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패션에 관한 잡담 시즌 투 - 2
상병 김무준 2008-12-17 12:45:19, 조회: 301, 추천:0
미루고 미루다 책을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붉은 색의 베르사체, 회색의 아르마니>를 마침내 다 읽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과연 나는 몇 가지의 색을 구분할 수 있고 색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름 미술학도였다면 미술학도였고, 색을 많이 접했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집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져왔다는 복제판 모나리자가 침대 위에 걸려있었죠. 자다 깨서 그 얼굴 쳐다보기가 무서워 떼버렸고, 지금은 창고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겠지만.
깽깽이는 소묘를 주로 그렸습니다. 검은 선 하나로 짙고 엷음의 차이를 둬 형태를 잡고 덩어리를 잡아나가는 과정이 신비로웠거든요. 꼭 다양한 색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연필만으로 대상에 명암차이를 두고 사물의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점점 검정이란 무채색에 빠져들었고 취향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채색의 옷이 너무 좋더란 말이죠.
패션에 있어서 색이 빠진다면, 밀가루 없는 붕어빵이요 딸기 없는 딸기잼이 될 겁니다.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단단히 각오했습니다. 오로지 무채색만으로 옷을 만들어보겠다 하는. 아집에 가까운 계획이었습니다. 색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공부할 것만 사다 놓았지 내일. 내일. 내일 하면서 미뤘습니다. 그러다 책 속에서, 채도를 낮게 해 색을 검정에 가까운 색으로 만들어 옷을 만드는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만났습니다. 이탈리아 패션을 대표하는 살아있는 전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타계 소식 이후, 가장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일은 아르마니의 타계가 될 것이라고.
아르마니는 저채도 색에 존재하는 다양함으로 고급스럽고도 신비로운 속성을 옷에 담았습니다. 책에는 명도, 채도, 보색과 같은 색의 다양성과 색에 대한 이론, 그리고 패션으로의 적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론을 머릿속에 갈무리하면서 책 끝부분에 나오는 존 갈리아노나, 베르사체,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창작세계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옷 안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부랴부랴 공책을 펴고 08 F/W Collection과 09 S/S Collection의 사진을 확인했습니다. 여태껏 볼 수 없던 색의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이전에는 단순한 감으로 디자이너가 표현하려는 이미지를 해석했다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표현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먹고 난 다음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그저,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음. 적나라한 포르노를 처음 보고 난 후의 충격 정도랄까요?
색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사실 색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는 하기 힘듭니다. 접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죠.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감각으로 옷을 선택하고, 색을 조합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행착오를 거치면 지식을 얻을 수 있죠. 길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만남의 자리에서 시각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을 곧잘 맞추는 편입니다. 자신의 경험이 복장에도 반영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어떻게 더 발랄하고 생기 있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입으면 어려보일까. 이런 색은 주책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 너무 밝아서 못 입겠어. 하는 고민들에 대해 앞으로는 더 폭넓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색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게 왜 중요한지 알겠어!’ 랄까요. 옷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제품 디자인을 다양하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입고 있는 얼룩무늬에도 아름다움이 있을 거라는 묘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착각일 것 같다고요.
이제 밖에 나서면 시커먼 옷을 입고서 까마귀 소리 듣기 전에, 우선 밝고 다양한 색의 옷을 골라봐야겠습니다. 그만큼 조합은 더 어려워지고, 돈은 줄줄 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스스로에게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테니까요.
22.83.38.90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11:59
병장 장지훈
32.1.22.149 무준// 저도 무채색 마니아 라고 불리는 사람중 1인 입니다.
언제나 검정색과 흰색의 단조로운 조화만을 추구 하였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입을 생각입니다.(웃음)
지금이야 에디슬리먼의 영향인지 그가 패션계에 남기고간 거대하고 굉장한 트렌드에 빠져서 살이란 살은 다 띄어버리고 기럭지와 무게가 공존할수 없는 지경까지 왔지만 아직도 조금만 더 슬림했다면 일란 생각을 머릿속에 하고 살아갑니다.
에디슬리먼을 필두로 릭오웬, 존갈리아노, 마크제이콥스등을 모르던 시절엔 아주 힙한 옷들을 주로 입었엇고 그로 인해 방송계쪽에 몸도 담았엇습니다.
48인치의 거대한 바지와 4Xl의 상의 수십 종류의 MLB NBA 어센틱들, 빨강 노랑 파랑등 유채색 계열의 옷들이 그주류를 이루었죠.
클럽 죽돌이로 살아가더 즘 신선한 문화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갱스터룩'.. 검은색 뉴에라 혹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반다나로 입과 목을 가리며 완벽한 무채색과 손목과 목에 걸려있는 브링브링한 그것들에서 풍겨오는 그 아우라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때 부터 시작된것같습니다. 저의 무채색사랑은 말이죠.
지금도 간혼 '시도해 볼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나 무리야.'로 끝나곤 하지요.
08 구찌 F/W 에 루비색 코듀로이 수트 들이 등장합니다.
굉장하다 란 생각이 머릿속에 밖히긴 했지만 런웨이는 런웨이일 뿐이란 결론으로 생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무준씨. 많이 시도해 보시고 도전하신다음에 저에게 최상의 조합을 알ㄹ주세요(웃음)
저 너무 비겁한가요? 2008-12-17
13:17:59
상병 김무준
22.83.38.70 최상의 조합이 있을지 몰라도, 그 조합이 개개인 모두에게 맞을리는 만무하겠죠. 개인의 취향과 개성에까지 맞을 리는 없으니까요. 깽깽이가 유채색을 공부하는 이유가 무채색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이해가 될런지요.
