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 어긋나다.  
병장 차종기  [Homepage]  2009-05-29 09:36:07, 조회: 258, 추천:1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들지도..




1.
포장마차 안의 분위기는 애석한 들뜸이 자리 잡고 있다. 삶의 무게 때문인지 일상의 고달픔 때문인지 다들 축 늘어진 어깨와 구부러진 등을 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 현수도 있다. 이제 막 자리 잡은 그는 어묵 탕과 소주 한 병을 시키고는 잔과 수저를 두 세트 주문한다. 제법 크기가 큰 포장마차에는 주인아주머니 아들로 보이는 녀석이 일을 돕고 있다. 그가 소주 한 병과 수저 두 세트와 잔 두 개를 파란 테이블 위에 두고 갔다. 현수는 소주병을 거꾸로 들어 가볍게 흔들고는 자신의 잔을 채운다. 그리고 털어버린다. 인상을 찌푸리고 입ダ 다시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긴 생머리가 찰랑 거린다. 

식어버린 어묵 탕에 수저를 꽂아둔 채로 사랑이가 이야기한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파란 테이블을 쓸어내린다. 
- 그래서 있잖아. 내가 헤어지자 그랬어. 쿨하게.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 올리며 동의를 표하는 눈길을 현수에게 건넨다.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현수는 그저 쓴웃음을 짓는다.
- 아마,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지 않았나봐. 헤어지니까, 그걸로 끝이야. 끝인데 마음이 아파. 
술에 취했는지 아까부터 계속 머리를 쓸어 올린다. 현수가 비워진 그녀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준다. 채워지는 술잔을 바라보던 사랑이가 입을 다시 뗀다.
- 예전이 좋았는데. 우리 그때 좋았잖아. 매일매일 만나서 놀고,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둘 분명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테이블에 놓인 빈 병을 치워가는 종업원 녀석 때문에 사랑이의 말이 잠시 멈췄다. 현수는 자신의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운다. 사랑이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현수를 바라본다. 
- 우리 사랑하는 사이 맞아. 다른 사람을 만나도 서로 사랑하고, 꼭 마음에 가득 차 있을 필요는 없고, 구석으로 밀려나도 서운해 하지 않고, 구속, 집착. 이런 거 생각하지도 않는 사이잖아. 대부분의 연인들이 구속이나 집착 때문에 헤어져.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랑이 식어버리는 거야. 우린 그런 거 안 하니까, 안 헤어지겠다. 
현수가 채워준 술잔을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고는 꼴깍 삼킨다. 현수도 아까 채운 술잔을 따라 비운다. 그리곤 술을 삼키며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이야, 그게. 서로 사랑하지만 온전히 너를 가질 수 없는 사이. 네가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데 그 이야기를 군소리 없이 들어줘야하는 사이. 오늘처럼 네가 그 사람과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사이. 우리는 그런 사이야.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이.


2.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랑이를 겨우겨우 부축해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그녀의 부모님이 나오고, 그녀의 방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이 모든 것을 현수 혼자서 다 감당했다. 그녀의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물을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 인사를 하고 나온다. 현수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감정의 파편들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녀가 조각낸 파편들이 현수의 심장에 박혀 고통을 주고 있었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하늘을 원망스레 올려다보지만 맑디맑은 밤하늘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별들만 들어 차 있을 뿐이다. 우리도 저렇게 빛나던 때가 있었는데. 현수가 그립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다.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으슬으슬한 한기에 몸을 웅크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3.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감촉이 전해져 온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과 함께. 흩날리는 벚꽃 잎이 그들 사이로 쏟아진다. 봄 햇살도 기분 좋은 따뜻함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다. 여기저기 들뜬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사진 찍는 사람들도 꽤나 보인다. 이곳만 본다면, 정말 세상의 슬픈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 마주 잡은 손에 약간의 땀이 젖어온다. 현수는 손을 잠시 떼고 자신의 티셔츠에 손바닥을 슥슥 문지르고는 다시 잡는다. 사랑이가 현수를 보며 웃는다.
- 우리 헤어지지말자.

