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패션에 관한 잡담 - 3  
상병 김무준   2008-10-13 15:02:35, 조회: 581, 추천:1 

수트를 입지 않는 이유

-어디까지나 본인의 경우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상적으로 중학교에 가는 대부분의 소년들은 굉장히 큰 변화를 겪습니다. 입학하기 전 너도나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교복사라는 곳에 갑니다. 설렘 반 귀찮음 반으로 입학할 중학교의 교복을 맞추려는 이유죠. 어릴 때부터 맞춤복을 입는 집이 입지 않는 집보다 굉장히 적다는 것은 주변을 둘러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금전적인 탓일 수도 있고 문화적인 탓일 수도 있겠죠. 그 까닭이 어찌되었건, 대부분의 소년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며 맞춤복을 입게 됩니다. 성장의 변화를 고려한 조금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인지라 딱히 맞춤복이라 하기는 그렇겠지만요.

교복을 입는 것의 의미는 굉장한 변화입니다. 스스로 옷을 입어온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을, 교복 입는데 고스란히 ‘바쳐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옷장을 뒤지는 일은 사라지고, 옷걸이에 걸린 교복을 제일 먼저 입습니다. 보통의 성장과정을 거친다면, 소년은 청년이 되면서 자그마치 6년 동안이나 교복이라는 맞춤복을 입고 생활하게 되죠. 처음 교복을 입던 설렘은 일상이 되고, 일상의 반복은 짜증이 되고, 짜증은 귀찮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부모님이 전날 밤에 깨끗이 다려놓았건 말건, 재킷의 얼룩이 깔끔하게 드라이돼있건 말건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기에 입고, 등교하고, 하교해 옷을 벗는 반복적인 일이 계속됩니다.

그 과정에서 멋을 아는 소년들은 다른 소년들과의 차별화를 꾀합니다. 자로 잰 듯 다들 똑같으니까요. 학생부 주임선생님의 눈을 피해 교묘히 재킷의 허리와 소매를 줄이고, 와이셔츠의 밑단을 잘라내며, 바지의 폭을 줄입니다. 어른들은 그런 소년들을 ‘날라리’라 손가락질 할지 몰라도, 소년들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남들과 다르게 주목받기를 원합니다. 선생님들은 소년들을 용납할 수 없죠. 소년들은 솟아오르는 생존본능(학주를 피해 다닐 수 있는 센서는 기본)과 함께 다가오는 위협(수업시간에 찾아오는 일괄단속)을 피해 정글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사냥꾼에게 잡힌다면 소중한 머리에 약간의 홈(흠이 아닙니다. 홈입니다. 네모난…)이 생겨난다거나 모피가 늘어나는 마법(부모님 소환이라는 협박인 경우가 많죠.)을 부려야만 하니까요.

몇 년이라는 성장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교복에 대한 반감은 수트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트는 그 미가 정형미기 때문에 클래식이라 일컬어 질 만큼 완벽한 옷이고, 손을 댈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적죠. 극도로 절제된 미라 할까요. 우리는 지난 6년의 ‘반복 학습’에 의해 본능적으로 그 절제미를 거부합니다. 지겹도록 교복을 입어오다 이제 자유를 마주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누가 수트를 입겠습니까. 수트를 입는 때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거의 한정되고, 기회가 더 있다면 경조사가 있을 때뿐이죠. 그나마도 검은색 수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릅니다. 청년은 먹고 살 처지를 걱정하게 될 나이가 되었습니다. 덜컥 취직이 되고 나면 부랴부랴 수트를 찾지만 누구도 수트를 입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도 배우려 하지 않았고요. 옷장을 열어보아도 수트라고는 경조사용으로 모셔둔 검은색 수트 한 벌 정도. 무엇을 사야할지, 어떻게 입어야할지, 얼마를 투자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첫 출근에 블레이저를 입을 수도 없죠. 난감한 상황. 그렇다고 수트를 사자니 본건 있어서 제대로 된 수트를 사고 싶은데 아는 수트 라고는 알만 한 사람은 안다는 아르마니, 한때 반짝했던 장광효 카루소 정도. 디자이너 브랜드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뭘 사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덜컥 매장으로 향하기엔 터무니없는 액수에, 바닥을 기는 통장 잔고만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어디까지나 보통 대한민국 남자가 수트를 입기까지의 (처절한) 생애를 간단히 이야기해봤습니다. 공감하시나요? Arena라는 잡지를 보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독자들을 Black Color Workers라 칭하며 각종 스타일링을 제시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잡지를 사 볼 정도의 여유를 가진 이들을 고려한 것이겠죠. 멋 내기를 배우려는 이들을 위한 배려는 별로 없습니다. 수트 스타일링에 대한 지면은 턱없이 부족한데 각종 구두와 수트, 패션화보를 늘어놓고 ‘이렇게 입어 봅시다!’를 외칩니다. 알만 한 사람은 알거라 이겁니다. 네. 우리도 그렇게 입고 싶습니다. 근데 입을 줄을 알아야죠.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 유럽의 남자들을 보면 한마디로 ‘작살나게’ 수트를 잘 입습니다. 포켓 치프나 타이 심지어는 양말로 깜짝 놀랄 포인트를 주는 것은 기본이요, 수트의 색과 구두의 조합 등을 보면 부럽기만 합니다.

