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왜 쓰는가 (상병 허원영/051107) 
 
 
 
 
  인간이 불행해 하는 이유의 가짓수는 무한대에 수렴하지만, 불행의 조건은 몇 가지로 압축시킬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근본에 대한 회의'다.
  어쩌면 인간이 '선천적으로' 불행할 수 있는 조건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은 무엇의 '근본'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세상의 어떤 고양이도 자신의 근본에 대해 회의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어떤 도마뱀도 삶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전유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온갖 종류의 '근본'에 대해 회의한다.
  문학의 영역에 속한 진지한 창작자들 대부분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근본에 대한 회의'는 바로 '왜 쓰는가'이다. '문학을 왜 쓰는가'에 대한 해답은 답변자의 수만큼 다양하며,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즉 각자 알아서 취향에 맞는 답을 찾아 가지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면 너무 심심하니까, 진지한 문학의 창작자들이 마주하게 되는 이 '근본에 대한 회의'가 어떤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지 살펴보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타파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근본에 대한 회의는 거의 예외없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특히나 소심하고(예민한 감수성의 표출인지도 모른다),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며(사물의 근본을 생각하는 태도일지도), 모든 것을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관찰하고(이면을 보는 눈?), 너무 뾰족한 성격을 지닌(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특징이 나타난 걸까) 창작자들은 이런 '근본에 대한 회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특유의 예민함과 논리적 정합성으로 자신이 회의하는 것에 대해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하고, 쉬운 눈속임이나 자기 기만을 견디지 못한다. 조금만 눈 감으면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굳이 정면에서 대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그들에게 자기 파괴적이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그들이 '왜 쓰는가'를 생각할 때 발생하는 첫번째 문제는,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이다. 문자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정보의 축적과 의사소통이라고 할 때,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는 저것들과 별로 상관이 없다. 정보를 축적하는 소설이나 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을 통한 의사소통은 가능할지 모르나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또한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는 효용이 없다. 어느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효용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 사회와의 관련성에서 얻어진다. 그 관련성이라는 것이 현 사회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쪽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모든 과학/공학적 지식 중에 현 사회 체제의 유지를 거부하는 것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문학에는 그런 특성이 없다. 문학은 오히려 현 사회 체제의 헛점을 드러내고,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의 약점만을 찾아내어 냉정하게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효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것은 다만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괴리감 정도다.
  그러므로 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글을 읽음으로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다 부수적인 것들이다. 문학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감정의 고양이나 정화 catharsis 를 문학의 효용으로 내세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이런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실질적인 이익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것은 명백하다. 길다면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던 기간이 훨씬 길며,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읽은 이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결정적으로,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사는 데 지장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문학무용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근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쓰는가?' 이렇게 무용한 문학을 왜 쓰고 있는가? 창작자들은 다시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구원도 없다. '문학의 신' 같은 것이 짠, 하고 나타나서 '너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무용하지만) 문학을 쓰거라'라고 말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주1). 오로지 '무용한 문학'과, '그것을 쓰는 자' 만이 존재할 뿐이다.
  왜 무용한 문학을 쓰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자기를 속일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택하는 답은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바로 '쓰고 싶기에 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직한 태도이다. 이 이외의 다른 대답은 변명이고 자기 기만일 뿐이다. 이 원초적인 사실에 무언가를 덧붙이고 치장하려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단지 쓰고 싶기에 쓴다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쓰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쓰는 창작자는 없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쓴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을 이렇게 상상해도 좋겠다.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을 쓰는 인간의 내부에는 암세포와도 같은 창작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소설이나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할 때는 바로 저 암세포로 인해 만들어진 악성 종양이 식도 끝까지 차 올라 밖으로 벗어나려 할 때인 것이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그것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기에 토해낸다. 어떤 이들은 단 한 번의 구토를 끝으로 다시는 쓰지 않는다(넬 하퍼 리처럼).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정신의 다른 부분에 전이되어 퍼져 있는 암세포를 자양분으로 계속해서 토해낸다(스티븐 킹처럼).

