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독서후기] 패션에 관한 잡담 - 번외(中)  
상병 김무준   2008-11-21 13:30:08, 조회: 324, 추천:1 

셋 - 합리적인 소비를 위하여





관광공사 말단 비정규직 노동자로 출발해 람보 투어를 마쳤다. 투어를 마치고 나니 가이드의 눈에 띄어 등짝에 유선 전화기를 업고 다니는 비정규직 가이드가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홍보부에 발령을 받았다. 그게 지난 3월. 등에 달린 유선 전화기의 배터리 두 칸을 채우고 몇 달 뒤 일이었다.

꼬박 입대 1주년이던 7월 나는 권력의 상징,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전설의 배터리 세 칸을 채울 수 있었고 정들었던 홍보부부장과 이별했고 우리를 인솔하던 홍보부실장과 한 판 신나게 스파링을 떴고 그는 동굴탐사부로 낙하산 인사를 받고 나는 부실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7월. 새로운 홍보부부장은 교대출신의 엘리트였지만 비정규직 직원들을 ‘초딩’처럼 대해주기 시작했다. 거기다 전 실장이 올라가며 새로운 비정규 직원이 내려왔는데, 폭탄이었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

담배를 끊었던 3년 하고도 11개월 만에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펴도 이 고민과 스트레스와 잡념과 온갖 화가 무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폈다.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주인공이 말했던 것처럼. ‘이거라도 태우면 속이 덜 탈것 같아서.’

그래도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었던 것이, 비정규직에게 지원되는 한 달 다섯 갑의 디스는 단 한 번도 펴 본 적 없다. 이른 나이에 나라에 해줄 것이 없어 일찍 관광공사에 들어온 나는, 애국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인지라 국산 담배는 피질 않는다. 일종의 긍지(Dignity)랄까. 회식을 해도 월말에 아무리 담배가 없어도 죽을 것 같이 화가 나도 말보로가 없으면 안 폈지 디스나 타임 레종 따위를 피지 않았다.

닐 부어맨(Neil boorman)은 클럽 디제이를 비롯해 영국 패션잡지의 편집장 등을 지내며 대중문화와 유행의 중심에 선 사람이었다. 에비앙 생수를 마시고, 콜게이트 치약으로 이를 닦고, 아디다스를 신처럼 떠받들며, 핼무트 랭의 자켓을 아끼는. 자신이 얻은 부를 쓸 줄 알았고, 브랜드가 가꿔오는 이미지를 그대로 이용해 자신을 꾸밀 줄 알았다. 그런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 제품을 런던 시내에서 불태워 버렸다. 아주 활활.

Bonfire of the brands (영국판 원제가 맞나 모르겠다)는 한국에 들어오며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다. 사실 닐 부어맨이 태운 것의 목록을 보면 랄프로렌이나 아디다스와 같은 브랜드가 많지 루이비통은 몇 가지되질 않는다. 21,000 파운드 (환율을 모르니 대략 우리돈 삼천 만 원정도 될까?) 의 물건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나는 왜 아디다스를 불태웠는가?>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제목에 왜 루이비통이 들어갔을까.

거리에 나가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보는 물건이 루이비통의 핸드백이다. 그 중에는 진짜도 있을 것이고 가짜도 있을 것이다. 루이비통의 로고와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핸드백은 대부분 여인네들이 지니고 있다. 뽀송뽀송한 고딩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까지. 세대를 불문하고 한국 여성에게 루이비통 핸드백은 ‘Must have item'인 듯하다.

『사치품 시장에서는 이런 소품 수준의 브랜드 제품들을 ‘진입단계 상품’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브랜드들은 비교적 가격이 높기는 해도 일반인들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200파운드짜리 선글라스는 사실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하다. 향수는 향기 좋은 물이 담긴 유리병일 뿐이다. 우리는 그 가격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물건들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제조원가라고 해봤자 몇 푼 되지도 않을 물건들을 그렇게 비싼 값에 산다는 것은 그 사람이 브랜드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사람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선글라스를 사는 것이 아니라 안경다리에 찍힌 로고를 사는 것이다. -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中』

<럭셔리>에서도 지적되었듯 브랜드 회사들은 향수, 지갑, 벨트, 핸드백 따위에 열을 올려 생산한다. 손쉽게 브랜드의 이미지를 값싸게 얻을 수 있는 방법. 브랜드 회사들은 심리학자를 고용해 소비심리를 연구했고, 광고를 뿌리고, 돈을 긁어모았다. 명품업체의 기업화는 순전히 아르노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르노가 아니었더라도 지금처럼 바뀌었으리라.

