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개]스물 세살의 돌잔치  
병장 이지훈   2009-03-29 23:43:06, 조회: 196, 추천:0 

이곳에 오기 전엔 ‘인문학의 위기’라더니 이젠 ‘청춘의 종언’이란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청춘의 한 명으로서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위기나 종언이나 꽤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인문학과 청춘,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청춘의 턱 밑까지 들이밀며 불편하게 하고 있다. 많은 청춘들이 호기로운 목소리로 “치워”라고 호통치거나, 이러저러한 변명으로 문제의식의 날카로움을 조금이나마 무디게 만들고는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식은 이미 너무 가까이까지 턱 밑을 파고들어와 호통이나 변명을 쏟아내려 입을 벌릴 때조차 턱을 찔러대고 있다. 이제 턱에서 흐르기 시작한 피는 목을 지나 가슴을 적시고 있다.

호통도 좋고 변명도 좋다. 당장 살갗이 도려내질 판인데 한 마디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이 불편한 문제의식을 턱 밑에서 걷어 내야할 때다. 손짓이든 발짓이든 고갯짓이든 행동을 통해 이것을 저 멀리 밀어내거나 치워내야 한다. 턱을 여는 것은 잠시 아껴두었다가, 이것이 먼지 쌓인 이삿짐처럼 멀리 치워져 잊혀 질 때쯤 맘껏 열어 제끼자. 그건 당시 20대들의 무대를 위한 조금 자극적인 광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이제 행동을 하려 한다. 그런데 왜 하필 발짓도 아니고 고갯짓도 아니고 손짓인가? 손짓 중에서도 왜 돌, 폭탄, 깃발 같은 것을 든 손짓이 아니라 연필을 든 손의 짓거리를 택하는가? 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는가? 글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세상을 ‘아름답게’든, ‘추하게’든, 변하게 하는 것은 발짓이나 또 다른 손짓이지 절대 연필을 든 손짓은 아니다. 그저 다른 짓거리를 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필을 들고 손을 까딱까딱하는 것이다. 물론 글이 어떠한 행동의 근거가 되고, 어떠한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글, 혹은 글쓰기 자체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 글은 오직 보조적인 역할일 뿐이다. 다른 행동과 연결하지 못하는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글만으로는 세상을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만들 수 없다.

허황된 희망을 기초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다른 행동들의 근거, 설명 등 보조적인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것, 이것이 글을 쓰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글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거나, 글쓰기 자체가 다른 행동들보다 더 이성적인 것이라거나 또는 더 효율적인 것이라거나, 고상하고 우월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경계한다. 이것은 죄악이다. 연필을 쥔 채 창 바깥의 불바다를 구경하는 자의 지나친 자기합리화요, 변명이다.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다. 글쓰기는 특권이 아니다. 행동하는 자들에게 특권이 있고, 있어야 한다. 아직까진 연필 밖에 쥘 수 없는 것이 부끄럽지만, 아직까진 돌을 쥘 용기와 능력은 없지만, 그나마 글쓰기로 행동할 수 있고 글쓰기에 대한 의지가 밥에 대한 의지 바로 다음인 것은 다행이다.