  쓰는 것 자체에 결부된 문제를 이런 식으로 회피하고 나면(주2) 두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왜 써서 남들에게 보여주려 하는가'이다. 쓰고 싶기에 쓰는 것은 좋다. 그렇다면 그것을 써서 왜 출판하는가? 어째서 게시판에 올리는가? 무엇 때문에 타인에게 보여주려고 하는가?
  이 질문은 몇몇 사람들의 인상중심주의에 대한 직격탄이다. 문학의 순수성을 믿는 이들은 흔히 이런 식의 주장을 한다. 문학은 순전히 작가의 감정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온전한 감정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옮겨놓는 작업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시의 경우에는 이런 사례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문학은 작가 개인의 '감정'과 '인상'을 표현한 것이고, 그 문학이 보편적 인간을 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들의 주장 속에서 문학은 항상 '개별'을 말하며, 그 '개별'이 다른 이와 완전히 공유되거나 '소통'의 수단으로 쓰이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문학은 작가의 개별적인 머릿속의 인상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주장에 대해서 1) 너의 글은 타인과 소통하기 어렵기에 틀렸다, 고 반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군가와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으면,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만이다. 괜히 원고지 수 백장 분량의 종이를 낭비해가며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다른 이들이 올바로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문학이라면 일기장에 써 놓고 혼자 보면 그만이지 않은가, 라는 식의 반박 역시 힘이 약하다. 완벽한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상이고, 따라서 공유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인상을 받아들인 독자가 다른 인상을 창조하고, 그 창조된 인상으로 인해 새로운 '개별'이 생겨난다는 논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학=인상=개별'이라는 등식을 받아들인다면, 여기에는 하자가 없다. 아무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李霜)의 시 역시 개별이요, 난 아직까지도 뭔 말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개별이다. 그 개별이 다른 인상을 낳고, 또 다른 개별을 창조한다. 이것으로 문학의 컨텍스트는 완성된다. 개별의 유토피아, 그것이 문학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무용하고' '개별적인' 문학을 출판하고 게시하며 보여주는 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것으로 '왜 보여주려 하는가'에 대한 회피(주3)가 완성되면, 그 다음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어떠한 경로로 출판되거나 게시되었든 간에, 그것을 읽을지 말지는 독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읽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작가와 독자, 둘 사이에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 이 상호간에는 어떠한 책임전가도 불가하다.(주4)

  결국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런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는 무용하다. 문학인은 다만 쓰고 싶기에 쓴다. 그리고 독자는 읽고 싶기에 읽는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시대에 문학이 낮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이익도 효용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이 시대에는 천대받는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이런 - 아무런 이해관계도 효용성도 존재하지 않는 - 문학의 속성으로 인해 아직까지 문학이 살아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뛰어가고, 날아가고, 빌딩을 올리고, 부동산을 장만하고, 펀드에 투자하고, 토익을 공부하고, 어학 연수를 가고, 보험금을 타기 위해 존속살해를 벌이는 이 시대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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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물론 사명감에 불타서/신의 계시를 받아서/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 위해 문학을 쓰는 일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선전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무용한 문학'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문학이든 무엇이든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쓰이면 그것은 그 자체로 유용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은 수단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이 목적 그 자체인 문학이다. 따라서 이문열의 '선택' 같은 책들은 배제된다.

주2) 어쨌든 이것은 회피일 뿐이다. 문학 그 자체가 무용하다는 실용주의적 주장에 대해 문학은 완전히 무력하다. 실질적인 방어를 하려면, 문학이 줄 수 있는 부수적인 효용성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3) 이것 역시 회피다. 어찌되었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은 무력하고, 또 무력하다. 우리 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것이 무력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주4) 이 시점까지 와서 실용서를 강조하는 시대의 흐름이나, 특정한 관점의 독법을 강요하는 시대상황을 들먹이지는 말기 바란다. 그건 독자 전체를 폄하하는 처사다. 물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읽기 싫은 책을 억지로 읽어야 했던 이 땅의 수많은 학생들은 따로 위로하기로 하자.





상병 허원영 (2005-11-07 22:12:14)  
이건 저의 지극히도 편협한 문학론의 일부입니다. 눈 밝은 이라면 여기에 심각한 책임회피가 널부러져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겠지요. 다만 위안입니다. 쓸쓸한 위안.  

상병 고계영 (2005-11-08 08:39:06)  
'하고싶어서 한다'에 한표.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않을 일에 대하여 떠들고
어떠한 소설을 '쓰레기'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비하하는 것은 
문학을 문학이 아닌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는 것만 같아 씁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요.  

상병 주영준 (2005-11-08 12:09:39)  
마력적인 글이로군요. 오랫만에 추천 하나.  

