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창조론 대 진화론?
문제설정
'문제설정 problematique'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건 원래 알튀세르가『맑스를 위하여』에서 사용한 것인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선(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문제설정'은 이미 선/악의 대립구도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선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에 대해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문제삼는다면 올바로 된 대답이 나올리가 만무하다. 이진경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지금까지 말한 데서 분명하듯이,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그 안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도 포함되어 있고, 그 중요한 것을 사고하는 데 기초가 되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이렇게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은 그 문제의 기반이 되는 사고방식, 가치, 개념들을 탐색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나는 이 '문제설정'의 개념을 가지고 '창조론 대 진화론'이라는 대립구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창조론 대 진화론?
간단히 말하자면,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고,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애초부터 '문제설정'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진화론이 던진 질문은 '생물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가'이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여러 섬의 생물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각 섬마다 새의 부리 모양이 다른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 다윈이 떠올린 질문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테다. '새의 부리 모양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처럼 되었을까?' 이런 문제설정이 가져오는 대답은 '어찌어찌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일 수밖에 없다.
반면 창조론은 '하느님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생물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문제설정은 '하느님이 이러이러하게 만들었다'라는 대답밖에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없다. 애초에 창조론이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상, 이것은 '답을 알고 있는' 방정식을 푸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해진 답이 있는 이상, 아무리 다른 입장에서 문제를 제시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진화론과 창조론이 건설적이고 결론이 존재하는 논쟁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버리는 것이 좋다. 창조론은 '전능한 유일자'와 '창세'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창조론에 어떤 공격을 가하든 대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창조론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대답 뿐이다. 이것은 개방된 구조가 아니라, 폐쇄된 구조다. 애초에 문제제기를 통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진화론은 '방정식을 푸는 것' 그 자체이다. 다윈에 의해서 제기된 진화론의 '문제설정'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것이지, 이미 정해진 답에 대해서 질문을 끼워맞추려는 시도가 아니다. 따라서 진화론은 모든 문제제기에 대해서 열려 있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명확한 증거가 오늘 밤에라도 등장한다면, 백 수십 년 동안 자리를 굳혀 온 진화론은 단번에 뒤집힐 수 있다. 만일 '신'이라는 존재가 강림하여 '너희는 내가 만들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진화론은 단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폐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진화론이 속한 과학의 영역은 '반증 가능성'을 가진다. '반증 가능성'이란 거칠게 말해서 어떤 이론에 반대되는 증거가 제시될 경우 그 이론은 폐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반증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과학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완전한 이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한 '선험적 분석판단'과도 비슷하다. 반증이 불가능한 이론은 논쟁의 여지도, 발전의 여지도 없다.
이렇듯 진화론과 창조론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이 두 가지를 놓고 아무리 논쟁하려고 해 봤자 결론이 날 리가 없다. 하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고, 다른 하나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립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것'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라는 인간의 기원이 어떤 일종의 '우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기 어려워한다. 과연 그것이 정말일까? 보다 확실한 기원이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불변이며 확실한 어떤 존재에 의지하게 만든다. 이건 말하자면 인간의 나약함과 선천적인 불완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대 문명이라는 것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불확실하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기반이 과학이기 때문이고, 그 과학이 태생적으로 '불확실하다'라는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귀납의 논리는, 이미 수백년 전에 데이비드 흄에 의해 논파당한 바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어떠한 명제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두렵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단순히 어떤 '신적인' 존재를 통해 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직무유기' 혹은 '게으름'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런 행동은 말하자면 자신의 능력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상한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몇 천만분의 일의 우연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우리 존재의 정당성에 어떤 타격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우리를 만들었든, 아니면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변화하는 과정에 의해 태어났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차라리 나름의 근거를 갖추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과정에 의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것은
창조론 옹호의 논리 중 대부분은 진화론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몇 가지 문제점들을 이슈로 삼아 창조론을 정당화시킨다. 그런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논점 일탈의 오류'에 해당한다. 어떤 명제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명제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쓰이기에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창조론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창조론 자체가 스스로 옳은 근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창조론이 정말로 납득할 만한 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해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면, 진화론의 존재 여부와 관계 없이 우리는 창조론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은 반(反)명제의 성격을 가진다. '진화론에 반대하여' 성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창조론은 하나의 이론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유일한 진리인 '성경'이 창조론의 모든 정당성을 확보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창조론은 확고한 지위를 잃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진화론의 주장에 반박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반명제는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할 힘이 없다. 오직 '진화론이 지적하는 자신의 헛점에 대해 반박함으로써' 이론적 생명이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론이 스스로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유치한 논리를 부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현대 생물학의 성과 대부분은 진화론을 모태로 해서 이루어졌으며, 사회과학 등의 여타 다른 분야에도 패러다임을전환시키는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화론을 부정하려면 진화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 다른 모든 성과들도 함께 부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단순히 몇 마디 말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과학자의 말대로, 과학을 부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컴퓨터나 라디오, 전등이나 인터넷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더 심각하고 중대한 의미와 문제를 포함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천문학자이자 대중과학서 저술가로 유명한 칼 세이건의 저서『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는 달라이 라마와 저자의 대화 중 일부가 나와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인용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불교의 기반을 부정할 만한 어떤 획기적인 증거가 나온다면, 당신은 불교의 교리에 수정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윤회론 처럼 결정적인 것일지라도?"
놀랍게도 달라이 라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뒤이어 그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지만 윤회론을 반증한다는 건 불가능할 거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종교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 종교는 굳이 '반증 가능성'이 그 가치를 증명해 주는 과학의 영역에 뛰어들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다. 종교는 애초에 '반증 불가능함'이 그 특성이며, 그것이 빛을 발하는 영역이 있다. '반증 불가능성'이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절대 불변의 진리를 제공해준다는 의미이며,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과학이 아직 풀어내지 못한, 혹은 영원히 풀어내지 못할 질문들에 답해줄 수 있다는 의미다. 종교는 이런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 필요하다.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듯이, 청하지도 않은 잔칫집에 가면 푸대접만 받고 얻는 것이 없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먹지도 못할 뽕잎을 먹으면 탈나기 쉽다.
병장 허원영 (2006/04/04 22:40:26)
희석 님의 '4월 4일 오늘의 잡담'을 읽고 올립니다.
62전대 시절에 올렸던 글입니다. 흐름이 어색한 몇 군데를 수정했을 뿐, 크게 손 본 곳은 없습니다. 다 뜯어고쳐야 할 것만 같아서. 물론 그건 보기에 영 좋지 않아서이지,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본 논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상병 조용준 (2006/04/04 22:50:12)
우후후. 62전대면 제가 일병때군요. 그때 이글을 본 기억이 나네요.(웃음)
병장 김대현 (2006/04/04 22:58:45)
(일부 급진적 성경 근본주의자들이) 창조론을 진화론의 반명제로 파악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성모독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절대 창조의 섭리를 속단할 수 없습니다. 고로 진화론에 반해서 창조론을 펴는 '신도'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셈이나 다름없죠. 그 창조의 모습이 성경에 적힌 그대로 복음병원 옹벽에 그려져 있는 동화책 그림 같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이름을 가장한 무지이고, 신의 권능을 그 동화책 그림 속에 국한시키는 일일 겁니다. 그 그림들은 신의 권능을 인간이 마음대로 상상해낸 것일 뿐, 그것이 곧 신처럼 숭배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제발 좀, 성경을 우상숭배하지 맙시다. 자기 머릿속에 든 신앙의 기준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신앙을 재단하지 맙시다. 저는 제가 믿는 신이 제 편협한 믿음으로 폄하되는 것이 싫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04 23:16:49)
이글을 읽고 제가 "종교와 과학이 소통 가능한 방법에 관하여"를 쓰지 않는다면 예의를 벗어날것 같아 이번주 안으로 쓸까 합니다. 이것은 절대 원영님에 글을 반박하기 위해 쓰는것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은 소통이 가능하고 싶은 저의 욕망'때문입니다. 아니 더 깊게 논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지만 그것은 추후로 미루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병장 허원영 (2006/04/04 23:59:51)
예전에 올렸던 글에 달렸던 답글들이 생각나서 미리 덧붙입니다. 이 글은 '창조론(論)'에 대한 글이지, 절대로 '창세기'라든가 기독교(Christian religion, 신교, 구교, 그리스 정교를 통칭하는 단어로서)의 창세 교리를 비판하는 글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창조과학론'에 대한 비판이 되겠군요.
