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 김강록 (2006/02/01 23:07:47)

희석, 원영님께 : 문제는 욕망과 그것의 실현이다! 

(이파리로 달기엔 길고, 따로 답글로 달기엔 하나의 완결된 글의 구조가 아니고, 해서 절충안으로. 이파리에 제목 달기.) 

사실 이번 주제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새롭지 못한 감이 있어요.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20대─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의식화'를 둘러싼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겪어보고 거기에 대해 한 마디라도 섞어보았던 대학 초년생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주제인데요. 헌데 놀랍게도, 진정 주목할 점은 항상 결론없는 평행선으로 끝났던 이 주제를 원영님께서 세계 최초로─적어도 제 삶의 범위 내에서는─거진 해결을 보셨다는 겁니다. 더더욱, 저희 학회 후배들에게 원영님의 글을 소개해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건 결코 저의 후배들이 스스로 고민해볼 기회를 제멋대로 빼앗아가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소모적인 논란거리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그 역량으로 더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할 여유를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 청춘기의 열정이 저보다 더 높은 계단에서 출발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희석님. 새로 보금자리를 옮긴지 오래지 않아 언제 예전같은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했던 우려를 불식시키는 요 근래 북클럽의 열띤 논의의 중심에는 희석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거듭 감사드립니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자꾸만 논의의 방향이 '독해'의 문제로 빠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논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것을 자꾸만 언어의 문제로 환원하려드는 저 개인의 성향 탓도 있습니다만.) 위에서만 봐도, "수많은 자기분야와 관계있는것들을 폭넓은 방식으로 문제제기도 하면서 '관심'을 가진다면 부담감도 줄어들면서 질높은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였습니다. 아니 '관심'뿐이 아닌 '실천'까지 할수 있지 않을까"라는 명석판명한 언표를 통해 서로의 의견에 대한 이해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필요 이상으로 먼 길을 돌아간 듯한 인상이 듭니다. 

이는, 위 경우를 놓고 보자면 '무관심'이라는 말이 너무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희석님이 말씀하신 '무관심'은 '우리의 진정한 욕망 구현에 대해 적대적인 관심에의 강요에 대한 반발', 즉 차라리 '욕망'의 문제였을텐데요. 하지만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무관심'이란 단어의 의미는 대체로 희석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정치적 함의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서 희석님의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곤혹스러워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용어의 사용을 명확하게 해주시면 논의의 효율성이 보다 높아지지 않을까 감히 주제넘는 주문을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이건 원영님께 드리는 말씀인데, 

"희석 님의 글을 쭉 읽어보니, '관심'이니 '인식'이니 '책임'이니를 강조하는, 또 부여하는 논리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시는 듯 합니다. 강록 님은 그것이 자신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군요. 강록 님의 입장이 기존의 '도덕률'을 의심하고 그 배후의 구조를 거부하는 데 있다면, 희석 님의 논리는 '관심'이나 '책임'의 문제에서 오는 '부담감'을 줄이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는 원영님의 지적을 듣고 뜨끔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지금껏 속으로, '도덕적 책임'과 '불편한 의식'의 의미를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의 매듭을 감.히. 제.가. 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등은 해소되었다.'라고 감.히. 우쭐거리고 있던 차에, 원영님께서 아직 불씨가 온전히 다 꺼진 건 아님을 다시 짚어내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언어 이전의 막연한 느낌을 신봉하는 사람이기에 희석님의 글에서 느꼈던 어떤 '에네르기'가 저와의 동질감에서 온 것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논의 과정의 텍스트상으로 원영님의 지적은 정확하십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여전히 희석님과의 어떤 '동질성'을 주장하고 싶네요. 

왜냐하면 저 역시 '욕망'을 지지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필진의 '묵은 최신작'인 「송혜교를 지켜라!」 「'멀쩡하게 생긴 녀석에게서 용기를 얻다」「나는 왜 학교 열람실과 거리가 먼가」 등에서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껏 꾸준히 내면의 욕망에 충실할 것을 주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구호 : 도로 포장 벽돌 밑에 해변이 있다!) 원영님의 너무나도 명쾌한 표현을 빌어 제가 '기존의 도덕률을 의심하고 그 배후의 구조를 거부'하려 시도했던 것은, 다시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우리의 욕망이 발현되기를 억압하는 조건들이기 때문입니다. 희석님의 말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결국 '관심에의 강요' 역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발현되기를 억압하는 조건이 아닌가─하는 뜻에서 '무관심'을 변호하려 하셨던 거겠죠. 

