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과거와의 재회 - 『식스티나인』, 무라카미 류 
 
 
 
 
어느 과거와의 재회 - 『식스티나인』, 무라카미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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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다른 이유 없이 소중해지는 책이 있다. 가령 Mr. 그람의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와 그에 대한 평전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대학가에서 많이 읽히는 책 중 하나다)도 나에게 그런 책이다. 사실 Mr. 그람이야, 대학 2학년 때 여러모로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는 도무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소중한 이유는, 대학 1년 때 사귄, 나이 차가 좀 나는 어느 여선배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이 책을 추천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소중해지는 책은 여느 책들과는 다르게 읽게 된다. 그 책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을 시도해보려 해도 늘 실패한다. 왜냐하면, 두 번을 읽건 세 번을 읽건 그 책을 소중하게 했던 추억들과 얽혀 버리고, 그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버리게 된다. 이내 냉정을 잃고 여러 추억들을 좇아가다 보면 멀리 동이 터오고, 그제서야 몰려오는 피로에 그 책을 읽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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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휴가 나갔을 때 일이다. 마침 스케줄이 없어 집에서 삼국지10을 플레이하며 천하통일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을 때, 한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강연 차 용인에 왔는데, 온 김에 만나고 가려 한다고. 오는 길을 일러주고, 내가 조종하는 손책의 원수 유표의 목을 베어버린 후 츄리닝 차림으로 집 밖으로 나갔다.
  이 녀석과의 인연도 참 질기다. 2000년, 중3이던 이 녀석이 한 손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끼고 하얗게 염색을 물들인 채, 이준기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을 때 사무실의 여자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서야 '제대로 된' 남자가 나타났다는 둥, 하면서. 그러나 나 역시 고1때 『짜라투스트라』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따위를 끼고다니며 이해할 수 없는 낱말들 위로 느껴지는 주위의 경탄의 시선들을 즐기고 했기 때문에, 이 녀석이 들고 다닌 『짜라투스트라』는 짜가임을 알고 있었다.
  무슨 얼어죽을 강연이야. 뭐, 우리가 맨날 하던거죠. 이 녀석은 우리가 고교시절에 저질렀던 일들을 아직 붙잡고 있다. 때문에 그 바닥에서 나름의 입지를 굳힌 것 같다. 뭐, 열심히 해봐라. 제대하면 도와줄게.
  이 녀석이 두 번째로 명동에 있던 우리 사무실에 등장했을 때, 이번에는 스머프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고2였던 나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증명된 스머프를 아직도 읽느냐며 구박했고, 그 후배는 다시 니체로 아이템을 바꿨다. 헤겔은 어떠냐 했더니, 너무 묵직해보인다며 그건 싫다고 했다.
  아무튼 이 녀석이다. 나에게 류를 권한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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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의 『69』에서도 나는 냉정을 잃어버리고 밤을 새어버렸다. 뭔가 나름의 관점으로 분석을 해보면 재밌는 글이 나올 법도 한데, 도통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항복해버렸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쩌면, 독서후기라고 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글이 아니라, 읽고 난 뒤 연상된 추억의 진부한 나열이니까, 일종의 실패한 글이다. 그래도 결국 이것도 내 인생의 일부라면 뭐, 굳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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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모 방송국 생방송에 출연했을 때,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X장. 어쩌다가 여기까지 끌려와버렸냐"했다.
  2000년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두발자유화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지방과 학교에 따라 편차가 좀 있기는 했지만, 결국 교육부가 "두발규정 재개정하라"는 공문을 발표할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사기성이 농후한 책략에 말려든 것이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몰아붙였다는 것에 우리는 환호했었다.
  그 단체에서 어쩌다가 대표까지 덥석 맡아버렸을 때 나는 새로 만난 여자친구 L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69』의 야쟈키에게 '사세보의 레이디 제인'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학연의 이영애'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를 먼저 좋아했던 친구 K, 후배 Y, 선배 G 등에게는 미안했지만, 뭐 어떡해. 결국 이렇게 되버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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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야쟈키가 '레이디 제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리게이트를 설치한 것처럼, 나도 비슷하게, N형처럼 되고 싶어서, 모임의 리더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사춘기시절부터 말더듬 증세가 와, 사람을 대하는 데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했지만 의지와 노력으로 이를 극복해내었고, 여자들 앞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을만큼 훈련이 되었다.
