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양동훈 2009-10-07 01:17:55, 조회: 337, 추천:0
1. 예전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의 코너로 ‘나몰라패밀리’라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마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 코너에 나오는 특유의 랩과 노래, 그리고 정체불명의 요상한 율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 코너는 무척이나 촌철살인의 짧은 언어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센스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딱 한 가지의 장면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장면은 대략 다음과 같다.
코미디언 A, B, C가 나란히 서 있고, 반대편에는 덩치 큰 코미디언 D가 있다. A, B, C는 같은 편이고 이 셋은 힘을 합쳐서 D와의 대립구도를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 A와 D가 시비가 붙는데, A는 B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상황에서 B의 행동은 정말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D의 앞으로 바짝 다가간 뒤, 뒤로 돌아서서 A를 향해 파이팅자세를 취하며 딱 세 글자를 말한다. “2대 1.” 아주 순식간에, A를 배신하고 D의 편이 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 코너가 끝날 때까지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그 뒤로도 며칠간은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피식피식 웃다가 뒤통수를 쳐맞을 뻔 했다는 이야기까지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2. 아주 오래 전 옛날, 스타크래프트에서 Use map settings 방식을 통한 옵맵의 개설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 2:2를 하기 위해서는 Melee방을 개설한 후에 방에 들어가서 팀끼리 동맹을 맺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절의 Melee는 바로 전적에 기록되기 때문에 승패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어차피 나는 배틀넷 전적이 도합 100전도 되지 않고, 승률은 30%도 될까말까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었지만,).
My ally's town is under attack(젠장. 이렇게 쓰는 게 맞다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는 건 아마 지금이 새벽 다섯 시 사십분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의 머리가 돌대가리이기 때문일 거다.). 스타크래프트 팀플을 하다 보면 나의 귀를 상큼하게 적시는 무척이나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이다(Not enough mineral, Build more pylon. 정도를 제외한다면, 들을 수 있는 빈도도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 미니맵에는 우리 편의 본진에 빨간색 네모가 뜨고, 아마 공격받고 있는 우리 편은 채팅창에 ‘헬’ 따위의 단어를 도배하고 있을 거다. 이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모아둔 병력들을 우리 편 기지로 보내서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동안 모아둔 병력으로 상대편의 빈집을 털러 가는 것이고, 세 번째는 우리 편이 잘 버텨주기만을 기도하면서 테크트리를 타고 확장을 펼치면서 고급유닛을 모아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최선의 전략은 저 세 가지가 모두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낸 최선의 방법은, 채팅창을 통해 상대편과 작당을 한 뒤, 우리 편과의 동맹을 끊고 상대편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물론, 우리 편이 당할 정신적 쇼크가 걱정되며, 우리 편의 현피요청이 걱정되기 때문에, 최대한 우리 편을 돕는 듯한 액션정도는 취하면서 끝까지 ‘너와 나의 동맹은 아직 굳건해. 다만 내가 널 구해주기에는 역량이 부족할 뿐이야.’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겨 주는 것이 좋다. 만일 내가 적군과 작당하여 아군을 버렸다는 것을 안다면, 그 녀석은 Ctrl+Alt+Delete를 누른 뒤에 ‘우리 아빠가 피씨방 사장이야.’ ‘ㅂㅅ아. 난 집이거든’ 따위의 전혀 무의미한 소모전 따위를 벌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공격받고 있는 아군이 나의 옆자리에서 같이 게임을 하고 있는 친구라면, 귀싸대기를 쳐 맞고 싶지 않다면 위와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어쨌든.
