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병 조문희 2009-09-23 15:05:20, 조회: 216, 추천:0
영화 '가족의 탄생'과 포스트모더니즘 - 책마을의 가족구성원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라며(아잉)
1. 태초에 가족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공동체, 최후에 기댈 수 있는 곳, 사랑이 가득한 곳, 부모형제가 함께하는 곳 - 이러한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엮여있는 공동체로서의 가족과 그 안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혹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전제된 혈연중심주의, 하나의 주체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발휘하는 집단, 가부장제 등의 사회문화적 양태들을 떠올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하나의 이데올로기화 하여 가족의 이미지를 (스스로) 구성하고, 그 작동방식과 가족에 대한 감수성을 지배해 왔다. 주말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대문자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문학이나 영상예술에서 휴머니즘이라는 탈을 쓰고 등장하는 가족과 가족주의에 감동하는 우리의 초상을 바로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가족의 탄생>에 대해서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손가락질한다. 아직도 부모 중 하나가 없으면 ‘결손가정’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야 직성을 풀리는 그들에게,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들은 그저 이상하게만 보인다. 집 나간 동생은 스무 살은 족히 더 먹은 듯 보이는 여자를 애인이라고 데려오고, 얼마 후 피 한 방울 안 섞인 어린 아이가 자신이 여자의 딸이라며 집에 들어선다. 어떤 엄마는 숱한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에 눈멀어 있고, 똑 소리 나다 못해 까칠한 현실주의자 딸은 그런 엄마가 못마땅해 자꾸만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낸다. 이들은 서로 다투고 부대끼며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과장 없이 조명함으로써 순혈주의와 ‘모범적’ 가족상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가족은 과연 필연적이고 항구적인 주체인가? 그리고 혈연과 가부장제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근원적 구조인가? 푸코식으로 묻는다면, 근대적 가족이 역사적 선험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조건들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이 글을 통해 갈등이 편재하는 관계의 모습이 기존의 완성된 관계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모습을 그려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족이라는 신화를 해체할 것이며, 현실적 힘을 가진 새로운 가족의 등장과 그 변화 가능성을 예감하고자 한다. 또한 그 과정이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의도치 않은' 연관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우리는 <가족의 탄생>이 함의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2. 갈등은 관계를 낳는다.
"It is so easy to see Dysfunction between you and me
………
But nothing lasts forever, but be honest babe
It hurts but it may be the only way"
미국의 모던 락 밴드 Maroon5의 대표곡 'Nothing lasts forever'의 가사이다. "우리 사이의 갈등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죠."라는 말로 시작해서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죠, 하지만 솔직해져요. 그것은 아프겠지만 아마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겠죠."로 끝나는 이 곡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별에 가까운 연인 사이의 불화와 그에 대한 안타까움의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일반적 인간관계로, 혹은 세계의 구성방식으로 확장해서 이해할 때 이 곡은 더 큰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개별자가 보편자로 확장되는 것은 그것의 작동방식이 명료하고 하나의 보편적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낼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것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라는 말처럼, 노래의 암시적 주체와 대상으로서 연인이라는 특수한 관계는 갈등이라는 홈파기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홈파기를 다른 관계의 배치에 적용시킴으로써 보다 더 큰 관점의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을 통하여 우리는 상대방의 요구를 알게 되고, 내가 무얼 원하는지 정확히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요구도 많아지고 커지게 된다. 그리고 그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 서운하고 억울한 심경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심경을 몰라주는 것이 서운하여 막말을 하게 되고 또 저만치 돌아서서 후회를 한다. 이런 종류의 후회는 항상 가깝고 당연한 관계에서 발생 한다. 부모 자식 간에, 형제?남매간에, 혹은 연인들 간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한결같이 "너 나한테 왜 이래?"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처럼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상대에게 애정을 갖고 있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악악대거나 투정을 한다. 