상병 이영준 (2006/04/05 08:04:07)
잘 읽었습니다. 그 말이 맞는거 같아요. 종교는 굳이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는 없죠.
'믿음'이니까요.
병장 노지훈 (2006/04/05 10:51:22)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화이트헤드는 진정 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유물론이라고 했습니다.
과학과 종교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설명을 정리해서 옮겨 보자면
[예를 들어 갈릴레이는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고, 종교 재판소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이 움직인다고 했으며 뉴턴 학파의 천문학자는 절대 공간 이론을 채택하여 태양과 지구는 모두 움직이고 이다고 주장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지"와 "운동"이라는 말의 의미를 위의 세 가지 주장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각기 규정해 놓을 경우, 이 세 주장은 다 같이 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양쪽의 주장은 다같이 그것들이 보다 완벽한 진리가 되는 데 필요했던 조건들을 알지 못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구와 태양의 운동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다같이 우주의 진정한 사실을 표명하였고, 또 그들은 모두 그 사실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만 그 당시의 지식 수준으로는, 그들의 진리가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원칙을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 생겨나는 여러 문제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양자가 공히 문제삼고 있는 세부적인 논점에서 충돌한다고 해서 우리가 확고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학설까지 폐기 처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경우 두 주장 가운데 어느 한쪽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폭넓은 사상사적 관점에서 전망하는 감각의 소유자라면 조용히 기다리면서 서로 저주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상병 김상엽 (2006/04/06 13:52:17)
노지훈 님의 얘기에 공감하며 덧붙이면
러셀이랑 화이트헤드 아저씨들 말대로
조용히 기다리다보니까 최근에는 과학에서 종교를 설명하는 것도 그럴싸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잖아요.
예를들면 인간이란게 본디 종교를 만들고 신화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얘기같은거죠.
그런 종교로 뭉쳐진 부족사회에 비협조적인 유전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구석기시대 이전부터 착착 제거되어왔고,
지금 우리가 똑똑해서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게 유전적 성향이 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고요.
언뜻보면 이런게 반종교적인 주장이고 그래서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올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뚱맞은 생각이라고 봐요.
허원영 님의 생각에 공감을 하며 저는 그런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대개 종교인이라고 봅니다.
여담인데 과학이 커가면서 세계를, 인간에 대해 좀더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자
스피노자 등과 같은 아저씨들이 생각해보니 더는 잘 안 먹히는
인격신의 개념을 버리는 작업을 했던 것 마냥
지금의 복잡성 과학바탕의 골치아픈 물리적 세계에서 종교는 그 나름의 새로운 신비주의 전략을 개발해야죠.
물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종교현상을 비롯한 인간 의식에 대해 아는 것과는 별도로
우리는 비합리적인 믿음에 기대고, 공동체에 협조적인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고 있으니까요.헤헷
러셀 아저씨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다시 읽고 싶은데 군대에는 없네요, 짧은 글인데
거기보면 이 아저씨는 대단한게 자연과학이나 심리학이 인간에 대해 많은연구를 통해 객관적으로 밝혀내기 이전임에도
직관적으로 인간 속성을 꿰뚫어 통찰해주고 있거든요.
상병 엄보운 (2006/04/06 16:26:15)
존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 때마침 원영씨 칼럼이 올라왔군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장훈 (2006/04/09 14:21:40)
저는 창조론이 종교의 영역에 국한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급하셨듯 창조론은 창조과학론 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과학적인 가정, 실험, 증명이 수반된 주장을 폅니다. 예를 한가지만 들어보면, 약 1년은 더된 내용인데, 기존의 지질학자들이 수억년된 지질층이라고 생각했던 특이한 지질형태가 섬 화산폭발 후 응고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생성된 것이라는 발견이 있었습니다.
소위 창조과학론자들은 결코 성경에만 근거하여 창조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화론의 맹점을 부각하여 창조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이고 증명가능한 실험과 결과에 의거하여 창조론을 지지하고 진화론을 비판할때 역시 철저한 객관적 사실과 결과들에 의거하여 비판합니다.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많은 과학적 실험과 증거 증명들 역시 진화론의 그것처럼 존재합니다.
훨씬 다수의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지지하는것으로 비추었을때 현재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증거와 현상들이 우세한듯 합니다. 하지만 천문학자들과 우주의 탄생, 초기의 우주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오히려 창조론을 지지하는이들이 많습니다.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창조론을 연구하는 이들의 열정 역시 진화론을 주창하는 이들의 그것처럼 과학성과 객관성, 증명가능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존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적인 구도를 허물며 양립가능케하는 새로운 가설이 세워지는 요즘입니다. 마치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에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식의 원영님의 생각은, 왜인지는 모르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것 같습니다.
상병 박정훈 (2006/04/09 15:40:48)
교양-생명의 신비 토론했던 기억이 나네요~
항상 토론 수업 방식이어서 무지 하게 말했던 생각이...(웃음)
뭐.....당시엔 창조론이 진화론에 반박하는것 자체에 대해서 코웃음을 쳤지만..
문제 설정이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말에 할말은 없네요~
병장 허원영 (2006/04/09 17:37:03)
장훈 님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애초에 글에서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에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론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죠. 창조론, 또는 소위 '창조과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확고한 증거가 있을 때 "이 세상과 모든 생물들은 하느님이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는 이 점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게 제 글의 핵심입니다. '진화론'은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창조과학론'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이론 - 이론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면 - 은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명제를 [가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실](또는 진실)로 놓고 논리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자기부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창조론이, 또는 창조과학론이 과학의 영역에 속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과학론이 얼마나 과학적인 체계를 갖추었느냐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인 이론이라도 그 전제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전제가 '불변의 것'이며 '영원한 진리'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론 대 진화론'의 구도가 성립하는 이유는, 둘 사이의 관계를 잘못 파악한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화론은 '생명체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이론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체는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다윈은 인간의 조상이 유인원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했지, 유인원은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본질적인 '창조'의 문제와 '진화론'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그리고 현존하는 어떤 사람도 '이 세상과 모든 생명체는 누군가가 창조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의 문제는 앞으로 탐구해 나아가야 할 영역이지, 지금 어떤 증명을 통해 밝혀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장훈 님이 말한 '창조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탄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우주의 탄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과학은 아무 답도 주지 못합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수많은 것들을 밝혀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혀내지 못한 '핵심'(창조의 문제, 신의 존재유무, 죽음의 문제 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핵심'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주는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학은 답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식의 생각도 가능합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무장된 과학자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태도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우주는 창조되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실을 [증명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요. 증명된 것은 '믿거나 안 믿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런 겁니다. 그러나 증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태도가 가능합니다. 신을 믿는 과학자들이 많은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학은 아무런 해답도, 심지어는 작은 힌트조차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신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겁니다. '우주와 생명체는 창조된 것인가'라는 질문은 당장 답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앞으로 밝혀내야 할 문제입니다. 아마 영원히 밝혀낼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당장 답을 내거나 증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어낼 때 필요한 것은 '과학'의 자세이지 '종교'의 자세가 아닙니다. 즉 저는, '우주와 모든 생명체는 창조된 것이다.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논리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기 때문에 우주와 모든 생명체는 창조된 것이다'라는 논리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전자가 '비과학'(또는 과학을 가장한 종교)이라면 후자는 '과학'입니다. 그리고 전자의 논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논리에 부합하는 사실'일 뿐이지, 결코 그 논리가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훈 님의 말씀대로 과학적인 증거와 실제적이고 증명가능한 실험으로 '창조'에 대한 탐구를 진행해 나가는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 '이 세상은 창조되었다'라는 명제를 [사실로] 전제하지 않고, '하나의 가정으로 삼은 채' 탐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저의 견문이 짧은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대부분은 '창조론'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이야기할 뿐, '이러이러한 사실이 있고 이러이러한 문제점과 이러이러한 의문점이 있지만 이러이러한 논리가 가능하므로 창조는 설득력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의 '자기위안'일 뿐이지, 결코 어떤 진실을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과학에서 논쟁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증명되지 않은 것'에 한합니다. 그리고 과학이 아직까지 '증명하지 못한', 밝혀내지 못한 부분은 끝도 없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도 있습니다. 종교가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할 부분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이 아닙니다. 종교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고 상대성 이론에 대해 참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는 차라리 '고통의 문제', '죄의 문제', '신의 존재의 문제', '인간 본성의 문제'에 대해 눈을 돌리고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지훈 님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금의 지식 수준으로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충분히 양립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과학의 문제이며, 종교가 거기에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는 과학이 결코 알 수 없는 방향을 넌지시 가리키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종교는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면 그만입니다. 괜히 '종교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 같은' 불안감에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처럼 저 역시, '창조의 교리'는 반증하기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4/09 18:07:49)
이거야 원, 댓글이 더 좋아버리는군요.
