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는 사람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이유
연애하는 사람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이유
한때 절친했던 99학번 여자 선배 중에 연애 시작한 후배들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누나가 있었다. 연애 시작한 사람들은 얼굴부터가 다르다는 게 그 누나의 주장이었는데, 이제 나도 들어오는 신병의 애인 유무를 얼굴만 보고도 알아맞히는 경지에 이르고 나니 그 말이 일리가 있는 얘기였구나 싶다.
일단 연애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대하는 선이 분명하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이름모를 확신 같은 게 배어나온다. 챙길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를 위해 결단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강단, 늬들이 아무리 발광하든 내 뒤엔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무언의 아우라 같은 것. 물론 누구에게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겠지만,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과 자기‘가’ 사랑하는 애인은 분명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그런 능동의 확신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사람의 인상을 둥글게 만들어놓는다. 쾌활한 가운데서도 무언가 헛헛해보이는 구석이 사람마다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이 연애인戀愛人들은 좀체 그런 구석이 안 보인다. 정서의 등뼈가 갖춰진 모습이랄까. 온갖 갈굼 속에도 그의 낯빛만은 번드르하고, 예기치 못한 대응에도 빨리 자신을 찾으며, 누구도 침범치 못하는 생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채워놓은 듯 삶의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건 무당이 제 손님이 아들 뱄다고 우길 때 쓰는 화법과 유사하므로 객관적인 근거 따위는 쥐뿔 없다. 또 알고보니 그렇더라는, 나중에 끼워맞춘 게 너무 티나는 거 아니냐는 혐의에도 그닥 자유롭지 못하고, 뭐 내가 무당이 아닌 다음에야 별로 자유롭고 싶은 생각도 없다. 더구나 수천년 동안 주워섬겨온 ‘알고보니 운명이어써’ 타령으로도 역겨워 죽겠는데 이젠 아예 증명할 길도 없는 인상으로 ‘연애인’의 우성형질까지 찾으려 드느냐는 몇몇 사람들의 우생학적 히스테리에 대해서도 별로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실은 나야말로 연애에 적합한, 경쟁력있는 인격 같은 거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고 앞으로 그걸 갖추고픈 의사는 더더욱 없는 연애 무경험자 & 반골주의자라는 것만 밝혀두고 싶다. 다만 전국민의 대다수가 이렇게 연애에 미쳐 날뛰고 있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었고, 그게 ‘흐흐 너도 해보면 알아’ 따위의, 첫경험 치르고 난 고딩들이 시시덕댈 때나 쓰일 그런 멘트 말고 좀 ‘말이 되는’ 방식으로 설명될 길은 없을까를 늘상 고민해 왔다면 고민해 왔다는 정도다.
흔히 빈정 상한다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 사람 마음이란 게 알고 보면 앞뒤 계산이 정확해서, 기쁜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걸 드러내려고 하고 상처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걸 화풀이하려고 든다. 물론 개중에 엄청나게 큰 상처를 받고도 종교에 귀의하여 그것들 모두 나빌레라 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건 한마디로 변태적인 경우고 그걸 정상으로 생각하고 인생 살다간 원인모를 스트레스에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수가 있다. 그만큼 이 마음이란게 우리는 몰라도 그 속으로 차고 더는 게 의외로 칼같다는 걸 해가 갈수록 깨닫는다. 그래서 뭔가 원인 모를 조울증이 지루하게 반복될라치면 혹 자기 마음속의 감정구조가 착취적이지는 않은가 한번쯤 되새겨보는 게 도움이 된다. 쉽게 말해 빈정 상할 일들을 미연에 줄여 두는 게 원만하고 명랑한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연애니 가족이니 하는 인간관계가 사람에게 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제적으로 줄 수 있게 만드는 체제 같단 생각이 자꾸 든다.
참고로 나는 이때까지 친구사이 중 몇몇을 거의 연애에 필적하는 관계로 특화시키는 방법으로 내 감정여닫음을 조절해왔는데, 요즘 들어 그것이 매우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그런 관계는 유지보수가 어렵고, 정이 집중되는 만큼 그 뿌리를 찾지 못하고 쉬이 흩어지기 쉽다. 흔히 친분의 근거가 되는 공동의 경험은 가면 갈수록 자리가 줄고, 과거 파먹는 것도 일이년이면 식상하다. 그리고 있는 대로 정 퍼주는 것도 있을 때 일이지, 날이 갈수록 그 샘이 점점 말라감은 물론, 복학하고 취업이다 직장이다 해서 정신없이 바빠지게 되면 퍼주고 싶어도 시간 없어서 못 퍼주는 사태가 틀림없이 불거질 것이다.
