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지향(過去指向)
걷는 것에 대하여
내게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도 떨쳐내지 못한 버릇이 하나 있다.
길을 걷다보면 문득 0.1초전의 내가 바로 뒤에 서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는 것이 그것인데,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행여나 달아날까 또 다른 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태연한 척, 순식간에 팽그르- 하고 돈다. 나이가 하나 둘씩 차고 나서부터 정신병소리 듣기 싫어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가끔씩 해보지만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나는 단 한번도 ‘나’와 마주치는데 성공한 적이 없다.
붙들 수 없는 시간의 한가운데에 서서 내가 ‘걸어온’, 텅 빈 길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서러움이었다. 이를테면, ‘아, 나는 이제 저 곳으로 다시는 갈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종류의.
뚜벅뚜벅 걸어가 내가 방금 지나쳤던 그 자리에 다시 서보지만 내가 조금 전 숨을 내쉬고 뱉던 그 자리와는 또 다른 곳이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시간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제 눈 가린다고 진짜로 세상이 어두컴컴해진다면야 퍽도 속편한 인생이겠으나 안타깝게도 살아간다는게 그다지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닌지라 팔을 한껏 내뻗고 개겨봤자 분절할 수 없는 무언의 단위로 조금씩, 형언할 수 없는 어마한 힘으로 밀고 나오는 시간을 도저히 막을 수 없으니 기껏해야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일일 뿐이겠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엷게 저며진 과거의 편린들을 지도와 나침반삼아 내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 마치 복제 명화(名畵)를 보는 느낌으로라도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해 대리만족하는 낭만,
그것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골수 과거지향자이고,
회상 중독자다.
혹자는 센티멘털한 과거지향 딱 질색! 이라며 일갈할지도 모르겠다만,
나 역시 삶을 과식(過食)하는 센티멘탈가이가 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과거에 고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것은 충분히 현재지향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상’의 즐거움을 진정 아는 사람이라면, 삶에 충실하지 못했던 순간들의 기억을 회상하는 일이 얼마나 고역스러운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나는 스스로 부끄러운 장면을 회상할 때는 너무 괴로워 잊고 싶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휘파람이나 노래를 불러 버리거나, 장탄식과 동시에 주먹으로 자학을 할 정도니까. 어차피 시간은 붙들 수 없고 인생은 한번이므로, 나는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것이 현재를 사는 내 삶의 원동력이다.
가만히 있어도 앞을 향해 쉴새없이 달려가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등 떠밀리듯 앞을 향해 나아간다.
과거-현재-미래라고 나눠봐야 80년. 어쩌면 과거지향이라는 것은 그다지 거창한게 아니고
그저 ‘낭만’, ‘감수성’, ‘연민’ 같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가지는 것들의 동의어가 아닐까.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우리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라는데,
먼 훗날의 도착점에서 나는.
천상병 시인처럼 덤덤하고도 즐겁게 나의 과거를,
나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나는,
비로소 ‘나’와 마주칠 수 있을까.
평생 뒤돌아봐도 나타나지 않던 그가
이번에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줄까.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고 그저 걸어온 과거를 동력삼아,
주어진 현재를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짐작도 가지않는 먼 미래에
다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뇌구조는 여자친구의 생일도 잊어먹고 다니면서 정작 당사자도 모르는 시시콜콜 산만잡다한 것을 모조리 기억해내는 돌연변이적 구조라 많은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와 낭만을 주기도 했으니, 내가 책마을 주민들게 미미하나마 추천을 받게 된 것은 후자의 경우가 아닌가 한다. 생각해보니, ‘노루표’가 그랬고, 안 친한 ‘친한’ 친구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것 말고도 변변찮은 글에 황송하게도 잘 읽었다고 격려의 댓글을 달아주신 글들도 넓게 보면 ‘그리움’이나 ‘아련함’일게다.
그러니까, 나는 그에 충실한 칼럼을 쓰면 되겠다는 용감한 다짐을 해본다.
책마을, 책가지에 지금까지 올라왔던 글들을
새삼 다시 바라보며,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고백한다.
처음 책마을을 접했던 때가 생각났다.