꿈을 꾼 것 같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난 사랑이가 원인인 듯하다. 상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상체만 일으킨 채로 휴대폰을 집어 메시지를 확인하고 머리를 긁적인다. 속이 적잖게 쓰리고 두통도 약간 있었다. 수업은 오후에 두 시간 있으니까, 밥을 먹고 샤워를 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래, 괜찮겠지, 전부. 쓰린 속도, 마음이 아릿한  것도. 현수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헝클어진 마음을 다 잡는다.


4.
사랑이는 아침부터 재촉하는 엄마 때문에 짜증이 났다. 무리하게 마신 술 때문에 속도 쓰리고 머리도 아픈데, 강의시간 늦는다며 닦달하는 엄마를 뿌리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다. 그깟 강의 안 들으면 어때. 답답한 이불 속에서 어제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녀가 했던 말들, 행동들. 그리고 조각난 기억들. 그리고 엄마의 말.
- 어제 현수가 너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계집애야. 술을 얼마나 퍼 마셨길래 제 발로 집까지 못 걸어오니?
자신을 부축하는 현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괜한 오해를 살까봐 걱정이 된다. 그 사람이랑 헤어진 것 때문에 술을 마신게 아닌데.


5. 
라면을 끓여 먹고 샤워를 마친 현수는 오전에 강의가 있는 사랑이가 학교 제때 갔는지 걱정이 되어 휴대폰을 집어 든다. 여전히 단축번호 1번에 저장되어 있는 사랑이에게 쉽게 걸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1번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동안 젖어있던 머리가 다 말라 버렸다. 현수는 1번을 꾸욱 누른다. 그리곤 자신의 마음도 꾸욱 눌러 넣는다. 20초 쯤 지나고 나서야 사랑이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속은 어때? 괜찮아? 학교는 제때 간 거야? 어머님께 혼은 안 났어? 머리도 아프지? 너 술 많이 마시면 정직해지잖아. 속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현수는 사랑이의 목소리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횡설수설 한다. 억지로 눌러 담았던 마음이 다시 넘치려고 한다. 휴대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한참동안 들리지 않는다. 현수는 여보세요? 라고 다시 한 번 확인 한다. 
- 미안 어젠 내가 너무 마셨지. 너한테 실수도 한 것 같고…. 나 때문에 힘들었지? 
현수의 마음이 넘어진다. 힘들다. 그래, 너 때문에 힘들어. 널 업었을 때 보다, 축 처진 널 한 쪽 팔로 부축할 때보다 더 힘들어. 우린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이니까. 우린 구석에 처 박아놓은 쿨한 사이니까. 다시 한 번 마음을 꾸욱 눌러 담는다. 몇 번을 다시 넘치려고 하는 것을 겨우겨우 억지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넘어졌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 미안하면 오늘 저녁은 네가 사면되겠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밥 먹자. 밥.