수트를 입지 않는 이유는 입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입니다. 수트를 입는 법을 누군가에게 배운 적은 한 번도 없고, 영감님처럼 몇 벌 씩 수트를 사면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멋 내기 학습을 할 수도 없습니다. 클래식 스타일을 고수하기에는 노력과 함께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니까요. 제대로 된 구두만 해도 몇 십 만원은 퍼부어야하니. 자기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명절에 입을 한복도 하나 없는 마당에 수트를 챙겨 입을 여유가 없군요. 

어디까지나 돈이 없다는 게 현실적인 변명이었다면, 심리적인 변명거리도 있습니다. 클래식 스타일에 대한 필요성과 동경은 느끼고 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태껏 가져온 수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선뜻 수트를 사기도 뭐합니다. 클래식 스타일은 그 자체만으로 ‘흠이 없는 완벽한 스타일’ 이죠. 복장의 한 갈래인 클래식으로는 다른 스타일에 비해 다양한 표현을 할 만한 부분이 극히 적습니다. 클래식 스타일을 통해 자유로운 스타일을 표현하고, 남들에게 자유롭게 비치려면 클래식 스타일의 어느 부분을 파괴해 재해석해야 합니다. 아직 멋 내기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제가 수많은 장인의 손에서 벼려진 클래식 스타일에서, 그 형식의 파괴를 통해 새 의미를 부여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자신도 없는데 할 마음까지 없다면 자제 해야겠죠. 그래서 저는 수트를 입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둘러대렵니다. 수트를 입건 입지 않건 제일 중요한 건 옷을 입는 사람의 의도와, 마음가짐입니다. 브리오니의 수트를 입고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구두를 신더라도, 옷을 입는 사람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남들 보기에도 불편해 보일 수밖에요.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지금도 많은 수의 소년들이 청년이 되는 과정에서 교복을 입고 반감을 갖고 자라납니다. 교복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디자이너의 열정이 담긴 교복은 드물 테니 입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마음이 편할 리가 없죠. 가끔 뉴스에 나오는 교복회사들의 담합과정을 보고 있으면 ‘꼭 그래야하나’ 싶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부모님도, 학교도, 교복회사도 아니라 학생들이니까요.

역시나 줄줄이 써놓고 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변명이랄까요. 무튼, 수트를 잘 입는 또래의 청년들을 보면 부럽기도 쓸쓸하기도 합니다. 괜히 옷장에 처박아둔 수트에게 미안하기도 하구요. 관리도 하질 않아서 엉망일 텐데. 이번에 나가면 드라이나 맡겨야겠습니다. 언제 다시 입을지는 모르겠지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6:47 

 

6급 하지연 
  수트는 남자를 평범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특별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수트를 잘 입는 남자는 품격이 있어 보이죠. 
여자 입장에서 기성 수트보다는 맞춤이 더 멋있는 거 같습니다. 
모피 혹은 쁘레따 포르테나 런웨이 옷이 아닌 이상 여자의 어떤 옷도 500만원이 넘는 
옷은 없다는 점에서 남자 맞춤 양복은 지상 최대의 사치인거 같습니다. 
수트를 즐기려면 아무래도 세월을 좀 더 겪어야 겠죠 2008-10-13
15:30:09
  

 

상병 김무준 
  마지막 말씀에서 뜨끔, 하고 다시 피식, 했습니다. 지금은 실실 웃으면서 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 달 Arena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데 각 맞춤 양복사들의 자기소개를 본 기억이 납니다. 천만원을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 더 경악할 사실은... 맞춤 구두는 수트에 비해 턱없이 작지만 수트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죠. 
구두를 사야하는 데 돈이 없습니다. 십만원 남짓으로도 충분히 수트를 즐길 수 있지만, 그래도 수트는 제대로 된 것이어야 한다며 미래를 기약하는 중입니다. 2008-10-13
15:34:47
  

 

6급 하지연 
  무준/ 저도 제냐의 셔츠에 브리오니의 수트, 테스토니의 구두, 콜롬보의 가방, 파덱필립 
의 시계를 찬 100%의 완벽한 남자를 보고 싶지만. 패션은 많은 착오를 거쳐서 자신의 
것으로 완성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품격은 수트보다 자신감에서 오는것 
같아요 2008-10-13
15:47:41
  

 

