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한 조각 2007.5.13

All alone.
완전히 홀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낡아빠진 갈색 문의 손잡이는 이제 돌아가지도 않아 돌리는 대신 붙잡고 밀어버렸다.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손잡이는 다만 오랜기간 청소를 하지 않아 뿌옇게 먼지가 쌓인 문을 거부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위치하고 있다. 문을 닫고 들어와 방석이 놓인 푹신한 의자에 천천히 몸을 묻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내무실과 사무실 사이에는 30m 가량의 거리가 있을 뿐이지만, 나는 사무실 문을 닫음으로써 완전한 단절성을 획득한다.

 그 순간 나의 세계에서 그들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들이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혹은 수화기를 드는 순간에만 그들은 이 영역과 소통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는 나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외롭지 않다. 이 공간에서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한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소설을 쓴다. 가끔 이런 활동들이 지겨워질 때면 나가서 천천히 사령부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그래도 나는 외롭지 않다. 이 공간, 이 세계, 이 우주엔 오로지 나만이 존재하고 있다. 문득 올려다 본 봄날의 하늘은 다만 따스해보였다. 왠지 모를 정서적 충족감을 느끼며 나는 사무실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무실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나는 다시 손잡이를 밀어 젖히고 자물쇠에 열쇠를 밀어놓고 돌린다. 찰칵 소리를 내며 사무실이 잠기면 나는 어둑어둑해진 길가를 조심조심 걸어 내무실로 향한다. 내무실 뒤편에선 병사들이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해 덤벨을 들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병장도 있고 상병도 있고 일병도 있고 이등병도 있다. 나는 경례를 하지 않았고, 그들도 나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 이등병만이 움찔움찔 눈치를 본다. 주말이라 전투모는 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지나쳐 내무실로 들어갔다. 내 세계에 비로소 다시 ‘타인’이 생겨났다. 마치 ‘AT 필드 전개!’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침상에는 저마다 사람들이 눕거나 기대어 TV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친분 관계에 따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내 관물대 앞은 TV를 보기에 절호의 스팟 중 하나이다. 나보다 후임이 관물대 앞에 길게 누워 TV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비키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약간 화도 나지만 괜히 싫은 소리를 해봐야 내 기분만 상한다. 나는 활동화를 벗어놓고 옆에 올라와 앉았다. 누군가 이등병이 지나가며 활동화를 깊숙이 밀어넣는다. 
  
  아. 내가 넣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등병은 이미 지나쳐 다른 활동화와 슬리퍼를 정리하고 있다. 나는 어쩔 도리도 없이 앉아서 TV를 바라본다. 내 관물대에 누워있는 후임과의 거리는 약 1m 가량. 후임은 옆에 내가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는지 아 오셨습니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나는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난 TV 안보니까.

후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누웠다. 여전히 거리는 1m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에는 거리가 없다. 그러나 둘이 되면서 거리가 생겨난다. 나는 그가 아니고, 그는 내가 아니다. 따라서 서로는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 비율이 거리를 결정한다.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우면 물리적인 거리도 따라 가까워지고, 심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물리적인 거리도 따라 멀어진다. 나와 그의 거리는 1m이다. 나는 문득 오른쪽을 보았다. 누군가 후임이 또 앉아서 키득거리며 TV를 바라보고 있다. 거리는 언뜻 보아도 1m는 넘어 보인다. 그와 나의 마음 사이의 거리도 분명 1m는 넘으리라.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나는 관물대를 주섬주섬 뒤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혼자를 만들기 위한 도구를 찾는다. 귀마개, 어학기, 씨디 플레이어, 눈 가리개. 감각을 차단하기 위한 수 많은 도구들 중에서 씨디플레이어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어폰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옆을  바라보니 사람들은 TV에 푹 빠져 있어 공용으로 사용하는 헤드셋은 그저 덩그라니 주인 없이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져야 귀에 덮었다. 헤드셋에는 왼쪽의 쿠션이 없었다. 왼쪽 귀가 불편했지만 나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 나왔고,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잠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눈을 떴다. 뿌연 시야로 나를 깨운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분대장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헤드셋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모두가 공용하는 헤드셋인데 가져가서 쓰면 안되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죄송합니다 -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에게 흰색 이어폰을 건네주곤 헤드셋을 가지고 사라졌다. 그는 친절했고 동시에 불친절했다. 문득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일병이었고 내가 이등병이었을 무렵 함께 근무를 나갔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이건 비꼬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넌 무엇 때문에, 무얼 위해 사냐? 

불쾌하진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은 의도가 무엇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불가해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코 나쁜 것도 무엇도 아니다. 단순히 그와 나 사이에 심리적인 거리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1년 3개월이 지나 그는 분대장이, 나는 상병 1도가 되어선 지금에는 오히려 더욱 늘어난 거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씨디 플레이어를 집어 넣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바깥역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다. 

 나는 전화기 앞에 섰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콜렉트콜을 쓰지는 않는다. 혹시나 콜렉트콜 때문에 내가 건 전화가 뚝 하고 끊어져 버린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161로 접속해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K냐. 나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K는 지금은 카이스트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군대는 가지 않았다. 나는 K와 얼마간 통화를 나누다가 끊었다. 나는 군대이야기, 그는 랩이야기 서로 포인트가 맞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게 ‘외롭다’고 하소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와 그는 친구이며 라이벌이었고 서로가 대등한 입장에 서있지 않으면 성이 차질 않았다. 나는 전화기에서 물러났다. 다 쓰셨습니까? 후임이 와서 물었다. 나는 쓰라고 했다. 

  내무실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그 평범한 광경은 어쩐지 눈부시고 동시에 화가 치밀게 만든다. 나는 야근을 하기로 했다. 분대장에게 가서 야근 신고를 했다. 분대장은 TV에 시선을 둔 채로 어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묻질 않았다. 그는 친절하며 동시에 불친절했다. 당직사관에게 야근 신고를 했다. 역시 이유를 묻질 않았다. 

나는 행정반을 나가 달리듯 뛰어 내려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어 젖혔다. 나는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점차 세계에서 소멸해 사라져갔다. 나는 컴퓨터 전원을 넣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문득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분명 사라졌어야 할 외로움 한 조각이 가슴 한 구석에 덩그라니 남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