6.
사랑이는 스파게티를 현수는 돈가스를 주문하고는 말없이 물만 홀짝이고 있다. 어색한 침묵을 참을 수 없던 사랑이가 입을 먼저 땐다.
- 여기, 돈가스 맛있는데. 어떻게 알고 주문한 거야? 내가 언제 말해줬던가? 
헤픈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를 보며 현수도 피식 웃고는 대답한다.
- 다른 테이블 봐봐. 온통 돈가스만 먹잖아. 그래서 나도 주문했어. 그런데 넌 왜 스파게티 같은 걸  주문한 거야? 어제 술 많이 마셔서 속도 안 좋을 텐데. 괜히 이런데 와서는 느끼한 것만 먹고.
- 야야.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원래 술 먹고 나서는 느끼한 걸 먹어줘야 하는 거야. 그런 말 하는 너도 느끼한 돈가스 먹잖아.
- 스파게티 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나 술도 별로 안마셨어. 네가 다 마셨지.
티격태격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두 사람 마음엔 새카만 침전물이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어둡고 무거웠다. 그걸 감추려는 듯 더욱 밝게 행동하고 있었다.
금방 나온 따뜻한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며 그녀가 제안한다.
- 우리 술 한 잔 하자. 어젠 소주 마셨으니까 오늘은 맥주 마시자. 내가 낼게.
현수는 그 제안이 내키지는 않지만 어차피 반대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커다란 돈가스 조각을 작게 잘라 그녀에게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민 돈가스를 받아 먹고는 적당히 마실 거라고, 안심하라고 말하며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다시 내민다. 현수는 잠시 쳐다보다가 받아먹고는 알았다며 웃는다.
- 그러니까, 밥은 네가 사는 거야.
사랑이가 꼭꼭 씹어 삼키는 현수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7.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근처에 있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북적대지 않고 적당히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딸랑이는 작은 종소리가 맘에 들었다. 구석 창가 쪽 자리에 마주보고 앉은 둘은 간단한 과일과 맥주를 시키고는 영화가 재미없었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특히나 남자와 여자가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이 너무 뻔했다고. 안주와 술이 도착하자 갑자기 둘의 대화는 끊어졌고, 자연스레 창밖의 풍경에 눈이 옮겨 갔다. 거리에는 어지러운 네온사인의 조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두 사람과는 다른 세계 있는 것 같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밖의 공기와는 차단된 채 적당히 조용한 가게 안에서 둘은 각자의 외로움에 빠져 술을 홀짝거렸다. 술이 들어 갈수록 둘의 외로움은 점점 분리되어 커져만 가는 기분이어서 함께 있어도 서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사이였다. 
갑자기 그녀가 가득 채워진 술잔을 힘들게 비워냈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뭐야. 밖은 저렇게 화려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어두컴컴한 거야.
- 글쎄, 가게 조명이 이래서 그런 건 아닐까.
현수는 삼킨 말 대신 그렇게 말했다. 우린 안 되는 걸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은 착각일까. 그의 눈빛이 혼탁해지고 있었다. 사랑이는 그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비워진 잔을 다시 채우다 하얀 거품이 넘치고 말았다. 테이블에 넘친 하얀 거품이 퍼져간다. 넘친 거품을 보며 사랑이는 자신의 마음을 생각한다. 자신의 넘쳐버린 마음. 이미 오래 전부터 넘쳤었던 현수에 대한 마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무섭고 두려워서 현수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그래서 그를 묶어 둔 것이다. 자신의 옆자리에 묶어 두기 위해 핑계를 대고 잡아 두는 것이다. 다른 남자를 만난 적도 있었다.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의 현수 같은 모습을 사랑했었다. 참 못난 생각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현수를 묶어 두고 싶었다. 테이블 위에 고인 맥주를 두 사람 모두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테이블을 한 번 닦아주고는 다시 사라졌다. 거품이 사그라진 잔에 반도 안 되는 맥주가 남아 있었다.


8.
사랑이는 학교생활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강의 시간에도 혼자였고, 밥을 먹을 때도 혼자였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명목 하에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모임에서도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술을 홀짝 거리고 있었다. 현수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사실 사랑이는 인기가 좋았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멀대같은 남자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무관심한 듯 그냥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별 말없이 거절하는 그녀가, 외톨이를 자청하는 그녀가 참 신기해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혼자서 밥 먹는 그녀의 옆자리에 현수가 앉았다. 그녀는 처음엔 조금 경계하더니 이내 관심을 거두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현수도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내 밥을 먹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밥을 반이나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수는 혼자 남아 자신의 몫을 묵묵히 다 먹었다. 그녀는 식기 반납을 하고 나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현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떠났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밥만 먹었다. 언제나 먼저 일어나는 건 사랑이었고, 남겨지는 건 현수였다. 그러다 한 날은 현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랑이는 밥 위에 수저만 얹어 놓은 채 손도 대지 않고 현수를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터덜터덜 현수가 힘없이 나타났다. 다 식어버린 밥을 그제야 뜨기 시작했고, 현수는 그녀를 발견하곤 잠시 놀라더니 이내 자신의 식사를 받아와 언제나처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는 그녀의 밥이 다 식어버린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사랑이가 밥알을 다 삼키고 수저를 내려놓으며 현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뭐라고? 나한테 말한 거야?
-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지금 식당에 우리 둘 밖에 없어.
현수는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 시험이 늦어져서. 그러는 넌 왜 이 시간에 밥을 먹고 있어?
- 나도 일이 있어서 늦은 점심을 먹는 거지. 너 시험 못 쳤구나. 딱 못 친 꼴이네.
- 응. 중요한 과목인데 망쳐버렸어.
머리를 마구 헝크리는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슬며시 웃었다.
- 어? 너 웃었지. 너도 웃을 줄 아는구나.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의 식기를 들고 일어났다. 현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밥을 다시 먹었다. 그녀는 식기를 반납하고 다시 현수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 뭐야. 오늘은 먼저 안 가는 거야? 웬일이래.
- 오늘 강의가 취소 됐거든. 할 일도 없고, 너 혼자 밥 먹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너 시험도 망쳐서 기분이 꿀꿀할 거 같아서 같이 있어 주려는 건데, 싫으면 뭐.
다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현수가 붙잡아 세운다.
- 앉아. 조금만 기다려. 금방 먹을게.
오늘도 자신의 몫을 깨끗이 다 비운 그가 이번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 가자. 기다려줬으니까, 후식은 내가 살게.


