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모두에게 : 나는 왜 침묵해 왔는가 
 
 
 
 

  나로 인해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는 사실에 놀라버렸다. 물론 우람 님과 영준 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글이 지향하는 바가 '나'라는 개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문제의식에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놀라운 일이다. 관심없이는 이런 글들을 써줄 수 없는 법이니까.
  많은 분들이 많은 관점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내용의 줄기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싶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 현실에서의 '실천' 문제다. 이건 사실 내게는 군 입대 이후로 오래된 문제다. 전에도 '자기보론-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 문제는 끈질기게도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끈질김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내 삶에 기반한 '실천'을 말한 적도 없고, 그 정도로 개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목청높여 외친 적도 없다. 구체적인 지향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본 적도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몇몇 분들의 의문표시가 있었다. 우람 님도 예전에 나의 "핏자욱"을 보여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으며, 대현 님 역시 나의 글이 "바른생활 필"인 듯 하다는 말을 했다. 우람 님의 최근 글 역시 '연대'를 말하지만, 결국은 나의 '발 딛는 곳'을 궁금해하며 서로 이야기해보자, 그래서 힘을 얻자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그 글에서 답글로 이야기한 바 있듯이, 나는 이런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 내가 뱉어놓은 뻔뻔스런 글들에 비해서, 나는 놀라울 정도로 "그 이후의 진행"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왜일까. 나는 왜 힘차게 '실천'을 말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은 당당하게 던져놓았으면서, 어째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강계정 님의 논리를, 다른 분들처럼 부정하고 때려부수지 못했을까. 왜 '당위'를 외치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목소리로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분명 나는 너무나도 뻔뻔했으며, 나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다. 내가 계속 입을 다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나의 개인사적인 일을 언급하는 일이 너무나도 싫다. 싫은 것 이전에 괴롭기까지 하다. 나의 성격 탓이 크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우람 님이 말한 "읽는 이를 향한 얼마나 성실한 내면의 발화였나"라는 질문에도 침묵했다. 그걸 말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나의 개인사를 끄집어내야했기 때문이다. 그건 싫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개인사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문과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뭣보다도,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써 온 '뻔뻔하고 공허한' 글들에 대한 책임감에 기인한다. 영준 님의 말대로, 내가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역량에 대한 기만"은 아니지만, "논리에 대한 방기"는 확실히 맞다. 내가 써 온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글들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그 이후의 진행"을 요구한다. 그렇게까지 목청을 높이고 나서 "이후"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며, 나 자신으로서도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전에 말했듯이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내보이는 일"처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내 개인사에 대해 말하려 한다.


  내 인생사를 다른 하나의 인생과 비교해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소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화목한 집안풍경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으며, 노가다판에서 현장소장으로 일했다. 어머니는 집에 있었지만, 그것은 경제사정이 풍족해서가 아니었고 아버지의 강요 때문이었다. 부부싸움은 일방적인 폭력이었으며, 소년은 시골의 어느 집에 어머니와 형제들과 집단으로 가출했던 일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소년은 참으로 많이 맞았다. 가죽 허리띠로 맞은 적도 있으며, 던져진 철제 회전 의자에 등이 찍힌 적도 있다. 다양한 물건과 다양한 자세와 다양한 방법으로 맞았다.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것이 '아동학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음주와 흡연으로 인해 뇌졸중에 걸려 쓰러졌다. 그것은 소년이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아버지가 남긴 것이 다름아닌 '빚'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집안이 풍족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독촉장은 소년의 실감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소년은 좀 더 자라서야,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 무서운 것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러한 일들이 폭풍처럼 지나가는 도중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뇌병변과 언어장애로 인한 '3급 장애인' 복지카드를 손에 들고. 소년은 더이상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마땅히 할 게 없어 마트의 판매원으로 취직했다. 빚은 줄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났다(갚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소년은 어찌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냥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이 전부인줄만 알았던 소년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빨리 흘러갔다. 그리고 소년은 대학에 입학했다.

  이런 성장과정을 거친 소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니, 자꾸 비겁하게 넘어가려 해서는 안되겠다. 이것이 나의 성장과정이다. 나는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니들은 고생이나 해봤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나는 나보다 훨씬 불행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잔뜩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학교성적처럼 등수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 '자기불행'에 대한 발언자격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에게 작용하며, 개인의 '불행'을 형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집은 가난했다.
  일전에 이야기했던 대학시절의 내 '시니컬함'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냉소는 전반적으로 사회의 '웃기고 자빠진' 것들에 대한 냉소였다. 나는 여자인 친구들과 이야기한 적이 많았는데, 그들이 '내면의 고민', '핏자욱' 비슷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속으로 실컷 비웃었다. 사실 '핏자욱' 같은 말은, 실제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꺼내고 싶어하는 말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핏자욱'을 뒤돌아볼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부당함에 민감하고 당위에 예민한 내 '성격상' 학내운동이라는 것도 눈여겨보았지만, 나로서는 우스운 놀이에 불과한 것 같았다. 나에게는 당장 벌어야 할 생활비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실천'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럴 시간이 어딨냐며 무시했다. '노동의 즐거움'을 말할 때, 나는 단순 육체노동이 얼마나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건지 알지 못하는 그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나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는 그들을 실컷 비웃었다. 너희들은 그러니까 실패하는 거야, 라며.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내가 쓴 칼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나타난 문제들은 결국 나 자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집안사정으로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장학금을 탈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보냈다. 그리고는 곧 입대였다.

