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별적’음악작품, ‘개별적’문학작품이 있다고 칩시다. 아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곳엔가 널려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집합의 근처로 가서 우리의 틀을 가져다 댑니다. ‘개념적’음악작품과 ‘개념적’문학작품의 경계를 도저히 알 수는 없어서 문학과 음악, 그 경계에 딱 맞게 틀을 댈 수는 없지만, 적당한 크기로 틀을 가져다 댈 수는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틀을 가져다 댈 경우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 틀의 경계의 부분에 있어서 이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그 둘의 교집합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음악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합의하는 부분입니다. 그 교집합의 실체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분명 정확하게 할 수 없을테지만(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해내시오!!! 하고 강요하지만), 분명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교집합 내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견해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어떤 한 평면을 가정했을 때, 완전히 똑같은 위치에 두 사람이 점을 찍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가능할테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번 이야기에 완벽한 소통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교집합의 추상적인 넓이에 따라 안도하며 일정 수준 이상의 확신을 만들어갑니다.

문학과 음악도 경계가 ‘개’의 경우보다 불분명할 뿐 분명히 어떤 경계는 존재할 것입니다. 아니, 경계가 시시각각 바뀌겠지요. 그러나 경계가 어딘지 정녕 모호하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겁니다. 우리는 개념과 정의의 틀을 통해서 혹은 원형과 스키마의 적용으로 무한한 공간의 어떤 지점을 ‘음악’이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봅니다. 그 공간을 편의를 위해 평면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교집합의 면적이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합의를 할 수 있는 겁니다.(제가 누누이 말씀드리는 합의라는 것은 실체에 대한 공감이며, 자신의 원형을 기반한 스키마적인 응용의 가능성입니다)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은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실체에 기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개개인의 틀에 갇힌 음악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틀의 확장을 시도하고 또한 그의 분할로서의 ‘장르’를 떠올립니다. 예를 들어, 기악만을 계속 접하다가 타악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 처음부터 타악을 ‘음악’이라는 범주에 넣지는 않을테지만, 점점 음악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테지요.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아무리 접한다고 해서 그것은 음악의 범주로는 넣을 수 없을겁니다.(언젠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음악이라는 함의적 합의의 가능성에서 완전히 배제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타악이나 메탈 등 처음에는 어떤 이들에게는 음악 같지도 않았던 것들을 점점 자신의 틀로 확장시킴과 동시에 장르도 분할이 됩니다. 장르는 개개인의 음악의 틀 안에 있으면서 역시 불분명한 경계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좀 더 작은 범위이고 합의된 면적이 적기 때문에 오해의 가능성은 분명 있겠지만, 그것의 합의된 면적이 존재한다면 그것에서부터 다시 확장과 분할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경계의 구체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합의된 면적이 없다면, 그것은 개인만이 생각하는 장르고 그것은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장르에 대한 합의적인 면적이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정의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할테지만, 시작된 논의는 점점 그 경계에 알맞은 형태로, 좀 더 나은 형태로 다듬어질 겁니다. 왜냐면 장르 역시 수많은 곡 등으로 이루어진 개념적인 실체이니까요.

그러니 실체의 온전한 파악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은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는 불가능합니다. 실체의 경계의 모호성이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기도 하고 그 실체 내부에 있는 가능성 모두를-면적-을 가정하고 있으면서도 그것 전체를 사유-예를 들면 모든 지점에 점을 찍는-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체의 모습을 온전히 재구성할 수 없다고 하여 그 방향성을 정할 수 없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합의된 정의에 의하여 논의를 시작할 때, 논의가 가능한 것은 그 합의된 부분에 의해서이지만, 그 합의된 실체에 의해 어떤 방향성이 논의되면 합의된 틀 밖의 부분은 개개인의 사유공간에서 개개인의 틀이 옮겨진 부분까지 같이 이동합니다. 즉, 합의되고 이동된 부분에서 다시 확장의 가능성을 간직한 채로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방향성이 어떤 외부로만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 실체의 내부로 향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적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목적성의 방향은 경계 내부로 향합니다. 목적성 자체로는 어떻게 해도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목적성은 결과로서 나타난 어떤 현상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당위 ‘이러이러 해야 한다’입니다. 당위는 정의와 함께 ‘어떤 것을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올바른 형태’와 내재된 방향성의 가능성 대한 논의입니다. 즉, 당위는 그 실체와 정의에 있어서 원형과 스키마를 통해 구성한 어떤 ‘이상향’, 완벽한 형태에 대한 가정입니다. 당위는 ‘가치’를 포함합니다. 

가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그것이 실체의 완전한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더할 때 그 가정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플라톤은 그것의 인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데아’라는 개념적 세계로 던져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실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실체도 실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재구성해내지 못할 뿐입니다. 빈약한 감각기관과, 인간 사유 방식의 한계-이를테면 은유-때문이지요. 실체가 실재하든 그것이 이데아의 세계, 혹은 신의 세계에 속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당위를 통해서 문학이나 음악의 목적성에 대해 어떤 틀을 갖다 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라든가, 혹은 카타르시스(정화작용)같은 것입니다. 당연히 불충분할테니, 그것에서 논의는 시작될 겁니다.

