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314씨, XXX씨를 만나다.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8-10-14 14:14:30, 조회: 324, 추천:1 

그냥 쓴건데...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수습이 안되는군요.



29살,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듯한 녀석들에겐 늙은이로 보일테지만, 아직 한창 일하고 계시는 분들이 보기엔 이제야 세상을 알아가는 나이, 애매한 20대의 마지막에, 난 작은 꽃집을 하고 있다. 꽃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으면 하루하루가 보람찼을지도 모르지만, 난 정말 어쩌다 보니 꽃집을 하고 있었고 장미나 프리지아 정도가 아니면 아직도 내가 파는 꽃 이름조차 잘 모를 정도로 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딱히 열정도 즐거움도 없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나날들. 나를 지켜주는 사람도, 내가 지킬 사람도 없는,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고 있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꽃 파시나요? 파란건데."
언제나와 같은 지루한 오후는 그 한마디로 끝이났다.
갑자기 어디선가 돋아난 것처럼 눈 앞에 나타난 여자가 정말 정말 못그린 그림을 내밀며 물었다. 사실 내 눈으로는 저게 꽃인지 자동차인지 구분이 안된다.
"없어요,"
사실이다. 내가 비록 내 꽃집에 무슨 무슨 꽃이 있는 지 외우지도 못하는 주인인 게 사실이지만 나도 제대로 된 미적감각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저렇게 괴상하게 생긴 꽃을 들여놓을리가 없다. 혹시나,
"그 꽃, 금이라도 열리나요?"
이런 실질적인 장점이 있다면 들여놨을 수도 있지만.
"아뇨, 그럴리가요. XXX씨죠?"
내 시덥잖은 농담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우리 구면인가요?"
"아뇨,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생명청 잔여수명회수과에서 나온 저승사자 314입니다."
뭐야 이건, 몰래카메라? 미친여자?
"당황하시는 게 당연해요, 저희는 보통 이렇게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테니, 차라도 한 잔 주시지 않겠어요?"
이쯤 되면 미쳐도 아주 뻔뻔하게 미친거다. 튀어나오려는 욕을 간신히 누르면서 최대한 친절하게 거절할 방법을 고민한다. 이게 만약 몰래카메라라면 버럭버럭 욕을 하는 모습이 TV에 나오게 할 수는 없다.
"관심 없으니까, 가주세요."
정말 내 모든 인내심을 써서 간신히 만들어낸 말이었다. 저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는 수십단어의 욕을 잘라먹어야 했다.
"아, 믿지 않는건가요? 역시 요즘 사람들은 의심이 너무 많아요."
---------!
갑자기 귓가가 울린다 싶더니 세상이 회색으로 물든다. 건물도 사람도 꽃도 나무도 이상하게 휘어진다.
"이게 무---?"
내 목소리가 이랬나? 늘어진 테이프를 재생하는 소리가 난다.
"빛이랑 시간을 좀 비틀었어요. 평소에 당신이 알던 세상과는 다를 거에요."
도망가려하는데 내 몸이 이상하다. 왼쪽 다리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오른팔은 내 생각보다 몇 배는 빠르게 움직인다. 결국 공중에서 허우적 거리는 자세가 됐다. 이 혼란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파고든다.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요즘 사람들은 왜 이런 힘을 보여줘야만 믿는거죠? 예전에는 내 얼굴만 봐도 내가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아봤는데 사람의 영감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 같아요."
목 뒷쪽에서 불꽃이 튀기는 느낌이 나더니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긋난 몸의 중심을 넘어지기 전에 간신히 되잡는다.
"어때요, 이제 믿겠어요?"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커피잔을, 그녀는 녹차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제가 XXX씨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한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에요."
"제안이요?"
내 앞에 앉아서 녹차를 후후 불어가며 홀짝이는 여자가 인간이 아니라 저승사자 314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자각하며 조심스레 되묻는다.
"혹시 지금 죽을 생각 없으세요? 아뇨, 꼭 지금이 아니라 내일이나 모레라도 괜찮아요."
복잡한 말이 아니었지만 그 내용의 난감함 때문에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난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 여자는 나를 죽일 생각이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지금 도망가면 살 수 있을까? 내 이름까지 알고 온 저승사자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디로 도망쳐야하지?
"아,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네요. 설명을 하자면 조금 복잡한 데 괜찮으시겠어요?"
겁에 질린 나의 표정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우리는 저쪽세상의 공무원 같은 존재에요. 314라는 명칭도 직장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호칭일 뿐이죠.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온갖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가 일하는 생명청은 온 생명들을 관리하는 곳이에요." 
그녀의 말은 사실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직 내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그리고 혹시나 이게 꿈은 아닐까 하는 무가치한 희망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 것에는 크게 세가지 경우가 있어요. 첫째는 자신의 수명을 모두 누리고 죽는 것, 둘째는 수명이 다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저희같은 생명청이 관여하는 경우죠, 그리고 도망가도 소용 없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차피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저쪽에서 평화롭게 대화로 나오는데 내가 굳이 힘대결로 몰고 갈 필요는 없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대화를 하자.