  여기서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나는 예전부터 이름을 많이 들어왔던 책들에 손을 댔고, 내가 보는 세상 뒤에 다른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무엇이었다. 그리고 많은 작가/사상가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은 내 경험과 오버랩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선언'을 읽을 때, 거기에 쓰인 '쇠사슬'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쇠사슬'이었다. 대학생인 나 자신이 제4계급이라는 말은 부끄러워서 할 수 없지만, 나의 경험은 제4계급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집에 날아들던 독촉장, 가압류 통지서, 빚쟁이들의 전화, 가족들의 불안한 표정, 어머니의 피곤한 얼굴, 내 등록금, 생활비, 책값, 이런 것들이 다 '쇠사슬'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 2교대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일주일마다 낮밤이 바뀌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파김치처럼 쓰러졌던 내 모습이 바로 '인격적인 자본-비인격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내게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었고, 그것과 동시에 이해한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그리고 왜 바꿔야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내 글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현실이 왜 부당한지, 왜 바꿔야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을 말했다. 내가 확신하고 있으므로,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글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다.
  내가 '경제구조'를 자꾸 배후로 지적했던 것도 아마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나의 '시각', '전제'는 내 삶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뭔가를 '학습'하고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형성된 부분이 별로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나 진보의 '다른 시각'이라는 것도 있다는 건 알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갈라져 있는 것에는 여전히 의아함을 느낀다. 그들은 '먹고 살만하기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 때로는 다투면서까지 자기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건 나로서는 굉장히 이해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겨우 내 삶의 테두리만큼만 이해하고 글을 써왔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러므로, 나는 '왜'에 대해서는 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어떠어떠한 일을 하자!'고 소리높여 외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논리(강계정 님의 논리 같은)를 부정하기 어렵고, 그 입장을 이해한다. 나는 함부로 누가 틀렸고, 누가 옳으며, 그러므로 목숨을 바치고 재산을 던져가며 운동에 뛰어들라는 말을 못하겠다. 나는 '어떻게'라는 말을 하기에는 '현실'에 너무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다. 그 '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깊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것만이라도 다들 잊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나 스스로를 향한 꾸짖음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 '어떻게'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는 점이 큰 몫을 했으리라. 입대 이전에는 생활과 냉소에 찌들어 있었기에 어떤 내세울만한 '실천'을 한 적이 없었고, 입대 이후에는 고작해야 '내 양심에 따라' 내가 받은만큼 돌려주지 않으려 애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현 님의 말대로,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자기근거'가 부족했다.
  뭣보다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사회에 나가면 나는 다시 "나의 산수"(박민규)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빚과 독촉장과 등록금과 생활비와, 그 모든 '쇠사슬'과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가 더 든 만큼, 그 전쟁은 한층 힘겨워지리라는 것도.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정도까지 뻔뻔해질 수는 없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의 진행"에 대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실천"을 확고히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꾸 내가 '책임'의 문제만 말하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를 강조한 것은, 냉정하게 바라보면 일종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현실'이라는 것을 방패삼아 '이 정도만 하면 되지'라는 자기위안을 계속 해왔던 것일지도, 그래서 내 양심 하나 편해보겠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뻔히 살아 움직여서 자꾸 나를 건드리는 이 '양심'을, 어떻게든 잠재워보겠다고, '나의 산수'를 위해서 마비시키겠다고 글을 써댔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해보겠다고, 되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그 뒤에는 '안되면 어쩔 수 없고'라는 말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지적한 점인데에도 불구하고 가슴 아픈 말이다.


  내가 요즘들어 칼럼을 거르고, 눈에 띄지 않게 방황했던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문제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산수'를 해결해야 하는데, 어머니를 쉬게 해드려야 하는데, 아버지의 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입에 침만 잔뜩 바른 채 선동하기만 한 거짓말쟁이는 아니었을까. 괴로웠다. 그래서 더는 글을 쓰기 어려웠다. 우람 님의 글에 답변을 하려다가 하려다가 결국은 '나는 왜 뻔뻔한 글을 쓰는가'로 대답했지만, 그건 일종의 회피였다. 변명은 어디까지나 변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양심선언'을 하지 않고 있다. 내 스스로 비참함을 느끼는 '내 현실'에도 아직 항복선언을 하거나 백기를 내걸지 않는다. 나는 왜 이렇게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가.

