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오늘날 환상문학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21 04:44:10, 조회: 251, 추천:2
1.
환상문학에서의 '환상'이라는 것을 어떤 층위에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곧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환상'과 (불)일치할 것이다. 이 일치와 불일치가 내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환상문학에 눈곱만큼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주변 환경이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진으로서의 잠시 동안의 <거울> 웹진에서의 활동은 분명 환상문학과의 조우Encounter를 불러온 것이었다. <거울>은 사실 90년대 이후 난립하던 웹진들의 틈바구니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축에 속하는, '권위' 있는 환상문학 분야의 웹진이다. 이곳은 90년대의 문화적-장르적 유산과 21세기의 소통방식이 결합되어 있으며, 과거의 환상과 오늘날의 마케팅이 매끈하게 접목된 공간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케이스 스터디'를 할 수 있었다고 해 두자. 이를 바탕으로, 나는 이 둘(환상문학과 이에 충실한 주체들이 '말하는' 자기표상적 환상과, 정신분석이 말하는 자기배반적 '환상')의 (비)관계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글을 전개할 것이다. 여기서 글은 기본적으로 둘의 (비)관계성에 대한 고찰과 매한가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환상문학'을 소비하는 어떤 범용한 방식에서 시대적 징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환상문학에서 꿈과 같은 소원충족(하늘을 날아다니느 마법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중원의 무림고수가 됨으로써, 미녀를 차지함으로써, 우리가 꿈꾸어왔던 세계를 실현하는 방식들....) 못지 않게, 그것의 의미심장한 좌절들(역시나 그러한 '대안세계'에서조차 맞부딪히는 현실적 한계의 정교한 비유적 표상들...)을 찾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장르적 쾌감을 유발하는 목적에서 고안된 세계관에서조차, 현실의 동일한 비장한 감수성과 절망들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장르적 쾌감 뿐만 아니라, 본연의 순문학적인 기획에 복무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순문학적 글쓰기 속에 포착하고 있는 삶의 근원적 유한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내적 서사들은, 또한 중세와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을 차용한 판타지 장르를 통해 더욱 '근원적'이고 스펙타클하게 빛나지 않는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환상문학의 기원은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탁월한 예감을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상징들을 통해 노래한 니체의 단편들과, 북유럽 신화를 장대하게 몰락해 가는 근대적 자의식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의장으로 입혀놓은 바그너의 오페라에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환상문학을 다른 장르들과 변별되는 동시에, 근대적인 순문학과 차별되는 유일무이한 위상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것이 순수 장르적 관심에서 탈피한, 환상문학에 대한 '가능한' 예찬론이다.(동시에 내가 믿기에, 이런 수사들은 이미 오늘날 문단 내부에 만연해 있는 담론들이다. 문단외부의 시장은 이렇게 문단을 꼬시고, 상징적 권위는 외부의 시장을 이렇게 고시는 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문학 예찬은, 사실은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는 할리웃 리메이크 영화들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해진, 환상문학의 장르적 세계관들은 얼핏 환상과 현실이라는 교차지점을 공략하는 본연의 장소에서, 하나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어디서부터 환상이고 현실인가? 어떤 의미에서 온전한 현실은 환상 자체에 의해 보충되지 않는가? 이런 곤궁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는, <오퍼나지-비밀의 계단>이라든지, 더 유명한 <판의 미로>에서 보여주는 슬프도록 유명한 영화들의 사례에서, 그 자체로 부조리한 현실은, 강렬한 '환상'에 의해 삽입됨으로써만 비로소 온전한 서사와,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기존의 구도(환상은 현실의 냉정한 기계적 법칙에, 가능한 심리적 위안과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교화의 수단을 제공한다)에서 탈피해서, 어쩌면 진정한 환상이란 냉엄한 현실 자체보다 '외상적'Traumatic이라는 정신분석의 오랜 테제를 옹호할 수 있다. 앞서 <길예르모 델 토로>의 두 영화들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 동일한 '근대적인 환상'이다. 사실 스페인 내전보다 더 끔찍한 것은, 기저에 상호적대적으로 분열된 현실을 전치된 방식으로 반영한 파편적 이미지의 실재적 강박이지 않은가? 영화의 중심에 놓인 소녀의 아름다울만치 '환상적인' 세계의 폭력들은, 단순히 실제 현실의 구역질 나는 신체훼손과 사지절단의 연속보다 더 '나쁘다' 혹은 더 폭력적이다. 그것들이야말로 현실적 폭력들의 실재를 순수한 형태로 응축하기 때문이다.