병장 김지건 (2005-11-08 16:24:56)  
쓰고 읽는다는건 두손모아 '기도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만...글쎄요, '기도의 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너무 종교적(혹은 토테미즘)인가요?  

상병 이상진 (2005-11-08 17:13:14)  
고양이랑 도마뱀이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고민하면 어쩌죠?

갑자기 엉뚱한 태클이 걸고 싶어지네요 

과연 문학이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선 그렇게 쓸모없는 것일까요...

반박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병장 박윤철 (2005-11-08 21:30:25)  
왜 쓰는가. 
처음 글을 쓴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습니다. 독후감 쓰는 숙제 같은 것을 열심히 해왔기에, 국가에서 교육하는 방식대로 글을 배웠다고 할 수 있겠네요. 국어 시간도 좋아하고 해서, 글짓기나 독후감 발표 등에서 상도 받고 했었죠.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 소설을 써 보기 시작했어요. 시는 글짓기 대회의 영향이었을 테고, 소설은 마음 속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였어요. 왜,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언어를 그렇게 이용하면 시가 되잖아요. 

그러다 글을 그만 둔 적이 있었어요. 논술을 무진장 써갈겨야 했던 고 3 이후, 저의 글은 항상 그런 전법을 따랐지요.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레포트 과제를 주신 교수님의 의도에 맞게... (사실 교수님이나 출제자가 제 글을 보고 흡족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 그들의 눈에 맞는 글을 쓰려 노력했었지요) 사실은 소설을 써 보고 싶었는데, 이래저래 고민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작가가 될지도 확신이 서질 않았고, 사실은 아직도 좋은 작품을 내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어요. 언제까지 만들 수 없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같은 것이 스스로를 얽어 매고 있었습니다. (원영 님이 말씀하신 '왜 쓰는가' 의 질문이 가장 컸다고도 생각합니다. 문학적 글을 쓴다는 것과, 유행하는 글을 쓰는 것 등에 대해서 많이 갈등했었습니다. 제 친했던 후배는 제 글을 보고 '이런 글 쓰면 망해요' 라고 했었죠. 물론 실력도 엉망인 작품이었겠습니다만, 어떻게 써야 할지 정말 고민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모든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과 마찬가지의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든, 소리를 만들든 그것은 어떠한 객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지요. 원영 님의 글에서 문학의 무용론을 주장하셨습니다만, 관객에게 불편을 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유용합니다. (저는 이것이 또 다른 예술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로 들으셨던 '고도를 기다리며' 는 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그러한 무용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을 보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예술은 언제나 고독합니다.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는 무용하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러한 무용함을 버리고 유용함을 위한 글쓰기를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신이 나에게 와, 토할 것 같은 영감을 불어넣어 손을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글쓰기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원영님의 글이 창작자가 노력을 하지 않는 글- 이 문학적 글쓰기란 말은 아닙니다. 다만 글에서 나타난 '문학적 글' 이라는 것의 범주가 너무도 좁아서 하는 말입니다. 뜻을 전달하기가 조금 어렵군요) 

왜 쓰는가, 라는 제목과 글을 보고 제 생각을 남겨 봅니다. 작가의 어떤 표현이든 그것은 주관을 함축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아무리 작품이 낯설어지고 무용하다 해도, 독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유용(실용적 의미와 예술적 자각을 포함해서)하기에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제 글의 두서가 없군요. 어쨌거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상병 허원영 (2005-11-09 00:31:36)  
세상의 모든 일은 본인이 겪지 않아도 대략 알 수 있는 것과, 겪지 않으면 도저히 모르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절실하게 대치하는 일은 후자에 속하죠. 자신의 손으로 펜을 쥐고 종이를 꾹꾹 눌러가며 시를 써보지 않았거나, 자판을 열심히 두드려가며 소설을 써 본 적이 없는 이들은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반면에 직접 시나 소설을 써본 이들은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한 번쯤 무릎꿇을 거라 저는 믿습니다. 그때의 감정은 막막함과, 불안함과, 자기 혐오와, 어떤 범죄를 저지른 듯한 느낌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지요.

