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훈씨에게.

1.
답변 감사합니다. 본론부터 들어가자면 저는 우선, 그 글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결국 우리의 갈등은 드러났고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유의미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원익씨가 쓴 아래의 글에 동의하지요. 그러나 어쨌든, 그래서 그렇게 악다구니물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덤벼든거였죠. 제가  ‘정치적인 것이 자생적으로 발화되는 양상 자체에 대해 대중의 공분을 유발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동훈씨의 글이 대중의 공분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악용되리란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왜 이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소위 '괴수'들에 대해 어떤 권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공분을 갖게 되는 일말의 태도들이 우리의 가능성을 보다 더 심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훈씨는 "왜 책마을 소사선거에 정치성이 유발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으셨지요. 다른 말로 되묻자면, "왜 정치성이 자생하는 것에 대해 공분을 유발하려하는가"라고 묻고 싶은겁니다. 만약 이런 식의 유유한 분위기(원익씨는 이를 차가운 머리 따뜻한 가슴이라고 표현하셨죠)가 통용되고 하나의 '선'을 형성한다면 우리는 아주 종종 한계 앞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말이죠. 그건 책마을의 가능성을 너무 간단하게 무마시키는 것 아닐까요? 제가 겁쟁이처럼 항상 돌아서고 또 돌아서면서도 정작 다른 이들이 정치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박수치며 응원하고 북돋으려고 나름의 얄팍한 노력을 기울여온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희생하리란 우스운 감정도 숨겨져 있지요. 저는 스스로를 무의식적으로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 '정치적인 장에서 시민권을 탈각한 인간'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점은 저의 증상적인 면모이죠. 저는 어느새 그걸 있는 그대로 운명으로서 받아들이면서 도리어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엄호 저격수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요. 스물다섯살 이후 이건 어딜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그것이 소사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는 소사 선거를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말하자면, 저는 누가되건 가히 달라지는 건 없다고 여길 정도로 씨니컬한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굳이 '소사 선거에서 드러난 정치성'에 대한 논쟁이어서 이렇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정치성'의 표출이 억압되는 순간이 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달려든 것입니다. 

2. 
깊이와 경험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그런 의도이셨던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 제가 그렇게 물불 안가리고 비판한 이유는, 우리의 논쟁이 '경험'의 차이라는 차원에서 단절되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못한 것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여기서 확실히 그것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습니다. 동훈씨가 제 글을 독해하기 어려운 딱 만큼, 저에게도 동훈씨의 글을 독해하는 것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삶에서의 경험의 문제라면 우리는 사실 아무 논쟁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어떤 개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말로 준혁씨의 니힐리즘을 떠올리게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니힐리스트가 아니지 않나요? 저에게 그건 말그대로 '절망'입니다. 더 이상 왜 살겠습니까? 저는 앎의 유희 자체를 즐길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곧 공부는 실천하기와 맞닿아있어야하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때에도 모든 것을 저의 정신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삶에서의 실천', 그리고 '변혁의 문제'에 연결시켜 사유해야만 그 읽기의 의의를 찾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다행히 아직은 허무주의자가 아니지요. 그런데 만약 우리의 논쟁이 얄궂고 얄팍한 저의 '경험'문제로 환급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린 논쟁을 중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지적 유희가 아무것도 해명해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진리 아니겠습니까.

3.
제가 "책마을에 존재하지 않는 보편성"이라고 말한 것의 저의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는 말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어쩌면 책마을의 보편성을 생각할 수도 있지요. 어떤 맥락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맥락'에서는 보편성 같은 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이미 동훈씨가 소사선거에서 드러난 정치성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온 다음부터 책마을의 보편성은 텅 빈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니, '비뚤어진 보편성'이라고 해두죠. 우리가 고개를 한껏 기울여 비뚤어지고 비스듬하게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그것의 보편성을 볼 수 있을겁니다. 마치 <괴물>이라는 영화를 본 이후에 결국 우리가 그 영화에 나오는 '괴물'의 실체를 비뚤어지게 보아야만 그 괴물의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괴물'은 미국의 음모 때문도 아니고, 미디어의 음해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비뚤어진 자화상-왜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서는 결국 제가 이렇게 그딴 보편성 같은건 개나 줘버려~ 라고 말하며,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다고 크게 외쳐야 동훈씨는 "왜"냐고 묻게 되지 않나요? 요컨대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그 '보편성'이란 놈을 정말 지나가던 개ㅅㄲ에게나 줘버리면 우리는 그 보편성을 무의식(어쩌면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심급에서 억압의 무기로 삼고있다가 내던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저의 말이 다소 니힐리즘적인 것으로 들릴 위험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고, 결코 나는 당신이 상정한 보편성에는 동의하지 않아!라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훨씬 자주 동훈씨의 생각들을 조용히 읽으며 동의해온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고싶은 얘기는, 왜 '그 보편성'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생성을 배제하는지 다시 묻고싶은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배경이 소사 선거판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 묻고 싶은 겁니다. 왜 '보편성'을 내세우고 부당대립하며 그것을 무기삼아 보편적이어야 했으며 보편성으로 향해가고자 했던 여러 욕망들 중 하나인 그들(원익,정환 등등)의 욕망을 '보편성'이라는 자화상에서 배제시키느냐구요. 그래서 결국 그것을 이렇게 논쟁의 장의 왜상 앞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느냐구요.