상병 엄보운 (2006/04/09 20:09:14)
종교가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할 부분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이 아닙니다.
핵심. 밑 줄 좍좍-
병장 장훈 (2006/04/10 12:39:05)
마지막에 말씀하신 얘기, 지훈님의 인용문에 대해 저도 너무나 공감합니다. 흔한 예로써 작금의 물리학자들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통합하는 이론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이러쿵저러쿵 뭐가 옳다느니 하는것이 아니라(할수도 없겠지만), 균형잡힌 시각과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 행동, 인내하는 모습입니다.
제가 원영님의 글에서 느낀점은, 자꾸 창조론 혹은 창조과학을 종교 혹은 종교적 믿음, 신념과 결부시킨다는 것입니다. 창조론도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것 아닙니까? 창조론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둘을 결부시켜버리니 하나의 과학적 이론(가정 혹은 가능성)이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는듯한 느낌을 주는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창조론을 사실이라 주창하지만 과학자들이 가정하는 창조론과 기독교인들이 주창하는 창조론은 전연 별개의 것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과학자가 자신은 과학자가 아니라고 광고라도 하듯, 가능성에 근거한 가정에서 출발하지 않고 확고한 신념과 믿음에서 비롯된 가정에대한 결론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이신지.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그렇다고 해도, 순수한 과학적 열정에 의해 창조를 연구하는 과학자들까지 싸잡아 묶으신게 아닌가요?
그간 앞의 이야기와 무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여, 인간들의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에는 관여치 않아도(종교든 그 무엇이든) 된다는 자세는 겸손한 자세와 거리가 먼것입니다. 사람은 대단한 능력을 지니기도 하였지만 참 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마음이나 정신만 약하다는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면에서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윗분께서 중요하다고 밑줄 치시는게 마음에 걸려서 사족을 달아봅니다.)
병장 허원영 (2006/04/10 14:13:54)
장훈 님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어째서 논의가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과학자들이 가정하는 창조론과 기독교인들이 주창하는 창조론은 전연 별개의 것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라는 장훈 님의 글을 읽으니 더욱 명확해지는군요.
견문이 짧은 탓이겠지만, 저는 "기독교인들이 주창하는 창조론"과 "전연 별개의 것"인 '과학적인 창조론'을 본 적이 없습니다. '창조'를 그냥 '가정'으로 삼고 올바른 검증과 실험을 통해 논리적인 결론을 내서 창조를 '설명'하는 - 아니면 최소한 설득력있게 주장하는 - 책을 저는 본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장훈 님과의 대화가 어긋난 듯 싶습니다. 이참에 장훈 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창조를 '순수한 가정'으로 놓고 연구한 책이나 논문이 있다면 한 권 소개시켜주십시오. 이건 비꼬는 것도 아니고 정말 꼭 읽어보고 싶은 의도에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한때 창조론에 관심이 있어서 책도 읽어보고 창조과학회 사이트에 들락거리기도 했지만, '과학적인 창조론'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그런 창조론이 있다면 저는 그것을 적극 검토하고 수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경험은 아직까지 없군요.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과학적인 창조론'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글에서 이야기한 대상도 '과학적인 창조론' - 그런 것이 있다면 - 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을 과학에 들이대서 근거를 쥐어짜내는 '비과학적인 창조론'입니다. 저는 그런 식의 논리를 많이 보고 읽었기에 거기에 대해 글을 쓴 것이지, 제가 아직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과학적인 창조론'에 대해서 비판한 게 아닙니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창조'라는 것이 현재의 수준에서 논리적인 흐름에 따라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과제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현대과학의 수준에서 "창조론을 입증했다!"고 주장하는 책은 모두 사기일 겁니다. '창조'에 대한 탐구는 현대과학의 최전선에서 조금씩 파고들면서 이루어져야지, 한번에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다지 없으므로 입을 다물어야 옳겠지만, 저는 창조가 언젠가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리라고는 - 또는 현재/단시일 내에 입증될 수 있는 것이리라고는 -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에 종교가 신경쓸 필요 없다는 문장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 같군요. 장훈 님의 해석과 저의 의도가 다르기 때문에 '겸손'의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저는 인간이 약한 것과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기로 장훈 님께서는 '인간은 능력의 한계가 분명하고 어떻게 보면 한없이 약한 존재이므로 종교와 신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분명 수긍이 가는 논리이며, 종교가 필요한 이유의 대부분은 아마 거기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은 장훈 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겠지요. '자체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이란, 예를 든 것처럼 과학의 영역에 속한 문제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석유파동과 세계 증시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에 따라 검증되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현실에 눈을 돌리고 혼자 고고하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문제에 개입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인간복제'라든가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 '윤리적/가치판단적'인 개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윤리적/가치판단적'인 문제는 인간이 섣불리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복제'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 종교가 관여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것에 대해 참견할 수 있는 권리도 없습니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인간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이끌어주는 선에서 끝나야지, 인간을 잡아당기고 참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병장 장훈 (2006/04/10 15:31:28)
책이나 창조과학회등 모두가 정해진 결론을 위한 도출형식이었나요? 그러면 바로 제 경우를 말해보겠습니다.
제가 창조론 입증을 위한 창조론이 아닌 창조론(말이 이상합니다만)의 실마리를 처음 찾은곳은 우주의 기원과 초기의 우주를 연구하는 물리학이야기 책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책이 아니고 저같은 양민을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시간의 역사같은 책 말입니다. 첫째로, 거기에 보면 누구나 아는 빅뱅이론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호기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빅뱅을 일으킨 원인인 무한대밀도의 특이점에 대한 구성성분은 무엇이며 또 그 구성성분이 왜 그렇게 특정지어졌는지 까지, 또 그 특이점은 어떻게 존재하게 됐고 왜 존재하는지까지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상상의 한계에 부딪치며 자연스레 절대자(기독교의 신을 가리키는것이 아닌 특이점을 만든자)를 언급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원영님께서도 생각하시듯이 저희의 영역이 아니겠죠. 한마디로 특이점은 만들어졌다(창조됐다)는 이론이 여기서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가지의 실마리였습니다.
둘째로, 만약 그 절대자의 존재를 가정한다면 시공을 지은이에게 시간의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가령 100억년이 1초고 1초가 100억년이라는). 그렇다면 지금의, 가령 조류가, 50억년의 시간을 통하여 진화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면 그것이 진화인지 창조인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이를테면 50억년도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순간이기때문에).
노파심에, 절대자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동일하다고 한적은 없습니다 저는. 가정이지요 하나의.