저 윗글 역시 제가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를 할 때 끈질기게 따라다닌,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변이자 위안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론은 딱 저라는 사람만큼 편협하고 회피적이지요.
제가 말한 문학의 '무용성'은 철저히 사회적이고 실용적인 의미에 한정됩니다. 만일 신이 지금 나타나 저에게 문학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목숨을 택하겠느냐고 물으면 저는 목숨을 택할 겁니다. 문학은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지만, 목숨이 없으면 끝이니까요. 뭐, 문학을 선택하고 순교하는 것도 그 나름으로는 멋진 일이겠지만, 그건 굳이 목숨을 걸 일까지는 못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문학은 사회적 실용성을 따지는 질문에 상당히 무력합니다. '과연 그 소설이나 시가 수백 만 그루의 나무를 죽여가며 출판될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 앞에서, 문학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소설을 쓰기 위해 투자된 시간과 돈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역시 꿀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없지요. 거칠게 말해서, 없어도 당장 죽지는 않는 것, 그게 문학입니다. 

반면 문학의 유용성에 대해서 저 글과 똑같은 길이의, 아니 그보다 훨씬 긴 길이의 글을 쓸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이나마 문학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 저런 글을 쓸 수는 없었을테니까요. 그건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어떤 종교에 빠져 신비체험을 하고 구원을 얻은(혹은, 얻은 듯한) 기분이 든 사람이라면 그 종교를 열렬히 믿겠지요.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칠 겁니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고 진리를 깨달은(혹은,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든) 사람이나, 자신의 인생에 어떤 방향을 찾은(혹은, 찾은 듯한 기분이 든) 사람이 문학의 가치를 믿고,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소설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뭐, 적어도 그런 의미 내에서라면 문학은 절대적으로 유용합니다. 사실 문학은 무용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유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말은 역설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죠. 사회적 유용성을 아무리 획득하려 해도 획득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이, 반대로 정신의 유용성(이런 애매한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을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일 테니까요. 문학이 이해하려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돈을 처바르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이런 '무용함의 유용성'을 절대 획득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윤철님도 짐작하고 계실테지만, 그게 제가 글 속에서 말한 '인상'과 '개별', 그리고 그것들의 '컨텍스트'라는 것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제 생각이 어느 정도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윤철님의 답글 자체가 제 글과 거의 비슷한 맥락이기에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덧붙여서 말하자면, "문학의 신이 나에게 와, 토할 것 같은 영감을 불어넣어" 쓴 글만이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 '쓰면서 토가 나올 것 같은'(너무 못 써서든, 아니면 쓰는 것이 힘들거나 쓰는 것에 지쳐서든) 글쓰기도 당연히 '문학적 글'에 속하겠지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토해 내듯이' 쓰는 글이든 '토가 나올 것 같은' 글쓰기든 둘 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라는 겁니다.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 말할 문제는 아닌 듯 하기에 접겠습니다.  

병장 홍성길 (2005-11-09 15:07:49)  
수단으로서의 문학과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인 문학. 온전히 구분하기가 좀 어렵군요.
작가가 쓰고 싶어서 글을 적는 행위. 즉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인 문학에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이를 다른이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고 생각됩니다.(원영님께서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는데 직접 말하는 것보다 수백장의 종이가 힘은 들지만 효과적일수도 있겠지요)
감탄사가 나와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은후에 든 생각입니다.
부족함이 많아 원영님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상병 허원영 (2005-11-10 10:36:16)  
홍성길 님 / 모든 언어는 기본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에 선을 긋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학'이라는 것을 '수단으로서의 문학'과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인 문학'으로 나누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사기에 가깝습니다. 물론 여타의 글쓰기와 '문학'을 구분해 내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변명하자면, 제 글에 존재하는 어떤 '구분'이 명확히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커다란 고무찰흙을 주물러 어느 한쪽은 두드러지게 만들고 다른 한쪽은 움푹 들어가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공통점을 가린 정도라는 이야기지요.
사람의 언어가 대략적이라는 성질을 타고난 이상, 인간은 끝없이 미끄럼틀 놀이(유명한 이야기입니다)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뿌옇게 흐려진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며 걸어가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 속에서, 모든 글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모호함'을 이해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수단으로서의 문학'과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인 문학'의 구분에 대해 이야기하죠.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절대로 '내가 쓴 글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는가 그렇지 않은가'도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차이점은 그것이 어떤 것의 도구로 쓰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수단으로서의 문학'은, 정말로 단순히 그것을 '쓰고 싶기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이미 도달하려는 어떤 '목적'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작가가 '이번에 쓰는 소설로 인간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함께함을 알리자'라는 목표를 설정한 채 소설을 썼다면 그 소설은 '문학으로서의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소설로 여성이 자기 권리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보여주자'라는 생각으로 쓴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키자!' '이 시로 돈을 좀 벌어보자' '이 희곡으로 대학 수시 입학에 합격하자' 등등, 들 수 있는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설정된 목표를 위해 쓰여진 문학은 제가 이야기하는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인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둘 사이의 구분이 좀 더 명확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문도 쉽게 풀리셨을 겁니다. "작가가 쓰고 싶어서 글을 적는 행위", 그러니까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인 문학"에 "다른이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면 이미 그것의 목적은 문학으로서의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글의 목적은 - 그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 '다른이가 공유 가능할 것'이 될테고, 그것으로 이미 그 문학은 "수단으로서의 문학"이 되고 맙니다. 아아, 편협합니다. 하지만 이건 글에서 제가 내린 정의(定義)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이니 부언은 필요없을 듯 합니다.


