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딱하게 보기 - 매력적인 방부제들 (상병 강승민/051107) 
 
 
 
 
촌장님의 필진 제의를 받고 나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필진자리를 맡아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시간을 조금 달라고 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문제들이 글이라는 정신노동에 투자할 여유를 없게 했음은 현실적인 이유였고(여기에 나의 부족한 글쏨씨는 기본 베이스다.) 한편으로는 글이라는 것, 더 정확하게는 사유가 시대를, 정신을 각성시킬 만큼 값어치 있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값어치를 따지는 그런 대차표가 사실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라는 체념에 결국은 다.다.르.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년시절, 정확하게는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어느 소모임에서 카시오라는 한 남자는 최면에 빠진다. 최면에서 그는 사회적 남성이라면 누구라도 경험하게 되는 폭력에의 굴종, 트라우마에 맞닥뜨리게 된다. 
일종의 몽상가였던 그는 어느 날 이야고라고 불리는 같은 반 급우에게 "코끼리 과자"라는 별명을 지어주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별명은 이야고의 어머니가 자주 나가는 매춘업소의 간판 이름이었다. 카시오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 별명을 들은 이야고는 심한 충격에 빠진다. 
한여름의 더위에 모두들 지쳐서 축 늘어져 있던 오후의 어느 한 때, 이야고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카시오의 안경에 칼로 흠집을 낸다. 흠집이 난 안경을 끼고 잠에선 깬 카시오는 비로소 자신이 "안경을 끼고 있었다"라는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즉 그 안경의 흠집이 자신이 실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을 '각성'하게 해 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이라는 실재에 대면했을 때 결국 카시오는 자신의 어머니도 이야고의 어머니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의 담당교사에게 굴욕적으로 몸을 파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이야고는 주먹을 날리거나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비열한" 복수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카시오에게 자신과 똑같은 지옥을 선물해주는 "정직한" 복수를 한 것이다. 

아마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대사 작위를 받은 2명의 남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아한 색감과 미장센까지, 정말로 대대로 남겨주고 싶은 명화라고 생각되는 그 때, 우리들은 그 두 대사들의 발밑에 대각선으로 휘어져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너무나도 섬뜩한 해골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개인적인 신념, 혹은 예술에서의 암묵적 배열과 선택을 단 한순간에 낯설게 만들어 버리고 <대사들>의 모든 도상과 소재들을 허망하고 붕떠다니는 기표들로 만들어버리는 실재의 "흠집" . 그리고 안경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기스'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철학자들, 문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런 안경의 흠집을 모른 채하지 못하는 '너무 많이 안' 현실 속의 정신병자들인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불균질한 말 한마디에 사랑의 불완전성을 몸소 체득하는 문제적 개인, 지독한 완벽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영화<트루먼 쇼>에서 세상이 실은 거대한 인공의 세트라는 점을 깨닫는 짐 케리가, 상거래의 법칙을 어김으로 해서 그 인위적인 대타자의 협곡으로 빠르게 타락하는(그럼으로 해서 입도 떼기 싫은, 또는 언어를 상실하게 되는) 김기덕의 영화 속 인물들이 실은 그들 스스로가 윤리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게 아니라. 어떤 사회, 더 정확히는 이 불완전한 세상의 어쩔수 없는 잔여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유는, 그리고 (벤야민이 말했던 의미로서의) 생산적 글쓰기는, 결국은 이 불완전한, 그러나 '하여튼' 살아야 되는 피투성으로서의 존재인 우리들에게 그러한 잔여들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이 X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왜 요모양 요꼴로 남들은 아무도 생각지도 않는 심각한 고민들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매번 성장통을 겪는가라는 지극히 실존적인 고민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고, 동참을 바라는 일에는 괜시리 고개가 절로 숙여지거나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끔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좋은 글을 써달라, 좋은 영화, 책들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매마른 현실에서 좋은 책과, 글과 사유란 무엇인가? 눈먼 자들에게 바치는 장님의 생존 전략?  아님 진짜 '눈'을 뜨고 자신의 딸이 몸을 팔러 인당수로 나가는 것을 직시하라는 죄의식의 일기인가? 나는 진정한 사유와 생산적 글쓰기는 후자에 기울어져 있다고 본다. 지금 내가 책마을 이라는 군 생활의 '게토'와도 같은 공간에서, 새로운 필진으로서 얼개를 쓰며 드는 감정은 나에게 좋은 책과 영화를 소개시켜 달라는 주위 사람들의 부탁에 심각하게 고민할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진실로 얻기 위해 자신의 계급적 위치로 타락시켜 창녀로 만들어 버리는 <나쁜 남자>의 한기의 자리에 내가 서 있게 되는 그런 참담한 기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다. 하지만 물질과 정신의 변증법이 결국은 시간을 지탱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사유의 편린들이 글이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언어로 바뀌게 되면 그것은 이미 생각의 자리가 아니라 현실의 것이 된다고 믿는다. '읽는 것의 위기'라고 하지만 일단 써놓고 보면 정신은 거기서 더 멀리 나아가기 마련이다. 
나는 제발 많은 회원분들이 더 좋은 글을 많이 써주셔서 '책마을'이라는 하나의 작은 사회가 더욱 견고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바깥의 아수라장에 맞설 수 있는 일종의 무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한 회원의 작은 욕망이기도 하다. 영화 <패컬티>에서 결국 외계인을 무찌르는 건 매력적인 '방부제'들이 아니었던가? 썩어가는 세상에서 "책마을"은 그 썩음의 골수인 군 사회에서 전선을 세웠다고 본다. 이제 방부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책마을과 방부제 공장'은 정말로,  온전히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안경에 흡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글이 좋다.  



