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학적이지 못한 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현학적일 수 있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따라서 나는 이 이야기를 예술에 대한 철학적 고찰 혹은 사변적 성찰이라는 수사Rhetoric을 구사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글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며 따라서 사색과 사변이 요구될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 글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예술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렇기때문에 가장 현학적인 문제가 그 속에 응축되어 있다. 삶이란 형이상학에서 고증된 로고스의 논리가 아닌, 베르그송의 말처럼 생의 경험과 기억의 문제도 아닌, 바로 정신의 문제다.  
  
  
  
정신은 많은 철학가들에게 사유의 대상이 되어왔다. 헤겔은 '세계는 정신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관념론에서 정신은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의지'전반으로 압축된다. 근대를 이끌었던 관념론의 '정신'이라는 것은 우주Universe를 지배하는 질서일반을 지칭하고 우주의 원리인 변증법의 에테르Aether인 프시케Psche 그 자체라고 헤겔은 지적한다. 또한 많은 철학자들은 정신을 철학적 에테르가 담겨있는 일반적인 질서원칙이나 사변논리를 뜻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변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이성의 영역 밖에 존재하며 동시에 육체적 주체안에 공존한다. 왜냐면 쇼펜하우어와 베르그송,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지적대로 자아는 시간에게 속박당해 있으며, 그 죽음의 감옥 속에서의 '시간의 현존재'는 결국 정신(세상을 지배하는 일반적 질서원칙이라 하더라도)을 삶 속으로 수렴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신은 아주 냉철하다. 이것은 논리logic와는 아주 다르다. 이 냉철함은 논리학이 가지는 주도면밀함이 아니라, 신념이 가지는 저돌적인 강직함이다. 정신은 원칙과 질서를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가장 '믿을만한'길로 질주할 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거는 '마음'에 두고 있다. 정신은 마음의 상태(혹은 심리라고 불리는)의 데이타베이스에 근거하여 정신적 '믿음'을 구축하고 그 믿음을 따라 냉철하게 사유한다. 즉, 마음은 정신의 고향이고 정신은 마음의 보호자다. 
이점은 로고스 명제가 철학패러다임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절대명제였던 것만큼이나 명백한 정신에 대한 명제다. 철학자들은 정신이라는 단어를 오해하면서 마음의 문제를 철학으로 편제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철학은 예술의 문제를 끝까지 외면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러서는 종교와 진리에 대한 모든 진리는 헛소리라고 칸트처럼 한계를 규정한다. 정신Spirit이라는 단어를 서양에서 얼마나 로고스중심적으로만 사용하였는지는 spirit에 대한 열번째 뜻을 주목해주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주1 : 한컴사전을 참조하라) 원래 spirit이라는 영문의 가장 근본적인 어원이 바로 이 뜻이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지적처럼 유럽문명은 여전히 황금가지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여러분은 본질적 자아에게는 철학적 고찰을 하는 정신이 있다면, 비이성적 혹은 영적 고찰을 하는 마음이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정신이 세상의 로고스를 지배하고, 마음이 감정의 영역을 다스린다는 변증적 관계가 붕괴되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 대한 표현을 우리는 '정신'에서 찾는다. 왜냐면 정신은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은 철학적 진리와 보편-우주적 코스모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숨겨진 진실들이 현현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그 페이소스혹은 파토스를 정신이라 부른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등반에 성공했을때,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 합리성과 스포츠적 트레이닝보다는 '정신력의 승리'에서 찾는다. 돈없고 남루한 복서가 챔피언 벨트를 안게 되었을때도 헝그리 '정신'이라는 말을 즐겨쓴다. 니벨룽겐리트의 복수극을 우리는 정신의 비극(파토스)이라 부른다. 우리가 보라매 번호를 달고 U격훈련을 받을때, 그리고 가스실에 들어갈때 우리는 이성보다는 정신과 정신력을 먼저 찾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언어가 사실 '마음'에 기인하여 심리적 문제와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철학자들의 정신에 대한 지적은 오용에 가까울정도다. 따라서 정신은 형이상학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단지, 형이상학적 고찰을 하는 보편자아의 옆, 즉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정신은 철학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삶'의 쟁점들을 가진다. 왜냐면 정신은 우리에게 실존적 혹은 영적인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던져넣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말 그대로 Philo-Sophia.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들로, 근대 형이상학까지의 서구 철학은 세상에 대한 보편질서를 찾아내는 것에 그 지혜의 '덕'으로 삼았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랬고, 분석철학과 현상학도 세상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그 목적이었다. 칸트의 관념론은 인간 인식에 대한 이해였고 헤겔은 그것을 세계로 확장시켰다. 페미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같은 사상역시 역사와 철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이데올로기적 질서를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결국 철학은 세상을 설명해줄수 있었을지언정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말할수 없는것이니 침묵'해야한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헤겔도 비트겐슈타인도 풀지못하는 정신의 영역이다. 결국 정신은 이성의 세계에 합류할수 없는 사유의 타자로 자리잡고 있는 영원한 손님이다. 그것은 지금의 형이상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삶'의 쟁점들을 가지는 생의 문제는 보편세계와 사회구조 대한 이해와 그 형이상학적 진리를 능가하는 삶의 보편성을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삶의 문제고 철학에 가려진 정신의 비밀이며, 예수가 베드로에게 건네준 천국의 열쇠다. 결국 인간은 살아가야한다는 가장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말할수 없는 것'이기때문에 철학적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해져야한다. 아니, '보여져야'한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수많은 오해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만 남겨두는 작업, 그리고 그 가능성이 바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 - 즉 정신들 - 과 연결하도록 만드는 제반의 '텍스트 필사행위' 이것이 바로 예술이며, 결국 예술은 마음의 약동에 따라 발현되는 정신의 영역인 것이다.  
  