방대한 지식체계와 치열한 고민을 놀라운 내공으로 녹여낸 묵직한 글들을 보면서
아, 헛살았구나 싶은 절망감에 못 이겨 어려운 책들과 끙끙거리며 글들을 흉내내 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공부부족을 일부러 티낼 필요는 없다.
나는 억지스러운 힘을 빼고 내가 이야기할 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된다.
내가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은 꾸준히 공부해 볼 작정이다.
고민을 거듭 할수록, 표현은 더욱 깊어지는 법이라고 생각해본다.
언젠가는 나도 다른 주민들처럼 심후한 철학과 문학, 사회과학적 내공으로
속되지 않고 풍요로운 향을 녹여낸 문장을 써볼 그날을 그려본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기존의, 그리고 새로 선출된 필진분들 중에서 주민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실 분이 분명 계실 줄로 믿는다.
아니, 그런 분들이 필진으로 선출된 것 같아 같이 이름을 올린 나로서는 황송하고
내심 기대와 응원을 보낸다. 자신의 개성이 분명한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다.
그와는 별개로 나의 역할은 딱 이것까지다.
졸렬한 펜부림이나마 주민들로 하여금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사소함과 기억들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단지 다른 주민들보다 더 끄적거릴 시간이 많을 뿐인
인문, 사회과학교양 쥐뿔 공부 부족의 가라 필진 박종민으로서는 더 바랄 게 없겠다.
하루키가 말하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고 했다.
모두가 정신없이 헐떡거리고 달리는 동안에 나 역시 헐떡거릴 수밖에 없더라도.
내 주변의 사람들하고 만큼은 가끔씩 함께 뒤돌아보기도 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을 바라보라며 응원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 5월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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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고민 많이했어요.
필진제의에 기분이 좋아서 냅다 지원은 했지만.
이거 괜한 짓을 한게 아닌가 싶더군요.
인문, 사회과학 일변도의 책가지는 이미 예전이야기고,
지금은 어느 정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글이 올라오는데,
나 말고도 이런 색깔의 글을 써주실 분들도 사실 눈에 보이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니, 자격운운하기 전에 개성있는 포지셔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던 현동씨나 기범씨가 필진명단에 없다는 것도
나름 부담이네요.
그런데, 저는 퍽도 이기적인 녀석이라
이 좋은 기회를 놓을 수가 없네요. 필진하면서, 뭔가 도움이 좀 많이 될 것 같거든요.
정신적인 면에서나, 시간 면에서나(웃음).
하지만, 언제든지 저라는 존재가 책가지에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그만둘게요-
책가지의 순혈을 지키기 위해서, 개인적인 욕심은 접어야죠.(웃음)
이미 책마을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버려서 말이에요.
병장 노지훈 (2006/05/26 00:21:22)
정말 필진 잘 뽑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잘 부탁드려요~(웃음)
하사 윤석호 (2006/05/26 00:54:27)
맛있는 글을 쓰시는 분이 여기 또 한분 계셨네요.(웃음)
좋은 글 부탁드려요.
상병 송희석 (2006/05/26 04:57:52)
오호호호호! 기대할께요!
일병 김현동 (2006/05/26 07:29:37)
축하드리고, 기대합니다(웃음).
병장 박원홍 (2006/05/26 10:15:46)
나를 찾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 이것이 아직까지는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시간이 흐른 후 창밖에 내리는 빗물에 눈물 한방울 같이 흘릴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았으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왕성할 활동 기다리겠습니다.
병장 박진우 (2006/05/26 13:54:45)
책마을의 다양성에 일조할 확고한 자아의 종민님.
같이 날아 보자구요. 으헷.
상병 조주현 (2006/05/26 16:14:48)
종민씨, 가는 그날까지 지켜보겠어요. 으핫핫핫
상병 이훈재 (2006/05/26 16:24:11)
플라이 종민 플라이- 옙 베이베!
병장 권기범 (2006/05/26 17:27:00)
억. 실명언급받으니 부담좀 되네요. 저는 전역이 얼마 안 남았고 복학준비도 해야 했지만... 최근 사상에 짠물이 들고 있거든요.
종민씨의 도전하는 자세가 아름답습니다. 좋은 글 기다리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