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 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차지한
우리 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은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우리 집은 명문가의 뼈대 있는 가문도 아닌 주제에 군기만 빡셌다.
여자가 술 마시면 안 된다 통금시간 준수해라 조신하게 굴어라 이런 군기가 아니라 늘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넌 자존심도 없냐?’
‘넌 인간이 그것밖에 안돼?’
‘왜 그렇게 생각이 짧아’
내가 공격적이고 호전적이 인간이 된 건 이런 절대적 이유가 뒤 배경으로 깔려있으니 좀 더 푸근하게 자라 두루뭉술하게 세상 편하게 살지 못한 회한 같은 게 물론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맏이로 태어나 동생은 거느려 보았어도 위는 없어서 언니나 오빠라는 호칭을 불러보지 못했다. 뭐 사촌들이야 있었겠지만 언니 오빠 하며 살갑게 부를 처지도 아니어서 거의 그런 호칭을 써보지 못하고 유년기를 보낸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언니란 호칭은 살면서 부를 일이 생겨서 어색하나마 가끔씩은 불러보는 말이지만 오빠란 호칭은 영 부를 일도 없고 어색해서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가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옆집에 살던 나보다 서너 학년 위였던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이 동생이 나의 친구여서 대문밖에 소꿉장난을 하고 놀다 친구가 오빠! 오빠! 하는 바람에 덩달아 오빠라 불렀더니 마침 장을 보러 돌아오시던 어머니가 힐끔 쳐다보시더니 
‘걔가 왜 네 오빠냐. 엄마가 같아? 아빠가 같아?’ 하시며 대문으로 쑤욱 들어가 버리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어린 마음에도 짧지만 강렬했고 나의 뇌리에 정확하고 단단하게 박혀버린 고정관념은 오빠란 적어도 친가든 외가든 피가 섞인 내 위 남자형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오빠란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는 오빠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오빠가 있던 친구들의 경우를 보면 오빠는 아버지 다음가는 집안의 수호자고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이며 유산의 상속자와 동시에 부모님의 노후 보장성 보험 이었다.
뭐 여기서 오빠는 장자에 대한 설명이고 둘째오빠 셋째오빠 쯤 가면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그러나 보통 장자인 첫째가 그 역할을 다 못할 경우는 둘째로 승계가 되고 그마저 어려울 때는 그 중간에 끼어있는 큰 언니나 둘째 언니는 건너뛰고 마지막 남은 막내까지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딸의 개념은 살림밑천으로 집안 살림의 조력자이며 수입원의 일부이고 출가를 하게 되면 노동력이 이동되는 소모적인 존재로 족보에도 오르지 못하는 존재였다.
집안의 오빠는 아버지를 도와 생계를 유지하고 다른 환경으로부터 집안 식구를 보호해야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인데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엄마란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모성을 느끼게 된다고 믿듯이 세상의 남자들은 오빠란 말을 듣게 되면 여동생을 보호해야한다는 본능적인 사명감을 갖게 된다는 전제하에서 얼핏 문정희 시인의 오빠란 시가 성립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오빠가 세상 남자들이 듣고 싶어 하리라 생각되는 과히 좋은 말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오빠라 불리고 싶은 욕구에 다름 아닌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 ‘남남 끼리에서 나이어린 여자가 손위 남자를 정답게 부르는 말’이란 것이다.
보호받고 싶은 여성의 본능과 소유본능과 함께 내 것을 지켜 려는 남성의 욕구가 적절히 만나는 타이밍이다.
여자로서 언니나 엄마라 불리는 것은 모성본능에 근거해 희생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듯이 남자로서 오빠라 불리는 것 역시 보호와 책임감을 부각시키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건 단순히 나이문제가 아니다. 나는 연하의 남자를 사귀고 있는 여자가 서 너 살 어린 남자를 오빠라 부르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보았는데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남자로서 보호자를 자처한 일애 대한 대가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여자가 오빠라 부르는 일은  그 오빠가 인심도 좋아서 두툼한 지갑을 열어 비단구두를 사주든 말았던 나를 보호해 주세요란 뜻이 깔리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생판 모르는 남자를 단순히 연장자란 이유로 오빠라 부를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여자들 중에 좀처럼 오빠라 부르지 않는 여자가 있다. 누구에게 보호받는 것도 싫고 기대기도 싫어하는 자의식이 강한 여자다. 이런 여자에게 오빠란 말을 듣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구두 사 달라 옷사달란 소리는 듣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당신이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이사도 하고 시청에 가서 여권도 신청하고 아이가 아파도 당신에게 전화해서 데리러오라고 성화를 부리지도 않고 퇴근해서 집에 가려는데 전화해서 혼자 병원 가서 맹장수술 했다고 병원으로 오라고 할 여자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누구에게나 오빠라 부르는 여자가 있다. 어려서부터 보호받는 것이 몸에 익은 여자로 집안에 항상 그녀를 보호해주던 오빠나 아버지가 있는 여자다. 이런 여자를 만나면 아이가 운다고 같이 울거나 부부 싸움 다음날 그녀의 오빠나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을 공산이 크다.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효율적으로 오빠란 호칭을 쓰는 여자가 있다. 본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 말의 위력을 효율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영리한 여자다. 이런 여자를 만나면 아마도 행복할 것이다.

PS.
나 같은 여자는 서 너 살 어린 애인이 한번만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애원해도 ‘네가 누나라 불러라 짜식아!’ 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