4. 
"제가 프랑스혁명이나 대학 선거를 끄집어내며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공간에도 이런 방식의 공분을 자아내는 자유주의적 반발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은거죠. 전자에선 그것이 성공했고, 후자에서도 이것은 아주 효과적으로 먹혀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점에 이데올로기적 전복의 실험들을 억압하진 않나요? 동훈씨는 프랑스혁명는 "사회구조나 권위주의적 객체에 대한 반발"이므로, 이것을 제가 예로 끌어온 것은 핀트가 어긋난 것이라고 하셨는데, 핀트는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자생적이고 의식적인 저항을 결국 누그러뜨린 이데올로기의 힘과 지금 여기에서 환급되는 어떤 '자유주의적 예의의 가치'가 맞닿아 있으니까요."

여기서 '자유주의적 반발'과 '자유주의적 예의의 가치'는 정반대의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비문을 쓴건 아닌데, 글을 유려하게 잘 쓰지 못해 모호하게 읽힐 수도 있겠네요. 자유주의적 반발이란, 쁘띠-부르주아, 부르주아들이, 가히 폭력적이고 추잡하기 그지 없는 저 체제에 반항하는 자들의 행동이 헤게모니의 우위를 점하고 있을때, 잠자코있다가 필살기로 다시 발동시키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힘일 겁니다. 요컨대 우리는 작년에만 해도 결국 이렇게 말하며 모든 전복적 행동들을 잠재우려는 미디어의 시도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 좋은데, 너무 과격한 것 아니냐?" 또는, "좋게 좋게 말할 수 있는데 왜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덤벼드냐" 이런거 말입니다. 또는, "저기 저 순수한 대다수 시민들의 뒤에 음모를 꾸미고 있는 배후세력이 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알고있는 소위 '시민운동세력'입니다. 제가 너무 볼짱 다보겠다는 식으로 말하나요? 아니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저 자유주의자들은 평소에는 멋드러지고 예의있게 캠페인을 벌이다가 대규모 행동이 벌어지면 그 '총체' 안에 명함을 들이대지요. 그러면 저 아무런 대중*동의 노력없이 명함만 내민 저들의 시민권이 이 안에서는 무시못할만큼 거대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적,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힘이지요. 아마 저들은 열심히 빈민구제 캠페인을 하다가도 빈민들이 볼짱 다보자는 식으로 '추잡하게' 부르주아들에게 덤벼들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자"고 점잖게 제안할 겁니다. 저는 진정한 적이 바로 그들이라고 지적하고 싶은겁니다. 겁많은 제가 결국 이렇게 속내를 얘기하게 되는군요.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이 공화국의 평화로운 시절이 아닌 험난한 저항의 시절엔 쥐죽은 듯이 있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엔 저렇게 다시 본색을 드러내고 나타날 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2003년 가을 *사 정국에도, 2004년 한-*레 F*A 때도,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 그들의 실체를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그때 막수가 말한 쁘띠들의 본질에 대해서도 비로소 알게되었죠. 