때로는 사랑하는 마음과 정반대로 행동하여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고, 또 이별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행동이야말로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내 사랑을 알아 달라"고 칭얼대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족의 탄생>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춘천에서 떡볶이 집을 운영하는 스물아홉의 미라(문소리)와 5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남동생 형철(엄태웅), 그리고 그가 데려온 스무 살 연상녀 오무신(고두심)의 갈등을 담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깐깐한 선경(공효진)과 이 남자 저 남자 품을 전전하는 헤픈 엄마 매자(김혜옥)의 갈등을 선보이고 마지막으로 만나기만하면 티격태격 다투는 연인 경석(봉태규)와 채연(정유미)의 갈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가족의 탄생>에서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불필요한 행위가 아니라, 그것 역시도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인식하면서 방관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이때 "너 나한테 대체 왜 이래?"는, 현재 관계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제스처, 혹은 몸부림과도 같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이별'이라는 파국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는 상대와의 힘겨루기에 지친 나머지, 잠시 곁에서 한걸음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상대에 대한 감정마저 식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안 그런 척 무심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불현듯 툭툭 불거져 나오는 기억 때문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기력하게 허물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변덕"으로 치부하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당연한 마음가짐"으로 여길 때 감동의 진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단지 그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사람을 사랑하고, 그가 남긴 추억을 사랑하고, 그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비록 떠났을지라도 그 사람이 남긴 것과 남겨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 그리고 남겨진 생(生) 위로 흐르는 시간들로 인하여 더욱 각별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는 항상성과 균형이라는 고리, 그것과 반대되는 파편화된 현실의 모습과 갈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제시하며 포용할 뿐이다. 그리고 이 포용으로 인해 드러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단순하고 의도적인 허무주의와는 다른 양상의 해체를 야기한다. 우리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것을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의 탄생>이 관객들에게 전율을 안기는 것은 이렇게 분산된 것과 같은 세 가지 에피소드를 한자리에 불러 모으면서부터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완결성 있는 단편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인과율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보완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면서도 주변상황과 절묘하게 조립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드러나는 <가족의 탄생>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갈등을 겪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인연을 맺게 되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것은 갈등이 양산하는 관계의 "확장"이다. 바로 이 지점이 도식적이고 정형화되어 버린 가족영화와 궤를 달리하는 부분인데, <가족의 탄생>은 이처럼 독특한 캐릭터로 구성된 가족의 갈등과 그리고 그 구성원들에 의해서 관계 맺게 되는 특별한 인연에 대해 정감 있는 어조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변주될 때 우리의 카타르시스는 극에 달하는 것이다.
p.s. 여기서 재밌는 것은, 앞에서 제시했던 모던 락 밴드인 Maroon5의 음악이, 그리고 근대의 산물로서 가족이 내부의 의미체계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그것의 반작용적인 배치를 노래하고 탈주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궤도의 안에서 궤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사이드 아웃사이더'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3. 가족의 해체? 가족의 탄생!
두 시간 가량의 영화가 제시하는 서사를 거치면서,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가족에 대한 환상은 파괴된다. 근대적 가족(혈연 가족 등)의 해체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인간관계, 고리)은 전통적인 계급적 질서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암시하고, 관계는 갈등을 통한 구성원들의 네트워크, 혹은 교차의 구조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족관계는 인간관계에 의해 대체된다. "헤픈 게 나쁜거야?" 라는 채현의 질문에 대해 영화는 다른 장면에서 선경이 경석에게 제시한 대답을 통해 직접적인 대답을 대신한다. 그것은 단지 "정이 많"을 뿐이라고.
그리고 영화 중반에 선경이 어머니가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가서, 그의 가족 앞에서 묻는 질문은 주목할만하다. 선경은 아저씨의 가족 앞에서 "우리 엄마를 정말 사랑"하냐고 묻는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리라 예상한 것처럼, 말문이 막힌 남자에게 그녀는 냉소하고 차갑게 질문한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들에게 예상치 못한 반전을 제시한다. 가족 앞에서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노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즉, 가족에 대한 맹목적 신앙은 전복되고 혹은 죽음을 맞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과 진보에 대한 모더니즘의 신뢰를 거부하기 때문에, 세계는 이해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고 여기에는 잠재적인 통일적 실재가 있다는 식의 의미를 거부한다. 모더니즘은 지식의 이름 아래 세계에 대한 대단히 편향되고 당파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포함하기보다 보다 많은 것을 배제하는 관점으로서 특정한 성차, 계급, 인종 및 문화를 대변한다. 그러나 영화의 특정 장면들이 대표하는 '특이한' 가족과 '특이한' 상황 설정으로 인해 '메타-내러티브'로서 가족의 지위는 허망하게 지워진다.
