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패션에 관한 잡답 - 마지막
상병 김무준 2008-10-20 23:50:18, 조회: 508, 추천:0
이번달은 책 읽느라 바쁘군요. [GQ] 이충걸 편집장의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를 읽고 있습니다. 곧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색채 심리], [붉은 색의 베르사체, 회색의 아르마니], 채한석의 [Mes's style guide book]도 읽어야 하는데다... [눈 먼 자들의 도시], [서울 동굴 가이드]는 물론 [설득의 심리학 2], [재상] 도 후다닥 읽어야하네요. 이거... 하루 한 권 읽어야 이번 달 안에 소화가 가능한데... 목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는 글쟁이입니다. 이번 달 [Esquire]도 절반도 채 못본데다, [GQ]는 손도 못 댔군요. 스크랩은 언제하고... 영어공부에 스페인어 공부에 디자인 공부에 색채학 공부는 또 언제할지...
무튼 여러가지 이유로 손가락 놀리기를 잠시 중단하겠습니다. 할 일이 좀 많거든요. 글은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다녀온 휴가 이야기입니다. 늘 그렇듯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목감기가 유행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변화
-9박 10일은 깁니다.
휴가를 나가 제일 먼저 안성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출발 전 공중전화에서 잽싸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 집으로 가려면 대학교 캠퍼스를 지나 학생마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길이란 게 군복입고 가기엔 몹시 부담스럽습니다. 빤질빤질 구두에 광을 내고 전투복에 스킨, 방향제를 떡칠해 다리고 또 다려도 전투모에 아무리 각을 잡아도 아직 저는 군복이 부끄럽습니다. 군인이란 사실이 부끄럽다기보다는 의복 자체가 부끄럽다는 거지만 어쨌든 제 학교도 아닌 곳에 불쑥 군인이 출현해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 또래의 학생들에게는 군대라는 현실을, 제 형님뻘 학생들에게는 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체가 될 테니까요.) 자다 깬 목소리의 친구를 기어코 학교 정문으로 불러냈습니다.
아. 이 친구. 자기 말처럼 10년 지기다운 걸까요. 지난 휴가 때 싸놓고 튀었던 옷을 그대로 들고 오셨습니다. 거기다 친절히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글쟁이를 안내합니다. ‘갈아입어.’ 친구에겐 마음속으로 패션을 부르짖는 글쟁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렸었나봅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께 거듭 사과를 드리고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부끄러워라. 9월 말의 날씨에 하얀 슬리브리스 톱에 물 빠진 검은색 후디 베스트를 걸쳤습니다. 검은 청바지에… 포인트는 무려 흰 바탕에 검은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고등학교 실내화 풍의 신발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추정)의 캡이었습니다. 거기다 캡 안쪽 천은 명도 높은 주황색. 안경다리는 체스 판을 연상케 하는 흑백 타일무늬였습니다. 친구 늘 그렇듯 상당히 난감했을 겁니다.
하루를 친구 집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라지만 오후 1시. 게으른 글쟁이에게는 아침입니다.) 서울로 향했습니다. 밤에 잘 때 살짝 추웠던 지라 친구 옷을 뺏어 입었습니다. 빨간색 체크셔츠가 절 유혹하기에 냉큼 집어입고 늘 그렇듯 잽싸게 튀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압구정 갤러리아를 가겠다고 큰마음을 먹었습니다. 부산 촌놈에게는 참 힘든 선택이었습니다. 지하철 압구정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탑니다. 마치 한 마리 늑대라도 된 양 쓸쓸히 담배 한대를 물고서 택시를 멋지게 택시를 잡고서 외쳤습니다. ‘압구정 갤러리아요.’ 기사님 친절히 말씀하셨습니다. ‘반대편에서 타세요. 차돌리기 어려워요.’ 글쟁이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봅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쿨 하게 말합니다. ‘괜찮아요. 차 돌려서 가주세요.’ 분명 기사님은 보셨을 겁니다. 달아오른 제 얼굴을.
차가 제법 밀리더군요. 돌아올 때는 꼭 걸어서 오리라 다짐하며 열심히 주변 건물을 머릿속으로 스케치했습니다. 차는 쭉쭉쭉 갤러리아 백화점(추정)을 지나쳐 계속 가더군요. ‘응? 이게 아닌데?’ 때마침 기사님이 물어봐 주셨습니다. ‘어디까지 가나요. 더 갈까요?’ 글쟁이는 다시 한 번 쿨 하게 썩은 미소를 날리며 말했습니다. ‘이쯤에 내려주세요.’ 택시에서 내려 기사님이 사라질 때 까지 자리에 서서 담배를 폈습니다. 멋지게 내려서 길 헤매면 좀 그렇잖아요.