  N형은, 2000년 새로 만들어진 우리 모임의, 전신 모임의 대표였다. '학복회'라고 알려진 모임 최후의 리더였던 N형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여자애들의 시선을 장악하였다. 99년, 그저 학교가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가입한 학복회에서 내가 좋아한 여자아이는 M양이었다. 정말 하얀 얼굴에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 아이였다. 나보다 한 학년 낮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고, 토론모임이나 독서모임에서는 늘 똑부러지게 말을 해 선배들의 주목을 받았다. 얼굴 여기저기 여드름이 난 것을 부끄러워하고, 토론할 때마다 말을 버벅거리는 나와는 비교 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단지 M을 보기 위해 모임에 나갔다.
  2000년 학복회가 망하고 새로운 모임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을 때, 나는 잠적을 한 상태였다. 잠적이유는, M양에게 차여서. M양은, N형을 좋아하냐는 내 질문조차도 부인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 거짓말이 더 화가 났다. 그리고 새로운 모임에 참여했을 때, 나는 뭔가 변해 있었다.
  이전까지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했던 반면, 싸가디가 없어졌고, 여드름이 대충 치료되고, 키가 3cm 더 컸으며,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고, 학복회의 권장 도서였던 "철학과 굴뚝청소부"와 "학교를 넘어서", "페다고지", "학교는 죽었다", "근대사회사상사"를 독파했다(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읽었다)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에게 뭔가 주장을 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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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은 우리에게 해방의 통로였다. 어떠한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극도로 억압적이고 기계적이고 획일적이고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권위적인, 공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쳐야 하든 학생들은 명동에 있던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서 저질러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인권 침해이고, 헌법 위반이며, 교육적으로도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갖고,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에 찍소리도 못하는 순응적인 인간을 양산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학교에 대한 비판은, 굳이 어려운 사상가들을 빌려올 필요도 없었다. 어설프게 푸코나, 아니면 재생산이론들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냥 헌법이나 세계인권선언문만 읽어도 충분했다. 
  모임이 2000년 갑작스럽게 커지면서, 어른들은 우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임 회원인 것이 알려지면 징계나, 자퇴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나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회원 명단을 제출하라며 두들겨 맞고, 징계를 당하였으며, 대부분은 자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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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M에게 차인 후 C와 잠깐 사귀다가 L에게 갔다. C는 우리 모임의 살림역으로, 사무국장 격이었다. C와 사귀고 며칠 안 가 허영덩어리의 모습에 나는 질려버렸다. 내 자신이 허영심이 많아 어릴적부터 고치려고 노력하는데, 나와 비슷한 혹은 더 심한 모습을 보이니 순식간에 사랑이 식어버렸다. 나와 관계가 안 좋아지자, 헤어지면 모임 공금 들고 도망가겠다고 말했다는 소문을 듣고, 안전하게 헤어지기 위해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 다음으로, 모임 회원들 몰래 만나게 된 것이 L이다. L은 키가 조금 작았지만, 특유의 야릇한 분위기로 이미 모임 남학생들을 휘어잡은 상태. 나와 친한 후배 Y가 석 달간 선물 공세 등을 퍼부으며 작업을 걸었지만 실패하였고, 나도 사실 마음이 있었지만 Y가 "L없이는 못살겠다"며 소주 사들고 우리 집 앞에 찾아와 펑펑 우는 통에, 포기한 상황이었다.
  '학교를 싫어할 뿐 아니라 학교에 저항하는' 우리 모임원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청소년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모두 하려는 심술보를 들고 있었다.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더군다나 회원 가입을 하면 학습하는 커리큘럼 앞부분에는 만 15세 이상이 되면 지적·도덕적 판단 능력이 성인 수준으로 도달한다(즉, '전제'로서의 능력은 완비되고 '경험'이 필요해지는 시기)는 발달심리학 기본편을 마스터한 상태. 우리는 지금은 없어진 '애다와'라는 술집을 애용했다. 이름부터 우리를 유혹했다. 애 다와, 라니.
  애다와에서 술을 마시던 나는 너무 취한 나머지, 내 옆에 있는 L의 손을 살짝 잡았다. L도 내 손을 쥐길래, 만사 Okey~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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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과도 몇 달 후에 헤어졌다. L은 『69』의 레이디 제인, 마츠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  마츠이 카즈코는 상냥하고, 예쁘고, 머리 좋고,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이다. 〈냉혈〉에서 묘사된 세계가 평화로운 생활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잔복해 있다고 해도, 또 그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천사가 한 말, "난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어"라는 것이다.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겨울 바다를 뒤로 했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1969년은 지나갔다.                                        〕  p. 261