그럼 이 명품들에 수백의 돈을 쏟아 부으며 핸드백을 소유할 정도로 이것이 가치 있는가?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에르메스 따위의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가 값싼 노동력이 제공되는 나라에서 제품을 생산한다. 일주일에 60~70시간 일을 시킨다든가 한 달 만 원 정도에 노동자를 부려먹는다든가 하는 일은 약과다. <럭셔리>에서 그려지듯 공장주들은 아이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다리를 분질러 기형적인 모습으로 뼈를 붙게 만들어 최소한의 식사만을 제공하고 공장에서 수작업을 시킨다. 환풍기는 돌아갈 리가 없다. 가죽을 세공하는 데서 나오는 썩은 공기와 나갈 듯 말 듯 한 불빛은 부모에게 팔려온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그 손 끝에서 하나의 핸드백이 만들어져 나온다. 구찌나 루이비통 등. 최저비용으로 생산 된 명품은 부풀리고 부풀려져 명품이란 브랜드 태그를 달고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영국 전통의 브랜드라는 버버리는 중국에서 생산되고, 돌체 앤 가바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의 이탈리아 브랜드도 중국에서 생산된다. 브랜드의 가치를 사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닐 부어맨은 아디다스 제품으로 몸을 도배한들 웨인 루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신발을 불태웠다.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여행용 트렁크를 생산하던 루이비통도 이백년이 채 되지 않았다. 코코 샤넬의 샤넬도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르마니도 반백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을 뿐이다. 명품이 ‘명품’이 된 역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짧다. 그럼 어떻게 그들은 이탈리아 대리석 등으로 표현되는 견고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까. 광고 때문이다.

『대부분의 광고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라고 부추긴다. 그것들을 사고 돈을 쓸수록 그만큼 더 가난해질 뿐임에도 불구하고 광고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더 풍족해 질 거라고 이야기한다. - <존 버거(John berger) - 사물을 보는 시각(Way of seeing) 中>』

나는 이곳에 패션에 관한 잡담을 연재하며, 언젠가는 세계 패션시장을 주도하는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는 꿈 많은 청년이다. 돌체 앤 가바나에 디자이너로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런칭하고픈 욕심이 있다. 또한 <패션에 관한 잡담 - 번외(上)>에서 우리는 옷이 주는 이미지와 옷 자체에 대한 소유욕에 의해 옷을 산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텍스트와, <스타일이란?> 따위의 잡문에서 자신만의 스타일과 이미지를 만들어야한다 주장했다. 그럼 왜 <럭셔리>,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갖고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같은 책들을 읽고 있느냐.

합리적인 생산과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서는 제품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知彼知己 百戰不敗라 했던가. 잡지를 보고, 매 시즌 브랜드의 컬렉션을 찾아 공부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까닭은 알기 위해서다. 내 자신을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기존에 디자이너들이 제시해 놓은 옷을 고르고 나에게 맞게 해석한다.

『나의 개성을 잘 드러내주는 상징들을 자연스럽게 내 주위에 모아들이고, 나의 개성이 빛을 잃게 만드는 물건들은 멀리해야 한다. 기피해야 할 브랜드들을 멀리하는 일은 그 자체가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특히 소비문화가 전염성 강한 돌림병처럼 널리 퍼져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브랜드를 차별해서 대하고, 브랜드를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무조건적인 브랜드 소비 형태보다 훨씬 우아해 보인다. -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中』

닐 부어맨은 브랜드 화형식 이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패션잡지 편집장을 지냈을 만큼 충분히 브랜드와 패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효과적으로 소비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는 브랜드를 기부하거나 찢어버리거나 할 수 있었다. 불을 택한 것은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 일을 상징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나는 책을 완독했어도 여전히 말보로 레드만 피운다. 그럼 내가 브리티쉬가 되고 싶어 말보로를 피우느냐. 그건 아니다. 국산 담배에서 오는 특유의 필터 맛이 싫기 때문이다. 시큼하고도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 씁쓸함이 싫다. 독한 담배가 좋아 블랙잭 블랙을 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필터 맛 때문에 포기했다. 담배는 펴야겠고, 말보로는 구하기 힘들고, 돈도 있고, 디스도 나오지만 나는 국산 담배는 피지 않는다. 사실 내 스트레스마저 관광공사의 기념품으로 해결하지는 않겠다는 무언의 저항도 있다. 흡연에 긍지가 있겠냐마는.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폴 스미스의 라이터가 갖고 싶고, 이브 생 로랑의 파란 수트가 갖고 싶고, 벨루티의 늑대발자국이 찍힌 브라운 슈즈가 갖고 싶다. 하지만 카드빚을 내서 내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월급을 쪼개 라이터를 지르지도 않는다. 공부할 책을 사고, 잡지를 사고, 화장품 따위를 살 뿐이다. 스크랩 해놓은 수많은 옷들을 사고 그 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저, 날고 기는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표현을 머릿속에 담아 둔다.

