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선택에는 아무리 하찮은 이유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걸맞는 이유가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 언어영역 지문에서 '엔트로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을 기억한다. 누군가의 독서후기를 보았다.. 일부러 눈을 감는다. 제목만 읽었으니까.. 주르륵 스크롤을 내려 답글들만 읽어본다. 결심한다. 이 책을 읽어봐야겠구나.. 굉장히 피곤한 버릇이 생겼는데 내 책이 아닌 이상 몰입도가 떨어진다.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책의 첫장에.. 오늘 날짜를 기록하고, 책을 산 장소를 기록하고, 책을 보고 있는 장소를 기록한다. 끝으로 내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적는다. 이 과정부터 참 행복하다. 그래서... 샀다. 읽었다. 이젠, 그 누군가의 독서후기를 읽을 자신이 생겼으며 이미 내가 본 책이기 때문에 약간은 가치가 떨어지는 지식(*주1)이 되어버렸다. 

1. 엔트로피란 ? (사전적 정의)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이것에 따르면 우주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한다. 결국 우리는 에너지를 활용하여 어떠한 일을 할때마다 일한 만큼 다시 쓸 수 없는 쓰레기를 양산해내는 것이다. 

(일상적 정의)
모든 것이 엔트로피로 귀결될 수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을 보는 관점인 세계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에너지 분야, 경제학, 농업, 수송, 도시화, 군대, 교육, 보건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된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생산물을 만들어 낸다 하였을때, 사용전의 에너지와 사용후의 에너지는.. 그 총량에는 변함이 없지만, 가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변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석탄, 석유등의 화석연료가 사용후에는... 이산화탄소, 타고 남은 재 등 다시 활용하지 못하는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등으로 미루어 볼때에 이 엔트로피 법칙은 물리학의 테두리를 넘어 모든 일상에 적용될 수 있는 그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섬뜩한 이야기지만.. 맞는 것 같다.

(좀더 가까운 일상적 정의)
'나'에게로 들어오는 지식과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오히려 보다 나은 결정을 내리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말콤 글래드웰, '블링크'라는 책에서 상세히 언급된다..) 한편, 앎이 늘어남에 따라.. 세상과 사물을 보는 눈은 보다 고고해질 수 있고,(혹은 더 분석적이 되거나 염세적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오히려 불행한 개인을 만들어낼 공산이 크다. 이 점에 대해서 더 나은 논의를 해보는 것은 나의 영역을 벗어난다.. 