  
  
예술은 철학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철학이라는 말이 엄존한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예술은 그 내용적 면에서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러면서도 일반적 삶의 단면으로 총체를 아우르려는 철학적 (혹은 연역-귀납적) 시도를 병행한다. 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고찰. 이것이 예술철학이다. 하지만 예술의 태생적 비이성성은 예술'철학'마저 예술의 영역으로 섭렵한다. 이것이 곧 문예비평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삶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지어 삶의 양태로서 철학을 말하기도 한다. 예술언어는 철학의 그것처럼 분명하지 않다. 아니 완전히 비어있다. 이것을 몇몇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단절적 관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의 설명처럼 예술언어는 철학언어와는 다르게 완전히 비어있다. 비어있음은 곧 채워질 가능태만을 남겨놓는다. (이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노자도덕경을 참조하라) 언어의 기의를 순수한 가능태만 남겨놓는다는 곧 철학적 언어와 사회적 관계를 완전히 분해한다는 것이다. 즉 예술언어는 철학이 아니기때문에 '말할수 없는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그러므로써 삶에 접근할수 있다. 데리다가 지적하고자 했던 '해체'의 철학적 본질은 이러한 언어에 내재된 언어적 의미관계를 예술언어 혹은 비철학언어로 (즉 말할수 없는 언어를 보여지는 언어로) 해체시키므로써 언어에서 로고스적 사유를 지워놓는 일이었다.  
  
예술언어는 따라서 일상어이자 비일상어며 의미어이자 비의미어이다. 시니피앙은 일상어의 옷을 입고 표상되지만, 시니피에는 '의미의 의미Meaning of Meaning'를 잃어버리면서 무한히 해체된다. 따라서 시니피앙마저 비일상어가 되버리고, 시니피에는 비어있으므로해서 무수한 '의미'가 재생산된다.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예술언어의 특징이고 과학-일상-철학어의 일대일관계와 분명한 논리적 제시관계에서는 정립될수 없는 '말할수 없는 언어'인 것이다. 
  
예술은 말할수 없는 언어를 가지고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여준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다. 말에는 논리적 관계를 가진 '로고스적 소통'의 모범을 보여준다. 대화에는 쟁점이 있고 쟁점의 정과 반을 가지고 합을 향한 토론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 말의 목적은 상대방을 설득, 혹은 더 구체적이고 나은 모색의 방향제시이다. 하지만 보여주기는 그러한 일대일의 쟁점관계를 넘어간다. 보여주기에는 아무런 '시니피에' 즉 쟁점과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서 비로소 일상에서 표상된다. 문예비평에서는 이것, 즉 일상성의 비일상화를 전경의 후경화 즉 '낯설게 하기'라고 부른다. 즉 예술언어는 본질적으로 공시어이며 해체어인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어는 태어날때부터 일상속의 수많은 비일상을 담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술언어가 은유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해체철학의 대안으로 은유인 문학어를 내세우는 이유는 멋스러움을 위해서도 아니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기위해서도 아니고, 작가의 직설적인 목소리를 감추기위해서도 아닌 바로 삶에 중요한, 정신의 문제를 '보여주기' 가장 어울리는 해체어이자 가장 전통적인 언어가 바로 예술언어였기때문이다.  
  