여기까지가 제가 얻은 실마리이고 책을 추천해드리자면 그림으로보는 시간의역사(스티븐호킹)을 추천해드립니다. 이미 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더 호기심이 이신다면 그 책에 참조사항으로 포함된 수많은 책들을 더 탐독해보시면 되겠지요.
제가 창조의 실마리를 얻은 책들은 창조론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우주의 기원, 지금의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호기심, 더 나아가 그 이유까지도 알고자 하는 열정을 품은 과학자들 이었습니다.
제가 사족을 단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 마무리 해야겠습니다. 예상하셨겠듯이 저는 기독교인 입니다만 연악한 인간에게 꼭 종교와 신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잘 알아야 하고 그것을 항상 인지 해야하고 특히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겸손함이 꼭 신을 향한 겸손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제 경우는 신에 대한 겸손입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0 17:09:38)
그냥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진화론이 과학적이라는 생각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그리고 과연 과학적이라는 말은 무슨뜻일까요?
과학의 역사에서는 기득권자들이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연구결과가 나오면,
무시, 묵살시킬뿐만 아니라, 매장시켜버리기도 했죠.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다른 학자들에 의해 그 의견이 정당성이 있다고 인정받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그럼 지금 이야기 하는 과학적이라는 내용은, 오랜시간이 지난뒤에 다른 과학적 사실의 정당성이 입증되면, 허구가 되는것 아닙니까?
창조론이 소위 '과학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이 완전입증된 겁니까?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라고 하면 떳떳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창조론을 배제한 진화론은 명백한 난점들이 많습니다.
굳이 제가 나열하지 않아도 되겠죠. 다 알고계실테니.(모르신다면, 논쟁을 할 이유가 없죠.)
그 중 가장 큰 문제를 생각한다면,
그럼 진화되기전의 최초의 상태는 어디서 기원한걸까요?
(그리고 최초의 상태가 먼지였다고 합시다.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진화할 확률을 혹시 아십니까?
우스갯 소리로, 여객기 한대가 있다고 하면,
돌풍이 불어서 볼트, 너트 하나까지 모두 분해하고,
다시 돌풍이 불어서 여객기 한대를 완전히 조립해 놓을 정도의 확률이라죠.
전 개인적으로 그 확률을 믿느니, 창조되었다고 믿는게 더 쉽던데요.)
빅뱅이론이라고 해보죠.
최초의 그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온겁니까?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나요?
제발 잘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합시다.
기분나쁘면, 그냥 기분나쁘다고 하시고요.
왜 자꾸 애매한 '과학적'이라는 이야기를 무기로 휘두르려고 하시는지...
병장 허원영 (2006/04/10 17:49:35)
장훈 님 / 더 이상 논의가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글에서 사용했고 의도한 '창조론'의 의미는, 장훈 님께서 설명하신 현대 우주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진화론'이 '생물은 어떻게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나'에 대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론'이라면 '우주와 생명체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명제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이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의도한 '창조론'의 의미가 바로 그렇습니다. 어떤 이론이 '창조론'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으려면, '창조되었다'는 것을 - 체계적이든 비체계적이든 - 주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물리학자들의 '우주의 시작점 연구'와 진화생물학자들의 '생물의 기원 연구' 같은 것에 대해 '창조론'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그것이 '창조'를 '가정'하고 그것을 '입증'하려는 연구일 때만 가능합니다. 제가 장훈 님에게 소개를 부탁한 것도 바로 그런 종류의 이론이고 서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빅뱅 이후 0.000001초까지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우주의 시작점 문제'는 '창조론'이라는 이름을 달기 어렵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창조'에 대한 생각을 자극하고 '절대자'의 존재를 언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시작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지, 어떤 논리적인 귀결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꾸 동어반복이 되는 느낌이지만, 제가 경계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과학의 어떤 분야도 결국 '시작점'이라는 벽에 부딪치기 마련이며, 그것은 암흑의 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그리고 그 '무지'가 '창조자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곧 창조자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제 생각에 문제의 발단은 '창조론'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장훈 님께서 '우주의 탄생 문제'로부터 '창조'의 실마리를 찾으셨다면 거기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마리가 하나의 '이론'으로 인정받으려면 넘어야 할 난관이 꽤 많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창조'의 가능성은 존재하며, 저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창조'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채 논지를 펴는 일부 억지이론 - 여기에 대해서는 장훈 님 역시 저와 같은 입장이시리라 생각합니다 - 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제 글의 논지입니다. 장훈 님의 말씀대로 [우주의 기원, 지금의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호기심, 더 나아가 그 이유까지도 알고자 하는 열정]이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 되겠지요.
친절한 답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런 주제가 빠져들기 쉬운 그릇된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장훈 님의 중심을 잃지 않은 답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또 좋은 대화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겠습니다.
병장 허원영 (2006/04/10 18:22:57)
보람 님 / 위의 써 있는 제 글과 답글을 자세히 읽으셨다면 제가 '창조'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창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무책임한 창조론'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글에서도 썼듯이, '진화론의 난점'이 '창조론의 정당성'으로 연결되는 이유를 저는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은 '생명의 탄생'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고, 그러므로 '창조'의 문제는 진화론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조'가 진실이 될 이유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보람 님이 예로 드신 '여객기 논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계 논증'에 속하는, 굉장히 고전적인 논증이군요. 현재의 진화생물학이 '대략적인 가설로 제시한' 생명 탄생의 논리(무기물이 유기물이 되고, 유기물이 생명현상을 일으키는)는, 보람 님의 지적대로 굉장히 희박한 확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희박한 확률'이 '창조'를 보증해주지는 못합니다. '확률을 믿는 것'보다 '창조되었다고 믿는 게' 더 쉬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믿기 쉬울] 뿐이지,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창조의 신비'가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이라는 게 그런 의미입니다. 모른다고 그냥 믿어버리는 게 '비과학적'인 태도입니다.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 거기에 어떤 절대자 -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같은 - 를 대입시키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 생명의 시작점에는 '창조'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모르고, 그러므로 섣불리 어떤 입장을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창조'를 염두에 두고 어떤 탐구를 진행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입니다. 그러나 '모르지? 그러니까 창조된 거야.'라는 식의 발언은 지극히 '비과학적'입니다.
저야말로 말하고 싶군요. "제발 잘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합시다." 모른다고 해서 '창조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모르니까 나는 창조를 믿는다'는 발언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안젤무스라는 중세의 신학자도 "나는 불합리하므로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자유이고 권리입니다. 그러나 그걸 '과학'으로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과학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과학'에 오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로 대화를 청하겠습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1 07:51:05)
원영 / 원영님도 제 글을 잘 읽어보셨으면, 신앙을 과학으로 주장한 적은 없다는 걸 아실테고, 진화론의 난점을 창조론의 정당성으로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것 쯤은 아시겠죠.
(어디서 나온 논리인지 잘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이유를 모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희박한 확률'로 '창조'를 보증한 적이 없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이것도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너무 고민하신 나머지 끌어땡기 셨나요..?)
모른다고 그냥 믿어버리는 사람은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죠. 그럼요.
저 역시 그런 믿음은 너무나 불안정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영님이 갖고 계신 편견만큼 모두가 그렇진 않은걸요?
편견을 깨려면 노력을 좀 해야합니다.
물론 그러실 마음은 없으시겠지만요.
그럼 창조론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연구하는 자세는 과학적이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안되나요? 비과학적이라서요? 글세요...
"모르니까 나는 창조를 믿는다" 이거 누가 한 말이지요?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정말 몰라서요.)
이런말하는 사람은 저도 혼내주고 싶네요.
흔히 비과학적이라도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인용당하는 구절이거든요.
원흉을 제거해야지 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자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있거나 없다고 입증된게 아니죠.
그럼 탐구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왜 배제하는거죠..?
그건 과학적인 자세인가요..?
병장 김대현 (2006/04/11 08:30:43)
보람님 / 논의가 이상해졌네요.
