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개]과거지향(過去指向)  
병장 홍석기   2008-11-30 13:13:10, 조회: 203, 추천:0 

과거지향(過去指向)

나에게는 묘한 버릇이 하나 있다.

갑자기 불쑥, 과거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장난전화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걷고 있을 때든, 일을 할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샤워를 할 때든. 그것은 어떠한 시간적, 공간적 순서에 구애받지 않는다. 아침에 체조 도중 초등학교 회장 선거가 벌어지기도 하고, 점심시간엔 지난 휴가 때 갔었던 노래방으로 회귀하기도 하고, 저녁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수업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1인칭도, 3인칭도, 청자와 화자,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서도 자유롭다. 재미있었던 친구의 농담을 다시 듣기도 하고, 이병 시절의 내가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고, 후임과의 논쟁을 숨어서 지켜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관람하는 한 명의 관객이 되어 감정 몰입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엄청 웃기는 파트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흐흐흐, 웃고, 주인공이 막다른 상황에 몰리게 되면 이런 족구신발, 같은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이거 멀쩡히 길가던 놈이 갑자기 웃고, 욕을 하니, 지나가던 사람 입장에서 보면 뭐 이런 미친롬이 있나, 싶은 노릇이다. 그래서 간혹 ‘특이하다’란 공손한 지적을 받기도 했는데, 어쩌면 여태 변태로 몰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자체 멀티플렉스 관람을 계속하다 보니, ‘애가 왜 이리 멍하냐,’ ‘쓸데없는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등등의 비난이 날아 왔고, 나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정신병, 아닌가. 고쳐보려고 했다. 머릿 속에서 재생 버튼이 눌러졌다, 싶으면 급히 일시 정지를 누르고, 우측 상단의 엑스박스를 클릭했다. 상담을 받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재밌으니까. 재미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그 씬의 배경과, 의도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두 알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감독이니까. 그렇게 내가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씬을 하나 하나 완성할 때마다, 거기엔 생동감이 부여된다. 김애란의 표현을 빌자면,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한다.
살아 있다, 는 느낌을 받았다. 이 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렇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완성의 씬을 완성하고, 잊혀졌던 수많은 과거의 ‘나’와 만났다.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하던 나, 처음으로 여자아이에게 러브레터를 받던 나, 어지럽기만한 다람쥐통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울던 나, 훈련소 첫 짬밥을 먹던 나, 공부에 지쳐 새벽 두시의 라디오를 듣던 나, 첫사랑 그대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던 나, 처음 외국에 홀로 남겨졌던 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서 의도적으로 묻혀졌던, 모든 책임을 떠맡고 기억의 ‘주류’에서 떠나야 했던, 또는 너무나 빨리 달리는 세상속에서, 버림받은 필름처럼 잊혀졌던 그 모든 이들. 그들과의 만남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감동적이었다. 마치 잊어버렸던 스칸디나비아의 이복 형제를 상봉 했을 때처럼. 그래서 내가 모르던 성장 배경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잊혀진 필름 하나 하나를 손에 넣으며, ‘나’라는 존재가 조금 더 명확해지고, ‘나’라는 이름의 영화가 조금 더 완성되어 간다. 어설픈 타인의 아이디어나 사회적 기준이 점철되지 않은, ‘나’의 언어로 쓰여진, 영화. 뭐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상쾌하기 그지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과거를 지향하려 한다. 잊혀진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버림받은 소중한 필름을 되찾아, 미완성된 삶을 연결하며 나의 영화를 완성하려 한다. 개중에는 쓸데없는 씬도 있겠지만, 선입견과 사회적 잣대가 들이대지며 이유도 없이 편집되버린, 중요한 장면들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으니까. 미친롬 소리 몇 번 더 들을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과거지향(過去指向). 
끊임없이 과거와 대면하며 나아가려 한다.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처럼,
이 한쪽 눈으로는 현재를 보고, 한 쪽 눈으로는 과거를 보면서.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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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개는 박종민(예)씨의 동명의 얼개, 과거지향(過去指向)에서 제목을 따 왔습니다.

