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왜 뻔뻔스러운 글을 쓰는가 
 
 
 
 

  며칠 동안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고, 글을 쓰려고 자판에 손을 올려놓아도 글이 써지지 않는, 나로서는 꽤나 드문 경험을 했다. 더더욱 기막힌 일은, 내가 무얼 써야 하는지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그걸 글로 표현하려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 깨달으면 별 거리낌없이 막 써내려가는 타입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글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고민을 했다. 도대체 왜 이럴까? 뭘 써야 하는지 알고 있는데도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에 걸쳐 생각하던 끝에 실마리를 찾았다. 내가 써야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나의 개인적인 내면을 드러내는 글을 써야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면'이라든가 '개인사적인' 일들을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런 말들을 공공에 풀어놓아 봤자 별 의미도 없을 뿐더러, 결국은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드러내는 꼴이 아니냐는, 조금 - 이 아니라 많이 -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회피하려고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걸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다른 글을 쓰기 어려울 거라는 예감이 확실하게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렇게 자판을 두드린다.

  발단은 내가 지금까지 쓴 글들을 쭉 읽으면서부터다. '필독서에 대하여'니, '문학적 인플레이션에 대하여'니, 전부 다 뻔뻔스러운 글이었다. 특히 며칠 전에 쓴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하여'와 '책을 읽고 난 뒤에 글을 쓰는 일에 대하여'가 그렇다. 도무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다. 어떻게 자신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체계적으로 글을 읽으라느니, 이해하면서 글을 읽으라느니 할 수 있는 것일까? 이건 부끄러운 일이다. 분명 내 글을 읽은 몇몇 분들은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지나 잘할 것이지.' 분명 맞는 말이다. 나 스스로도 "나는 '양서만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면서', '진지한 자세로' 읽었다"고 소리칠 수가 없다. 그건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이렇게 뻔뻔스러운 글을 쓰게 되었는가? 나는 이제부터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원치 않았지만 부득이하게 내 '개인사'가 약간 섞여 있으며, 결국 이 글의 의미는 내가 쓴 글에 대한 변명 쯤 될 것이다.


  2002년 봄,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캠퍼스는 크고 넓었으며, 도서관에는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의 책들이 수없이 꽂혀 있었다. 수도권 변두리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기대했다. 내가 18년 동안 살아온 소도시가 내게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대학이 줄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 대학이라는 담장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시골 고등학교의 친구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알고 나를 이끌어줄 수 있는 '천재'들이 수두룩할 것이라 믿었고, 교수들과 강사들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내 정신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고양될 것을 기대했다. 분명히 압도당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 기대들은 한 학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깨지고 말았다. 대학은 그저 그런 시시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시한 대학에서 가르치는 공부도, 또 그런 시시한 공부에 매달리는 친구들도 시시했다. 누구 하나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뿐이다. 직접 찾아다녔다면 훌륭한 대학생이나 선생님을 못 만났을리 없다. 하지만 그때는 실망이 너무 커서 그런 단순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대학에 흥미를 잃어버린 나는 고시 준비나 학회 가입은 물론이고 누구나 한 번 쯤 한다는 동아리 활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 외에 하는 일이라고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벤치에 드러누워 음악을 듣고 시집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같은 과반 선배와 친구들은 항상 '오랜만이네, 너 왜 이렇게 안 보이니?'라는 말로 나에게 인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전히 대학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대학에 대한 경멸과 동시에, 삶에 대한 경멸도 시작했다. 내가 굳이 알려고 애써야 하는 것들은 없다고 생각했다. 시니컬했으며, 모든 문제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뻔한 것이며, 다만 말들이 넘치고 수사가 많은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이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이다. 눈 옆을 가린 말이 낭떠러지를 겁없이 걸어가듯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는 세상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그 책이 잘못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이해를 못한 것이라 해도 그걸로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입대를 하고 몇 가지 계기를 통해 나는 그동안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말 그대로 '무식'했다. 나는 무지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바닥의 바닥에 지나지 않았다. 뉴턴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넓디넓은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가 아니라 겨우 모래알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든 분야의 지식에는 보다 전문화된 영역이 있으며,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의 드넓은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개안수술을 받은 맹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법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만 했다.
  그 뒤로 나는 함부로 말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읽더라도 예전처럼 '문장이 나쁘다, 번역이 잘못됐다'며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의 지평선'을 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지금 생각하는 범위보다 더 깊고 넓은 '새로운 단계'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우물을 벗어나 시냇가로 나온 개구리가, 그보다 넓은 강가와 바닷가를 상상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고수를 만난 하수가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고수보다 더 뛰어난 사람도 존재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저술가는 이런 말을 했다.

[……]발레리가 쓰는 글처럼 고도의 지적인 내용을 갖고 있으면서도 언어를 절약하여 설명을 별로 붙이지 않는 문장, 간결하고 밀도 높은 문장을 읽으려면, 더구나 그 문장 뒤에 숨은 뜻까지 이해하려면 독자에게 상당한 지적 수련이 요구됩니다. 연애 경험을 얻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그러한 지적 수련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감히 읽어보라고 권하는 까닭은 젊을 때는 도저히 알 것 같지 않은 글이라도 감히 도전해 보는 '발돋움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을 겪어보지 못하면 인간의 지성은 둔화됩니다. 모르는 것을 만나면 인간의 지성은 그 기회에 자기 능력을 최대한 높여 그 불가해함을 소화해 보려고 합니다. 그 도전과 응전의 반복 속에서 인간의 지성은 고양되어 갑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만남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측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이것은 진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 자신이 얼마나 낮은 위치에 있고 아무 존재도 아닌가를 느껴야 한다. 진흙탕 속에 머리가 처박히고 숨쉬기 힘들어 헐떡이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를 절대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인간은, 결국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도, 결국 이런 의미이리라. 너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고 나서 기하학을 하든 시학을 하든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올바로 배우고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이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뻔뻔스러운 글들을 쓰게 된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므로, 책 한 권 한 권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진지하게 읽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을 '하나의 지향점',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될 턱이 있나. 나부터가 형편없는 인간인 것을. 그러므로 나는 애초에 오로지 나를 위해서 '뻔뻔한' 글들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깨달은 것들을 잊지 말자는 기록이며, 동시에 보다 높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한 메모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 글을 보고 '뭐야 저 자식은'하며 기분나빠 했던 분들은 이 글을 읽고 기분을 푸셨으면 한다. 그 글들은 '보다 높은 단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무지의 인간이, 스스로를 향해 내리친 채찍질이었으므로. 