단, 이 지점에 대해서는 저도 희석님과 다소 이견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는, '욕망'과 '무관심'이 일시적으로 겹쳐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항상 등가일 수는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관심'을 욕망할 수도 있는데. 희석님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욕망을 '벗어나려는 것' '뛰쳐나오는 것'에만 지나치게 한정시키는 듯한 인상이 듭니다. 거꾸로 우리가 '뛰어드는 것'을 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이번 논의는 '불편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추스려서 '정치적으로 반듯한political correct' 행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게 아니라, '뛰어들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제약하는 각종 이유들을 어떻게 하면 잘 조율해서 무리없이 '욕망의 실현'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저도 덕분에 여기까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들 고맙다구요. 하핫!    
 
 
상병 송희석 (2006/02/02 00:02:08)

강록님// 축구가 끝나고 님의 글을 본 순간 다시 한번 담배를 물수밖에 없었답니다.(웃음) 
일단 '독해'문제로 빠지게 되는것은 저의 개인적인 경향이 너무나 크게 나타나고 있는것 
같네요. 그점 고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무관심'에 대한 저의 정의를 강록님처럼 표현했다면 조금 달라졌을텐데, 전 그런 표현을 
쓸 문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것 같습니다.(울음) 

특히 강록님이 마지막 단락에서 저는 분명 첫번째 논의를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다시 보니 
역시 두번째 논의가 더 정확한것 같습니다. 아니 두번째 논의라고 생각하면 그 어느누구라도 
이파리도 달지 못할만큼 원영님의 글은 완벽하다고 볼수 있네요! 

아무튼 이 곳은 저에게 큰 경험을 줄수있는 곳임은 분명한 사실인것 같네요. 앞으로 많은 
실수로 인한 소통을 할지언정 흘려버리시지 마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병장 김동환 (2006/02/02 08:29:12)

프린터는 이런 글을 인쇄하라고 있는거죠.(웃음) 
저도 대현님과 같은 이유로 원영님의 그간 칼럼중 이번글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남과 다른 생각을 
해낸다는 것과 그것을 여러사람이 볼수 있게 공동의 언어로 펼쳐놓는 것 두가지 모두 참 어려운 
일인데 이 글은 그 두가지에 보란듯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네요. 멋져요. 
요즘 부쩍 토론이 많아진 책마을 분위기가 저를 행복하게 하고 있습니다. 호호호.    
 
 
병장 한상원 (2006/02/03 03:09:59)

며칠 쉬고 올라왔는데 엄지 손가락을 다섯 개 정도 준비할 걸 그랬습니다! 저는 괜히 사족만 갖다붙인 것 같아 너무 부끄러워요! (웃음) 

그래도 조금만 덧붙여보자면, 2)의 무감각의 문제에 관해서는 사안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연계가 실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 같아요. 쉬운 예로 환경오염과 나 사이에는 자주 듣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해보건대 별 관련을 못느끼거든요. 더 나아가 나의 자식이 시달리게 될 입시지옥이라든지(공교육, 사교육의 문제), 농업에 종사하는 인척이 있더라든지(FTA) 말이죠. 

이런 연계를 생각하면 3)까지도 어쩌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습관의 문제라는 것 역시도 몸이 필요로 하면 운동을 하듯, 관계 혹은 인과를 인지함에 있어서 먼듯 보이는 문제 현상들의 배후에 있는 원인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가장 핵심적이면서 골치거리인 4)번의 경우에는 원영씨 말처럼 구조의 문제로 결국 향하겠지만, 저는 이 또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을 넘어서는 구조는, 개인을 넘어서는 결속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멀고도 험합니다.    
 
 
병장 육이은 (2006/02/03 08:47:13)

원영님, 상원님. 자꾸 이런 글 올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전역할 때 너무 아쉬워진단 말이에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원영님의 첫번째 글도 훌륭했고, 상원님의 예리한 보론도 좋았고, 그 진전물의 격인 이 글은 아주 탁월했습니다. 저도 학교로 돌아가면 주위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해주고 싶네요. (괜찮겠죠?) 

