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 보르헤스를 만나다. 
 
 
 
 
푸른꽃, 보르헤스를 만나다.


아득히 오래전, 아니 혹은 조금 전이었을지도 모를, 어느 꿈 속에서 나는 보르헤스를 만난 적이 있었다.



보르헤스 : 나를 찾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미 삶의 에너지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푸른 집속에서 쉬고 있는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푸른꽃 : 우리 동양인들은 돌아가신 분들을 '나으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기때문입니다. 동양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 단계를 셋으로 보았습니다. 태어난 사람을 '난 자', 즉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기'라는 말은 '신(God)과 동일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신화에서는 '신神'이라는 한자어대신에 '아기'라는 존칭을 사용합니다.) 삶의 에너지는 곧 신성神性이니까요. 그리고 아기가 자라나면서 어른이 되는 절차를 밟으면 (즉, 진정으로 '사람'이 되면) 어르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르신이라는 말은 '어루다'에서 나온 말로, 남녀가 교합하다, 즉 결혼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신성이 곧 다른 신성을 잉태할 자격을 갖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시 영혼의 집(House Of Spirit - 톨킨이 『실마릴리온』에서 지적한 엘프들의 그것이나 당신의 제자였던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영혼의 집』의 그것과 비슷합니다.)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살아있는 자들보다 훨씬 높은곳에 있는 분이라서 '나으리'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러한 동양인의 눈으로는 돌아가신 나으리들에게도 언제나 용건은 있는 법입니다. (서양과는 달리 '제사'라는 특이한 풍습이 발달한것도 이런점에서 당연한 이치일겝니다.)

보르헤스 : 그렇다면 자네는 삶과 죽음의 특별한 경계라든지, 죽음의 의미를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처럼 무겁게 두지는 않는군.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삶의 안티테제로만 상정했음) 이런 점에서 자네는 내가 존경했던 어느 철학자(莊子)와도 맥을 같이하는군. 아무래도 동양인이라서 그런가?

푸른꽃 :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의 스승이었던 노인(老子)의 경구(道德經)를 신념처럼 여기는 자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이켠이고, 삶과의 단절이 아닌, 삶의 다른 단계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제가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보르헤스 : 흥미로운 대답이군.

푸른꽃 : 제가 노자를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도 줄곧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왔고, 노자는 짧은 말들로 저의 그런 얼개를 뚜렷하게 해주었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채워주고, 길고 짧음은 서로를 의논하며, 미와 추는 서로를 이끌어주는것이죠.

보르헤스 :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자네가 십여년간 그렇게 파고들고 있는것이 바로 이 '환상'이라는 테마일텐데.

푸른꽃 : 환상Reverie, Fantasy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이라는 말은 현실Reality라는 허상에서 태어난 또다른 허상에 불과합니다. 환상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며,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를 보완하고 때로는 구분이 불가능한 경지Trance에 이르기도 하지요. 우리가 술을 마실때 처럼요. 어떤 환상문학가는 '환상'이란 화자가 인식한 세계와 청자가 받아들이는 세계의 간극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캐서린 흄, 『환상과 미메시스』中), 이는 100% 올바른 대답은 아닙니다. 물론 그녀가 지적했던 간극이라는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인식 사이의 틈새는 환상과 현실의 대립이 아니라, 생경함과 경이로움과 일상성의 충돌이겠지요. 

보르헤스 : 톨킨이 말했던 점과 상당히 유사하군. (톨킨, 「On Faerie Stories」中 - 톨킨은 이 논문에서 환상의 가장 커다란 효과는 바로 일상으로부터 도피시켜주는 '경이로움'에 있다고 지적했다)

푸른꽃 : 하지만 톨킨 역시 환상성을 환상성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환상을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로 독립시켜버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말할수 없는것에 대한 침묵'이 아닙니다. 말할 수 있는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단지 '말'이라는 경계가 생기면서 빚어진 오류일 뿐입니다. 환상과 현실은 거짓이며, 그것은 단지 '경이로움과 생경함'이 '일상'에 충돌하여 느끼는 어색한 감정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토도로프가 말한 망설임과 비슷하겠군요.