예술언어는 완전히 비어있다. 왜냐면 모든 의미가 다 들어있기때문이다. '사과'라는 시니피앙은 일상적으로 과학적인 하나의 시니피앙을 연상시킬테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자신이 경험한 기억속의 사과를 먼저 떠올린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참조하라) 따라서 독자들 혹은 인격은 그 읽는 수만큼이나 사과라는 시니피앙에 반응하는 시니피에의 의미는 무한하며 잠정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사과'라는 하나의 간단한 언어에서조차도 예술언어는 철학어와 같은 논리적 의미획득을 상실한다.  
그것이 다른 시니피앙과 독립적 텍스트를 구성할때 (예를들면 황금 + 사과라는 두가지 완전한 독립적 텍스트가 공존하여 구성될때) 더욱더 무한히 의미가 확장되며,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언어의 숫자만큼(무한히) 의미는 무정형으로 진행한다. 즉 예술언어로서 사과는 이제 사과라는 표상Emblem만 남게되고 순수한 시니피에는 존재하기 않는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독자적 경험과 '삶의 문제'에 따라서 새로운 시니피에를 형성하고 그 안에 자리잡는다. 무수한 '독자'의 사과시니피앙의 인식으로 인한 무수한 독립적으로 완전한 시니피에가 서로 거미줄처럼 형성된다. 이것은 원형텍스트의 복원이 아니라 사과라는 철학어(혹은 과학어)의 언어적 의미관계가 붕괴되면서 얻게되는 해체적 다원성이다. 예술언어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같이 일상의미이자 비의미고 완전히 비어있는 텍스트이기때문에 이런 무정형으로 진행하는 시니피에의 해체가 가능하다.  
  
예술언어는 위와같이 본질적으로 해체어이다. 그렇다면 예술철학, 즉 문예이론이라는 질서의식은 어디서 가져오는 것일까? 결국 예술철학도 철학이기때문에 로고스적 질서가 필요한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술철학 역시 예술의 하위개념으로 포괄되는 예술의 특성을 고려하면 로고스로 환원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술철학은 데리다가 지적한 것 처럼 예술에 대한 철학적 '예술' 즉 메타언어와 메타비평을 이용한다. 그래서 비평은 철학이 될수 있고, 동시에 예술이 될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다. 데리다의 철학어가 문예비평어로 상정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텍스트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지시적 관계에 의한 논리전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데리다의 언어 혹은 문예비평의 언어는 이런 지시적 관계 대신에 은유적 숨김을 사용한다. (그의 차연이라는 단어 사용 자체에서부터가 패러디Parody에 대한 패러디, 즉 메타패러디이다.) 그러므로써 철학 논리구조자체를 미끄러뜨리고 그 미끄러뜨림으로 인해서 시니피에를 확장으로 이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해체철학의 논조는 어떻게 이끌어가게 되는가? 이것이야 말로 철학보다 문학비평에서 데리다가 더 많이 연구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다. 바로 철학어(논리) + 철학어(논리)의 논리구조 관계가 '언어 + 언어'라는 구조주의적 관계로 치환됨에 따라서 "나는 사람이다 -> 사람은 죽는다 -> 그러므로 나는 죽는다"라는 논리 & 철학적 수사에서 벗어나, "문학은 써먹을수 없다는 것을 써먹는다. 억압하지 않지만 억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라는 다분히 메타적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해체한다. 첫번째 문장은 논리적으로 명백하다. 하지만 두번째 문장은 명백하지 않다. 저 문장은 메타언어다. 동어반복인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해서 텍스트를 은유로 숨겨버리고, 그 안에 시니피에를 비워버린다. 즉,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독자의 경험이 스스로 시니피에를 상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조세희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에게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 하지만 억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는 텍스트는 가장 현실적인 삶의 경험과 감응하는 시니피에 (자신의 경험)에 동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학은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써먹는다'라는 명문장은 나같은 문학도에게도 유효한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왜냐면 그것이 내 삶속에서 절실히 '경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증적 관계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주의 언어적 관계에서 그 비어있는 텍스트에 나의 '삶적 경험의 진리'가 시니피에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해체철학, 예술언어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 
결국 예술철학, 해체적 텍스트는 삶과 정신에 가장 커다랗고 밀접한 관련을 가진 분야이다. 
  
