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만남. 1.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29 10:38:44, 조회: 37, 추천:0 


"자."
혼자 사는 집에서 혼잣말까지 꺼내가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는 건 꽤나 멋쩍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루고 미뤄왔지만, 결국 빠를수록 좋다. 미뤄봐야 나만 힘들고 아플 일이다. 그녀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 더 이상 그녀가 생각나지 않도록. 
"깨끗하게 한 번 치워보자!"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남자와 사진에 담기는 걸 좋아하는 여자가 만났다고, 참 어울리는 것들이 만났다고 시시덕거리던 게 생각난다. 몇 장이나 찍었더라? 얼마나 찍었지? 하나, 둘, 셋, 온 집안이 그녀 사진이다. 하긴, 우리가 만난 게 몇 년인데. 탁자 위에, TV 위에, 벽에, 심지어 쿠션에도, 여행지에서 찍은 것, 놀이동산에서, 집에서, 같이 찍은 것, 혼자 찍은 것, 앉아서, 서서, 누워서, 책을 읽으며, 먹을 것을 먹으며, 브이 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으며, 윙크하며, 콧잔등을 찡그리고, 우리 집에 액자가 이렇게 많았나? 내가 좋아하던, 메롱 하며 찍은 사진이 어디에 있지? 내 지갑에 있지 참. 아, 미니홈피. 미니홈피에도 사진이 한 가득이구나. 그것도 정리해야 한다. 웃고 있지 마, 바보야. 사진 속 그녀는 아직도 웃고 있다. 나도 웃고 있다. 집어치워. 스탠드 밑에 놓인 액자를 덮어버리며 일어난다. 앨범, 앨범들도 찾아야 한다.

옷장을 연다. 커플티, 커플티가 최우선 제거대상이다. 나에게는 어색하기만 하지만, 그녀가 입은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버린 핑크색 커플티. 후드티. 나란히 서면 등에 그려진 실 전화가 이어지는 커플 후드티. 그 옆에 걸린 건 알록달록 길고 긴 커플 목도리. 그녀가 선물해 준 셔츠. 어? 이 셔츠를 버리면 이 바지에 맞춰서 입을 게 없는데? 맙소사. 제멋대로 섞여있는, 셔츠 옆에 티가 걸려있고 그 옆에는 바지가 걸려있는 옷장에는 그녀가 사준 옷들과, 그것에 맞춰서 산 옷들로 가득했다. 이 정도는 요즘 다 가지고 있다며 계절마다 던져주던 옷들, 그녀의 쇼핑에 따라가서 까다로운 그녀를 쫓아 한나절을 헤맨 끝에 결국 내 옷만 샀던 날들. 넥타이 매는법을 배웠다며 한 보따리를 챙겨왔던 넥타이들. 그래, 옷이야 새로 사면 되는 거야. 까짓것 나도 이제 옷 좀 입을 줄 안다고. 사라져.

내 손에 끼워진 반지? 서로 주고받았던 닭살스러운 편지? 누르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인형? 사이좋게 달고 다니던 반쪽짜리 휴대폰 고리? 이제는 삐쭉빼쭉 머리가 뻗쳐버린 칫솔? 같은 향기를 풍기고 다니자던 향수? 바보같이 반지와 같이 맞췄던 목걸이? 읽고서는 내가 생각났다며 선물 받은 책? 같은 곳을 발맞추어 걷자던 신발? 아, 음악 나눠듣던 Y잭? 함께 봤던 영화티켓들? 함께 쓰고 걷던 우산은? 커피를 마시며 볼 때마다 자기 생각을 하라던 컵? 내 면도기는? 잠깐, 저 노란색 쿠션은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아 맞아. 우리 집 비밀번호도 바꿔야 해. 화분! 화분도 치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고양이 사료? 아, 우리 나비. 나비 보고 싶다. 나비는 내가 키운다고 할 것을. 어떻게 하지? 그래.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서 나비는 내가 키우겠다고, 지금 데리러 가겠다고-

-말해놓고는 나비를 들고 나온 너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더 보려고 애쓰겠지. 머릿속에 꼭꼭 눌러 담으려고 난리를 치겠지.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겠지? 사진까지 다 치워버렸으면서. 이해할 수 없어.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데? 그래, 예전과는 많이 달라.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세상을 공유하던 그때와는 다르지. 난 이제 네 입에서 나오는 이름들이 낯설어. 넌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지만 그게 우리가 함께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거야? 우리가 몇 년을 만났는지 알아? 7년이야, 7년. 그래, 넌 말했지. 우리가 만난 시간은 점점 길어지겠지만,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고. 만나서 할 이야기도 전화로, 문자로 하는 게 무슨 사랑이냐고.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그 날도 그렇게 억지로 시간을 만들어서 만나러 나간 거잖아. 그런데 그런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네가, 나에게, 어떻게.

지쳐서 소파로 쓰러진다. 치우기는커녕 아주 난장판이다. 사진들과 옷들, 그리고 잡다한 것들이 온통 널브러져있다. 무심코 팔을 뻗어 끌어들인 노란색 쿠션을- 집어 던진다. 집안 곳곳, 아니 이 세상 모든 곳에 그녀가 있다. 내 집에, 내 차에, 나의 모든 것에, 길에, 버스에, 식당에, 꽃집에, 카페에, 술집에, 아아.
우리가 다시 만나면 안 되는 걸까? 처음 물어보았을 때 들었던 냉정한 대답. 잊어버리고 다시 묻고 싶다. 다시 한 번 물으면 대답이 달라질까? 참을 수 없다. 아무런 장식품도 달려있지 않은, 어색한 전화를 꺼낸다. 1번. 유일한 단축번호. 질려버릴 정도로 익숙한 컬러링이 흐른다.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떠돈다.

우린 진짜 사랑을 하기에는 아직 어린 것 같아.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리다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고 있잖아. 그거야 말로 너의 어리광이야. 넌 이제 네 앞길을 결정할 수 있어. 아, 그래서 너 스스로 결정한 거야? 네가 결정한 너의 미래에는 내가 없었니? 받아, 대답해봐. 내 물음에 대답을 해! 왜 우리의 미래를 너 혼자서 결정해 버린 건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래, 이제 만날 수 없겠지. 넌 맺고 끊는 건 확실한 여자였으니까. 조금 지나면 휴대전화 번호도 바뀔 테고, 미니홈피 주소도 바뀔 거야. 물론 일촌은 이미 끊어졌겠지. 어쩌면 이사를 할지도 모르겠네. 옛날부터 학교가 멀다고 투덜거렸잖아. 그래, 이 소파에 앉아서 투덜거렸었잖아. 이 집에서. 

나야말로 이사를 해야 될 것 같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9
13:04:09 

 

병장 안재현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에 지우는게 불가능 한건 같이한 물건이나 장소 그녀의 향기 때문이죠 2009-01-29
11:59:49
  

 

상병 이지훈 
  캬오 2009-01-29
12:3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