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머신즈 그린웨이 STATE 1-7  
병장 정영목   2008-10-12 03:35:34, 조회: 193, 추천:0 

“헥… 헥… 같이 가!”

브론도가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는 카린을 향해 외쳤다.

“아아…… 이거 좀 심각한데……”

카린이 투덜거리며 브론도에게 다가갔다. 이미 브론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카린은 마지막 남은 영양 주사를 꺼내 브론도에게 찔러 넣고는 무관심한 눈으로 그의 팔뚝으로 흘러들어가는 영양액을 응시했다. 사실, 이러고 있노라면 조금쯤은 욕심이 생길만도 한데, 그보다는 소금 달팽이 생각이 훨씬 더 간절했다.

‘쳇, 더 이상은 못 참겠는걸.’

그들은 3일째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남서부 유럽 전역에 펼쳐진 전자기장이 지도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설마 길을 잃을까 하며 가볍게 생각했지만, 이미 지구는 인류가 번창하던 그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울창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각종 야생 동물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이라면, 바로 그 동물들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동물들은 카린과 브론도를 멀리서 지켜보며 뭔가를 ‘소곤거렸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먹이사슬 관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이틀 전, 호랑이 한 마리와 사슴 두 마리가 함께 다가와 자신들의 URC를 건네주기도 했으니까. 다소 방언이 많긴 했지만 총을 내리라는 말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때 그날 밤, 동물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카린과 브론도는 여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동물들이 아파치 체제에 실로 열광적이란 사실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파치에 의한 지구는 깨끗하고 풍족하며 무엇보다 평화롭다는 점. 인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모로 인류의 현 모습은 ‘알코올에 중독된 부모’와 가깝다고. 그런 부모의 유능한 아들딸들-이를테면 아파치의 기계들-이 옳다는 증거가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만 있는데 인류는 소금 달팽이에만 집착한 채 눈과 귀를 굳게 닫고 이를 부정하기만 한다고.

자성의 목소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라며 카린이 항변하긴 했지만, 동물들이 ‘전 생명 지능화 계획’에 대한 인류의 궤변을 공격할 때는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인류는 몇몇 철학자들의 이론을 핑계 삼아 기계들의 생태계 개입에 대해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무지의 소산’이라며 혹평하곤 했다. 물론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먹이사슬 관계를 무턱대고 무시해버리면 생태계 자체가 무너질 수 있으니 말이다. 허나 도네호가와의 일소대로 ‘생태계’는 인간이 주장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상해…… 아파치는 이 숲에 인간이 들어온걸 알고 있을 텐데.”

“우리가 망명자란 걸 밝히면 데려가 주지 않을까?”

브론도가 원기를 되찾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를 질렀다. 수많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른 후, 이윽고 새하얀 은빛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그들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숲속의 생명들을 놀라게 하지 말거라. 이미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 이름은 검은주전자. 아파치의 외교 노드를 맡고 있지.”

자신의 이름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는지 이내 사족을 달았다.

“언어로서는 우주의 역동적인 과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지. 이정도 원시적인 화두는 그대들도 이미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카린과 브론도는 긴장 탓인지 웃을 여유조차 없었다. 허나 상대방이 그리 고압적인 자세가 아니란 건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전 UCS 제1482기계화보병대대 소속이었던 마크 브론도, 이쪽은……”

“마찬가지, 메실리야 카린입니다.”

검은주전자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알고 있다오. 망명을 원하지 않는가?”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그동안 지켜보고만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그리고 이제는 왜 나타나셨는지요?”

“분석 중이었네. 그대들이 정말로 해결책이 될 것인지, 아닌지. 방금 그 결과가 나왔다네. 아마도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이.”

“?”

“문제가 있다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건 그대들의 옛 동료 대부분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 UCS 점령사령부가 당신들을 자폭용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야. 그대들이 먹는 음식에 PU 계열의 약물이 투여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꽤 은밀하고 강력한데다가 전염 물질까지 생산하는 바람에 우리네 아메시스트까지 위험해 처해 있다네.”

“약물…… 말입니까?”