9.
둘은 멍하게 술잔만 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가게 안도 어느새 사람들이 꽤나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테이블이 그와 그녀였다. 다들 웃고 떠들기 바쁜데, 그 둘 주변의 공기만 무겁게 내려 앉아 있는 듯 했다.
-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해?
사랑이가 호흡이 힘든 것처럼 어렵게 말한다. 현수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흐릿했던 눈동자가 돌아온다.
-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 안나. 
- 그래? 나는 다 기억하는데. 너는 하얀 바탕에 까만 줄이 그어져 있는 셔츠를 입었구, 색이 진한 청바지에 컨버스화를 신고 있었어. 머리가 너무 길어서 여자애 같았는데. 남자애인 걸 보고 조금 놀랐었지. 후후. 그날이 아마 입학식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넌 여름에도 절대 짧은 바지를 입지 않았어. 신발은 항상 컨버스화였고, 가끔 모자를 쓰고 오기도 했어. 넌 참 특이했던 사람이었어. 아무 말도 없이 내 옆에서 밥을 먹다가 내가 먼저 일어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 내가 가버려도 혼자서 꿋꿋하게 밥을 다 먹었어. 그러다가 하루는 네가 안 오는 거야. 나는 또 식당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네가 너무 안오는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데, 그 날은 진짜 혼자서는 밥을 못 먹겠더라. 그래서 기다렸어. 네가 올 때까지 밥은 식어서 딱딱해지고 국은 식어서 밍밍해졌는데 그제야 네가 나타났어. 터덜터덜. 힘없는 모습으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른 숟가락을 들어 먹는 척을 했어. 네가 날 보더니 내 옆자리에 와서 밥을 먹더라. 언제나처럼 말야. 우리 그 날부터 쭈욱 같이 다녔었잖아.
그녀가 이야기를 끝내고 잔에 차 있던 반도 안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다. 현수가 과일 중에 키위를 포크로 찍어 그녀 앞에 내민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받아먹고는 배시시 웃는다. 
- 나는 말야. 널 처음 본 날이 입학식이 아니었어. 그 날은 맞는데. 입학식 전이었어. 우리 나중에, 많이 친해지고 나서 같은 버스 타고 다니는 걸 알고는 많이 놀랐잖아. 사실 나 그전부터 우리가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어. 너는 항상 중간 자리에 앉았고, 나는 항상 그 뒷자리에 앉았지. 우리 타는 버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적했잖아. 너는 버스만 타면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 누가 타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그런 너를 지나쳐서 너의 뒷자리에 앉았지. 그리고 나도 봤어. 네가 보던 곳을. 
- 뭐야. 기억 안 난다더니. 다 기억하고 있었네. 그나저나 의외네. 네가 날 오랫동안 지켜봤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단지 특이한 애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특이한 애가 맞구나. 헤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현수도 같이 덩달아 웃었다. 
- 네 옆자리에 밥을 먹을 때, 항상 말을 걸고 싶었어. 네가 항상 먼저 일어날 때, 항상 물어보고 싶었어. 왜 그것밖에 안 먹냐고.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고 잔소리도 해주고 싶었지.
- 그 잔소리. 다 했잖아. 그 날 이후에 나랑 밥 먹을 때 마다.
- 그래. 나는 기다렸어. 네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네가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린 거야. 사실 너 꽤나 인기가 좋았잖아. 너 차버린 남자애들도 꽤나 된다구. 걔네랑 나랑 다른 게 뭔지 알아?
- 글쎄. 걔네들 보다 네가 더 잘생긴 거?
- 아니야. 걔네들은 기다릴 줄을 몰랐던 거야. 닫힌 문을 억지로 열려다가 잘 안되니까, 포기하고 가버린 거지. 그런데 나는 기다렸어. 네 문이 열릴 때까지. 그러다가 어느 날 네가 내게 말을 걸었지. 조금 까칠하긴 했지만, 그런 대로 괜찮았어. 우리 그날 아이스크림도 먹고 저녁도 같이 먹었잖아. 나랑 같이 있을 때 보여준 네 웃음이 다른 곳에 있을 때에 너의 웃음과는 달랐거든.
- 즐거웠어. 너랑 함께 있으면 즐거웠어. 그래서 웃음이 났어. 그뿐이야.
