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하루키를 위한 변명 (상병 허원영/051002) 
 
 
 
 

변명의 발단

  하루키만큼 우리나라에서 잘 팔린 일본 소설가는 없을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에서 마루야마 겐지에 이르는 수많은 일본 소설가들이 우리나라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하루키는 달랐다. 90년대 초반부터 가히 '하루키 현상'이라 할 만큼 인기몰이를 했고, 그 여파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남아 있다.「해변의 카프카」가 출간된 직후에는 지하철을 타면 한 칸에 한 명 씩 그 책을 들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인기에는 항상 비슷한 수준의 비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시류에 편승해 한 몫 거두려는 글쟁이'라는 비판은 흔한 쪽에 속한다. 그의 문학성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실제에 비해 너무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 역시 많다. 심지어는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까지 있다.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변명을 해보려 한다. 물론 누군가를 위해 변명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크든 작든 일종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더구나 하루키가 나에게 그런 변명을 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다. 이런 일은 아무런 이익이 없고, 변명이 통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한 변명이 에밀 졸라처럼 정의감에 불타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사회 발전에 도움이라도 되겠지만, 딱히 그러한 정당성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키의 소설, 혹은 그의 문학 전체를 놓고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내 나름대로 변명을 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건 부당하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여타의 비슷한 입지에 있는 작가들에 비해 유독 하루키만이 혹독한 비판을 받는 이유를 나는 파헤쳐 보고 싶다. 과연 어떤 메카니즘이 작용하여 독자가 한 작가에게 절교를 선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걸까. 무엇이 그토록 독자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그의 작품을 던져버리게 하는 걸까. 나는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과장되었고, 어떤 점이 부당한지 가리켜 보일 것이다.
  그 전에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나는 그의 작품의 해석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피할 것이다.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소설들 중에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 천 명의 독자가 천 권의 책을 만드는 것과 같다. 결론나지 않을 이야기로 읽는 이의 시간을 뺏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오로지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싶다. 그의 작품 안팎의 어떤 면이 반감을 불러 일으키고, 어떤 사고의 흐름을 따라 무수한 비판이 생겨나게 되는가, 이런 것들을 알고 싶다. 이 글에 작품 자체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이 나의 의도이며, 이 글이 가지는 나름의 한계이다.


참을 수 없는 속독의 가벼움

  '하루키 비판'을 관통하는 가장 큰 축은, 그와 그의 작품이 실제에 비해 너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다. 문학성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주장은(과연 그 문학성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흔하며, 그의 작품이 과대평가 되었다는 주장 역시 끊이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하루키가 시대적 흐름에서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 하루키는 '반짝'하고 말 문학적 엔터테이너이며, 그의 글 역시 그 이상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을 살펴보면 글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읽어낸 비판은 고사하고 하나의 작품을 어떤 구조물로 읽어내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어떠한 소설적 구조를 이루고 있고, 그 중 어느 부분이 허약하며 어떤 내용이 빈약한 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역시 없다. 단편적인 평가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의 원인은 무엇보다 하루키의 글이 읽기 쉽다는 데 있다. 그의 소설은 잘 읽힌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난해한 단어 또는 문장이 별로 없다. 이야기의 구성 또한 복잡하지 않고, 약간 꼬여있다 하더라도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캐릭터의 성격은 명확하며, 사건의 흐름 역시 따라가기 쉽다. 이런 글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감을 얻는다. 몇 번씩이나 앞을 펼쳐보고 사전을 들춰보며 책을 읽은 경우에는 움츠러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순식간에 다 읽은 경우에는 어깨를 쫙 펴고 고개를 쳐들 수 있게 된다. 이런 경우 성급한 독자들은 '작품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차분하게 앞과 뒤를 살피며 읽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모른다. 정작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빨리 읽은 만큼' 급하게 머릿속에 들어온 '덜 익은' 내용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엉성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과연 누가 사르트르의「구토」를 우습게 보는가? 어떤 이가 카프카의「심판」을 가치없는 소설이라고 평가절하 할 수 있는가? 읽지 못했거나 읽다 포기한 이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고, 다 읽은 이들은 힘들게 읽은 만큼 그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이건 말하자면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인간의 심리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로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리 높게 평가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인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남아 있다.
  이런 요인과 더불어, 하루키의 작품이 평가절하 당하는 데는 독자들이 작품들 사이의 연관성을 눈여겨 보지 않는 것도 한 몫 한다. 작품 내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지만, 눈치빠른 독자라면「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해변의 카프카」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한 작품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작가가 여러 작품을 써나가는 이상 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게 마련이다. 하루키처럼 의도적으로 연관성을 부여하는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이 점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까뮈의 말로 대신하겠다.