4)의 문제에 사족의 곁다리의 아기발가락을 살짝, 몰래 걸치자면요, 

4)의 문제가 '책임의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에 '시대의 모순'을 바꾸는데 부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책임의 인식'은 모르더라도 '시대의 모순'을 바꾸는데 '특정 상황에서' 급진적인 역할도 하는 듯 해요. 인간의 역사가 굉장히 모순적이듯, 사실 '이 죽일 놈의 구조'라는 것이 굉장히 모순적인 효과를 내거든요. '먹고사는 문제로 바빠서 다른 문제에 신경쓸 틈이 없다-'라는 것이 '이 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라는 자기고백이자, 인식이기도 하거든요. 그 인식의 수준에 대해서 논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4)의 문제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결국은 일상적으로 어떤 불만족 상태에 있다는 소리가 되지요. 사실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 자기 주변의 소소한 불만에서 출발하기도 한다고 봐요. 
'구조'라는 놈은 마치 고무풍선 같다고나 할까요? 질길 수록 늦게 터지지만, 그럴 수록 터질 때 아주 큰 소리를 내게 되지요. 

뭐- 그래서 결론은... 좌절하지말자- 뭐 그런 게 되겠지요. 원영님의 의견에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다"라는 말 빼고는 거의 다 동의합니다. 아주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3 10:19:30)

상원 님 / 역시 상원 님다운 지적이십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어떤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유지'하는 문제는 다르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자기의 경험'이 아니기에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계속적으로 '인식'시켜야 하겠지만요. 

그리고 '구조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로 향한다는 것에는 동감합니다. 개인이 '집단'이나 '구조'와 싸우면 반드시 지기 때문이지요. 이에는 이, 구조에는 구조로. 그렇지만 이 시대는 '집단'이나 '연대' 같은 것은 형성하기 참 어렵군요. 색다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은 님 / 물론 괜찮습니다. 영 쑥스럽긴 하군요. 

이은 님의 '고무풍선' 이야기는 1798년의 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수 백년을 이어 온, 그 질기던 제 1신분의 '구조'도 결국은 대폭발을 일으키며 터져버렸으니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사회가 '불만족 상태'에 있는 것을 떠나서, 자꾸 '만족시키려는' 상태로 가려는 것이 영 찜찜합니다. 전에 어느 글에도 썼듯이, '체제가 아니라 공기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나 할까요. 현실 스머프주의 국가의 실패도 큰 몫을 했을테고, 뭣보다도 이 '세계화'라는 것이, 자꾸만 사람들이 '불만족'을 느낄 만한 여유를 없애면서 한 곳으로 몰아대고 있어요. 고민이 필요합니다. 


*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다'에 대하여 

촘스키를 인용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이전에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이건 '스머프주의'가 '현실 스머프주의 사회'와 전혀 다른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현실 자본주의 사회'와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들어 제기되는 문제, 그러니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그것에 딸린 '도덕론'을 함께 읽지 않으면 완전히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적절한 예가 되겠군요. 

더 이야기해 보자면, 고전 경제학의 '자본주의'는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을 근간으로 하는데, 이 시대는 이 전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산업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완전경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력'은 다른 나라로 이동하지 못하는데, '자본'은 자유롭게 이동하지요. 따라서 '자본'이 '인격'을 가진 채 움직이고, '노동력'은 '인격'이 사라진 상품이 됩니다. 이런 시대는 '이론적인 자본주의 시대'가 아닙니다. 제가 즐겨쓰는 '자본지상주의 시대', 또는 '자본을 신격화하는 시대'가 차라리 옳은 용어이겠지요.    
 
 
병장 육이은 (2006/02/03 10:53:06)

예에. 답글 감사하고, 이 세계를 어떻게 규정할 지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볼께요.    
 
