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능아의 심경고백>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날개> -이상-




   위에 적힌 <날개>의 구절은 아마도 입대 전날 어느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글일 겁니다. 그 당시 '군입대' 라는 나름대로 일종의 극한상황에 맞닥뜨린 저는 아마도 가장 속된 의미에서 '쿨'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상 특유의 냉소와 함께 정들었던 사회에 아주 쿨 하게 굿바이를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여느 때처럼 아침에 나서며 "학교 다녀올께요" 라고 외치듯, 아마도 저는 애써 그런 기분으로 굿바이를 외치고 싶었을 겁니다. 


   입대 당일 같이 오신다던 부모님을 끝내 뿌리치고 친구와 단 둘이서 논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부모님은 틀림없이 눈물을 보이시고 말 것이기에, 그러면 나 또한 분명 눈에 뜨겁고 희뿌연 무언가가 어른거릴 것이 뻔하기에. 그것은 호기롭게 작별을 고한 내가 흘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을 겁니다. 논산 연병장에서 마지막으로 친구와 저는 애써 어색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래 차라리 웃자. 넉살좋게 웃어보이자. 떠나온 사회를 향해, 그리고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무엇을' 향해. 쿨하게 굿바이.


   그러나 단지 그 순진하고 무모한 오기만으로 감당하기에 2년간의 생활은 얼마나 신산스러운 것이었는지요. 아니, 신산함을 넘어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는지요. 우선 고백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동안 얼마나 상처를 입어왔고, 내가 입은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상처를 남에게 주었는가를 말입니다. 그동안 굳게 믿고 배우며 따라온 황금률들이 땅바닥에 뒹구는 삐라만도 못한 나락으로 추락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앉았습니다. 나의 육체가 내 의지를 배반하고, 어느새 그토록 혐오했던 제스처를 매우 당연한 듯이 취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얼마나 컸던지요. 끊어진 테이프에서 샘솟는 피의 공포와 아프게 벌어진 상채기의 고통은 "머지않아 완치될"것 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나락의 한가운데서 정신없이 허우적대고 있을 때 아마도 이곳을 만났나 봅니다. 지적 미숙아인 저에게 이곳은 분명 별천지와 다름없었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단지 쓰디쓴 독백으로 애써 삼켜야 했던, 혹은 부질없는 방백으로 흩어졌던 무수한 것들이 이곳에서 쏟아지고 이야기되고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 생전처음 마천루의 숲에 들어선 촌뜨기마냥, 놀라운 경이에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이곳을 배회했나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서성대고 있었나봅니다.      

              
   이제 그 철없는 촌뜨기에게도 여러분께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새삼스레 2년 전 가슴팍 한구석에 새겨 넣었던, 갖가지 풍파에 닳고 닳아 이제는 자취마저 희미해진 <날개>의 글귀를 더듬어 봅니다. 오래 전 각인했던 가슴 속 버려진 빗돌 한 조각으로부터, 잊은 줄만 알았던 그 문장을 검은 기억으로 미약하게나마 탁본해봅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귀환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어떤 작별을, 다시 어떠한 굿바이를 외쳐야 하는 것일까요. 보잘 것 없는 제가 여러분께 마지막으로나마 남길 수 있는 흔적은 고작해야 어느 저능아의 두서없는 심경고백 정도가 아닐까요.


    글의 제목에 써넣은 <어느 저능아의 심경고백>이란 문구는 원래 김윤식 선생의 고별강연에 붙어있던 부제입니다. 정직한 성실함과 쉼 없는 열정으로 마지막 땀방울까지 '문학함'으로 연소시켰던 노교수. 그 '위대한 저능아'의 담담한 소회를 들으며,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문학을 했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수줍은 고백에 우리는 감동과 찬사를 보낼 수밖엔 없을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었다고. 
문학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예언자가 없더라도 이제는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 있을 것도 같다고



   그러나 어설픈 눌변의 더듬거림으로 책임질 수 없는 장광설만을 늘어놓았던 저는 단지 '진짜 저능아'일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거창한 작별인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한줄기 의례적인 격려를 기대하는 것마저 사치일 뿐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너그러운 여러분이 부디 허락해 주신다면, 지나간 유행가 가락처럼 촌스럽고 통속적인 다음과 같은 몇 줄의 경황없는 중얼거림으로 여러분에게 올리는 마지막 굿바이를 대신해볼까 합니다.  



당신들이 
그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이제는 끊어진 테이프 사이로 배어나온 피도
아프게 벌어진 상채기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렇게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하며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모두,
다시 만날 때까지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