3. 어떠한 사회의 ‘틀’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정한 대상이나 인물, 혹은 사건에게 준거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이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범인들이 꿈꾸어야 하는 이상향이라도 되는 양, 거의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권위를 부여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권위에 매달리기 위해 허우적대곤 한다. 세상에 말과 행동과 이상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말과 행동과 이상이 영원히 한 방향만을 향하는 사람도 없다. 늘어가는 나이와, 안주에의 욕구가 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갉아먹는 도구일 것이다. 아니, 갉아먹는 것에 대한 핑계거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강자는 권위의 상징이 되고, 약자는 비참함의 상징이 된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만 가는 것이 어찌 보면 현실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가장 쉽게 사는 방법은, 권위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강자에게 비굴해지고 약자에게 잔혹한 자가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인류사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흐름이었다. 이 흐름을 깨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스스로 권위를 가진 강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강자인 사람은 지극히 드물기에, 결국 우리는 강자에게 비굴해지는 방법을 통해 강자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범인凡人의 비극이라고 말하기에 지나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더욱 더 비극인 것은, 그 사회의 ‘권위’라는 것은 권위를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더욱 더 탄탄하게 하기 위한 조작된 권위라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권위’로 만들고 그것들을 증식시키면, 그것들을 갖지 못한 자들은 엔간해서는 ‘이미 갖고 있던 자’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조작된 권위에 끊임없이 매달려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4. 그러한 권위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책마을 안에서도 거침없이 일어난다. 책마을의 학자 원익씨와 속칭 ‘김예찬급 김예찬님’ 예찬씨, 동안의 센스쟁이 명교씨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은 누구인가? 그들 자신이 아닌 책마을의 많은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위는 권위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허구이기도 하다. 결국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원익씨는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로 ‘알랭 바디우’를 꼽는다. 예찬씨는 원익씨를 ‘바디우주의자’라 말하고, 원익씨는 명교씨를 ‘지젝주의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왜 남의 이름을 딴 ‘~~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아직까지는 배우는 단계에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 겸손하기 때문인가? 내가 여기서 ‘나는 양동훈주의자입니다.’ 라고 했다가는 비웃음을 살 것 같기 때문에,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는 것인가? 그들의 이름 앞에 침잠沈潛되어 버리면, 과연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치, ‘잘 되어봐야 제 2의 XXX' 이라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강제된 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들을 공부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라는 것은 분명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과연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세상의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다. 딱히 존경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첫 번째의 이유요, 누군가를 존경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두 번째의 이유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그 자체로 존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사람의 ‘권위’에 기대어 존경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존경은 위험하다. 존경은 때로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되, 그 무엇인가‘처럼’ 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5. 경제학에서는 ‘매몰 비용’이라는 개념이 있다(내가 이 개념을 인용하는 것조차도 경제학이라는 것의 권위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을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이미 쏟아부은 것은 이미 들어간 비용이니, 앞으로 추가적으로 투입해야 할 비용과 그것의 이익을 저울질했을 때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 그것이 매몰 비용이다. 조금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워서’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 지극히 명쾌한 정의이다. 내가 굳이 이 개념을 꺼내들고 온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하던,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하루하루 부모님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학창시절을 보냈고, 집에서 담배를 필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술을 먹더라도 되도록이면 밤은 새지 말아야 했다. ‘사회에서 부여해 준 권위’에 대해, ‘그런 것은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부모님이 과연 한 분이라도 계셨을까. 나는 없었으리라고 단언한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지극히 프리한 부모님이라고 하더라도, 은연중에 권위를 얻을 것을 바라지 않았던 부모님은 없으리라. 그리고 그러한 부모님의 틀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권위를 위한 투자를 꾸준히 해 오지 않았던가. 왜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도 치열했던가. 그것을 온전히 ‘사회가 제공한 억압적인 틀’ 때문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리는 세상이 다르고 미래가 다르기에, 그 ‘앞’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는, 치열하게 20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 치열함은 너무도 다양한 방향으로 발현된다. 사랑에 대한 담론이라던가, 사회와 삶에 대한 논의라던가, 나 자신에 대한 끈질긴 탐구라던가, 모두 좋다. 나쁜 것이 있겠는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가슴이 떨린다.
6. 다만, 비겁해지지는 말자. 준우씨는 스스로를 ‘비겁하다’라고 말했지만, 준우씨는 하나도 비겁하지 않다. 내 눈에 보이는 준우씨는 용자勇者일 수는 있어도 비겁자일 수는 없다.