순서는 기억나질 않지만 여러 매장을 열심히 쏘다녔습니다. 08 F/W 시즌 아이템들이 많더군요.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아우터 종류가 많았습니다. 피코트와 트렌치코트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특별한 감상은 없었습니다. 다만 잡지에서 떠들어대던 맥시멀리즘이니 남성복의 여성화니 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프레타 포르테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냥 무난한 느낌이었습니다. 프라다만 제외하면요. 그 실험정신, 어쩌면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 미적 감각에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지만 저보고 입으라면 사양하고 싶더군요. 대체 누구보고 셔츠 등 뒤의 단추를 잠가 달라는 건지.
그렇게 걷고 걸어 압구정 유니클로에 도착했습니다. 지하 1층 남성 매장을 둘러봤습니다. S-000 스키니 라인과 S-001 슬림 스트레이트 라인 사이에서 고민하다, 주제에 무슨 스키니 냐며 S-001 워싱이 보일듯 말듯하게 된 검은색 바지를 골랐습니다. 절대 지름신이 왕림하셨다 거나, 게시판에서 가격대 만족이 최고라기에 솔깃해서 사본 건 아닙니다. 친구네 샴 고양이가 제 다리에 털로 도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플란넬 체크 셔츠와 그 유명한 S-001 진을 골랐습니다. 붉은색 셔츠와 흰색 셔츠 중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한 끝에 흰색 셔츠를 골랐습니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과 회색으로 체크무늬가 들어가 있고, 연한 초록색 선이 중심을 잡아주는 플란넬 체크 셔츠였습니다. 패턴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연한 회색의 느낌이더군요. 약간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을 좋아하기에 골랐습니다. 피팅룸에 들어가 바지를 갈아입었습니다. 이거, 잘 팔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지가 딱 맞았습니다. 원래 몸에 붙는 옷을 싫어하는 편인데 큰 거부감 없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무릎이 심하게 잘 늘어나더군요. 휴가 한번용이랄까…
그리고 홍대로 향했습니다. 아가씨와의 데이트(오오!)가 있었거든요. 여기저기 자주 가던 매장을 쏘다녔습니다. 글쎄요. 대세는 후디 랄까요? 후드 홀릭인 글쟁이가 진지하게 스타일을 바꿀 고민을 할 정도로 어둠을 사랑하는 분들이 늘어났습니다. 테크토닉을 사랑하는 클러버들은 살짝 움찔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다른 트렌드가 몰려올 것 같습니다. 글쟁이의 육감이랄까요. 근데 그게 무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글쟁이에게 손짓하는 후디의 손길을 뿌리쳤습니다. 다행히도(!) 유니크한 아이템은 건지질 못했습니다. 열릴 듯 말듯 지갑을 깨작이다 아쉬운 마음에 상상마당에 가서 이탈리아 지도만 사왔습니다. 나름 정신 차리자는 생각에서…
이번 달 Arena를 사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카이아크만에서 광고책자를 끼워 넣었습니다. 3이라는 숫자를 앞세워 3차 성징. 즉 심리적 성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상당히 흥미롭게 봤습니다. 메트로 섹슈얼을 넘어서, 남자는 여자처럼 여자는 남자처럼 느껴지는 스타일링을 제시했습니다. 창조랄까요. 아니면 폐퇴랄까요. 그 판단은 대중이 내릴 겁니다. 상당히 참신하긴 하더군요. 평소에 하고 싶었던 히잡(얼굴을 가리기 위해 하는 검은 천)같은 액세서리는 충분히 시도해 볼 만 했습니다. 물론 실험정신에 가득 찬 글쟁이가 작년 겨울 쯤 시도했다가 친구들한테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신비주의 컨셉으로 평생 신비 속에 살도록 만들어줄까?’ 라더군요. 아름다운 친구들.