더욱이 나는 사람들과의 친분을 잴 때 서로간의 약점이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나눠질 수 있는가를 종종 기준으로 삼는데, 내가 마더 데레사나 한비야 같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내 경험의 궤적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분양할 수 있는 마음의 평수는 한정되어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내가 애초에 빈틈이 많고 자기 절제가 안돼서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바보’로 캐릭터라이즈시킴으로써, 내 빈틈을 잘라파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그게 가면 갈수록 소모적일뿐더러 남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신의 약점을 안 보여주는 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필요한 외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글을 쓸 때도 맨 살갗을 그대로 내보이기보다는 어떤 스타일을 갖추어 드러내는 것이 내면의 샘을 퍼내는 데 장기적으로 유리하듯이, 굳이 약점을 쉽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기의 겉과 속 사이의 층을 두텁게 만들고 그 층들 사이에 사람을 들게 하는 것이 곧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닐까, 비밀과 약점을 쉽게 내다팔다 내면을 쉬이 바닥내기보다는, 약점을 안 보여주면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게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현명한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놈의 약점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자연히 가까운 몇몇 사람으로 점점 한정되는, 그리고 그것이 종내엔 가족이나 연인의 테두리로 굳어지게 되는 게 자연스런 추세가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제 마음 속이 정을 함부로 퍼줘도 상관없는 화수분이 아닌 다음에야, 결국은 애인이나 가족같은 ‘전형’에 포섭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자기 정쏟음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해온 게 연애고 가족관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예전에 제 여자친구에만 제 속을 다 털어주고 다른 사람에겐 ‘친구’라는 선을 칼같이 긋던, 사람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확히 두는 치들이 못내 미웠었는데, 그런 그들의 처세엔 그렇게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당장에 나라도 그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만 붙잡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타인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제 자신만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걸 봐도 그렇다.
해서, 역시 연애만이 살길이다. 사람에게 정을 주고 그 정을 온전히 돌려받는 것만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에게 무작위로 뻗치는 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주는 인간관계의 틀이 필요한데,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 주고 돌려받는 기쁨들을 효과적으로 추수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낯빛이 그리 두둑할 수 있었던 게다. 맨땅에 씨뿌리는 거랑 이랑 지어넣고 씨뿌리는 거랑 추수의 기쁨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남들 다 하는 것에는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꼭 이렇게 당연한 소리를 일부러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늦봄에 노망나는 소리 죄송하다. - 20060512, cryingkid
병장 한상원 (2006/05/13 03:28:12)
예리한 분석에 저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완전 주관적, 감정적으로 어떤 보살님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됩니다만, 연애한다고 꼭 외롭지 않은건 아닌거 같애요.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요. 존재는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숙명이랄까. 그래도 사랑, 사랑은 뭔가 다른 그 어떤 초월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꺄르륵.
병장 김동석 (2006/05/13 09:03:06)
심하게는, 잠시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에 사무치고, 헤어지고 나서 찾아오는 헛헛함을 견디지 못하여 금세 다른 짝을 꿰차는 '연애중독증' 환자도 있지요. 한 사람에 중독되는 것과, 사랑에 중독되는 것과, 연애에 중독되는 것은 전연 다른 것인데, 이 시대에는 이 '연애중독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게 문제에요.
병장 노지훈 (2006/05/14 09:42:03)
대현씨 배신이오. 솔로부대여 단결하라!(웃음)
병장 한상원 (2006/05/14 12:07:14)
지훈/ 우워어어-!(후다닥)
상병 송희석 (2006/05/14 15:55:58)
으흠. 저한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글이군요. 헛헛!
상병 박종민 (2006/05/14 20:05:24)
아. 끄덕끄덕 너무 좋아요.
하사 윤석호 (2006/05/18 19:44:20)
바야흐로 연애시대가 도래했으니,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가는 것은 이미 늦었으니, 다음 시대인 솔로시대를 겨냥하여, 있는 애인님도 차버리는 센스를 발휘, 시대를 한발짝 앞서 나가는 멋쟁이님이 되어보는건 어떨지 싶어요.(웃음)
대현// 부락의 근황을 알고 싶소만.. 71사에 글을 남길수 없다는게 이렇게 큰 아픔이었던가!
병장 김석윤 (2006/05/20 21:19:35)
솔로생활 5년에 말년이라 더더욱 외로워죽겠는데 대현님 '노망 나는 소리'가 제 가슴에 불을 지르는군요.. 얼른 소화기나 찾아야지.(울음)
병장 박진우 (2006/05/22 10:26:47)
주말에 연애시대 1권을 읽은게 큰 화근.
연애하고 싶어졌다. 이런.
상병 손현 (2006/05/30 14:44:22)
대현님의 유쾌한 글에 덧붙여 오른쪽 구석탱이에 낙관마냥 있는 cryingkid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것은 왜인지..
글 잘 읽었어요..
병장 박진우 (2006/05/30 17:37:15)
직접 만나서 들은 결과.
놀랍게도 이 글은 연애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보니 음....고개를 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