  [……]사람들은 흔히 한 창조자의 작품을 각기 따로 떨어진 별개의 증언들의 연속으로 간주하곤 한다. 이때 그들은 예술가와 글쟁이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의 심오한 사상은 부단히 생성, 변모하면서 한 생애의 경험과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모습이 다듬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의 하나뿐인 창조는 그가 차례로 내놓는 작품들의 연속적이고 다양한 모습들 속에서 견고해져간다. 어떤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을 서로 보완해주고 수정해주거나 또는 미진한 것을 만회시켜주고 나아가서는 부정하기도 한다. 만약 창조를 종결짓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나는 할 말을 다했다'라는 눈먼 예술가의 득의양양하고 환상적인 외침이 아니라 창조자의 죽음이다. 죽음은 그의 경험을 정지시키고 그의 천재의 책을 닫아버리는 것이다.[……](강조:인용자)

  하루키와 그의 작품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사실 '작품 외적인' 측면에서는 많이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문학사상사의 요란한 광고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문학작품은 명품 핸드백과 다를 바 없는 상품이고, 많이 팔기 위해서는 과대포장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상품은 객관적 평가 기준이 없는 소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적어도 과대광고라는 이유로 고발당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그들은 하루키를 '세기의 작가'라 칭하며 그의 작품들을 '명작'이라 말한다.
  그렇지만 출판사의 광고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출판사는 어디까지나 기업이며, 그들의 광고활동은 작품의 직접적인 가치와 커다란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악령」이나「적과 흑」같은 작품은 아무런 광고가 없어도 모두 명작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결국 하루키의 작품이 대대적인 광고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까지 평가절하한다면 문제가 있다. 하루키의 소설이 '광고보다' 과장되었다는 사실은 옳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의 작품이 읽을 가치가 있는가와 관련이 없는 문제다.


「상실의 시대」신드롬

  하루키 비판의 다른 한 축은 그가 소설에서 '상실'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인기를 얻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하루키가 처녀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줄곧 '상실'을 소재로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상실'이라는 트렌드는 이미 한물 갔고, 따라서 그도 이젠 별볼일 없다는 이야기다. 이 주장 속에는 시대적 조류를 따라간 하루키의 작품 역시 별 볼일 없다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