계획하고 있는 글의 가지는 두 가지다. 우선 첫 번째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 당연히 실존인물이며 생존인물이다. 기록과 사진, 영상자료 등의 사료들과 현장답사를 통해 기본적인 틀을 잡겠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 그의 기억에 의존하여 작업을 진행해나갈 것이다. 기억을 통한 대화에 의존하는 만큼 사료 수집과 연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지만 그는 이런 시간을 모두 투자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역사학에는 시계의 그것처럼 중심, 주체가 있어야 한다. 시침과 분침, 초침을 잡아주는 중심이 없다면 시계를 뒤로는 커녕 앞으로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심을, 주체를 사회나 국가에서 개인으로 옮겨온다는 점에 있어서는 기존 평전 작업 등의 미시사 연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기존의 평전들이 개인을 통해 결국 사회나 국가만을 조명하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단절된 시간 속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이 평전은 개인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며, 연구 대상을 결코 단절된 시간 속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연구자와 연구 대상은 연속성 속에 있으며, 이 연속성은 바톤 터치로 이어지는 계주의 연속성이 아니라 같이 뛰는 2인3각 달리기의 연속성이다. 또한 연구 대상이 가지는 보편적 사회적 지위는 특정한 연구자, 특정한 연구대상에 국한된 미시사에 미래를 향한 역동성과 보편성을 부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금요일’의 글이다. 주로 ‘이곳’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막연하지만 지금의 20대에게 한반도 ‘하나됨’의 기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 ‘하나됨’이 결코 말처럼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님에도 이와 관련된 깊은 고민들이 오고 간 흔적은 보지 못했다. 우리들끼리 뿐 아니라, 그들과도 말이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두 곳의 학생들이 학생대표회의를 주도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 때와 같은 적극성과 사회적 공감대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적극성과 공감대를 왜 가져야 하는지 충분한 대화가 있었는가? 또한 ‘이곳’에서 금요일마다 만나는 논리들은 과연 ‘이곳’의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인가? ‘이곳’에서 우리 행동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고 꾸준히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도 얕고 일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뿌리와 가지”로부터 “우리의 현재와 미래”까지. 20여 년 전 돌잔치 때 연필을 잡았던 어린아이가 20여 년이 지난 오늘, 두 개의 어설픈 손짓을 앞세워 다시 연필을 잡는다. 20년 전에는 어린아이의 힘으로도 쉽게 들어 올려 흔들 수 있었던 연필이지만 지금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르다. 그러나 이번엔 혼자 돌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혼자 연필을 들어 올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무게가 두렵다기보다 설레는 것이 사실이다. 증자라는 사람이 말하길,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나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고 한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자, 20년 만의 돌잔치에서 다시 연필을 집어 들었다. 지켜보라. 나와 벗들의 연필을, 손짓을, 글을, 행동을. 그리고 모두 함께 이야기하자. 우리가 모두 글로써 벗이 되기 위하여. 모두가 벗이 되어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05:25 

 

병장 김민규 
  "역사학에는 시계의 그것처럼 중심, 주체가 있어야 한다. 시침과 분침, 초침을 잡아주는 중심이 없다면 시계를 뒤로는 커녕 앞으로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음에게 요구되는 형이상학적 일탈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설령 거대한 장력의 시침이 아닐 수도 있고, 현실적 주체로서의 분침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작은 초침의 움직임이 모이고 모여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요. 

누가 과연 청춘에 종언을 고할 수 있습니까? 연필은 인문학을 다시금 생기있게 할 수 있을까요? 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에 이르러 바람은 차고 하늘은 어두웠는데, 다시금 환히 비출 태양을 기다리며 외로운 약동을 꿈꿔봅시다. 온화한 아침이 올 것을 믿으며, 아름다운 세상의 다면들을 긍정하면서, 

유후 2009-03-30
04:13:20
  

 

상병 이기범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글이군요. 

두번째 주제에 대해선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지만 우리 20대들이 반드시 논의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됨'을 지향하는 집단에 대한 편견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질 기회가 매우 적었습니다.(아님 접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던가) 속시원하게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하나됨'을 지향해야하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던 터인데, 이런 글을 보니 매우 반갑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흐흐 2009-03-30
15:13:35
  

 

상병 김지호 
  지금 우리세대에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속시원히 지적해 주신 듯합니다. 

지금 시대는 기초와 순수가 상실되어가려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나서서 행동을 해야하니까요. 그게 저희에게 주어진 지상과업이랄까요. 2009-03-31
19:41:45
  

 

상병 김태완 
  글로써 벗이된다는 말 괜찮군요. 
저도 뭔가 써봐야 겠습니다. 2009-04-03
09:54:10
  

 

상병 정근영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그리고 있던 지훈님에 대한 이미지가 비로소 드러나는 것 같군요. 
부디 지훈님의 글이 목표로 하는 것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 중에, 글이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고 한 말씀에 고개가 갸웃하는군요. 
저는 책마을에서 글의 힘을 느꼈고,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펜을 들었으며, 글이야말로 모든 실천적 행위의 시발점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의견에 쉽사리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대답을 해줄 수 있으신지. 아, 물론 싸우자는 얘기는 아니에요. 저는 온건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흐. 2009-04-04
23:30:23
  

 

병장 이지훈 
  얼개에 귀 기울여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얼개에 책임지는 활동을 하렵니다. 

근영// 

물론 글이 어떤 행동의 시작이 될 수 있고, 또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글의 힘을 과신하는 것을 경계하려고 해요. 실제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글로만 이것이 저것이다, 저것이 이것이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잖아요? 글이 행동의 하나가 될 순 있겠지만, 행동을 잊고 자신을 잊고 말로만, 글로만 짖어대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서요. 지금까진 그래왔던 것 같지만. 흐 

제 글쓰기의 문제점 중 하나인, 조금 극단적으로 흐르는 글쓰기 덕분에 글의 힘을 폄하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군요. '보조적인 역할'이라는 것에 이런 '경계'의 의미를 가지게 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헛, 제 이미지가,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