 
상병 엄보운 (2006/02/03 11:06:31)

엄지 손가락이 두개라는 것이 아쉽기만 하는 글이군요. 저도 주변의 친구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책마을 필진분들이랑 같은 군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병장 이준우 (2006/02/03 12:17:15)

제가 생각의 깊이가 깊지 못해서 답글을 달기가 망설여 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의식을 갖고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글에서 쓰신 것처럼 각자가 "관련"된 일만도 개인의 삶을 꽉 채우니까요. 그래서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게 아닐까요. 무관심을 정당화 시키는게 아니라 어쩔수 없는 거라고 해야할까요. 위에 필진부들처럼 멋진 글귀는 생각이 나질 않는게 안타깝네요. 
"분담"하는거죠. 단 협력은 필요하겠죠. "공동체"의 중요한 덕목중 하나가 "협력"과 "유기성"이니까요. 위에 분들께서 말씀하시는 주제와 너무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해서 걱정입나다.(땀) 
제가 생각하는 "어떻게"를 적고 싶었습니다. "협력"과"공동체". 위 주제와 어긋난다면 지우겠습니다.    
 
 
상병 엄보운 (2006/02/03 12:33:35)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라는 말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원영님께서는 자본주의의 근간인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라고 볼 수 없다라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상품 속에 내재하여 국경을 초월하는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론은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강화되고 있습니다. 요 근래의 FTA(자유무역협정)가 아직은 현실적으로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와닿지 않는다고 차치한다 하더라도 '스톨퍼-사무엘슨 정리'로 위시되는 자유무역에 관한 경제학적 체계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뒷받힘 해주고 있습니다. 

* 스톨퍼-사무엘슨 정리 : '어떤 상품의 상대가격이 오르면 그것을 생산하는 데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생산요소의 가격도 오른다.' 


반대 입장으로 촘스키쪽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촘스키의 말은 단 0.1%의 이익이라도 생기는 곳에 0.1초만에 덤벼드는 세계 자본에 비해, 제한적인 노동의 이동은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근거로 불완전한 자본주의를 이상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본의 투기적 성향은 광범위한 자본의 유동으로 노동의 제한적인 이동에 비하자면 그 크기가 실로 막대합니다. 전세계의 자본 이동의 98%는 투기적 자본 이동으로 관찰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실제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무역적 크기의 50배 정도되는 자본들이 투기적으로 전세계를 휘돌며 자유롭게 쏘다니고 있습니다. 촘스키는 이러한 엄청난 자본의 유동적 특징을 노동과 비교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킨 것으로 생각합니다.    
 
 
병장 육이은 (2006/02/20 07:22:27)

지웠다가 다시 올리려니까 민망해지는군요. 어쨌든, 추후 논쟁된 것을 데이터화 할 필요는 있을것 같아서. 
별 문제있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보안성검토 때 괜히 찔려서 지웠던 겁니다. 




자본주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자본주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이 글을 쓰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별 대단하지도 않은 문제가지고, 그저 원영씨의 글「자기보론-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단 한 문장 거론된 이야기일 뿐인데 그것 가지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이러다가 다른 주민분들의 비웃음조 꼬리말이 주르륵 달리는 건 아닌지. 아름다운 책마을 주민이 되기 위한 방법 중 한 가지인 독서후기 열심히 쓰기조차 뜸해지고, 필진들이나 여러 주민분들처럼 탁월한 꼬리말로 토론의 길을 잡아가는 재주도 없어, 그저 내 이름 석자 책마을에서 잊혀지는 게 두려워 쓸데없는 친목성 꼬리말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처지에 이런 글이나 쓰고. 더군다나 남이 자본주의를 뭐라고 부르건 내가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그냥 듣고 넘기려다 못된 성격이 꼭 한 마디 붙이고 싶어 고민하다 쓰다보니 약간 길어졌다. 아무튼- 
우리는 어떤 명칭을 두고 많은 논쟁이 벌어진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최근 원영씨는 자신의 글에서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 글은 그 이유를 나열한 것이다. 
굳이 따로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다"라는 말이 원영씨의 글에서 중심적인 내용이 아니었고, 그 글의 본문이 매우 훌륭해서 논지를 흐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책마을에서 이 문제가 한 번쯤 다뤄지는 것도 매우 유익하리라는 판단이다. 


자본주의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전제조건에 관하여 


원영씨는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자본주의의 이론'과 지금의 세계가 다르므로 자본주의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본주의의 이론'은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을 말하며, '자본지상주의 시대' 또는 '자본을 신격화하는 시대'가 옳은 용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도출된다. 