  먼저 이 점을 생각해 보자. 나는「어둠의 저편」을 제외하고 하루키의 거의 모든 작품을 읽었지만, 그 어느 부분에서도 '상실'이나 '허무'같은 단어를 보지 못했다. 혹시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전 작품을 통틀어 보아도 '상실'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키 하면 '상실'과 '허무'의 작가로 기억되는 걸까?
  여기에는「상실의 시대」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 유명한 문학사상사에서「노르웨이의 숲」을「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광고와 여러 가지 요인이 맞물려 붐을 일으키면서 하루키 하면「상실의 시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제목에 들어간 '상실'이라는 단어는 하루키의 어떤 작품에도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상실'이 그 정도의 키워드가 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초기 '쥐 삼부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양을 둘러싼 모험」)까지는 '상실'이 작품의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댄스 댄스 댄스」에 들어서면 이미 '상실' 하나만으로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우며,「태엽감는 새 연대기」에서는 '상실'이 작품 안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근작인「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나「해변의 카프카」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원작의 제목을 바꾸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 특히 초기작에서 일종의 공허감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작품의 특성을 '상실'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리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옳은 방법도 아니다. 어느 하나의 단어를 키워드로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작품 이해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름길이며, 그 외에도 작품에 접근하는 수많은 방법과 시선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식의 접근이든 단 하나의 방법으로 작품과 작품들을 뭉뚱그려 읽어낼 수는 없다. 작품은 하나의 구(球)와 같은 것이며, 한 쪽을 통해서 보면 그 뒷면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상실'만으로 하루키를 읽어내는 것은 '전공투(全共鬪)'와 같은 학생운동만으로 그와 그의 작품을 한정짓는 것과 같다.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하루키가 '상실'이라는 시류에 몸을 맡긴 것이 아니라 그 시류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노르웨이의 숲」은 일본에서 1988년에 출간된 작품이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이때부터 하루키적인 감수성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상실'이라든가 '쿨함'이라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김연수'나 '김영하'를 비롯한 현대 한국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하루키 소설의 흐름을 보면 그가 딱히 '상실'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설을 쓰고 있으며 어떤 시대적 흐름을 의식하지는 않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나온 그의 소설을 읽고나서 하루키의 '상실' 트렌드가 한물 갔니 어쩌니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21세기인 지금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쓰고 있는데, 독자만이 과거 속에 머리를 묻고 '한물 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를 버릴 때가 되었다?

  위의 두 주장을 모두 포괄하면서 동시에 하루키 비판의 핵심을 차지하는 주장은 바로 '이제는 그를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 논리가 꽤 단순하다. 내가 예전에(혹은 어렸을 때, 사춘기에, 청춘시절에) 읽은 하루키 소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제 뒤돌아보니 그 소설은 너무나 유치했다는 것이다. 내 머리는 컸고 이제는 그런 '말랑말랑한' 소설들을 읽을 시기가 지났다, 는 것이 논리의 핵심이다. 이 논리에 따른 결론이 바로 위의 두 주장이다. 예전에는 인생의 지침서로까지 보이던 그 책이 이제 보니 1) 과장되었고, 2) 시류를 탄, '별 것 아닌' 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어떤 하나의 감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이다. 내가 이런 책을 대단히 여겼다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같은 감정. 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런 감정의 반대급부로 그들은 그의 소설을 비웃고, 그걸 읽는 이들을 '예전의 나'와 같은 존재로 여기며 안타까워한다. 어째서 저런 유치한 책을 읽고 있지? 그들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면서 괴로워 한다. 그것은 '나의 유치했던 시절'을 다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감정에 휩쓸려 소설 나부랭이를 대단하게 여긴 시절. 그는 이미 '거기'에서 벗어났고, 따라서 그 '부끄러운' 시절을 상기시키는 하루키의 인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루키 비판에 열을 낸다. 일종의 '자기혐오'다. 그들은 하루키를 평가절하하면 그들의 과거가 정당화될 것이라 믿는다. 이념을 전향한 사람들이 예전의 믿음에 신랄한 공격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 추론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루키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한때 하루키 작품의 팬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하루키의 작품을 높게 평가했다는 부분을 이야기하자. 사실 이 부분은 별 문제가 되지 못한다. 먼저, 하루키의 작품이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독자가 작품을 높게 평가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문제가 되지 못한다. 작품을 읽은 것은 독자이고, 읽은 것을 바탕으로 - 제대로 읽었든 그렇지 못했든 -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도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가 '독자의 성장'으로 인해 바뀌었다면 그것 역시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평가의 변화가 허술한 비판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독자가 하루키의 작품을 재평가하게 되었다면 먼저 거기에 대해 올바른 근거를 찾는 것이 순서다. 이전에는 대단해 보였던 부분이 지금은 어째서 하찮게 보이는가, 이 점을 먼저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명의 독자가 어느 소설을 대단하게 여겼든 그렇지 않든,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작품에 아무 변화가 없는데 평가가 변했다면 거기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순서가 뒤바뀌면 비판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것은 단순한 투정에 불과하다. 그런 투정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할 필요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다. 그런 글들은 다만 다른 이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다.


