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성과 세계Ⅱ : 철학의 문제들 
병장 이승일 02-17 04:34 | HIT : 109 
 

 

완전성, 철학의 문제들, 그리고 철학의 가치

  앞글「완전성과 세계」의 주제였던 <완전성>과 관련해서 좀 더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철학의 문제들>이라는 주제와 연관지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이따금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철학책을 몇 권 뒤적여보는 사람들과 마주치곤 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어떤 해답을 찾았다는 느낌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만 접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갖고서, 말도 안 되는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벗어나 단단한 지표면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저는 이들의 느낌이 굉장히 정당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철학은 해답을 제시해주는 학문이라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학문에 가까울 테니까요. “철학의 가치“ 따위를 논하는 글에 제가 시니컬한 리플을 자주 단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해답을 찾고자하는 이에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만 선물해준다면, 대체 그것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궁리해보기 전에 <철학의 문제들>과 <완전성>이라는 개념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논해보겠습니다.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모든 일관적인 체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관적 체계안에는, 그 체계의 규칙들만으로는 참, 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이 바로 이런 결정불가능한 명제들을 의문문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언어 체계 - 이 안에는 온갖 학문의 지식, 경험 등이 포함되어있을 것입니다. - 안에는 수많은 규칙들과 공리들, 용어들이 존재합니다. 이것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면, 우리 언어체계에서 허용할 수 있는 ‘적형식’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 자체도 인간 언어체계의 적형식의 한 예이겠지요. 그런데 인간의 언어체계는 당연하게도 모순을 용납하지 않으며, 따라서 일관성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불완전성을 감내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 안에는, 적형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수많은 명제들이 존재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명제들 중 일부를 의문문으로 바꾼 것이 우리가 ‘철학적 문제들‘이라고 부르는 다음과 같은 의문의 본성이 아닐까 합니다.

  *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 이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 이 세계는 누가 만들었는가? 
  * 나는 누구인가? 
    등 등. 

이 질문들에 쓰인 단어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 ‘의미’, ‘세계’ ,‘존재하다’, ‘정신’, ‘물질’, ‘살다’, ‘나’, ‘만들다’, ‘어떻게’ 등등.
우리는 이 단어들이 아무 문제없이 쓰일 수 있는 문맥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 내 [인생]은 참 고달프다.
  *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구나
  * 저기 나무 한그루가 [존재한다].
  * [정신]력이 떨어져서 경기에 지고 말았다. 
  * 이것은 무슨 [물질]로 만들었지?
  * 나는 서울에 [살고 있어].
  * 이 성당은 누가 [만들었을까]?
    등 등. 

이런 식의 조합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언어체계는 이러한 문장들의 의미와 해답을 결정해줄 방법과 정보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문제들’ 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들은, 마치 수학에서 ‘연속체 가설‘ 문제가 결코 증명도 반증도 될 수 없듯이, 우리의 언어체계 내에서는 그 해답을 구할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업은, 마치 패치를 통해 프로그램상의 버그를 제거하듯이, 이런 질문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끔 언어를 정리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임의의 해답을 하나의 공리처럼 기존의 언어체계에 추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앞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저 하나의 해답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공리로 받아드린다거나, ’이 세계는 창조자가 없다‘는 주장을 공리로 여긴다거나 등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질문들은 기존의 언어체계를 명료하게 하고 정리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질문들은 새로운 공리를 기존의 언어체계에 추가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정리, 확장된 언어체계는 (그것이 일관적인 한) 또 다른 문제들을 양산해 낼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작업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문제를 ‘저기로’ 옮기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대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끊임없이 풍부해지고, 점점 단정하게 정리되어나갈 것입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점을 여담으로 말하고 싶군요. ‘일관적인 체계는 불완전하다’ 라는 말을 한번 더 상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완전한 체계는 비일관적이다’ 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체계(완전한 체계)는 모순을 허용(비일관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선불교나 도인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 것처럼 스스로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모순을 받아드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꼭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종종 모순을 받아드림으로써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의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힘들겠지요. 언어는 모순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대화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니까요.) 

‘여기에 있는 문제를 저기로 옮기는 행위’ - 이것은 어쨌거나 일반적으로 ‘문제의 해결’ 이라고 간주되는 상황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문제들은 아무리 생각해봐야 답이 안나온다.‘, ’철학에는 결말이 없다.‘ 라는 의견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철학은 흔히 쓸모없는 학문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진정한 해답을 원하는 사람에게, ’여기서 저기로 문제를 옮기는‘ 방식의 접근은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지요. 