①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②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은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올바른 잣대인가. 
③ 지금 세상을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①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원영씨가 말했듯 결국 "이론은 이론일뿐이다" 이론에 딱 들어맞는 현실을 본 적 있는가? 우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동그라미를 본적 없지만 동그라미에 대한 비교적 안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맥락에서의 봉건주의는 존재했는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고대 노예제 사회는? 사실 어느 것도 완전한 '이론으로서' 존재한 적 없다. 만일 순수한 이론으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 어느것도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줄 수 없다. 표면에 채 닿기도 전에 미끄러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론은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론의 핵심적인 어떤 특징 혹은 경향이 합당하다면 그것을 그 무엇이라고 부른다. 
②의 문제는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 - 자본의 부동'이 현 시대를 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가의 문제겠다. ②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운씨도 답글을 달았다. 나는 보운씨의 의견에 상당부문 동의한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나, 국내의 '사회구성체논쟁'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고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 범주에서 뭉뚱그려 이야기해보자면, 자본의 축적이 상당수준 진행되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자기 노동이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노동자집단이 성장하고, 시장경제가 상당부문 진척되어 그 사회의 경제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굉장히 추상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사회의 하나의 전반적인 경향을 말하는 추상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도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논쟁은 아직도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주1)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은 원영씨 말대로 '이론일 뿐', 자본주의냐 아니냐를 가를만한 최소한의 기준 혹은 전제가 되는지 의문이다. 우선 원영씨가 '완전 경쟁'을 어떤 의미에서 쓴 것인지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일단 완전경쟁은 주류경제학에서 '수요-공급' 곡선을 필두로 하는 여러 이론들 - 특히 미시경제학의 -을 설명하게 위한 가설일 뿐이다. 완전경쟁은 ① 판매되는 재화가 질적으로 동일하고 ② 판매자와 소비자가 아주 많아서 개별 판매자나 소비자가 시장가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하는데, 이런 사회는 원영씨 말처럼 "산업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여러 국가나 경제권 사이에서 뿐 만 아니라, 한 국가 내부에서조차 단 한 번도 성립된 적 없다. 
원영씨가 '주류경제학적 정의'가 아니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는 의미에서 '완전경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면, 자본주의는 원래 '동등하지 않은 조건'을 통해 성장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자본주의로 인한 최대의 성과는 심지어 스머프선생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생산력의 극단적 성장이며, 이 극단적 성장은 '동등하지 않은 조건'을 어떤 의미로든 이용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생산수단을 가진 국가가 값싼 노동력이나 원자재를 가지고 있는 국가를, X부문에 비교우위를 지닌 지역이 Y부문에 비교우위를 지닌 지역을 이용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본주의의 성립조건은 사유재산권과 재산 격차의 긍정인데, 이것 또한 동등한 조건에서의 경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력의 이동 - 자본의 부동'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에는 보운씨 의견에 동의하는데, 어떤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 생각은 이렇다. '이론적인 자본주의'의 시대가 아니라는 말 자체부터 사실 동의가 안 된다. '이론적인 자본주의'가 뭔지 너무나 많은 정의들이 있고, '완전경쟁'과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도 딱히 적당한 전제조건이 되는지 의문이다. 