위에서 예술철학, 즉 해체적 언어는 개인적 경험(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시니피에를 뽑아온다고 말했다. 이것으로 이미 정신의 문제가 담겨있는 텍스트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언어 + 언어'에 담긴 완전히 비어있는 시니피에에 대한 개인적 정신을 반영한다고도 앞서 말했다. 따라서 예술철학 자체도 정신이 담겨있는 예술로 치환된다. 메타비평의 메타화. 메타의 메타. 끊임없는 해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서 의미는 점점 해체되고 다원주의 원칙에 따라 개인의 정신에 더욱더 접근해 나간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다시 지적하겠다.) 
  
바르트가 지적한 작가의 임무가 '창작가'가 아닌 '필사자'라는 말도 여기서 신용을 얻는다. 텍스트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들은 전적으로 독자의 '정신'몫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텍스트에 담긴 언어와 언어사이의 관계를 작가의 언어적 백과사전 속에서 베끼기만 하므로써 새로운 시니피에의 공시성을 획득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 그 안에 어떤 특정한 의미를 담아두는 새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면 텍스트의 시니피에를 작가가 만들수 없는 문학언어 본질의 해체성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곧 공통된 혹은 단절된 언어를 구조적으로 엮어서 작품(텍스트)를 만드는 필사자가 된다. 기의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 된다. 여기서 텍스트와 정신의 소통관계가 드러난다. 이부분은 예술철학뿐만이 아니라 예술 자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부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예술을 통한 '철학적이고 정신적 소통'에 대한 면모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가의 '언어적 백과사전'에서 여러 기표(시니피앙)들을 퍼올려 단순히 구조적으로 배열만 해놓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독자와 '게임관계'를 상정한다. 독자와 작가는 서로 '언어적 세계'를 공유하기도 하고 공유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텍스트를 '필사'할때 예술텍스트에 언어를 배치하면서, 자신의 언어적 배경을 숨겨서(은유적으로 - 해체어의 본질이라고 위에서 지적함) 집어넣고 더불어 독자가 어떤 언어적 배경에서 이 텍스트를 읽을 것인지 역시 고려하여 텍스트적 해체로서 비어있는 가능태를 열어놓는다. 롤랑 바르트는 이 관계를 독자와 작가가 서로의 언어적 세계 공유를 놓고 벌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게임관계'로 상정한다. '즐김'과 '즐거움'관계다. 독자는 그런 즐김을 염두하고 텍스트를 작성하고 독자는 그런 텍스트의 언어를 공유하고 비공유하면서 즐긴다. 이것은 해체어가 가지는 가장 본질적인 관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텍스트를 (독자를 위해서) 완전히 비워놓고, 독자는 자신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시니피에로 그 자리를 채우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의 언어적 게임관계에 의해서 독자가 얻게되는 '정신적 반응', 즉 예술철학, 문예비평은 그러므로써 또하나의 예술로서 치환Meta되고 상승한다. 바르트는 이 과정의 대표적인 예술장르로 음악을 꼽고 있다. 
  
음악의 장르에서 있어서 작곡가는 '작가' 즉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연주자는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 즉 비평가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필사자고, 그 필사의 텍스트와 교감을 가지고서도 독자적 입장에서 정신을 표현하는 '연주자'는 단순한 창작자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즉 연주자는 텍스트에 독자(읽는 이의)의 정신(즉 시니피에)을 채워넣어 다시 또다른 텍스트로 치환하여 보여주는 메타예술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연주자는 텍스트의 '해석자'이자 '완성자'인것이다. 문학으로 따지자면 문예비평이 바로 이 텍스트의 '완성자'가 될것이고 음악의 경우는 '연주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를 읽는 모든 독자는 이런 의미에서 텍스트의 완성자가 된다. 그리고 그 완성자가 내놓는 텍스트는 다시 메타예술의 원텍스트가 되어 또다른 독자와 끊임없이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가 되어 해체된다. 비어있는 텍스트로 자신의 정신을 분출할 수 있고, 그것은 다시 비어있는 언어로 치환되어 타자에게 전달된다. 이런 해체성은 정신의 소통의 문제로 이행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바로 해체적 텍스트접근인 예술철학으로 자아와 타자의 정신소통의 방법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소통의 방법 역시 해체적 텍스트인 예술철학의 방식이 '예술화'되어 (메타예술) 표현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끊임없는 메타텍스트로 정신을 소통하는 게임을 '유리알 유희'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옛 글들을 참고하라) 
  
  
  