- 그래. 그러다가, 우리 너무 잘 지내다가 갑자기 너는 딴 남자를 만났어. 그리곤 나에게 말했지. 우리 쿨한 사이로 남자. 헤어짐 같은 것도 없고, 서로 집착하지도 않는 그런 사이. 그런 말을 내뱉고는 넌 그 놈에게로 가버렸어. 나는 네가 날 사랑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너에게 물었지. 날 사랑했던 게 아니냐고. 너는 대답했어. 날 사랑한다고, 지금도 사랑한다고.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게 꼭 끝이라는 것과 함께 붙어 다닌다며 우린 다른 사랑을 하자고 했지. 나도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니까 그러자고 했지. 서로 다른 사람 만나면서도 서로를 잊지 말고 사랑하는 그런 사이로 남자 했지.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 만나려고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 자꾸 다른 사람 얼굴이 네 얼굴로 보이고, 다른 목소리가 네 목소리로 들리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너에게 더 집착할 거 같아서 그만뒀지. 그리고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어. 네 옆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밥만 먹던 그때처럼.
말을 마치고 가득 차 있던 잔을 단숨에 비운다. 그녀도 따라서 잔을 비운다. 술기운이 이제 오르는 듯 그녀의 긴 머리칼이 테이블에 닿고,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고 있다.
- 사람은 너무 잘 변해. 더운 여름날의 우유보다 상하기가 더 쉬워.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다가도 금방 싫증내고 잊어버리는 게 사람이야. 나는 그게 너무 싫었던 거고, 또 무서웠던 거야. 지금도 무서워. 사람과 사람들 사이는 이상해서 한 번 틀어져 생긴 틈은 웬만해서는 잘 메워지지 않아. 너와는 그런 틈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난거야. 한 쪽으로만 소비되는 내 마음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려고. 그런데 나도 네가 느낀 것을 느껴버린 거야. 그 사람을 만나도 널 만나는 것 같고,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면 네가 날 부르는 것만 같았지. 그래서 그 사람과 헤어졌을 때 너랑 헤어진 것만 같았어.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지만, 너무너무 아팠어. 널 밀어 내는 것만 같아서.
흘러내린 머리칼을 턱을 괸 채 쓸어 넘기며 현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주위의 분위기와는 분리되어 독립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고, 둘은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사랑이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거두려다 포크를 떨어뜨린다.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자,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새 포크로 바꿔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 현수는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 너 나 아직도 사랑하니?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뜨며 살며시 되받는다.
- 아직도 라니. 아직까지 널 사랑하고 있어. 
이번엔 현수가 눈을 감는다. 감은 눈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린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그를 사랑이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점점 더 취기가 오르는 듯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를 안고 싶다. 그에게 안기고 싶다. 지금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그런 감정들을 숨기지 못해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상했다. 사랑의 감정이 벅차올라 흐르는 눈물이, 그리고 그런 감정을 두려워해야 하는 자신이. 훌쩍이는 그녀를 감지한 그는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르며 눈물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그 틈새로 흘러내린 눈물을 그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눈물의 의미를 그는 알지 못했다. 왜 우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그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한심함과 사랑의 감정과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 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떨구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안아주고 싶다. 등을 다독여 주며 위로해 주고만 싶다. 다시금 피어오르는 그녀에 대한 감정에 현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낄 뿐. 