그리고 저는 몰라서 창조론을 믿습니다. [웃음]
그럴리는 없겠지만, 과학이 세상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오더라도 그 가운데 인간의 무지는 반드시 존재할 겁니다. 신이 아닌 이상.
그렇게 신은 인간의 무지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지 속에 갇힐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존재이므로. 어떤 경우에건 인간의 지보단 인간의 무지가 훨씬 큰 영역일 테고, 그 중에 과연 어떤 곳이 신이 머무를 성소에 합당할 지는 자명하리라 생각합니다.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밝혀지는 영역이 감히 신에게 대적할 수 없기 때문에 부러 개입하지 않는 거라고 해두자구요. 그리고 그 밖의 부분은, 이를테면 자신이건 세상이건, 사실은 사람이 알 수 있었을 무지의 부분에 신을 모시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과 세상에 대해 최대한 알아두자, 라고 해두면 될 일이구요.
병장 강보람 (2006/04/11 09:03:55)
대현 / 대현님 반가워요.
논의는 이상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몰라서 창조론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웃음]
오히려 창조론이 제게는 훨씬 설득력이 있어서 그걸 믿는거죠.
성경이 거짓이라는 증거보다, 사실이라는 증거가 더 많아서
혹은, 그게 더 설득력있어서 믿게되는 예는 비단 저만이 아닐겁니다.
저는 그런관점에서 창조론이나 기타 성경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저라고 다 아는건 아니지만요.)
그게 비과학적이라거나, 성경은 거짓부렁쟁이 라거나 하는 소리를 배척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몰라서 믿는다"라는 말이 와전되어서,
아전인수격으로 인용되기에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거구요.
(사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차원자체가 틀린 일이니, 인식의 범위 바깥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래도 저는 남겨두신 흔적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병 엄보운 (2006/04/11 09:14:06)
병장 장훈/ 뒤늦게야 답글을 봤습니다. 늦은 대응에 사과드립니다.
원영씨가 제가 해야할 말을 다 해주셔서, 특별히 언급하는 것이 불필요하다 생각하지만 조금 끄적여보겠습니다.
일단 장훈님께서 염려하는 식으로의 '종교의 개입 차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시라면 중세 이후 - 특히 르네상스 시대 - 의 종교관이 불필요한 과학적 개입으로 인해 그 입지를 스스로 좁게 했다는 점을 알고 계실겁니다. 종교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란 바로 이런 부분을 말합니다. 경기의 순환을 설명하는데 있어 성경을 펼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경제학자의 개인적인 신앙 문제는 별개겠지요. 이런 식의 간접 영향을 말씀하신 거라면 경기 순환의 설명에 신앙적 힘이 부여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건 궤변이 아닌가 합니다.
일반적인 창조론의 허구가 비판받는 이유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창조론에 과학적 사실들을 사후적으로 끼워맞추는 데 있습니다.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나름의 진실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영씨가 말한 '제대로 된 창조과학이 없다.' 라는 말의 의미도 이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주의자는 모든 책을 변증법으로 독해하고, 막시즘에 깊히 빠져든 사람은 모든 것을 계급 투쟁으로 보게 되기가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눈으로 비친 빅뱅이론이나 초끈이론은 모두 종교적 해석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과학적 해결의 영역임에도 그것을 단지 '종교'라는 마스터키로 마무리 짓는다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만약 과학의 역사가 자신의 한계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설정했다면 지금과 같은 발전은 없었을 겁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11 09:22:40)
끼고싶은데, 끼고싶은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다른글로 쓰기에는 내용이 너무 광범위한데, 거참! 아무튼 너무나 좋은글들이 넘쳐나는 상황이군요! 다들 크게 숨한번 쉬고 천천히 시작하세요! 그리고 조금씩 자세하기 시작해보는게 어떨까요? 그럼 낄자리가 생길듯 한데! 제가 엉뚱한 글을 남기는 이유는 조금 쉬었다 하자는 의미랍니다.(웃음)
병장 김대현 (2006/04/11 09:33:27)
보람님 / 보람님 저도 반갑습니다.
만, 거두절미하고 -
그 "설득력" 자체가, 신이라는 어마어마한 '것'을 구겨넣기에는 너무 협소한 건 아닌가, 하는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아는 부분 속에 남아있는 신을 향한 단서보다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분 속에 신이 거처할 곳이 더 넓지 않느냐는 것이었구요.
그래서 종교는, 사람의 아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학"의 태클에 비교적 초연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애초에 종교는 사람의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 양쪽에 그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진화론이 아무리 판쳐도(?), 그 진화의 섭리마저 그분께서 주재하셨다 - 라고 해놓으면 그만인 게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건 애초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는 것이겠구요. 신의 증명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종교를 믿지 않을 이유가 될 것이 아니라 종교를 믿을 이유가 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랄까요.
성경이 비과학적이라는 말과, 성경이 비단 과학으로 재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라는 말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지요. 그리고 원영씨의 글은 전자보단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네요. 설령 성경이 "남겨두신 흔적"에 비추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설명 불가능한" 부분에 우리네 신의 정수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병장 강보람 (2006/04/11 09:41:28)
보운님 /
만약 창조론자들이 과학적사실들을 '자신들이 알고있는' 창조론에 사후적으로 끼워맞추고 있다면,
창조론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과학적사실을
'자신들이 알고있는 비과학적인' 창조론에 사후적으로 끼워맞추고 있는거겠죠.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 예를 좀 제시해주시죠.
(급하게 안하셔도 됩니다. 저는 인내심이 조금은 있는 편이라.)
그리고 자신들의 이론에 적합한 설명이 나온다면, 왜 그것을 적용할 수 없는거죠?
과학의 발전도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럴듯한 이론과 가설을 세우고, 그걸 뒷받침해줄만한 실험결과나 연구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이론이나 가설을 뒷받침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과학적 해결의 영역임에도 그것을 단지 '종교'라는 마스터키로 마무리 짓는다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혹시 아직도 중세시대에 살고계신가요?
요즘 어디 그런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나요?
좀 알려주세요. 저도 같이 혼내러 가드릴께요.
이런사람들이 좀 없어져야 비정상적인 기독교때리기도 수그러 들겁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1 09:52:16)
대현님 /
네, 맞습니다.
물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차원이 틀린 존재입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어쩌면 잡았다고 생각한것이
그분의 옷자락 끝을 겨우 스친것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영역역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는 때로는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성질의
개인적인 체험이 존재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되는 것이죠.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지만 말이죠.
그렇게 설명되기 힘든(어쩌면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은 애초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예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는게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믿는않는분들과의 대화를 어떻게 진행해야 합니까.
많은 분들이 싫어하시는대로 "예수천당 불신지옥"하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기독교에서,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얼마든지 지금까지 검증되었고, 이야기 가능한데도
단지 그것을 위의 내용들을 들먹이면서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기분이 나쁜것은 제껴두더라도,
그런 의견이 마치 지성인들이 갖춰야할 의견인양 여기는 것이 싫다는 거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니, 해당되지 않으시는 분들은 패스하시죠.)
전 머리로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만큼이나,
설명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놀라운 작품들로 가득차있죠.
유후.
상병 송희석 (2006/04/11 10:05:58)
보람/ 보람님이 말씀하시는것이 혹시 저의 착각이지만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검증하면 안된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요? 혹시 제가 그 '검증'을 해도 될까요? 사실 이것은 신학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내용들이 꽤 많은데 실례가 안된다면 가능할런지? 만약 가능하다면 조만간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저도 궁금하거든요. 과연 '성경'텍스트 - 그것도 외경을 제외하고, 혹시 외경까지 포함시킨다면 더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가 검증할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매우 들기 때문이죠. 어떠신가요?