2.
정신분석 역시 이 근대적인 환상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좋다. 그런데 이것은 환상문학에서 하나의 자립적인 '세계관'으로서 표상되는 환상과 분명히 다르다. 근대적 환상들은, 존 말코비치의 영화들에서 나온 것 같은,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불가해한 단어-표상과 같이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는 강박적 부분대상(영화 <총알 탄 사나이>에서 노래하기 시작하는 가방 속 절단된 머리들)으로서만 '유효'하며, 그것은 온전한 자기실현은 커녕,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제약에 의해 현실-보충적 지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그러한만큼이나 그것과의 직접적인 대면 효과는 자뭇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빈정거리며 반문하듯) 온전히 근대적 이성의 억압 탓으로 돌려져야 하며, 혹시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을 근대적 자의식 속으로 억압한 결과는 아닌가?
여기서 잠시 하나의 우화를 들도록 하겠다. 이 우화는 '실화'이며, 오늘날 젊은이들의 전형적 표상과도 같이 파악하고 싶다.
가령 자신을 '도킨스주의자'로 자처하는, 트라우마를 모른 채 밝게 자란 (단지 요새 평범한 젊은이들처럼 우울증 말고는 정신적 문제는 없는) 한 호감 가는 젊은이가 있다. 자신은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의 내적기제가 유전자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고 믿으며, 그 밖의 모든 내적 자기경험들은 어디까지나 신경다발의 생화학적 결과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 젊은이의 지인인) 나는 그가 자신의 애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지고지순한지 잘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이 모순이 아닌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전혀 모순점이 없는 깔끔한 하나의 정리된 입장이었다! "물론 나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호르몬 작용에 불과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차원에서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경험되는 것이야!"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언제나 은밀하고 부분적인 외상적-억압된 위상을 차지하는, 근대적인 정신분석적 환상과 단절하는, 환상의 완전한 '자기실현'과 같은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하나의 완전히 실현된 환상-세계관과 같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이 (정신분석이 임상적 유효성을 상실한) 오늘날의 환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상문학에 대해서도 유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오늘날 톨킨이나 JK 라울링에 대한 잘 알려진 팬덤현상 계열의 환상문학에 대한 취향은, 마치 사랑에 바진 도킨스주의자의 그것과 같지 않은가? 환상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부인되는 방식으로' 내적 거리를 둔 채 유지되어야만(도킨스주의자 역시 자신의 사랑이 한낱 호르몬 작용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이 온전한 환상으로 정립된다. 그렇다면 앞서의 도킨스주의자는 사실 그에 앞서 로맨티스트이고, 도킨스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은 이 로맨티시즘의 배경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 경의 <방랑자 이야기>와 같은(+나는 이것을 추천한 분이 논평하듯, 오늘날 슬레이어즈와 같은 판타지 장르의 라이트 노벨에 가깝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19세기 말의 독일 낭만주의의 뻔뻔스러운 중세적 취향이 동일한 배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이기 이전에, 근대과학적 사고가 야기한 비관주의에 심취해 있던 자들은 아닌가? 아니, 오히려 역으로 그들이 근대과학적 사고를 마지못해 수용한 것은, '모든 사물에 노래가 잠들어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복선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모든 낭만은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그것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바'는 더욱 새롭고 애수 넘치게 다가온다. 이렇듯 우리는 기계론적 사고관에 철저히 복종할수록(이것이 그들의 '보수주의'의 정체이다), 사물과 더불어 노래하고, 낭만적인 모험을 떠나는 자율적 지평을 편한 마음으로 더 잘 획득하게 된다. 우리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입장에 완전히 동의하며, 그들이 한낱 퇴폐적인 불한당들이기 때문에 거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초해 있는 이런 '기만'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가 칸트의 합리적 비판 전통으로부터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이, 그들의 '비합리성'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과 달리, 그들이 다른 종류의 합리성, 지극히 보수적이고 결정론적 성격의 '기계론적' 세계관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더 문제적이다.
