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언 37. 오리와 호랑이 
병장 이영기 01-12 11:31 | HIT : 169 
 

 
190. 오리와 호랑이 


----------발췌부분은 민감하여 타이핑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을 더이상 우롱하지 말라" 2007. 1. 10 동아일보 논설 중 발췌  



한 사람이 당신에게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탈출했다고 말한다. 인근에 동물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당신은 코웃음을 친다. 다른 사람이 조금 뒤 미친듯이 한 쪽방향으로 뛰어가며, 동물원 동물수송차량이 교통사고가 나서 호랑이가 이 인근에 풀렸다고 말한다. 수송차량이 파손될 정도의 사고라면 호랑이가 무사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함께 뛰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당신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거리에 붙은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호랑이가 사람을 습격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온다. 아마도 당신은 화급히 건물이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려 들 것이다. 호랑이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삼인성호, 세 사람이 말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 수 있으니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거나, 존재하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인 실로 간단하다. 유사 이래로 그런 조장된 애매모호함은 정략이나 전략의 기본적인 전술이었고, 기만은 상대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기략 중 하나였다. 유무를 뒤집는 모든 시도는 결국 인간에 의해, 인간에게 집행되고 기만당한 대상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진실에 대한 적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종국에는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한다. 진실을 보지 못하는 피기만자의 행위는 당연하게도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비효율적으로 전락하고, 기만자는 피기만자에 비해 효율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기만책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기만책이 항상 기기괴기한 계책, 현실과 거짓을 전환시키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 것은 아니다. 피기만자에게 현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 또한 기만일 수 있다. 기만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피기만자에게 고려와 숙고라는 비용을 유출시키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기만이 있을 것이라 믿는 자에게 진실 그대로를 알려주면, 아마도 피기만자가 제시된 진실을 최후에나 고려하게 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나와 목적을 달리하는 모든 자들이 제시한 정보는 언제나 의심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진리이며, 따라서 진실의 적확한 제시가 그 자체로서 전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기만을 포장할 여력, 기만을 현실처럼 꾸며낼 여유가 없을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문제는 인간의 인식이다. 기만하려는 자는, 자신이 다루는 기만의 정보에 언제나 지극히 근접해서 사고하고, 그 바로 옆에서 생활한다. 가장 기만당하기 쉬운 자는 바로 기만자 자신이다. 인간의 인식은 그리 강건하고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며, 바로 자신이 만든 거짓말에도 수월하게 넘어가는 편이다. 서로 간에 오가는 기만과 허위의 정보 흐름 속에서 진실의 눈을 잃을 가능성은 따라서 누구에게나 있으며, 오인의 가능항은 무한대로 증가한다. 일정 이상의 기간 동안 일상적으로 기만이 행해졌다면, 진실은 지극히 깊은 곳에 묻혀져 아무도 그 빛을 볼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원천적으로 서로가 자신의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이 의무인 제도인지라,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각자의 의사나 권익을 밝히는 것을 터부시하는 행위는 대부분 권위주의에 맞닿아 있다. 민주주의는 부당한 권위를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베버식의 권위는 실로 인간의 인식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존재하겠지만, 그렇더라도 민주주의는 그 모든 권위들을 계속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 속에서 보다 의의에 맞닿을 수 있다. 애초에 민주주의는 행복을 위한 이념이 아니라 당위적인 사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민주주의와 그 속의 개인들은 자신의 이기든 남을 위한 이타든 상관없이 자신이 믿는 바를 주장할 권리가 있고, 그런 믿는 바를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할 의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시끄러우며, 그 시끄러움 속에서 권위주의는 소멸한다. *1 시끄러움을 기피하는 것 역시 권위주의적이다. *2 그리고 권위주의가, 기만이 성행할 토양을 제공한다. 

우리가 직접 마주치기 힘든 사람을 하나 가정하자. 당신이 다니던 대학의 총장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누군가 그 사람이 오리걸음을 걷는다고 매일같이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학보가 총장의 오리걸음을 만평으로 그려대고, 교수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강의 중 총장의 꼴불견스럽게 뒤뚱 뒤뚱 걷는 것을 비판한다고 해보자. 아마 당신은 총장을 직접 보고 그 걸음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총장의 걸음 걸이가 정말 그러했을 거라고 믿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총장의 뒤뚱걸음을 안주삼아 비꼬면서 누군가와 술잔을 기울일지도 모를 일이다. 총장이 진실로 뒤뚱걸음을 걷는지에 대해 별다른 확인도 하지 않고서. 

앞서 말했듯 기만은 권위들 속에서 태어난다. 합리적 사고나 확인의 노력이 있었다면 소문은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며, 총장이 욕을 먹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혹시 총장이 뒤뚱걸음을 정말 걷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의 행위가 여전히 총장으로서 합당하다면 '총장의 품위를 깎는' 뒤뚱걸음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품위는 대학교 총장의 직무와 관련이 없다. 대학 사회 내 민주질서에 문제가 되는 것은 도리어 그런 총장을 무분별하게 비꼬면서 확산시키는 것은 일반 대중일 것이다. 