예전에 솔직하지 못한, 어디서 주워들은 아이디어를 구겨넣은 얼개를 올린 뒤, 상당히 후회를 했었습니다. 일단 창피했고, 또 나도 모르는 주제를 떡하니 써 갈긴 뒤에는, 도무지 칼럼을 쓸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솔직한 얼개를 꼭 다시 올려야겠다, 다짐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글을 써야 할 것인가. 여태 쓴 글을 돌아보았습니다. 몇 편 안되는 졸작이었지만, 여태껏 전부 과거지향적인 글을 써 오고 있었더군요. 첫 글을 쓸 때에도, 같잖은 얼개를 올렸던 시기에도, 가장 최근에 글을 쓸 때에도, 모두. 생각하고 자시고, 저 자신은 제 글의 방향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이왕 필진이 대거 추가되는 이 혼란의 시기를 틈타 얼개를 수정합니다. 이제 위선과 자기기만의 시대를 끝내고, 솔직한 글을, 올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연재될 저의 글은 과거지향적인, 과거 회상적인 글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편견’이란 놈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어, ‘편견’ 부수기란 칼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만, 이 칼럼도 그저 소분류의 목적이지, 과거지향이란 큰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제는 다 다를 수 있으나, 과거의 제 이야기가 중심이 될 것 같습니다. 연재 기획중인 몇 가지 ‘그나마’ 학술적인 칼럼- 오리엔탈리즘, 러다이트, 엘리티시즘- 같은 것도, 이 틀을 크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뭐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저의 무지함 때문에, 제 이야기 말고는 딱히 쓸 말이 없어서, 라는 구차한 핑계를 대도록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과거지향적인 글은 염치없는 글이니까요.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욕먹기 십상이니까요. 뭐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최대한 재미있게, 과거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님 말랑께롱.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10 18:18)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3:30:22 

 

병장 김현민 
  왜요? 저는 오히려 과거지향이 좋은걸요. 

석기님 얼개 잘봤습니다. 

글 기대할게요! 2008-11-30
13:28:15
  

 

병장 이동석 
  으허허- 제가 말 없이 있다 갑자기 엠병-이라는 지껄인다면, 석기님은 이해해주실테지요. 저만 그러고 사는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끌끌- 2008-11-30
13:57:32
 

 

병장 홍석기 
  사실 단지 우수회원이 되고 싶었다능...그렇다능....흐흐. 동석님 감솨- 2008-11-30
14:24:08
  

 

병장 정병훈 
  이야- 석기님의 얼개가 다시 올라 왔군요.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과거이야기를 풀어 놓으시겠다니, 이거 또 석기님과 저는 글로 얽힐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다만, 칼럼형식으로 글이 올라오는건가요? 
칼럼이라는 이놈의 부담감은 우수회원이 되고서야 느껴지니, 하하하 2008-11-30
14:52:01
  

 

병장 김민규 
  우수회원. 크크크 
잘 읽었습니다. 더불어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까지. 단기기억은 별론데 쓸데없이 장기기억만 좋아서, 한 번 지나갔던 자리를 지나간다던가 하는 사소한 실마리만 있어도 그 때의 정황과 스토리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건 시험공부할 때도 못 써먹는건데, 쳇. 
기대할게요. 석기님의 글이라면 남은 이곳 생활을 알차게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오래 나가있다 왔더니 손이 얼어서 오타내고 고치고 하는게 번거롭군요. 흑흑 2008-11-30
15:07:40
  

 

병장 김선익 
  저랑 비슷한 버릇이 있으시네요, 아이 좋아라. 
저도 모든 과거는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명이거든요. 
과거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보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랑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데, 
그 때 저는 말빨이 딸려 모든 그의 말에 수긍하고야 말았죠. 
석기님의 글이 필요해요(웃음) 2008-12-01
00:09:15
  

 

상병 이동열 
  저도 과거지향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뭔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드니 새삼 석기님의 글에 기대고 싶어지네요(흐흐)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2008-12-12
11:0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