흐느낌이 잦아들자 빨개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 우리 언제까지 이래야 되니. 이게 네가 말한 쿨한 사랑이니.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전혀 쿨하지 않아.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네 옆자리에서 언제까지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건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 너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 분명. 그러면서도 잔인하게 다른 사람을 만났고, 날 기다리게 했어.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든 일인 걸 이제 알겠지? 그런데도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나는 아니야. 
현수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놔두고 가려고 했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녀를 등진 적이 없던 그가 먼저 일어난 것이다. 사랑이는 그런 현수가 무서웠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끔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흐를 것만 같은데 꾹 참았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그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그런 그녀의 다짐을 허물 듯 그가 차갑게 말했다. 가려는 그를 붙잡는다.   
- 가지마. 가지마. 가면 안 돼.
그의 등이 멈춘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돌아 그녀를 향한다.
- 진작 붙잡아 주지. 왜 이제 붙잡아 주는 거야. 우리 이제 이러지 말고, 그냥 사랑하자.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우리 둘만 생각하자. 우리 행복할 거야. 분명 행복할 거야. 내가 장담할게.
현수가 그녀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 주고 꼬옥 안아준다. 사랑이는 그의 품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버린다. 그 곳의 사람들의 시선이 현수와 사랑에게로 모이더니 수군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있는 둘을 보더니 이내 관심이 사라진 듯 자신들의 이야기에 빠진다. 울음이 잦아든 사랑이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힘들게 이야기한다.
- 미안해.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네가 너무 무섭고, 널 사랑하는 내가 너무 무서워서. 널 너무 사랑하는데, 상처 받을까봐 겁이 나서… 그래서 그랬어. 너 아픈 건 생각하지도 않고 나 아플까봐 일부러 그랬어. 미안해.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빨개진 눈가를 손으로 연신 비비며 말하는 그녀를 현수는 다시 한 번 안아주고는 말한다.
- 괜찮아. 다 괜찮아. 우리 서로 사랑해도 헤어짐 같은 건 없을 거야. 우리 힘들었던 만큼 분명 더 행복할거야. 그러니까 네가 미안해하지마.
그들에게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 같은 어둠은 사라지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침전물도 사라졌다. 어둡던 가게 안의 조명도 환해진 것만 같았고, 들리지 않던 노래도 들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마음에 있던 짐이 조금씩 나누어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이 상처와 헤어짐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이해할 준비가 이제야 되어 마음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주위에서 들리던 웃음소리와 기분 좋은 시끄러움이 이제야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10.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감촉이 전해져 온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과 함께. 흩날리는 벚꽃 잎이 그들 사이로 쏟아진다. 봄 햇살도 기분 좋은 따뜻함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다. 여기저기 들뜬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사진 찍는 사람들도 꽤나 보인다. 이곳만 본다면, 정말 세상의 슬픈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 마주 잡은 손에 약간의 땀이 젖어온다. 현수는 손을 잠시 떼고 자신의 티셔츠에 손바닥을 슥슥 문지르고는 다시 잡는다. 사랑이가 현수를 보며 웃는다.
- 우리 헤어지지말자.