병장 김대현 (2006/04/11 10:18:20)
보람님 / 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거, 재밌어지는데요. [웃음]
보람님의 말씀대로, 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우겨넣기 위한 고안들이 고래로부터 있어왔습니다. 사제의 성사권, 교회의 권위, 성상Eikon, 성모의 발명... 그런 것들이 매번 걷잡을 수 없이 사회적 문제로 퍼질 때마다 종교는 여러가지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교는 구교의 폐습을 물리치고자 신앙의 정수를 성경 내에 국한시키는 모험을 했고, 그 모험은 당시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성경조차 무수한 해석이 난무하고, 그에 따라 교회 분파가 갈리거나, 성경의 큰 줄기와는 동떨어진 한구절 한구절의 해석 차이에 매달리는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정없이 진리와 동떨어진 듯한, 세속적인 것들이죠. 마치 우리가 사과라고 생각하는 그 동그랗고 빨간 과일과 "사과"라는 말 사이엔 어떤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요. 신앙과 그 신앙을 받쳐주는 "설명할 수 있는" 신앙의 외양은 아쉽게도 서로 자의적입니다. 그리고 그 자의적인 신앙의 외양이 예전부터 사고를 많이 쳐왔기에, 그 외양에 대한 의심의 칼날을 먼저 세우는 많은 분들의 말씀에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헌데 그렇다고 그 외양을 전부 벗겨내면, 당연히 종교가 안됩니다. 신앙도 안되구요. 그래서 골치아픈 거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신앙해야 하니까요. 그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신앙의 외양을 쌓아나가야 하느냐. 사실 이 부분부터는 철저히 정치적인 고려와 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종교를 믿는 게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에 더글더글 끓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의 외양에 대해 학을 떼는 사람들의 의견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종교가 그의 고객층을 잃어버린 건 종교 스스로의 불찰이겠으므로, 종교 스스로가 종교를 구원할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굳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주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촛점을 맞췄을 때, 아직 미개척된 신앙의 토양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 믿고 있거든요. 여기까지가 제 해명이고 핑계이며 의견입니다.
상병 엄보운 (2006/04/11 10:30:38)
병장 강보람/
탐구 방법적인 문제에 '종교'가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형편없이 얽히고 鰕榻鳴 결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줄에 매달려 내려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연극처럼 우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어 그런 태도는 배격해야 합니다.
종교적 입장에서, '새로운 과학 이론이 과거의 과학 이론을 대체하고, 그 전까지 기득권은 그것은 은폐와 왜곡을 시도한다.' 라고 종교가 과학을 비판하시다니 이건 좀 너무했군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라고 말하시려면 있다면, 보람님의 과학 비판 또한 지금의 일이 아님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창조론'적 입장은 신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끼워 맞추기가 100%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굴절을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논거를 찾는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전제의 종교는 모든 이론을 종교적 입장으로 포섭 가능하지요. 즉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충분히 요리 가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의 가정과 종교의 가정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위에도 다른 분들께서 언급하셨지만, "신께서 창조론을 반신반의하게끔 의도하셨다." 라고 하면 할 말 없지 않겠습니까?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불태우고, 교황의 이름으로 노예해방을 반대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천동설을 지지한 것이 훗날 영광된 자리를 안배하기 위해서라고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불가능한 논리(?)가 없죠. 이렇게 되면.
병장 강보람 (2006/04/11 10:52:56)
보운님 / 자자, 흥분은 조금 가라앉히시고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차분히 이야기합시다.
첫번째 단락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죠.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말씀하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뭔지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하여튼 인문학좋아하시는 분들 어려운 말씀 쓰시다니까...휴우..)같은 건 저도 지양하는 바입니다.
두번째 단락, 누가 '종교적 입장에서'라고 했습니까?
과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일뿐이지요. 흥분하면 뻔한 사실도 안보이는 법입니다.
세번째 단락, 마찬가지로 "창조론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역시 사후적으로 끼워맞추기가 100%가능합니다.
누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로 시작하나요?
제가 그랬나요? 에이~ 설마요.
자기 생각에 너무 빠지셔서 그저 자신만의 논리가 되어버렸군요.
전 그렇게 말한적 없습니다.
전 그런입장 안좋아합니다.(몇번째 쓰는건지 손가락 아프네요.....휴우...)
병장 강보람 (2006/04/11 11:01:57)
대현님 / 네, 그러네요.
그런데 전 여러사람이랑 이야기 해서 그런지 좀 머리가 버벅대는 느낌인데요.
한번 껐다가 켜야겠네요.
네, 말씀하신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우겨넣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건 정말, 부정할 수도 없는 카톨릭과 기독교의 더러운 역사고,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구&신교의 행실역시,
을 수 없는 더러운 역사죠.
더 더럽고 역겨운 건, 이 모든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겁니다.
그냥 지들이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면 문제가 안되는 데,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인거죠. 허허... 참...
그리고 현재 기독교의 수많은 분파들을 보면, 참...이권다툼이 더럽다는게 느껴집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기타....
장로교 내에서도 대한예수교 장로교, 대학기독교 장로교,
그안에서도 고신, 장신 어쩌고 저쩌고....
그렇죠, 이들이 처음에는 기존의 교파에 반대하는 부분이 있어서
빠져나갔겠죠. 하지만 그래봤자.... 이권다툼이죠.
맘에 안드니까, 우린 나가서 우리끼리 이거 하겠다. 뭐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성경의 진리와는 무관하게 곁가지에 관한 문제죠.
세례가 어쩌니, 장로가 어쩌니, 안수집사가 어쩌니...
대현님과 저는 이 부분에서 의견이 좁혀질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지난번에 이야기 하면서도 느꼈지만,
신앙 외적인 부분을 너무 강조하시니, 사람인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군요.
"고객층"이라는 말에서는 더욱 더 거리감을 느끼는 군요.
그럼.
병장 강보람 (2006/04/11 11:05:51)
희석님 / 늦어서 죄송하군요~
제 생각엔 착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니,
제 실수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검증하시겠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글세요. 제가 해라 마라 할 수는 없겠죠.
희석님이 편한대로 하시죠.
다만, 저랑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성경 딱 하나뿐임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민간인 신분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면,
서로 좋았을 텐데요. 도서관도 있고, 이야기를 나눌 분들도 많으니 말이죠.
하지만, 글을 올리시려면,
이야기를 하셨던 신학자들에 대해서도 올려주세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요.
이름까지 나온다면 더 좋겠군요.
상병 엄보운 (2006/04/11 11:13:09)
병장 강우람/
지금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오해를 풀어드리지요. 제가 별로 흥분할 건 없습니다.
보람님께서 제 글을 좀 잘 읽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제가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제 글은 장훈님이나 보람님의 어떤 글에 대한 반박으로 쓴 것이 아니라 종교적 입장에 대한 제 의견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것을 자꾸 보람님의 어떤 문장에 대한 의견으로 보시려니깐 간극이 생기는 것 같네요. 그렇게 억지로 끼워 맞추시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보시니깐, 제가 흥분한 것처럼 보이시는 게 아닐런지요.
보람님의 입장이 제 입장도 비슷하다면, 기쁜 일입니다. 보람님의 주장을 제가 같은 주장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의견은 그저 제 의견인 거지요. 그러니깐 보람님께서 손가락 아프게 글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마구마구 꼬이는 극의 말미에 갑작스레 등장해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극적 장치입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1 11:35:59)
보운님 / 이름도 제대로 못 치신걸 보니 흥분하신 것 맞는 것 같은데요[웃음]
그리고 제 글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면,
"종교적 입장에서, '새로운 과학 이론이 과거의 과학 이론을 대체하고, 그 전까지 기득권은 그것은 은폐와 왜곡을 시도한다.' 라고 종교가 과학을 비판하시다니 이건 좀 너무했군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라고 말하시려면 있다면, 보람님의 과학 비판 또한 지금의 일이 아님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
"너무했군요~"에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질문을 하시는 대상은 누구죠?
그리고 거기에 불행하게도 제 이름이 있군요.
마지막 단락도 아무리 봐도 그 전의 제답글에 대한 의문제기로 보이는 걸요?