저 역시 철학에는 어떤 결말이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그렇게 절망스러운 사실입니까?  대체 어떤 분야에 결말이 있을까요? 모든 학문분야,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항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마주치고, 그것을 해소함과 동시에 또 다른 문제들과 대면하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학문분과들이 얻어낸 것은 해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정교하고 복잡해진 다량의 문제들입니다. 인류의 생산성이 증대되었다는 경제학적 명제는, 그 생산의 대상이 '문제들'인 경우에도 적용될 수 것입니다. 다른 모든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다른 모든 분야에서처럼 이러한 활동은 흔히 더 복잡하고 더 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말로는 행복, 성공, 안정, 사랑 등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의 현실은 대부분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 현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무시 받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낮은 학점을 메우기 위해, 그리고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 등 등.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이 마치 궁극적인 목표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불쾌한 장애물인 듯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들만 해결하고 나면 그 다음엔 편안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추구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쩌면 이러한 문제 풀이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퀴즈, 퍼즐을 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요. Quiz 와 Puzzle 이라는 영어 단어는 시험문제나 미해결 문제처럼 대면하기 싫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낱말 추리나 조각 맞추기와 같이 흥미로운 놀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문제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역시 우리가 항상 고난과 대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마르지 않는 놀이의 샘이 우리에게 주어져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만의 문제를, 고난을, 그리고 놀이를 마주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는 아마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문제를 공유하면서 고난의 고통과 놀이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추가적인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저는 소위 ‘철학의 문제들’이 언어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으로부터 태어난 버그의 일종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완전성은 비단 철학 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과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담당하고 있는 언어 역시 처해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학문들과 구별되는 철학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 대답해야 될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 오직 철학 속에서 우리는 문제들이 세상의 부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엇보다도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것임을 확인합니다. 오직 철학 속에서 우리는 문제가 영원한 것임을, 그러나 동시에 어떠한 구체적인 문제도 영원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 문제 없는 삶이 없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우리는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철학의 가치는 단지 이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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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심승보 
54.12.7.21   승일씨,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밤이 늦고, 눈꺼풀이 제 정신을 덮어) 보다 진지한 논의는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한 가지 눈에 띄게 흥미로운 대목 하나만 언급하겠습니다. 

"Quiz 와 Puzzle 이라는 영어 단어는 시험문제나 미해결 문제처럼 대면하기 싫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낱말 추리나 조각 맞추기와 같이 흥미로운 놀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전 이 대목을 딱 보자 마자, 자크 데리다의 '파르마콘'이란 용어가 떠오르더군요.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일등공신으로 등장하는, '약이면서 곧 독'인, 그 둘의 모순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 이중긍정어로서의 파르마콘(pharmakon)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주요개념 '산종'(dissemination)의 간판스타라 할 수 있을텐데, 요 대목에선 심지어 그 어투까지 데리다와 아주 유사하군요. 사실 그 형태적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분명 그 맥락도 다르고, 별 의미없는 비교일 수도 있을 테지만, 평소 데리다의 말장난을 선호하지 않는 승일씨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다소 이채롭네요. 그냥 글을 읽다가 재밌어서 좀 적어봤습니다. 

음, 기왕 이렇게 된거, 조만간 데리다가 이 문제를 나름껏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 조그만한 글을 통해 소개해 봐야 겠네요. (웃음) 02-17 * 
 
병장 이승일 
54.2.9.70   승보 / 뭐 양면가치적인 언어사용이야 굳이 데리다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일상에서도 충분히 흔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02-17 * 
 
상병 고도현 
22.4.1.11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역시 끊임없이 사색하려고 하며, 그 사색의 재료를 모으기 위해 독서하는 한 인간으로서 승일님글에서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칫 공허하게 여길 수 있는 "이 세계는 실재로 존재하는가"같은 철학의 문제들을 유의미한 질문으로 제기하기위해 노력하신 흔적이 묻어나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저는 철학의 문제들은 인간의 선험적 관념론에 입각한 오성에 의해 결국 정답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모든 일들뿐만아니라 시간, 공간, 존재하는 것과 그 존재를 이루는 근원 등은 모두 인과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밀한 보편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 엄밀한 보편성이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으며, 오로지 순수한 오성의 힘에 의해서만 파악 될 수 있구요.. 충족이유율의 네가지 근거처럼 말이죠. 예를 들자면 시간이라는 개념은 변화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변화란 물질을 통해서 표상적으로 나타나며 그 물질이 있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공간은 물질과 물질의 관계를 의미하게 됩니다. 물질은 공간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으며, 물질 자체는 생성과 종말에 의한 변화를 가지므로 그 물질이 존재하려면 시간역시 필연적으로 있어야합니다. 