결론

  비평은 신중해야 한다. 비평을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는 몇 달 몇 년에 걸쳐서 작품을 '쥐어짜내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한 눈으로 훑고 나서 한 두 마디씩 뱉어내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비평하는 사람 역시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만큼' 아파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작품이 어떤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면, 적어도 세밀하게 훑어보고 전후좌우를 따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이 작품이 어떤 문제점이 있고 어떤 허술함이 있는지 알아낸 뒤에야 하나의 비평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하루키를 옹호하려 한 것이 아니다. 다만 글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을 뿐이다. 칭찬은 쉽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칭찬할 수 있고, 거기에는 대단한 근거가 필요치 않다. 칭찬은 책임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은 다르다. 비판의 영역에 속한 비평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어떤 사람 혹은 그의 창조물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은 그의 노력과 열정과 재능에 대한 책임을 수반한다. 입과 손이 자유로운 이상 우리는 어떤 말도 할 수 있지만, 그 입과 손을 휘두를 자유는 정확히 타인 앞에서 멈춘다. 책임 없이 내던져진 비판은 길거리에 뱉어낸 더러운 가래침과 같다. 그것은 보는 사람 모두를 불쾌하게 하지만 아무도 치우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글이라면, 더구나 모두가 볼 수 있는 가상공간의 글이라면 치우기도 어렵다.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그것이 좀 더 성숙한 자세이며, 이런 글을 읽는 시간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상병 김진수 (2005-10-02 02:26:12)  
서두에서 밝히셨듯이 하루키에 대한 '변호'로서 매우 공감가고, 박수치고 싶은 글이였습니다.
책임 없는 '비판'은 아무것도 낳을 수 없고, 서로를 소모시킬 뿐입니다.  

병장 김남식 (2005-10-02 08:09:35)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전 하루키에 대한 독자들의 비판들이 위에서 말한 것보단 좀더 합리적이었던 것 같네요.  

상병 정치환 (2005-10-02 08:11:30)  
저에게 있어서 하루키의 소설은 이른아침에 일어나 커피한잔에 소파에 기대어 볼수있는 가장 좋은 책인데 말이죠, 사회로 방출되면 집안에다가 하루키소설만 잔뜩 쌓아놓고 읽어봤으면 하는게 제 작은 소망입니다(웃음)  
  
상병 허원영 (2005-10-02 08:41:09)  
남식님 / 저도 그런 합리적인 비판들을 읽어보고 싶군요. 적어도 이 게시판에서는 '합리적인' 비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비판이 합리적이라면 몰라도요.  

병장 이준환 (2005-10-02 14:26:24)  
하루키의 문제가 아닌 하루키를 둘러 싼 논쟁 자체가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 하루키를 잘팔리는 책을 쓰는 작가로 분류할 것이냐, 작품성 있는 책을 쓰는 작가로 분류할 것이냐...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 맞기 마련.

잘팔리는 책은 작품성이 있을 리가 없다. 미디어가 띄워준 스타에 불과하다...이런 식의 공격은.
세월이 지나면 알게되겠지. 
하루키의 책이 세월이 지나 대학 논문 소재로 도서관 한편을 차지할 뿐인 죽어가는 책이 된다면 지금의 하루키 현상은 분명 반짝붐에 불과한 것이 맞을 테고, 그때도 책읽는 재미를 주어 사람들 손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냥 그건 안티팬이나 애독자나 하루키에게나 본전이니까.

무의미한 논쟁이야. 나는 안티들의 의견도 듣기 싫지만, '어둠의 저편'에서의 그 지저분한 광고글로 도배가 된 커버같은건 벗겨내버리고 책을 읽었어. 하루키의 책을 돈주고 사보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지만.
이러쿵 저러쿵 다른 사람들의 잔소리는 읽는 순간 손해보는 느낌이지.