상병 김무준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그 누가 20대를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시기라 했던가. 20대를 20대 답게 하는 것은 젊음, 그 자체가 아니라 치열한 삶의 태도이다.> 자신감으로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가 제일 멋지죠. 초롱초롱 빛날 때. 근데 아무리 거울을 봐도 제 눈에는 검은 심연의 불꽃만 훨훨 타오르는 게 어둠의 자식이라 그런가 봅니다. 
며칠 전 휴가복귀를 하면서 동대구역 플랫폼에서 웬 노신사를 보았답니다. 배가 이만큼이나 나온 독일인이었던 것 같은데... 배를 D자로 감싸는 와이셔츠와 연신 땀을 닦는 모습이었습니다. 감색 블레이저를 입고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갈색 구두를 신었는데... 어찌나 그 모습이 자연스럽고 균형있는지 저도 모르게 15분 가량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영감님도 제 시선을 의식했는지 씩 웃어 보이더군요. 
그렇게 늙고 싶은데, 열심히 살다보면 그렇게 늙을 수 있겠죠? 2008-10-13
16:01:26
  

 

병장 정병훈 
  무준님께서 매너에 대해서 얘기 하셨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신이 쓰는 향수를, 샴푸를, 비누를 계속 쓰면 피부에 그 향이 밴다고 하죠. 매너를 몸에 익히고 다니는 사람은 어쩔수 없이 몸에서 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슈트는 기본적인 매너와 함께 할때 그 사람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거 같아요. 정갈함과 친절함이 함께 뭍어 나올때 정말 멋진 슈트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적어도 슈트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2008-10-13
17:29:13
  

 

병장 김낙현 
  제가 패션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가요? 
스타일링을 제시하는 것과 멋내기를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다른거죠? 

저 역시 언급된 잡지들을 최근들어 보기위해 노력하는 편인데 
저는 비싼 옷들을 보는 게 아니라 그런 옷들이 가진 특색, 조합을 많이 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요렇게 포인트를 줄수도 있죠!' 라는 부분도 많은 거 같았습니다. 그리곤 제가 그런 느낌으로 코디한 옷을 입곤 합니다. (돈 없어서, 주제 넘어서 제시된 옷들은 입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엔 그런(비싼?) 옷들이 나로 하여금 갖춰지게 될거라 믿곤 합니다. 
돈 많이 벌고나서 그때 그런 옷 사서 공부하는 건 너무 준비가 없지 않나 싶어서 김칫국처럼 나름 공부하는 거죠 뭐. 허허허허허 2008-10-13
17:50:00
  

 

상병 김무준 
  스타일링을 제시하는 것과 멋 내기를 가르치는 것의 차이라... 저는 나와 당신이라는 쪽으로 해석하겠습니다. 스타일링은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복장을 참고 하는 것입니다. 멋 내기를 가르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멋 내기는 색감의 공식 등 타인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형화 된 형식에 불과하겠죠. 좀 추가되는 것이 있다면 스타일링은 복장 그 자체에서 끝나버리지만 멋 내기를 가르치는 것은, 제가 <Style이란> 제목으로 주제넘게 말 해놓은 '이야기의 주제가 몇 가지'가 추가될 겁니다. 

우리가 쉽게 표현하는 '스타일링'은 옷을 입는 법 정도로 끝납니다. '멋 내기'는 옷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죠. <옷 잘 입는 남자의 다섯가지 키워드>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 도요. 2008-10-14
01:24:45
  

 

병장 김낙현 
  악-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면 역시 차이에 눈이 어둡게 마련이군요. 

멋내기를 가르치는 책들, 한번 접해봐야겠네요.[웃음] 2008-10-14
01:57:06
  

 

병장 전승원 
  남자의 완성은 슈트에서 시작됨은 틀린 말이 아닌거 같아요. 2008-10-14
09:47:29
  

 

일병 구진근 
  저 같은 경우에는 스타일의 완성은 롱코트!!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끄적끄적) 
개인적으로 슈트가 되었든 저 같이 특이한(?) 사상을 지니고 다른 류의 옷을 입는 사람이 되었든 단정하고 세련된 매너.. 같은 것이 있으면 그로써 완성된 남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코트의 이상한 로망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도망) 2008-10-14
10:26:49
  

 

상병 김무준 
  요즘 피코트나 트렌치코트를 지르고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거립니다. 근데, 통장 잔고에는 친절한 KTF 분들이 휴대폰 요금을 1원도 남기지 않고 쓸어가시고 지름신께서는 피같은 월급을 책에다 불살라버려 잔고는 오늘도 0원이지 싶습니다. 

머리 밀고 코트 걸치면 보는 사람들이 도망갈까봐 두렵습니다. 2008-10-14
10:30:28
  

 

일병 성일곤 
  ㄴ저도 피코트 사고싶어 죽겠습니다. 다음 휴가때는 피코트나 하나 사입을까 생각합니다. 2008-10-14
11:2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