경험을 배재한 선험적 관념론은 타인이 바라볼 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독단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존의 경험에 의한 개인적 감정으로 외부세계를 보기 때문이며, (승일님 표현을 빌려)불완전성에서 태어난 결과물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진정한 사상가에 의해 진리는 드러날 것이며, 언어와 사고의 발전에 힘입어 명제를 명료하고 뚜렷하게 정의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02-17 * 
 
병장 이승일 
54.2.9.70   도현 / 진지하고도 사려깊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개별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항상 그래왔다고 믿고 있구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언젠가 종료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칸트와 같은 철학자가 시간과 공간의 본성에 대해 정말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는 속도가 빨라지면 시간이 연장되고 공간이 줄어든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의 명제를 이미 주장할 수 있었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도 알아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속이 불변이라는 사실을 경험에의해 알아내기 이전 그 어떤 누구도 상대성이론을 오성에 의해 연역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천재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물론 모든 관념이 경험에 의해 수정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과율이 그 예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인과율은 경험에 의해서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양자역학도 인과율에 대한 긍정과 부정 중 어느 한쪽을 명료하게 가려내주지는 못합니다. 인과율은 아마도 경험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경험적 지식을 정리하는 방식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인과율이야 말로 인간 언어체계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언어(및 지식) 체계는 인과율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해주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는 그 둘 중 한쪽을 강제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다른 명제들의 참 거짓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과율을 긍정함으로써 양자역학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을 참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요.) 

분명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발전할 것이고, 여러 명제들은 더욱 더 명료하고 뚜렷해지겠지만, 아마도 그 만큼의 불명료한 명제가 새롭게 탄생할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운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이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궁극적인 앎이 이와 같은 과정 그 자체라고 보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이러한 운명이 인간 이성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성은 결코 유한한 과정 속에서 종료될 수 없으며, 바로 이점이 이성을 진정 초월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02-18 * 
 
일병 구본성 
5.12.1.72   말로만 듣던 괴델의 정리가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오늘에서야 대강이나마 알게 되었고, 읽는 중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꼭 '철학'이 그로인한 영광을 차지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고, 글에서 수학적 명제-->언어--> 삶 전반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좀 더 해설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학이 현대물리학과 갖는 관계가 기막히다고 해서 그 관계가 해명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적 문제라고 제시된 것들에 대한 철학적 답의 '무능함'과 일반과학의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 과정 자체가 드러내는 '유능함'이 동일시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02-18 * 
 
병장 이승일 
54.2.9.70   본성 / 우선 마지막 부분에 대한 대답부터 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사실 현대 철학은 본성씨가 말씀하신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 과정 자체가 드러내는 유능함' 을 상당히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말도안되게 추상적인 질문은, "양화사에 의해 속박 가능한 개체변항과 개체상항" 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대답되어지며, 이러한 속박이 이루어지는 조건 역시 논리적으로 정교화됩니다. (여기서 '양화사'나 '속박'은 전문용어이므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교화를 바탕으로, "수란 존재하는가?" 와 같이 겉으로 보기엔 한 없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질문도,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다루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은 본성씨가 말한 과학의 "유능함" 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아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은 상대적으로 근래-라고 해봐야 약 최근 100년이나 되었지만 - 에 얻어진 성과이며, 매우 전문적이어서 일반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우리를 또 다른 질문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것" 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묘사한 표현이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과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리학은, 그것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인 힘과 질량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해 정교한 설명을 축적해왔습니다. 뉴턴은 그것을 무정의 용어로 받아드렸지만, 그 이후의 물리학은 힘과 질량을 보다 기초적인 개념들로 분해하는데에 성공했습니다. 예를들어 힘은 각 매개입자들의 교환으로, 질량은 힉스장과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유능함'의 한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통해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 매개입자의 교환이 무엇인지, 상호작용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이 왜 우리가 힘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일으켜야만하는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어쩌면 '힘과 질량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과학의 생산성에 철학의 그것을 견주는 것은 과장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 메커니즘이나 과정의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이 물리적 세계를 관찰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최대한 정확하고 일관되게 수학적 모델로 표현하는 학문이라면, 철학은 개념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의 특성을 최대한 정확히, 그리고 일관적으로 표현할 논리적 체계를 구축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현대철학은 자연과학과 그 탐구의 대상이 다를 뿐, 탐구를 수행하는 작업의 방식에 있어서는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적한 것은 이러한 작업들이 (과학의 것이건 철학의 것이건)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거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학적 명제-->언어--> 삶 전반으로진행되는 과정'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러한 과정을 처음 부분 -수학적 명제 -->언어 - 과 두번째 부분 - 언어-->삶 전반- 으로 나누어 생각해야할 것 같습니다. 수학적 명제들로부터 인간의 전반적인 언어와 지식의 체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둘 모두 일관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체계라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언어와 지식의 총체가 실제로 일관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그 언어와 지식체계로부터 발생한 어떤 물음에 답하고자 할 때에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오직 일관적인 명제들의 집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학의 체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지식의 체계는 불완전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언어에서 삶으로 진행한 부분은, 일종의 감정적 동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며, 논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은유였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은 글의 puzzle 과 quiz 를 비롯한 글의 내용상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그렇게 (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성공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점에 관해 제가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은 현재로서는 별로 많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일종의 옹호하는 입장'을 취해본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때문에 매우 낯선 것 같습니다.) 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