"그렇다면 첫번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는건가요?"
"아뇨, 수명은 보장되요. 다만 수명의 개념이 보통 살아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죠."
"어떻게 다른가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이 대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모든 개개인은 태어날 때 수명이 정해져요. 그리고 자신의 수명을 다 쓰지 못하고 죽은 경우에는 남은 수명만큼 저쪽 세계에서 생활할 수 있죠. 사후세계라고 하나요? 물론 저쪽에서 살고싶지 않은 경우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수명을 포기할 수 있어요. 아, 그리고 자살한 경우에는 사후세계가 적용되지 않아요."
여자의 설명은 불친절했다. 자신은 어린아이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왜? 하며 질문하는 것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생명청에서 사람의 죽음에 개입하는 처부는 세 군데에요. 사고 및 재난과, 질병과, 그리고 저희 잔여수명회수과. 사고나 재난,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남은 수명만큼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요. 일정 이상의 능력이 있다면 생명청이나 다른 처부에서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죠. 근로환경이나 복지수준 모두 이곳과는 비교도 안되고요."
"잠깐만요, 당신은 잔여수명회수과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난 죽어도 사후세계를 누릴 수 없는 건가요?"
"음, 조금 더 설명을 해야겠네요. 일단 사후세계를 통해서 자신의 수명을 모두 사용한 생명은 '거대한 생명'으로 통합 흡수돼요, 그리고 그 후에 일정한 절차를 통해 '거대한 생명'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만들어지죠. 그리고 그 생명들이 갖게되는 수명이 자살한 사람들의 잔여수명과, 우리 잔여수명회수과에서 회수한 수명, 그리고 저쪽 세계에서 남은 수명을 포기한 자들의 수명이에요."
"그럼 내가 자살하는 거랑 다른 게 뭐죠?"
"상당한 이익이 있어요. 우선 당신이 나의 제안에 따르게 되면 행복한 꿈을 꾸게 될 거에요. 당신은 절대로 꿈이라는 걸 모를테고, 그 꿈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어요. 당신 자신도 몰랐던 완벽한 만족을 얻은 후에 더이상 바랄 것이 없어진 당신은 스스로 생명을 놓게 되는거죠. 더이상 여한이 없다고 하죠, 그런 상황이 되는거에요. 우리는 그걸 만족사라고 불러요. 그리고 당신은 사후에 '거대한 생명'에 통합 된 후 최우선순위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어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날 거라는 건 보장드릴 수 있군요."
이 무료한 세상을 최대한 행복하게 마무리짓고 다음 생에 풍요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끌리는 면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새 죽음에 대한 인식도, 두려움도 상당히 변해버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도대체 왜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거죠?"
"예전에는 이렇게 저승사자들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제안 할 필요가 없었어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거둬들이는 수명과 다시 내보내는 수명이 비슷하게 돌아갔거든요. 하지만 요즘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너무 오래살기 시작했어요. 최근 몇십년 사이에 사람들 이쪽 세계에서 사용하는 수명이 너무 길어져서 내보내야 하는 수명보다 거둬들이는 수명이 너무 적어지게 된거죠."
"그래서 저승사자들이 이렇게 직접 찾아다니면서 제안을 하고 다니는 건가요?"
"네, 맞아요. 어쨌건 우리는 이 세상의 균형을 맞춰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제 슬슬 제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나가는데, 어떤가요? 만족사 하시겠어요?"
사실 나의 삶은 무료했다. 크게 부유하지도 않은 생활, 지루한 나날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스트레스 가득한 삶.
"당신이 만족사를 택한다면 당신의 수명은 당신의 후손들을 위해 쓰이게 될 거에요."
그래,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인류를 위한 일이다. 내가 희생하지 않으면 우리 인류의 후손들의 기본적인 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참고로 말씀드리는 건데 저승사자가 한 인간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일생에 단 한번 뿐입니다. 당신은 이제 다른 저승사자는 만날 수 없어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 하지? 그래도 죽음인데? 하지만 고통스럽지도 않고, 다음 생애까지 보장되는 경우가 흔한가? 계산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하지?
"결정하셨으면 이 서류에 서명해주세요."
저승사자가 맑은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하하핫, 역시 대단하구만! 도대체 비결이 뭔가?"
"우선 무료하게 사는 인간을 찾는 게 중요해, 일단 상대방의 직업과 관련된 주제로 접근해서 경계심을 없애야 하지. 그리고 행복하고 부유한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흔들리게 되어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희생이라고 조금만 띄워주면 다 넘어온다니까?"
이번달에도 뛰어난 실적으로 우수영업사원에 선정된 저승사자 314가 동료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설명해주며 동료들의 부러움에 찬 눈빛을 즐기고 있었다.


