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개] 삶을, 비추어  
병장 홍석기  [Homepage]  2009-01-26 16:23:13, 조회: 107, 추천:0 

어느덧 이곳 책마을에 정착한지도 1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작년 11월 즈음이었을 겁니다. 눈사역과 야근의 압박에 시달리며 소등을 하기 무섭게 잠자리에 뻗어버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대기 두 개의 일상 속에서, 스캔 심부름을 하러 온 한 선임과의 뜻하지 않은 만남을 통해 이 곳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상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때마다 프린트한 글을 몰래 훔쳐보거나 Alt+Tab 신공을 발휘하는 날들이 늘어나고, 새 책을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5분 이상 생각을 곱씹어 보기도, 그 생각을 모아 글이란 것을 써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일련의 행위가 지속되며 어느덧 나 자신에게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잊혀졌던 기억과 지식들을 되찾아 내었고, 무지했던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 니체, 구조주의, 벤야민, 김애란, 신자유주의, 박노자, 사이드, 시의 아름다움, 김지민과 주영준과 당구장의 김프로 같은-을 새로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볼 수 있었지만 보려 하지 않은, 그동안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부해왔던 기억과, 과거와, 나의 모습을 똑바로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진실은 얼음같이 차가웠고, 현실은 죽고 싶을 만큼 무서웠으며, 나의 과거는 두려울 만큼 끔찍했기에 때로는 몸이 벌벌 떨리기도 했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며, 이대로 뛰쳐나가 숨어버리고 싶기도 했지요. 아니, 사실 저는 아직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김동석씨의 언어를 빌자면) ‘글로 삶을 풀어쓰며’  삶과 삶을 부딪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수많은 주민 분들을 보며 어느덧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뒤를 돌아보면 조금씩 성장해가는 나를 볼 수 있었기에, 저는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종종 탈출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자기 구원에 너무나도 매달린 나머지 화자와 청자 모두 나 자신에게 맞추어 버린 편협한 글만을 양산하며, 그 단점을 커버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나의 글쓰기를 깨달았을 때. 또, 변변한 한 줄의 덧글조차 쓸 수 없는, 도저히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의 얇디얇고 빈약한 나의 지식수준을 깨달았을 때, 책마을에서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겪어버린 저는 하루 빨리 펜을 꺾고 지식 습득에 철저히 몰두하고 싶었습니다. 스물넷의 발레리처럼. 도무지 읽지 못하여 쌓여만 가던 책들을, 교보의 위시리스트와 본부 도서관에 놓여있는 수십, 수백 권의 책을 모두 파고들어 좁디좁은 나의 지식세계를 넓혀나가며, 제 2의 김강록, 주영준, 허원영 같은 이들에게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이영기씨의 글에 나타나있듯-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그 누구와의 논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만한 진정한 무림의 고수가, ‘굇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실, 부족한 제 입장에서는 진즉 이렇게 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마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떠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글로 삶을 풀어 쓰는 것, 그리하여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혼자만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또는 타인의 눈이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추어 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서로를 마주보며 그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책마을’ 이란 공간에서 우리는 그 누구의 얼굴도, 습관도, 몸짓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비추어 줄 수 있으려면 글로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각기 다른 삶의 궤적들 속에서 내 삶의 궤적을 그려보는, 그렇게 서로의 삶을 글로 풀어쓰며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을 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낯간지러운 글이라고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덧글 릴레이의 즐거움을. 말랑말랑한 지적 촉각을. 소통의 따뜻한 온기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각기 다른 삶을 비추며 그 속에서 성장하는 자신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5:59 

 

병장 김민규 
  만세 2009-01-26
17:05:06
  

 

상병 이지훈 
  만세, 만세, 만세 음? 

잘 부탁드립니다 흐 2009-01-26
17:37:02
  

 

병장 이동석 
  만세 만세 만만세 

여기서 이모티콘 하나 써버릴까요? 낄낄. 2009-01-26
21:17:07
 

 

병장 김지웅 
  마안세 2009-01-26
21:43:21
  

 

병장 이동석 
  이거까지 방주에 타도록 하겠습니다. 흐흐. 동욱님 얼개를 보고 갈수 있었음 좋겠군요. 2009-01-27
15:36:11
 

 

병장 김동욱 
  이런 식의 '댓글'릴레이는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망설여지지만- 

정말 만셉니다. 2009-01-28
00:54:53
  

 

상병 이동열 
  쪽지 답장도 안해주시는 석기님이지만 어쩔수 없죠. 만세라고 외칠수밖에 없는걸(웃음) 2009-01-28
10:36:15
  

 

병장 홍석기 
  뭡니까 이 반응들은. 아니, 민규님이 '하일' 이라고 외치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동열// 아짤의 압박으로 쪽지가 다 날아갔어요...(흑) 2009-01-28
14:04:04
  

 

상병 정근영 
  켈켈켈 
모르셨겠지만 석기씨의 글은 저에게 엄청난 자극이 되었어요 
제가 베일을 벗고 나오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할까나, 흐흐 
잘 부탁드려요 
만세 2009-01-28
1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