여전히 동대문이나 홍대나 남포동, 서면 같은 곳에 가 옷을 사고 어느 브랜드인지는 알지도 못한 채 스트릿 매장을 들락거린다. 마음에 들면 적절한 가격에 타협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아하는 브랜드라도 사지 않는다.

『나처럼 브랜드에 묻혀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구입하는 거의 모든 제품은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심사숙고 끝에 고른 것들이지만 사실 그중 대부분이 잡지나 책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중략… 내가 사는 제품들은 지속적으로 나의 자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에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 너무 집착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우아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中』

우리는 명품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도배해도 조인성이나 송승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보이고는 싶다. 닐 부어맨은 말했다. ‘나는 IBM도 아니고 MAC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내 자신일 뿐이다.’ 우리가 빅뱅이나 비가 될 필요는 없다. 유행을 쫓을 필요도, 명품에 돈다발을 때려 박을 이유도 없다. 어느 브랜드의 옷인지, 누가 입는 스타일인지를 고민하고 알아 볼 필요도 전혀 없다. 내게 맞는, 내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면 그 뿐이다.

그게 어렵다는 게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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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11:14 

 

상병 양 현 
18.17.54.124   그쵸, 그게 어렵다는게 문제죠. 2008-11-21
13:43:21
 

 

상병 이우중 
16.32.7.127   전 글을 많이 쓰지는 않지만 몽블랑의 마이스터슈틱이 그렇게 갖고 싶더라구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산의 이름을 회사의 명칭으로 가져다 쓴 독일 회사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된, 정확히 말하면 이문열의 소설로부터 시작된 몽블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어서요. 2008-11-21
14:19:59
 

 

병장 이동석 
40.6.1.206   개인적으로 이건 독서후기의 이름으로 <가지로>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좀 정치색을 띤다고 그게 마음에 들었냐고요? 
알량한 속내 뻔하다고요? 
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것보다, 
무엇보다, 정말 멋있잖습니까. 

박수 한번 주세요- 
<가지로> 박수를- 2008-11-21
14:51:16
 

 

병장 이동석 
40.6.1.206   일종의 추천사인데, 어떤 분야든 그 분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겐 무엇보다 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간의 그 어떤 글 보다도 철학이 또렷하군요. 

뭐 제가 평가를 하건 말건 신경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일종의 감상-입니다. 
무준님이 패션과 브랜드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쩌면 저는 '소비'에 대한 힌트 하나를 얻었으니까요. 

아무쪼록 
'돌잔치 가봤나'에서 꼭 꿈을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2008-11-21
15:06:16
 

 

병장 고은호 
20.1.17.108   후우.. 좋네요. 
이미지의 소비라... 

정말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사는게 아니라,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를 과시하기 위해 사는게 아닌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네요. 

더불어 정말 나에게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 
까지도 생각하게 되고요.(웃음) 

과연 번외(下)로 또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지 기대가 되는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8-11-21
17:10:47
 

 

병장 정병훈 
16.35.11.87   음... 멋집니다. 이정도의 글을 뽑아 낼수 있는 무준님께 박수를 치며, 

'브랜드의 가치를 사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 부분이 느끼는 바가 크네요. 

한 예로, 까르프라는 마트의 물품이 싼 이유도 비슷한 이유라고 하더군요. 그 다음부턴 이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같은 이유로 명품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2008-11-21
20:50:11
 

 

일병 신민재 
50.1.4.50   잘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나타내고 평가하는것이 
그 사람의 지식, 성격, 능력 등 내적인 미(美)뿐만이 아니라 
그사람의 패션, 외모 등 외적인 미(美) 또한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걸 표현하기가 참 난감했었는데, 이 글에서 그것을 잘 표현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브랜드의 옷인지, 누가 입는 스타일인지를 고민하고 알아 볼 필요도 전혀 없다. 내게 맞는, 내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면 그 뿐이다.' 

이부분이 참 와닿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란 동물이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지만, 
요즘 사회는(제 개인적은 느낌이지만) 너무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좀더 자신만의 색깔을 내며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2008-11-22
11: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