덧. 연재로 넘어오면서 제목 바꿨습니다(땀)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3:52 

 

병장 노요셉 
  오호라 구미가 당기는 주제로군요 흐흐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의 문장중 자동차인지 꽃인지 모를 그 그림은 
대체 어떻게 생긴 그림일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는.. 2008-10-14
14:18:48
  

 

병장 정병훈 
  그냥 쓰는데 잘 쓰시네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와 느낌이 비슷하네요. 

뭐... 잘 쓰는 사람은 잘 쓰는데로 못쓰는 사람은 못 쓰는 대로 살아가는거죠 히히 
좋은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눅들면 않되는데 마음을 추스리는게 쉽지 않네요 하하 
재밌게 잘~ 봤습니다!(웃음) 2008-10-14
14:29:31
  

 

병장 황인준 
  후훗. 이미 포기하고 글 잘쓰시는 분들의 글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답니다. 
덕분에 잘 살고 있어요(웃음 웃음). 

이 글을 읽고 나니 생뚱맞게 삶의 무게 라는 단어가 생각나네요. 
저울에 내 삶의 무게와 저승사자 314가 제시한 것의 무게를 재면 어떤게 더 나갈런지... 2008-10-14
15:07:32
  

 

상병 김무준 
  질량보존의 법칙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읽은 사신 치바라는 일본소설도 기억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10-14
16:05:21
  

 

일병 송기화 
  예상치 못한 칭찬에 얼굴이 빨개집니다(땀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흐뭇) 2008-10-14
16:17:05
  

 

병장 이동석 
  하하하하, 이거 죽입니다. 
기화님, 이거 제가 영화로 만들어도...(퍽) 2008-10-14
18:58:32
 

 

병장 신지훈 
  우하하하하!! 즐겁게 읽었네요. 이런거.. <가지로>해도 될까요..(웃음) 2008-10-15
06:51:59
  

 

상병 김민규 
  생명청에서 사람의 죽음에 개입하는 처부는 세 군데에요. <처부>에서 왠지 웃음이 나온건 저 뿐인가요? 하하하 2008-10-15
10:26:11
  

 

병장 김태형 
  즐거운 글이군요. 

배경도 흥미롭구요 핫핫, 2008-10-17
07:46:57
  

 

병장 전상우 
  맨날 보고만 지나쳤는데, 
댓글 남겨보는 건 또 처음이네요,, 
정말 신선합니다. 하하 . 감탄이 절로.. 
대단하십니다. 2008-10-17
17:5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