권위에 침잠해버려도 좋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겁이 난다. 저녁 후에 펼쳐질 나의 삶이, 과연 권위에 침잠해버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하게 말하자. 자신이 없다.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할 나이와, 생길 가능성이 아마도 있을 것 같기는 한 처자식과, 어느 새 은퇴하시게 될 부모님까지. 나를 권위에 매달리게 만들어버릴 만한 가능성은 너무도 많고, 도처에 깔려 있다. 솔직해지자. 우리 모두가 사실 그렇지 아니한가.
다만, 비겁해지지는 말자. 최소한의 도의道義와 양심만은 안고 가자. 몰래 상대편과 동맹을 맺고 아군을 짓밟아버리는 비겁자가 되지는 말자.
그리고, 우리의 뜨거운 지금을 축복하자. 언젠가, 우리 모두가, 이 아름다웠던 삶의 단편을 추억하는 날을 기대하면서. 그 미래에, 우리의 이 뜨거운 지금이 가슴 저미는 아름다움으로 남기를. 혹은, 비록 그 미래에, 우리의 지금이 고작 치기로 기억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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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1:21:29
병장 정인환
권위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개개인이 '권위'에 의해 생기는 맹신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가 매번 훌륭한 논문을
생산하는건 아니지만 일반대중들은 그의 논문을 '모두' 훌륭한 논문으로
단정지어버릴 가능성이 많다는게 있겠지요.
뭐 일종의 편협한 사고정도요. 2009-10-07
02:17:43
병장 김홍엽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사람의 ‘권위’에 기대어 존경하는 것이다. '
그럴지도 몰라요. 실은, 마음은 이미 그렇다로 기울었지만.
뭐라도 쓰고 싶지만... 일단은 우리의 뜨거운 지금을 축복할께요.
가지로- 2009-10-07
08:21:07
병장 김태완
개성과 젊음, 열정, 솔직함이 아주 물씬 풍기는군요. 버려짐을 자처한 자유로운 영혼다워요. 2009-10-07
15:14:55
병장 류선웅
가지로- 2009-10-07
15:59:14
병장 김성환
동훈씨 글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4번부터 저와는
생각이 조금 다르신거 같아서 댓글을 달아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것은 그 사람의 권위 일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권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물론 그 존경
그 자체가 동훈씨가 말씀하신 부모님이란 권위일 수도 있겠죠.
아마 저희 부모님두분을 존경하는 건 저와 저희 누나가 다일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모님의 존경이 단지 나의 부모님이란 권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존경하므로써 부모님의 권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고 원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면 그 부모님은 과연 부모님으로써의 권위가 있는 사람일까요?
(극단적으로 원망이라는 예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권위 있어보이는 사람) 아무도 존경하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권위가 있는 사람입니까? 라고 묻고싶습니다.
존경을 받을 만한 받을 수 있는 받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권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10-07
16:08:10
병장 윤정기
존경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붙이지 않는 건, 저와 비슷하시군요.
대신 저는, 존경이라는 단어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것의 부여가 만들어내는 차별성, 그러니까 존경받지 못하는 대상과 존경받는 대상에 대한 차별성이, 한 객체에게서 '배타적'이며 '타의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포한 아우라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경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결국 어떤 권위에 우리가 기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저는 그저 존경함으로서 그것의 권위를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내포시켜 버리는 것을 증오합니다.(증오하긴 하지만 저 자신도 그 증오의 대상이 되는 짓거릴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권위자를 '따라가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권위자'인 척 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언어로서, 그 사실의 살포를 통해 '권위'를 얻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되겠네요.
어쨋든 책마을에서는 수많은 권위에 대한 논쟁(마치 예전의 '우월성 논쟁'을 연상시키는) 이 있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랭 바디우를 존경하고 배우는 것 자체, 혹은 그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머무르는 방식이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지식으로 변환시켜, 세계속에서 그 자신이 '권위자'의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조건으로 승화시키는 장면,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원익님이 말씀하신대로) 책마을의 '권위자들',(동훈님의 말에 따르면 원익-예찬-명교 라인으로 이어지는 삼총사분들) 또한, 그들 자신이 바디우가 되겠다거나 발리바르의 정치적 의견을, 그 권위를 곧이곧대로 따른다기 보다는,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언어'를 축출해내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바로 그 지점에 서서야 우리는 '뜨거운 우리의 엉덩이'를 축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낄낄. 2009-10-07
16:19:30
병장 이기범
잘 읽었습니다. 치열하고, 열정적이고, 뜨겁고, 정말 좋아요.