우월성의 경우는 어떤 하나의 대상이나 실체가 아닌 두개 이상의 대상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목적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목적성은 당위를 포함하고 당위는 실현됨의 가능성으로 인해 ‘가치’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위의 가정에서 저는 당위가 한 실체의 완전한 경계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더할 때 온전히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가치는 당위의 모든 실현가능성의 합으로 구성됩니다. 물론 그 합을 수량적으로 구해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위에도 말했지만, 일정한 면적의 평면의 모든 지점에 점으로 모두 채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계를 정확히 재구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 가능성의 크기를 더 자세하게 구할 수는 있습니다. 마치 자연수와 정수의 집합 모두가 무한이지만, 자연수의 집합보다 정수의 집합이 더 크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가치가 실현할 수 있는 당위의 가능성의 합은 우월성을 따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제 입장에서 어떤 음악장르의 우월을 정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뒤따라야합니다.


㉠ 개별 장르는 음악의 하위개념이다
㉡ 개별 장르에 대해 합의된 부분이 존재한다
㉢ 음악의 목적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그러면 당위와 가치의 가능성의 논의는 ‘가능’해진       다. 그것은 완전히 올바로 구해지지 않을지라도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가치      는 우월성의 논의를 가능토록 해준다)
㉣ 개별 장르는 음악의 하위개념으로 그 목적성도 개별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 그러므로 개별 장르의 우월성 논의 역시 음악자체의 목적성을 통해 이야기해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논란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은 3번입니다. 음악의 실체는 비교적 장르의 실체보다 경계화-틀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것을 의미 합니다- 시킬 수 있으므로, 그것의 목적성 역시 장르의 그것보다는 쉬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음악의 목적성, 당위, 이상향이 없다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아니, 개념적으로 합의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적어도 ‘마음의 감동(어느 쪽으로 움직이든 간에)’정도로는 시작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작이 되었다면, 우월성의 논의로 달려가 봅니다.


  ② 주관적 우월성과 객관적 우월성에 대하여

우월성에 대해 그 획득방식과 그것이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해 좀 더 깊은 설명을 드립니다. 목적성이라는 것이 내재된 가치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 드렸는데, 우월성의 경우 두 대상 이상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 따라서 우월성이라는 것이 비의존적으로, 혹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은유의 방식을 통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개념이 개별적으로 존재함에도 ‘모자’ 혹은 그 어휘를 자주 쓰지 않는다는 비판이 들어온다면 ‘모자라고 부르는 관계’가 개념적으로 실재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에 어떤 원형과 스키마를 획득하여 철수엄마와 철수 사이에 최초 성립된 개념을 영희 엄마와 영희 사이에도 적용시킬 수 있게 됩니다. 

최초 어떤 것에서 어쩌면 그것의 맛의 실재적 측면에 기반한 ‘선호도’가 우월성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관계의 개념은 나중에 다른 것에도 연결됩니다. 실체에 기반한 선호도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은 객관적 우월성의 가능성과 연결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최초에는 개인적인 선호일뿐이라고 생각되겠지요. 선호도가 우월성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는 그 선호도가 실체에 기반하지 않는 경우-이를테면 미신-나 혹은 그 선호도가 합의되는 과정에서 경계에 머물러 논란이 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선호도 역시 실체적 존재를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객관적 우월성의 판단 가능성으로 작용합니다. 그것은 제가 받은 비판 중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해명이기도 합니다.


음악의 우월이, 나아가서 어떤 장르의 우월이 가능하다고 네가 그렇게 부르짖으니, 그래, 내 그렇다 칠게.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객관적’이겠니? 
다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 아니겠어?   
그것에 우월성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할 순 있어도,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건데, 그것은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그 판단은 다분히 실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합의는 실체의 존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경계,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것이 100% 주관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완전한 객관, 100%의 객관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노력을 통하여 더 높은 %의 객관을, 실체의 더 나은 재구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것을 100% 도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저는 비겁하다고 생각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생각 안 해봐서 모르겠다’가 아니라 ‘객관적’우월이란 없으니 그저 즐기자 하고 치워버리는 것이 변명이라는 겁니다!! 다 포기하고 자기 좋을 대로 살 순 있겠지만, 개인의 자유겠지만, ‘포기’가 ‘포기’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만은 죽어도 잘못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너는 모든 것이 판단의 가능성과 논의의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도대체 그렇다면 논의 불가능한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라는 문제가 당연히 뒤따릅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저는 앞선 단락에서 우월성의 논의에 있어서 우월성이 논의되지 못하는 경우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였습니다.

㉠ 우월성이라는 것이 실체에 기반하지 않을 때(실체 경계의 외부 요인을 통해 우월성을 논하려할 때), 혹은 그렇게 믿을 때
㉡ 그 논의가 틀 안이 아닌 경계에 놓여있을 때

그 두 상황에서는 합의되고 만족스러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전자의 경우는 전혀 논의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의 문제(신이 존재하느냐)라는 것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문제입니다.(저는 신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 이야기도 이곳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책-칸트 이후 첫 철학자의 등장입니다!-에는 요런 내용이 나오죠.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뉘앙스만 재구성 하겠습니다. 

“내가 단풍나무라고 말할 땐 언제나 자네가 의미하는 너도밤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네. 너도밤나무는 자네가 이야기하는 물푸레나무인줄 알았지.”

단풍나무와 너도밤나무가 같은 것을 지칭하는지 모르는 언어적 지칭의 문제 역시 논의를 가로 막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월성을 비교하려는 대상에 있어서 같은 표현인데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다면 논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표현의 합의를 통해서 다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여기서의 논의란 이야기의 진행으로 합의합시다)

후자의 경우는 진정한 의미의 ‘논의’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전자의 상황에 봉착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후자의 경우에 가까움을 깨닫고 확장과 합의의 방법을 통해 계속 접점으로 나아갑니다. 비슷한 개념적 틀이 합의되었을 경우 일차적인 갈등은 멈추고 내재적 속성-이른바 목적성 따위-를 논하게 되거나, 다른 경계의 합의에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