제가 잘못이해를 한건가요? 아니면, 보운님의 손가락이 말을 안들은 건가요?
제 손가락은 제 말을 잘 듣습니다만....음....
맞습니다. 보운님의견은 보운님 의견일 뿐이지요.
제의견은 제의견일 뿐이고요.
그런데 그의견이 저를 향해 있었으니 손가락 아프게 칠수밖에요.[웃음]
'데우스 어쩌고'는 그런뜻으로 대충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친절한 설명 감사하군요.
친절하신 것 같애요.
상병 김상엽 (2006/04/11 11:45:09)
말 꼬리 잡기 놀이가 즐겁게 계속되는 가운데 오늘따라 할일 없는 육군 상병으로서
끼워달란 말 대신 (맘대로 끼어들며)
강보람 님께 제 양심에 기초를 둔 깊은 사과를 드리려고 합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1 09:52:16) 님의 댓글 중
"그렇게 설명되기 힘든(어쩌면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은 애초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예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는게 됩니다."
이걸 읽는 순간 Alt + F4 를 눌러대어 창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유로운 의견개진란에서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만 것이지요.
(덕분에 전자결재 기안기도 꺼져버렸으니 죄값을 약간 치룬 셈이지만)
이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11 11:47:02)
보람/ 제가 언급한 신학자래봤자 장신대 나 한신대 교수입니다. 물론 연대 신학과교수들도 몇분 있습니다. 아 여기서 장신대 나 한신대 가 결코 연대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름을 열거하자면 일단 기억나는 순으로 조태연,정지련,차정식,김준우,이형기,김성재,김경재......교수들인것 같네요. 아마 목사 겸 교수들도 몇분 있습니다. 성경 하나라고 해도 충분히 이야기는 가능합니다. 문제는 성경이 어떤 성경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웃음) 요즘 성경종류가 여러가지라서!(헤헤)
병장 김대현 (2006/04/11 11:51:33)
보람님 / 제 마지막 리플의 마지막 문단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왜 애써 고객층이란 표현을 끌어다 쓰고, 열심히 "곁가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까. 그 곁가지가 때로는 "성경의 진리"를 잠식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성경의 진리가 아무리 숭고했던들, 그 성경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죄악은 더할 나위없이 추악했습니다. 그걸 저는 뻔뻔스럽게 칼지른 듯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요.
그래서, 종교의 외양에 추상같은 분들의 말씀에 저는 일견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럼에도 종교의 외양을 어떻게든 둘러써야 하는 저의, 그리고 21세기의 종교인의 사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이구요.
한마디 지르자면, 보람님께서 피력하고 계신 성경 속 "설명될 수 있는 부분"에 관한 논의도 "성경의 진리와는 무관"한 "곁가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이구요. 어차피 종교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에, 증명되어서 믿은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저는 최대한 곁가지가 아닌 "핵심"의 부분을 '제대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겁니다. 핵심이 곁가지에 휘둘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핵심을 이야기하기 위해, 누구보다 곁가지의 문제를 속속들이 생각해야 함이, 말하고자 하는 그 "핵심"에 대한 도리이겠구요.
답글 부탁드립니다.
병장 김대현 (2006/04/11 11:53:18)
보운님 / 이거, 우람씨가 깜짝 놀라시겠는데요 [웃음]
상병 엄보운 (2006/04/11 11:55:40)
병장 강보람/ 어이쿠- 우람님을 사모하다보니 그렇게 쳤네요. 대충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한 번 제대로 글을 써야 겠네요. 조금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흥분은 안했는데 자꾸 그러시면 흥분하고 싶어지잖아요. (웃음)
상병 엄보운 (2006/04/11 12:50:38)
병장 강보람/
저에게 있어 종교적 입장이란, 절대자를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제가 흥분했음에도 친절하게 설명한 '데우스 어쩌고'가 왜 쓰여졌는지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신적 존재가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이렇게 흘러가리라 의도했다면 과학적 방법이고 뭐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보람님의 생각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아니라면 제가 한 이야기가 보람님의 주장과 틀릴 게 없습니다. 제가 말한 학문적 태도에 대한 '신적 존재의 전제'의 무의미성을 이제는 아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과학의 과거의 잘못을 따지자는 사람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람님께서 과학사의 과거를 비판을 자신의 논거로 삼는 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 많은 해악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제가 쓴 '종교적으로' 라는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제가 그랬나요? 에이~ 설마요.' 라고 하셨는데, 전 그 수준으로 맞춰드릴 수가 없네요. 능력 부족입니다. (웃음)
뻔한 오타로 장난을 치시다니, 유쾌하신 분 같아요. 저도 말장난 좀 쳐볼까요? <친절하신 것 같애요> 라니요. -애-는 사동 접사예요. 그리고 띄어쓰기 좀 해주세요. '그의견' '칠수밖에요' '잘못이해를' 같은 간단한 것 정도는 지켜주실 수 있잖아요. 설마 이 정도도 모르시진 않을 것 같고, 이것 혹시 발가락 실수라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보람님께서는 꽤 많은 관리가 필요할 것 같네요.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 알 수 있다면, 걸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지요. 제가 이름을 틀리게 써서 기분 나쁘셨어요? 사과드릴게요. 그런데 손가락 운운한건 기분이 나쁘네요. 보람님의 답글을 좀 돌아보시겠어요? 제가 반박할 수 없게 말이예요. 이렇게 되면 소모적이잖아요.
병장 강보람 (2006/04/11 13:46:36)
보운님 / 이아쿠, 맞춤법을 잘모르는 게 이럴때 흉이 되네요[웃음]
저도 한글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인데, 역시 지식이 안 따라주면 안되는 군요.
그리고 어설픈 개그로 가장한 공격에 대해 일단 사과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정리가 안되는 것 같으니, 글을 한번 본뒤에
다시 글을 올리도록 하지요.
아, 그전에 제 질문에 답을 해주세요.
바로 요 전 질문이요~
상병 엄보운 (2006/04/11 14:02:56)
병장 강보람/ 억지로 제 글을 보람님의 글에 근거한 글로 받아들이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글의 발생을, 즉 제가 생각하고 있는 '종교적 전제'과 '학문의 자세' 문제를 보람님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명시적으로 그 단락에서 지칭하는 사람은 보람님이 맞습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1 14:06:24)
보운님 / 제가 썼던 내용을 단락에 인용하시면서 너무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에 글에 근거한 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면, 무슨 말씀이신지....?
상병 엄보운 (2006/04/11 14:16:46)
병장 강보람/ 그것에 대한 제 의견은 대현님의 윗 질문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의 사실 은폐, 왜곡을 말하기에는 종교의 폐단이 너무 크다는 뜻에서 너무하다는 겁니다. 즉, 그 논리를 끌어다 쓸 염치가 종교에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지요.
병장 강보람 (2006/04/11 14:23:17)
대현님의 질문과 연결되는 건 상관이 없는데,
글을 다시 보시죠.
"종교적 입장에서, '새로운 과학 이론이 과거의 과학 이론을 대체하고, 그 전까지 기득권은 그것은 은폐와 왜곡을 시도한다.' 라고 종교가 과학을 비판하시다니 이건 좀 너무했군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라고 말하시려면 있다면, 보람님의 과학 비판 또한 지금의 일이 아님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
이 단락 어디가 대현님의 질문과 연결되는 말이죠...?
'새로운 과학 이론이 과거의 과학 이론을 대체하고, 그 전까지 기득권은 그것은 은폐와 왜곡을 시도한다.' 라고 종교가 과학을 비판하시다니 이건 좀 너무했군요.