3.
이것은 똑같은 합리성과 현실주의를 모토로 삼고 있는 오늘날 저 낭만적인 88만원 세대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낭만주의자인 동시에, 똑같은 결정론적 기계론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판을 치는 자기개발 담론들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의 풍부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 우리는 객관적으로는 과소독점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88만원 세대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주관적으로나마 이미 성공한 CEO와 부자의 마인드, 씀씀이와 생활습관을 가져얌나 그나마 간신히 승리할 수 있다는 교리Orthodox들에 노출되어 있다. 물론 그런 마인드가 시대적으로-폭력적으로 내면화되었다는 진부한 주장은 전적으로 요점을 놓친다. 그것들은 <꽃보다 남자>와 같은 백치 같은 환상적 드라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일종의 '부인된 환상'으로서만 만인들에게 공유된다. 이러한 '반성성' 때문에, 환상은 단순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객관적'인 것이다. <자본론>의 저 유명한 '상품물신주의의 비밀'이라는 절을 떠올려보자. 강막수는 단순히 상품의 가치가 물질적 속성에서 떠나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개한다는 부르주아 사회의 물신적 환상('호경기'에 우리는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외양을 띠고 얼마나 요란하게 선전되는지 잘 알고 있다)을 실증적으로 논박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논변 일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게 '그렇게' 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앞서 칸트 이후의 낭만주의에 누락된 것은, 칸트가 그의 <초월론적 전회>를 통해 최초로 해명한, 우리가 필연적으로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것들로 구성된 초월론적 스크린Screen이다. 칸트는 흄의 통상적인 회의(리얼리티는 환상에 불과하지 않은가)를 더 밀고 나가, 도리어 환상이야말로 어떤 실천적 리얼리티가 있음을 공공연하게 천명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결국 환상문학의 장르적 쾌감의 원천 역시, 환상에 대한 의식적인 '사회적인Sozial' '거리감-기시감'에 기초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환상문학이 단순한 하위문화이기를 그치는 부분은, 그러한 거리감이 모든 사회-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것이야말로 환상문학의 단편적이고 고유의 폭력적인 환상을 하나의 '객관적 세계관'으로 번역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톨킨의 세계관의 지명과 종족 언어들이 그 자체로 마치 학문적 대상인 양 탐구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강막수가 드러낸) 그런 기묘한 객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큰 기만적 환상이 내재되어 있다. 마치 <해리포터>에서, 머글들의 세계와 마법사들의 세계가 극명하게 갈라지듯이, 훨씬 '리얼'하고 생동감 넘치는 환상의 세계 이면에는 어떤 불가역적인 기계적 법칙에 의해 완전히 복속당한 하나의 '비현실적인'(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판명 나는) 세계지평이 도사리기라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해도' 또 다른 대안세계에서 느끼는 위안이 가능해진다. 가령 어떤 작품에서 고등학교 수험생이 모종의 타임워프에 의해 중원의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생활환경에 내던져질 때조차, 거기에는 모종의--수험생활의 쳇바퀴 굴러가는 생활에서 적어도 해방되었다는--안도감이 실려 있는 것이다.
결국 장르로서의 환상문학을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 보편화된 이데올로기적 제스처를 따른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어느 이데올로기적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장르적 합의를 통해 하나의 '의식적 세계관'으로 정립된다. 여기서 반론이 가능하다: "착취와 기만이라는 실질적 목적으로 고안된 이데올로기적 세계관과 달리, 환상문학의 세계관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 고양된 순수 예술의 영역이라는 자율적 의미지평을 획득한다." 그러나 재차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 "원래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 무위無爲인 것이다." 가령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말하는 내용의 진위여부나 실제 사회적 효과의 실현여부에서 승부가 나는 것이기는커녕, 그 진위여부나 실현여부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미학적인-공허한' 차원을 내포한다. 가령 모두가 '그것이' 허구임을 알지만, 그런 반복-재생산 가능한 허구를 통해 적어도 독자의 혹은 주체의 인식적-실천적 좌표를 찍어주는 부정적 일관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사실상 강제된 선택인데, 우리가 이러한 의식적 '환상'을 거부한다면, 현실감각의 최소한의 일관성마저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개 더 나쁜 것을 피하게 위해 덜 나쁜 것을 선택한다. 이런 선택의 구조는 왜 우리가 그것이 기만임을 알면서도 자기개발 서적에 몰입하느냐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제공한다.