보르헤스 : 그렇군. 자네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우주의 중심을 응시할수 있다고 해도, 자네에게는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겠군. 내 소설을 읽었다면 무척 싱거웠겠는걸(보르헤스의 『알렙』을 참조) 나와 상당히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 나는 삶의 모든 공간은 우주의 공간이었지. 도서관은 곧 우주였고, 지하실은 곧 세계의 근원(알렙Alep)이었으니까.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눈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람이 눈과 귀를 잃을수록 더많은 것을 보고 더 풍분한것을 들을 수 있게 되더군. 이것이 바로 '상상력'의 파워가 아닌가 싶네. 나는 도서관을 보지 못함으로써 도서관속에서 우주를 보았고, 지하실이 깜깜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모든것을 볼 수 있었지. 현실에서 보여지는 환상이란 어쩌면 자네가 말한 그 '생경함'에 그 진의가 있는지도 모르겠네.

푸른꽃 : 물론, 나으리의 소설들은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제가 바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이런 생각을 본격적으로 체계화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3년전, 우연히 집어든 나으리의 소설들을 읽고 '환상적 사실주의'라는 괴상망측한 용어를 처음 맞딱뜨리게 된 것이니까요. 저의 환상과 환상성에 대한 생각은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들의 영향이었죠. 제 친구들은 모두 이러한 환상성을 환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환상은 바로 일상속의 어색함(경이로움,생경함)이었고, 그 경이로움속에서 폐부를 찌르는 반짝이는 무엇에 의해서 삶을 맛보았다고 증언한 가장 확실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드래곤과 싸우는 먼 시대의 기사이야기는 이들에게 '실재'였습니다. 저는 그 환경의 세례속에서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러한 것을 문학으로 훌륭하게 빚어낸 나으리의 소설을 보고 본격적으로 자극을 받았다고 말할수 있을겁니다. 요컨데, '환상적 사실주의'랄까요.

보르헤스 : 평론가들은 그것을 그렇게 부를지 모르겠지만,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런 사실들이 '실재'였지. 위에서도 말했지만 도서관과 우주는 내게 하나였으니까. 

푸른꽃 :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학패러다임에 눌려 이성과 논리, 오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의 실체가 아닌한 (즉, 증명하지 못하면) 부정하는 냉철한 사람들일 뿐이니까요. E.A 포, 노발리스, 니체가 비운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이유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증명되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생떽쥐뻬리가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를 증거했던 가장 확실한 증언, "그는 웃었고, 아름다웠으며, 금발머리를 하고 있었다"라는 명제를 깡그리 무시하는 행위이면서도 우습게도, 현대인들은 동시에 이 명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거죠. 저는 이 명제를 일반인들에게 설득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성과 논리, 철학적 오성에 기반하지 않은 채, 밑바닥에 깔린 '말할 수 없는것'(위에서 비판한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어쩔수 없이 빌어서 표현하는걸 송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독자들의 패러다임을 존중하기 위해 인용한 점을 이해바랍니다.)을 일반인에게 납득시키기는 호메로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것만큼 어려운 부분입니다. 제가 그렇게 지적방랑끝에 만나게 된 것은 78장의 작은 종잇조각, 바로 타로카드입니다.