5.
그런데 그렇다고 동훈씨가 저항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내 안의 거머리'를 제거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고 말한 것의 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제 안에도 역시 바로 그런 자유주의적 예의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동훈씨에게 그런 것처럼 말이죠. 예전에 한창 원익씨 등이 저에게 '자유주의자이십니다'말한 것은 어쩌면 저의 은밀한 내면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저는 있는 그대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말았죠. 우리는 언제고 결국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절자들의 편에 서있을지 모르는일이죠. 저는 부디 제 인생이 그런 비극만은 막아내길 염원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동훈씨와 제가 벌이는 이 논쟁은 결국 저항주체가 되고 싶은 제 안의 어떤 주체가 자유주의적인 쁘띠성에 머물러있는 거머리같은 제 안의 다른 주체에게 하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은 호명 자체로 드러내려는 하나의 class strugle이기도 하며, 제 안에서 갈등하는 쟁점을 스스로 드러내고 싶은 저의 악에 찬 시도입니다. 자기 내면을 올곧이 내던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박함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이건 정말 절박한 문제이죠. 이렇게 절박해도 결국 운명대로, 예속된 주체가 되어버려 흘러가는게 삶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삶을 바꾸고 싶습니다. 간극을 긍정하는 자가 결국 그저 그런 기성세대와 같은 염세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건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을때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386들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치열했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무수히 많이 좌절하여 결국 푸석푸석한 운명의 수레바퀴로 돌아가야 했습니까. 제가 유물론자이고싶은 한, 저는 운명을 전복하려는 저의 도전이 성공할 가능성을 1퍼센트라도 믿어야만 합니다.

6.
당파성과 소사의 역할이 대립되고 아니고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 일말의 대중*동이 살아있는 한, 소사가 되려는 자가 정치성을 통해 자질을 평가받으려 하건, 아니면 동훈씨가 바라는 것처럼 온전히 헌신적이고 인간애적인 자질로 평가받으려 하건, 그는 어떤 당파성을 지닐 겁니다. 그런 점에서 동훈씨는 부질없이 결국 비뚤어지게 될 보편성을 끈덕지게 물고늘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익씨가 소사 선거에 후보로 나오지 않았어도 결국 그 대신 누군가가 있었을 겁니다. 저는 사실 원익씨가 후보로 있어서 놀랐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그가 글쓰기로써 시도하는 운동을 넘어서 다른 것에 도전하려는 시도 자체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결국 원익씨라는 사람도 책마을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저는 삶의 가능성을 얻어내지요. "나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예요. 그래서 '자생적으로'(그것은 확실히 원익씨가 책마을에서 쟁취해낸 변화이자 제 나름의 자생성이지요.) 정치성을 드러내는 것에 증상적으로 반발하는 것에 대해 찰떡같이 달라붙어 논쟁을 건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계산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는 어떤 자조가 담겨져있습니다. 저는 이런 저 자신에게 조소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4년간의 대학시절의 치열함과 외도한 아버지의 폭력성과의 치열한 투쟁(정말 그것은 치열한 투쟁입니다.)을 벌이고난 이후에 얻은 것 겨우 '방출'입니다. 저는 학생*동의 공간에서도, 아버지로부터도 방출당했고, 이것을 벅차게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항상 무엇으로 나서지만 속에서는 벌벌 떠는 인간입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저는 계산적이고 치밀하게 전략적인 것에 집착하죠. 제가 이런 자조를 쏟아내며 표출한 건 결국 저의 논쟁이 저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음을 스리슬쩍 밝힌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소사 선거로 인해 어떤 라인이 형성되건 저는 크게 상관하지 않을겁니다. 누가 되느냐는 원래부터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이미 이 소사 선거에 따른 논쟁이 무엇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소사 선거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동훈씨와 저입니다. 하하. 누가 되는게 뭐가 중요합니까? 결국 어떤 일관된 라인이 형성되어도 우리는 결국 그들이 일관된 라인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될겁니다. 제 말이 틀릴지 두고보십시오. 그리고 무수한 논쟁들과 글들이 자신의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그곳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도전해야할 우리 안의 거머리들과 계속 싸워야하지요. 그런 점에서 동훈씨가 "안된다고하면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되는 이유’를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것이 동훈씨가 순수해서도, 가식적으로 예의를 차려서도, 그것이 동훈씨가 말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어서도 아니라, 동훈씨가 아직 진정한 내면의 '적'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울 앞에 비스듬히 서서 그 안의 비뚤어진 양동훈이를 바라보십시오. 그 자식이 동훈씨를 비웃으며 노려보고 있을겁니다. "풋,..." 이렇게 조소하면서. 그러면 동훈씨는, "내가 네가 누군지 모를줄 알고!"라며 째려보세요. 거울마저 깨뜨릴 심정으로. 

20.19.3.5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2-07
17:03:15 



병장 양동훈 
18.1.17.63   이 글에, '답변을 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밀려오는 중입니다. 일단, 묵혀두고 있겠습니다. 이 '묵히는 일'이 며칠이 걸릴 지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말이지요. 2009-11-05
22:23:07




병장 홍명교 
20.19.3.55   넵. 엉엉 울고싶은 주말이에요. 2009-11-07
09: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