  나는 찾고 있는 중이다. 과연 '현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한 걸음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나는 그것을 '현실'로 되돌아가서 찾아보려고 한다. 그건 '현실'에서 '현실'을 극복하지 않으면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이 싫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편이 좋다. 그쪽이 훨씬 재미도 있고, 훨씬 감동적이다. 젊은 사람은 활자의 세계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자신의 눈으로, 귀로, 온몸으로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주위에 언어의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환상의 테두리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서려 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하여 코멘트를 일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의 "코멘트"는 이 안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지반"을 다지고 내 결의를 굳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안에서이다. 그것은 내가 그 '결의'를 이 안에서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실천"을 소리높여 말하는 것은 밖에서다. 내가 나의 현실과, 나의 산수와 본격적으로 마주치고 거기에서 쓰러지지 않은 뒤이다. 그 전에 나는 "실천"에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다. 그와 동시에, 내 '결의'를 북돋아주는 일도 멈출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지독한 '털 난 양심'이 날 붙잡고 놔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 모든 글들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잊지 말자고. 어떻게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실천'하기 위해서. 

  
 
 
 
병장 허원영 (2006/03/17 01:24:18)

결국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이유에 개인적인 문제였다는 이야기. 저는 '구조'나 '변증법', '다른 시각'이나 '과학적 분석' 같은 것들을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지쳐있었나 봅니다, 라는 한 비겁한 자의 변명.    
 
 
병장 김대현 (2006/03/17 01:45:12)

그것이 무엇보다 가장 강한 것을요. 

이 아래에 있는 원영씨의 칼럼들과, 이 글이 있는 한, 책마을에서 진짜가 아닌 논쟁들이 진짜 논쟁인 양 탈을 쓰고 유령처럼 떠돌지 못하리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얘기해야 할 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려주는 글입니다. 원영씨, 행간에 피가 배어있는 글, 토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상병 박종민 (2006/03/17 05:04:25)

이쯤되면 숙연해는거죠.    
 
 
일병 허익준 (2006/03/17 07:08:12)

... 문득 허원영님께서 "왜"가 아닌 "어떻게"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될 날이 기다려집니다.    
 
 
병장 한상원 (2006/03/17 07:25:46)

일상과 현실의 문제 아래에서 쓰러지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겁니다. 정말 웃음띤 얼굴로 고민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잡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영씨와 제 삶이 일상에서 이상까지 곧게 뻗어나가는 그 어느 화창한 날에 서로를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습니다.    
 
 
병장 주영준 (2006/03/17 07:41:44)

실은 이런 걸 기대했습니다. 헤엣. 이제야 인사의 부담이 줄어들었네요. 내일 뵈어요. 케익에 소주나 한 잔 걸치자구요.    
 
 
일병 허익준 (2006/03/17 07:51:09)

영준 - 이의있습니다!! 케익에 소주는 언밸런스합니다!! 차라리 백설기에 막걸리가 훨씬 궁합이 맞는다고요!(어이)    
 
 
상병 엄보운 (2006/03/17 08:47:34)

마음을 여는 것이 친구와 친구가 아닌 자를 결정짓는 가장 확실한 요건이라면, 난 이제부터 당신을 나의 친구라 말하겠습니다. 피가 흥건한 이 글의 마지막 끝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좇으며 아주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단어가 생각나는군요.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말입니다. 

상원씨 말대로 조금 낯뜨거운 말이지만 원영씨를 지켜보겠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17 10:59:19)

동석님이 부럽네요! 쳇! 나도 원영님 보고싶은데! 쳇!    
 
 
병장 김태경 (2006/03/17 20:41:57)

몇번이나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웁니다. 
다른분들에 비해서 유독 자신의 얘기는 안하신다 싶었는데 이렇게 마음을 열어주시니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다음에 정말, 한잔 기울이고 싶네요.    
 
 
 병장 양인수 (2006/03/17 22:51:37)

주워들은 말. 여기에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나... 
다행히도 절망의 계곡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정신차리고 무엇인가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다시 올라올 수 있다고 합니다. 
실천! 꼭 실천해야지요.    
 
 
병장 김강록 (2006/03/18 15:25:07)

이곳에서 당신을 알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병장 김주선 (2006/03/20 00:40:51)

,,,눈물 나네요. 참 다행이에요. 

원영님 이렇게나 사랑받고 계시는구나 해서. 사랑 많이 받고, 사랑 많이 하시길.    
 
 
병장 김대현 (2006/03/29 19:44:35)

이 글은 다시 읽어도 참, 대박이네요.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