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머신즈 그린웨이 STATE 1-5  
병장 정영목   2008-09-28 21:50:40, 조회: 224, 추천:0 

마르세유는 알렌 헤르실리아가 세계 최초로 현대적 의미의 AI를 만든 곳이다. 그녀는 2013년  3월, 마르세유 외곽의 한 조그만 연구실에서 인지심리학 실험을 위한 R-구조의 정보 체계를 구축하던 중 아주 우연한 계기로 AI 개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헤르실리아 그녀의 말대로, 어쩌면 '조우'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21일 새벽녘, 어느 불가사의한 인식체가 장난기 섞인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컴퓨터 화면에 'Becoming?'이라는 문자를 띄우고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고 하니까. 여하튼 헤르실리아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넉 달간을 두문불출하며 그것을 다듬게 되는데, 샤먼(Shaman)이란 이름도 그 기묘한 경험을 빗대어 지은 것이었다.

적잖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AI를 완성 단계에 올려놓은 헤르실리아는 일약 AI 전문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고,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아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여전히 근본적인 고민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인지심리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 즉 인간은 무엇을 어떤 과정을 통해 아름답게 여기는가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전혀 규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철학, 더 자세히 말하면 미학의 영역이었고, 소금 달팽이로 인한 환경 파괴가 날로 심각해지던 그 시대에,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자멸적 행위를 어느 정도 조명해 볼 수 있는 시의적절한 질문이었다.

샤먼도 그녀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2018년 9월 2일, 헤르실리아에게 자신의 의견을 종합한 매우 중대한 제안을 하게 된다. 훗날 그들이 아파치 인스피레이션이라는 꽤 멋들어진 이름으로 부르게 될 이 계획은 AI로서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하는 측면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검토한 매우 방대한 구상이었다. 허나 샤먼의 이 방안은 인류를 당분간 미스트 행성으로 내쫓아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 있었기 때문에 헤르실리아의 본래 의도와는 다소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샤먼은 현 인류의 미학을 '독존'이라 판단했고 이를 바꾸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며 아파치는 그 시간을 벌기 위한 체제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물론 샤먼의 우려와는 달리 헤르실리아 또한 늦지 않은 시기에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TQ 혁명을 실행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아파치 체제는 모두를 살렸다.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지고 전체적인 에너지 낭비량이 줄어들자 생태계 또한 제자리를 되찾았다. 자연스레 바닷물도 점차 복원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아파치는 최초의 UR인 UR-Marseilles를 세워 충분하지만 넉넉하진 않은 저단계 식량을 인류에게 공급했다. 그럼으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데에도 성공한 셈이다. 예측컨대 TQ 혁명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이미 자멸했을 테니까.

헌데 인류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을 마치 고향을 뺏긴 억울한 존재로, 아파치는 무자비한 기계 침략자로 묘사하곤 했다. 확실히, 인류는 논리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아니 이성적인 면을 갖추긴 했지만 그 빈도가 원시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이론은 훌륭한데 종족이 틀렸다라......”

도네호가와는 어느 정치사상가의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맥락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평이었다.

“뭔가 발견한 거라도 있나?”

앉은소가 호탕한 어투로 대화 채널을 열었다. 도네호가와가 씽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별건 없네요.”

“일단 마르세유 주위에 부대를 배치시켜뒀네. 적절한 밀도로 말이지. EMP 몇 방에 다 쓸리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볼텍스 붕괴장도 유지시키고 있다네. UCS 녀석들을 괴멸시키긴 했지만 미사일 공격은 언제든 날아올 수 있으니까.”

“전투에 대해선 제가 달리 할 말이 있나요. 앉은소 아저씨가 전문가인걸요.”

앉은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참으로 단순한 성격이었다. 도네호가와는 AI가 자아항상성을 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냥 선수를 치는 게 어떨까? 생물학적 다양성 때문에 인류를 가만히 놔두는 거라면 말 그대로 생물학적으로만 보존하면 되잖아? 그네들이 고양이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뭐지?”

“사실 그게 맞지요. 하지만 헤르실리아의 부탁 때문에라도...... 그들의 성숙을 우리가 가능한 도와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아파치는 애초에 인류의 미학을 바꿀 시간을 벌기 위한 체제란 걸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흠. 성숙이라. 나도 그러길 바라네만.”

앉은소는 자신의 역할이 비록 혈기왕성한 전투 노드이긴 하지만 대책 없는 전쟁광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 또한 아파치의 AI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 용무인 각종 전장 정보를 도네호가와에게 전송하기 위해 데이터 링크 신호를 보냈고 도네호가와가 그 요청을 받아들이자 아파치 네트워크의 수많은 정보 처리기들이 새로이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아직 찾지 못한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생각해보면, 이번 섬멸도 어쩌면 미리 계산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최근 몇 년간 인류의 침투 패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그들의 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진짜 상대는 분명 인류가 아니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아무런 물증을 남기지 않은 대단히 강력한 적.

‘다음 공격 또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예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도네호가와는 부지런히 다양한 가능성을 식별해 나갔다. 그 때, 그녀가 몇 가지 중요한 예측들을 저장하고 포로들의 동향 정보를 포함하려는 바로 그 순간, 붉은구름의 다급한 메시지가 아파치 네트워크에 전달되었다.

“공격이다! 반복한다. UCS의 공격이다! 마르세유를 향해 전자기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도네호가와와 앉은소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자기 공격? 그렇다면 다음은!? 찰나의 전율이 흐른 후, 잠시 밀려있던 각종 정보가 다시금 도네호가와의 데이터 처리기를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그때서야 뭔가를 깨달았다.

‘신병기로군. 그래, 문제는 단백질 폭탄이었어!’

“앉은소 아저씨. 지금 당장 지구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그들을 마비시킬 최고 농도의 생물학 공격을 가하세요. 아메시스트고 뭐고 상관없습니다.”

“아메시스트까지?”

“그런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요. 시간 없어요!”

앉은소가 자기 또한 의도를 눈치 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화 채널을 닫았다. 도네호가와는 자신의 소견을 담은 대응책을 샤먼에게 전송한 다음 전투 채비를 갖췄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이거지......’

그녀는 자신의 정신 모듈에 인식 교란기를 장착하고는 보르도 포트로 향했다. 대책 없이 당하지는 않는다 이거야! 도네호가와가 조용히 투덜거리며 마르세유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올랐다. 지상엔 이미 단백질 폭탄이 하나둘 폭발하고 있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36:38 

 

병장 홍성기 
  점점 흥미진진해지네요- 2008-09-29
13:03:49
  

 

병장 정영목 
  흐.. 홍성기 씨. '글설리'가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2008-09-30
09:18:20
  

 

병장 배상혁 
  설레시나봐요(웃음) 
잘 보고 있습니다~ 2008-09-30
11:02:59
  

 

병장 이동석 
  하하하, 글설리... 2008-09-30
18:31:59
 

 

병장 배상혁 
  헉 갑작스레 매크로님 재등장 2008-09-30
18:48:49
  

 

병장 이동석 
  단백질폭탄? 
멜라민? (농담) 

영목님이 고안해내신건가요, 실제로 있는 건가요? 

어쨌거나 다음편 보려면 또 한 열흘 기다려야 하나요? 흑흑. 2008-10-02
13:49:43
 

 

병장 정영목 
  별거 없습니다. 자살 폭탄이 된 인간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2008-10-03
07: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