이건 분명 제가 과학에서 일어났던 전례를 얘기했던 내용에 대한 것이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라고 말하시려면 있다면, 보람님의 과학 비판 또한 지금의 일이 아님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
이 단락을 보더라도 저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창조론'적 입장은 신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끼워 맞추기가 100%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굴절을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논거를 찾는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전제의 종교는 모든 이론을 종교적 입장으로 포섭 가능하지요. 즉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충분히 요리 가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의 가정과 종교의 가정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위에도 다른 분들께서 언급하셨지만, "신께서 창조론을 반신반의하게끔 의도하셨다." 라고 하면 할 말 없지 않겠습니까?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불태우고, 교황의 이름으로 노예해방을 반대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천동설을 지지한 것이 훗날 영광된 자리를 안배하기 위해서라고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불가능한 논리(?)가 없죠. 이렇게 되면. "
이 단락에 와서야 말씀하신 내용들이 나오는 군요.
그리고 예전 책마을에서도 컬럼을 본 것 같은데,
자기가 잘못이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없는겁니까?
그건 어떻게 보면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병장 강보람 (2006/04/11 15:17:04)
대현님 /
대현님이 제기하시는 의문의 일부는 이미 이야기한 내용들이겠군요.
세부적인 사항이 바뀌었을 뿐이지.
종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은 지난글에서, 어느정도 서로의 거리를 확인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제 의견을 정리하자면,
"믿는 사람들의 행실에 문제가 많다. 그래서는 안된다.
하지만, 컴퓨터가 아닌 사람이기에 잘못의 여지는 있다.
그리고 사람이기에 진리를 완벽히 실천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입니다.
서로의 더이상의 절충점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객층과 기타 곁가지에 의한 진리의 훼손에는 동의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진리를 가릴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훼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단락의 질문에 대해서는 핵심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해한 범위내에서 답변을 하자면,
"성경 속 "설명될 수 있는 부분"에 관한 논의도 "성경의 진리와는 무관"한 "곁가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종교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에, 증명되어서 믿은 것이 아니기에.."
->역시 동의는 합니다.
저 역시 처음부터 증명되어서 믿은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냥 맹목적인 믿음에서, 점차 증거들과 설득력을 갖추면서
좀 더 근거가 있는 믿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더 이상 의견이 좁혀지지는 않겠네요.
병장 강보람 (2006/04/11 15:22:48)
상엽님 /
상엽님께서 지금 죽~ 늘어지는 답변들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계신 것 같네요.
네, "말 꼬리 잡기 놀이"이지요.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논쟁보다는 저질 농담들이 오갔고요. 음.
그점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책마을 여러분께, 보운님께 사과드립니다.
병장 김대현 (2006/04/11 15:33:03)
보람님 / 그렇지요, 사람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챙길 수 있는 건 챙긴 다음에 "완전할 수 없잖아?" 라고 묻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종교 내에서 잘못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잘못은 더욱 철저히 가려져야 하고, 그 "진리" 속에 혹시 깃들어있을지 모를, 진리가 아닌 것들에 신경을 기울여야 하겠지요.
종교에 대한 저의 위악(고객층 같은)은 바로 그것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종교는 맹목적인 믿음이다 - 라는 말과 종교는 애초에 사람이 모르는 것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 는 말은 다릅니다. 그리고 보람님이 말씀하신 그 "증거들과 설득력" 중에 가장 큰 부분이 "사람에겐 모르는 것이 존재한다" 라는 것이라 저는 확신하고, 그것보다 더 큰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은 없으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도 그 아래 새롭고 너른 지반을 종교는 가질 수 있습니다. 과학은 안돼도, 종교는 가능합니다. 저는 그것을 꿈꾸는 겁니다. 진화론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한들, 그 진화마저 신의 섭리라 이야기하는 것으로 종교는 세상 끝까지 살아남아 거기서 제 소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의 테두리에 갇혀 종교를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끊임없는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저는 보람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그렇게 다 내주면 어떡하느냐, 나는 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상징과 겉치레를 (설령 그것이 온전히 편견이라 하더라도) 다 내버릴 수 없다." 라는 말이 가능하겠고, 그 속에서 "그럼 대체 어디까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신앙의 외양을 떨어버리는 과정에서 신앙을 위해 필수적인 신앙의 외양을 어디까지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보람님의 고민을 듣고 싶은 것이죠. 사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재밌을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상병 송희석 (2006/04/11 15:36:26)
대현/ 이제 그 재밌을만한 부분을 같이 이야기할때가 된것 같은데, 솔직히 남을 통해 할 필요도없이 칼럼하나 준비하시지 않으셨나요? 저역시 그 부분에 대해 할말이 많은 사람중에 하나라서 더더욱 기대되는 바입니다.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에코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저들이 예수가 돌아가셨던 십자가 조각이라고 하는것들을 전부 모으면 수십개의 십자가를 만들수 있다!"라는 뭐 대충 이런 이야기.....
상병 엄보운 (2006/04/11 15:39:22)
병장 강보람/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사과드립니다.
병장 김대현 (2006/04/11 15:42:47)
희석님 / 에이, 희석님이 먼저 - [간질]
이거, 댓글놀이에만 취미붙였더니 글 하나 쓰는게 녹록치 않아서 원, 아이구 - [뻐근]
병장 강보람 (2006/04/11 15:53:54)
대현 / 좋은 이상을 갖고 계시는 군요.
그 이상 변치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제 고민을 이야기 한다고 해도,
결국 필수적인 신앙의 외양에 대한 정의가 틀리다면,
평행선을 달리겠죠.
(제 생각엔 대현님글을 쭉 보아온 결과 틀린 것 같습니다.)
병장 강보람 (2006/04/11 15:54:50)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조금 정정하면,
대현님이 틀리다는 게 아니라 저랑 생각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4/11 16:14:35)
아.. 아깝다. 원영씨 칼럼엔 덧대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재밌는 토론이 벌어졌었군요. 할말 참 많은 주젠데. 아쉽네요. 쩝.
병장 김대현 (2006/04/11 19:52:19)
보람님 / 좋은 이상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좋은 행위는 누구나 가지기 힘들지요.
그 얘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쪽팔린 이야기이기에 "선빵"을 날리기는 저로서는 힘들군요. 하하.
당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렇듯 어느정도는 비겁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주눅들지 않으셨으면 좋겠구요.
신앙의 외양에 대한 정의는 한 구절로 요약되는 아포리즘 따위론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기에, 다음 이야기를 기약할 밖에요. 밑바닥에 있는 말을 꺼내드리자면 저는 솔직히, 제가 무언가를 신앙하고 있는지조차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 흔들림조차 신의 역사하심이라 믿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전가"가 직무유기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가짜 위안에 쉽게 빠져들 수도 없는 일이구요. 어느 CCM 가수가 읊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와 비슷한 상태랄까요.
어떤 말이든, 결국엔 그렇게 자신의 추잡하고 속된 어떤 이야기를 꺼내올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그걸 꺼내어 이야기할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우리, 그때를 기약합시다. 좋은 대화 나누어 반가웠습니다.
상병 김형훈 (2006/04/13 12:00:40)
아도데체 왜!!
이 위험한 주제는 뭐얏!
상병 곽지훈 (2006/04/18 08:55:09)
엄청난 주제죠....
차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병장 정치훈 (2006/04/30 10:57:23)
늦게나마 이 논쟁을 접한 저의 의견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강보람님의 글에서는 강한 적개심이 느껴지네요. 흔히 인터넷상에서 댓글 문화가 생기면서 발생한 병폐중의 하나인 말꼬리 잡기도 강보람님 글에서 많이 느껴지는 것 같구요. 저도 상대방이 쓴 글에 대한 문장 하나하나를 인용해서 글쓰는 방법이 편하기 때문에 자주 쓰지만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자제하려고 노력 합니다. 어차피 그런식의 글쓰기는 서로의 소모적인 논쟁만 야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해서 그 논점을 반박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 글을 못 읽으실 가능성이 높지만 읽게 되더라도 화내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럴 능력도 안되구요. 다만 허원영님의 의견쪽에 더 공감이 가네요. 제가 성경을 믿지 않아서 일까요?
병장 정치훈 (2006/04/30 10:59:35)
진화론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옳다는 전제 하에 끼워맞추기식 연구는 근본적인 설득력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의견에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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