하루키의 책은 광고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읽지만, 비평을 접한다 해서 읽지 않는다거나 읽은 것을 후회한다거나, 자기자신의 느낌이 초라하다고 느낀다거나 하지도 않아. 

하루키와 절교한 사람?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내가 사는 지구에 존재할줄이야.  

상병 허원영 (2005-10-02 16:19:48)  
준환님 / 준환님의 개인적인 감정이야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굳이 반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보이는군요. 더구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보는 글이라면요.  

병장 박성용 (2005-10-02 17:00:05)  
저는 하루키가 참 대단한 작가라고 봅니다. 대단하지 않다면 이런 논의조차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하루키에 대한 비판이든 하루키에 대한 옹호든 모든 것은 독자의 판단이겠죠.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들은 계속 좋아하면 될테고, 싫어하는 이들은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면 될테니. 
원영씨의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는 새겨 들을 만한 이야기군요.  

병장 한상천 (2005-10-02 20:53:33)  
전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아주 좋아 합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냈었고 그 기억을 연장선상에서 3년간 혼란속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처음 책을 읽었을때는 숨막히는 감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의 소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의 유년시절의 아픈 추억입니다.

그 의 첫 책을 읽고나서 근간의 책을 제외하고는 많은 책을 읽고 느낀점이라면,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몇편의 책, 몇권의 단편만으로 그를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장편들은 대부분 단편의 소재화 하여 장편화 되었고 초기 쥐삼부작(그는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과 상실의 시대은 크게 연작이라고 평가하지 않지만 많은 의미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하루키의 문학을 "상실"이라는 큰 테두리에 가둬버리는 것은 그의 책을 선입견에 가둬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80년대 후반에 출판된 그의 책이 우리 삼촌의 또래에서 우리또래에게 또 우리동생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가치를 충분히 나타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칭찬은 책음을 수반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평은 다르다.
원영씨글중에 가장 돋보이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장 문형섭 (2005-10-02 23:50:29)  
글이 가치있느냐 아니냐는 문학적인 구조나 전개에 달려있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 글이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 어떻게 재해석되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하여 논의하는게 올바른 것이겠지요.

물론 그 글이 한 세대에서만 혹은 한 지역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해도,
그 의미가 폄하될수는 없습니다.
글이 항상 보편적인 상황을 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글은 항상 특정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문학은 당대의 세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후대에서 현재 혹은 90년대를 바라보게될때 하루키의 문학은 충분히 유용한 가치를
지니게 될테니 그것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소설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루키의 문학이 오락적이고 감각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이미 15년여간 읽혀왔다는 사실이 충분히 대답해 줄것 같네요.

하루키에 대한 변명이었습니다.  

병장 양용구 (2005-10-03 12:38:01)  
글 잘 읽었습니다.
비평에 대한 허원영 상병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꼭 하루키의 작품뿐 아니라, 많은 작품의 비평에는 가벼운 글들이 많다는게 사실인듯 합니다.
조금더 신중히 생각하여 비평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네요.(웃음)  

병장 정명기 (2005-10-03 22:38:53)  
글쎄요. 상실의 시대를 가장 나중에 읽어서 그런지 "왜 상실이란게 코드지?"라는 생각만 머리에서 휘도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성장"이-"소년"의 성장의 의미만이 아닌 "미성숙"한 성인의 것도 포함한-가장 눈에 보였습니다만….  

상병 김동환 (2005-10-04 07:23:44)  
저는 하루키를 좀 늦게 만난 편인데 '상실'로 모든게 설명되는 
그런 작품, 그런 작가란 생각은 무리가 있어 뵈더군요.
그저 이야기를 꽤 재미있게 풀어내면서 사람 마음도 흔들어놓는
좋은 작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얘기 잘 들었습니다. 저도 동감이에요.  