2. 패러다임의 변화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은 역사는.. 순환과 몰락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태초에 절대자는 완벽한 세계를 구현해 내 었고, 인간은 이것을 이용해 삶을 영위함에 따라 완벽한 세계를 '갉아먹으며' 살았다고 전한다. 판도라의 상자이야기도 당초 완벽했던 세상이 지식의 등장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변한 것은.. 소르본 대학의 자크 튀르고 교수라는 사람이,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는 축적의 산물임과 동시에 진보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다음이다. 이후, 그것은 뉴턴의 기계론, 데카르트의 철학, 로크의 사회계약론, 베이컨의 경험론, A.스미스의 경제학적 관점을 통해 공고해지며.. 서방 세계의 근본 패러다임으로 정착되게 된다. 현재 에너지 과잉의 세계는 이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은 서양의 침탈을 겪었던 제 3세계로 치부되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3. 결론
저자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고 엔트로피 적인 세상을 변화시키고 '저'엔트로피의 상태로 나아가 결국 태양에너지를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려면... 현재 폐쇄계(*주2)에 있는 지구의 에너지를 적게 쓰려고 노력을 하거나..(이런 노력도 결국에는 무위에 그친다고 말하다) 아니면, '극적'인 가치 체계의 변혁을 말한다. 이를테면 산업화를 부정하고 노동집약적인 방식을 촉구하며, 과거의 자급자족적 생활 양태로 '변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1) 군생활의 엔트로피
우리는 과연 어떠한 엔트로피 상태에 있는가. 고 엔트로피 인가, 저 엔트로피 인가.. 단연코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은(지나친 일반화이지만) 상당히 저 엔트로피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 굉장히 자급자족적인 생활양태도 가능하며, 가장 적게는 하나의 분대 단위..소대 단위, 중대 단위의 자전적인 구성 또한 가능하다. 저자가 말하는 소규모 공동체의 중요성이 이 안에서 찬란하게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의 쓰임은 상당히 적다. 기계를 사용하여 지구 전체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대신 우리는 두손으로 하는 작업들이 산재해 있다. 어줍잖은 제설작전에는 우리의 손과 발이 투입되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하고,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의 지력을 회복시키기도 한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으로 극한의 추위이거나, 극도로 더운 경우에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저자가 걱정하는 항생제의 오남용의 결과도 의무대의 이용이 제한적인 이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외부를 구성하는 물질적 측면이 아닌, 우리의 의식체계를 더듬어 보아도.. 더욱 결론은 확고해 진다. 개인의 측면으로 돌아와보아도,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 작업 양태, 큰 변화없는 인간관계(물론, 들어오고 떠남은 존재하나..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나의 떠남과 들어옴은 기간중에 두어번 정도밖에 없지 않은가)와 가치체계의 혼란 없이 그저 무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체계는 생각 자체를 말살하기에 이른다. 유혹 또한 자리할 여유가 없다. 밖으로의 소통은 전화 내지는 편지의 유이한 매개로밖에 진행되지 않을터, 하물며.. 엔트로피를 극대화 시키는 여인네의 향기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것의 말살이다.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닌 말살이기에, 저 엔트로피의 상태를 지향하기에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물론 예외는 있다. 한 곳에서 엔트로피 증가를 역행시키려면 다른 곳에서의 엔트로피를 증가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국 주변환경의 전체 엔트로피는 늘어난다. 라고 저자는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A의 나태함으로 비롯된 엔트로피의 감소분이, B의 엔트로피의 증가분을 상쇄하지 못한다면.. 결국 A,B가 속한 집단의 엔트로피는 증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하는 일에만 소홀히 하지 않으면 된다.

(2) 다양성과 전문화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지나친 전문화는 종의 멸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어떤 종이 특정한 생태계 내에서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즉 전환에 대비할 수 있는 융통성과 다양성을 구비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는.. 전문화의 시대이다. 하나의 특화된 영역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1개 이상의 외국어를 희한하게 잘한다거나, 경제학, 법학, 물리학, 화학, 컴퓨터공학, 철학, 정치학, 아부, 작업, 화술, .... 기타의 모든 것. 을 포함하여 1개 이상의 전문성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취직을 하든.. 학자가 되든, 공무원이 되든..) 
저자는 이러한 시대가, 에너지의 과잉을 불러온 세계관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한 세계관이 이렇게 편협한 사고방식을 개인에게 주입하였고, 전문성을 키우라는 강요를 알게모르게 받았다고 한다. 그래.. 우리는 그렇다. 전 교육부 장관이었던 해골같이 생긴 어떠한 아저씨..의 말처럼, 하나만 잘하면 대학간다. 라고도 이야기 했었고, 1개 이상의 자격증 따위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의 전문성을 인정받고자 토익을 볼라치면, 이젠 토익의 시대는 갔고 토플정도는 해야한다. PBT를 하던 사람들은 CBT로의 전환에 깜짝 놀랐고, CBT를 준비하던 사람은 iBT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또한번 깜짝 놀란다. 전문화, 전문화, 전문화.. 우리는 그릇된 세계관(고 엔트로피적 세계관)에 의하여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몽매한 개인에게 저 엔트로피적 사고방식을 갖게 하려면, 다양성과 융통성을 위한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를테면 세계의 경험들을(지식이 아닌) NUS(*주3)의 그들과 동등한 조건 하에서 받아들이려면 그에 합당한 언어적 소양은 가지고 있어야 하며,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자는 자연과학내지는 인문과학의 영역까지.. 그 개괄적인 이해정도는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전문성에 천착된 삶을 사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 생각해볼 점
지식의 과잉 상태가 과연 좋은 일인가 ? 속된 말로, 공부하는게 무슨 소용인가. 사실(지식과 정보)이라고 믿는 것들을 더 많이 알고, 세상을 더 잘 이해한다고 믿는 것이.. 알고보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관한 '사실'의 양은 몇년마다 두배, 세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 결과 세상이 두 배 더 질서정연해졌다고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지 않은가. '아'의 삶에 있어서도, 스무살의 나와 스물 두살의 내가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스무살보다 지금이 더 질서를 갖는 삶의 모습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경제를 예측(이 용어 자체도 모순이지만..) 하는 것은, 실제로 더 어려워 졌다. 자본주의의 맹아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현대로 와도.. 혼란은 극심하다. 왜 그럴까. 총명한 경제사상가들이 많이 나왔고, 경제학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왜냐면, 지식은 축적되니까... 스미스에 맑스를 섞고, 누구를 더하고 누구를 더하면 더 나은 결론이 나와야 하고, 더 나은 경제체계가 나와야 하는데 더 어려워 졌다. 차이나 리스크가 커져서, 이젠 중국 증시가 기침만 해도..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비틀거린다. 거대 국가가 이런데, 하물며 개인의 측면은 말해 무엇하랴. 금융공학의 발달로, 개인의 이익은 물론, 국가적 기업적 이익은 증대될 것이라는 순수한 기대는.. 깨진지 오래이다. 뭘 얼마나 배워야 할지, 지식의 과잉상태가 과연 좋은 것인가.