지금까지 필자는 근대철학, 즉 형이상학이 접근하지 못하는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정신은 삶과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말할수 없어서 침묵해야하는' 영역이기에 예술의 영역에서 '보여졌고', 예술의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예술, 즉 예술에 대한 예술인 메타픽션Meta-fiction, 메타예술Meta-Art과 문예비평에서 그 질서와 관계가 어떻게 비워지고 정신과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물론 이후에 진행해야할 이야기가 많다. 예술 텍스트를 통한 정신의 소통이 필자가 상정한 유리알유희로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해체철학과 문학비평에 있어서 어떤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지 따위의 문제들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글에서 하고자하는 말은 형이상학과 로고스중심주의에서 탈피한 포스트모더니즘-해체철학이 어떻게 '정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정신이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문예이론-예술비평적 접근이었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신'의 양태로 표상되지만,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소통'으로 이행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가져온다. 이에 대해서는 또 이야기할 다음을 기약하는것이 좋을듯 싶다.  
  
끝으로 한마디 부언을 붙이자면, 정신은 마음을 고향으로 두지만, 그 사이에는 '상상력'이라는 다리가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신과 상상력, 마음은 모두 예술을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참조하라) 


- 이 글을 읽는데 도움될만한 책들 -
(혹은 필자가 이 글을 쓸때 생각하고 염두했던 도서목록)


『유리알 유희』, 헤세 
『탈형이상학적 사유』, 하버마스
『20세기 프랑스 철학』  메슈스 (동문선) 
『철학개론』 철학교재편찬위원화  
『서양철학사』S.P 스텀프 (을유문화사) 
『융 심리학 입문』 C.S 홀 (범우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신승환 (살림)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범우사) 
『파이돈』 플라톤 (범우사) 
『방법서설』 데카르트 (범우사) 
『순수이성비판』 칸트 (책세상) 
『철학강요』 헤겔 (을유문화사) 
『수상록』 쇼펜하우어 지음 (범우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민음사) 
『생명과 정신의 형이상학』 베르그송, (서광사)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베르그송, (대우총서) 
『논리, 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서광사)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까치)
『존재와 무』 사르트르 (살림) 
『일반언어학강의』 소쉬르 (민음사) 
『기호학』 연세대학교인문학연구소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동문선) 
『환상과 미메시스』C.흄 (생각의나무) 
『환상』 최기숙 (연세대학교인문학연구소) 
『촛불의 미학』바슐라르 (문예출판사) 
『현대문학이론 개관』 라만 셀던 (한신문화사) 
『러시아 형식주의』, 토도로프 篇 (이대출판부)
『문학개론』 단국대학교출판부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 김영건 (책세상)
『법 없는 길』, 김우창 (민음사) 
『데리다 읽기』 유성원 外 (문지사)
『연금술』 (시공디스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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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언제 썼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아마 데희리석다님과 문학이야기를 하다가 내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려고 쓴 글인데, 다시 보니, 언어선택이 엄청나게 모호한 부분도 많고, 논리 진행도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고, 책 한권도 없이 머리로만 쓰지니 한계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2부작이었는데, 2부는 (아마 제목이 '텍스트의 공시의미를 통한 소통탐색'이었나 어쩌나 했는데) 귀찮아서 안쓰다보니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군요.

아무튼, 말련에 컴퓨터정리하다가 그냥 보이길래......
 
 
 
병장 한유빈 
  괴물.. (후다닥) 03-08   
 
병장 정성우 
  Rage Against The Machine. 
2집 Evil Empire 의 부클렛에 나오는 

"우리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 
이 생각나네요. 
게릴라 전쟁-체 게바라, 사형수의 인생-무미아 아부 자말 
동물농장, 촘스키 독자, 등등등. 
(그 수많은 책중에 4분의 1은 봤었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는 
불상사.) 

[의미불명] 

아무튼 황민우 님의 글을 이제서야 찾아다니며 몇개 보고 있는데, 
깊이가 장난 아니네요. 뭔가 엔터테인먼트에만 치중해서 사는 
저한테는 부러운 영역인걸요. 03-09   
 
병장 황민우 
  제 친구는 만화를 그리지만, 철학에 대해서 저보다 더 빠삭합니다. (웃음) 
엔터테인먼트에 치중하는거랑 깊이랑, 학문적 내공은 전혀 별개랍니다. 03-09   
 
상병 이지훈 
  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전문서적과 비교해 봐도 전혀 손색이 없어요. 
조금 읽어봤지만 넘 어려버서 프린트해서 볼까생각중입니다... 정말 괴물이란 수식어가 어울릴만하네요(후다닥) 03-09   
 
 병장 임정우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거 전에도 읽었던것 같은데 다시보니 새롭고 또 대단하군요. 역시.. 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