가령 우리가 오늘날 자기 개발서적을 읽는 데서 얻는 이익은 단순히 성공의 방법론을 얻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기개발서에 88만원 세대의 심원한 주체성의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고까지 주장하고 싶은데, 가령 자기개발담론을 믿지 않는, '무신론적인(그러나 아직은 신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는)' 냉소적인 독자들을 상상해보기만 하면 된다. 그가 얻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에서의 처세술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궁극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읽는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기본적인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제스처이다. 그가 이런 '기만적 처세술'들과 관계하는 반성적 차원에서만, 어떤 비-현실 속에서 적당한 현실감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어쩔 텐가? 냉소적인 주체가 얻는 이득은 단순히, 그가 조우하는 각종 담론적 구성물(오늘날 자기개발 서적을 미셸-푸코적인 안목으로 읽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머의 '일관된 무언가', 초월적인 일자一者와 같은 것이 있다는 바로 그 현실감각 자체이다. 그 현실감은, 전적으로 임의적인 그러나 그 자체로는 정말한 환상적 세계관들에 대한, 최소한의 주체적인 '거리-유지'에 의해 지탱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그러한 세계관과 전적으로 단절된다면, 우리는 저 '신자유주의적 (비)현실' 속에서 문자 그대로 '모든 것'(주체성을 포함한 현실감각 전체)를 잃지 않겠는가?
4.
해서, 나는 <문학의 종언>의 시대에서조차 두 가지 '작은 문학'만큼은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출판업계를 지탱하는 두 원천이기도 하다. 그것은 <창작과 비평>도, 한국문단도, 백낙청도 아닌, 첫째로 환상(-장르)문학이고 둘째로 자기개발 서적(복거일과 공병호는 동시에 탁월한 문학적 센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주요한 탈-근대적 환상들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아무도 신을 믿지 않는 저들 가운데 공유되는 '부인된 환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인된만큼이나, 그것은 오늘날의 일관된 '세계관'이기도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좋았던 옛 정신분석의 시절의 환상은 결코 '세계관'일 수 없었다) 나는 이것을 '문단'의 권위가 종말하고 시대적 화두를 규정하던 거대담론이 상실된 오늘날의 지탱하는 '작은-담론'들, 혹은 작은 우상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표준적인 젊은이들의 서가를 찾아가 보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찾아보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전공서적과 만화책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판타지-장르문학 시리지 몇권과 자기-개발 교양서 몇 권 쯤은 비치해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범죄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들 역시 서가에 이런 작은 우상들쯤은 모셔둬도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지금까지 환상문학이 오늘날의 현실감각을 지탱하는 주요한 축들 중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에는 어떤 아이러니도 없다. 그것은 환상문학이 현실에 대한 보충적인, 위대한 (동시에 끔찍한 외상을 포함하는) 허구적 서사로서 환상(신화를 통해 현실의 곤궁을 설명하는 등등의 기원적인 원초적인-억압된 환상)이라는 위상을 '더 이상' 차지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뜻이다. 말하자면, 환상문학에 담지된 환상성은 오늘날 의미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 형形 인간'이 준거하고 있는, 자의식적 장르적 합의의 다발들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오늘의 지평에서 환상문학의 환상성은, 빅토리안 시대 정숙한 여인의 다락방에 꼭꼭 숨겨둔 채 은밀한 향유의 원천이 되는 무엇이기는커녕, 정 반대로 온전한 장르적 합의를 통해 공적으로 PR되는 자기실현된 환상이다.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형 인간이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데이터베이스-화'된 허구적 세계관들의 편린 자체를 재전유하고, 패러디하고, 재상연하는 한에서만 존속하는(제정신을 유지하는) 포스트모던한 자의식이라고 일컬어진다(나는 일전에 이를 절대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에 전복적이거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다, 더 나쁘게도, 어떤 더 큰 상상적 기만에 준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환상문학이 준거하고 있는 '허구적 세계관'을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여기는 태도를 기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 누구도 이 '세계관'을 눈곱만큼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진지하지 않은 '바로' 이 태도야말로 오늘의 유일하게 일관된 현실감각을 보증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차원이자 사회화 수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말하자면 오히려 기만은 허구가 아닌, 허구들을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패러디와 재전유 그리고 '동인지화'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의식적 장르적 관행들에 대한 바로 그 '합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대여점과 라이트 노벨의 지평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환상문학의 환상성의 위상인 것이다.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하나의 온전한 '장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유력한 관행이기도 하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5-01 09:3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6:58
병장 김형태
아, 가지로 2009-04-21
07:24:12
상병 김치곤
가지로.