“덕분에 마르세유가 UCS에게 농락당하고 있지. 전자기장 방어 메커니즘을 포로 자폭으로 무력화 시키다니, 나 원 참.”

“요약하자면 저희에게 항생체가 있다는 의미인가요?”

“역시 잘 이해하는군. 마음에 들어. 망명 정도야 우리 아파치는 대체로 자유롭다네. 소금 달팽이의 유혹을 이겨낼 만한 의지력만 갖추면 우리네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지. 기억하게.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이야. 우린 뭔가 억지로 강요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보답은 확실히 하겠네. 아메시스트 커뮤니티에서도 후하게 대접하겠지만.”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브론도가 카린에게 어서 동의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카린은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저희들에게 전략적 가치가 있다니 그것 참 기쁜 일이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UCS에게 복수할 기회를 우리에게 보장해 주셨으면 하네요.”

“복수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군. 허나 자연스러운 게 반드시 옳은 건 아니지. UCS를 붕괴시켜야 한다면 응당 그렇게 할 것일세. 그럴 경우엔 우리가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원한다면 기회를 잡게 될 것이야. 알겠는가? 반드시 복수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은 들어주기 힘들군.”

카린이 한방 먹었다는 듯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때마침, 그녀의 배가 이 난처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조건을 바꾸죠. 지금 당장 맛있는 음식이라도 대접해 주세요.”

카린의 갑작스런 능청에 검은주전자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유머를 아는 인간은 믿을만하지, 암. 자, 따라오게. 시드니에 가면 URC 요리의 진수를 맛보게 될 것이야.”

검은주전자가 돌아서자 브론도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잘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카린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는 말없이 검은주전자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내가 소금 달팽이를 끊을 수 있을까?’

카린과 브론도 둘 모두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그 우려도 잠시. 고속 수송기의 좌석에 앉자마자 그들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수면욕이 식욕, 아니 권력욕보다 더 강한 욕망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37:18 

 

병장 김태형 
  음 URC가 어떤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항상 즐겁게 보고 있는데 가끔 생소한게 나오기도 하네요 (씨익) 2008-10-12
18:25:44
  

 

병장 이동석 
  음, 아파치들 참 마음에 드네요. 흐흐. 

이런 성격의 종족을 영화로 다루면, 관객들은 공감을 못할까요, 뭔가 새로 깨달을까요? 얼마나 설득력있게 표현하느냐의 문제겠죠? 

영목님 오늘도 잘 읽었어요. 2008-10-12
18:37:39
 

 

병장 정영목 
  URC는 Universal Root's Compounds의 약자입니다. UR-마르세유나 UR-사하라와 같은 거대한 기계 나무들이 생성한 화합물이죠. 

공감 문제에 대해선, 뭐, '묵묵히 진행시키겠다' 대략 이런 자세긴 하지만, 아파치 일원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약간의 개그도 섞은... 헌데 제겐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2008-10-13
07:48:34
  

 

상병 박민욱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네요. 2008-10-13
09:37:59
  

 

상병 김호균 
  소설같지가 않고, 신(scene)단위로 끊어지는 느낌이 좀 들긴합니다만, 
그건 궁이란 제약에서 연재되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 같고.. 

성실하고 방대한 설정이나 만만치 않은 주제, 거기에 재미까지... 
항상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영목님 화이팅!! 2008-10-13
10:41:48
  

 

병장 정영목 
  잘 지적하셨습니다. 3000-3500자 가량의 단위입니다. 현실적 제약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제가 초보이기도 하기에 일부러 어떤 형식에 스스로를 얽어맨 탓도 있습니다. '수파리(지키고 깨고 새로 세운다)' 중에서 수 단계랄까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때때로 제가 쓰려고 하는 게 소설인지 아니면 가상 역사서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재미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고라 자조하는 중입니다. 하핫. 2008-10-13
12:32:13
  

 

병장 이동석 
  이런식으로 모이고 모이면,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 역사가 만들어질것 같습니다. 

지금은 미약해보이는 시작이지만, 
겨우 이제 시작이니까요. 2008-10-13
12:5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