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힘.들.때 - by 하지연 
 병장 김지민 06-08 17:10 | HIT : 317 





 힘. 들. 때. 




 자폐증으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살면서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 가 없다. 가끔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인간관계로 해소 할 수 없는 내면적인 문제이고 그래서 사는 동안은 항상 누군가와 부대끼며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매사에 귀찮고 게으른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은 적응하기 좋은 아주 심플한 곳이다. 그 이유는 이곳에는 딱 한 부류인 군인만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아아.. 여기서 어떤 분들은 민간인과 군인을 차별하는 것이냐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수 도 있겠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나 역시 군인과 다름 아니다. 이곳에 몸담은 지 십년이 훨씬 넘었기 때문에 하루 한 끼씩 먹는 짬밥을 하루 세끼 먹는 병사들과 비교해도 벌써 두 번은 전역를 했을 것이고 내가 받은 화생방 훈련도 1분 이내에 방독면에 보호의 보호덧신까지 착용할 수 있는 웬만한 교관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하고 훈련이면 워커를 신고 군복을 착용하고 아침 일조행사 후 구보까지. 지침이 바뀌기 2년전 까지는 내 또래의 여군과도 똑같은 체력검사까지 받은 몸이다. 친구들과 모여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다가 무심코 튀어나오는 민간인 타령과 각종 훈련 얘기, 술이라도 한잔 할라치면 잔 돌리기, 좌 턴, 우 턴, 원 샷, 건배하기(정말 심각하네) 지금은 군대 내에서 조차 악습으로 취급받는 이런 행동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친구들을 경악하게 하며 가끔 남자친구를 데려나온 친구도 남친이 군대 이야기라도 하려고 하면 내 눈치를 보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그런 존재이다. 게다가 적어도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으니 나의 군대생활은 쭈욱이다. 

 원래는 인간과 관계된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꺼낸 말인데 처음부터 군인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건드리고 나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리도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원래 내가 좀 잘 헤매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것도 재미있다. 내친김에 나의 군대 복무기를 한번 들려드리겠다.

 처음 임용장을 받고 인사처에서 신고를 하고 어리버리하게 앉아 있으려니 누군가 차로 나를 데리러 왔다. 뒤가 뻥뚫린 1.5톤 트럭이었는데 안전벨트도 없고 또 어찌나 시끄럽고 덜컹거리는지 첫날이라 신경 써서 차려입은 정장치마가 뒤집힐 것 같아 치마 단을 부여잡고 차에서 튕겨 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브레이크를 사정없이 밟는 바람에 거짓말하지 않고 좌석에서 엉덩이가 1m 는 튕겨 앞 창문에 머리를 부딪칠 뻔 했다. 너무 놀라 운전석을 보니 요 맹랑한 운전병이 히죽 웃고 있는 것이다. 첫날부터 뭐라고 싸울 수도 없고 얼굴이 귓불까지 붉어져서 내리는데 그때 마중 나온 분이 지금도 나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 인 배 선배였다. 차도 없을 때라 나를 부대에 인사를 시키고 또 멀리 있는 선배 언니들을 알현하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그날 나는 높은 구두 굽으로 뒤꿈치 물집 잡힐 때 까지 걷고 또 걸어서 부대 내 곳곳에 있는 선배 언니들을 뵙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퇴근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언니들에게 교육받은 것이 음... 귀걸이 큰 거 하지마라, 무릎위에 까지 오는 짧은 치마 입지마라, 원색 옷 입지마라, 인사 잘해라, 청바지 안 된다, 혼났다고 질질 울지 마라. 등등 
 절대로 왕 고참언니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딱 중간쯤에 있는 선배언니들이 주로 군기를 잡는데 세상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것이 지금 내가 그 군기반장 군번인데 요즘 애들한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왕 따 당하기 좋은 아이템이다. 어쩌다 인사한번 못해서 버릇없다고 아침 업무시작하기도 전에 불려가 30분쯤 혼나고 립스틱 색깔 이상하다고 밥 먹다 말고 휴지로 지우고, 치마 짧다고 전화오고, 심지어 치마바지 입고 출근했다가 반바지라고 지적받아서 결국 체련복으로 갈아입고 하루 종일 일을 하다 퇴근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요새 군기 잡는다고 이런 식으로 했다간 헌병대에 끌려가거나 대찬 후배만나 너나 잘 하시란 말 듣기 딱 십상이다. 
 게다가 행사는 좀 많은가. 군가경연대회 5회 최다 참가라는 빛나는 기록이 있고 구타근절 연극대회 2회 출현, 체육대회 달리기 선수로 2번 테니스 대회 선수로 2번 배구대회 선수로 2번등 여자가 참가해야하는 모든 종목에 빠짐없이 불려 다녔다. 부서에 여자가 둘인데 한분이 10년 선배고 하니 테니스든 배구든 구기종목에 소질이 있든 없든 노래를 잘하건 못하건 무조건 나가서 머리수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해도 거르는 법이 없다. 작년에 했으니 올해는 좀 빼주세요? 어림도 없다. 이유도 우습다. 도대체 왜 우리가 꼭 들어가야 하냐고 물으니 장병들 사기진작과 정서순화를 위해서라고 너무도 거창한 해명을 해줘서 한동안 왜 우리가 장병들 정서순화를 책임져야하는지 고민한적 도 있었다. 각종 행사가 있으면 차출해서 차 서빙을 나가고 불우이웃 돕기 일일찻집에는 한복을 입고 차를 나르고 먹거리 장터에서는 하루 종일 순대를 썰기도 했다. 처음 행사요원으로 차출되어 서빙을 나갈 때 너무도 자존심이 상해 언니들 안 볼 때 화장실에서 눈물 몇 방울 뚝뚝  떨구기도 했고 생전 처음 만져본 테니스 라켓을 배드민턴 라켓 휘두르듯 마구 휘둘러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고, 연극무대에서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가 사람들 애를 태우기도 했고 체육대회 때 나는 죽어라고 뛰어서 들어왔는데도 왜 뒤로 뛰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참 고생 많았네)