꿈이 아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음이 분명했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11.
사람은 언제나 감정에게 지고 만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쓰러지고 만다. 누구나 그렇듯 사랑이도 쓰러진다. 자신의 감정에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채로.
두 사람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랑이란 감정의 유통기한은 3개월이라 했던가. 그것보다 짧은 행복은 그녀에겐 커져버린 두려움만, 그에게는 깊은 상처만 남겼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으나, 등을 돌린 것만 같았다. 현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고, 그녀는 죄를 진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봄날이 갑자기 떠나가고 있었다.
- 내가 무섭니.
차가운 그의 목소리.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그녀.
벚꽃은 이미 졌다. 나무는 푸름으로 탈바꿈하고, 날은 무더워져만 갔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는 무더운 날씨에도 녹지 않을 만큼 절대적이다.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자꾸 이러면 우리 헤어질 수밖에 없어.
그의 입에서 헤어짐이란 말이 나오자 그녀가 움찔한다. 얼마 전부터 그녀가 현수를 피하기 시작했다. 만나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손을 잡아도 황급히 뿌리치기 일쑤였고, 혹시라도 살갗이 스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 거리를 두고 걸었었다. 현수도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 
- 넌 날 사랑하지 않아.
거짓말.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생각했다. 그건 거짓말이라고. 그녀의 사랑은 조금도 줄지 않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깊어지고 커져있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점점 깊어지고 커져가는 마음이, 자신이 감당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려 무서워진 것이다. 그녀는 날마다 헤어짐과 불안에 싸워야 했다. 현수와의 나날은 달콤했지만, 아팠다. 썩은 이가 생긴 것처럼. 그의 말 한마디가 다시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판다.
- 나도 이제 지쳐. 나도 힘들어. 헤어짐이 무서워서 우리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니, 우습다. 그런데 이것만 알아둬. 네가 헤어짐이 무서워서 피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고, 헤어짐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사랑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이상하게 눈물이 넘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현수는 답답함이 차오른다. 손끝이 저리다. 화가 난다. 얼굴이 달아올라 어지럽다. 여러 가지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사랑이에 대한 마음이 슬그머니 밀려난다. 
- 그만하자.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든 일이야. 
- 미안해.
그녀의 입에서 미안해란 말이 넘쳐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에서도 눈물이 넘친다. 
- 피한다고만 해결되는 게 아니야. 사람들을 만나는 건 헤어짐을 전제해 두고 만나는 거야. 그리고 그 헤어짐을 최대한 뒤로 미루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헤어지는 건 아픈 거지만, 피하기만 하는 건 나쁜 거야. 그래서 너는 나빠. 이기적이야. 너만 안 아프려고, 너만 상처 받지 않으려고 피하는 거니까. 이제 피할 필요 없어. 내가 갈 거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곤 그녀만 두고 나가버린다. 창밖으로 그의 뒷모습이 넘실거린다. 눈물 때문인지 아스팔트의 열기 때문인지 그의 뒷모습이 흔들거린다. 남겨진 사랑이에게 남은 것은 없다. 
거리는 생각보다 덥다. 나무는 생각보다 푸르고, 하늘은 그보다 더 푸르다. 밀려난 사랑이에 대한 감정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의 명치끝에 주먹만 한 감정이 걸려있다. 답답함. 그녀의 두려움을 해소해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답답함. 그녀가 이기지 못한 두려움에 대한 답답함. 헤어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 떠나는 사람이든 남겨진 사람이든. 헤어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끝이란 단어에 대한 두려움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끝을 무서워하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녀는 끝이 무서워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그가 손을 잡아끌고 억지로 몇 걸음 뗐지만 다시 뒷걸음 쳤다. 그리곤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그가 돌아와 주길 바랐고, 그는 등을 돌려 버리곤 혼자서 떠났다. 이젠 손을 뻗어도 닿을 수가 없다. 역시 사람은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 