이름논쟁에 숨겨진 의미에 대하여 


사실 이렇게 말하며 보운씨의 의견에 첨언했지만, 사실 나는 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이름논쟁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하다고 본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회 각계에서의 이름짓기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름짓기가 '사회적 제 관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현실적 효과를 낼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시기부터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는가?"의 질문에는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숨어있다. 시점을 잡기에 따라 '서구 제국주의의 노동력·자원의 약탈', '산업혁명 초기 서구 노동자들의 피와 땀', '청교도 윤리', '프론티어 정신(?)'등 다양한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당연히 현실 사회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오래된 이야기지만, '현실사회주의국가'를 어떻게 이름붙이는가에 대한 논쟁도, 각자의 대안을 추구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령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평가하는 입장은 맑시즘의 종언을 말하며,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후쿠야마 등)를 이야기하거나 새로운 저항의 모색(주로 포스트모던?)을 추구한다.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었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황광우)의 주장은 인간은 결코 역사적 발전법칙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토로이다. 똘똘이 스머프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타락한 노동자국가론'과 '국가자본주의론', 그리고 다른 좌파들 사이에서의 논쟁은 에멜주의에 대한 평가와 그 현재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결국 사회의 여러 이해세력와 이데올로기의 배치에 따라 '이름짓기'는 그 사이에 상이한 전선을 긋는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이름짓기'는 무의미한 말장난에 그칠수도 있지만, 반대로 굉장히 현실성 있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이름을 짓는 사람들의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여러 사회관계의 배치니까. 
나는 이런 맥락에서, 현 시대를 자본주의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그것이 같는 논리적 궤적 혹은 효과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현 시대를 자본주의라 부르지 않은 것은 어떤 효과를 갖는가? 그것은 현 시대의 여러 중요한 문제들 - 기아, 빈곤, 전쟁, 빈부격차, 그리고 원영씨가 이야기한 '자본을 신격화하는 경향 혹은 물질만능주의 - 의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한다. 이런 논리는 원영씨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로 세계화나 자본주의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써먹는 논리다. 세계화를 통해 빈곤과 빈부격차가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정당하며, 지금의 전쟁·빈곤·빈부격차는 자본주의가 본래의 모습, 즉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혹자들은 각종 사회복지시스템을 비판하며, 빈곤과 빈부격차는 완전한 자본주의 ('완전경쟁')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앞 단락에서 말한 현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의 책임에서 '자본주의'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현 시대는 명백한 자본주의이고, 자본을 신격화하는 경향은 자본주의적 논리의 당연한 귀결이며,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론으로서의 '자본주의'든 현실 사회로서의 '자본주의'든 책임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주2) 


책임이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책임'이야기가 나와서, 결론은 원영씨의 「자기보론-어떻게 할 것인가」로 돌아가겠다. 자본주의에 명백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 것은, 감히 인트라넷에서 거론하기 힘든 어떤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자 함은 아니다. 무엇보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더 잘되는 것인지. 그저 책임 소재는 명확히 해두자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두자. 내가 「자기보론-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려는 이유이기도 한데, "'자본주의'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이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을 사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쓰다보니 '사해준다'라는 표현을 쓰긴 했는데, 웃긴 말이긴 하다. 대체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건지)어떤 이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이름이 무슨 예수 그리스도라도 되는 양 뭘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 이것에 대한 답은 원영씨의 글을 읽어보면 될 듯하다. 






주1)원영씨가 "'스머프주의'가 '현실 스머프주의사회'와 전혀 다른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현실자본주의사회'와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라고 말하여 이 두 사회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스머프주의는 성립 과정이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어느 불세출의 예언자가 예언을 하며 그 신념에 따르는 사람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먼저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후,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이론은 어디까지나 현실자본주의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고, 현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과 이론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설사 있더라도 그 차이는 크지 않다. 
반면 스머프주의는 정반대로, 이론(물론 그것도 대단히 추상적이었지만-)이 있은 후에 "그 이론을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스머프주의와 현실스머프주의사회에 커다란 간극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 모른다. 


주2) 반대로 스머프주의도 '나뽈레옹주의(혹은 대형주의)'의에 일정한 책임을 갖고 있는가? 나는 이론으로서의 스머프주의와 '나뽈레옹주의' 사이에서는 커다란 벽이나 낭떨어지가 있는 듯 하며 스머프주의에게 전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러나 에멜주의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에멜주의의 서자인 똘똘이 스머프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병장 허원영 (2006/02/06 11:27:17) 

저의 생각이 짧았군요. 역시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더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 듯 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고, 많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은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애초에 말하려고 했던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를 통해 설명했던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문제였습니다. 제가 썼던 '완전경쟁'이라는 단어는 '자유경쟁'이라는 말로 고쳐야 옳겠군요. 그리고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이라는 것은 순전히 애덤 스미스의 고전경제학적인 의미로만 썼습니다. 애초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말하려고 한 것은 '국가의 부는 어떤 방식으로 축적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지요. 그리하여 부의 축적은 '고정'된 한 국가 내에서 수출-수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그것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노동력을 자국에 들여오거나 자국의 노동력이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이런 '고전경제학적인 의미의' 자본주의 사회와 지금 사회는 다르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물론 지금 이 답글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초에 제가 뜻한 바대로 이해가 됐다 하더라도, 이은 님께서 제기하신 수많은 문제들은 애초부터 없앨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몇 가지 점에 있어서는 의문도 생기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뽈레옹주의(대형주의)'라든가 '에멜주의' 등 여러가지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쪽지로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병장 육이은 (2006/02/06 11:42:57)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더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 듯 합니다"는 사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말입니다. '노동력의 이동-자본의 부동'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국부론 이야기였군요. 이해했습니다. 

