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에 대하여 
 
 
 
 

  칼럼을 제낀 지 한 주도 채 되지 않아서 다시 칼럼에 손을 댔다. 우스운 일이다. 사실 아직도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책마을에서 있었던 강계정 님과의 논쟁을 보고 또 거기에 참여하면서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쓰겠다'라기보다는 '쓰지 않으면 안된다' 쪽에 가깝다. 스스로 논쟁의 한 구석을 맡아 글을 썼지만, 뭔가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뭣보다도, 계정 님의 오해를 풀고 싶다. 다른 책마을 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정 님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거니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지도 별로 없다. 계정 님의 논리와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며, 또 일부 공감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과연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짚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욕심을 내자면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까지 생각해 보고 싶다. 분명 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벽에 부딪칠 거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포기하면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법이니까.

  계정 님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또한 우리 시대의 논리라고 바꿔 말해도 괜찮으리라. 그 논리의 두 가지 기둥은 어쩔 수 없는 '조건'과 따라서 불가피한 '노력'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사는 곳은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는 증가하고, 정세는 급변하고, 경쟁은 치열해지고, 수출하지 못하면 죽는 세상이다. 그런 환경이다. 그러므로 노력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력도 하지 않고서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정신차리라는 핀잔을 들어도 마땅하다.
  또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불평불만하는 것도 우습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세상에서 힘을 발휘할 정도로 충분히 성공해서 '복지가' 또는 '종교인'의 자세로 세상에 환원하면 되는 것이다. 정당한 수익구조로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돈을 벌면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리고 그 돈으로 사회복지에 힘쓰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불평하기 이전에 노력하라. 노력해서 성공하라. 뭐 대충 이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실 이건 전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구조 안에서는. 이 시대가 제시하는 논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말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을 표시해야 마땅한 이야기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자본의 축복을. 퓨리턴의 성실성을. 다윈의 자연도태를 사회에 구현하라! 이건 모두 그 '큰 틀의 논리' 속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계정 님에게 반론을 제시한 많은 분들의 의견은 '구조 속의 논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고진의 말을 인용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사실 내가 인용을 좀 좋아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태인 할아버지'가 추구한 것은, 가령 개개인의 자본가와 경영자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본의 담당자인 한 강제되고 마는 관계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자본가는 나쁘다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 할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을 강제하고 있는 관계구조에 대한 인식이고, 그것이 '자연사적 입장'이다. 또는 그것이 '그'의 '윤리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모든 자본가는 나쁘다는 말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또 기업윤리가 확립되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도 아니다.[……] (수정 : 인용자)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계정 님의 논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른 방법으로 성실하게 노력해서 돈을 버는 것은 분명 이 시대에 '유효한' 논리다. 이 세상에는 '좋은' 기업가도 있지만 '나쁜' 기업가도 있다. 그리고 '좋은' 기업가가 돈을 많이 벌어 사회에 환원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그리고 계정 님이 이러한 역할모델을 지향한다는 것에 대해 그것이 '좋다' 혹은 '나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 시대에 '유효하게' 작용하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조금이나마) 이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계정 님이 '좋은' 기업가가 되든 '나쁜' 기업가가 되든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떠맡게 되는 역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역할에 따른 문제점들도 잔뜩 존재한다. 나는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선악을 떠나서, 그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강제되고 마는 관계 구조"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봉건 시대의 한 영주가 있다. 그는 '좋은' 영주일 수도 있고 '나쁜' 영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선하고 인간성이 '성자의 반열에 오른' 인간일지라도, 그가 '영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맡게 되는 사회적인 위치와 역할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 좋고 나쁘고에 관계없이 "관계 구조"에 따라 수많은 농노들의 비참한 생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고 영속화시키는 데에도 한 몫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속하게 되는 "관계 구조"가 있다. 아무리 선한 기업가라 할지라도, 그는 '기업가'이기 때문에 자본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이 시대의 구조에 한 몫을 단단히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가들의 인성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내 글을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열심히 달림으로써 반드시 누군가를 치게 되는 그런 구조 속에 있다는 말이다. 자본의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하나의 정점을 차지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넘어뜨리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고진의 논리이고, '유태인 할아버지'의 논리다.

  이쯤 되면 흔히 제기되는 반론이 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구조가 잘못되었든 말든, 그로 인해 사람이 죽든 말든, "그게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토록 구조는 무섭다. 생활의 틀은 사람의 사고를 제한한다. 이 시대의 논리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거나', '알더라도 외면하거나', 또는 '잊는다'. 이성복 시인은 <그날>이라는 시에서 이런 시구를 썼다(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인용을 즐긴다).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어 있는데, 더 나은 다른 길이 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시내 술집과 여관"에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도 "교통사고"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가 막혀' 있거나 '귀를 막고'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너무도 바쁘게 우리를 몰아대고 있고, 귀를 기울이다가는 '차에 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잊는다. 그들은 말한다.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 큰 '틀'을 우리가 무너뜨리기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건 불가능하다. 그냥 순응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종종 말했듯 책임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이 시대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바꿔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절대로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틀'은 생활이고 공기이며 환경이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익숙하며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 작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인가? 최명희의『혼불』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인용주의자다).