환상문학에 대한 멋진 개념글이군요. 2009-04-21
07:46:50
상병 기류언
가지로!! 2009-04-21
08:03:09
일병 김태건
좋고 멋진글이긴 한데... 솔직히 어렵습니다... 미셸 푸코적 이 뭔지... 제가 인문계가 아니라서 이해를 못하는건가요? 흑... 2009-04-21
08:48:36
상병 구진근
흐음..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슬프군요...
원익님이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를 해부하고 분석하며 왠지 가장 큰 무언가를 놓치진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칼 이라는 물체가 있습니다. 이 칼이라는 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
만약 이 칼이 아주 잘 만들어 졌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사람은
단순한 고철 덩어리처럼... 또 반대로 주위에서 얻은 지식으로 이 칼의 가치를 매기는 사람
혹은 이 칼에서 어떠한 예술적인 감각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어떤 조그만 아이가 그린 그림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서 조차 아주 복잡한 수학적인 지식으로 해부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문학적으로 높은 능력을지닌 사람은 이 글을 한 편의 명작으로 탄생 시킬 수도 있을테고 또 아주 뛰어난 예술가의 손에 의해 명화로 재탄생 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했냐의 문제보다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또한, 이성적보다 감성적으로 바라볼때의 느낌이 다른 것 입니다.
10년동안 수학을 한 사람은 어떠한 식을보고는 말도 안되는 연산법이라며 코웃음 쳤습니다. 하지만 잘 몰라서 그 식을 이리보고 저리보다가 새로운 식을 발견하는 어떤 학생이 있습니다. 지적 능력으로는 수학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 유리하겠지만 어떻게 관심을 가지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입니다.
쓸데없는 소리들이라고 비웃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것저것 다양하게 읽어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그것이 전문적인 학문에서가 아닌 말 그대로 잡다한것들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한 것들을 읽으며 느꼈던 점을 말해 보고 싶었습니다.
A라는 판타지 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작지만 소중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B라는 철학책을 읽고 문득, 지난번 읽었던 A라는 판타지 책을 떠올리곤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모든것이 모순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C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다시 A라는 판타지를 보았습니다. 갑자기 철학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던 그 어떤것이 보이는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같은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야누스의 조각 같은거랄까요.. 그래서 이것에 빠져버렸지 않나 하고 한숨쉬어 봅니다.(웃음)
아마 원익님은 누구보다도 다양한 지식을 얻고 그것으로 인해서 어떠한 것에 대해서 파악하는 능력이라던지 지적 수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환상문학은 환상문학 그 자체로 보아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아이시절로 돌아가 읽는다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어쩌면, 거기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04-21
19:25:13
상병 박원익
김태건/미셸 푸코라는 사람은, 예컨대, 객관적인 의학적 보고나 법률적 소견에조차,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는지 혹은 어떤 권력의지를 은폐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던 철학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진근/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지만, 저는 환상문학에서 환상문학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글을 쓴게 아닙니다. 제 논지는 환상문학에 있는 환상적 요소들의 '위상'이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위상변화'만큼은 주관적인 것이기는커녕 '객관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더 이상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판타지 소설을 읽을 수 없게 된것이죠. 우리는 거기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고, 역으로 그게 판타지 소설들이 널리 읽히게 되는 조건이니까요. 2009-04-25
15:46:52
병장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황민우씨 이후로 박수를 보내고 싶은 분이 생겼군요.
가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