'나뽈레옹주의'나 '에멜주의'는... 뭐 나름대로 보안의식을 살린 것인데 너무 꼬았군요. 전 개인적으로 '~~주의'라는 표현을 많이 쓸수록 안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의'를 썼으니, 제 책임입니다. 쪽지로 답해드리겠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2/06 11:50:17) 

호호호. 에멜주의는 알겠는데 나뽈레옹주의는 잘 감이 안오네요. 

그나저나 책임질일만 늘어나는군요.(웃음) 


병장 육이은 (2006/02/06 11:56:29) 

원영님께도 쪽지드렸는데 제가 너무 오바했나봐요. 별거 아닌데. 책마을이 무슨 퀴즈게임 푸는 곳도 아니고. 
잘 모르시거나 관심없는 분들께는 거리감만 드릴것 같은데요. 앞으로 적절히 사용해야 할 듯합니다. 

조지 오웰을 참고하세요. 


상병 엄보운 (2006/02/06 12:26:42) 

마지막으로 달았던 답글이라 글을 쓰면서도 '조금 일찍 논의에 참가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 했었습니다. 이은님과 같은 이유로 너무 지엽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이 부분에 대해서 책마을 사람들과 말해보고 싶다라는 소통의 욕구가 있었는데 이은님의 글로 해결되는 듯 싶네요. 고마워요 이은님! 

두터운 스키마를 갖고 계신 무공의 소유자답게 재미없는 경제학적 사실을 사회적 현상에 빗대어 풀이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투르게 전개했다면 이런 글은 나오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어제 막 읽은 '문장강화'나 물끄럼히 한 번 더 쳐다볼 뿐입니다. 
특히나, '이름논쟁'에 관한 문단은 개인적으로는 이견의 여지 없을 만큼이나 그 요지를 잘 전달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뭐라 할 말이 없군요. 하하 - 만, 글을 더 길게 쓰고 싶지 않았다는 의도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글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풋 들었습니다. 

논의가 조금은 거칠고 부딪히는 맛이 있어야 타오르기도 하고 하는 건데, 너무 매너가 좋으셔서 굳이 더할 말이 없습니다. (웃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상병 엄보운 (2006/02/06 12:29:34) 

병장 김동환/ 그러게 말이예요. 이거 눈 감는 날에 '괜히 왔다 간다.' 하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큰 일 났어요. 보통 큰 일이 아니예요. 


상병 송희석 (2006/02/06 12:42:41) 

더더욱 큰일이다! 난 이글을 읽음으로 해서 경제학까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 큰일이다! 


상병 주영준 (2006/02/06 13:12:47) 

대문자주의.. 


병장 박형주 (2006/02/06 13:22:41) 

덧글을 보고서야 두 이름을 이해한 나는 바보인가. 하고싶은말이 많은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적절하지 않을 듯도 싶고. 


병장 한상천 (2006/02/06 14:10:21) 

제가 이해가 안되서 출력을 감행해서 몇자쓸려고 하니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오갔군요. 
~주의 ~이즘 아 정말 골치 아픈 언어의 향현같은 이라고.. 


일병 조형규 (2006/02/06 14:22:21) 

나뽈레옹주의와 똘똘이스머프라. 인트라넷의 힘이군요.(웃음) 
조그마한 태클을 걸자면 똘똘이 스머프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기 전에 정치적인 올바름에 대한 고려를 조금 더 하셨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으흠. 오늘도 똘똘이 스머프의 계승자들은 거리에서 열심히 신문을 돌리고 있겠군요. 