그러나 잘못된 방향은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서로 각자 자기의 '언어'만 고집하고 우기는 건. 양아치나 하는 짓이지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건 좋지만, 상대방의 주장에도 귀를 귀울여야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너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글쎄.. 과연 정말로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아니면 위선일까요. 왜 상대방의 반박에 대한 의견은 없고 '그건 그렇지만'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는 건지.. 과연 이런 사고방식에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까요.. 2009-10-07
16:32:54
병장 김태완
정기 / 특정 위인이나 권위자들을 따라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을 본받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받고 싶다면 전 오히려 그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만한 태도로 상대를 첫대면 하는 것보다 일단은 상대에 대해 존경심을 먼저 가지고 다가가는 것이 훨씬 자기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존경심을 가지고 접근했다가 그 사람이 영 자기 생각과 많이 다르다 싶으면 존경심을 버리면 되는거구요. 그 대신 그 사람에 대하여 인정하는 마음까지 버리지는 않아야겠습니다만.
그런데 '뜨거운 우리의 엉덩이'가 뭐죠? 제가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와는 정 반대의 위치에서 서있어버려서리.. 2009-10-07
16:45:05
병장 김성환
태완// 컴퓨터 앞에 앉아서 타자치고 있는 우리의 엉덩이를 뜻하는게 아닐까요?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는 뜨거워지죠...
이게 아닐수도 있지만요...쩝.. 2009-10-07
16:48:22
병장 김태완
기범 / 상대의 의견과 내 의견이 다르면 반박의견을 내며 최대한 설득하려하되 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존중해주는 범위 내에서 토의를 하는겁니다. 내 뜻이 이렇다고 상대에게 강제적으로 내 뜻을 따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고서 말이죠. 2009-10-07
16:50:30
병장 김태완
성환/ 아. 그러한 의미가 맞는 것 같아요. 풋. 친절한 해석 감사합니다. 2009-10-07
16:52:03
병장 이기범
태완/ 맞아요. 독단주의에 빠져서는 안되죠. 제가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퇴근시간이 임박해서 길게는 못쓰겠는데, 그 '설득'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주장에도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며, 그러한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를 생각해보며, 헛점이 있다면 그곳을 파고 들어가서 토의를 해야겠지요. '그럴수도 있지만' 내 주장이 더 맞는 생각이다-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경향이 전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2009-10-07
17:02:27
병장 윤정기
태완 / 존경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두는 비중에 대한 개인차가 각각 다르겠지만, 저의 입장에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태완님이 누군가를 존경한다면, 그것은 그 사실 자체로 저는 그와 동등한 위치의 '누군가들'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차별화'는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작업이 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존경을 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 존경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가 '얻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앞서 말했듯 우리가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표명했을때,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얻게되는 '권위'가 바로 그것입니다.(물론, 이것은 존경하는 이가 보편적 '권위자'일 경우에 한정되기는 합니다만) 이것은, 가령 우리가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볼 때와 유사한 장면인데, 저는 여기서 어떤 찝찝한 입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더욱 찝찝한 건, 개개인마다 이렇게나 다른 존경과 인정의 '기준'을, 이런 상황을 통해 우리가 보편적이며, 선험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버릴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뜨거운 우리의 엉덩이는 성환님이 말씀하신 의미에 가깝군요. 그냥 조크. 허허. 2009-10-07
17:09:16
병장 양동훈
기범// 저는 상당히 '그럴수도 있지만' 내 주장이 더 맞는 생각이다-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경향'을 띄는 글쓰기를 하는 편인데, 어느 곳에서나 그러한 경향의 글쓰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글쓰기를 하는 곳은 거의 절대적으로 책마을에 국한됩니다. 왜냐하면, 사유와 고찰을 통해 나온 어떠한 의견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존중받고 인정될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충분한 사유와 고찰을 통해 생각과 의견을 배출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어디서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껄껄.