보르헤스 : 타로카드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있지. 아마도 내 추측이 맞다면 자네는 그것을 가지고 칼 융의 분석심리학이나 상징형식의 아카식레코드(Archasic Record - 모든, 하나의 사건과 물질은 우주와 연결되어있고, 그것을 직관과 심미안으로 통찰하여 세계를 통찰하고 정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이론 - 칼 융이 그의 분석심리학과 집단무의식 이론을 내세우면서 대두되었다. 아카식 레코드론은 타로카드, 점성술, 연금술등 비교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분명해. 나는 타로카드를 깊이있게 연구한다든지,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쓴 적은 드물지만 이런 점에서 이 종잇조각들은 하나의 책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 나도 비슷한 생각을 어느정도 하고는 있었어. 도서관에서 우주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아카식 레코드와 연결하여 나의 정신을 우주속으로 보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자네와 나는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군그래.

푸른꽃 : 바로 그겁니다. 제가 타로카드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역시 친구들에 의해서입니다. (친구중에서 전문적으로 점성술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타로카드의 점술적-포츈텔링Fortune Telling적인 의미보다는 그안에 들어있는 그림들이 가지는 상징과 알쏭달쏭한 엠블럼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압도당했습니다. 저는 이런 아우라의 근원을 찾으려고 만고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만난것이 칼 융의 저서들과 이론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렸던 '말할수 없는것'에 대한 일종의 '규명', '증거'였고, 저는 이것을 제가 생각하는 환상이라는 허상을 허상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는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문학에 열정을 바치려 했던 이십대 초반, 다시 융에서 프라이의 신화비평과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으로 넘어가면서 문학에서도 똑같이 보여지는 이러한 말할수 없는것을 포진하고 있는 아우라들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고 비평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들, 그리고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나 다다선언자들(알리 부르통, 루이스 브뉴엘, 살바도르 달리등)의 작품속에서 저는 융의 집단무의식의 거대한 바다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감명과 짜릿한 충격을 주는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당신의 후배뻘되는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은 충격은 제가 읽고 써야할 모든것을 가르쳐준 선생님, 교과서의 반열에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보르헤스 : 마르케스라. 그의 소설들은 그런점에서도 흥미롭지. 하지만 자네는 동양인 아닌가, 동양인이라면 동양인의 글을 써야하지 않겠나. 마르케스의 소설이나 나의 픽션들이 널리 읽혀지는 것은 우리의 소설들이 라틴아메리카의 정서와 온전히 부합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네. 그것은 실천문학이든 순수문학이든 마찬가지야. 라틴아메리카는 인디언의 영성의 토템과 20세기의 표지인 고층빌딩과 18세기 레콩키스타(반反스페인 저항운동 - 레지스탕스)때 사용한 구식 화포와 자동차가 혼재하는 곳이라네. 당연히 현실은 곧 과거이며 미래이기도 하지. 하지만, 자네가 우리의 그런 글들에 감명받았다는건 다행이지만 글을 '써야하는'입장에서는 그런 수용은 곤란하지 않겠나? 요사이 삶을 살아가는 자들(살아있는 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상한 담론에서도 해체가 대세인것 같은데,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서구의 형이상항을 해체한 것 뿐일세. 그러니 자네는 자네의 정서로 서구형이상학을 해체해야하지 않겠나?

푸른꽃 : 마르케스의 소설들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 그리고 나으리께서 감상하셨을지 모를 일본의 한 장인(匠人)이 제작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만화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이유 역시 당신께서 말씀하신 공로가 인정되었기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삶을 삶아가고 있는 미천한 신분에, 거기에 '어르신'도 아닌 존재인지라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만, 당신과 여러 작가들이 이룩한 노력들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습니다. 융심리학을 익힌 이유는 단지 그 뿌리를 탐구하기 위해서였지, 열매를 맺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날카롭게 지적하신것 처럼,(보르헤스의 걸작 단편소설인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그는 그리스신화의 신의 저주를 받은 비운의 괴물 미노타로스의 비극을 통해 서양 형이상학과 죽음의 응시를 추적하고 있다) 저 역시 황금사과에서 탄생한 형이상학의 이데얼리즘Idealism 우리의 정서로 해체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매는 프레이저가 지적한 황금가지나 헬레나의 황금사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해체는 당신과 제가 존경한 두 노인(老子-莊子)의 그것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더더욱이 방랑에 기반을 한 유목민의 정서입니다. 저는 앞으로 쓸 글을 통해서 이런 우리의 정서로 황금사과와 황금가지를 ‘해체’할 것입니다. 각오는 되있습니다. 다만, 부단한 연습과 사유가 아직 못미칠 뿐입니다.