12.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감촉이 전해져 온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과 함께. 흩날리는 벚꽃 잎이 그들 사이로 쏟아진다. 봄 햇살도 기분 좋은 따뜻함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다. 여기저기 들뜬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사진 찍는 사람들도 꽤나 보인다. 이곳만 본다면, 정말 세상의 슬픈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 마주 잡은 손에 약간의 땀이 젖어온다. 현수는 손을 잠시 떼고 자신의 티셔츠에 손바닥을 슥슥 문지르고는 다시 잡는다. 사랑이가 현수를 보며 웃는다.
- 우리 헤어지지말자.

꿈이다. 그의 얼굴에 흥건한 땀이 그것이 꿈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를 위로하듯 얼굴을 어루만져 준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곤 문득 두려워진다. 아무도 없음에, 존재하지 않음에. 똑딱이는 시계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 같다. 열린 창문 사이로 다시 한 번 위로의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땀이 조금은 식는다. 


13.
감정의 바다는 너무 넓다. 특히나 두려움은. 그녀는 두려움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 한다. 아무리 헤엄쳐도 제자리다. 아니, 방향조차 잡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모두 그녀 때문이라는 것. 그녀는 그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과 현수의 부재가 모두 무서웠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이기적이었다. 상처받기 싫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할퀴고 물어뜯고, 피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긴 칼에 깊숙이 찔려 피를 흘리는 것보다, 시작하기 전에 긁힌 상처가 덜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현수는 아무리 할퀴고 물어뜯어도 떠나지 않았다. 그 상처가 쓰라리고 아팠을 텐데 웃으며 견뎌주었다. 그런데 결국엔 자신이 그를 칼로 찔렀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에서 그가 죽은 것이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는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나타난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곰팡내 나는 사랑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사랑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시원한 밤바람이 분다. 그녀는 이 바람이 그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란다. 하늘엔 달이 너무 밝아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03 07:38) 

16.1.182.17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3:32 

 

상병 이재환 
5.5.2.87   슥슥, 이런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신기하던데(..) 2009-05-29
10:07:11
 

 

병장 김형태 
54.4.11.94   아아, 
'가지로-'보내서 오래오래 남기고 싶군요 2009-05-29
10:11:18
 

 

병장 차종기 
16.1.182.171   재환님 슥슥 잘쓰는 건 아니랍니다. 
한달 동안 A4 10장 정도의 분량 정도 밖에 쓰지 못했어요.. 
저한테는 매우 힘든 작업이었답니다. 흑흑. 

형태님 가지로 가기엔 조금 모자란 글인듯 한데..흙. 2009-05-29
10:28:57
 

 

상병 전영필 
22.39.1.170   잘 읽었습니다. 요즘 인스턴트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네요. 2009-05-29
15:33:11
 

 

병장 곽상민 
27.2.11.199   전 왜 이런글이 달콤할까요. 휘리릭 뭔가에 풍덩 빠지는 느낌. 좋습니다. 2009-05-29
22:52:57
 

 

일병 이재용 
22.49.1.34   가지로- 

급박하지 않으면서도 몰입도는 최고네요. 흠뻑 빠졌어요. 2009-05-29
23:49:40
 

 

상병 권홍목 
16.48.8.33   진-하네요 

가지로 2009-06-01
13:57:56
 

 

상병 김태완 
16.48.6.22   감성적인 사람이기에 글을 읽은 후 가슴이 너무 아렸습니다. 
저런 사랑을 한적 없어 이런 사랑.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을 이해 할 수 없어야 정상인데, 
이런 결말.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인식합니다. 
글을 다 읽은 후 하도 답답하여 사랑이를 으이구~이러면서 원망을 했지만 갸녀린 여자상을 떠올리며 이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뜻대로 되지않기에 늘 서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인연이라고 합니다. 
파스텔체의 종기님의 글 참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칠해두고 갑니다. 2009-06-01
14:04:32
 

 

병장 차종기 
16.1.182.171   사랑은 언제나 이별을 동반합니다. 사별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두려워 시작하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못해낼 겁니다. 
사랑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별은 그냥 사은품이죠.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얹어주는 그런 것. 
때때로 사은품 때문에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구입법이 아닐테죠. 
사은품은 그저 사은품일때 가치가 있는게 아닐까요. 2009-06-02
10:26:34
 

 

병장 김형태 
54.4.11.94   가지로 세개 나왔습니다- 2009-06-02
10:46:01