상병 김강록 (2006/02/06 14:38:50) 

3번에 대해서는 저 역시 무한한 지지를 보냅니다만. 하지만 저는 우리 촘 선생님이 "이 시대는 자본주의'도' 아니다"라고 했던 맥락으로 한번 다시 되돌아가 봤으면 하네요. 

그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자본주의는 공산진영과의 대결 구도에서 스스로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자본주의 진영의 개발도상국들을 들어 왔다고 합니다. 한국, 대만이 바로 그 예이죠. 이제 자본주의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보라, 자본주의를 채택한 제 3세계 신생독립국들의 눈부신 발전을!" 하지만 촘스키는, 과연 그들이 예로 제시한 한국과 대만이 과연 '자본주의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는지를 되묻습니다. 그 타이트한 '계획경제'를 과연 '자유방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촘스키는 내친 김에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봅니다. 한국, 대만과 같은 신생독립국들 이전에, 기존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성장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과연 식민지와의 일방적 무역을 통해 축적한 그들의 부가 과연 자본주의가 말하는 '자유무역'에 의한 것인지. 그들이 말하는,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 삽화같은 자본주의라는 게, 처음부터 있기나 했는지. 

그래서 촘스키의 '이 시대는 자본주의도 아니다!'라는 지적은 '자본주의'를 둘러싼 헛소문 비슷한 것들을 향한 꽤 공격적인 레토릭의 일환이었지, 촘스키가 의도했던 본래의 맥락을 놓고 따지자면 이은님께서 우려하시는 점들은, 뭐랄까요. 이은님의 말씀도 굉장히 유의미하긴 한데, 굳이 이 글을─촘스키적 의미에서의─'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한 반론의 성격으로 규정하자면 뭔가 아귀가 꼭 들어맞지 않는 느낌도 든다고나 할까요. 

뭐 어때요. 어차피 "의미는 사용에 있는 법"인데. 촘스키가 처음에 어떤 의도로 그 문장을 사용했든,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인용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함의를 가질 수도 있겠죠. 마침 이은님의 예리한 시선이 그 점을 놓치지 않으셨던 거구요. 

ps. 제 얘기는, 그러니까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마치 HOT에 열광하는 여중생처럼 촘 선생님을 우러러보는 한 청년의, 선생님을 위한 작은 변명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6 16:15:32) 

강록 님께 / 아! 제가 촘스키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그런 점이었군요. 어쩐지 글을 쓰면서도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어요. 이은 님의 주장이야 백번 옳은 것이지만, 아아, 뭔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 그럼에도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워서 뭐가 뭔지 파악할 엄두도 못냈군요. 

나 참, 책도 남이 대신 읽어줘야 이해하다니, 이거 오늘 자신의 무능력을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는 걸요. 


병장 육이은 (2006/02/06 16:23:05) 

밖에 나가서 사역을 뛰고 온 사이에 답글이 많이 달렸네요. 

흠. 강록님 말씀을 듣고나니 촘스키의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한 제 이해가 일부에 그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맥락이라면, '공격적인 레토릭의 일환'으로서의 촘스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WTO이야기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에게 불리한 시장 개방에는 굉장히 폐쇄적인 지금 선진국들을 봐도 말이죠. 저는 '자본주의를 둘러싼 헛소문 비슷한 것들'이 아닌, 제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그러니까 '결코 자유무역적이지 않은 자본주의'에 집중하다보니 이렇게 논지를 핀 것이겠죠. 

그럼 뭐, 결론은 제가 뻘짓을 했다는 생각도 조금 듭니다. 결국 제 '독해의 문제'에서 비롯된 거군요. 아앗. 얼굴 빨개진다. 


병장 허원영 (2006/02/07 07:34:59) 

이은 님 / 이은 님이 '잘못 독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후루꾸로 익힌' 내용을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않은 채 어설프게 써서 생긴 '텍스트의 문제'이지요. 애초에 명확하게 촘스키 선생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문장을 썼더라면 별 문제는 없었을테지만, 결국 그럼으로써 이은 님을 통해 좋은 공부를 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테지요. 저는 차라리 이은 님의 훌륭한 의견을 듣게 된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이건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엉뚱한 방식으로 커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병장 허원영 (2006/02/20 08:18:28)

아니 답글로 다시지 그러셨어요! 아무튼 다시 읽어도 또 공부가 되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