대통령이 진실로 레임덕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민주적인 절차를 밟으면서 정치하고 있는지의 여부일 뿐이다. 현재까지 그는 대부분 헌법과 법의 절차 내에서 움직였고, 상대를 비판했다. 수구 언론이 문제였다는 것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잘 알려진 문제였지만, 그는 수구언론을 타파하기 위한 위법적인 행위는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실용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군부 시절처럼 검열을 하고 언론사를 폐합시키는 것이었을 것이고 정권 초 그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오보에 대해 정정 신청을 끝없이 제기하는 힘든 길을 택했다. 언론은 그의 정책을 하나 하나 비틀고 와전시켰으며 정책의 방향을 실종시켰다. 국민을 오도하거나 거짓 분기시키고, 대통령의 행동이나 권위를 실추시켰다. 대통령의 정치 행위를 비민주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했고, 무능함과 오기의 소치인 것처럼 매도했다. 기만이었고, 기만전술은 분명히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명백히 위법을 저질렀다. 오보나, 특히 의도된 오보나 흑색선전은 여러 법에서 언론사에게 손해배상 및 정정보도의 의무를 부여하며 그들은 상당 부분 법원의 그런 결정마저 거부했다.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일반인들은 따라서 그들을 질타하고 그들의 비민주적이고도 비합법적인 행위를 거부하고 비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보유한 권리를 침탈할 권리마저 갖는 것은 아니다. 설사 죄인이라 할지라도 제한이 규정된 권리 이외의 권리는 모두 그대로 유보되는 법이니까. (그런 위법을 저지르면서도 말하는 언론이 있는 것이 도리어 민주주의의 특성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더욱 그러하다. 민주적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법적 절차를 지키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도리어, 대통령은 어쩌면 그런 언론의 도움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 대통령의 언행과 발언은 언론의 초점이 되었고, 그의 주장과 사유는 간접적으로나마 (비난의 틈에 섞이어)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벽과 권위를 깨겠다는 공약을, 대통령은 (의식했든 아니든)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 이전 임기의 어떤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수준의 권위 허물기를 달성하고 있고, 또한 기피되던 담론과 주제들을 사회적 논의의 위에 모두 끄집어 내고 있다. 겉으로은 위태해보일 지언정 최소한 사회 각 계층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고, 노조나 비정규직 등이 흑색선전으로나마 사회 전반에 노출될 기회를 확보하게 되었다. 

달리 생각해 보자. 과연 (흔히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규정하는)수구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기반과 힘으로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가? 언론의 힘은 강력하고, 스스로 진보의 틀로서 세상을 보는 이들의 관점에서는 정말로 그러하다. 보다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인 정책들은 대부분 좌초되고 있고 진보나 개혁 세력들은 흑색, 인신 공격을 당하며 와해되고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자. 논의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여, 사회에 그 주장과 움직임이 알려지지도 않던 시절이 바로 몇년 전이다. 그런 것이 이제는 최소한 그런 식으로나마 세상에 드러나고 있고, 논의되고 있다. 현 시점의 사회를 보면서 '자기 세력의 협소해진 지반'이라는 위기 의식을 느끼는 것은 진보적인 틀을 갖춘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추된 권위, 등을 생각하는 것부터가 벌써 권위주의적이다. 순전히 입헌적이고도 민주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레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정책이 부결되고 관료나 보수층이 저항하는 것을 레임덕으로 규정한다면 오리걸음을 걷지 않는 민주 정권 따위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현 정권과 대통령이 레임덕에 처해 있는가? 정권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이토록 다양하고도 많은 담론들을 이끌어내고, 대통령의 한 마디 한마디에 온 국가의 관심이 쏠리던 시절이 있던가? *3 과연 우리는 어떤 것을 토대로 레임덕을 규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기만책을 쓰고 있던 것은 과연 누구인가? 왜 조선일보의 만평은 매일 대통령의 머리에 오리 모자를 씌우고 있는 것일까? 그런 극단적인 왜곡을 일삼는 것이 과연 사회적인 강자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1.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른 것이며,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많이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권위를 타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의 인식이나 일상 생활을 위해 권위는 필요불가결한 부분이 있다는 근거를 흔히 제시하며, 이들의 논리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인주의 사상의 근간에 닿아 모순이 된다. 제도에 모순이 기거하는 것은 필연이며, 따라서 용인할 수 있다고 믿는 자의 의견이라면 권위와 권위주의에 대한 처우를 달리하는 것에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논의중인 얘기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당위라고 말하는 현 시점의 윤리에 근거한 것이며, 이 경우 권위와 권위주의는 결국 같은 맥락의 부정성을 지닌다. 

*2. 간단히 생각해 보자. 베버는 권위를 카리스마적 권위 등 인식과 행동에 대해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상대에게 강요할 수 있는 비제도적인 힘이라고 규정했다. 일반적으로 리더십이론, 행정학, 기타 권위를 논의하는 학문들의 규정은 이에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민주주의는 올곧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고에 근거함을 지향한다. '높은 학식과 전문성을 닦은 이의 의견을 권위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결과적으로 그 자가 논리와 화법을 갖고 합리적 사고를 갖는 시민들을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확장을 낳을 수 있다. 보통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에는 우민, 우중이라는 인식이 숨어있으며, 합리적 시민들의 집합체는 실종된다. 지금 논의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지향해야할 이상이 어떤 것이냐는 여부이지, 현실의 민주주의 어떠하냐는 것은 분명 아니다. 모든 인간이 언제까지고 우중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이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3. 이 글은 책마을 ver 사제에서 김형진, 김대현, 김봉현 회원이 논의한 내용을 보고 적게 되었습니다. 현 대통령에게 아직 레임덕은 없다는 논의의 골자는 김형진 회원이 코멘트로 전개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은 분은 사제 책마을을 참고하시길. 참고로 말하면 압도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