장근석도 화장을 하고, TOP도 화장을 합니다. 영화는 영화다의 시사회(?)에서 소지섭의 상대배우(죄송합니다. 관심이 없어서 이름을 모릅니다.)는 당당히 프라다의 수트를 입고 나왔더군요. 2중 칼라를 목에 걸치고서. 설마 저 옷을 입을 수 있는 남자가 대한민국에 있을 줄이야. 저 옷을 입을 수 있는 정신이 안드로메다와 프라다의 정신세계가 아닌 곳에도 존재했구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미니홈피를 통해 당당히 게이임을 밝혔답니다. 친구가 그 남성분의 미니홈피와 사진을 보여주더군요. 사지 멀쩡해 보이고 얼굴은 더더욱 멀쩡해 보였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만큼은 평범하지가 않더군요. 글쟁이는 개인의 성적 취향에는 무척이나 관대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홍석천이 진행하는 커밍아웃 프로그램이 케이블 TV에 나옵니다. 출연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울며, 망설이며, 두려워하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슬프지만,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제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멋진 남자라고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선택과 고백에 후회가 없기를 속으로 자그맣게 빌었습니다.
패션, 직업,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꾸미고 여자가 남자처럼 멋을 부리는 세상입니다. 기업조차도 당당히 유니섹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상 고객층의 확장을 위해서? 돈이 되니까? 트렌드라서? 제가 기업하는 입장이 아니니 그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겠군요. 해골만 복잡해지니까요.
어쩌면 글쟁이의 육감이라는 게 그런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양성의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패션에 있어서는 좀 더 심한 것 같군요. 프라다 뿐 만 아니라, 제법 유명한 브랜드(기억 나질 않기에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에서도 드레스처럼 등 부분의 단추를 잠그는 셔츠를 내놓았더군요. 하이패션을 주도하는 슈퍼 피플 들이니 정말 흐름이 바뀌어 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글쟁이는 소인배인가 봅니다. 다가올 변화가 두려운 걸 보면…….
22.83.38.70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10:40
상병 홍승표
5.20.1.64 105게시판에서 본 글인데 다시봐도 너무나 잘쓰신거 같습니다...
패션에 문외한이였던 제가 조금이나마 패션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가 될수 있어서 좋았는데 폐쇄되서 아쉽기만 하네요.... 2008-10-21
02:36:34
상병 양순호
18.17.54.125 이번것은 좀 붙는 맛이 있어서 보기에 좋았는데 마지막이라뇨.
다음은 없는건가요. 질문 받아서 답해주시는 외전격이라거나. (끙) 2008-10-21
05:39:01
병장 박장욱
56.3.1.253 우리나라의 패션 리사이클 순환 주기는 엄청 짧은편인데...
그에 비해 테크토닉이라는 유행이 지금 오래가긴 했죠...
뭔가가 올때가 되긴 榮쨉 웬지 제 코드랑 좀 맞아 떨어지면 좋은거고 아님 아닌거죠... 2008-10-21
07:38:55
상병 이우중
16.32.7.127 벌써 마지막이군요. 아쉽습니다.
겨울이면 어머니 무스탕에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저같은 패션 테러리스트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 글이었는데.. 2008-10-21
07:56:54
상병 이우중
16.32.7.127 참,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 재밌습니다!! 2008-10-21
07:57:10
병장 황인준
52.1.8.188 허걱 왜 마지막인가요. 흐윽. 정말 잘 읽고 있는 데 말이죠.
원래 패션에 관해서 별 신경 안 쓰다가 군대에 와서
옷 잘 입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그런 점에서 다음이 나오길 바랄게요. 흐윽. 2008-10-21
08:45:24
상병 고재형
18.34.51.123 서울 동굴 가이드 저도 추천입니다.
105에서 보던 글 인데. 역시나 신선하네요.
스페인어 공부는 왜 하시는지 괜히 궁금합니다.
아, 그리고 후디가 뭐죠?... 2008-10-21
12:06:32
상병 김무준
22.83.38.99 흠... 질문 하실분이 많으실거라는 생각은 하질 않는데,
뭐 일단 질문은 쪽지로 받겠습니다. 궁금한것 물어봐 주시면 10월 26일까지 글로 올리겠습니다. 스페인어 공부는 일단 영어와 같은 라틴계열이기 때문에 하고 있고, 예전에 포르투갈 어를 조금 한 적이 있어 배우는 것이 쉬울 것 같아 택했습니다. 아메리카 문화권에서 위 세 언어만 할 줄 알아도 굶어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전역 후에는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생각이고... 여유가 된다면 프랑스어도 해 볼 생각입니다.
후디는 그냥 후드가 달린 옷을 통틀어 칭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2008-10-21
12:22:31
병장 이동석
40.6.1.206 쪽지는 수시로 날라가는수가 있긴 합니다만,
마지막이라니 아쉽군요. 시즌 2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성의 경계는 이제 깨질때도 된듯합니다. 아마 백년은 이른 전망일테지만, 2008-10-21
20:5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