  
 
 
 
 병장 김동환 (2006/02/28 10:02:15)

첫째문단 넷째줄. '따라서 글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에서 울컥.    
 
 
7급 하지연 (2006/02/28 10:03:49)

그러게요. 칼럼의 한 꼭지를 맡게 되면서 이렇게 거침없이 무언가를 써대는 내가 조금 더 많이 
뻔뻔하구나. 늘 느꼈던 점입니다. 일전에 교양이란 책을 들었다 놓아버린 적이 있는데 지식도 
아닌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이렇게 힘이 든데 가끔은 필진이라고 칼럼을 쓰면서 그저 
내 생각을 주절거린다는 사실을 빼면 과연 뭐가 남을까 이런 자괴감으로 오랫동안 글이 써지지가 않기도 하죠. 불안감은 내 글이 나를 옭아매지는 않을까. 내가 정말 이런 사실을 잘 알기는 하는 
걸까. 아니면 난 좀 더 생각을 한 후에 이글을 썼어야 할지도 모른다. 
원영씨 글을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또 한편으로는 글을 쓰는 사람의 보편적인 딜레마가 
아닌가 하기도 하구요. 
뻔뻔하기로 치면 저 역시 만만치 않을 것 같네요(엄숙하게 자숙(自肅)중...)    
 
 
 병장 한상천 (2006/02/28 10:15:46)

나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 깨달으면 별 거리낌없이 막 써내려가는 타입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글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울컥!! 

내가 뻔뻔스러운 글들을 쓰게 된 이유는, 결국 내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울컥!!    
 
 
병장 김대현 (2006/02/28 10:17:43)

그놈의 "핏자욱"이 아주 잘 보이는 글 감사합니다. 
엔간하면 댓글 잘 안다시는 하지연님의 댓글이 그 핏자욱에 값하는 듯 합니다. 잘 읽었어요. 

동환님, 상천님 / 뭐 이곳 분들 겸손하신 거야 어제오늘 일입니까. 허허. 저는 이제 울컥하기 포기했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2/28 13:49:50)

대현씨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라구요..쿨럭.    
 
 
상병 안대섭 (2006/02/28 15:11:44)

담담 아기자기, 심오함, 치열함 어느것 하나 들이댈 만한 구석이 없으니... 

랜선 뽑아버리지 않는것만 해도 저로썬 상당한 뻔뻔함을 필요로 하는것 같습니다.    
 
 
병장 주영준 (2006/02/28 15:24:01)

역시. '너는 왜 뻔뻔스러운 글을 쓰는가'. 따위의 제목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차원의 허원영. 

그러나 우리 사이엔 링고가 있소이다. (동생이 도쿄지헨 Adult 한정판 homme를 질렀습니다 만세!)    
 
 
병장 노지훈 (2006/02/28 17:26:33)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겸손하시죠.(웃음)    
 
 
병장 손동철 (2006/02/28 19:59:00)

글을 써놓고 절망과 후회를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마도 원영님이 이 글에서 말한 것 같은 것이겠죠. 정말인지 요새는 좀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귀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는 글은 최대한 적게 쓰고 싶은 생각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스스로 만족하는 글을 쓰려다가는 죽을 때까지도 못 쓰겠죠. 어쨌든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 무지를 안다는 것. 모닥불을 얼굴에 얹혀놓은 듯 정말 인지 부끄럽군요.    
 
 
상병 엄보운 (2006/02/28 20:41:36)

글을 읽었습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을 듯 하군요,    
 
 
병장 허원영 (2006/02/28 21:35:45)

지연 님 / 그렇습니다, 글 쓰는 사람의 보편적인 딜레마. 랭보 같으면 뻔뻔함을 느끼지 못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그러니 보편적인 거겠지요. 현학(玄學), 그것도 아무나 못하는 거예요. 정말 깊어서 안 보일 정도의 학식이 있든가, 아니면 그렇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믿을 정도로 뻔뻔해야 하니까요. 

영준 씨 / 아니, 옴므를! 저의 동생도 뭔가 사긴 샀다고 들었는데, 그게 과연 뭔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빨리 나가서 들어봐야겠어요, 도쿄지헨의 두 번째 앨범을.    
 
 
병장 박용태 (2006/03/01 12:05:02)

그렇군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입니다. 
1학년 첫강의 때 한 교수가 '앎의 시작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데에 있다'라고 했는데 
당시에 그 말이 굉장히 뇌리에 박혀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것도, 무지를 극복하는 과정 중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벽을 타고 밖에 나와서야 자신이 우물 안에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처럼.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자신을 알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영준.원영// 아니 책마을에도 도쿄지헨을 듣는 분들이!! 역시 책마을 사람들의 소울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땀) 저는 이번에 팜프버젼을 구입, 대만족입니다. 1집 '교육'에 비해서 좀 Jazzy해진 경향이 강한데, 역시 멤버 교체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구요. 링고 특유의 매력적인 가사는 여전합니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