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공지영에 반대하며 _황성규 
 병장 임정우 03-06 08:40 | HIT : 475 



 그러니까 이 책이 아직도 베스트셀러에 속하고 우리의 나영씨가 주인공이 되어 영화로도 나오고 나름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만, 읽은지 반년이 넘은 책에 대해 뭐라고 끄적거리려고 하는 건 순전히 내 소심함 탓이라는 걸 미리 밝혀둔다. 그래서 이젠 주인공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찝찝한 만큼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기에, 공지영씨에게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물론 공지영씨는 이 글에 관심 1g도 없다는 걸 나도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 두가지다. 사형폐지론자와 소설가 사이에서 끝내 제대로 된 자리를 잡지 못한 방황하게 된 작가와 사형제도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비겁하게 승부를 피해버린 것에 대한 비판이다.

 먼저 첫번째 얘기부터 시작해보겠다. 공지영은 작품내내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사형제도의 비정함을 알리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러한 변화를 유도시켜야 하긴해야하는데, 그녀의 소설에선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한채, 마치 이등병이 뽈록이 오버로크를 친것처럼 어색하게 드러나고 있다. 느닷없이 자신이 어느TV에서 봤던 수용자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은, 구어체만 바꾼다면 이게 소설인지 사설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런 장면이 꽤나 여러번 등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뭐 이게 새로운 소설의 장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아직까진 소설은 매끄럽고, 세련되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가령 백년의 고독에선 '내가 아니라 혁명이 자네를 죽이는걸세'라고 했던 부엔디아 대령의 말에 그의 친구는 '똥 같은 소린 집어 치우게'라고 받아친다. 구구절절, 이것저것 다 끌어다 부치는게 리얼리즘이 아니란 말이다. 마르케스 처럼 간결하지만, 명료하게, 그러면서도 치명적이게 현실을 내지르는 것이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공지영은 참으로 서툴렀다.


 이건 뭐 그렇다 치고 이제 정말 하고 싶은 얘기인 공지영의 비겁함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이들의 가장 주된 논리는, 바로 복수이다. 이건 책에서도 인용한 까뮈의 단두대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그렇다면 진정 사형폐지를 원하는 공지영은 이 복수와 당당하게 정면승부를 해야하는게 자명하다. 복수는 등가교환이 될 수 없고, 그것에 근접하지조차 못한다고 호소해야한다. 결코 누명가능성을 빌미로 싸움을 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누명가능성은 단지 사형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30년동안 복역했는데 이제서야 그것이 누명이라는 걸 알게된다면, 그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물론, 공지영은 용서라는 화두를 계속 꺼내고 있긴 하다. 자신의 딸을 죽인 살해범을 용서하고, 여주인공 역시 자신을 성폭행했던 삼촌을 용서하고, 자신을 냉대했던 어머니는 용서했다. 그게 과연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무턱대고 덮어두는 용서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용서의 미덕은 궁극적으로 남자주인공에게 향해야 한다. 하지만 소설의 중간정도만 읽어보아도, 남자가 누명을 썼다는걸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 누명을 쓴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건 '프리즌 브레이크'의 음모론자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동의하지 못한다. 남자는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른 사람이 됬어야 했다. 10대 소녀를 강간하고, 3명을 살인한 그런 정말 못된 놈이 됬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공지영은 비겁하게 그 남자를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죄를 다른 친구에게 전가해버렸다. 우리는 그 나쁜 친구를 잠깐 욕하게 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별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악역만 떠맡은 채 사라져 버린다. 이게 뭐냐. 이럴거면 앞에서 용서고 뭐고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왜 우리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느냐 하는 말이다. 공지영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비겁함을 자처했다.



 물론 '문학의 위기' 라는 말이 아직도 메아리치는 시점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서점으로 향하게 했다는 점과, 사형제도에 대해 한 번은 더 생각하게 해보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녀는 세련되지 못했고, 비겁했다. 문학의 위기에서 어느정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갖춘 소설을 공격하는건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도 있겠다만, '비판적 지지'의 전제는 당연히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날카롭지 못했다면 거기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내 할 말은 끝났다. 약간은 그 찝찝함이 가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병장 송영윤 
 짝짝짝... 