정기// 아마도 '존경'이라는 언어에 대한 개별적인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정기씨가 '존경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두는 비중에 대한 개인차가 각각 다르겠지만' 이라는 한 줄로 깔끔하게 표현해 주셨군요. 기실 어떠한 경우의 어떠한 논쟁 혹은 논전에서도 이러한 어휘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차이가 그 상황을 난해하게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죠.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을 통해 권위를 얻어내려 한다- 라는 것은 분명 일리있는 말입니다. 다만, 제가 말하는 것은 '존경한다는 말' 보다는 '존경하는 그 자체'였다는 것이 차이점일까요. 정기씨의 재미있는 의견개진 감사합니다. 껄껄.
성환// 부모님에 대한 존경은, '부모님이 부모님이기 때문에 하는 존경'이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만 정의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이는 오히려 저의 입장에서는 존경이라기 보다는 '사랑-' 이라는 말로 정의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아니라면 부모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부모님이 행하시는 '어떠한 행동이나 사고'에 기반하는 것이 될 텐데, 이것은 '부모님을 닮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 될 겁니다. 이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존경이겠지요.
부모님에 대한 존경은, 논외로 두고 말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보여집니다. 사실 이 글을 작성할 때도 부모님 이야기를 쓰다가 지웠었는데, 부모님에 대한 존경이라 함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가까이 있었기에, 그리고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은 주셨기에'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 존경이기 때문이지요. '사회적' 권위자에 대한 존경과는 다른 방향으로 보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09-10-07
20:14:44
상병 박준우
기범//저는 그럴경우 보통 '너도 맞고 나도 맞다.' 라고 생각하는데, 뭐 여러가지 경우가 있을수 있겠죠. 경험의 차이에서 시작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너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의 경우는 타당하다고 생각하고요. 뭐 case by case겠죠.
//존경이란 단어는 좀 애매모호 한거 같기는 한데, 저는 존경은 권위를 포함하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존경보다는 존중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데,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은 저같은 경우에는 살아온 부모님의 인생을 존경하는 것이라서(아버지는 존경하고 어머니는 존중합니다.)... 결국 존경은 그런거 아닌가요? 경외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일단 권위든 뭐든 거리감을 인정하고 더이상 수평 개념이 아니라 상대방과 나 사이의 높이 차이를 인정하는거 아닌가요?
동훈//아, 저는 정말 비겁합니다. 그런 의미의 비겁함은 아니지만 어쨌든 비겁해요. 현실을 대하는 태도랄까 글을 쓰는 태도랄까... 2009-10-08
04:19:16
병장 김지호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가 봅니다. 하하. 동훈씨 글 잘 읽었어요. 그리고 준우님 자꾸 괴로워하지 마요. 동훈님이 또 그래서 당신은 변태라 놀릴지 몰라요 (웃음) 2009-10-08
05:39:43
병장 김태완
지호 / 변태요? 2009-10-08
07:40:14
병장 이 원
지호/
큭큭큭큭 거참, 껄껄
용기있는 자가 됩시다.
가지로 - 2009-10-08
13:25:28
병장 양동훈
준우// 비겁함과 페티시의 거리인가요. 2009-10-08
13:41:40
상병 진수유
동훈님 잘 읽었어요. 동훈님다운 글 그대로입니다. 2009-10-08
15:06:28
상병 박준우
동훈// 뭐 어떤 거리인건가요? 전혀 감이 안오는 거리인데요? 2009-10-08
18:42:24
상병 민해기
가지로 날라와서야 읽었네요(웃음)
이런 글때문에, 제가 항상 부끄러워지는군요
동훈님 글에서 풍기는 이런
분위기가 너무 부럽답니다..... 2009-10-14
21:32:44
병장 김홍엽
이 글을 다시 읽기 위해 찾았는데, 가지로 와있었네요.
다시 한 번, 글 잘 읽었습니다. 2009-10-19
21: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