병장 변태현 (2005-10-05 07:41:38)  
고등학교때 처음으로 상실의 시대를 읽었는데 그땐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키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않좋았죠. 한마디로 별로 재미 없었다. 였습니다. 그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직 내게 거울처럼 비출만한 시기가 아니였던것 같았습니다. 모든 문학이 다 마찬가지 일꺼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고전 명작이라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시기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 3류로 추락하기 마련이죠. 한참 성장의 문제와 여러가지 삶과 사회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을때 만난 '해변의 카프카'에 와서야 하루키를 다시 보게 營윱求. '어둠의 저편'도 매우 공감하고 절실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이 좋다 나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에 따른것 같네요. 사회나 대중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아무도 보지 않는 작품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의 거울이 될만한 것이라면 최고가 아닐까요.  

상병 김상희 (2005-10-06 11:08:42)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개인 취향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다만 하루키가 상실에 시대로 유명해졌고 그 이후에 하루키의 소설들이 열심히 번역되고 출판되고 있죠. 요즘엔 요시모토 바나나와 가오리 소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비평이든 칭찬이든 이런게 많다는건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된다는 뜻이고, 돈벌이가 많이 된다는 의미도 됩니다. 굳이 다른 이유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상실의 조류나 유명세로 비판하는건 좀 어긋나다는 생각입니다...  

병장 석봉준 (2005-10-07 02:47:42)  
허원명님..책뒤에 있는건가요?이거?
하루키..노르웨이숲..2틀간 읽었던 정말 재미있게 본책중 하나인데..
또 봐라고 하면 또 볼수 있는 책중에 추천도서로 뽑고 싶네요..  

병장 김경환 (2005-10-07 05:53:18)  
위에 분들 하루키 소설 몇 권이나 읽어보셨는지 먼저 물어보고 싶군요.
카뮈의 인용이고 이건 하루키 소설 뒷편의 하루키 지지글로 밖에 보이지 않네요.
합리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읽다보니 그렇더라구요, 쉽게 읽혀서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징하고자 하는 것이 실제로 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무수한 메타포를 이용해서 소설을 도배해 놓고 '전부 의미가 있으니 한 번 찾아봐!'
하는 것도 아니고... 류의 소설이 무거운 것처럼보여도 사실 훨씬 가볍고
직설적이지만 저는 한번도 류가 우릴 속이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편협하다면 하루키 팬들은 너무 단순하고 일괄적인 생각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하루키 소설이 왜 좋은지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노르웨이 숲''하드보일드'...'쥐3부작?' 다 읽어는 보셨는지 알고 싶군요.
그리고 [이제는 그를 버릴 때가 됐다] 문단.
독설에 가깝군요. 'ㅁㅁ는 ㅁㅁ하니까 ㅁㅁ하다.'
일반적인 사실로 만들어서 하루키 비평세력을 바보로 만들고 싶어하시는 것 같네요.
별 것 아닌 것이 하루키가 다루는 것들이 아니라 
그가 여기 저기 온통 흩뿌려 놓는 재능(상징적 수법, 이야기의 연계)의 통제불능이 이유라면 어떨까요?
저는 '하루키' 그가 '별 것'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병장 김건영 (2005-10-07 14:56:09)   
하루키 소설이라면 대부분을 읽었습니다. 쥐 3부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AfterDark, 태엽감는 새 연대기,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노르웨이의 숲, 그 외 수많은 단편들(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등).

무엇보다 하루키 소설의 소재들을 메타포로 여기느냐, 혹은 구체화된 요소로 여기느냐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것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겠군요. 물론, 하루키는 읽기에 따라서 여러모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책들이 그렇겠습니다만, 하루키의 소설은 수의적 혹은 불수의적으로 읽는 것에 따라 쉽게도 어렵게도 읽혀질 수 있는 수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 속에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메타포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제게는 단순하고 가벼운 류의 소설에서 무거움을 찾아내기도 어렵더군요. 저는 류를 읽는 내내 우리가 받아들이는 인지된 정보의 몇 퍼센트가 과연 진실일까, 의심하곤 했답니다. 오히려 제게는 류의 그 직설적임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가 수많은 메타포의 남용으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했다면, 류는 구체화된 수많은 오락적 요소들로 형상화한, 둥둥 뜨는 소설을 남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