여기서 제대로 이야기할 만한 문제는 아마도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문학의 영역에 속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일 것입니다. 이건 사실 아주 오래 된 문제입니다. 이하에서는 보다 정확한 논의를 위해 '수단으로서의 문학'은 제외하겠습니다.

만일 논리와 합리성만으로 구성된 문학이 있다면, 그 문학은 타인과 소통하는 데 있어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문학은 없습니다. 문학이란 본디 감정과 인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감정과 인상을 형성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개인적이며, 그렇게 해서 형성된 감정과 인상을 표현하는 것 역시 완벽하게 개인적입니다. 특히 문학처럼 혼자서 작업해야 하는 경우, 이 개인성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그것을 공유하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건 선천성 장애입니다. 문학은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인 것이죠. 문학은 두 발로 다른 이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걷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걷는 리듬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굳이 다른 이에게 맞춰 바꾸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결국 그 차이는 평행선처럼 만나지 않은 채 계속 엇박을 유지하지요.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말하려 합니다. 물론 이것을 '진정한 소통'이나 '다른이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너무나도 괴롭기에 지르는 소리가, 반드시 누군가가 들어주고 그것을 이해해주며 공유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문학은 감탄형이지 청유형이나 명령형은 아닌 것입니다. 
이리하여 논쟁은 끝없이 계속됩니다. 문학은 공유하거나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또한, 문학가는 무언가를 말하려 합니다. 이 주장들은 둘 다 맞기에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결국, 진정한 문학가는 '진정한 공유나 소통'에까지 손을 뻗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말할 뿐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공유'나 '소통'을 위해 글을 쓴다면 그는 매번 실패만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 시도는 결과가 예정되어 있기에 무의미합니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덕분에 저도 좀 더 깊게 생각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병장 홍성길 (2005-11-10 11:13:25)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좀더 생각해 봐야 되겠군요.  

병장 김대현 (2005-11-11 12:00:35)  
아시다시피, 원래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재밌게 사람들이랑 복닥거리는 '소통'은 분명 다른 범주의 이야기지요.
인간의 본능은 원래가 약육강식이므로 아예 배째라 그쪽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신자유주의가 당연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원래 그러한 '수준'과 그걸 믿고 오바하는 '수준'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요.
물론 원영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와서요.

그 사람들이랑 복닥거리는 '소통'이라는 것도,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에서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저는 그래도 "나는 姑 소통해봐야지" 라는, 말도 안되는 강박, 헐렁한 껍데기를 끼고 사는 편이 더 좋네요. 
저도 보편타당한 문학론을 펴긴 힘든 모양입니다. 저 역시 편협하니까요, 아멘.  

상병 이동일 (2005-11-13 03:18:12)  
왜 쓰는가? 왜 읽(게 되)는가?!
닭이 먼져인가? 알이 먼져인가?
어찌되었건 근본적인 회의에 한표!!  

상병 손재선 (2005-11-14 10:22:17)  
다수의 진지한 댓글에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첫문장에 "가짓수는 무한대에 수렴하지만"이라는 문구, 무한대&수렴, 수학적 표현을 시도한 것 같은데
다시 읽어보면 가짓구가 무한대에 이른다는 말과는 약간 다른 것 같아서요. 어색하지 않나요?  

병장 김병규 (2005-11-14 10:47:59)  
문학은 정말 감탄형인가요, 감탄형인가요? 나 이런생각했다. 그러니 보아라,보아라 아닌가요   

  
 
 
 
 병장 김동환 (2006/03/23 23:37:07)

상진님 댓글 이모티콘 사용으로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