그렇게 하여 나의 2001년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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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네스티에서 청소년인권 관련 강연이 있다며 용인에 왔던 후배는, 그날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그날 술을 마시고,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부정한 세상에 저항한다는 사람들, 너무 금욕적이지 않아?"
  남자들끼리 있다보니 성(姓) 이야기가 나와서 신나게 경험담을 늘어놓는데, 문득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작가의 말, p.269

  나에게 99∼01년이,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02∼03년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었음에도 더 재미있게 기억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축제였다.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4-09 17:19) 

  
 
 
 
상병 송희석 (2006/03/08 13:59:39)

이거 이은님이 대충 청소년시기에 어디서 활동했는지 감이 아주 조끔 오네요! 
부럽다! 나는 오로지 당구장과 오락실과 유흥업소와 국회도서관에만 있었는데!    
 
 
 병장 김동환 (2006/03/08 14:22:36)

어머. 이제보니 이은님은 인기남. 
저의 그을음으로 가득한 불완전연소 성장기는 별 재미가 없는데. 흑흑.    
 
 
병장 주영준 (2006/03/08 14:37:00)

나이 차가 좀 나는 어느 여선배, 라 함은 8년 연상의 그분이군요. 
(사보타쥬의 명인에겐 사보타쥬로 응수. 가 본인의 노선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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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쪽 탈학교 모임(내지는 고운 모임)이라. 또 저널리스트 라인 돌리기에 나서봐야 하나 이거.    
 
 
병장 한상원 (2006/03/08 15:42:11)

이은님 멋져요. 팬클럽 조직해야겠다. 영준씨가 조직할 안티들이랑 모여서 축제를 여는거에요! 
팬클럽 초대회장은 병장 김강록. 

류 작품은 아직 하나도 안읽었어요. 못읽었어요가 맞을래나. 주변에 추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심지어 바나나도 한권 정도는 읽었는데. 69은 OCN에서 영화로 봤대죠. 어쨌든 영준씨의 추천으로 <투명에 가까운 블루(?)>란 책을 구해서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트레인스포팅 책은 절판이래요. 흑. 영화를 구해서 봐야하나.    
 
 
병장 정준화 (2006/03/08 17:52:04)

부럽네요. (중고등학생들의 그런 모임들이 있다는 건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 알게 되었죠. )    
 
 
병장 박형주 (2006/03/08 20:14:34)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 허덕이다 쉴겸 들어온 곳에서 이런 글을 보면 그냥 지대로 좌절이죠.    
 
 
병장 김형진 (2006/03/09 08:55:18)

형주님에 올인    
 
 
병장 김대현 (2006/03/09 09:30:40)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정말이지 이은님의 글빨은 제 편견에 의거해 책마을 최고예요. 이은님 글 좋아합니다.    
 
 
병장 주영준 (2006/03/09 09:47:55)

사실 이은씨가 얼굴도 참 고운데.    
 
 
병장 김태경 (2006/03/17 14:59:58)

이런글 읽으면 중고등학교때 뭐하고 살았나 싶네요. 우하. 
지금 실은 회원특집에 질문하려고 이은님 글을 찾아서 읽고있는데, 늦게 찾아오셔서 글이 몇개 없군요!    
 
 
상병 조성환 (2006/03/20 06:31:57)

예전에 다튜멘터리 형식의 단편영화에서 본것같은데... 
가물가물하네요...    
 
 
상병 곽지훈 (2006/04/18 08:14:10)

어머, 인기남-(웃음) 

글이 120% 흡수되네요. 

그것은 축제였다.    
 
 
상병 문창현 (2006/04/29 09:13:38)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