 책가지로 옮겨지고 나서야 읽게 되었는데 

 정말 후련하군요 

 저도 읽다가 뭔가 간지러운 느낌에 불편했는데 

 황성규 님께서 너무나도 시원하게 긁어주셨네요 

 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03-06   

 상병 박수영 
 저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별로였다는.. 잘 읽었습니다. 03-06   

 병장 임정민 
 간혹 책마을의 글을 볼때면 칼로 재단한듯한 날카로움에 조금은 빡빡한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너무 날카로운 비평에 대한 부담이랄까?...(무서워요..) 
 황성규님의 글이 그런듯 합니다. 제가 공지영씨 책은 읽어보지 않아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황성규님의 글을보니 생각나는 것이 조금 있어 적어 봅니다. 
 첫째는 사형제도에 관한 내용에 관한 것인데, 극속의 미적지근한 사형제도에 대한 내용은 현실속의 애매한 사형제도에 대한 사회상(반대하면서도 그 정당성을 확실히 내새우지 못하는)을 그저 저자가 끌어다 놓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더불어 저자 또한 그런 미지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죠.(그저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둘째는 용서에 관한것입니다. 일단 집고 넘어가고 싶은것은 용서의 주체에 관한 것입니다. 황성규님은 독자의 용서를 말씀하셨는데.. 극속의 살인범이 누명을 썼던 진짜 잔인한 살인범이던 우리가 그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서란 피해자 그러니까 극속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거 아닐까요? 독자가 용서 운운 할 부분은 아닌듯 합니다. 
 여튼 계속 하자면 극속 피해자는 가해자의 누명을 모르리라고 생각됩니다.(그러니까 용서가 성립됐겠죠.) 피해자에게 가해자는 진짜 살인마이며 고통의 주체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는 용서를 합니다. 공지영씨가 말하고 싶은것은 바로 이 "용서가" 아닐까 합니다. "가해자가 진짜 살인마이던 착함놈이던...용서를 하자." 이것이 이 소설의 목소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말인데 저자가 가해자를 누명 쓴 착한인물로 만든것은 독자에게 납득의 여지를 준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독자들도 한번 용서라는것을 이해해 봐 달라고, 또 가해자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것을 한번쯤 생각해 봐 달라고 말입니다... 
 음 괜히 쓴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책도 안읽어 봤는데... 잘 쓴글에 심술부리느라 토다는거 같아 미안합니다.. 제가 공지영 옹호론자도 아니고... 그냥 공지영 작가가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제 희망사항정도로 봐 주실 수 있겠죠? 03-08   

 상병 황성규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쓴 글을 되돌아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해요. 그 시간의 흐름만큼 내가 조금은 더 성장했기에 예전에 쓴 글의 잘못된 점들을 발견하게 되는거겠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고 많이 후회가 되죠. 제겐 이 글이 그래요. 날카로운 비판이라 함은 그 논리의 명확함과 타당성일터인데, 여기선 글의 내적인 결핍을 단지 시니컬한 문체로 메꾸려했던 것 같아요. 

 음, 어쨌든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약간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저는 저자가 사형제도의 내용에 대해서 미적지근하게 표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채 그저 사형제도의 부조리함만을 지적하려 하는, 소설도 아니고 논설문도 아닌 어정쩡한 표현형식에 대한 문제제기였다고 말하고 싶네요. 

 두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글을 쓴다는 것은 읽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함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혼자 이해하고 감동받기 위함이라면, 굳이 책으로 낼 필요가 없겠죠. 저는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끊임없이 사형제도의 비정함과 부조리함을 알리려고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어요. 이는 저자가 사형제도에 대해 최소한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봐달라는 의지를 내포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점에서 우리에게도 사형제도에 대해서 용서에 대해서, 저자에 생각에 동의를 하든 반박을 하든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봐요. 

 정민님이 얘기하신 착한놈이던, 나쁜놈이던 용서를 하자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용서란 것은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하는 행위일텐데, 누명을 쓴 무고한 사람에겐 용서를 할 필요가 없겠죠. 

 정민님의 지적덕분에, 소설에 대해서도 제가 쓴 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네요. 소설을 읽으신 후에 더 많은 얘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03-08 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