<가족의 탄생>은 흔하고 익숙한 혈연관계만이 가족의 당위는 아니라고 역설한다. '모범적 가족'상의 알레고리가 지칭하는 총체성과 질서, 그리고 그것의 회복에 대한 믿음이 근대를 지탱해 온 뿌리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러한 향수나 신념이 얼마나 나이브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은 그 질서와 총체성이라는 것이 자칫 어떤 획일적 또는 전체주의적 지배 체제의 허위의식일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헤픈 사람'과 사랑 때문에 가족을 포기하는 '낯선 가장'의 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믿어온 가족의 모습에 작은 파문을 남긴다. 때문에 영화는 혈연적 가족관계에서, 다중적 인간관계로 시선을 돌린다. 이러한 양상은 영화에서 갈등이 편재하는ubiquility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인간 관계는 만남-설레임-열정-갈등-화해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갈등"이 없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갈등이야 말로 관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가장 객관적인 척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더욱 확장된다. 가족의 신화가 단지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면 어떻겠는가? 대문자로서 가족의 자리는 해체되고 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관계의 변화가 존재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이러한 의문을 통해 역사적 유물론의 과거 회귀라는 마르크스 식의 메타담론을 해체하고 남는 갈등의 편재성을 파악해야 한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 원리로서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배치를 유지하고 변화시키는 원리로 갈등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만 우리는 해체와 탈주, 그리고 재구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변화를 통해 우리의 경계에는 탈주의 선이 그어지고, 들뢰즈의 말처럼 탈코드와 재코드화의 무한한 변주를 통해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말미에 우연한 계기로 인해 모이게 된 네 사람이 TV로 합창단의 공연을 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너는 웃어라.”라는 노랫말처럼 가족은 행복감에 젖어 웃기 시작하고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축하하듯, 하늘에선 폭죽이 연방 터진다. 더 이상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가족은 콩가루 가족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족이 된다.
4. 그것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심리적 간극은 감성적 층위에 있어서 매우 탄력적이다. 이들의 대화는 공통된 주제 안에서 부드럽게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만의 입장만을 피력하고 주장하여 갈등과 불화를 예감하는 '불안한' 대화다. 대화의 구심점은 소통의 주체와 대상이 자신에게만 향해 있는 인물들의 성향으로 인해 계속적으로 '미끄러진'다. 때문에 미라와 형철, 미라와 무신, 선경과 매지, 경석과 채현의 대화는 항상 어떠한 완결상태로써 끝나지 않고 불안한 영속성을 지닌 상태로써 이루어진다.
틀어질 듯 보이던 인물들 간의 관계는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하여 화해를 이룬다. 각 인물들은 스스로가 극복하고 변화되어 완결된 화해를 이루는 기존 영화의 캐릭터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켜 돌아오게 하거나 상대방과 타협의 여지를 남겨 놓는 기존의 소통방식도 거부한다. 즉, 이들은 각기 나름의 위치(자리)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각자의 길을 걸으려 할 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인하여 '우연히' 여기서 인물들의 화해의 장은 열리게 된다.
시간은 동등하게 흐르지만, 인물이 서 있는 공간적이고 상황적인 배치에 의해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때문에 인물들이 긋게 되는 삶의 수많은 '선'들은 우연한 기회에 교차하고, 그것으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영화의 플롯을 구성한다. 여기서 영화의 순서 배치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에피소드의 순서는 분명 ① 미라-형철-무신 ② 선경-매자 ③ 경석-채연 의 순서로 되어있으나 영화가 시작되는 것은 ③ -> ② -> ① 순서로 약간의 장면을 노출함으로써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한다. 또 오프닝에 나옴직한 플랫폼 씬을 엔딩 크레딧에 배치함으로써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영화의 주제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결국 미라는 형철이 '우연히' 데려온 한 꼬마아이(채현)을 매개로 무신과 화해를 이룬다. 선경은 바로 자신과 소통을 이루던 대상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을 '우연히' 대면하면서 진정한 '가족의 탄생'을 야기한다. 물론 이 화해 또한 기존 영화에서 나타나는 완결된 형태가 아닌, 앞에서도 이야기했든 불안한 영속성을 지닌 채 맺어진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화해이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화해는 완결된 형태의 화해에서 나타나는 소통의 '끝'이 아닌, 계속적인 소통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진정한 가족의 탄생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도 소통의 끝이 아닌 이제 시작이라는 암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화는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채 끝이 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형철을 내쫓은 뒤 김장하는 장면을 줌아웃하며 영화가 끝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영화는 겨울을 난 뒤의 따뜻한 봄을 준비하는 과정에 서 있는 '김장'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겨울에 김장김치를 담그며 새 해를 맞이하듯, 혈육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 새로운 가족은 이제 탄생했음을 알린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지 예상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열려있고, 가능성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10-21 10:5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10-01-27
13:23:39
상병 민해기
이쿠-
[내글내생각]. [독서후기]
말머리만 붙여주시면 완벽하셨을 텐데(웃음) 2009-09-23
15:29:40
상병 박정민
이 영화 무척 감명깊게 봤었는데요, 엄태웅 보면 정말 한 대 쥐어패고 싶어지고, 여.배우 고두심을 재발견하게 해준 영화였어요. 몇 년지난 영환데도 글 정말 잘 쓰셨네요. 영화잡지에 칼럼인 줄.. 잘 봤습니다. 2009-09-23
19:24:53
병장 김형조
숱한 이들이 06년 최고의 한국영화로 꼽던 작품이죠.