[……]눈멀고 귀먹어 민둥하니 낯바닥 봉창이 된 달걀껍데기 한 겹, 그까짓 것 어느 귀퉁이 모서리에 톡 때리면 그만 좌르르 속이 쏟아져 버리는 알 하나. 그것이 바위를 부수겠다 온몸을 던져 치면 세상이 웃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요 달걀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니,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지만 달걀은 깨어나 바위를 넘는다.[……]

  맞다, '틀'은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요, 인간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다. 아니, 어찌 그것뿐이랴. "바위"는 "달걀"이 만든 것이 아니지만, '틀'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깨어나 바위를 넘든지, 그게 안 되면 달걀로 바위치기라도 해야 한다. 어차피 바위는 죽은 것이라서, 본래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금이 가고 부서져 모래가 된다. 어찌 살아있는 인간이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없단 말인가. 달걀 하나로 바위를 치면 노른자가 흘러나올 뿐이지만, 수 만 마리의 닭들이 모여 바위를 쪼면 결국은 부서진다.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마지막에는 부서진다. 그것이 지금껏 인간이 살아온 방식이고 역사다. 

  
 
 
 
병장 김대현 (2006/03/12 16:06:43)

설령 우리에게 부여된 책임의 기대치가 너무 높더라도, 골치아파 내던지고 싶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내던져버린 것들이 언제 어떻게 나의 얼굴로 내게 되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모르는 저이기에, 이 거대한 공룡같은 세상 속에서 제 꼬리에 끌리게 될 책임들 다 짐지고 살 수 있으리란 다짐은 저도 못하겠습니다. 살다보면 몇 갠가는 놓칠 테고, 몇 개는 제 손으로 버리게 될지두요. 네, 저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기여코 버리게 되더라도, 쥘 수 있을 때까지는 쥐고 있고 싶네요. 미리 포기하고 집어던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책임을 놓쳐버린 사람과, 자기 현실과 무관하게 대충 주워들은 칼부림나는 정보로 머릿속을 무장하고 책임 같은 건 처음부터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해버린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든 구별할 수 있더군요. 
(저는 했던 소리 또 하는 게 취미인가 봅니다. 이런 건 무슨 주의를 붙여야 하나 [먼산])    
 
 
상병 박종민 (2006/03/12 16:49:19)

굳이 붙여보자면 알코올리즘...... 죄송합니다(후다닥)    
 
 
 병장 김동환 (2006/03/12 18:17:55)

원영님의 예리한 지적에 온전히 동의합니다. 
포기하는 순간. eliminate.    
 
 
상병 송희석 (2006/03/12 18:42:28)

참 어려운데, 정말 어려운데, 계속 어려운건데, 진짜 어려운건데, 한번 치면 계속 쳐야되는데, 다같이 모여야 되는데, 부수고 싶은 마음이 끝까지 가야 하는데, 분명히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이미 매우 튼튼한 바위를 보았기 때문에, 그 바위를 계란으로 치다 포기한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계란으로 치자하면서 도망간 사람들도 너무 많이 보았는데, 윗글을 읽고 느낀점은 참 많은데, 결국 당연한 소리인데, 내가 계란으로 바위를 못치는 이유는 아직 '용기'가 부족한것 같은데.... 

대체 왜 원영님은 사람 마음 심란하게 만드는 글을 올리시는 건지(하하하) 그냥 넋두리입니다.    
 
 
병장 김강록 (2006/03/13 08:59:20)

이 사람이 바로, 아름다운 청년 허원영.    
 
 
병장 주영준 (2006/03/13 09:01:39)

강록 / 그런데 원영씨는 언제 분신할꺼야? 라는 패러디와 키치의 미학.    
 
 
상병 이영준 (2006/03/13 09:58:40)

요새, 아니 얼마동안 저를 붙잡고 있던 문제에 관한 논쟁이 주말동안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현실의 구조는 우리보고 (원영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일단 무조건 달려!' 라고 말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달리지 않으면 지고 만다는 이 막연한 불안감때문에 저는 지금도 달리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런 제 모습이 한심하기도 합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사회의 거대한 구조 속에 스스로를 편입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며, 한숨이 나옵니다. 
과연 계란으로 바위를 쳐 부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그런 날이 오기를, 제가 못한다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병장 주영준 (2006/03/13 10:20:47)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겠다는 필사의 신념으로 우리 모두가 무쇠를 집어 바위를 찍는다면, 바위는 부스러지고 말 겁니다.    
 
 
병장 김강록 (2006/03/13 11:23:55)

어디서 들은 건데, 그냥 우화인지 실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간에요. 코끼리를 묶어놓을 때 사용하는 말뚝은 그 코끼리가 어릴 때나 다 자랐을 때나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다 자란 코끼리는 어릴 때 자신을 묶고 있던 말뚝을 뽑아낼 만큼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어릴 적의 기억 때문에 처음부터 안되겠지, 하는 생각에 말뚝을 뽑아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입니다. 당구장에서 자신이 30일 때 돌리지 못했던 우라마와시를 언젠가는 돌려내는 게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상병 엄보운 (2006/03/13 12:44:02)

날카롭게 번뜩이려고만 하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숙고하고 다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원영씨가 있기에 책마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또한 이 화려한 회원들의 답글. 책마을 완전 좋아요.    
 
 
병장 손동철 (2006/03/13 23:04:18)

잘 읽었습니다. 인용주의자는 물론 휴머니스트이시군요.    
 
 
일병 강세희 (2006/03/15 17:03:16)

강록 / 얼마전에 한비야씨가 TV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시더군요. 저도 무척 와 닿았고 뜨끔했습니다. 
원영 / 서로간의 시야차를 통해 대립지점을 너무나 명쾌히 분석해 주셨네요. 글의 후반부는 최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고찰하고 있던 저에게 많은 불편함을 안겨주네요. (개인적으로 김규항씨의 말처럼 독자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