p.s

1
한  지금은 폐간된 <키노>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키노>는 처음부터 어떤 이념을 가지고 만들어진 잡지가 아니라 영화를 예술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잡지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영화는 온전히 예술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생이 상품의 속성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문입니다.  브레히트가 "예술은 영화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영화는 예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영화는 정말 그것이 예술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술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키노>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에 입대한 후 자주 보게 된 책마을에서 키노의 흔적을 느낍니다.  책마을은 군인트라넷에 유일한 인문사회 동아리입니다. 솔직히 군 생활을 하면서 사회에 못지 않게 치열한 사유를 하는 필진님들과 그들의 글을 읽는 회원들 모두는 아마 책마을이 단순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곳이라기 보단 '보호소'이자 '게토'로 더 생각하실 겁니다. 
저는 얼마 전 어느 회원 분의 글이 책마을의 존폐위기까지 거론시키며 논란이 되었던 적을 생각해봅니다. 책마을을 아무리 자유롭게 놓아둔다고 한 들, 저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며 
사유의 컨텍스트에는 일종의 축소판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그 때 어느 분께서 그 글을 신고하셨을 때 우리는 책 마을의 존재론적 위기를 경험했었습니다. 그리고 책마을이 디디고 있는 지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모두가 한번쯤은 느끼셨을 겁니다. 
얼개를 읽으시면서 어떤 분들은 제게 선민의식이 있다고 느끼실 지 모릅니다, 혹자는 책마을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라고 반문 하실지도 모릅니다. 
(제게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솔직히 할말이 없습니다. 왜냐면 저는 너무나도 게으르게 책마을에 얹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마을을 제발 어떤 의미로 구획 짓지 말라는 것은, 저가 정말 어떤 목적이 있어서 구획 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칫 너무 광범위하게 번져서 이제는 책마을의 고유한 어떤 느낌을 잃지는 않을까, 그래서 불확실한 리비도가 돌연 독이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 '구역 없애기'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글을 쓰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책마을과 탈 영토화에 대한 글들이 떠오르는 군요.


2

저의 글쓰기 방향은 정말로 "삐딱하게 보기"를 유도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기 위해 저는 가끔 저가 즐겨보는 공포 영화 속의 '좀비'들과 "비급 인생"들을 끄집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외계인의 존재를 믿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병장 김동환 (2005-11-07 14:37:22)  
저도 기원합니다.
칼럼 목빼고 기다릴께요오-.(웃음)  

상병 고계영 (2005-11-07 14:51:27)  
'키노','외계인'이라는 단어에서 흠칫하게 되네요.
앞으로 좋은 글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느껴지네요.
기대하겠습니다.  

병장 박윤철 (2005-11-07 14:58:57)  
후후. 글 잘 읽었습니다.  

상병 김상희 (2005-11-07 15:09:58)  
유목하는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아요.. 항상 새로운 삶의 조건들을 찾아 움직이기 때문에, 정착민과 대비되죠.. 하지만 이건 단순한 이동이나 유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창안하기 위함이에요.. 어디든 들러붙어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하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어떤 상황과도 접촉할 수 있고, 언제든 다른 존재로 변이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유목적 능력 아니겠어요..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자신이 선 자리를 초원을로 사막으로 만들어가는거 아니겠어요..  

일병 안대섭 (2005-11-07 16:36:58)  
만일 영광과 지혜와 행운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도 되게 하소서. 비록 나의 자리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천국이 존재하게 하소서. 내가 능멸을 당하고 죽어 무로 사라져버린다 해도, 단 한 순간,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당신>의 거대한 <도서관>이 정당한 것이 되도록 해주소서.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中  

상병 주영준 (2005-11-08 10:08:11)  
'밀즈-사회학적 상상력'

대학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끄적거린 낙서입니다.
기대할께요. 삐딱하게 보기. 같은 B급 매니아로서.  

상병 이정수 (2005-11-08 14:20:57)  
몇 년전이었죠?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키노> 편집장의 글에서 폐간 소식을 접했을 때의 그 참담함.

사실, 그런 패배감은 익숙한 것이 되어버려 이 '아수라장'에서도 조용히 연명하고 있습니다.  

병장 김지건 (2005-11-08 16:35:39)  
유후~ 그레이트~!!! 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승민님께는 이런말이 실례일듯 하군요. 그래도 역시 그레이트!!  

병장 김종휘 (2005-11-13 09:31:00)  
어쩌면 이제는 아무리 안경에 '기스'를 내어도 그 '기스'조차 보이지 않게 안경이 상해버린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조심스레 생각하게 되는군요.  

병장 한상천 (2005-11-13 14:00:04)  
키노 잡지는 없어졌지만 인터넷 싸이트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더군요..
기사거리는 예전만 못하지만 그곳 블로그에 잠자고 있는 키노인들의 글과 영화에대한 열정에 깜짝놀라고
왔습니다. 이번에 나가서 말이죠..  

상병 이동일 (2005-11-14 22:05:45)  
자신의 안경에 흡집을 드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글" 에 한표~!!  

병장 이준영 (2005-11-16 11:38:12)  
비딱한 시선에 한 표를 던집니다. 그러고 보니 책마을의 필진 대부분이 비딱한 분들이군요 [웃음]  

병장 정구일 (2005-11-16 14:51:33)  
저도 안경을 끼고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 하게 되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