 아아. 정말 정말 직장생활 힘들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냐면 그건 아니다. 내가 참석하지는 않지만 군가경연대회는 어린 후배들이나 여군들로 머리수를 채워서 여전히 해마다 치루고 있고 체육대회 릴레이와 배구를 해야 하고 먹거리 장터에서는 여전히 순대를 썬다. 이제 갓 취업한 어린 후배가 분해서 씨근거리며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냐고 하면 그냥 이렇게 위로할 뿐이다. 
'그냥 타줘라. 그냥 속으로 인간아! 인간아!  너 이 커피마시고 오래오래 살아라 그러면 된다'

 세상은 어차피 부조리하다.
 학교 다닐 때 죽어라고 공부를 해도 결국 술렁술렁 놀며 공부하는 머리 좋은 친구를 따라 잡지 못하고 안테나 엄청 세우고 창가에 딱 붙여야 나오는 라디오로 지직 거리는 잡음이 반 이상 섞인 FM을 듣다가 어떤 친구 집에 놀러가 수입 소니 오디오로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들으며 놀고 있는데 일하는 아주머니가 갖다 주던 카스테라와 콜라를 마시며 느끼기도 했지만 내 인생에 이 부조리의 절정은 직업을 가지면서부터였다. 
 그동안 읽었던 책하고도 틀리고 학교 다닐 때 배우던 모든 것이 쓸모없는 곳이 직장이었다. 사회 초년생은 모든 것을 정말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직장이 이런 곳이라면 왜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복사하는 법이나 타자치는 법이나 기안문 만드는 법이나 커피를 맛있게 타는 법이나 자를 대고 보푸라기 없이 반듯이 종이를 자르는 법이나, PT자료를 영감님들 보기 쉽게 짧고 간결하게 두장 이상 넘지 않게 작성하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고 유기화학이니, 철학이니, 미적분이니 그딴 것들을 가르쳐 취직을 하자마자 여전히 내가 바보라는 사실에 절망하게 만드는 것일까. 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친구는 선생님이 되어 지금도 10년째 별로 내용도 바뀌지 않은 중학생들 영어를 해마다 반복해 가르치고 있고 매일 선생님께 출석부로 얻어맞던 공부보다 친구 많고 놀기 좋아하던 친구는 오전에 가게 맡겨놓고 친구들과 아침골프를 간다.

 직장 생활 10년을 넘어 이제 연금 받을 날이 가까워오니 갓 직장생활을 시작한 어린후배들이 어떻게 이렇게 오래 생활을 했냐고 물어 오는 일이 종종 있는데 가끔 기분이 썩 좋거나 무슨 바람이 불어 내키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주로 하는 말인데 이 직장생활도 그렇고 힘든 세상살이를 할 때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면 상당히 유리하다.

 첫째는 어떤 일에 닥치면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해보려고 덤비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말 불가능해보였던 일도 몇 번 해낸 적이 있는데 그때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정말로 이일은 안 되는 것인가 라고 냉정하게 곱씹어보고 안된다면 그 다음 차선책은 무엇일까. 즉 불평을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이때야 말로 그동안 읽어왔던 책이나 학교에서 배웠던 그 쓸모없어 보였던 지식들이 총망라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냉정한 머리로 판단했을 때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개기라는 것이다. 미적거려도 좋고 냉정해도 좋고 도망을 가더라도 그 상황에 맞게 발을 담그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려면 두둑한 배짱이 필수다.
 개인적으로 이 개기는 방법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 나는 이 개기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고 즐겨 사용하는데 개길만 하면 충분히 개기고 아 이건 이빨도 안 들어가네 그런 낌새가 보이면 잽싸게 포기하고 시킨 대로 한다. 대안이 없는 불평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살기 힘든가.
 세상만사가 모두 이유가 있다지만 꼭 그 이유를 다 알아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힘들면 '개겨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명예로운 생활양식 가운데 하나는 '버티는 것' 이다 즉 개기는 것이다.




 병장 김지민 
 지연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끄응 06-08   

 병장 박동일 
' 인간극장'의 성우분 목소리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06-08   

 상병 구본성 
 오늘은 기분이 좋아~ (하하) 좋네요. 06-09   

 병장 김선목 
 멋지네요. 예전부터 하지연님의 글들을 몇개 봐왔었는데 볼 때마다 참 깨어있고 자기만의 칼라가뚜렷하다고 느껴져 부러운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 글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군요. 
 특히 힘들면'개겨라' 라니..(웃음)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개김의식을 고취시켜주시다니요. 
 병사의 개김은 간부입장에서는 분명 득이 아닌 실이 될것임이 분명함에도. 특히나 어떠한 불합리한 상황일지라도 무조건 복종이 중요시되는 계급사회의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개기라니요." (웃음) 
 하지만 상병때 저였다면 무조건 개기겠지만 100대 깨진순간부터는 무조건 예~예~ 하고 다닌답니다. 몸사려야죠. 

 하하! 지극히 저 혼자만의 왜곡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퍽) 06-09   

 상병 김요한 
 정말. '인간극장'이네요. 06-09   

 상병 김현진 
 저도 참 좋아라 합니다. 개기는 거. 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