작년 가을, 절친한 동기놈에게 물었었다. '과연 인간은 더똑똑해졌을까'.. 어차피 멍청한 두 놈들간의 대화이기에 선문답으로밖에 흐를수밖에 없었지만, 고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머지 않은 과거의 중세의 누군가.. 이 사람들은 당대의 모든 지식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식이 분화되고, 더 분화되고 세분화됨에 따라.. 모든 지식은 커녕, 단 두가지 학문을 섞는 작업조차 힘들어 졌고, 그것을 속되다.. 라고 치부해 버린다. 다시 묻는다. 똑똑해졌는가.. 그리고 지식의 과잉 상태가 개인에게 옳은 일인가.. 그러면 책을 덮어야 하나 ? 불가나 도가에서 이야기 하는, 혹은 동양화의 여백의 미를 연상시키는 안빈낙도 내지는 안분지족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리 해야 하나. 이 또한 이미 일정정도의 지위를 획득한 서방의 사다리 걷어차기 라고 표현 될 수 있는 오만일까..


*주1 :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다. 기 학습한 지식이나 기 습득한 정보는 하등 가치 없는 허섭스레기로 치부해버리는 그것이다. 

**주2 : 지구가, 폐쇄계인가 개방계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한창이란다. 폐쇄계라 함은 두꺼운 대기층에 갇혀, 지구 내부의 에너지로만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이고, 개방계는.. 태양에너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폐쇄계라 이야기 한다. 과거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 그리고 MD를 끊임없이 주장하는 미국의 일부 매 아저씨들이 보면 욕할 소리다. 이미 지구는 우주적으로 개방되었고, 개방계라고 이야기 하니까..

*** 주3 : 순전히 필자의 경험이다. 동남아 여행중 싱가포르에서 아시아 5대 대학이라고 손꼽히고, 세계 20위권 대학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NUS(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에 견학을 갔을때에.. 그 중앙도서관을 찾아가, 경비 아저씨의 허락을 받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방대한 지식의 양에 숨이 턱턱 막혔었고(나에게는 '원서'였지만 그들에게는.. 모국어로 쓰여진 한낱 책에 불과했다).. 열정적으로 스터디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틈바구니에 잠시 껴서 경청했었다.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때 결심했었다. 절대로, 언어 격차(Language Divide)에서 비롯되는 정보 격차(Information Divide)를 겪지 말자고. 그것은 너무 슬픈일이지 않겠는가.. 그들과 동등한 조건하에 세상의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데.. 그 길이 요원한 것이 슬프다..


...순전히 개인적 아집으로 분류해놓은 카테고리는 독서후기인데, 전혀 독서후기스럽지가 않다. 책에 대한 충실한 요약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순전히 고집스럽게.. '나름의 해석'을 내려버렸고, 향후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난삽한 생각들만 던져주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