보르헤스 : 그러고보니 이번에 칼럼을 맡았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자네가 쓸 글들의 내용도 그러한 내용인가?

푸른꽃 : 그 점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깁니다만, 아직 우리 동양인들의 작품 속에서 그들만의 체계적인 해체를 시도한 작품은 보여지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센과 치히로’라는 만화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비평이나 ‘칼럼’이라고도 불릴지 의심의 소지가 다분한 졸저속에서 이러한 우리정서로의 해체는 시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껏 쌓아왔던 심리학 속에서의 상징형식구조나 융의 분석심리학, 그리고 그것이 엮여지는 문학비평의 여러가지 성분들을 검토하면서 얼개를 풀어나갈수 있는 그런 글들을 써보는 것으로 만족해보려 합니다. 언젠가 그러한 뛰어난 작품이 등장한다면, 그때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해체의 시도’가 성공했다고 다시한번 당신을 만나 떳떳하게 말해볼수 있을 듯 합니다.

보르헤스 : 그때가 되면, 자네의 칼럼을 한번 눈여겨 보겠네. 구미가 당기는데.

푸른꽃 : 누구도 못쓴다면, 제가 써서라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웃음)

보르헤스 : 그럼 그때를 기약하자고. 영혼의 집의 밤은 무척 길지만 낮은 짧아서 삶을 사라가는 자 (사룬자 ? 사람(살아있는))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척 제한되있으니, 이만 가보게.

푸른꽃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칼럼 혹은 작품에 대한 약속을 걸고, 나비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나갔다.


내가 보르헤스를 만나는 꿈을 꾼 것인지, 보르헤스를 만난 내가 꿈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나는 잠에서 깼다.

 

  
 
 
 
상병 송희석 (2006/03/18 19:24:16)

다른것은 눈에 안들어오고 오로지 노자 - 도덕경만 보이는군요!(제가 부전공을 포기한 이유인 노자의 도덕경 - 소유유편때문인데!) 
민우님의 첫칼럼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상병 조주현 (2006/03/18 19:28:02)

그러니까, 1힛의 짜릿함을 뛰어넘어, 
Alpha & Omega.라는 느낌이에요.    
 
 
병장 김태경 (2006/03/18 19:46:29)

우와아! 친절한 괄호들이 많이 있지만, 어느 정도 기반지식이 없으면 얼개도 이해하기 힘들겠는데요. 
동양적, 민우님적인 해체를 기대하겠습니다.    
 
 
상병 엄보운 (2006/03/18 19:51:40)

우와- 감탄할 수 밖에 없는 필력과 내공에 다시 한 번 휘둥그레해지는군요. 민우님이 필진을 맡아주신 것이 책마을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역시 헛된 게 아니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상병 박종민 (2006/03/18 23:01:43)

아아. 민우님의 이름 석자는 사회에 나가서도 '죽어도' 못잊을거에요.    
 
 
 병장 김동환 (2006/03/19 12:51:22)

오옷. 동양철학이라면 좀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좋아라. 히히.(웃음)    
 
 
상병 조용준 (2006/03/19 14:04:14)

와우. 역시나 짜릿하네요.(웃음)    
 
 
 상병 박진우 (2006/03/19 16:29:11)

이래서 민우님을 추천했다니깐.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잘 짜여진 얼개.    
 
 
상병 권희용 (2006/03/20 01:38:42)

덩실덩실 민우다 민우~(반말한다고 때리진 않겠지..) 
나도 가입했으니까~ 자주 올께(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