님의 명문을 보니 당시에 꽤 흥미롭게 봤던 이 작품의 몇몇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2009-09-23
20:18:14
상병 홍명교
이 영화 정말 좋아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이 정말 탁월했죠.
정유미와 고두심도 매우 인상적이었고... 2009-09-24
00:41:23
병장 곽대희
저도 이 영화 좋아합니다, 저에게는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이었죠.
공효진의 에피소드가 가장 맘에 와닿았어요.
엄마와의 갈등이나 연인(류승범이 연인 역할이었죠)과 헤어지는 장면이 아리고 좋았지요. 2009-09-24
13:14:57
상병 김강현
보지못한 영화인데, 안보면 안될것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훗훗
복잡한 관계들과 현실적이면서도 방관적인 스토리전개가 뭐랄까, 심오한 만큼이나 자칫 위험하단 생각이 들게 해주네요.
뭉툭한 연필 위에 지우개를 올려놓은 마냥 불안해보이는, 허무주의로 쉽사리 빠질것만같은.. 그리고, 좀더 비판적으로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을 빙자한 탈도덕현상의 합리화라든지..
과학사측면이 아닌 인문사회학적인 측면에서의 이런 가족해체와 탄생의 모습들은 과거 부요했던 로마시대때나 그외 다른 사회들에서도 볼수 있었다라고 생각되어져요.
사람의 비도덕함과 죄의식을 인간애적인 측면에서 보도록 낭만화시키기보단,
거울을 보듯 그것과 담담하게 마주할수 있도록 하는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해석할수 있는 장치가 있었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마치 봤다는 양...-웃음)
이 위험한 판단여부를 독자에게 남긴다는게 아무래도 좀 위험해보이는건.. 제 오지랍이자 교만함일까요? 2009-09-25
00:04:23
상병 김민정
이 영화 덕분에 김태용 감독의 엄청난 팬이 되었죠 0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잠깐 뵈었는데, 당시에 가족의 탄생 덕분에 감독 인지도가 엄청 높아져서, 저의 대담함이 아녔으면 같이 잠깐 차 한 잔도 못했을 뻔 했지요.
영화는 물론 지금도 DVD로 가지고 가끔 보는 편입니다.
다른건 모르겠지만 채연의 캐릭터는 정말 이해가 안되지요. 봉태규 분의 남자 뿐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화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지 않나요? 정말 착해서 바보라는 말 그대로를 볼 수 있는데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가족의 구조가 우리 사회에 받아들여지면, 그런 덕목을 지닌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겠다는 김태용 감독의 작은 바람이 아닌가 짚어봅니다.
실제로 감독을 보았을때엔 그런 부분에 관한 질문은 못했어요. 어떤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무슨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물어보느라 바빠서요 히히. 2009-09-28
18:32:07
일병 조문희
다시 읽어보고는 아무래도 씁쓸한 것이,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썼다는 느낌이 드네요. 진정성이 없는 글, 부끄럽습니다. 과연 제가 이 글을 쓸 때 말놀이를 하고자 했던지 아니면 저 나름의 주제의식을 형상화했던지 자문해봅니다. 2009-11-09
20:4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