루비색의 채도를 더 낮춰서 검정에 가깝게 만들면 고급스러움과 함께 단순한 검정이 포함할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겠죠. 꼭 구찌의 수트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찾아보면 런웨이의 트렌드에 맞는 옷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안되면 깽깽이처럼 직접 만들려고 시도하면 되겠죠. 2008-12-17
13:57:51
상병 김무준
22.83.38.70 꼭 에디슬리먼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패션 트렌드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의문에서 성의 경계에 대한 파괴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창조한 셔츠의 이중 칼라나 등 뒤로 잠그는 셔츠등이 질 샌더 등 다른 브랜드에서 점점 시도되고 있죠. 문화 트렌드마저 옴므 파탈에 열광하는 시대가 왔고 남자도 화장을 합니다.
에디슬리먼이 천재라 평가되는건 그런 패션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제시했다는 데 있겠죠. 꼭 남성 패션계에 해당하는 현상은 아닙니다. 카이아크만에서는 올 시즌 트렌드로 '페미큘린'룩을 제안했죠. 남자는 더 여성스럽게, 여성은 더 남성스럽게. 그 성의 경계에서 제 삼의 성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에 의문을 던지자 하는. 무튼, 에디슬리먼이 아니라도 아름다운 남성에 대한 물음은 진행되었을거고 늦든 더 빠르든 지금처럼 변하기 시작했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스스로 찾고, 확립해야죠. 시대가 변해가니까. 2008-12-17
14:04:49
병장 장지훈
32.1.22.149 무준// 저는 크리스 반아쉐의 뒤틀린 카라를 보면서 저걸 어떻게 입지 했다가 결국 구매 하고 말았다는..
저는 옷을 볼때 소재를 굉장히 중요히 여기는데요. 카이 아크만의 경우 그 가격대에서 잘 쓰지 않는 소재들을 많이 쓰더라구요.
예를들면 셔츠에 견 이라던지 말이죠.
예전부터 눈여겨 보아오던 브랜드 인데 무준씨께서 다시 말씀하시니까 새삼 대단한 브랜드구나 란 생각이 드는군요.(웃음) 2008-12-17
14:27:36
상병 김무준
22.83.38.70 킁. 깽깽이는 그저 고졸학력에 불과한, 저 드넓은 들판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답니다. 아, 요새는 앞발 뒷발이 달려서 꼬리를 흔들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는 하군요. 2008-12-17
14:31:39
이병 정종욱
22.53.10.34 혹시 디매하시는분 2008-12-17
15:24:58
일병 김광현
5.11.11.122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칼빈 해리스는 The Colours에서 '니가 무슨 옷을 입던 상관하지 않지만 "색"이 있어야 한다' 라고 노래했었죠. 2008-12-17
16:15:23
병장 방수현
18.49.9.195 크라운제이가 외친 말이 떠오르네요
Black & Gold-!!
금색은 검정에 가깝게 만들 순 없는지..블랙골드.? 2008-12-17
21:43:24
상병 김무준
22.83.38.70 벨벳과 같은 소재에 검정에 가까운 노란색을 염색한다면, 금속의 속성처럼 빛나는 어떤 색을 얻을 수는 있겠죠. 2008-12-18
02:30:41
일병 구진근
7.7.1.95 저는 개인적으로 블랙&화이트도 좋지만 레드 스칼렛이라던지 강렬한 색상도 좋아한답니다.(웃음) 물론 그런 색을 입거나 하는것이 아닌 단순한 악세사리로써 그 옷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깐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 할지는 몰라도 제가 입는 옷의 색상은 사실 많은 것 같지만 정해져 있는듯한 기분이 듭니다. 검정, 회색, 흰색, 연갈색, 아이보리 등... 하지만 전혀 옷으로써 색상이 이상한 것 같은 것도 다른것과 매치만 잘되면 묘한 매력이 있는 색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청록색을 예로 들어 볼까요? 저는 솔직히 어머니께서 청록색 후드를 구해오셨을때 집어 던졌었습니다. 왜냐하면 촌스러워 보이는 색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안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다시 그 후드티 밖으로 흰색 후드를 같이 껴 입으니 괜찮아 보이더군요..이것 또한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 어떤 유치할 것 같은 색이라도 조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8-12-18
08:34:04
병장 이동석
40.6.1.206 오우, 역시 재밌습니다. 런웨이의 패션이 좀 더 와닿게 해주는 책이라니,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책은 어떤분야라고 당길수밖에 없죠.
<붉은 색의 베르사체, 회색의 아르마니>기억해두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책 보면 안 어울린다고 소가 웃겠군요. 낄낄. 2008-12-18
15:04:05
상병 김무준
22.83.38.70 3개월 만인가 다 읽었을 만큼 드럽게 이해가 안갑니다. 색채학 책을 옆에다 펼쳐놓고, 한 한달 정도 보라색에 가까운 파란색이 대체 무언지 이해되질 않아서, 이게 왜 보라색이 아니라 보라색에 가까운 파란색인지 헷갈려서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좀 추천해드리기는 그렇네요. 2008-12-18
15:21:22
병장 이동석
40.6.1.206 색채학책까지 봐야되는거라니, 갑자기 턱-막히는군요. 제가 영화찍을때도, 뭐 다 엉망이긴 했지만, 특히나 색감이 떨어진단 소릴 들어서말이죠. 흐흐, 뭐 그림도 아니고 색감이 다 무어냐-했지만, 은근히 신경쓰인단 말이에요.
색채학 책이나 한번 펴봐야겠습니다. 흐흐. 2008-12-18
15:4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